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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知識을 낳는 뮤지엄

러브앤 스캔들/세기 연인들의 숨겨진 미친 사랑 이야기

by 마음heart 201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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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랑을 하지만 누구나 그 사랑을 아름답고 귀한 추억으로 보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아리따운 기억속의 열정과 완벽한 사랑으로 더욱 기억되는지도 모를 일,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유명 스타의 삶 자체에도 사랑과 성공, 미친듯한 사랑의 방정식은 늘 존재했었다는 것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것,

사랑은 성공과 실패라는 말로 이분법할 수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교감하고 마음을 나누어가야 그 시작과 끝이 온다해도 영원히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더욱 소중한 이야기로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무는듯합니다.

 

 

 

 

 

 

 

 

 


 

1954년 1월 14일 치러진 뉴욕 양키스 팀의 조 디마지오와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결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조 디마지오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초까지 강타자로 활약하며 361개의 홈런, 56게임 연속 안타 행진 등의 경이적인 기록으로 아메리칸 리그에서 3번이나 MVP에 선정된 야구선수,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였으니 말이다. 사실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찍은 누드 사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쇄시킬 목적으로 전미 야구영웅인 조와의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결혼식이 끝날 즈음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에게 자신이 먼저 죽게 되면 매주 자신의 묘에 꽃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행복할 것만 같던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 남자들의 추파를 조는 용납하기 힘들었고, 연이은 영화의 흥행으로 나날이 높아가는 마릴린 먼로의 인기에 섹시한 이미지를 위해 연출해야 하는 아내의 노출 또한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혼하기에 이른다.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던 그녀가 1962년 8월 5일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되자 조는 장례식을 조용히 준비했고, 장례식 당일 관에 누워 있는 마릴린 먼로에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 20년 동안 결혼식 날 그녀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매주 그녀의 묘에 꽃을 바쳤다.

 

 

 

 

 

 

 

희대의 2인조 강도로 명성을 날렸던 악당 커플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우.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모든 이를 범죄대상으로 삼아 주유소, 식당, 시골 은행 등을 털었던 그들은 대공황 시기에 빈민층에서 자라나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를 향해 범죄로 일격을 가했다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 남편에게 버림받고 텍사스 달라스 서부에서 웨이트리스로 살고 있던 보니와 전과자 클라이드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끌렸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다. 클라이드가 강도와 무단 침입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자 보니는 그에게 권총을 전달해 탈옥을 돕고, 함께 공범의 길을 걷게 된다. 탈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붙잡힌 클라이드. 그는 14년 형을 선고받지만 강도 높은 노동에 지친 나머지 자신의 왼쪽 발가락 2개를 자르는 자해 행위를 하고 곧이어 가석방된다. 다시 보니를 찾아온 클라이드는 레이먼 해밀턴이라는 사람과 함께 3인조를 이뤄 강도 행각을 벌이고, 그러던 중 그들을 쫓는 경관을 쏘아 죽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죽음을 감수한 두 사람의 사랑이었다. 함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니가 클라이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기적이었던 클라이드도 보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했고, 보니가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었을 때에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1934년 5월 23일, 잠복해 있던 텍사스 경찰대원들이 그들을 향해 187발의 총탄을 날린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모델로 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페이 더너웨이와 워렌 비티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특히 온몸에 총탄을 맞으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힌다.

 


 

 

 

 

 

 

 

 

비틀스를 해체시킨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경멸당했던 여인 오노 요코. 비틀스는 공식적인 해체 이유를 다른 것으로 둘러댔지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모두 그녀를 싫어했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었다. 대중의 영웅이었던 비틀스와 존 레논을 포기할 수 없었던 팬들에게 오노 요코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여인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 존 레논을 만나기 이전부터 요코는 아방가르드 미술계에 이미 널리 알려진 인사였다. 일본 은행가의 딸로 뉴욕에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과 공연했고, 컨셉트 아트로 알려진 전위예술가로 유명했다. 이들의 만남은 아방가르드적인 미술학도였던 존 레논이 1966년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서 열린 요코의 전시회 미완의 회화와 조각전을 관람하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작업한 첫 앨범 <미완성 음악 1번:두 명의 숫처녀(Unfinished Album No.1 : Two Virgins)>를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평론가나 대중들은 난해하고 즉흥적인 음악보다 그들의 전라로 찍은 표지에 더 관심이 많았고, 점점 비틀스와도 멀어졌다. 이미 배우자가 있던 존과 요코는 각자 이혼을 했고, 1969년 3월 12일 언론의 공세를 피해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순회공연 중단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히트곡, 비즈니스에 관한 견해 차이 등으로 인해 균열되기 시작한 비틀스는 결국 1970년 4월에 공식 해체를 선언한다. 존과 요코는 평화와 사랑에 대해 논하거나 전위예술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지만 언론의 부정적인 평가와 그들의 예술지향점에 대한 회의, 마약사용과 음주 등으로 인해 관계가 금이 가고, 결국 1973년 결별한다. 그러나 이혼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1975년 10월 아들 숀이 태어나자 다시 합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1980년 12월 8일 정신 착란증의 한 팬에 의해 존 레논은 암살당한다.

 


 

 

13세기 그리말디가 모나코를 점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점령군 중 한 명이 플레미시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가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여인은 마녀로 변해 그에게 그리말디 가문은 결혼해서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700년이 흐른 후 그리말디의 피가 흐르는 모나코의 레이니에 3세는 결혼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의 부모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결혼 생활이 모두 불행했기 때문. 게다가 결혼을 통해 불안하고 어두운 모나코의 이미지를 쇄신시켜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당시 모나코 근처에 위치한 칸에서는 영화제를 위해 세계 각국의 영화배우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그 중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도 있었다. 운명이 언제나 그러하듯 레이니에 왕자와 그레이스 켈리의 만남도 우연하게 찾아왔다.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의 칸 영화제 특집판 커버스토리를 위해 두 사람의 사진촬영이 추진된 것이다. 사진 촬영 이후 그들은 편지를 교환하며 관계를 유지했고, 1956년 4월 18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린다. 모나코의 왕비가 된 매력적인 할리우드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 그녀 덕분에 모나코는 휴양지의 명성을 되찾았다. 동화 속 왕자님과 결혼한 그레이스 켈리의 왕국을 보고자 찾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왕자는 모나코의 이미지를 위해, 여배우는 안정된 미래를 위해 선택한 약간은 계산된 결혼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충실한 이상적인 커플이었다. 물론 수줍은 성격의 그레이스 켈리가 보수적이고 엄격한 왕실에 들어와 외로움을 타거나 여러 가지 미묘한 갈등을 빚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캐롤라인 공주와 알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가 태어나면서 부부는 훌륭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서로를 믿고 사랑했다. 그리말디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레이스 켈리는 1982년 9월 13일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모나코 왕국은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레이스 켈리를 사랑했던 레이니에 3세는 그들의 결혼생활이 행복했기에 저주를 극복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파리 드 프로뤼스 거리 아파트 27호에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모였다.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대부분이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그리스 등 화가들이었고, 종전 후에는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앤더슨, 포드 같은 작가들이었다. 초청자는 미국인 여류소설가 게르트루드 슈타인. 그녀는 문학의 큐비즘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 소설을 썼던 인물로 예술계에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르트루드의 아파트에는 그녀의 요리사이자 가정부, 비서인 동시에 편집자이자 발행인, 게다가 연인이었던 이가 함께 동거했는데, 그녀가 바로 앨리스 토크라스로 모더니스트의 배후에 있는 실력자였다. 당시 아방가르드 사조에 휩쓸린 파리의 예술인들 사이에도 동성애는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는 공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게르트루드의 작품은 앨리스를 감동시켰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해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 문제로 두 사람은 모두 괴로워했다. 게르트루드가 옹호했던 천재들, 피카소와 마티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예견대로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책을 읽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팔리는 책을 쓸 때가 왔다고 결심해 6주 만에 완성한 작품이 《앨리스 토크라스의 자서전》이다. 제목은 앨리스의 자서전이나 실제로는 게르트루드가 쓴 것으로 책에는 앨리스의 눈으로 본 게르트루드 주변의 유명 화가, 문필가에 관한 가십성 내용을 담아 베스트셀러가 된다. 1946년 대장암으로 게르트루드가 죽고, 앨리스는 게르트루드의 저작권을 관리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1967년 죽은 후에는 게르트루드가 묻힌 묘에 매장되어 영원히 그녀와 함께 누워 있다. 앨리스는 죽어서까지 게르트루드의 명예에 금이 가지 않도록 게르트루드의 묘비 뒷면에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죽은 날짜를 기입했고,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앨리스가 이곳에 묻혀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1932년 12월 11일 영국 역사상 최초로 에드워드 8세는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났다. 호칭마저도 윈저 공으로 격하된 에드워드 8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기까지 지난 25년간 봉직해 온 조국 아니 웨일스 왕자로서의 신분을 잊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나 지지 없이는 국가적 대사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를 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말한 사랑하는 여인은 두 번이나 이혼경력이 있는 미국 국적의 월리스 심슨 부인이다. 어떤 이는 그녀가 현대판 신데렐라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영국 왕가의 재산을 탐내는 마녀라고도 했다. 하여튼 왕세자가 사랑을 위해 왕위마저 포기했다는 것은 꽤나 로맨틱한 사건으로 두 사람의 사랑은 왕실이나 국민들의 반감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월리스는 20살에 해군 장교 워휠드 스펜서 후작과 결혼하지만 알코올 중독에 난폭한 그와의 결혼은 불행했다. 결국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인 어네스트 심슨을 만나 때때로 영국 귀족층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한 파티에서 에드워드를 알게 된 월리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남편과 에드워드와 셋이서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마련했고, 결국 에드워드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월리스에게 이미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는 마침내 어네스트 심슨과 이혼한다. 웨일스 왕세자의 염문이 영국 왕실의 추문으로 비화되자 영국 왕가와 측근은 월리스가 에드워드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월리스와 결혼을 못하면서까지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왕위를 버렸고, 그 후 영국 왕실 식구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녀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소문 없이 서로에게 충실한 사랑을 이어 나갔다. 에드워드는 월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72년 사망했고, 그 후 쇠약해진 월리스도 1986년 남편의 뒤를 이어 죽었으며, 두 사람은 윈저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 1927년 뉴욕에서 파리까지의 그의 비행은 33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단독비행으로 가히 세계적인 기록이었고, 그의 비행기록을 담은 책 《우리(WE)》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27년 매력적인 독신남이었던 찰스 린드버그는 멕시코와 미국 관계 완화의 일환으로 멕시코까지 비행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저에 머물면서 대사의 둘째 딸인 앤 모로우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비행을 하며 조금씩 사랑을 싹틔웠다. 주목받는 유명 인사였던 그들은 결혼을 비밀에 부쳤다. 또한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신혼여행을 떠난 후에야 1929년 5월 27일 결혼했음을 알렸는데 그래도 따라오는 기자들을 피해 비행을 하며 하늘에서 시간을 보냈다. 앤은 찰스의 영향으로 지상과 공중 사이의 전신 교류의 최고 기록을 보유하게 되고 마침내 글라이더 면허증을 딴 최초의 여성이 된다.후에 그녀는 대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아름다움을 맘껏 누리면서 비행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가 오히려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아이 찰스 2세가 유괴되어 변사체로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언론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부부는 영국으로 이사하지만 유괴사건과 극성스런 언론보도, 유괴범 재판을 에워싼 살벌한 분위기에 혼돈스러워 하던 찰스는 독일 나치즘이 주는 질서 정연함에 매료된다. 때문에 조국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찰스 린드버그는 비행기의 고도와 비행지역을 개선하는 테크닉을 개발해 미공군력 증강에 기여하고 남태평양에 50차례나 출격하는 등 미국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에 기여해 명예를 일부 회복하고, 1953년 대서양 횡단을 담은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을 발간해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앤 역시 아내와 작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자신의 이야기를 조개에 비유해 글로 풀었고, 그녀의 책 《바다의 선물》은 미국 여성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책은 찰스 린드버그의 책보다 더 많이 팔렸고, 1년 간 부동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 찰스는 계속해서 비행을 하고 앤은 글을 썼으며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두 사람은 독립적인 삶을 살면서도 사랑하는 관계였다. 

사랑이 사랑으로써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처음 기억하는 기억의 왜곡이 전혀 부끄럽지 않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연애에서는 비일비재하지만 그것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것은 그들만의 아름다운 추억이라 믿어진다.

 

 

 

 

 

 


 

러브 앤 스캔들 - 세기 연인들의 숨겨진 미친 사랑 이야기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폴 아론 / 김영실역
출판 : 지상사 20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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