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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천장에서 발견된 32구의 미스테리한 시체들_박순자의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by 마음heart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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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천장에서 발견된 32구의 미스터리 한 시체들/

박순자의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_박순자와 오대양의 창립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은 1987년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주)오대양 공장에서 일어난 집단 자살 사건으로 오대양의 교주 박순자는 1974년 횡격막에 병이 생겨 고통받다가 병이 회복되었다고 겪었다고 주장한 뒤 신학교를 다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했고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위 (권신찬·유병언파)구원파에 출석하기도 합니다.박순자는 구원파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탈하여 1984년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겸 회사인 오대양을 직접 만들었는데 오대양이라는 교명은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는데서 나왔다고 합니다.박순자는 1984년에 민속공예품 제조사 오대양을 만든 뒤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그후 민속 공예품 제조로 대통령상은 물론 88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로 지정이 되면서 회사의 명성은 커져갔고 이후 대전과 용인 등의 공장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제조 사업 외에도 유치원과 양로원과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 사업을 하였으며 최신시설을 꾸며 고아들을 잘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며 당시 대전에선 오대양의 평판이 매우 좋았으며 박순자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 평판이 좋았다고 합니다.하지만 박순자의 실체는 신도들의 자녀를 고아로 위장하고 아이들에게 "너희는 모두 고아이며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라고 세뇌했으며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소리도 공공연히 했다고 합니다.신도 및 그 자녀들은 모두 집단으로 공동생활하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도들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매월 '반성의 시간'을 갖았으며 이 때 신도들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토하고, 규율을 어겼음이 드러나면 집단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이후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이미 사건 발생 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된 뒤 암매장 당했던 것까지 밝혀지게 됩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_박순자의 실체

박순자는 용인에 공장을 세우고 공예품을 만들었지만 모두 사채빚이었으며 매출은 사실상 없었으며 직원들을 죄다 용인의 공장에서 합숙을 시켰다고 합니다.그리고 학사원의 원생들이 대외적으로는 고아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직원들의 자녀들이었으며 양로원 역시 대외적으로는 독거노인들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직원들의 부모였습니다. 박순자는 이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어버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십계명 운운하며 자식들로 하여금 부모를 구타하도록 시켰는데 도리어 신자들과 자녀들은 박순자의 이런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자식에게 매를 맞는 부모들은 이런 행위를 하나님의 은총이라며 매를 맞으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이런 구타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해도 박순자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므로 은혜롭게 죽었다고 선전했는데 이런 박순자의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대양과 박순자를 의심하지 않은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는데 ①박순자는 사패를 빌려쓰면서 매우 높은 이자를 단 한 번도 연체하지 않고 꼬박꼬박 갚아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신도들에게서 걷은 헌금으로 갚은 것이기도 합니다.②박순자는 당시 전두환의 표창 등 대통령상을 여러개 수상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통령상에 자치단체장상 등을 여럿 받은 박순자는 논외의 인물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③또한 박순자는 지역 유지 겸 자선사업가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박순자의 두 얼굴을 당시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_박순자의 사업실패

1986년 박순자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당시로선 거액인 7억 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사기를 당했고 당연하게도 사업은 실패하고 맙니다.박순자는 이 손실을 매꾸기 위해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명하고,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들에게도 돈을 빌려서 박순자에게 바치고 맙니다. 그렇게 박순자가 신도들을 이용해 끌어모은 사채는 무려 170억 원에 달했는데 갚지는 않고 사채만 끌어 쓰니 당연히 채무자들에게 독촉과 사채이자가 쌓여갔습니다. 1987년 박순자에게 5억 원을 빌려준 이상배라는 사람이 빌려준 돈을 갚으라 독촉하려고 부인과 함께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당하고 채무 포기각서까지 강요받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으며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들의 만행에 참다 못한 다른 채권자들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 경찰은 사기 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했고 오대양과 박순자는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이미 엄청난 사채 이자를 더는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박순자는 전 신도들과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80명을 오대양 용인 공장으로 모이라 지시를 내리는데 그중 자신과 자녀들, 가장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모은 신도들을 합해 총 32명 만을 골라 식당 천장에 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장 창고 내 구석 공간에 4일 동안 숨겨버립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 씨는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서 죽어있는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으며 그 후 박순자의 남편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에 신고해 오대양 집단 변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과 담당 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의 상황은 참혹하다 못해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천장 위에 있던 빈 공간에는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을 하고 있던 시신들이 각각 이불을 쌓아놓은 것처럼 각각 19명, 12명씩 쌓여있었고 그 먼 곳에는 공장장이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법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현장 정리 도중 사망자들이 썼다고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라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으며 이 메모와 부검을 통해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 전날과 발견 당일로 추정되었습니다. 메모 내용과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말 못 할 상황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음독하고 죽은 것이 아닌가 추측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으며 시신들 모두 경부 압박으로 인한 교살이 사망 원인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 교살로 인한 저항 흔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판명났습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은 결국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시키고, 뒤이어 이경수가 김길환과 여자들을 교살시킨 뒤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했으며 이경수가 교살된 시신을 두더미로 나눠서 쌓아놓은 뒤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자의적인 타살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종교에 미쳤다고 하지만 3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자살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었는데 당시 수사를 한 경찰들은 사건이 벌어진 현장 천장 온도가 무려 70도까지 올라갔으며 게다가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천장이다 보니 4박 5일간의 도피기간 동안 이미 신도들은 탈수 현상으로 거의 가사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제대로 저항할 힘도 없었을 것이며 시체들 중 교주 박순자 시체의 부패가 심했기에 박순자가 먼저 죽었으며 사이비 신도들 특성상 교주를 따라가고자 했던 마음이 컸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 열성 신도였던 32명 역시 빚이 어마어마했으며 설사 살아남아도 평생 빚쟁이로 사는 암울한 상황인지라 이미 살 의지도 없었을 것으로 결국 믿고 따른 교주의 죽음과 빚쟁이로서 살아남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포자기 심정이 집단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Suicide case in five oceans.1987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_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사망자는 남자 4명, 여자 28명 총합 32명이었으며 자살 주동자인 박순자는 당시 48세, 박순자의 장남 이영호는 24살, 박순자의 차남 이재호는 21살, 박순자의 딸 이경진은 당시 19살이었으며 오대영의 간부이자 나머지 일반 신도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45세의 이경수와 39세의 김길환 등이 사건의 배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이후 꼬리에 고리를 무는 의혹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널리 퍼졌는데 당시 세간에는 오대양에서 죽은 사람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자살을 강요받았고, 심지어 타인의 손으로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당시 국회의원 박찬종이 1991년 7월 19일 기자회견을 이용해 박순자가 한때 몸 담았던 구원파와 그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가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구원파가 사건에 개입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 사람들은 박순자가 실제로는 구원파를 이탈하지 않았고, 모종의 이유 때문에 구원파를 이탈한 척하며 오대양을 차렸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순자는 구원파의 대전 지역 자금조달 책임자였고, 오대양은 외부의 돈을 끌어 모으려는 구원파의 위장 계열사로 구원파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의 자금을 마련하고자 박순자가 오대양을 차리고 신도들에게 거액의 사채를 끌어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대양이 세간에서 주목받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구원파나 모 회사가 박순자와 다른 31명을 살해했다는 것이 당시 세간에 떠던 타살 의혹의 골자였는데 실제로 오대양과 구원파 계열 사업체 간 자금 거래가 있었다는 내역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습니다.(실제로 박순자가 오대양 설립 이전에 물품 대금을 구원파 교인에게 사업관계로 송금한 사실은 있지만 이는 정상적인 거래일뿐, 오대양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 또한 거액의 오대양 사채가 어디로 흘러갔는가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대해 수사한 결과, 어디론가 유입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오대양이 고율의 사채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고 합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은 이후로도 1987년과 1988년, 그리고 1991년 정권(전두환, 노태우)이 바뀔 때마다 세 차례나 재조사받았지만 외부 세력과 관련이 없는 집단 자살로 동일하게 결론이 났고, 구원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으로 종결됩니다. 후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의 각종 의혹들을 취재하면서 언론의 지나친 보도 경쟁과 일부 정치인의 정치적 이용 등이 어우러진 사례라고 결론짓기도 합니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 박순자가 이끌었던 오대양 집단자살사건은 가장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종교가 인간의 정신과 삶을 어떻게 유린하고 지배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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