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아이폰처럼 시대를 앞서갔던 고구려의 천리장성
요샌 스마트폰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불과 1년전만해도 데이터 요금때문에 자살했다는 청소년 기사를 본것만 같은데 이젠 단돈 5만원이면 무제한으로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고 길거리마다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무선랜이 간섭받아 도리어 수신율이 저하된다는 기사도 있고,
암튼 스마트폰에서는 한국의 내노라하는 휴대폰 제조업체를 비웃시라도하듯이 애플의 아이폰이 만리 장성보다 더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IT강국이라고 연신 떠들어대던 말들이 결국은 허세 가득한 남친의 거드름과 같은 꼴이 되었지요.
통신 시장을 독점해 오던 거대 공룡 3사는 늘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안주하거나 기본틀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모바일 산업에서 뒷걸음치게 된 것이지요.산업은 크게 발전하고 사람들은 똑똑해 졌지만 도리어 옛 선인들보다 지혜나 창의성에서는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던차에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의 효용성에 대한 글을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히 고구려의 천리 장성이 주는 어감보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위용에 더욱 감탄과 찬탄을 아끼지 않겠지만 슬금 슬금 ㅍ제가 풀어 놓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옛 선인들으 지혜와 창의성이 얼마나 휼륭했는지 미뤄 짐작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 그럼 642년 9월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지시로 천리장성 공사의 책임자로 떠나기 전의 상황부터 이야기를 풀어 갈까요?
연개 소문은 공사 책임자로 떠나기에 앞서 열병식을 열어 신료 100여명과 태왕 고건무를 시해함으로써 암울하던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는 왜 영류왕이 집권하던 25년간의 많은 시간중 천리장성 축조관으로 임명된 시점에서 혁명을 일으킨것일까,
고구려의 상징과도 같은 태왕을 죽이면서까지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얼핏보면 연개소문의 혁명은 현무문의 난을 일으킨 이세민과 닮은 꼴이며 현대사에서는 박정희와 닮은꼴이다. 상반된 평가 역시 비슷하다
영류왕은 내부 불안요소인 신흥 무장세력의 불만을 천리장성 축조로 돌리는데 성공한듯했다. 631년부터 646년가지 무려 16년이라는 세월간의 대공사였던 천리장성 축조에 문제점과 허와 실은 무엇이었을까?
신흥무장세력인 전쟁 옹호파는 전쟁을 통해 노비와 재물,토지를 획득하여 성장한 집단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수전쟁은 고구려 내지에서 벌어진 방어적인 전쟁이었기에 위와같은 소득은 전무했겠지만 무장들이었기에 복수전 성격의 전쟁을 내심 바래지 않았나싶다
그에 비해 평화를 원하는 보수 세력은 예전부터 노비와 토지를 가진 기득권층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노비의 군 차출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피해가 속출했으므로 전쟁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민생안정과 피해복구를 들어 전쟁을 회피하는 영류왕의 정책이 마냥 틀린것도 아니기에 25년간을 통치하는데 커다란 소요는 없었듯 하다
그러나 630년 당의 이세민이 북방의 강자 동돌궐을 격파시키며 힐리가한을 사로잡는 사건이 일어나자 고구려 지배층은 심한 충격을 받았을것이다.
이 사건은 고구려에게 있어 당나라를 견제할수 있는 국가(유목민족인 돌궐이나 거란은 고구려에겐 무척 중요한 동맹세력이었다 할수있다)가
더이상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임을 의미했다
즉, 영류왕은 초반기의 안정이란 단 꿈에 빠져 신흥 대국 당나라의 성장을 지켜보기만 함으로써 기존 강대국의 위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주변국의 이탈을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전파는 당의 팽창주의에 예민해졌을것이고 영류왕도 민감한 반응에 어느정도 수긍하면서도
평화를 바라는마음이 컸기에 천리장성 축조라는 대안을 내놓게 된것이다.
이 장성 축조가 전혀 쓸모 없는것이었다면 영류왕 사후 중지되었을것이나 그의 죽음이후 몇년
만에 공사가 마무리 된것을 보면 연개소문도 장성축조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은듯하고 무용지
물에 가까운 공사였다면 16년간 지속되기도 어려웠을것이다
위의 사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천리장성 지도
밑의 사진은 위와 틀린데 천리장성 시작점이 산해관으로
표기되어있다
산해관이면 만리장성 시작점이 아닌가
지도의 진실 여부를 떠나 우리민족의 역사 부실이
갖은 추측과 오해를 낳고 천리장성의 정확한 지점 하나
설명해주지 못하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강력한 힘으로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시황제는 북방유목민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장성의 주기능을 상실하고 국경을 경계하는 이상의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
했다
그것을 후대의 고구려는 몰랐을까?천리장성은 고려때의 천리장성과 같이 만리장성의 효용가
치밖에 없었다면 16년의 대공사치고는 전략적,전술적으로 무가치할 정도로 인력과 돈만 낭비
한 공사란 말인데 그렇다면 그공사를 주도한 영류왕이나 묵과한 정치세력은 요새말로는 청문
회 대상 1순위일것이다.
일단 천리장성이 당과의 전쟁에서는기록상으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전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단 말인데, 전쟁후에도 천리장성 축성과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는것은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장성의 역할이 분명히 컸다는 것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는 고수전쟁에서 요동방어선의 취약점을 보완해 당과의 일전을 대비했
던것인데 우리는 장성의 효과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천리 장성이 연결된 만리 장성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장성은 일반적 장성이 아닌 네트워크 요새이다!
일단 고구려의 방어선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될수 있다
1차 방어선은 요하이다<이곳은 고수전쟁에서도 수나라군을 한달이상 진격을 봉쇄함으로 고수
전쟁 승리의 첨병역할을 한곳이다.>
2차 방어선은 신성,요동성.안시성,건안성등 천산산맥을 넘을수 있는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3차방어선은 천산산맥이다. 천산산맥 곳곳에 고구려성들이 교통로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큰 성은 아니나 ,적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어벽이었다
이같은 3가지의 방어벽이 있기에 고수전쟁에서 수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할수 있었지만
완전한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고수전쟁때의 피해복구와 동시에 요동 방어력을 강화,보강하며
적이 천산산맥을 통과해 고구려 내지로 진격하지 못하게 하기위해 세 방어선을 보강하는것에
초점을 맞추었을것이다
즉, 천리장성은 세 방어선 가운데 어느 하나,또는 둘,그렇지 않으면 전부를 보강하기 위해 축조
한것으로 볼수있다
고구려가 천리 장성을 쌓은것은 천리나 되는 구간에 성을 쌓았다는 의미이지 반드시 그것이 연
결된 성을 의미한다고 볼수는 없다.
고려시대의 천리장성은 여진과의 경계의 의미, 즉 고려라는 문명세계와 여진족이라는
야인의 세계를 구분한다는 화이론에 입각해 축조했다 볼수있지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당나
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한 것이므로 지역구분의 의미가 강한 만리장성이나 고려의 천리장성
과는 성격이 다르다
만리장성이 방벽이라면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요새 네트워크라고 할수있다
방벽은 한 곳이 무너지면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지만, 요새 네트워크는 한 곳이 무너지더라도
쉽게 전략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때 연결된 장성을 축조하는것보다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의 주요한 성들
을 보강,축조하는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적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력을 높일수 있었다
그러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 역시 요동 방어망의 중요성을 인지했기에 천리장성의 축성을
마무리 지으려 한것이다
고구려가 당의 대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데 우리가 간과한 천리장성은 요새 네트워크의 기
능을 충실히 수행하므로써 연개소문의 대당전쟁에서 승리할수있는 숨은 밑거름 및 원동력이
되었다
미력하나마 고구려의 천리장성 에 대해 알아보았다
요새 운하다 뭐다 말들이 많고, 운하의 건설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고비용에 저효율이라는 문제,사후관리에 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하리라 본다
천리장성 역시 연개소문에 의해 효과적으로 관리 되어 당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효과를 보았지
만 그의 사후, 천리장성은 무용지물이 되었듯 운하의 건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관
리에 있다.그러나 당시 기술력에서 천리장성이 국방력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해도 현시점
에서 천리장성은 필요치않은 요소이다.대운하 역시 고대역사에서 노예를 동원하고 지역적 특
성에 운하가 건설된 방면 우리나라에서 꼭 대운하가 필요한지는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생각이
라 아니할수 없다.
찬성과 반대를 떠나 수십년을 관통하는 대역사에는 철저한 준비와 함께 백년 이상을 내다보는
천리안적인 시야가 중요할것이다
연개소문이나 고구려에 관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워낙 알려진 바에 비해 진실과 거
짓,소문등이 뒤섞여 있는 지라 당시의 그가 되어 보기도 하고 현재 나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
기도 하며 글을 써간다.
물론 이 글에 내 생각도 반영되지만 많은 것은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참조하고 있다
학자가 아닌바에야 진실을 가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지, 시대는 변해도 역사는 반복된다.
동북공정이 불과 십년전의 얘기같지만 그런점에선당의 이세민은 이미 고구려 역사를 지우고
왜곡한 선배이자 주범인셈이다
이미 중국은 언제라도 우리 역사를 말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국가이다. 연개소문에 관해 또 어
떤 글을 쓰게 될진 모르지만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지킬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 그런
밤이다
경극속의 연개소문
등에 메단것은 "고기"로 경극속에서
이민족을 표시하는것이다.
중국 역사속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이민족으로 표시하고 있음에도
고구려는 저들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동북공정의 허와실이 중국역사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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