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스캔들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1889. 4. 261951. 4. 29)
신해철의 음반 제목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영미 철학의 최고 스타는 이론의 여지 없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 통칭된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20세기 최고의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호명되기도 한 그는
매우 특이한 인생 행로를 걸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생의 비트겐슈타인.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의 사상은 논리적 원자론(原子論)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B. 러셀과의 상호 영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점차 인공언어(人工言語)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193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 언어(日常言語)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19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론』뿐이지만, 구두논의로 영국의 분석
철학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 『철학적 탐구』(1953) 등 많은 유고가 출판되었다.
*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후인 1953년에 출간된 유작으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1921)와의 대비를 통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철학의 성격 및 과제와 관련하여,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논리철학논고』의 목적이라면, 『철학적 탐구』 역시 언어의 오용으로 생기는 문제를 비판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후기의 철학의 성격과 임무는 언어 비판적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철학논고』에서 제시되는 언어는 외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며, 내적으로는 외연성의 논리구조를 가진 언어이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명제에서 드러나듯, 요소명제는 세계의 사태를 묘사하며 또한 이런 요소명제의 진리 값에 의해 복합명제의 진리 값이 결정된다. 이런 언어관에 기반해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지 종교나 윤리의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는 인간의 활동으로 이해되며 도구 혹은 게임에 비유된다. 언어가 활동이나 맥락에서 이해되는 한, 언어는 더 이상 『논리철학논고』에서처럼 세계에 대한 대립항으로 간주될 수만은 없다. 또한 도구는 삶의 세계에서 사용될 때 제 기능을 하듯이, 언어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쓰여질 때 유의미하며, 게임처럼 언어도 일정한 규칙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이런 유비에 바탕하여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 이론을 주창한다. 한편,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본질이 세계의 사태를 지시하는 지시적 기능에 국한되었다면,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는 인간의 삶의 문맥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명령이나 질문 등과 같은 다양한 기능과 쓰임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다양한 기능들을 묶어줄 언어적 본질이란 없으며 단지 가족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또한 『철학적 탐구』는 언어공동체가 특정언어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를 단지 규약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 속에서 찾고 있다. 이런 삶의 형식 개념은 인간의 개념체계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특성과 문화에 따라 상이한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철학적 탐구』는 서양근세철학 이후에 인식론적 출발점이자 근거로 설정되었던 자아를 사적 언어비판에 기초해 공박했으며, 그 결과 심신이원론을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철학적 탐구』는 기술적 분석이란 새로운 철학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언어분석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철학이란 언어비판이다.
철학이라고 불리는 잡탕을 순수하게 구분하고 분리시켜서 여러가지 분자들이 나오면, 그 중에서 순수한 철학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언어비판이란 말이다. 그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는 삶의 형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고 있는 사회의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언어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로서 단순히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사실을 표상한다. 그것은 크게 볼 때 언어가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의미한 언어는 사실에 대한 진술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사실적 언어, 즉 명제들이 나타내는 바는 ‘우연적인 것’이다. 이는 언제나 반드시 참 또는 거짓이 되는 그런 명제들이
아니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언어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주장한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적 언어를 세계를 기술하는 본질적인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유의미하게 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성격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적 언명들은 무의미하게 된다는 언급은 결코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영역을 제거해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의 근본적인 틀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체계에 주어지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강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논리적 형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논리학의 명제들은 과학의 명제들과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공리나 정리들은 사실에 대한 진술은 아니지만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는 논리학이 다루는 명제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논리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는 문장들은 이미 사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그런 문장들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면, 그런 문장들은 무의미한 문장들이다. 즉 논리학은 과학과 같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논리란 ‘논리적 형식이 주어진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때 논리적 형식은 대상과 함께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다. 다만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과 과학에 대해서 강조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점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지는 논리적 명료화를 통해 유의미한 명제들을 무의미한 문장들로부터 구별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적 명제들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논리적 명료화의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형식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며, 전기는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고, 후기는 『철학적 탐구』로 대표된다. 그의 철학의 전면은 언제나 언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언어를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의해서이다. 그는 철학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언어 논리가 오해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를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논리철학논고』에 따르면,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며, 명제는 더 이상 분석되어질 수 없는 요소명제로 이루어진다. 이들 명제는 세계의 그림이며, 세계는 원자적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실을 그리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며, 따라서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오면 비트겐슈타인은『논리철학논고』의 ‘의미그림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중대한 잘못을 비판하고 언어의 다양성, 언어와 행위와의 관계 등에 주목하고서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제 언어는 더 이상 실재의 그림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극히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나아가 언어가 이러한 도구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삶의 형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언어는 그 언어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형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기에 있어서 언어에 관한 새로운 통찰은 이러한 삶의 형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리하여 언어는 ‘실재를 그리는 것’으로 본 전기에 비해, 후기에는 ‘언어와 삶의 형식의 관계’로 그 축이 바뀐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철학의 전체 모습을 조망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삶의 형식’은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저를 형성하는 중심개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단어들의 의미가 그 단어들이 나타내는 대상이라는, 의미그림이론과 같은 언어관은 언어의 일부 기초적 기능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동들이 언어를 배우게 될 때 가르치는 교사는 언어의 원초적 형식을 빌려 가르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동들은 아직 아무 이름도 모르기 때문에 교사는 어떤 대상, 예를 들어 하나의 대상인 목판을 지시하면서 ‘목판’이라는 말을 발설한다. 그는 그것을 이 단어의 ‘예시적 교육’이라고 말한다. 예시적 교육은 설명이 아니라,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반복교육, 즉 훈련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훈련방법은 단어와 사물 간에 대응한다는 관계를 확립시키고, 아동들이 어떤 단어들을 들었을 때 그 대상의 그림이 그 단어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관은 의사를 전달하는 체계 중 한 체계만을 기술하였을 뿐 모든 체계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비록 문장들이 이름의 집합처럼 보이고, 이름이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어의 의미가 대상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단어들이 예시적 정의에 의해 이해된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무엇의 이름만을 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전기 비트겐슈타인에서는 세계와 언어, 이 두 가지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을 의미그림이론을 통해서 주장한 것에 반하여, 후기에는 언어와 인간, 좀 더 정확히는 언어와 삶의 형식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언어의 의미가 인간의 활동 속에서의 언어의 사용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언어놀이의 다양성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쓰여지지 않는 언어놀이는 사라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종류의 언어놀이들은 삶의 형식의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 유사성 개념을 통한 의미설명과 규칙을 따르는 행위의 예들을 통한 훈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에 의해서이다. 셋째,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정의의 일치와 판단의 일치가 요구된다. 그리고 언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있어야 하며, 이것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는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들의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으면 언어로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언어사용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다. 넷째, 삶의 형식에는 원초적 삶의 형식과 문화적 삶의 형식의 두 국면이 있으며, 원초적 삶의 형식이 인간의 생물학적 종의 특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모든 인간에 공통된 것이라면, 문화적 삶의 형식은 특정 시대와 사회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바탕을 둔 원초적 삶의 형식은 인간의 자연사라고 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성에 의해서 인간은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원초적 삶의 형식은 언어습득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다. 다섯째, 언어교육은 훈련에 의하여 그 언어공동체의 행위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원시적 반응이 있기 때문에 어떤 훈련에 일정하게 반응하고 따라서 언어적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적 반응을 포함하는 인간의 자연사는 언어의 존재근거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언어의 궁극적인 근거이며, 또한 그것은 더 이상 설명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하나의 언어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고, 동시에 그러한 언어적 행위는 삶의 형식에 제약받고 있다. 이러한 삶의 형식은 주어진 것으로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의도한 것은 언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삶의 형식과 관련시킴으로써 언어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언어가 없이는 인간의 삶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삶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의 언어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놀이가 성립하고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삶의 형식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언어가 인간의 삶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언어와 세계의 이원론을 벗어나 그것들이 원래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언어놀이는 언어와 그것이 얽혀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것이며, 언어에 얽혀있는 행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이 언어놀이에서 언어와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관심사는 과학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의 주요 역할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을 꾀하며, 그 과정에서설명의 단순화를 위해서 가설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철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설명을 꾀하거나 가설적인 것을 채용하지도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경험적 탐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철학은 무엇을 설명하거나 연역해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철학은 과학에서 탐구하는 모든 새로운 발견과 발명 이전에 가능한 것에 대한 학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이 다루는 경험적 탐구가 아니라 경험적 탐구를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철학적 탐구를 문법적 탐구라고 보았으며, 그러한 탐구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비트겐슈타인이 문법 또는 문법적 탐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 명확하게 문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파헤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에서 발전되어 나온 개념임은 틀림없어 보이므로 그 점에 주목하여 논리와 문법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고, 그로부터 각각의 개념이 철학과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논리 분석에 주된 관심을 두는 20세기의 분석철학은 크게 보면, 오류가 없는 완벽한 언어를 찾아보려는 ‘이상언어학파’와 일상 언어의 쓰임새를 면밀히 검토하는 ‘일상 언어학파’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각각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격이 다른 두 학파가 모두 한 사람에게서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언어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오류를 줄이려는 분석철학의 논의는 상당히 전문적인 논리학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라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언젠가 자신의 책은 철저하게 ‘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어찌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언어의 본성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분석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것은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지닌 한계였다.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드리고 주어진 삶에 겸손하게 순응하는 자세,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이 점이 아니었을까? 비트겐슈타인이 전문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일상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면, 현대 과학문명 사회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고 있는 논리적인 과학적 사고의 한계를 깨닫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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