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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를 향한 조선인 차별에 항거한 권희로 야쿠자 살인사건_김의 전쟁은 범죄 합리화와 영웅 만들기의 가짜 히어로의 결정판

마음heart 2024. 4. 17.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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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를 향한 조선인 차별에 항거한 권희로 야쿠자 살인사건

김의 전쟁은 범죄 합리화와 영웅 만들기의 가짜 히어로의 결정판



권희로는 1968년,야쿠자 2명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이는 등 일본 내에서 화제가 된 재일 한국인 범죄자입니다.1928년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현 시즈오카시)에서 목재 하역부인 아버지 권명술(權命述)과 어머니 박득숙(朴得淑) 사이에서 출생한 권희로는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가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 등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라고 불렸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친아버지의 성을 따서 권희로라는 이름을 썼지만 보통 김희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권희로는 재일 조선인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극빈층으로 빈곤하게 생활했는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소학교 때부터 출신 때문에 차별을 경험하면서 '이 곳은 조선인이 다닐 곳이 못 된다'라고 생각,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13살에 가출해서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먹은 것을 시작으로, 수 차례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며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권희로 야쿠자 살인사건_일본인을 향한 분노의 항거

혼인과 사업에 실패하고 40세가 된 권희로는 1968년 2월 20일, 시미즈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채권자에게 청부받아 빚을 독촉하던 야쿠자 2명을 살해했습니다.이에 대해 본인은 그 야쿠자들로부터 "조센징,더러운 돼지새끼"라는 말을 듣고 격분해 라이플로 이들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문제는 이들이 준조직원 정도의 인간들로, 권희로에게 심각한 생명의 위협이 될 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권희로는 라이플을 소지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애초부터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이후 다이너마이트,라이플,실탄을 갖고 도주했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하이바라군의 가와네(川根) 온천장에 있는 여관 후지미야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고 출동한 경찰관들과 대치하다 4일(88시간) 만인 24일 검거되었습니다. 인질극 와중에 개를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에 개봉한 유인촌 주연의 김의 전쟁


재밌는 점은 13명의 인질들이 그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는 점인데 여관 주인과 같이 담배를 사러 나갔다 오기도 하고, 인질들과 함께 목욕도 하기도 했습니다. 도중 풀려난 인질 세 명중 하나는 회견에서 신변의 위협은 느낄 수 없었으며 그가 재판을 받게 된다면 그를 변호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권희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인질 한 명은 자신은 그와 약속했다며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당초부터 권희로는 후지미야에 있던 사람들을 모아두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당신들이 이런 일에 휘말린 것에 대하여 미안할 따름이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권희로가 여관에서 농성을 벌이며 자신을 모욕했던 경찰관에게 사과하라는 요구를 전달하고 TV에서 '기억나진 않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과한다.' 라는 답변이 오자 인질 중 한 명은 저건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며 권희로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인질극은 당시 TV를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권희로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고자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면서 경찰관들에게 사과를 받아 내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체포 뒤 8년간 이어진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이때 누가 권희로에게 다이너마이트와 라이플을 주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경찰청 측에서도 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때 사용한 총기는 호와 M300으로서, 같은 탄약을 쓰는 M1 카빈의 30발짜리 탄창과 조준경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총도법이 더 엄격하게 개정되기도 합니다.

■권희로 야쿠자 살인사건_일본에서는 살인자,한국에서는 영웅이 되다

권희로의 가석방을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승려 박삼중과 재일동포 사업가 조만길 등이 '재일 한국인 김희로 씨 석방 후원회'를 만들어 노력해 왔으며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단행본 분노는 폭포처럼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기자 출신 작가인 혼다 야스히루(本田靖春)의 사전(私戰, 시센)으로 나왔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이 사전을 원작으로 김영빈 감독·유인촌 주연 영화 김의 전쟁이 제작되기도 했는데 이전에 일본에서 먼저 극화물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권희로는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석방되었고,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는 법으로 국외 추방토록 규정된 일본 법규에 따라 승려 박삼중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뒤 친아버지의 성을 따라 권희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귀화했습니다.귀국 후에는 중앙일보로부터 후원을 받게 되는데 권희로의 후견인이었던 승려 박삼중과 오랜 인연이 있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김준범의 힘을 빌려 독점 계약을 성사한 것으로 1999년 9월 10일, 권희로가 중앙일보를 방문해 당시 사장 홍석현을 만난 것도 이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이런 극진한 대접을 비판했는데 당시 시민들로부터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앙일보가 권희로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사실이었는데, 평생 구독권을 선물하고 호암 갤러리를 구경시켜 줬으며, 삼성서울병원에서 2박 3일간 정밀 건강 진단을 받도록 조처했습니다. 이후 총 19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권희로의 수기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가 연재되었으며 연재가 끝난 후 중앙일보는 자회사 중앙M&B(현 알에이치코리아)를 통해 수기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합니다. 중앙일보로서는 나름대로 다 계산이 있는 투자였던 셈입니다.


1981년에는 돈(頓)모(52) 여인과 옥중 결혼식을 가졌는데 이 돈 모씨는 1979년 출옥한 후,권히로에게 온 후원금 등을 포함해 3억원을 몰래 빼돌린 적이 있었는데 권희로가 이 사실을 알고서도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이후 권희로가 귀국한 후 돈 모씨와 2000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부로 함께 살았으나, 귀국하고 2개월 후 돈 모씨는 권희로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지 못하겠다면서 권희로의 돈을 가지고 달아났으며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져간 권희로의 돈은 "정신적 피해의 보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애초부터 이 여성은 내연 관계에 있던 일본인의 본처를 살해한 죄로 수감되어 권희로와 감옥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으며, 두 번이나 권희로의 돈을 훔쳐 달아나는 등 질이 좋지 못한 인간이었습니다.그 후 권희로는 박 모씨와 내연의 관계가 되었는데, 2000년 71세의 나이로 박 모씨의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공주치료감호소장 51세 최상섭(崔相燮)은 권희로가 체포됐을 당시 검찰청으로부터 의뢰받아 권희로를 검진하고, 그가 비정상적인 가정 환경과 오랜 수형 생활 탓에 인격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후에는 치료감호를 받으며 살게 되는데 중앙일보에서는 후원을 철회했고 권희로를 후원한 승려 박삼중도 재일동포 사회에서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던 권희로가 죄를 자꾸 저지르자 후회스럽다고 말하면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박삼중은 승려로서 많은 극악 범죄자들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그 중에는 김태촌도 있다) 그런 그가 지지를 철회할 정도니 어지간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으로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서는 부산에서 살았으며 취미는 장 보기와 총기 사격이었다고 합니다.2010년 3월 26일 오전 6시 50분께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소재한 봉생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향년 81세.

한국에서의 삶도 평범하진 않았던 권희로 씨

당시 적지 않은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한국에서 권희로를 영웅시하는 움직임에 크게 반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권희로는 애국자가 아니라 그저 양아치였을 뿐이었다는 것인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시되었던 적도 있는데, 이것은 사채업자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나타난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이미지가 좋지 않은 편으로, 특히 혐한들게는 킨키로우라고 불리면서 까이는데 한국인은 죄를 저질러도 애국인 양 미화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사건을 일으킨 계기가 된 야쿠자 측의 욕설 때문에 차별에 항거한 의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전후 관계를 잘 따져보면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한국 언론에서도 차별을 근거로 반일 폭력행위를 무조건 영웅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데 권희로는 폭력범죄자였을 뿐이었는데, 민족 차별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김영빈 감독이 제작한 영화 김의 전쟁에서 유인촌이 권희로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었으며, 일본 후지 TV에서도 한국보다 1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거기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했었는데 범죄자가 특정 사상적 색채로 지지를 받은 사례로 밸러리 솔라나스가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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