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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뮤지엄

종군위안부,우리들이 망각한 세월속에 잊혀져만 가는 우리 어머니,할머니들

by 마음heart 201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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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야..

나는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니가 나의 썩고 있는 육신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짱한 입술로
맹랑한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난 그래도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단다.

한때..나도 너만큼이나 뽀얀 속살로 벌판을 누비며,
홍조 띈 얼굴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재잘거리던
너만큼이나 철없던 계집아이 시절이 있었단다.
부자집은 아니어도 건장한 청년 만나서
초가 삼간에 살아도 이쁜 아이 낳아 옥수수 심고
고추심어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
조금 지나니 고통스럽더라..
그래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여길 즈음..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악몽이라는 걸..니가 지금 느끼느냐?
나는..수십년을 그렇게 지옥속에서 살았단다.
나는..나를 놓아 버린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여자 였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너는..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땅이 없어.
그들이 다 파서 먹었으니..
수십명의 개 떼들에게 내 몸 하나 먹힌건 그래도 별거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향이라고 돌아와 발을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놓고
개 떼들의 습격이 마치 내 의지였던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하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 나의 숨통을 더 조여왔던 것 같다.


내가 너를 미워한다면..그건 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가 여자이기때문이다.
니가 나를 모른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그저 너를 대신하여 개 떼들에게 끌려간 것일 뿐이다.
너덜 너덜한 육신을 안고서 돌아와서..
온전한 햇볕 한번 못보고 살아온 내가
지금와서 너에게 사진의 모델이나 되라고 하니까..
내 살아온 것이 오늘 이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이구나.


나를 동정하지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덜 너덜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에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트릴 그런 삶은 아니었다.


애야..

어떤 때에는 니가 무슨 죄가 있을까..싶었다.
동물원 구경 오는 심정 이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를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는 내 욕심이 어리석은 것이라 여겼다.
너처럼 부푼 젖 가슴을 나도 가졌었단다.
너처럼 고운 등을 나도 가졌었단다.
개 한마리 세워놓고, 니가 얼굴에 숯을 바른다고 정녕 니가 내가 될 수 있겠느냐?
니가 그 고운 등을 들이대고, 풀어 헤친 저고리 고름 사이로
하얀 젖 가슴을 내민 것은,
사치였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살아도 조국속에 묻힐 것이다.
아마도..
내 눈감을 그날까지 나는 그저 개 떼들의 습격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온
병들고 썩고 있는 늙은 할머니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나 인것 처럼 하지마라.
정녕..너는 내가 아니다.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애야..
들끓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마라.
그들이..나였다.
왜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냐고 원망 하지마라.
수십년을 소외된 채 사회와 단절된 나도 살아온 땅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랬던 적이 있었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었느냐..
정녕 니가 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해다오.
내 젊은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평안하게 잠들도록..

그리고..
내 힘없는 조국을 그래도 안고 갈 수 있도록.


 

 

아주 멀지 않은 시절에 우리 나라에선 연예인 누드 신드롬이 한창 뜨겁던 때가 있었습니다.그래요.아마 그때즈음 우후죽순 일명 B급 연예인 중에서  한 톱스타가 위안부를 테마로 누드집을 발간하려다 여론과 언론,시민단체에 뭇매를 맞고 그 톱스타는 직접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가 고개를 조아리고 눈물을 흠치며 무릅을 꿇고서야 겨우  일단락이 되었었죠.지금에와서 생각하면 아찔하고 아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감각적이고 향락에만 심취해 역사의 아픔조차 돈벌이로 팔고 사고 했다면 정녕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었을테니까요주제 넘게도 오늘은  우리 나라의 풀리지 않은 역사의 고리중 한가지를 이야기 하려 합니다.짐작하다시피 그 역사의 고리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잇을까요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이 좀 더 관심을 쏟으며 바로 잡아 나가야 할,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는 생각입니다.너무나 많이 풀리지 않은 그 역사의 고리중에 오늘은 1992년부터 시작되어서 올해로 18년째 진행되고 있는 수요집회에 대해 이야기헤 보려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오랫동안 단일한 주제로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라도 생각됩니다. 수요집회가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는 것, 우리 나라 정부의 무능력과무관심, 더불어  매우 서글픈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끈질긴 수요집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늘 자신들의 죄과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정부와 일본국회가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에 책임있게 나서길 바라지만 어쩌면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이 듭니다그렇다면 우리가 많이 접하고 들은 위안부 할머니들 (속칭 정신대라 부르지요.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표현이고 사실 위안부라는 표현조차 쓰기 싫었지만 호칭상 어쩔순 없었다는 점 양해바랄게요) 종군 위안부는 일제의,일제에 의한, 일제만을 위하여 전쟁에 참가한 군인에 의해 성착취를 당한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비참하고 슬픈 반백년전의 교과서속의 역사가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 시대의  보고서이자 외면 할 수도 외면해서도 안 될 현실이란 것입니다.

정신대는 일제 강점기 말에는 기생이나 자원자에 한하던 것이 군인들에게 성병이 감염되는 사례가 속출하자 군인들을 보호하려는 요량으로 직업여성을 배제하고 처녀 위주로 모집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지자 강제 징발하기 시작하였고 그 대상이 특히 조선, 우리나라 여성에게 집중되었으며 군위안부들은 여자로서,혹은 인간으로는 감당키 힘든 치욕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주로 간호보조/군부대 잡역/ 여자 특수군속이라는 명목으로 동원되어 그 대부분이 일본군 주둔 부대에 배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지만 일본은 철저히 자신들과는 무관한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다 1992년에 발견된 정신대의 고용조건.동원권자.의무규정등을 명시한 일왕 칙령 제519호의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하면한반도내에서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정신대(군 위안부)를 징발한 증거가 포착되었습니다여기에는 약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공출되었으며 관리 감독은 전적으로 일본군이 지휘했으며  패전후에는 전선에 그대로 방치하거나 살해했을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오랜 시간,침묵과 어둠의 시간을 깨고 용기있는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치기 시작한 우리 불행한 과거사의 아픔이자 눈물인 어머니들이 보상받을수 없는 세월에 대한 단죄로 일본 정부를 향해 투쟁을 시작하였지만 일부 의식있는 식자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남의 일보듯 외면하고 회피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통탄할뿐입니다.

병자호란직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공녀들이 대거 돌아왔지만 환향녀라는 오명속에 스스로 죽어간것을 역사를 배우며 당시의 시대가 무지몽매하고 미개하였다 말하곤 하지만 현재도 국가와 지아비,부모의 무능력으로 전쟁 한복판에서 일본군들의 성착취의 노리개가 된 우리의 어머니들을 누구도 안아주지못한 우리 먼저 무릎꿇고 사죄해야 마땅한것이 아닐까 

그러다 얼마전  근로정신대에 끌려간 지 66년 만, 해방 65년 만, 손해배상 소송 11년 만에 미쓰비시 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작지만 커다란 환희의 만세 삼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에 '협의의 장' 마련에 동의한다는 뜻을 알리는 공문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는 협의가 계속되는 동안 한·일 양국에서 정신대 문제와 관련해 미쓰비시 관련 회사를 대상으로 한 집회와 서명활동, 불매운동을 삼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민모임은 미쓰비시 중공업의 결단을 환영하면서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견해를 밝혔지요.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가 젊음을 바친 뒤 66년 만에야 협상의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다.미쓰비시 중공업은 1944년 5월 전남 출신 150여명, 충남 출신 150여명 등 300여명의 소녀를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징용.이들은 같은해 12월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목포, 나주, 광주출신 동료 6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은 뒤 해방을 맞아 1945년 10월 맨몸으로 귀국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들을 기억한 나고야의 일부 양심적인 시민들이 1988년 12월 나고야의 일부 시민들은 미쓰비시 공장 안에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를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10여년이 또 흐른 뒤 양금덕(82) 할머니 등 8명은 1999년 3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지만 2005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11월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기각 판결을 받았고 이에 반발해 시민모임을 결성해 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2만8천여명의 서명을 미쓰비시중공업에 전달했지만같은해 9월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은 원고 8명에 대한 후생연금 가입사실을 확인하고 3개월 뒤 연금 탈퇴수당으로 라면 1개 값에 불과한 99엔을 지급하기로 해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으며 보상조차 하지 않는 몰염치한 일본이 바로 우리 이웃 나라인것입니다.자신들의 죄와 양심을 단돈 99엔에 팔아버린 일본,독일의 예를 들지 않아도, 그 어떤 나라들을 예로 삼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우리는 슬픈 역사 위에 너무나 후안무치한 나라를 이웃으로 두고 있다는 생각 - 저 만의 것일까요..

 

 


자료 사진을 구하던 중 몇몇 잔인한 사진은 삭제 하기도 했는데 위 몇몇 사진은 난징 대학살 사진 으로 판명 되기도 했지만 우리 어머니들이 당했을 고통과 절망결코 난징 대학살보다 못할리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올립니다. 1938년부터 1942년사이 태평양 전쟁의 말기에 끌려가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위안부란 명목으로 죽어가고살아선 죄인보다 못한 삶으로 햇빛조차 보지 못한채 이제 그 마지막 생존의 한명까지 세월속에 사라져가는 이때, 정부는 정신차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국민이라는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며 지킬것일까요,대한 민국이라는 이름하에, 조국이라는 흠모하고 사랑하는 이 나라가 그 어떤 후안무치의 주변국보다 도리가 서고 법치가 서며 인륜과 평화가 바로하는 자랑스러운 조국이길 바라며, 진심으로 우리의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던,그리고 이제는 살아가야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방치하고 외면 했던 우리의 어머니들께 피 눈물을 삼키며 용서를 구합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망각이라는 몹쓸 병에 걸려 지난 일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시대를 논하는 우리의

교만과착각,제 뱃속 부르면 전부인 줄 아는 집단 주의속에서 진정한 우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섞은 후손들을 용서해주셔요

일본의 저 몰염치보다 더 무섭고 무서운 것이 바로 우리들의 무관심과 진저리쳐지는 편견임을..

어머니, 우리 어머니..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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