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_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by 마음heart 2023. 10. 23.
728x90
반응형
728x170
BIG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

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남당유고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박창화가 1933년 ~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서릉부(일본 황실 도서관)에서 촉탁(계약직)으로 근무했는데, 서릉부에는 일제가 규장각 등에서 약탈해 간 비공개 고서가 많이 있었고 10여년간 여러 책들을 읽고 손으로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광복 이후에는 교사 생활을 했으며, 제자 김종진, 김준웅 형제를 가르칠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 당시 박창화 자신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약탈해 간 고서들을 되찾아 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정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고구려의 세상을 연 시조 추모대제기는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에서 발췌한 것으로 원문출처는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같습니다.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

▶신사{단기2294년/BC40}, 여름

호걸 네 명 오이・마리・협보・분노와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玄武; 방장대구)를 타고 渡盖斯水, 一作淹水, 一作奄利水; 개사수, 일명 엄수, 일명 엄리수를 건너고; 삼국사기엔 엄표수淹淲水,보술{普述}수,삼국사기 왈 모둔곡에 이르렀다. 현자 세 명 재사・무골・묵거;麻衣・衲衣・水藻衣와 함께 졸본천 즉 흘승골성에 이르러서 호{虎}족을 축출하고 갈{鞨}족을 쫓아내어 순노{順奴; 順義縣 以 東・以南?]를 열었다. 이해에 예{禮}후가 광명{光明}을 낳았다.

임오{단기2295년/BC39}, 봄엔 락랑{樂浪}국 및 졸본{卒本}국과 경계를 정하고, 가을엔 소서노{召西奴}를 거두어서 비로 삼았다.

○ 동명 원년{단기2297년/BC37}갑신, 2월

졸본왕 연타발{延陀勃}이 죽자, 소서노가 나라를 순노에 바쳤고, 졸본사람들이 상을 황제로 받들어 모시니, 비류곡{沸流谷} 서성산{西城山}에서 즉위하였다.  나라이름은 고구리{高句麗}, 년호는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한소{漢素}는 배{戰船}를 만들고 가까이에 澤池・湖 등의 貯水場所가 있음!}, 정공{鄭共}은 병장기를 만들고, 마려{馬黎}는 말을 모아서 기르게 하였다(개한인야){西漢과 근접하여 있었다?}. 말갈{末曷}이 대거 들어와서 노략질하기에, 상이 친히 정벌하여 1천 급의 목을 베었다.  5월, 비류로 송양{松讓}을 찾아서가 덕{德}과 의{義}로써 타일러도, 망령되게 선족{仙族}을 칭하며 굽히지 않기에, 처자와 진보{珍宝}를 빼앗아 돌아왔다. 7월, 송양이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이를 격파하고 2천구를 사로잡았다. 조공을 약속하기에, 훈시하여서 놓아주었다.  8월, 한{汗; 桑干河=桑乾河=永定河?} 수변에서 군사를 훈련하였다. 훈련에 참여한 이가 2천여 사람이었다.  10월, 수제{隧祭; 天祭? 地祭?}를 지내서 풍년을 빌었다. 부여{扶餘} 비둘기가 보리를 물어 왔다. 11월, 황룡{黃龍}국과 경계를 정하고 기구{箕丘; 산서성 태원동동북 箕山? 태원동남 箕山?}>이동의 땅을 차지하였다.양길{羊吉}이 딸을 오이{烏伊}에게 처로 주고, 자신의 백성을 징발하여서 진주성{眞珠城}을 쌓았다.


表紙 : <高句麗史>抄
內容 : <高句麗>史略卷之一

01. 始祖<芻牟大帝>紀 

辛巳, 夏, 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来, 乘玄武(方丈大龜, 而至<普述>.  與三賢(再思・武骨・黙居), 逐<虎>攘<鞨>以開<順奴>.  是年, <禮>后生<光明>.

壬午, 春, 與<楽浪>․<卒本>, 定界.  秋, 納<召西奴>, 為妃.

◎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献<順奴>.  <卒本>之民推上為皇帝, 卽位於<沸流谷>西<城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命<漢素>造船, <鄭共>製兵, <馬黎>畜馬(皆漢人也).  <末曷>大擧入寇, 上親征斬首千級.  五月, 訪<松讓>于<沸流>, 以德義曉之, 妄稱仙族而不屈, 遂奪其珍宝妻子而来.  七月, <松讓>入寇, 破之, 虜獲二千口, 約貢而示縱.  八月, 鍊于<汗>濱(三姓), 皈者二千余人.  十月, 祀隧, 祭豊. <扶餘>鳩含麥而来.  十一月, 與<黃龍>定界, 割<箕丘>以 東. <羊吉>, 以女妻<烏伊>, 徵其民以築<真珠城>.

◎ 二年乙酉, 正月, 徵<黃龍>馬三千匹, 鍊于<中川>, <羊吉>憂惧死.  二月, <桓那國>女主<桂婁>来降, 納為夫人.  四月, <召>后生子<沸流>, 為人多情而懦弱.  六月, <松讓>, 「懸鹿漂都」, 以國来献, 封為<多勿候(多勿故鄕之意.解慕漱之地也)>.  七月, <黃龍>男三千為軍, 女五千為婢, 冶工三十所兵船二百成.  八月, <烏伊>等伐<河北><鞨>平之, 以其地為<湯西>・<質山>二郡. 樹木塹天獐鹿無盡, 乃鍊兵而畋之.  畜神馬五十匹於<石河>.  <漢><京房>以易進,. <石顯>殺之.

해발 800미터에 이르는 환인지방 졸본은 고산지대로 협소하고 척박한 입구 위에 드넓은 평야가 탁자 모양 형태로 깔려있는 특이한 지형으로 옛부터 하늘과 통하는 지역으로 다섯명의 선녀가 노닐던 곳으로 신성시 여겨졌던 곳입니다.다섯 선녀들이 흑룡과 싸우다 전사하여 그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오녀산성으로 지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또한 천지라는 연못이 오녀산성 암벽지대에 위치해 있어 전쟁시나 비상시 식수로 활용이 가능했으며 초기 고구려왕조의 수도로써 천혜의 요새 역활을 했다는 평이 높으며 원 고구려 혹은 졸본 부여세력이 있었을 곳으로 추청되는 지역입니다.



○ 동명 2년{단기2298년/BC36}을유, 정월

황룡{黃龍;箕丘卽北箕山以西!}의 말 3천 필을 징발해서 중천{中川; ☞箕丘東쪽・黃龍國近地!}>에서 훈련하였더니, 양길{羊吉}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다 죽었다. 2월, 환나국{桓那國}여왕 계루{桂婁}가 찾아와 항복하여, 부인으로 거두었다. 4월, 소{召}후가 아들 비류{沸流}를 낳았다. 사람됨은 다정하나 나약하였다. 6월, 송양{松讓}이 현록표도{懸鹿漂都; 사슴들{비‧빈}을 줄줄이 이끌고 도읍을 이리저리 옮김?하다가 나라를 바치기에, 다물후{多勿侯}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해모수지지야). 7월, 황룡{黃龍}국 사내 3천을 군사로 만들고, 계집 5천을 녀종으로 삼았다. 야공{冶工;대장간} 30곳에서 병선 200척을 만들었다. 8월, 오이{烏伊} 등을 시켜서 하북{河北; 河套지역古河北?; 永定河北部? 錫喇木倫河北部?}의 갈{鞨}을 평정하고, 그 땅을 탕서{湯西; 湯河서쪽?; 湯山서쪽? ,北京西北 小湯山?}와 질산{質山;  吉山?} 두 개의 군으로 삼았다. 수목이 하늘높이 울창하고 노루와 사슴이 무진하여 군병훈련을 겸하여 사냥하였다. 석하{石河; 에서 신마 50필을 길렀다. 한{漢}의 경방{京房; 西漢末 사상가}이 역전{京氏易傳}을 바쳐왔는데, 석현{石顯; 西漢의 간신}이 그를 죽였다.

탕산이 현금 북경> 북방 <석라목륜하=현금{서요하}
서부의 림서와 경붕 중간지역의 탕산이면 하북은 옛 하북이고 하북이 영정하 북쪽이면
탕산은 북경> 서북 <소탕산>일 것임.

◎ 三年丙戌, 三月, 二龍見于<鶻嶺>, 相都未營.  十月, 祀隧, 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娄>. 為人尙義忠孝, 陛為小后.  十二月, <宝得(黃龍主)>女<禾>為妃.  召<祖天>于<河>濱, 不来.

하북 河北; 河套지역??

○ 동명 3년{단기2299년/BC35}병술, 3월

룡 두 마리가 골령{鶻嶺}에 나타나 도읍할 자리를 살폈으나 자리를 잡지는 않았다.  10월, 수제{隧祭}를 지냈더니, 비둘기 떼가 신전{神田; 제물로 바칠 곡식을 가꾸는 들판}에 보리를 파종하였다.  계루{桂婁}부인이 아들 고루{高婁}를 낳았는데, 사람됨이 의{義}・충{忠}・효{孝}를 귀하게 여겼다. 소후로 올려 주었다.  12월, 보득{宝得}(황룡주)의 딸 화{禾}를 비로 삼았다.  조천{祖天}을 하{河} 수변{또는, 河・濱땅?}으로 불렀더니, 오지 않았다.

石河가 현금 河北省,山海關 동・서로 두 개...., 高麗河로 보이는 高兒河가 高力城山 남쪽에 있다.
이 주변이 高句麗> 시국처{東都}?  
다른 石河로는 북경 서남방 琉璃河가 흘러드는 大石河> 등이 있음

◎ 四年丁亥, 正月, 伐<湯東><鞨>十部落, 逐于水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  七月, 宮室成, 茅茨土階.  九月, <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 동명 4년{단기2300년/BC34}정해, 정월

탕동{湯東; 湯山東? 湯河東?}에 있는 갈{鞨}족 10부락을 정벌하여 물줄기 밖으로 몰아냈다. 락랑{樂浪;소위 漢四郡 중의 樂浪郡이 아님}국의 임금 시길{柴吉}과 함께 하남{河南; 大凌河南?; 猩木倫河南?}에서 사냥하였다.  7월, 흙 계단 위에 띠 풀로 지붕을 이어서 궁실을 지었다.  9월, 화{禾}비가 아들 을두지{乙豆智}를 낳았다.  시길의 딸 시화{柴花}를 협보{陜父}의 처로 삼았다.

● 五年戊子, 正月, <召>后生子<溫祚>, 為人英偉有智. 上曰;“此真吾子也. <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皆, 汝出也, 何有真乎.”  設「漢舘」以敎民.  幸<羅淵>, 拿<荇>騎, 探其虛實.

○ 동명 5년{단기2301년/BC33}무자, 정월

소{召}후가 아들 온조{溫祚}를 낳았다. 사람됨이 뛰어나게 듬직하고 지혜로웠다. 상이 “이 아이가 진정 내 아들이오. 비류{沸流}는 당신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아이는 나를 닮아 호탕하고 쾌활하여 보이오.”라 하였더니, 소후가 웃으며 “둘 다 당신 자식인데, 어찌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까?”라 답하였다. 한관{漢館=학당}을 두어 백성을 가르쳤다. 라연{羅淵}으로 행차하여 행인{荇人}국의 말 탄 이를 붙잡아 그 나라의 허와 실을 탐문하였다.

◎ 六年己丑, 正月, <桂>后生女<曼>.  五月, 幸<質陽>, 沿<滸>作站而攻<祖天>, 遁于<北棘>.  七月, <芬奴>, 定<荇南>, 進駐<滸原>, <天>都也. <黃龍>修文而沱{沈}酒, <荇人>好仙而荒淫.  十月,  拔<北棘>, <天>走<海山>.  以<荇人國>為<荇東>・<荇西>・<荇南>三郡.

○ 동명 6년{단기2302년/BC32}기축, 정월

계{桂}후가 딸 만{曼}을 낳았다.  5월, 질{質}산 남쪽 또는, 質 水 北쪽으로 거둥하여서, 호{滸※; 淮水 支流, 또는 山西 繁峙縣發源하여 白河로 드는 滹水=滹沱河}수를 따라 참{站; 거점, 역}을 세우고 조천{祖天}을 쳤더니 북극{北棘}으로 달아났다.7월, 분노{芬奴}가 행남{荇南}을 평정하고 호원{滸原}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조천의 도읍이었다.  황룡{黃龍}국은 문{文}을 하면서 술에 빠져 살고{또는, 흐린 술을 마시고}, 행인{荇人}국은 선{仙}을 즐기며 황음하였다.  10월, 북극{北棘}을 빼앗았더니, 조천은  해산{海山}으로 내뺐다. 행인국{荇人國; 三國史記曰在太白山東南}을 행동{荇東},행서{荇西},행남{荇南} 세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水經柱>卷三十<淮水>
   《爾雅》曰:<淮>別爲<滸>. <游水>亦枝稱者也.
   《爾雅》曰:<淮>爲<滸>, 然<淮水>與<醴水>同源俱導, 西流爲<醴>, 東流爲<淮>.      
                     潛流地下三十許里, 東出<桐柏>之<大復山>南, 謂之<陽口>, 水南卽復<陽縣>也.

● 七年庚寅, 三月, 定官秩; 一品, 公(三輔), 紫袖・金花・銀魚; 二品, 大卿(主・兵・刑・民・宮・穀), 紫衫・金花・銀魚; 二品, 次卿(主神・賓・藥・農・畜), 紫衫・銀花・銀魚; 三品, 小卿(大注簿・大將軍・大使者・大對盧), 紫衫・銀花・銅魚; 四品, 上大夫(于台・沛者・將軍・大仙人・大評者), 緋衫・銀花・銅魚; 五品, 中大夫(都尉・仙人・使者・評者), 同而雉花等.  四月, 勸農.  八月, 虜<句茶(海龍王)>・<閃尼(女主)>.  十月, 親行隧祭(祭天). 置郊豕神鹿.  十{十一?}月, <桂>皇后, 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 子<高婁�>・<曼>公主, 皆賢.  是年, <召>后始養蠶, 得絹綴織之, 以爲帝依

○ 동명 7년{단기2303년/BC31}경인, 3월

관등체계를 정했다; 1품인 공(3보)은 자주소매옷・금화머리장식・은어패식을 하고; 2품 대경(주・병・형・민・궁・곡)은 자주적삼・금화・은어패식; 2품 차경(주신・빈・약・농・축)은 자주적삼・은화・은어패식; 3품 소경(대주부・대장군・대사자・대대로) 자주적삼・은화・동어패식; 4품 상대부(우태・패자・장군・대선인・대평자)는 비색적삼・은화・동어패식; 5품 중대부(도위・선인・사자・평자)는 4품과 같으나 은화 대신 꿩 깃 등을 머리에 꽂았다.  4월, 농사를 장려하였다.  8월, 구다{句茶}(해룡왕)와 섬니{閃尼}(여주)를 사로잡았다.  10월, 친히 수제{隧祭}를 올렸다. 교시{郊豕; 제사 희생용 돼지}와 신록{神鹿; 제사 희생용 사슴}을 제물로 했다.  10월{11월?}, 계{桂}황후가 상처가 썩어서 죽자, 상은 이를 애통히 여겨, 오처곡{吾妻曲}을 지었다. 황후는 기사{騎射; 말 탄 채 활쏘기}를 잘하여, 행인{荇人} 및 구다{句茶}와 전쟁할 때 어가를 뒤에서 호위하며 공을 세우다가, 황산{黃山}땅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았다. 춘추 서른둘이었고, 진주산{眞珠山}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高婁}와 만{曼}공주 둘 다 현명했다.  이해에 소{召}후가 누에치길 시작하여 명주실을 뽑고 천을 짜서 황제의 옷을 만들었다.

● 八年辛卯, 正月, 沿<黑水>立亭.  <黃龍>主<宝得>殂, <于仁(從弟)>立.  八月, <卑離(西扶餘)>・<紫蒙>来貢.  十月, 不豫, 簡政.

○ 동명 8년{단기2304년/BC30}신묘, 정월

흑수{黑水; 白河東黑河?; 山西平陽黑水?; 山海關東北黑水?}를 따라 역참을 세웠다.  황룡{黃龍}주 보득{宝得}이 죽고, 우인{于仁}(종제)이 섰다.  8월, 비리{卑離}(서부여)와 자몽{紫蒙}이 조공하여 왔다.  10월, 제가 위독하여 정사를 간략히 하였다.

● 九年壬辰, 五月, <柵城>巫来.  <類利>彈雀.  十月, <烏伊>等伐<北沃沮>, 破十二部落.  <召>后, 生<馬>公主, 問<禮>后事.

○ 동명 9년{단기2305년/BC29}임진, 5월

책성{柵城; 동부여도읍?}무당이 왔다.  유리{類利}가 참새를 쏘았다.  10월, 오이{烏伊} 등이 북옥저{北沃沮; 또는, 北方의 沃沮}를 쳐서 12부락을 깼다.  소{召}후가 마{馬}공주를 낳고서 예{禮}후의 일을 물었다.

◎ 十年癸巳, 二月, 營「西 都」于<鴨水>, 以質朴為主.  九月, 白鸞来集「西 都」「王臺」, 故名之曰<鸞臺>. 上, 與<召>皇后, 居之.  十一月, <尉厭(芬奴弟)>・<馬黎>・<菸狗>等伐<北沃沮>, 拓地千餘里. 以其生口八萬, 置於<杜訥原>之西, 名曰<梁貊谷>.

○ 동명 10년{단기2306년/BC28}계사, 2월

압수{鴨水}에 「서도{西 都}」를 세웠으며, 질박하게{치장없이 수수하게} 지었다.  9월, 흰 란새 들이 「서도」의 「왕대{王臺}」에  날아와 모여들기에, 란대{鸞臺}라 이름 지었다. 상과 소{召}황후가 이곳에 기거하였다.{삼국사기엔 王臺의 소재를 숨겼고? 현금 河北省의 옛 鴨水변에  서도를 건립하였음 등등도 숨겼음?} 11월, 위염{尉厭}(부분노의 동생),마려{馬黎},어구{菸狗}등이 북옥저{北玉沮}를 쳐서 천 여리 땅을 넓혔다. 북옥저{北玉沮; 大興安嶺東邊?}의 생구 8만을 두눌원{杜訥原; 大興安嶺西邊?; 중천대제 4년기 참조} 서쪽 땅에 살게 하고, 양맥곡{梁貊谷}이라 하였다.

● 十一年甲午, 五月, 幸<梁貊谷>, 遇<卑離>主<素奴>相見, 以其不敬, 拿来「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嫡孫拒垦其谷, 故伐之.  八月, <烏伊>拔<不而城(洮南)>, 徙其大姓於<湯東>, 以<烏伊>為其假王.  十二月, <烏干(烏伊弟)>・<馬黎>等伐<長岺>․・高顯>, 以 毒 氣 軍多傷.

○ 동명 11년{단기2307년/BC27}갑오, 5월

양맥곡{梁貊谷}으로 거둥하다 비리{卑離}임금 소노{素奴}와 마주쳤다. 그가 불경스러워 「동도{東都=初都, 삼국사기엔 비류곡}」로 잡아왔다. 송양{松讓}이 북부여{北扶余} 선종{仙宗}을 망령되이 칭하고, 소노가 북부여 적손{嫡孫}임을 망칭하며 우리를 적대하고 계곡{양맥곡} 안쪽 끝에 숨어 있기에, 이들을 정벌한 것이었다.  8월, 오이{烏伊}가 불이성{不而城}을 빼앗고 그 곳의 큰 성씨들을 탕동{湯山 또는 湯河 동쪽}으로 옮겼다. 오이를 탕동{湯東}의 가왕{假王=임시왕}으로 삼았다.  12월, 오간{烏干}(오이의 동생)과 마려{馬黎}등이 장령{長岺}과 고현{高顯; 소위玄菟郡屬縣?}을 쳤다. 독 기운{=硫黃煙氣等?} 때문에 군사 중에 상한 이가 많았다.

● 十二年乙未, 正月, 親至<長岺>, 觸氣而還.  七月, 親征<西河>拔之. 本<黃龍>地, 與<長岺>共反者也. 使<尉厭>守之, 幷伐<長岺>.  九月, <禾>妃, 生<羊>太子, 為小后.  十月, <摩離>, 拔<海山>虜<祖天>. 上謂<天>, 曰;“<黃龍>文而淫, 汝國仙而淫. 文․仙, 皆好道, 過卽敗食色. 皆好道, 過卽傷. 汝知之乎.” <天>, 叩頭請命. 命居<湖>上養氣.

○ 동명 12년{단기2308년/BC26}을미, 정월

친히 장령{長岺}에 거둥하였다가 아직 독 기운이 있어 돌아왔다.  7월, 서하{西河; 黃河의 본디 河南인 河套 동부 黃河의 별칭}를 친정하여 빼앗았다. 본디 황룡{黃龍}의 땅으로, 장령과 함께 반란하였었다. 위염{尉厭}에게 서하를 지키게 하고, 장령{長岺}땅도 함께 쳤다.  9월, 화{禾}비가 양{羊}태자를 낳고, 소후가 되었다.  10월, 마리{摩離}가 해산{海山}을 쳐서 조천{祖天}을 사로잡았다. 상이 조천에게 이르길; “황룡{黃龍}은 글{文}을 하나 음란하고, 그대의 나라{荇人}는 선{仙}을 하나 음란하오. 문{文}과 선{仙}은 모두 좋은 도리{道}이지만, 지나치면 먹거나 색을 탐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오. 왜 좋은 도리{道}라도 지나치면 상하게 되는 지를 그대는 알기나 하시오?”라 하였더니, 조천은 머리를 조아리고 처분만을 바랐다. 상은 조천에게 “호{滸} 위쪽에 살면서 기운을 북돋우라.”고 하였다.※古代의 <西河>는, <黃河>의 옛 <河南> 즉 <河套>지역 東部의 이름

● 十三年丙申, 二月, <烏伊>拔<高顯>. 五月, <尉厭>拔<南口>. 以<乙音>為<玄菟>太守, 以營<南口>. <音>, <召>皇后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 為夫人.  九月, 播麥于<西河>, 與<平>氏如<溫湯>.  十月, 畋于<杜訥原>, 置鯉宅十所(養鯉之沼兼造陶器,故以窯爲鯉宅).  <召>后, 實諸妃公主, 習羹.

○ 동명 13년{단기2309년/BC25}병신, 2월

오이{烏伊}가 고현{高顯}>을 빼앗았다.  5월, 위염{尉厭}이 남구{南口; 涿鹿 西方 東城과 懷安 남방 東北口의 중간?, 昌平과 居庸關 사이의 南口鎭?;}를 빼앗았다. 을음{乙音}을 현도{玄菟}태수로 삼아 남구에 머물게 하였다. 을음은 소{召}황후의 외가 오빠이다.  조선대가{병선 만들기 총책임자} 한소{漢素}의 딸 평{平}씨를 거두어서 부인을 삼았다.  9월, 서하{西河}에 보리를 파종하고, 평씨와 함께 온탕엘 갔다.  10월, 두눌원{杜訥原; 達里湖주변 평원?}에서 사냥하고, 리택{鯉宅}(잉어를 기르는 늪에서 질그릇과 기와 만들기 등을 겸하였었기에, 도요{가마}를 리택이라 하였다)열 곳을 두었다.  소{召}후가 모든 비와 공주를 거느리고 국{갱=탕} 끓이기를 익혔다.

      ※탁록{涿鹿}서방으로 상건하{桑乾河}변 동성{東城}과 회안{懷安} 간의
      남구{南口};上와 탁록{涿鹿}동방 창평{昌平}과 거용관{居庸關} 간의
      또 다른 <남구{南口};下>.

◎ 十四年丁酉, 二月, <祖天>, <荇南>沛者.  八月, <柳花>太后崩于<柵城>, 擧哀于「東都」. 遣<仇都>・<松義>, 吊賻. 作像立聖母神廟于<南岺>.

○ 동명 14년{단기2310년/BC24}정유, 2월

조천{祖天}을 행남{荇南}패자로 삼았다.  8월, 유화{柳花}태후가 책성{柵城=동부여도성}에서 죽어, 동도{東都=初都}에서 애도하고, 구도{仇都}와 송의{松義; 松讓의 아들}를 보내서 조문하고 재물을 내었다. 상을 만들고 성모{柳花}의 신묘{사당}를 남령{南岺; 赤峰市 東北 近地?, 朝陽市 東東北 方向 30Km境?}에 세웠다.{「東都」는 이 남령{南岺}>의 서쪽에 있을 것임}.

● 十五年戊戌, 五月, 東巡至<楽浪>, 浮海. <柴吉>納女<鵲>.  八月, 閱神馬二千匹于<汗>濱.  以<馬黎>敎<溫祚>, 上與<召>后, 時徃聼之.

○ 동명 15년{단기2311년/BC23}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락랑{樂浪; 최리의 락랑국; 하북성 동북부와 요녕성 서부지역; 이 시절 동북평원 일부는 바다?}에 다다랐다. 배를 탔다. 시길{柴吉}이 딸 작{鵲}을 바쳤다.  8월, 한수{汗水; 둑으로 치수한 물줄기?, 永定河中下流? 濟水?}변에서 신마 2천 필을 둘러보았다.  마려{馬黎}가 온조{溫祚}를 교육하고 있어서, 이때 상이 소{召}후와 함께 찾아가서 {교육상황이 어떠한 지를} 들었다.

● 十六年己亥, 正月, <多勿候><松讓>薨.  <平>氏生女<漢>.

○ 동명 16년{단기2312년/BC22}기해, 정월

다물후{多勿候}송양{松讓}이 죽었다.  평{平}씨가 딸 한{漢}을 낳았다.

● 十七年庚子, 八月, 行聖母祭.  <解素(<柳花>所生<金蛙>子)>送<禮>后及<類利>.

○ 동명 17년{단기2313년/BC21}경자, 8월

성모제를 지냈다. 해소{解素}(유화소생금와자)가 예{禮}후와 유리{類利}를 보내 주었다.

● 十八年辛丑, 五月, 御馬<巨婁>死.  六月, <禾>后崩, 春秋三十三. 葬于<桂>后塚西.  十月, 上, 與<禮>后․<類利>, 謁「神隧」.  <召>皇后退居<牛壤(<桂樓>北)>.

○ 동명 18년{단기2314년/BC20}신축, 5월

어마{임금의 말} 거루{巨婁}가 죽었다. 6월, 화{禾}후가 춘추 서른셋에 죽어, 계{桂}후 무덤 서쪽에 장사했다.  10월, 상은 예{禮}후와 유리{類利}를 데리고 신수{神隧; 隧祭를 올리는 수혈}를 찾아뵈었다.  소{召}황후가 물러 나와 우양{牛壤; ☞牛山주변 평지? 옥토!}에서 거처하였다.

◎ 十九年壬寅, 正月, 以<類利>為東宮.  二月, <鵲>氏生<鵲>太子.  四月, 上崩於「西都」, 東宮卽位. 「仙記」曰;“上不樂居位, 傳釼璽于東宮.  九月, 乘龍上天, 遺棄玉鞭処, 為<龍山陵>.”  <禮>后生女<再思>.

○ 동명 19년{단기2315년/BC19}임인, 정월

유리{類利}를 동궁으로 삼았다.  2월, 작{鵲}씨가 작{鵲}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서도{현금 북경주변!}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선기{仙記}엔 “상은 보위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고, 9월에 룡을 타고 상천하였으며, 옥채찍을 버려 둔 곳이 룡산릉{龍山陵}이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예{禮}후가 딸 재사{再思}를 낳았다.

※ 論曰; <東明>以不世出之英主, 年未四十, 席卷東土, 開七百年之基, 可謂聖矣.  後之<阿骨打>・<忽必烈>亦有所不及処矣. 但其尙屬未開之. 初, 后妃之制未爽, 胎弊於後. 急於創業, 未克其壽, 惜矣.

북한 평양에 위치한 동명성왕 추모의 묘



추모왕 사론(史論);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나이 40 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하여 700년이나 이어가는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에 나타난 아골타{금의 시조}나 홀필렬{원의 쿠빌라이}>도 역시 부끄럽게도 미치지 못할 곳에 있었다. 다만,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다. 초기에 후․비 관련한 제도를 완비하지 못하여, 이것이 후에 폐단{일찍 죽었음}이 되었고,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폐단}이 애석하였다.”고 하였다.

※자금성 북변 고려영 동남방・순의현 서남방에 룡천{龍泉}과 룡산장
         {龍山庄}이 있는 룡산{龍山}이 룡산릉{龍山陵}자리로 유력한 곳?

▣고구리 대제국 시조 추모대제=동명성왕 시절에 이미 서진하여서 전한의 도성이라는 서안 즉 장안에서 멀지 않은 하북성지경에 서도를 세워{BC28년} 중원 등 서쪽으로 뻗어나갈 토대를 세웠음. 아울러, 이 서도에서 제2세 광명대제=유리명왕이 등극하였음

우리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무에서 유로 창업했다 막연히 여기지만 주몽이 부여를 떠나기 전부터 고구려의 선대문화호 추측된느 세력들이 주몽 남하하기 이전부터 압록강 상류 요동반도 동부 환인 지역에 터를 잡고 오랜 기간 청동기 문화를 이룩했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고학적으로는 대이수구 문화(大梨樹溝)-대전자 문화(大甸子)-망강루 믄화(望江樓)를 형성시킨 세력으로 대체적으로 비파형 동검계 문화권에 속해 있어 고조선의 세력권에 있던 토착세력으로 고조선과 동일한 비파형동검과 팔주령,청동거울 등을 공유하던 것으로 볼때 오랫동안 고조선과 시공간을 공유했던 세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환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관묘의 연대를 추정한 결과 BC1200년 경으로 추정되며 하안선은 BC400년경으로 약 800년 가량 대이수구 문화(大梨樹溝)가 유지되다가 대전자 문화(大甸子)로 전환이 됩니다.대전자 문화(大甸子:BC400~BC200년)의 시대는 고조선이 연나라와 충돌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는데 고조선의 수장층들의 문화(청동제작 기술)등을 차용하여 대량생산을 하였으며 한발 더 나아가 환인 지방 특유의 청동기 양식을 생산해내며,소위 졸본이라 일컫는 지역의 수장층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큰 역활을 했을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측합니다.하지만 대전자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청동기 부분에서는 비약적인 성정을 하지만 주거지의 흔적이나 토기들을 볼때 기존의 기술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사략으로 살펴보는 추모 대제의 고구려 초기영토

고구려사략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한 추모왕 고구려 초기의 기록들과 영토 확장 방법이 나열되어 있습니다.국가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군사적 정복활동을 동반하는 방법이며, 또 하나는 혼인 등을 통해 결합하는 방법으로 고구려 추모왕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여 영토 확장을 꾀합니다.홀본국 출신의 소서노와의 혼인을 통해 추모왕은 홀본국을 모체로 고구려를 건국합니다.당시 대륙 동북방은 북부여가 와해되며 연맹체를 구성하는 여러 나라가 하나 둘 독자노선을 취하며 난립하는 소위 열국(列國)시대였는데 삼국사기 시조 추모왕(동명성왕) 편에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3개 열국이 나오는데 이들 열국은 추모왕이 직접 군사를 보내 정벌합니다.

▒추모왕,송양왕의 비류국을 정벌하다

비류국(沸流國)은 고구려 북동쪽에 인접한 지금의 요녕성 흑산현 동북쪽지역에 소재합니다. 당시 왕은 송양(松讓)으로 삼국사기를 보면 추모왕은 고구려 건국 직후 송양왕을 찾아갑니다.송양왕은 일찍이 ‘군자(君子)’를 만난 적이 없다며 추모왕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이에 추모왕은 천제(天帝-북부여 왕호)의 아들임을 밝히고 비류국이 고구려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활쏘기로 승부를 가립니다.추모왕은 前38년(추모2)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오자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군주에 봉한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기에 이름으로 삼는다.[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故以名焉]

비류국으로 추정되는 지역

▶고구려사략에서  ‘다물은 고향의 뜻으로 해모수의 땅이다.[多勿故鄕之意 解慕漱之地也]라고 설명합니다. 비류국은 옛 북부여 땅이다. 유기추모경 기록을 보면 추모왕은 비류국을 정벌하고 그 땅을 탕동(湯東), 탕서(湯西), 탕북(湯北) 등 3군으로 나누며 송양왕을 다물후에 봉합니다. 또한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 천제의 압록행궁이 탕동 땅에 있어서 추모왕이 북부여 옛 땅의 일부(비류국)를 되찾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대목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송양왕이 처음 언급한 군자(君子)의 실체인데 일반적으로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지만 여기서의 군자는 ‘단군의 아들(자손)’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고구려사략은 이때 송양왕이 망령되게도 선족(仙族-선인왕검의 후손)을 칭했다[妄稱仙族]고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추모왕은 비류국 송양왕과 단군조선(고조선) 계승의 혈통문제를 놓고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행인국을 정복하다

추모왕은 비류를 정벌한 후 前32년(추모6)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합니다. 행인국은 고구려의 북서쪽인 지금의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을 포함하는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 주변일대에 소재하는데 노로아호산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산’의 뜻으로 이는 단군왕검의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를 연상시킵니다. 이 일대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특히 적봉지역은 요하문명의 상징인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기도 합니다.유기추모경에 당시의 행인국 왕의 이름이 나오는데 해존(解存)과 해문(解文)으로 둘 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성씨가 같으며 또한 왕호는 천제(天帝)를 쓴다는 것입니다. 행인국은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해모수의 직계후손이 세운 나라이기도 합니다.뒤늦게 북부여 계승을 기치로 건국한 추모왕의 고구려로서는 행인국 존재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추모왕의 행인국 정벌은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재확립하는 과정에서 흡수됩니다.

▨말갈(북갈)집단 북옥저 제압

추모왕은 前28년(추모10)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합니다. 북옥저는 지금의 요녕성 심양(瀋陽) 일대에 소재하는데 다만 당시 북옥저가 국가체제를 갖춘 집단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추모왕은 동부여(길림성 길림)를 탈출하여 홀본국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갈을 만나는데 북옥저는 말갈집단과 관계가 깊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외의 제후국들

추모왕이 정벌한 제후국은 앞의 3개 소국 말고 어떤 나라들이 있었을까? 고구려사략에는 개마국, 구다국, 낙랑국, 비리국, 섭라국, 순노국, 자몽국, 환나국, 황룡국 등이 줄줄이 나오는데 모두 고구려(홀본국)를 중심으로 한 주변 소국입니다. 

추모왕의 고구려가 제압한 북부여 제후국

추모왕은 이들과 혼인 또는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영토를 넓히는데 이들 열국은 대부분 추모왕시기에 병합되나 일부는 계속해서 독립 체제를 유지하며 대무신왕(3대) 때에 이르러 개마국과 구다국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구려에 흡수됩니다.이 중 낙랑국은 남옥저 땅인 지금의 요하 동쪽 요녕성 요양(遼陽)일대에 소재하는데 요양은 삼국사기가 ‘선인왕검이 살던 집[仙人王儉之宅]’으로 소개한 옛 고조선의 수도 평양(왕검성)이며 훗날 동천왕(11대)이 천도한 평양성입니다. 당시 낙랑국 왕은 시길(柴吉)이었는데 시길의 낙랑국은 대무신왕(3대) 때인 32년(대무신15)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는 낙랑국은 최리(崔理)의 낙랑국입니다.고구려사략은 이때에 이르러 낙랑국이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았다.[樂浪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고 소개합니다.이 시기 소국 중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는데 추모왕의 병합에 반발한 일종의 후국(後國)이 한반도내에 자리잡는 것입니다. 북쪽지방인 평북지역의 황룡국, 함북지역(개마고원 개마국에서 유래)의 개마국, 함남지역(백두산 남쪽)의 행인국, 동해 북동쪽 연안(함흥 지역)의 동옥저 등이며 또한 서남지방에는 전북지역의 비리국이 있습니다.결과적으로 추모왕의 초기 고구려가 비교적 손쉽게 영토를 확장하며 급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주변 소국이 모두 북부여 제후국이었기 때문으로 이로 인해 이들 소국은 북부여 계승을 천명한 신생국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고구려가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추모왕의 혈통이 절대적인 배경이었다는 것입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반응형
그리드형
LIST
사업자 정보 표시
옥탑방 바카시온 | 최창열 | 22309 | 사업자 등록번호 : 708-28-01499 | TEL : 070-4517-4074 | Mail : sysy2202@naver.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22-인천중구-0183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 ☆ 詩폐라뮤지엄 > 고구려사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_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0) 2024.01.26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9대 고국천제기_고구려 최초의 국상 을파소의 중용과 진대법 실시  (0) 2024.01.25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_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0) 2024.01.2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폐주 차대제기_한국사 최초의 폭군,명림답부에 의해 실각하다  (0) 2024.01.23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7대 태조황제기_고구려의 새 역사를 열다  (0) 2023.11.09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6대 신명선제_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다  (0) 2023.11.08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5대 모본제기_고구려 최초의 폭군,신하에게 시해되다!  (0) 2023.11.07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4대 민중제기_짧은 재위기간으로 명을 다하다  (0) 2023.11.06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3대 대무신제기_부여를 복속하고 정복국가 고구려로 거듭나다  (0) 2023.11.0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_고구리 왕조 900년의 기틀을 다지다  (0) 2023.10.24

댓글


.myredbtn{ -webkit-text-size-adjust: 100%; word-break: break-word; background-color: #e00d0d; border-radius: 28px; border: none; display: inline-block; cursor: pointer; color: #faf8f8 !important; font-family: Arial; font-size: 20px; font-weight: 550; text-align: center;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white-space: nowrap; padding: 10px 35px; box-shadow: 2px 4px 6px #646363; text-shadow: 0px 1px 0px #bb2154; width: 80%; height: 40px; line-height: 40px; overflow: hidden; transition: background 0.3s, transform 0.3s; text-decoration: none; } .myredbtn:hover{ transform: scale(1.05); background-color: #fc6565; text-decoration: under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