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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뮤지엄

잊혀진 역사의 부스러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이다

by 마음heart 2011.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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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에서 부패한 권력의 상징으로 추락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그로부터 63년이 흘렀다.

한 국가의 탄생과 멸망의 주기가 150년에서 200년안팍이고보면 이제 갓 출생한 신생국가인 것이다.

하지만 푸릇 푸릇하고 싱싱하기만 해야할 대한민국의 앞길은 험난하며 과거에는 더욱 험난한 길을 걸었

었다. 국가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와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으나 초기

대한민국에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북으로는 북한정권이, 남한에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한 내부 요소가 산적해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이 국가로써 생존하기 위해선 미국과도 같은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대한민국은 태생적으로 빌어먹는 일부터 해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성혁명의 성공이후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해야했다.

대한민국 역시 살아남기 위해 절실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유엔의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건국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만 온전하고 제대로된 국가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이 처해 있던 국내외 상황은 유엔의 승인을 낙관 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 축으로 남북협상파가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5․10선거 무효화투쟁을 전개하며 유엔총회가 개최되는 파리에 통촉의 대표단을 파견하여 유엔에 대해

대한민국 승인을 거부하도록 촉구할 계획을 세웠다.

국제적으로는 유엔한국위원단에 참여한 8개국 가운데 3개국(호주, 캐나다, 인도)의 대표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호주․캐나다․인도의 영향을 받아 영국도 대한민국 승인에 반대태도를 취할 공산이 있고,

자칫하면 프랑스와 중동지역 국가들 및 북유럽지역 국가들도 승인반대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다 여겼다.

또한 영원한 우방이라 믿는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승인을 유엔의 승인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의 눈에는 미국이 전력투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비추었다.

이승만 박사는 유엔의 승인 획득 외교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세방면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제1방면은 미국인 친구들을 동원하여 미국무성을 공략,미국으로 하여금 유엔의 승인을 유도하는 활동

이었다.

제2방면은 장면을 유엔대표단을 파리에 파견,각국의 유엔대표들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하는 활동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이 장면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고, 그가 카톨릭 신도임으로 카톨릭교의 도움을

받으려는 계산이었다)

제3방면은 조병옥을 대통령 특사로 임명,주요 국가를 순방하여 유엔의 건국 승인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부탁하는 활동이었다.        

 

아무튼 이런 다각적 활동 덕에 이승만 박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미국및 여러 국가들이 호의적인 반응및

활동을 보여줬다.

그러나 문제는 대한민국 내부에서 발생했다.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사회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존속능력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국회에서는 반정부 의원들의 미군철수결의안을 둘러싸고

정치적 소란이 끊임없이 일어 그때까지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함을 드러냈으며 백범 김구는

미․소련군의 철수 후 재선거를 통해 한반도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성명을 발표하고 내용이 담긴 서한을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내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 승인 안은 찬성 40 대 반대 6의 압도적 다수로 통과

되며 유엔의 승인을 얻게 된다.

이제 전세계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나 대한민국은

국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국민을 먹이고 국가를 지키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힘도,여력도 없는 빈 껍떼기

국가였다.

 

 

 

당시 남한과 북한 모두 경제적으로 왜곡된 산업구조속에 휘청거리고 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북한의 공산화에 식겁하여 월남하는 주민이 늘어나자 남한에는 인구가 급증했다.

주택과 식량,일자리는 부족한데 인구는 넘쳐났다. 인구의 절반이상이 실업자였고, 노숙자였으며,

굶주리고 있었다.

당시 남한의 1인당 소득은 약 35달러 수준이었는데 특히 지역적으로 심각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프라에 적정한 인구는 50만 명이었는데 실제로는 1백5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에겐 국민을 먹여 살리고 실업난을 해소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지키는 일,

즉 안보였다.

북한은 국토완정(남한까지 인민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뜻)의 기치 아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소련에게 수혈받은 군대로 북한에 대규모 군사력을 양성하였으며 신형무기로 무장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그들로부터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북한과는 사정이 달랐다.

극복할 수 없는 경제난과 안보의 문제를 해소해 줄 수 있는 국가는 미국뿐이었지만 미국은 원조제공에

소극적이었다. 경제원조 제공에도 인색했지만, 군사원조 제공에는 더욱 인색한 태도를 취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으로부터 미군 병력이 보유했던 군사장비들을 양도받아 그 힘으로 한국군의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여겼다. 그러나 미국은 혹 한국에 무기를 양도하여 한국군이 강력해지면 통일을

위해 북침을 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군에 철저히 방어용 무기만을 양도했으며 병사들의 기본무기인

소총마저도 북한군의 소총과 대등한 성능의 것으로 교체하는 일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미국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무기제공을 호소했다.

미국의 의도를 간파한 후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필요한 무기만은 효과적인 무기를 달라고 거듭 요청

하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탱크, 전투기 등 효율적인 무기들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탱크는 한국지형에 맞지 않다’,

 

‘일본에 있는 미국 비행기들이 쏜살같이 날아올 것이므로 한국에는 전투기가 필요 없다’

 

는 등의 구실을 내걸며 무기들을 제공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조병옥이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다시 무기 문제에 대해 협상하였으며 미국은 결국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고 1억3천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군사원조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에 무기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인 자세를 지속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미국은 한국에 애치슨라인을 선물한다.

미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한 연설에서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열도-일본-유구-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선(애치슨라인)이라고 발표했다.

이 애치슨라인에는 한국이 빠져 있으나 실제로는 애치슨라인에 한국이 빠져 있다고 해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애치슨라인은 그 안에 들어있는 국가에 대한 침략은 미국이 단독으로라도

방어에 나선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며, 애치슨라인 밖에 위치한 국가에 대한 침략은 유엔의 틀 속에서

미국이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애치슨라인이 풍기는 미국의 한국포기 인상은

한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온 북한의 김일성을 고무시켰다.

 

 

미국이 이토록 한반도와 대한민국 수호에 적극적이지 않던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미국 고위관리들 사이에서는

 

한반도는 소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나 미국에는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미국의 국가이익에 중요한 지역이 아닌 한국에서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조만간 공산화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미국 식자층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즉, 미국의 대한민국 건국을 지원한 것은 임시방편이며 미국은 대한민국을 소련에 포기할 것이라는

보도가 미국 각 주요 언론매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결국 소극적인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국 방어해법을 찾으려 노력했다.그러한 노력이

태평양 동맹결성 추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미국의 소극적 자세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남침을 감행했으며 한국군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극적이던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대한민국은 국토의 90%를 북한군에게 상실한채로 죽음 직전에서 다시 회생했다.

전선이 대한민국에게 유리해지자 이승만 박사는 남북통일을 할 수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으나 미국은

6․25전쟁을 조속히 휴전시키려는 데만 관심있었다.

 

미국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은 한국에 장기간 얽매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속히 휴전을

성사시키고 싶어 했고 남북통일을 원하는 이승만 박사가 성가시기 시작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이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한국을 배반한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미국이 한국의통일열망을 외면하고 공산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미국이 또다시 한국을 배반하는

것이라며 도덕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이승만의 외침을 귓전으로 흘려 들으며 한국전쟁 정(휴)전협정을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해 10월 1일에 체결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당초 이 박사가 요구한 사항을 100퍼센트 반영하진 않았지만 미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휴전 후 한국군은 미국의 대규모 군사원조를 받아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으며, 미군도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 오늘날까지 주둔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을 상대한 외교를 보면,

떼쓰기 전술 혹은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하여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확보했다.

미국은 1950년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 박사를 제거하는 쿠데타계획을 세웠다가 그만두곤 했다. 

그만큼 이승만 박사는 노련하고 능숙한 외교를 미국을 상대로 펼쳤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빼앗긴 국권을 겨우 찾았으나 북한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찾아온 한반도,

비록 국내 정치에서는 독재로 인해 하야 하는등 말년의 모습이 좋지 않았으나 풀한포기 조차 모두 착취

당한 일제시대이후의 한반도에 초대 대통령이 된 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과 줕타기 외교는 후세에

다시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독재까지 미화해선 안되지만)

자주국방을 외치며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한 박정희 이전에 황무지와도 같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공산화의

마수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초창기의 업적도 인정하고 말년의 치졸하다못해 시대를 역행하는 정치를 한

과오 역시 과감없이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

그것이 잘못한 것과 잘한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역사이며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는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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