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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知識을 낳는 뮤지엄

"나를 향한 깊은 성찰" 야스퍼스의 이성과 실존

by 마음heart 2011.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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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는 실존이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라고 말하였다. 인간 실존은 초월적 세계와 경험적 세계 중간에 위치해 있다. 실존은 자각적 존재인 인간에 한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실존은 나의 존재 궁극의 근거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기존적 모습과 대존재가 결합된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는 존재를 완성된 실재, 최고선의 이데아, 본성이라 한다. 실존으로부터의 철학은 이 세계를 근거로, 이 세계를 증명하여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근원의 세계, 대존재를 조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야스퍼스의 실존태도는 인간 존재 분석이 아닌, 인간 본연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현상의 나라는 존재에만 국한된게 아니라 초월자와도 관련이 있다. 인간실존은 초월자에 의해서 지지(支持)되어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초월자에게로 지향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최고선의 이데아`를 지향할 적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초월적 세계를 자각할 수 있을 때 초월자에게로 귀의한다. 그때 우리는 실존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되어져 나온 근원적 세계를 찾는 진리 태도를 가질 때 인간은 그 때 비로소 실존한다 할 수 있다.

 
 
 

 야스퍼스는 원래 하이델베르크와 뮌헨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그는 생에 대한 많은 상이한 태도들에 관한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관의 심리학>을 출판하였는데 그것은 야스퍼스가 심리학에서 철학에로 전환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철학 교수로 전임한 뒤에 야스퍼스는 I.칸트, S.A.키르케고르, F.W.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E.후설의 영향까지 곁들였다. 그는 더욱 철학에 진력하여 마침내 그의 최대의 저서인 <철학 (Philosophie)>(3권)을 펴내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체계적 전개의 배경에는 20세기 서구사회가 제기하는 기계문명, 대중사회적 사회, 정치상황,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전환적인 사상적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기조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철학'을 시대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인간존재를 규명하는 철학적 사색은 그 전과 같이 세계의 조감도를 얻는 그런 단순한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원에 파고드는 활동이며, 철학은 '철학한다(Philosophieren)'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자아의 본성은 실존해명(Existenzerhellung)을 통하여 발견된다. 실존해명은 인간의 가능성들, 즉 자아와 존재의 이해를 추구하는 실재의 가능성들을 드러내 준다. 실존해명은 질문자 자신에로의 접근을 허용한다. 인간에 있어서 실재적이며 가치 있는 것, 즉 진정한 것은 실존(Existenz)이라 불리어 진다. 실존은 새로운 가능성들에 무한히 열려 있으며, 전통적인 탐구로는 접근할 수 없다. 비록 실존이 개념적으로 한계 지워질 수 없는 인간존재의 결정적인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경험된다. 실존은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이며, 반면에 현존(Dasein)은 인간의 현세적인 차원이다. 현존은 기술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영역이며, 이론적 반성으로 접근될 수 있다. 단순한 현존을 나의 존재인 실존의 진정한 근거와 혼동하는 것은 우둔한 유물론이며, 난파를 초래한다. 반면에 현존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초래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이 중용인 것이다. 



 

인간은 그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생존은 의존과 공존하는 자유, 고독과 공존하는 사귐, 악과 공존하는 선, 불행과 공존하는 행복, 죽음과 공존하는 삶 같은 역설과 이율배반들로 가득차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은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의하여 제한된다. 이러한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특성은 그의 유한성이다. 인간은 유한성을 자신의 실존에 대한 한계로서 경험한다. 진정한 실존은 가능한 이러한 한계들을 밀어 되돌려 보내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을 수용하고 견디어 나가려고 한다. 죽음은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뒤로 연기하지 않고 확실하게 삶의 절박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상황성의 한계는 우리가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자유는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이다. 자유는 도덕적 책임의 문제가 되는 선택의 압도적인 중요성을 초래한다.


 실존은 한계상황을 통해 감지되고 실현되며, 또한 초월자를 감지함으로써 실존이 나에게 증여되는 나의 현실적 실존이다. 실존이 한계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깨닫는 비약은 첫째 모든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세계현존으로부터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고독한 자아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둘째 좌절의 세계 속에 내가 필연적으로 참여하여 한계상황에 있는 자신을 알고, 이 한계상황을 사유함을 통하여 사물들을 관찰함에서부터 가능적 실존의 해명에로 나아가는 것이고, 셋째 가능적 실존으로의 현존으로부터 한계상황 속에 있는 현실적인 실존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한계상황의 해명을 통하여 실존해명이 이루어지고, 한계상황의 주체적 체험을 통하여 현실적 실존에로의 비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19세시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혹은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시작하여 분석철학과 함께 현대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후설(Edund Husserl)은 현상학적 입장을 통해 철학의 관심을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실존주의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후설의 그 같은 제창은 양차대전의 비극적 체험을 통해 더욱 더 촉진되었다. 게다가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반면에 인간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역현상도 초래하였다. 이것 또한 실존주의의 생성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출발한 철학사상이다. 요컨대 그것은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하였다. 그것은 기술문명과 관료기구 그리고 객관주의에 대한 항변이며, 산업사회에서의 조직화로 인한 인간소외에 대한 거부이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인으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인간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고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나'를 상실한 비본래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나'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가 주구하는 기본적 주조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실존의 의미를 알아보면 실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존 철학이라 함은 그러한 실존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어 적인 의미에서만 보았을 때는 실존주의는 방법론 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신 앞에 존재하는 고독자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니체의 실존주의를 비롯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허무적인 철학에서 그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이라 함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을 아무 것도 아닌 무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길을 찾고자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그 이전의 철학이 진리와는 동떨어진 모색만을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랄 수 있으며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데카르트 이후의 신을 잃어버린 시대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실존한다는 것은 그 외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밖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이고, 또한 실존주의에서 우리는 삶을 느낀다는 것이다. 모든 낡은 관념과 우매함을 떨치고 진정한 이 삶에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 이러한 삶에 대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방식, 이것이 실존주의이며, 이러한 이유로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니체의 철학을 생의 철학이라고 한다.

 실존주의는 다양한 발상에 의해 생겨났다. 그 역사도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멀리는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현대적 의미로의 실존주의는 위에서도 말한 키에르케고르에서부터 시작하여 니체, 하이데거, 카뮈, 부버 등에 이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마저 각각 그 관심사가 다르기에 실존철학의 연구주제가 무엇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많은 것은 체제성의 대비 개념인 개체성, 지식뿐만 아니라 감정, 의지까지도 포함한 체험의 세계를 중시하는 지향성, 엄연한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합리성,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데 행사해야 할 선택의 자유와 결단, 인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안·죽음·우울, 그리고 두 자유로운 개체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공감적 관여의 문제 등이다.

 

플라톤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전통철학은 그 관심이 주로 본질에 관한 문제에 있었으며, 따라서 철학자들은 철학의 주요 임무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본질의 문제를 종속적인 지위로 좌천시키면서 철학의 관심을 전환시켰다. 그들은 실존을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실존주의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되는 바, 그 물음은 "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기능공의 예를 든다. 즉 제화공이 신발을 만들 때 그가 만들려고 하는 신발의 이데아(본질)가 신발을 만들기 이전에 그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도 인간을 만들기 이전에 이데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항성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의 창조주는 없다고 본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실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즉 인간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또 신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신을 창조한 창조자의 창조자를 설명해야만 한다. 이러한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면 한이 없으며, 결국 창조자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파악되며, 그가 어떤 특별한 무엇이 되기 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유사한 양식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를 반박할 수 있다. 즉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분명히 나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기 이전에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다."(I think, therefore I have one of the prerequisites for thought.)라고 고쳐야 더욱 정확한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실존주의는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I choose, therefore I am.)라는 명제를 사용한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다.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다. 즉 인간은 그가 되고자 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실존주의에서는 각 개인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까지도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윤리적 선택에 대한 인격적 책임은 필수적이다. 즉 도덕적 결정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 실존주의의 중심원리이다.

  인간은 결정되지 않은 존재이며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그 자신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사실상 이러한 과정은 되어 감(혹은 생성)의 과정이다. 요컨대 존재한다는 것은 되어 감의 과정에 종사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이 지구상에 있는 한 계속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가 어떠한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한 제약은 전혀 없다.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를 초월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며 끊임없이 인간의 본질을 재조정한다. 인간의 실존은 그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결코 한번만으로는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하는 자, 그리고 그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는 자"로서 파악한다.

 

19 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사상으로,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최초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구체적 개별적 단독자로서의 존재이다. 실존이란 그러한 현실 존재 또는 참된 진실 존재로서의 참된 본래적 자기를 가리킨다. 이 참된 본래적 자기를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대체로 신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과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베르자예프 등이 있고, 후자에는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등이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대지(大地:現實)에 충실을 기하고 현실적 생에 대한 긍정적 사랑을 역설하는 무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며, 그 목표는 운명애와 '권력에의 의지'를 원리로 삼는 초인의 이념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을 밝혀 주는 독특한 방법을 실존 해명(實存解明, Existenzerhellung)에서 찾는다. 실존 해명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 존재에 눈뜨게 하고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특히 죽음.고뇌.투쟁.책임 같은 한계 상황에서 실존은 가장 잘 해명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우리 자신이 깊이 해명된다. 이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필연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세계 내 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로 본다. 인간이 세계 내 존재인 한, 인간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염려.관심(念慮.關心, Sorge)과 불안(不安, Angst)을 갖고 살기 마련이다. 즉, 현존재의 존재 방식은 염려이며, 이 염려는 현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드러내 준다. 죽음 앞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현존재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이해는 시간성의 시계(視界, Horizont)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zum-Tode)이며, 절대적 한계점으로서의 죽음을 직시하는 현존재이다. 

 

 20 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실존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의미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제에렝 키어케고르(1813~1855,42세)에서부터 이다. 키어케고어는 힘겨운 기독교와의 논쟁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으며 자신은 신보다는 인간의 양심을 믿는다라고 했지만 그는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로 말하여진다. 실존철학의 무신론적인 것은 니이체(1844~1900,56세)에 의해서 부터이다. 그 이후 금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뉘어졌는데 사르트르(1905~?), 까뮈(1913~1960,47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이상으로 인해 정치적이 되었으며 맑스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참여적인 행동에 의한 그 당시의 발로였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결국 그는 까뮈와 퐁트와도 결별하였다. 사르트르와 까뮈는 모두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 20세기 중반에 커다란 존재들이었으며 소설가이며 비평가로도 유명하다.

 

야스퍼어스(1883~1969.86세)는 유신론으로, 하이데거(1889~?)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라고 구분되며, 사르트르는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하이데거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은 야스퍼어스도 평생을 거쳐 신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거의 없으며 가장 기독교적인 실존주의자 였던 키어케고어 자신도 자신을 기독교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인 것이 한 면으로 구분되어지긴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무신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야스퍼어스와 하이데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시기도 비슷했으며 둘 다 아카데믹한 논문과 강의로 일관했다는 점. 그리고 그 둘은 50대에 들어서부터 니이체에 대해서 생의 마지막 까지 자주 이야기 했으며, 또 위에 언급한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만큼의 강렬한 철학과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실존이라 함은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진실 그 자체에 접근하는 철학이다. 추운 것을 춥다고 말하는(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 하는) 것. 그것이 실존주의 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의 시적 특성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유명한 말에서 비롯된, 비신학적 논거를 출발점으로 잡은 근대 철학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철학의 과도한 반항에서 그것을 넘겨 니이체에 이르러 세련되고 심오해졌다.

   니이체는 맑스와 함께 20세기를 뒤흔든 두 명의 철학자이다. 니이체의 실존주의 철학은 현대 정신문명의 거대한 기반이며 굳이 실존주의라고 말하여지지 않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실존주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20세기에 미친 실존주의의 영향, 그 근본을 관철하는 삶에 대한 깊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미 많은 것을 니이체 위에서 살고 있으며, 실존주의는 20세기 사유의 세계에서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21세기의 철학 역시 니이체의 20세기 혁명 아래로, 혹은 위로 가지 않을 것이다.


 실존이란 말, Existenz는 중세의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본래 '본질(essentia)'이라는 말에 대립어로 쓰였다. (특히 중세의 에리우게나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때 본질이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은 책상이다'라고 할 때의 책상이란 그것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예로 하는 보편개념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이 이데아가 바로 본질이다.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실재이며 참된 존재이다. 이에 반해 existentia란 말은 '있는가?' 또는 '어떻게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즉 이때 존재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 또 이렇게도 있고 저렇게도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존재란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현실존재를 말한다. 플라톤적 관념론에 따르면 모든 개별자는 이데아를 원형으로 하여 제작된 모상, 즉 원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만물이 있기 위해서는 그 원형으로서 이데아가 먼저 있어야 하며 이것을 모방한 만물은 본래의 실재에서 파생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existentia라는 단어는 원래 ex-sistere (밖에-나와있다, 나타나다)의 명사형으로 '밖에 나와 있는 것, 밖으로 나타나 있는 구체적,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것은 플라톤 식으로 보면 만들어진 것, 제작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보다 본질이 우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존재가 사람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가령 이 책상, 저 걸상이 없어지면 다른 책상, 다른 걸상으로 대신할 수가 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똑같은 현실존재라 할지라도 사물은 '거기에 현실적으로 있다'는 의미뿐이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단순한 존재나 생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해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존재이다. 즉, 인간의 현실존재에는 개별성과 주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본질이란 이러한 개별성과 주체성을 제거하고 인간을 일반화하는 데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존재는 이 본질의 밖으로 나와서(ex-sistere) 각 자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 '너는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야 한다.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의 본질은 이미 신의 의도 속에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싸르트르에게 신은 없다. 따라서 인간존재는 개념에 의해 규정되기에 앞서 먼저 실존하고 다음에 스스로 생각하고 행위 함으로써 자기자신을 만들어 나아간다. 인간의 본질은 본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해 가는 것이다. "사람이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둘째로 중요한 특징은 진리란 객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주관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이라는 말이 특히 인간의 현실존재를 의미하게 된 것은 19세기 키에르케고르 이후이다. 그가 코펜하겐 대학을 다닐 때는 방금 사망한 헤겔의 철학이 이 북구의 대학까지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정신을 매개로 하는 범논리주의(Pan-logismus)의 거대한 체계의 그물로 자연과 정신의 모든 것을 포섭하는 헤겔의 정신철학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문장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감탄사', '줄 사이에 거꾸로 박힌 활자' 등으로 느껴온 고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속이 텅 빈 공허한 형식으로만 보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일기에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할지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쓰고 있다.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얽혀있는 것, 그것을 나는 추구하리라'. 그에게는 따라서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보편타당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 진리를 찾아다니다가 개체적인 현실적 인간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보편타당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타당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영혼을 구원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단호하게 '주체성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 때의 주체성이란 합리주의적 관념론의 순수자아나 인식론적 주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자,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자기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논리적인 명제에만 국한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명제만이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러나 참된 친구, 참된 인간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참'이라는 말은 '성실', '진실'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실하다', '진실하다'는 의미에서의 '참'은 명제의 특성이 아니라 인격의 특성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참이란 자신에 대해서 참되다, 성실하다는 의미이다. 그에 있어서 인간적 실존의 과제는 참된 자기자신, 본래적 자기로 되는 것이다. 실존의 자기형성의 실례를 우리는 그의 미적(감성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의 세 단계의 전개에서 볼 수 있다.


 


미적(감성적) 실존은 오로지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향락만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향락만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쾌락의 노예가 되고 만다. 즉 자기의 감성적 요구에 가장 충실한 감성적 생활은 실은 자기의 상실이다. 여기에 감성적 실존의 한계가 있으며, 이 모순에서 윤리적 실존의 단계로의 비약이 일어난다. 윤리적 실존은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것을 의무로서 이행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윤리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이상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즉, 윤리적 생활태도는 결국 윤리적 단계로서는 참된 자기, 참된 윤리적 실존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좌절과 절망에서 실존은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비약한다. 이것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단계이다. 이것은 결국 종교상의 역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지이다. 이것은 신이 시간 속에 나타나고, 영원이 시간이 되고 또 그리스도가 신이면서 인간임을 믿는 것은 말한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신과의 무한한 단절 앞에서 구원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저 역설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신앙은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잃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매일 매 순간마다 새로이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참된 실존이란 바로 이런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이다. 

 

그런데 이 세 단계는 물이 흐르듯 연속적으로 도달되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는 서로 질적으로 상이하며 비연속적이다. 그것은 비약이다. 따라서 거기서는 헤겔의 변증법에서와 같이 '이것도 저것도(sowohl als auch)'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 oder)'의 의지의 결단에 의한 선택이 있을 따름이다. 즉, 그 흐름은 지양에 의한 종합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에 의한 비약의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의 변증법이 질의 변증법, 역설의 변증법인 까닭이다. 실존이란 원래 밖으로 나가서는 것을 말하였다. 실존의 참 모습은 이처럼 부족한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실존이 특별히 현대에 와서 그렇게 강조되고 추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현대가 바로 인간소외의 시대임을 들 수 있다. 실존주의 운동은 고도의 기계문명이 인간을 평균화하고 억압하는데 대한 반항의 운동이다. 현대사회의 이러한 보편적 현상을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중엽에 이미 예견하였다. 군중 속에 묻혀있는 개인의 비참한 상태를 그는 19세기 초 러시아 농노의 취주악대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는 20인의 악사가 각각 도, 레, 미 등 자기에게 고유한 소리 하나 만을 내도록 되어 있어서 자기 차례가 되면 일정한 길이의 그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들 악사는 각 자에게 배당된 음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이들이 지나가면 구경꾼들은 저기 어느 지주의 도가 지나간다, 어느 지주의 미가 지나간다고들 말한다. 따라서 이들 악사는 배당된 하나의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대사회란 이 농노 취주악대에서의 지주와 농노와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조직과 그 성원의 관계로 바뀌어진데 불과하다. 가령 솔음만 내고 있는 농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노동자들도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조작을 하루에도 몇 천 번씩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개인은 그가 속하는 조직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즉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품 이상의 아무런 뜻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 각자의 개성은 완전히 무시되고 대중화, 평균화된다는 것이며, 이렇게 비인간화되는 것을 인간의 소외라고 부른다. 인간은 조직 속의 일원으로서 그 기능의 한 단위에 불과하고, 집단 속의 한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라도 괜찮은 어떤 자'에 불과하다. 인간은 기계문명의 거대한 메카니즘 속에 한 부분으로 끼여 있어서 이 메카니즘의 움직임에 순응함으로서만 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통계청의 한 장의 카드로 환원된다. 인간의 기계화, 평균화는 체제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있고 따라서 인간의 교환가능성은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변혁 정도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부조리, 인간소외와 인간상실에 최후의 반항을 시도한 것이 실존주의이다. 

 

둘째로 실존주의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다른 원인은 금세기가 '불안의 시대'라는 데 있다. 근대 계몽주의와 독일 관념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가만히 두어도 인류사회는 진보하고 향상되어 간다는 이 우상은 20 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무참히 깨져 버렸다. 절대자를 자처하던 인간이 이제 그 유한성이라는 쓰라린 현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제 "죽음에 이르는 병에 사로잡힌 절망적 존재"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존재"(하이데거),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야스퍼스)이다. 이런 상황의 묘사로 자주 쓰이는 용어가 독일어의 Abgrund, 심연이라는 말이다. Grund는 바닥, 근거를 의미하며, ab은 접두사로서 '떼어내다'의 뜻이다. 즉, 심연이란 '근거, 바닥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심연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하이데거의 'Geworfenheit, 던져져 있음'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사상에서 연유한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은 피조물이요 신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요 삶의 의미도 신에 의해서 비로소 있게되는 것이다. 신은 모든 존재의 기원이며 동시에 모든 가치의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 함은 모든 존재와 가치가 그 근원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인류에게 있어 역사적, 개인적 삶이 그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던 발판이 사라짐으로 해서 이제 역사와 인생이 허공에, 無 위에 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을 하이데거는 '던져져 있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신이 베풀어 준 삶이 아니다. 누가 무엇 때문에 던져준 삶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나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의 생전과 사후는 완전히 無이다. 우리의 삶도 無 위에 떠 있다. 우리는 無 위로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실존철학을 관통하는 불안의 현상은 이렇게 인간적 실존은 그 근거가 없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일방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자기존재를 야스퍼스는 `실존`이라고 불렀다. 실존이란 단순히 이러저러하게 존재함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존재할 수 있음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실존이 아니라 가능적 실존인 것이다. 나는 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이란 마치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현존과 같이 항구적인 의미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며 생성하고 스스로를 밝히는 것이면서 스스로를 상실하는 것이다. 

 

실존은 `영원을 현재화하는 것으로서 시간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존철학은 단순히 無를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둘로 나누어 정신의 하강으로서 허무주의(19 세기말 데까당)에 대해 정신의 고양으로서의 허무주의를 구분하고 있다. 니체는 無의 심연에 도달한 절망적인 결단의 순간에 이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그렇다고 無의 끝도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해 들어오는 있는 그대로의 생, 즉 영겁회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초인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니체의 이러한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격렬한 열망을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 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고 난 후 인류는 그의 예언이 터무니없는 외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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