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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13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2대 중천대제기_애첩 관나부인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위나라 군대를 물리쳐 아버지 동천왕의 복수를 하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2대 중천대제기 애첩 관나부인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위나라 군대를 물리쳐 아버지 동천왕의 복수를 하다 중천대제의 이름은 연불인데 동천대제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림전 후로 태보 명림식부의 딸이다. 갑진년(AD224) 2월에 산속 궁궐의 마을에 불이 번지는 태몽을 꾼 후에 중천대제를 낳은 것이다. 차분하고 의지가 강하여 지략이 있었다. 무리들을 잘 다스렸었다. 그런데 관구검이 침략한 후에 동천대제가 서안평으로 급하게 진공하였음을 후회하면서 임금께 "魏와는 싸우지 말고 잘 살펴서 신라와 백제를 복속하라"고 말하였었다. 군사를 씀에 신중하고 다만 전렵과 황색하기를 삶에 다 바쳤다. 동천대제를 효성스레 섬기고 그 뜻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사람.. 2024. 3. 20.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1대 동양대제기_돼지난생설화의 주인공이자 공손씨를 멸하고 조조의 위나라에 환도성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1대 동양대제기 돼지난생설화의 주인공이자 공손씨를 멸하고 조조의 위나라에 환도성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다 동양대제의 원래 부르던 이름은 동천대왕이었다.이름은 위궁인데 또는 하위거라고도 한다. 어릴때에는 교체라고도 불렀었다. 어머니는 향부 소후인 주통촌 주인 연옹의 딸이었다. 우후가 성품을 시험하려 아끼던 말의 갈기를 잘랐는데 동양대제는 이를 보고 "말이 갈기가 없어 심히 가련하다"라고 하였다. 모두에게 관해하고 인자했다. 원년은 정미년(AD227)이다. 여름 5월 7일 밤에 산상대제가 죽었다. 2년은 무신년(228)이다. 봄 2월에 임금과 황후와 주통후와 우술비가 졸본으로 가서 동명사당을 찾았다. 3월에 대각궁으로 와서 하례를 받았다. 3.. 2024. 3. 19.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_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 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산상대제의 이름은 연우이다. 혹은 위거라고도 한다. 신대제의 서자이고 어머니는 주태후인데 황룡과 몸을 교합하였다가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서 바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우후가 산상대제를 좋아해 남몰래 상통하고 고국천제가 죽으나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산상대제를 궁중에서 맞아드리고 가짜 조서를 세워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생인 발기는 연우의 적형이므로 제위에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기에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두고 싸웠다. ▣第十世紀 제10세기 帝, 諱, 亦曰, 之別子也. 母, 太后, 夢黃龍纒其身而交之. 奇其夢, 而當夕.. 2024. 1. 26.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9대 고국천제기_고구려 최초의 국상 을파소의 중용과 진대법 실시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9대 고국천제기 고구려 최초의 국상 을파소의 중용과 진대법 실시 고국천제의 이름은 남무이다. 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 신대제의 둘째아들인데 어머니는 목태후인 목도루의 딸 수례이다. 을미년(AD155) 4월에 황룡이 몸을 얽은 꿈을 꾼 후에 아들을 낳았다. 키가 9척이고 늠름한 외모에 가마솥을 들을만큼 힘이 셌다. 정치에 있어서 아량과 엄격함에 중용을 알았다. 임금의 형은 현태자인데 선하지만 용감하지 못하여 신대제가 고국천제를 후사로 삼은 것이다. 이제 형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나에 있었다. 현태자는 "예로부터 현명한 이가 제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고는 해산에서 선을 즐기러 갔기에 서도의 황단(난대)에서 즉위하였다. 第九世 故國川.. 2024. 1. 25.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_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 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신대제의 이름은 백고인데 태조대제의 별자이다. 어머니는 상온의 딸 천화인 상태후이다. 의표가 영특하여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워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제가 무도하자 백성과 신하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꺼렸다. 화를 당할까봐 백고도 맥부에 사자로 갔다가 산속에 피했었다. 이때 차대가 백고를 의심해서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의 자식인가?"라고 묻자 상후가 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차대가 화를 내어 백고가 태어났을때 그대는 상황 태조의 총애를 받던 후였는데 어찌 백고가 仙제의 자식이 될수있냐고 하였다. 그래서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던 백고는 위급해졌고 상후는 명림답부에.. 2024. 1. 2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폐주 차대제기_한국사 최초의 폭군,명림답부에 의해 실각하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폐주 차대제기 한국사 최초의 폭군,명림답부에 의해 실각하다 차대제의 이름은 수성인데 태조의 동생이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사를 장악하여 공이 많았다. 그러나 음란하고 포악하여 술을 좋아했다.태조를 위협하여 제위를 받아냈다. 병술년(AD146) 12월에 태조가 명령하여 정치를 맡았다. 신라와 압독에서 전쟁하였다. 정해년(AD147)년 정월에 송씨와 흘씨와 우씨와 양씨 등의 여자를 5방선후로 삼고 그들이 있는 궁궐에 새와 꽃과 옥과 채단으로 치장하여 함께 즐기는 무리들의 자정장소로 만들었다. 도루를 좌보로 삼았다. 상후가 록을 낳았다. 신라가 이때에 장수를 가려 뽑았다. ▶廢主 次大帝>紀 폐주 차대제기 帝, 名, 之胞弟也. 勇而有威, 秉軍立功.. 2024. 1. 23.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7대 태조황제기_고구려의 새 역사를 열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7대 태조황제기 고구려의 새 역사를 열다 태조황제는 이름이 궁이다. 또는 어수라고도한다. 신명선제의 큰아들이고 어머니는 부여씨인 호화태후인데 동부여의 태사인 왕문의 딸이다. 임금께서는 태어날때부터 눈을 뜨시고 보실수 있으셨다. 신통한 힘으로 요동을 쳐서 큰 공을 세우셨다. 이제 제위에 오르시니 나이가 마흔다섯이었다. 아량이 넓고 어질고 효도를 하며 우애가 두터웠다. 타인을 존경하였다. 부황이 정사에 별 뜻이 없어 모친에게 물었기에, 태후가 정사를 처결하였고, 태보를 따로 두지 않았었다.원년은 임자년(AD112)이다. 6월에 先帝을 태상황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호화궁황태후로 추존하였다. 마락을 좌보로 삼고 송두지를 우보로 삼았다. 신명이라는 연.. 2023. 11. 9.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6대 신명선제_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6대 신명선제 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다 신명선제의 이름은 재사인데 혹은 록신이라고도 한다. 대무신제의 별자 즉 서자이다. 어머니는 갈사태후라고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해소인데 유화부인이 금와에게서 난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어진 것을 좋아하며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다. 또한 병사를 이용하는데 능하다. 언변이 좋고 항상 아는 것도 모르는듯하였다. 동복형인 호동이 비명에 죽어 슬퍼하였다. 민중제가 죽으매 나랏사람들이 재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지만 거절하며 말하기를 "적자가 있고 서자의 마땅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났다. 모본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어 선왕(仙王)으로 봉하였다. 부여를 평정함에 .. 2023. 11. 8.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5대 모본제기_고구려 최초의 폭군,신하에게 시해되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5대 모본제기 고구려 최초의 폭군,신하에게 시해되다! 모본제의 이름은 해우이고 대무신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오태후로 오이의 아들 루의 딸이다. 용모가 아름답고 말타고 활쏘는데 아주 능하였다. 허튼소리와 비위를 잘맞추고 옛 무제가 그를 귀여워하여 정윤[동궁이 될 수 있는 친자식]으로 삼았는데 이윽고 뜻 하던 것을 얻었으므로 후궁들과 어지러이 놀아났으며 성품은 아주 잔인하였다. 무제는 죽음을 앞두고, 태갑의 옛일太甲故事을 민중에게 시키면서, 해우가 개관천선하기를 기다렸다가 해우에게 물려주라고 하였다. 오태후에게도 명하길 민중을 받들면서 그 일을 이루라고 하였다. 아직 개과의 기운도 보이지 않았는데, 민중은 해우가 개과한 것으로 알고 양위하려고 .. 2023. 11. 7.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4대 민중제기_짧은 재위기간으로 명을 다하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4대 민중제기 짧은 재위기간으로 명을 다하다 帝, 諱, 之季子也. 母, 太后. 性, 寬厚好賢. 之伐時, 守都得宜故信其能, 而臨崩, 寄以大事. 群臣, 以為不肖, 而立之. 卽位於. 以為太子, 戒之以善. 민중제의 휘는 해읍주이며, 광명제의 막내아들이고, 모친은 송태후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현명한 이를 좋아했다. 대무가 부여를 정벌할 때, 민중은 도읍을 {잘} 지켜내었기에 마땅히 그 능력을 인정받았었고, 선제가 임종할 때 큰 일{나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 군신들도, 모본이 불초한 까닭에, 해읍주{민중}를 보위에 세웠다.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해우{}를 태자로 세우고, 선{善}한 방도로 그를 타일렀다. ◎ 元年甲子, 十一月, 大赦. 群臣.. 2023. 11. 6.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3대 대무신제기_부여를 복속하고 정복국가 고구려로 거듭나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3대 대무신제기 부여를 복속하고 정복국가 고구려로 거듭나다 ○ 대무 원년{단기2361년/AD28}무자, 11월 연호를 대무로 고쳤다. 다물후인 송의를 태보 겸 주민대가로 삼고, 모친인 송후를 태후로 올렸으며, 비{妃}였던 진 공주를 황후로 올렸다. 용산{동명릉}에 가서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이해에 나이 25세였다. ◎ 元年戊子, 十一月, 改元. 以為太輔․主民, 以母后為太后, 以妃公主為皇后. 如, 告卽位. 時, 年二十五. ○ 대무 2년{단기2362년/AD29}기축, 정월 황후가 아들 대해를 낳았기에, 천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한남{汗南}국이 가물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의지하려는 이들이 1,000여 호가 되었다... 2023. 11. 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_고구리 왕조 900년의 기틀을 다지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 고구리 왕조 900년의 기틀을 다지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2대 광명대제 광명대제의 원년은 임인년(BC19)이다. 추모임금을 룡산(龍山)에 장사지냈으며 추모임금의 명에 따라 순장을 하지 않았다. 아이비가 아들 도절을 낳았고 예후를 태후로 승격시켰다. 이해 12월에 오이를 황룡왕으로 삼았고 마리를 비리왕으로 삼았다. 2년은 계묘년(BC18)이다. 정월에 연호를 유리광명으로 바꾸었다. 재사를 태보로 삼았다. 협보를 좌보와 주민대가로 삼았다. 부분노를 우보와 주군대가로 삼았다. 고구를 주궁대가로 삼았다. 옥지는 곡물을 담당하게 했다. 구추는 형벌을 담당하게 했다. 도조는 의약을 담당하게.. 2023. 10. 2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_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 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남당유고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박창화가 1933년 ~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서릉부(일본 황실 도서관)에서 촉탁(계약직)으로 근무했는데, 서릉부에는 일제가 규장각 등에서 약탈해 간 비공개 고서가 많이 있었고 10여년간 여러 책들을 읽고 손으로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광복 이후에는 교사 생활을 했으며, 제자 김종진, 김준웅 형제를 가르칠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 당시 박창화 자신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약탈해 간 고서들을 되찾아 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정부는 그의 ..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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