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미제사건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영국을 공포에 물들게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
영국을 공포에 물들게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
영구 미제사건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은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Reaper가 아니다. '찢는 자'라는 뜻의 Ripper지만 발음도 그렇고, 연쇄살인마이기에 Reaper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1888년 8월31일부터 11월9일에 걸쳐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매춘부 최소 5명을 갈기갈기 찢어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일명 살인마 잭이라 불리운 그가 저지른 화이트채플가의 연쇄살인은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된 유명한미제 사건이기도 합니다.5명 모두 매춘을 하며 살았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이지만, 이들 중 매춘부는 1명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이와 반대로 마지막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만 매춘부가 아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전업 매춘부는 공식적으로 1200명이었으며, 생계가 어려워 가끔씩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이들이 상당했기에 정확하게 매춘부였다는 기록이 최근에 확인된 메리 제인 켈리를 제외하면 다른 희생자들은 모두 매춘부는 아니지만 매춘을 했던 인물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현재는 마지막 사건이 발생한 지 134년이나 지났기에 범인 본인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을 테니, 완벽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는데 살인마 잭을 잡지 못한 이유 중엔 과학수사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던 데당시 찰스 워런이 워낙 수사를 부실하게 했던 탓이 있습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당시 배경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과 의료 기술 발달, 농업 기술 발달의 결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습니다. 1851년에 영국 인구는 1,680만 명이었지만, 1901년에는 3천만 명으로 늘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당시 영국이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차지하면서 많은 영국인들이 캐나다,호주,뉴질랜드,인도,남아공,홍콩 등의 식민지로 이주한 데다가 또한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미국,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 등의 아메리카 국가로 이주했음에도 영국 본토의 인구만으로도 엄청난 인구 성장세가 나타난 것입니다.그리고 이처럼 늘어난 인구는 산업혁명기에는 쉽게 대체 가능한 잉여 노동력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노동환경은 열악하고 대체인력 수급은 쉬우니, 당연히 고용주들은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여성들은 같은 계층 남성들보다 더 혹독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1890년 기준으로 영국의 말단 하녀가 12시간 매일 일하고 받은 연봉은 13파운드 정도였는데,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260만원 정도, 그러니까 '월급'이 20만원 정도였습니다.결국 여성들이 기존에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는 여성들이 매춘을 부업 또는 전업으로 삼는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 차별적인 법률에 의해 남편 귀책 사유로도 이혼이 어려웠고, 이혼이 간신히 이루어진다고 해도 제대로 생계를 지원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을 통해 그 일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희생자인 메리 앤 니콜스의 경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이 옆집 여자와 바람이 난 후 자주 부부싸움을 벌이곤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이 간통할 경우 이혼 사유가 되지만, 남편의 경우 간통을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가정내 폭행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되지 않았기에, 니콜스는 결국 별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구빈원에 들어가서 바느질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니콜스 이후의 다른 희생자들도 결혼 경력이 있었지만 결혼 과정에서 큰 고생을 하고, 결국 별거에 들어갔다가 빈곤층으로 떨어진 케이스가 대부분이었습니다.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는 스웨덴에서 지주의 집 하녀로 일하다가 식모 일을 하러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나 매춘에 발을 들였고, 애니 채프먼은 때때로 하녀 일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여 돈을 벌었으나 수입이 부족하여 매춘으로 생활비를 벌충했습니다.
게다가 여성의 당시 여성의 성비는 1851년 통계에 의하면 50만에서 100만 명 정도로, 남성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남성이 여성보다 수가 적었던 이유는,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높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생겨난 공장들에서 일어난 사고의 사망자들이 주로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영국의 식민지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식민지 지역으로의 이주가 활발히 진행된 데다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일대로 이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남성 이민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주둔군으로 파견된 남자들이 현지 주민들과 빈번히 통혼하고, 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나폴레옹 전쟁,미영전쟁,아편전쟁 등 대규모 전쟁들이 빈번하게 일어나 징발된 남자들이 전투나 풍토병으로 죽자, 미혼 여성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습니다.25세에서 40세 사이 여성 중 15% 이상이 결혼을 할 수 없었는데 남성의 경제권이 강하던 시대에 여성의 경제적 지위 하락으로 이어지는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노동과 결혼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소외됨으로써 영국의 매춘부 수는 폭증하였는데 당시 계간지였던 The Westminister Review에서 추산한 영국 전체의 매춘부 숫자는 5만 명에서 36만 8천 명이었는데 이 통계수치가 맞다면, 매춘은 영국 여성의 직종들 중 4번째로 흔한 직종으로 잭 더 리퍼 사건이 첫 발생한 1888년, 영국 경찰이 파악한 런던의 매춘부 수는 5,678명이었고, 영국과 웨일스 전체에서는 2만 4,311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1888년 10월 잭 더 리퍼 사건이 벌어지는 중 사건의 배경이 된 화이트채플에서 공식적으로 경찰이 집계한 매춘부의 숫자는 1,200명이었지만 통계수치마다 숫자가 모두 다르고, 경찰이 집계한 숫자는 부족한 당시 치안력으로 파악한 최소치임을 감안하면, 실제 매춘부의 숫자는 경찰의 파악보다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이 확실히 집계한 숫자로 한정하여 생각해도, 런던 전체에서 화이트채플의 매춘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습니다.잭 더 리퍼 사건의 희생자들 대부분은 결혼하였어도 남편과 사별하거나 헤어져서 안정적인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여인들이었습니다.당시 이런 여성들은 당장의 비바람을 피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구빈원에 들어갔지만, 이 시기 영국의 구빈원은 사회적으로 실패자 낙인을 강하게 찍히는 곳이었기에 이곳에 들어간 기록이 생긴 이들은 더욱 제대로 된 직업을 찾는 것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즉 실패한 결혼 생활이 이들을 생활전선으로 내몰았고, 복지정책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희생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가 매춘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배경이었던 화이트채플은 그 중에서도 매춘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이미 유대인,아일랜드인,기타 외국인들이 모여들어서 사회 혼란의 진원지가 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잭 더 리퍼에게 희생당한 5명의 피해자들 중 2명이 잉글랜드 본토 출신이 아닌 외지인이었다는 것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가 스웨덴 출신, 메리 제인 켈리가 아일랜드 출신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였던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범죄의 표적이 되어 살해당하거나 갱단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춘부들은 제대로 된 치안의 보호를 받지 못함이 현실이었습니다.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888년 초중순에도 많은 매춘부들이 길 한복판에서 살해당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는데 다만 살해 수법을 보았을 때 잭 더 리퍼 사건의 피해자는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당시 매춘부들의 절망적인 생활 패턴이 맞물려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같은 살인자들에게 손 쉬운 표적이 되었습니다. 매춘부들은 당시 빠른 성행위에 4펜스 남짓 푼돈을 받았고, 그 돈으로 그날 먹을 비스킷과 진을 사면 숙박비를 구할 수 없어 노숙하거나, 영국의 하층민들이 이용한 2펜스 정도의 푼돈을 내고 벽가에 설치된 긴 벤치에 서로 붙어앉아 자는, Two Penny hangover라는 간이 숙박시설 등을 써야 했습니다. 말이 숙박일 뿐 그냥 야외 혹은 지붕만 있는 실내에 의자 하나와 자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벽에 걸려 있는 기대는 긴 밧줄에 기대어서 자는 준 노숙으로, 아침이 되면 주인이 밧줄을 풀어서 깨워 주었다고 합니다.심지어 Penny sit-up이라고, 반값이지만 대신 기댈 밧줄도 없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자야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숙박비를 벌지 못한 많은 매춘부들이 이런 식으로 잠을 자야 했습니다.19세기 말부터 1900년 무렵 런던의 가장 저렴한 숙박업소에서 침대 하나를 하룻밤 빌리는 데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4펜스에서 6펜스 남짓이었는데 매춘부들이 한 번의 야외 매춘으로 번 돈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2펜스에서 4펜스 정도였는데 이러한 시세의 영향으로 당시 퍼진 속어가 twopennies upright, 2펜스를 주고 담벼락에 기대 선 채로 매춘부와 하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야외에서 적당히 으슥한 곳에 가서 유방과 성기 정도만 노출하고 잽싸게 끝내는 착의섹스로, 저렴한 만큼 질도 낮은 서비스였는데 이때 영국 화폐는 1파운드가 240펜스였던 때였습니다. 1889년 기준으로 1파운드는 현재의 15만 원이 조금 넘는데 그렇게 따지면 4펜스는 지금의 2,600원 정도 가격으로 당시 매춘부들이 물처럼 마시던 진 1잔은 3펜스 정도였습니다.살해당한 5명 중 4명이 모두 새벽에 손님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 희생자는 살해당할까 두려워 집 안에 머물렀지만 결국 자기 집 안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야간에 조용한 장소에서 손님을 만나야 하는 매춘부들의 직업 특성상, 잭 더 리퍼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살해조건이 널린 것었습니다.잭 더 리퍼가 사용한 흉기로는 외과 수술용 칼이자 양날의 칼인 리스턴 칼(Liston knife)를 흉기로 썼는데 리스턴 칼은 스코틀랜드 출신 외과 전문의 로버트 리스턴 (Robert Liston, 1797 ~ 1847)이 써서 유명해진 절단칼이며, 리스턴은 생전 속도와 정확성으로 유명한 의사였으며, 무균성 수술(aseptic surgery)에 이 칼을 썼다고 합니다. Down Bros가 제작했으며, 손잡이는 니켈로 이루어져 있으며, 칼의 날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습니다.그러나 1888년 잭 더 리퍼의 범행 당시 이 칼이 발견되면서 악명이 생겨 버립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첫번째 희생자 메리 앤 니콜스 1888년 8월 31일
1888년 8월 31일 새벽 3시 40분, 메리 앤 니콜스(Mary Ann Nichols, 43세)라는 매춘부가 벅스 로우의 입구 근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전날인 8월 30일 23시 경, 니콜스가 화이트채플 거리를 걷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31일 0시 30분에는 스피탈필즈의 주점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1시 20분에서 40분 경에는 숙박업소의 침대를 빌릴 4펜스가 없다는 이유로 숙박업소의 부엌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숙박업소 관리자가 자신을 쫓아내자 니콜스는 "침대 하나를 비워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는데 "신경 쓰지 말아요. 금방 숙박비를 벌어올테니. 여기 이 예쁜 모자 보이죠?" 관리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모자는 지금껏 니콜스가 사용하지 않았던 새 검은색 보닛 모자였다고 합니다.니콜스가 생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2시 30분, 오스본 가에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에밀리 홀랜드와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 때가 니콜스가 사망하기 약 1시간 전이라고 추정되는데 홀랜드와 이야기하면서 니콜스는 자신이 "숙박비의 3배를 벌었으나, 세 번 모두 술을 마시는 데 다 써버렸다.", "한 남자와 거래를 시도하고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로 돌아갈 것" 이라고 말하였으며 홀랜드는 "니콜스가 굉장히 취한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으며, 그녀와 7~8 분간 동안 대화하고 헤어졌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3시 15분 경, 니콜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벅스 로우를 2명의 경관이 순찰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합니다.3시 40분에서 50분 사이, 벅스 로우에서 찰리 크로스와 로버트 파울 이라는 수레꾼은 길가에 여자가 쓰러져 있는걸 발견하는데 두 수레꾼은 일에 늦지 않기위해 마침 지나가던 조나스 미즌 경관을 만나 이를 미즌 경관에게 이야기합니다. 미즌 경관이 도착하기 직전, 맞은편에서 순찰돌던 존 네일, 테인 이라는 두 경관이 먼저 발견하면서 니콜스는 벅스 로우 거리에서 누워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니콜스의 시신은 브라운 앤 이글 양털 창고라는 상가에 있는 마구간 입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마구간 옆 건물의 1층에 거주하는 엠마 그린 부인은 딸과 함께 오후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린 부인의 침실 창문은 니콜스의 시신 거의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모녀는 당시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린 부인의 집 맞은편에 살던 풀키스 부부도 11시와 11시 15분에 각각 침실로 향했는데, 잠을 청하지 못한채 침실을 왔다갔다거린 풀키스 부인 역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당시 벅스 로우는 오스본 스트리트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해있었고, 거리 끝에있는 한개의 가스 램프가 유일한 조명이었습니다.검시 결과, 니콜스의 목과 배에는 깊은 자상이 있었고 목에는 숨통이 졸린 자국이 있었습니다. 니콜스의 몸 주변에서 피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니콜스의 사인은 자상이 아닌 질식사인 듯했으며 니콜스의 시신을 검시한 의사는 "니콜스의 몸에 있는 자상은 모두 아주 날카로운 칼 한 자루만으로 생겼고, 범인은 왼손잡이이며, 범인은 다른 곳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벅스 로우로 옮겨 훼손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참고로, 메리 앤 니콜스가 살해당하기 전, 앞서 엠마 엘리자베스 스미스와 마사 타브람이라는 두 매춘부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러나 잭 더 리퍼 특유의, 칼로 베는 시신 훼손 수법을 토대로 분석했을 때 니콜스가 당한 살해가 잭 더 리퍼가 최초로 저지른 범행이란 추측이 많습니다.그러나 당시 런던 경시청은 이 사건이 연쇄살인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 화이트채플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던 프레드릭 애벌라인(Fredrick Abberline) 경위를 파견했습니다.이 당시 런던 경시총감을 맡고 있던 사람은 찰스 워런 경(Sir Charles Warren, GCMG, KCB,)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워런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 사실 그는 전문적인 경찰관이나 형사가 아니었고 게다가 워런은 1887년에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벌어진 실직자들의 폭동을 과격하게 진랍해서 2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에, 이미 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은 인물이었습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두번째 희생자 애니 채프먼 1888년 9월 8일
1888년 9월 8일 새벽 6시 경, 애니 채프먼(Annie Chapman, 47세)이라는 매춘부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9월 8일 오전 1시 35분, 채프먼은 숙박업소에서 침대를 빌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자 "곧 숙박비를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길거리로 나갔습니다.채프먼이 시신으로 발견되기 30분 전인 5시 30분, 어쩌면 애니 채프먼 사건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롱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애니 채프먼은 한버리 29가에서 사냥 모자를 쓴 키가 5피트 7인치(170cm) 정도에 복장이 추레한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롱이 엿들은 그들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남성은 "하겠는가?"라고 물어봤고, 채프먼은 "예"라고 답했다고 합니다.오전 5시 45분경, 존 리처드슨은 자신의 어머니, 아멜리아 리처드슨의 사업을 돕기위해 한버리 29가 지하실에 들렀는데, 이때까지는 뒷마당에 채프먼의 시신이 없었다고 합니다.그리고 5시 50분에서 6시 사이, 한버리 29가에 거주하던 젊은 목수 앨버트 카도시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울타리 너머에서 한 남성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여성의 "안 돼!" 하는 비명 소리,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그 후 6시, 한버리 29가 3층에 거주하던 수레꾼 존 데이비스가 한버리 29가 뒷마당에서 채프먼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검시의 조지 백스터(George Bagster Phillips)가 채프먼을 검시한 결과, 죽은지 대략 두시간이 지났고, 시체로 발견된 그 장소에서 살해당했다고 추정했습니다. 채프먼은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있었고, 목이 깊이 그어졌습니다. 혀가 이빨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얼굴이 부풀은 점으로 보아 아마 피해자가 목에 두른 스카프로 교살한 듯하였습니다. 이는 스카프로 목을 졸라 의식을 잃게 한 후, 칼로 목을 베면서 빠르고 조용하게 살인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채프먼은 비명을 지르지 못해 주위의 사람들이 살인 현장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손가락에 찰과상이 있었는데, 당시 채프먼의 반지가 강제로 빼내어져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친구들은 애니 채프먼이 값싼 황동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이것은 금반지로 착각할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첫 번째 살인이 비교적 평범한 살해였음에 비해, 이 살인은 배를 열어 내장을 어깨에 걸쳐놓은 시신훼손이 워낙 잔혹하여 단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한 더 큰 원인이 된 것은 그가 신문사에 보낸 편지였는데 편지는 9월 27일 소인이 찍힌 채 Central News Agency of London 신문사에 발송되었고 이 편지는 후대에 수신인 표시 부분을 따서 'Dear Boss Letter'로 불리게 됩니다.
나는 경찰들이 나를 잡았으며 아직 날 처리해 버리지 못한 거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그들이 똑똑한 척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땐 웃음이 나더군.
그 가죽 앞치마에 대한 농담은 정말 웃겼어. 난 창녀들이 혐오스럽고 내가 쇠고랑을 찰 때까지
그들을 찢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저번 일은 대단했지. 난 그 여자가 찍찍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그들이 날 잡을 수 있을까. 난 내 일이 좋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너도 곧 나와 내 즐거운 작은 놀이에 대해 듣게 될 거다. 최근 사업의 성과로 얻은 생강맥주 병에 담아놓은 빨간 물질로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풀처럼 굳어버려서 못 쓰게 되었다. 붉은 잉크면 충분하길 바란다. 하하. 다음 번에 할 일은 여자의 귀를 잘라버리고 재미로 경찰에 보내는 거지. 그렇지 않나. 내가 좀 더 일할 때까지 편지를 보관하다 공개하도록. 내 칼이 아주 좋고 날카롭기에 기회만 있으면 바로 써보고 싶어. 행운을 빌며, 안녕히, 잭 더 리퍼로부터(Jack The Ripper) 이 별명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시길. PS 내가 두 손을 붉은 잉크로 다 적시기 전에 이걸 부쳐서 다행이지 않나. 빌어먹을, 운도 없지. 이젠 그들이 나더러 의사라더군 하하.
잭 더 리퍼, 즉 살인자 잭이라는 별명이 처음으로 소개된 이 편지는 런던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화이트채플의 살인자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문사에 범행 사실을 알려주었기에, 그의 범죄는 최초의 극장형 범죄로 기록되기도 합니다.그러나 로이 해이즐우드 저 프로파일러 노트에서 저자는 TV쇼에서 의뢰받은 이 과거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 편지는 잭 더 리퍼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장난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지만 이 편지가 진짜로 범인이 보낸 것인지 누군가의 단순한 장난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이 편지가 이틀 후인 9월 29일 경찰에 보고되었을 때 경찰은 이것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날인 30일, 여자의 귀를 자르겠다고 편지에 언급되었던 대로 캐서린 에도우즈가 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실제로 귀가 보내지지는 않았지만 경찰은 이 편지가 진범에 의해 보내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편지를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필적을 아는 누군가의 제보를 바란 것이었지만, 소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잭 더 리퍼'라는 별명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를 사칭하는 가짜 편지들을 써서 보낸 계기를 낳고 말았습니다.살인사건들이 끝난 후, 경찰 내부에서는 이 편지가 지역 신문사 기자의 장난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1931년에 와서야 한 기자가 "Dear Boss 편지는 내가 썼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편 Dear Boss 편지는 후술되는 From Hell 편지와는 달리 글씨체가 훨씬 깔끔하고, 철자법 사용이 비교적 정확한 편이라고 합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세번째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네번째 캐서린 에도우즈 희생자 1888년 9월 30일
1888년 9월 30일, 더블 이벤트(Double event)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날 새벽 1시와 1시 45분에 두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면 경찰들이 주변을 순찰 중이었으며 주변을 지나던 행인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범인은 경찰뿐만 아니라 행인 등 어느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았고, 불과 1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을 2명이나 죽이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살해된 두 여성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Elisabeth Stride, 45세)와 캐서린 에도우즈(Catherine Eddowes, 46세)라는 매춘부들이었습니다.스트라이드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 여러 곳에서 남성과 같이 있는 모습이 각각 목격되었습니다.오후 11시, 노동자 J.베스트와 존 가드너는 베르너 스트리트에서 스트라이드가 검은 콧수염과 속눈썹이 있고 코트를 입고있던 키가 작은 남자와 함께 커머셜 로드와 버너 스트리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11시 45분, 스트라이드는 노동자 윌리엄 마샬에 의해 버너 스트리트에서 보이드 스트리트의 서쪽에 있는 64 버너 스트리트 입구에서 짧은 검은색 코트와 선원모자를 쓴 남자와 키스를 하며 이야기를 하는것이 목격되었습니다.0시 35분, 순경이었던 윌리엄 스미스는 버너 스트리트에서 스트라이드가 어두운 코트와 사냥모자를 착용한 28세 정도의 젊은 남성과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0시 45분에는 이스라엘 슈바르츠(Israel Schwartz)라는 유대계 헝가리인이 "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남성은 30대 정도에 어두운 머리색, 갈색 수염이 있었고, 어깨 너비가 한 5피트 5인치(약 165 cm) 정도의 어두운 색깔의 재킷을 입었으며, 챙 달린 검은 모자를 썼다"고 증언했습니다. 슈바르츠의 증언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스트라이드가 살해되었을 현장에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슈바르츠에 의하면 자신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 길로 끌고가려했고, 이후 돌아서서 여성을 길거리에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여성은 작게 비명을 세 번 질렀고, 남성은 여성을 골목길 안으로 끌고 가면서 길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다른 남성을 향해 "립스키!"(Lipski)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이 립스키라는 소리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립스키는 유대인의 성으로도 쓰였고, 유대인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의 호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게다가 잭 더 리퍼 사건 1년 전에는 립스키라는 성의 유대인이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이 주변에 서 있는 슈바르츠를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여긴 더 볼 것이 없으니 꺼지라"는 경고 내지는 모욕의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립스키라는 말을 들은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슈바르츠의 증언을 감안한다면, 여성을 공격한 남성과 담배를 피우던 남성은 공범관계이고, 유대인인 슈바르츠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고안한 그들만의 신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잭 더 리퍼에 대한 책을 저술한 폴 베그의 주장에 의하면 "립스키"라는 외침은 잭 더 리퍼 본인이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자신은 여성을 구하는 사람이고 슈바르츠야말로 여성을 공격한 유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사용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시의 반유대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목격자를 쫓아내 버린 범인의 지능적 책략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슈바르츠가 영어를 잘 못 하던 외국인인 것을 감안했을 때, 슈바르츠가 들은 말이 과연 유대인을 모욕하는 욕설인 '립스키'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슈바르츠는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와서, 나는 도망쳤다"고 경찰에 증언하였고 슈바르츠 본인이 본 공격당한 여성이 살해당한 스트라이드가 맞다고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과 자신과 같이 길 건너편에 있던 남성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하였는데 경찰은 이 증언을 꽤 신빙성 있게 보았습니다. 실제로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이고, 공격당한 여성이 스트라이드가 맞다면 슈바르츠는 잭 더 리퍼를 직접 목격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거나 진범을 사칭한 편지들이 횡행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보았을 때, 정말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결국 1시, 스트라이드는 보석 판매원 루이스 디엠슈츠에 의해 끝내 덧필드 야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을 발견한 디엠슈츠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말이 무언가 낌새를 차렸는지 사건 현장으로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고, 처음엔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다고 믿었으나 근처의 클럽에서 아이작 코제브로드스키, 모리스 이글이라는 남성들과 함께 덧필드 야드로 돌아가 스트라이드의 시신을 찾아내 만졌을 때는 시신이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스트라이드는 살해당한 직후에 발견된 셈으로 피웅덩이 속에 누워 있던 시신의 목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으나, 다른 신체 부위에는 비교적 상처가 없었습니다. 범인이 행인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몸을 피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한편, 또 다른 피해자였던 캐서린 에도우즈는 그 전날인 9월 29일 저녁 8시에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가 경찰에 의해 끌려가 유치장에 감금되었고, 1시 경에 풀려났습니다.에도우즈는 술에 취한 채 알드게이트 하이 스트리트로 향해 듀크 스트리트 입구를 지나쳐 마이터 광장을 통해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로 돌아가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에도우즈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시신으로 발견되기 불과 10분 전인 01시 35분 무렵으로 남성 3명이 듀크 스트리트를 지나가다가 에도우즈를 보았는데,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원 복장을 입고 붉은 스카프를 맨, 키가 5피트 7인치(170.2cm) 정도 되는 수염을 기른 남성과 대화 중이었다고 합니다.그리고 45분, 순찰 중이던 에드워드 왓킨스 경관이 에도우즈의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시신을 검시해보니 신장이 없어졌고 귀가 잘렸으며 얼굴 주변에 상처가 있었으며, 하복부는 절개된 채였습니다. 또한 사건 장소 주변에서 피 묻은 에도우즈의 옷 조각이 발견되었고 근처에 있던 벽에는 누군가에 의해 "유대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욕 먹는 게 아니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글이 새겨져 있었으며 덤으로, 10월 1일에 화이트채플 감시위원회(Whitechapel Vigilance Committee)의 위원장인 조지 러스크(George Lusk)에게 편지 1통이 도착했는데...
From hell
Mr Lusk
Sor
I send you half the
Kidne I took from one women
prasarved it for you tother pirce
I fried and ate it was very nise I
may send you the bloody knif that
took it out if you only wate a whil
longer.
signed
Catch me when
you Can
Mishter Lusk
지옥으로부터
러스크 씨
선생
내가 한 여자에게서 꺼낸 신장의
반을 당신 앞으로 보내오
당신을 위해 보존해뒀지 나머지 반은
내가 구워먹었는데 아주 맛있었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걸 꺼낼 때 쓴
피묻은 칼도 당신 앞으로 보내드리리다.
(서명)
잡을 수 있게
되면 잡아보시오
러스크 씨
/편지 번역본
이 편지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키웠는데 이 '지옥으로부터 온 편지에는 신장 반쪽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장이 진짜로 에도우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대의 의사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는데 동봉된 신장이 여러모로 인간 여성의 것, 과음을 한 흔적, 적어도 3주 전에 죽은 사람의 것임을 밝히는 정황은 많았으나, 남아있는 에도우즈의 완벽히 건강한 오른쪽 신장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경찰들과 의사들은 편지에 동봉된 신장에 대해 "신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의대생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지금까지도 이 편지와 신장이 에도우즈 살해 사건의 진범이 보낸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경찰들은 여장까지 해가면서 그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그러나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찰스 워런 경은, 필적 감정을 해도 모자를 중요한 단서인 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이라는 낙서를 지우라고 명령했습니다.그 외에도 워런 경의 악행(?)은 계속되었는데, 사례를 들자면 무턱대고 거리에 개를 풀어서 범인을 잡으라고 시킨 것입니다.더블 이벤트 사건이 발생하고 이틀 후, 더 타임즈 지에 퍼시 린들레이(Percy Lindley)라는 블러드하운드 사육자가 올린 투고문이 올라왔는데 그 투고문에는 '개들을 동원해서라도 범인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었습니다. '만약 사건 현장에 범인의 냄새가 생생히 남아있는 곳에 개가 투입되면 경찰이 놓쳐버린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더블 이벤트 사건 이후 다급해진 경시청은 일단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워런 경도 아주 백치는 아니었던지라 린들레이에게 개가 사건현장에 도착하면 범인의 냄새만을 구별할 수 있는지, 만약 냄새를 찾더라도 수많은 시민이 오가는 런던 시내에서 어떻게 범인의 냄새만을 찾을 수 있는지 질의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입장이었던 워런 경과 경찰국은 블러드하운드를 범인 추적에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그 결과 에드윈 브로우(Edwin Brough)라는 사육자가 데려온 바나비와 버고라는 이름의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투입되었고 이 개들을 대상으로 하이드 파크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추적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한 번은 워런 경도 사냥감 역할을 맡으면서 개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습니다.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사람을 추적하는 능력은 꽤 괜찮았기에 워런 경도 만족을 표했습니다.그러나 이것을 도그 쇼에 참가했거나 다른 주인에게 일시적으로 맡겨졌다가 훈련 중 길을 잃은 개들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오해한 언론들이 워런 경의 멍청함에 비난을 퍼부어댔고, 워런 경의 우유부단함과 겹쳐 개들은 활용될 기회를 잃은 채, 그 뒤로 투입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해프닝은, 범인을 잡지 못 한 경찰이 개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다섯번째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 1888년 11월9일
1888년 11월 9일, 메리 제인 켈리(Mary Jane Kelly, 25세)라는 매춘부가 자신의 거주지인 도르셋 가 밀러스 코트에서 살해당했는데 우연인지, 범인이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다음 왕인 에드워드 7세의 생일이었습니다.참고로, 도르셋 가는 런던 내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였는데 잭 더 리퍼 때문에 켈리도 불안감에 한동안 계속 집에 있었으나, 돈이 궁했던 데다가 때마침 6주 동안 밀려 있던 집세 29실링이 있어서, 다시 매춘을 하다가 집에서 살해당했습니다.켈리가 살았던 밀러스 코트 13번지는 요즘으로 말하면 원룸텔 내지는 고시원 같은 곳이었는데 3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정도의 넓이의 방에 가구는 탁자에 의자, 난로와 침대가 전부였습니다.켈리의 이웃이었던 매춘부 메리 앤 콕스의 증언에 의하면, "켈리가 살해되기 전 날인 11월 8일 밤 23시 45분 경, 켈리가 35 ~ 36세 정도의 키가 5피트 5인치의 남성과 같이 집으로 들어왔고, 1시 경까지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고 합니다.오전 12시 30분, 켈리 근처에 살던 꽃장수 캐서린 피켓 부인은 켈리의 노래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캐서린 피켓 부인이 이에 불평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는 것을 "불쌍한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며 막았습니다.오전 1시, 켈리의 윗방에 살던엘리자베스 프레이터는 밀러스 코트 입구에서 30분 가량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프레이터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무도 밀러스 코트를 드나들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켈리의 노래가 1시 30분에 그쳤고, 이때 켈리는 외출했던 것으로 보였는데 오전 2시경,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에서 커머셜 거리 하숙집 거주자인 조지 허친슨은 6펜스만 빌려달라 요구하는 켈리를 마주칩니다. 마침 허친슨은 롬포드에서 막 돌아왔기에 돈이 없었고, 결국 켈리는 스웰 스트리트 방향으로 되돌아가 걸어갔습니다.콕스는 "3시 경에 켈리의 방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4시 경, 프레이터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자신의 목을 밟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 직후 "살인이야!" 하는 비명을 들었지만 그런 외침은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무시했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 밀러스 코트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사라 루이스도 그 소리를 듣습니다.그리고 프레이터는 5시 45분 경에 누군가 밀러스 코트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오전 10시 45분, 토마스 보우어(Thomas Bowyer)는 고용주 존 매카시(John McCarthy)의 지시에 따라 켈리에게서 6주 동안 밀린 집세 29실링을 받기 위해 켈리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자 깨진 창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침대에 누운 켈리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켈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점이 잘려나갔고 오른쪽 대퇴부와 두 유방이 모두 잘려나갔으며 뱃속의 자궁, 신장, 간, 내장, 비장 등이 적출되어 주변에 널렸을 뿐만 아니라, 심장은 사라져서 찾을 수조차 없었습니다.앞서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다른 4명의 시신도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켈리는 특히 그 훼손 정도가 심각했는데, 이는 범인이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홀로 작업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오전 8시 30분, 켈리의 지인인 캐롤라인 맥스웰은 이때 켈리를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그녀는 켈리와 자신의 의상을 심도있게 설명했고, 켈리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날짜는 틀리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진술했습니다.범행 시간은 토머스 본드(Thomas Bond)의 추정 결과 새벽 2시에서 8시 사이였고, 두 번째 피해자인 채프먼을 검시한 적 있는 조지 백스터는 '적어도 이 훼손이 2시간은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한편, 오전 11시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2시간이 걸려서야 문을 부수고 켈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워런 경이 개들을 사건 현장에 투입하려면 아무도 그 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선 경찰들과 경찰국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켈리가 살해되기 직전, 워런 경은 사임했으며, 개들은 투입되지 않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경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능했다는 것입니다.이후 모든 영국 국민들이 공포를 넘어 분노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반드시 그를 잡으라.'는 어명까지 내렸지만 살인마 잭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고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됩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범행의 유사성과 공통점
희생자는 모두 매춘부였고, 범행장소는 공공장소 혹은 그에 가까운 장소 등 야경꾼이나 행인이 지나갈 수 있는 장소가 많았는데 이는 범인의 대담성과 계획성을 보여주는 항목이며, 때문에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을 말한 증인도 있었습니다.살해수법의 특징은, 칼로 살해한 후 외과 수술용 칼 같은 예리한 날붙이로 시신을 해부했다는 점입니다. 이래서 널리 알려지게 된 이름이 Jack the Ripper가 된 것. 직접적인 사인은 대개 목에 가해진 자상 또는 교살이었고, 주로 훼손된 부분은 복부와 내장,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범죄치고는 특이하게도 무릎을 꼭 붙인 채 사망한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여성의 생식기를 절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범인이 일반적인 성행위에는 흥미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며 해부학 지식이 상당했던 듯합니다. 한밤중에 조명도 없는 곳에서 캐서린 에도우즈의 신장을 적출했다는 점, 게다가 신장은 막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적출해냈다는 점에서 부검의들 일부는 '범인이 상당한 외과적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인이 해부학적 지식이 있는 의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전문 의사의 솜씨로 보기에는 조금 조잡하다"며 "(그 당시에) 취미 생활로 사냥과 사냥감 해체를 자주하던 상류층 남성"이라는 반론도 있었습니다.캐서린 에도우즈가 살해되기 직전, 에도우즈를 목격한 증인(조지 허드슨)의 말에 따르면 "상당히 깔끔하고 번듯해 보이는 차림의 남자와 대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자와 만나고 얼마 지나 캐서린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자가 바로 잭 더 리퍼일 가능성이 높으며, 상류층 출신일 가능성도 높습니다.또한 정신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자였다는 것도 분명해 보이는데 그의 범행은 일반적인 살인자와 달리 증거를 많이 노출한 데다가,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잭 더 리퍼가 '매춘부', 더 나아가 '여성'이라는 존재에 비정상적인 증오를 품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왔으며 여기에 모든 범행이 주말에만 벌어졌다는 점도 흥미로웠는데 메리 앤 니콜스와 메리 제인 켈리는 금요일 새벽, 애니 채프먼은 토요일, 스트라이드와 에도우즈는 일요일에 살해당하였습니다. 이로 추정했을 때, 범인은 안정된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주말만을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수 있었습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이후의 화이트채플 살인사건
일반적으로 메리 제인 켈리는 잭 더 리퍼의 마지막 희생자로 여겨지며 범인의 죽음, 투옥, 시설 수용 이민 등으로 인해 범죄 행위가 종료된 것으로 봅니다.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 파일은 캐노니컬 파이브 이후 발생한 4건의 살인은 로즈 밀렛(Rose Mylett), 앨리스 맥켄지(Alice McKenzie), 핀치 가(Pinchin Street) 몸통, 프랜시스 콜스(Frances Coles) 살인으로 1888년 12월 20일 교살당한 26세의 로즈 밀렛의 시신은 포플러의 클라크스야드에서 발견되었으며 다툼의 흔적은 없었고, 경찰은 그녀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실수로 목걸이로 목을 맸거나 자살한 것으로 봤습니다.그러나 목 한쪽에 끈으로 생긴 희미한 자국 때문에 밀렛의 목이 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밀렛의 죽음을 조사한 후 배심원단은 살인 평결을 내렸습니다.앨리스 맥켄지는 1889년 7월 17일 자정이 지나고 나서 화이트채플의 캐슬 골목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맥켄지는 목에 2개의 자상을 입었고 왼쪽 경동맥이 베여 있었는데 몸 여러 곳에서 작은 타박상과 상처가 발견되었으며, 왼쪽 가슴에서 배꼽까지 이어지는 7인치 정도의 얕은 상처도 있었습니다.검사 병리학자 중 한 명인 토마스 본드(Thomas Bond)는 이 사건이 잭 더 리퍼의 소행이라고 보았지만, 이전에 피해자 세 명의 시신을 부검했던 동료 조지 백스터 필립스(George Bagster Phillips)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작가들 사이에서도 맥켄지를 죽인 살인자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잭 더 리퍼의 살인 수법으로 맥켄지를 살해한건지,잭 더 리퍼가 살인자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양분되었습니다."핀치 가 몸통"은 1889년 9월 10일 화이트채플의 핀치 가 철도 아치교 아래에서 발견된 30세에서 40세 사이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부패한 몸통으로 머리와 다리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피해자의 등, 엉덩이, 팔에 멍이 있어서 죽기 직전에 심하게 구타를 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으며 성기에는 부상이 없었지만 복부는 곳곳이 절개되었습니다.그녀는 몸통이 발견되기 약 하루 전에 살해당했고,토막난 시신의 일부분은 오래된 케미즈 아래 숨겨져 철도 아치교 아래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프랜시스 콜스는 1891년 2월 13일 화이트채플의 철도 아치교 아래에서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습니다.1891년 2월 13일 오전 2시 15분에 PC 어니스트 톰슨(PC Ernest Thompson)은 화이트채플의 스월로 가든(Swallow Gardens)에 있는 철도 아치교 아래에 누워 있던 프랜시스 콜스라는 25세의 매춘부를 발견했는데 목은 깊게 베였지만 몸은 잘리지 않았고 그래서 톰슨이 가해자를 저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콜스는 발견 당시 살아 있었지만 의료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는데 스토커 제임스 토머스 새들러(53세)가 앞서 콜스와 함께 술을 마시던 모습이 목격되었고 두 사람은 콜스가 사망하기 약 3시간 전에 언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새들러는 경찰에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잠시 동안 잭 더 리퍼로 여겨졌지만,이후 1891년 5월 3일 증거 불충분으로 법정에서 풀려났습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그 외의 추정 피해자들
시사 평론가들은 11건의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 외의 사건들에 잭 더 리퍼를 연관지었는데"페어리 페이(Fairy Fay)"의 경우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조작된 것인지 불명으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페어리 페이"는 12월 26일 말뚝으로 복부가 관통된 상태로 상업로 도로의 출입구 근처에서 발견된 신원 불명의 여성의 시신에 붙여진 별명입니다.그러나 1887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화이트채플에서 기록된 살인 사건은 없었습니다.'페어리 페이'는 에마 엘리자베스 스미스가 질에 막대기 같은 뭉툭한 물건이 찔려 살해당했다는 언론 보도를 통한 혼란으로 탄생한 것으로 대부분이 "페어리 페이"라는 희생자가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1888년 2월 25일 애니 밀우드(Annie Millwood)라는 38세 과부는 다리와 하반신에 다수의 자상을 입어 화이트 채플 노역 의무실에 입원했고 밀우드는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주머니칼로 공격받았다고 직원에게 알렸습니다.이후 밀우드는 퇴원했지만 3월 31일에 자연사했으며 이후, 밀우드는 잭 더 리퍼의 첫 번째 희생자로 추정되었지만 잭 더 리퍼와 이 습격을 명확하게 연관지을 수는 없었습니다.또 다른 피해자로 추정되는 에이다 윌슨(Ada Wilson)이라는 젊은 양장사는 1888년 3월 28일 보우에 있는 집 현관 앞에서 접이식 칼로 목을 두 번 찔렸지만 생존했으며 40세의 앤 파머(Annie Farmer)는 마사 태브럼과 같은 숙소에 거주했으며 1888년 11월 21일 습격 사실을 신고했는데 파머는 목에 얕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 목격자는 파머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입과 손에 피가 묻은 이름 모를 남성이 "그녀가 한 짓을 보라!"라고 외치며 숙소를 뛰쳐나왔다고 진술했는데 그녀의 상처는 가벼웠으며 자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화이트홀 미제사건은 1888년 10월 2일 화이트홀에 건설 중이던 새 경찰청 본부에 지하에서 머리가 없는 여성의 몸통을 발견하고 나서 만들어진 명칭으로 앞선 9월 11일에 핌리코 인근 템스강에서 떠다니던 시신의 팔과 어깨가 발견되었고, 왼쪽 다리는 10월 17일 몸통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묻힌 채로 발견되었습니다.남은 사지와 머리는 회수되지 않았으며 시신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의 훼손 상태는 다리와 머리가 잘렸지만 팔은 잘리지 않았는데, 핀치 가 몸통과 비슷했습니다.화이트홀 미제사건과 핀치 가 사건 모두 "토르소 킬러(Torso killer)"라고 불리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연쇄 살인 사건 "템스 미제사건의 일부였을 수 있는데 잭 더 리퍼와 '토르소 킬러'가 동일 인물인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별개의 연쇄 살인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토르소 킬러의 살인 방식은 리퍼의 살인 방식과는 달라서 당시 경찰은 둘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토르소 킬러의 네 명의 피해자 중 엘리자베스 잭슨 한 명만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잭슨은 1889년 5월 31일부터 6월 25일까지 3주 동안 템스 강에서 여러 신체 부위가 수습된 첼시의 24세 매춘부였습니다.1888년 12월 29일 브래드포드의 매닝햄에 있는 마구간에서 12월 27일에 실종된 존 길(John Gill)이라는 7세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시신의 다리는 잘려 있었고, 복부는 열렸으며, 창자의 일부는 뽑혀있었고, 심장과 한쪽 귀는 없어졌습니다. 리퍼 살인 사건과 유사해서 리퍼가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언론의 추측이 이어졌고 소년의 고용주인 23세 우유 배달원 윌리엄 배렛(William Barrett)은 살인 혐의로 두 번 체포되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결국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1891년 4월 24일 뉴욕시에서 캐리 브라운(Carrie Brown, 셰익스피어 작품의 대사를 인용하는 습관 때문에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함)은 옷으로 목이 졸려졌고 칼로 베여져 죽었습니다.사타구니 부위에 크게 찢어진 상처가 있고 다리와 등에는 얇은 상처가 난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침대 위에서 난소가 발견되었지만, 의도된 것인지 의도치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 장기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이 사건은 화이트채플의 연쇄 살인 사건과 비교된 적이 있었지만 광역경찰청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용의자들
범인이 끝내 잡히지 않았기에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에는 다양한 인물이 용의자로 올라갔는데 용의자로 오른 인물은 의사부터 공작까지 다채롭고, 그 외에도 작가 루이스 캐럴,화가 월터 시콧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용의자 후보로 올라와 있습니다.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 용의자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으며, "영국인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며 유대인과 외국인이 의심받기도 했습니다.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몽타주가 공개되었지만, 기록이 오래되었고 목격자도 거의 없어서 크게 신빙성은 없습니다.
◎용의자 1.애런 코즈민스키_당시 잭 더 리퍼를 추적하던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은, 어떤 폴란드계 유대인을 유력 용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앤더슨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그를 체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즈민스키(Kosminski)는 도널드 스원슨(Donald Swanson) 경감 사후에 남겨진 메모를 통해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스원슨과 앤더슨은 용의자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스원슨과 앤더슨이 언급한 이 용의자를 폴란드 출신 미용사 애런 코즈민스키(Aaron Kosminski)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앤더슨은 또한 유일하게 범인의 얼굴을 본 목격자가 "애런이 범인이 맞다"고 지목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애런이 정신병원에 수감된 이후부터 잭 더 리퍼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이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게, 애런이 수감된 것은 1891년이며, 잭 더 리퍼의 범행으로 확실시되는 범행은 1888년 8-11월의 범행이다. 당시 화이트채플의 여성 연쇄 살인은 1891년을 마지막으로 끊긴 것은 맞으나, 마지막 케이스인 1891년의 프란시스 콜 살인 이전 벌어진 살인은 1889년 9월 10일 발견된 이름 모를 여성의 훼손된 몸통이 끝이었으며, 시간적 간극을 보면 잭 더 리퍼와의 연관성이 높진 않습니다. 애런이 수감된 1891년과 연쇄살인이 종료된 시점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또한 이 모든 것은 앤더슨 개인이 주장한 사실일 뿐이며 결국 코즈민스키가 진범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사건으로부터 126년이 지난 2014년, DNA 감식을 통해 범인이 애런 코즈민스키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캐서린 에도우즈가 둘렀던 숄이 경매에 올라왔는데, 이 숄에 남은 DNA를 분석해 코즈민스키의 후손과 대조해본 결과 일치했다는 것. 그러나, 법의학계에서 진범을 가리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핵 DNA가 아닌 상대적으로 특이도가 낮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대조해본 것이기 때문에 DNA 서열이 서로 유사한 사람이 여러 명 있을 수 있는 만큼, 아직까진 신빙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과학자들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으므로 해당 DNA에 일부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증거로서 불충분하다"는 반론을 낸 상황이라, 영원히 진범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렇지만 그 DNA를 증거로 제시한 에드워드에 말에 따르면 애런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당시 살해 현장에서 200m도 떨어지지 않았던 곳에 있었던 것과 그가 신체를 노출하거나 성도착증세를 갖고 있었던 점, 에런이 정신병원에 수용된 시기가 잭 더 리퍼의 범행이 끝난 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정황증거도 있습니다.일단 애런 코즈민스키의 후손의 DNA를 분석한 것으로 보아 다른 용의자들의 후손들도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진범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은 보여준 점에서는 의미도 있다 할 수있습니다.1988년 잭 더 리퍼 사건 100주년 기념으로 방영한 살인광 잭의 숨겨진 정체라는 방송에서 FBI 유명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습니다.
경찰에게 보낸 편지는 범인이 보낸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경찰에 노골적으로 도전할 인물이 되지 못 한다.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했다는 것은, 정신 장애와 섹스 부적응 등의 문제가 결합하여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또한 여자를 전격적으로 해치웠다는 것은 범인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적응의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을 보면 말더듬이 등 언어 구사가 부자연스러운 자일 가능성이 크다. 범죄 현장을 살펴보면 창녀의 환경 속에 잘 어울려 창녀의 의심이나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 자이다. 외로운 늑대 유형이지 힘센 학살자 유형은 아니다.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살해 현장으로 되돌아올 그런 유형이다.런던 경찰은 이 범인을 이미 조사했을 것이다. 단지 그가 범인인 줄 몰랐던 것이다. 살해 후의 시체 훼손 때문에 의학 지식이 있는 자라는 의견이 있지만, 그 훼손 행위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쇄살인범이 피살자를 제멋대로 해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드 게인,에드 켐퍼,제프리 다머,리처드 마켓 등은 의학 지식이 하나도 없었지만 끔찍하게 시체를 제멋대로 훼손했다.우리에게 제시된 여러 후보 중 애런 코스민스키가 가장 프로파일에 부합한다. 그러나 코스민스키는 우리에게 제시된 용의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며, 그를 잭 더 리퍼라고 확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잭 더 리퍼가 코스민스키와 '유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범죄심리학과 유명 교수인 데이비드 캔터 또한 유력 용의자 코즈민스키의 거주지가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원으로 그릴 경우 중앙에 위치하다는 사실을 말하며 애런을 지목했습니다.일단 정황증거와 프로파일러의 설명까지 전부 분석해보면 지금으로서는 코즈민스키가 꽤 유력한 후보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용의자 2.몬터규 존 드루이트_잭 더 리퍼의 수사를 담당한 멜빌 맥노튼 경은 3명의 용의자를 지목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몬터규 존 드루이트입니다.그는 사건이 시작된 곳 근처에 사는 변호사이며 의사가 아니지만 의학이 취미였고, 친척이 운영하는 병원도 있었으며, 후에 자살했습니다. 그가 자살한 이후 경찰은 수사를 종료했으나,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미심쩍은 점도 많습니다.
◎용의자 3.조세프 바넷_5번째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의 애인이였던 남성. 한때 메리 제인 켈리와 동거도 하는 사이였으나, 둘은 생활고 때문에 별거를 하기 시작했고, 켈리는 매춘을 시작하자 바넷은 매춘을 하는 그녀를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켈리가 사망하기 전날 바넷과 켈리가 함께 말싸움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메리 제인 켈리의 문이 잠겨있고, 살인범을 그녀의 집을 안에서 열어야한다는 수법을 아는 사람이였을테고, 켈리의 방 상태를 보면 침입자가 아니라 켈리가 집으로 초대한 사람에게 살해당했을 확률이 높아 의심을 받았는데 다만 켈리를 살해하였지만, 잭 더 리퍼는 아니고 그저 잭 더 리퍼를 모방범죄를 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용의자 4.찰스 크로스_첫번째 희생자 메리 앤 니콜스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남자로 니콜스의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옆에 지나가던 로버트 파울가 시체를 발견한 크로스를 만나 같이 경찰에 신고했다는데, 사실은 크로스가 직접 니콜스를 살인했지만 파울의 발소리를 듣고 마치 자신이 시체를 발견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가설. 당시에는 그저 경찰과 언론에게는 목격자로 여겨졌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용의자로 평가 받고 있으며 게다가 모든 희생자들이 크로스의 출근길과 비슷한 경로에 살해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식 수사에서는 자신이 찰스 크로스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본명이 아닐 확률이 높은데 "크로스" 성은 의붓아버지 이름을 따온 것이고, 본명은 찰스 레츠미어이라는 것.
◎용의자 5.앨버트 왕자_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7세의 장남인 앨버트 왕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는데 왕자가 매독으로 미쳐서 매춘부를 살해한 것이라는 루머와 앨버트 왕자가 매춘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가졌는데 여자가 가톨릭이고 앨버트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왕실을 지키기 위해 프리메이슨을 동원해서 매춘부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4명을 죽이게 했다는 루머도 있습니다. 나이트라는 작가가 화가 월터 시콧과 살해된 매춘부의 딸 사이에 나온 남자에게 증언을 들었다는 게 증거인데 몇 년 뒤 자기가 다 꾸며낸 일이라고 실토했습니다.만화 프롬 헬, 1979년 영화 살인 지령(Murder By Decree)등의 모태가 바로 왕자의 음모설. 여기다 프리메이슨까지 결합해서 나름 무적의 가설이 나왔는데 문제는 영국 왕실은 절대로 중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왕가의 허가 없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서, 앨버트 왕자가 무슨 일을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는 것.굳이 살인까지 벌여서 입을 막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용의자 6.월터 시콧_앨버트 왕자를 지목한 월터 시콧도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에 의해서 살인자 잭이라는 의심을 받았는데 그에게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성적 충동으로 인한 살인동기가 있으리라는 점,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섬뜩한 그림이 다수 있으며, 필적이 살인자 잭의 편지와 흡사한 데다가, 편지지 역시도 살인자 잭의 것과 같은 회사의 갈은 묶음이라는 것이 근거인데, 이를 반박하는 증거도 많기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세기의 미스터리 - 전설의 연쇄 살인마(원제 : IT IS REAL? JACK THE RIPPER)에서 이 설을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용의자 7.토머스 닐 크림_동시대의 살인의사 토머스 닐 크림은 처형되기 전 자신이 잭 더 리퍼라고 주장했지만 토머스 크림은 피해자들을 비소로 독살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
◎용의자 8.질 더 리퍼_어쩌면 여자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는데 소위 질(Jill. '잭'과 비슷하게 쓰이는 여자 이름) 더 리퍼 음모론으로 만약 살인마가 여자였으면, 매춘부 여성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산사들은 당시 흔한 직업이었는데, 조산사였으면 해부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테고, 피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여기에 1890년 12월 처형되었던,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산파 메리 피어시(Mery Pearcy)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메리 피어시는 애인의 아내와 그 자녀의 목을 잘라 살해한 살인 범죄자였는데, 피어시가 사건 당시에 이스트엔드에 거주했다는 일부 기록등을 토대로 몇몇의 사람들은 피어시가 질 더 리퍼이며 매춘부 5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엠마 스미스 살인사건 당시, 핑거즈 프레디 라는 남성과 엮여 떠돌던 소문도 질 더 리퍼가 범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용의자 9.프랜시스 텀블티_아일랜드 태생의 미국인 사기범으로 무허가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소위 돌팔이로서의 사기 전적을 가진 인물로서, 미국에서는 군 장교로 위장을 하는 등 다른 사기 전적으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 "인디언 허브"의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두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_그후
살인마 잭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잭 더 리퍼 사건은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고, 빈민구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이를 두고 조지 버나드 쇼는 "그 어떤 사회개혁가보다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을 널리 알렸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살인마 잭을 사칭하거나 그의 범죄 수법을 따라하는 보방범죄가 극심하게 발생해서, 화이트채플에서는 위에 언급된 살인 외에도 다수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아무나 잭 더 리퍼가 되는 것은 아닌지, 대부분은 잡혀서 교수대 위로 올라갔고, 정말 정상참작이 되고 또 되어야 종신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잭 더 리퍼가 언론에 편지를 보낸 이후, 조디악 킬러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잭 더 리퍼 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이 미제로 종결되었음에도 범인을 특정하려는 노력에 빅토리아 시대 후기 사회사와 인물사 연구를 곁들인 리퍼학(ripperology)까지 생겨났고 미제 사건이라는 점이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잭 더 리퍼 이후, 칼로 해체하거나 찌르는 형태를 주로 보이는 연쇄살인자들은 리퍼형 연쇄살인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잭 더 리퍼는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 의해 '사상 최악의 영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합니다.또한 안일한 수사로 잭 더 리퍼의 검거 실패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찰스 워런 경은 나중에 보어전쟁에 장군으로서 참가, 스피온 콥 전투에서도 살인자 잭 사건 때와 같은 안일한 작전으로 영국군의 엄청난 참패를 초래합니다. 이때 젊은 종군기자 한 사람이 "상황이 안 좋은데 뭐라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에 발끈한 워런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이 사람을 당장 끌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쫓겨난 이 종군기자는 워런 경의 실책을 낱낱이 고발했고, 이로써 워런 경은 왕립군사학교가 배출한 최악의 인재라는 악명을 얻게 됩니다.결국 비난 속에 1905년 한직으로 전출되었다가 1908년 사임하며 은퇴,그 뒤로도 영국 귀족계에서도 비웃음을 당했고, 워런 본인도 이런 비난에 시달리던 걸 신경쓰며 자서전이랍시고 책을 쓰며 자기 변명이나 하다가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록에 보면, 1921년 친척에게 '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고 할 정도로 영국에서 욕을 두고두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았는데 오래 살다 보니 그 기자가 자기처럼 삽질하는 것도 보았지만 기자는 특이한 물건(마크 전차)을 만들어서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게 만들었고 40년대 영국의 불굴의 상징이 되었기에 워런처럼 욕만 먹는 신세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런던에는 잭 더 리퍼 소굴(Jack the Ripper Haunts)이라는 관광상품이 있는데 잭 더 리퍼가 연쇄살인을 벌인 범행현장을 일일이 걸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며, '올해의 관광 가이드 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