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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폐주 차대제기_한국사 최초의 폭군,명림답부에 의해 실각하다

by 마음heart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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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폐주 차대제기

한국사 최초의 폭군,명림답부에 의해 실각하다



차대제의 이름은 수성인데 태조의 동생이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사를 장악하여 공이 많았다. 그러나 음란하고 포악하여 술을 좋아했다.태조를 위협하여 제위를 받아냈다. 병술년(AD146) 12월에 태조가 명령하여 정치를 맡았다. 신라와 압독에서 전쟁하였다. 정해년(AD147)년 정월에 송씨와 흘씨와 우씨와 양씨 등의 여자를 5방선후로 삼고 그들이 있는 궁궐에 새와 꽃과 옥과 채단으로 치장하여 함께 즐기는 무리들의 자정장소로 만들었다. 도루를 좌보로 삼았다. 상후가 록을 낳았다. 신라가 이때에 장수를 가려 뽑았다.

차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378호 전경.


▶廢主 次大帝>紀 폐주 차대제기

帝, 名<遂成>, <太祖>之胞弟也. 勇而有威, 秉軍立功雖多, 性嗜淫虐好酒. 脅<太祖>讓位得立.
제의 휘는 수성으로 태조의 동복아우이다. 용감하고 위엄 있어, 군권을 장악하고 세운 공도 많았지만, 성품이 음란하고 포악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였다. 태조를 위협하여 양위를 받아내어 제위에 올랐다.

◎ 丙戌年, 十二月, 以<太祖>命, 摂行政事.  是年<羅>・<押督>相爭.

○ 병술{단기2479년/AD146}, 12월, 태조의 명에 따라 정사를 도맡았다.  이 해에 신라와 압독이 서로 싸웠다.

◎ 丁亥, 正月, 以<松>氏․<婍穆(<度婁>女)>・<紇>氏(<于>女<桶口>王 妃)・<于>氏(<恢>女)・<陽>氏(<神>女)為五方仙后, 飾其宮園以珍禽異花玉綵{緞}, 以為遊黨恣情之所, 四時移住.  <度婁>左輔.  <尙>后生子<騄>.  <羅>, 選将材.

○ 정해 (단기2480년/AD147), 정월, 송 씨・기목(도루 녀)・흘 씨(우 녀통구 왕 비)・우 씨(회녀)・양씨(신녀)를 5방선후로 삼고, 그들이 있는 궁은 진기한 새와 기이한 꽃 그리고 옥과 채단으로 치장하여, 함께 즐기는 무리들의 ‘자정지소{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장소}’로 삼았고, 철따라 옮겨 다니며 머물렀다.  도루를 좌보로 삼았다.  상후가 아들 록을 낳았다.  신라는 장수 될 인재를 가려 뽑았다.

◎ 戊子, 七月, 獵<倭山>. <彌儒>・<箊疾>・<陽神>勧受神璽.  <羅>, 以<朴阿道>為「葛文王」.  <伯固>娶<度婁>女<守禮>.  田于<平儒原>, 射白狐, 不中, 隨鳴不己. 問于巫師曰;“妖怪也. 匈. 然, 修德則轉為福.” 主, 大怒曰;“匈則匈, 福則福. 汝, 何乱言.” 乃殺其巫. 主, 自知罪重, 不可修德. 故惡其勧悔也.  <[梪]健>子<山>来, 献白駝. [以]<裶>公主妻之.

○ 무자(단기2481년/AD148),7월, 왜산에서 사냥하였다. 미유・어질・양신이 옥새{神璽}를 받아내라고 권고했다.  신라에서는 박아도가 갈문왕{신라 때에 왕의 근친에게 주던 봉작. 본문 혈통을 달리하여 왕위를 이은 왕의 생부나 왕의 장인 등에게 추봉하던 직위}」이 되었다.  백고가 목도루의 딸 수례와 혼인하였다.  평유원에서 사냥하다가 흰 여우를 쏘았는데, 맞추질 못하여, 소리를 따라갔더니만 찾을 수 없었다. 점치는 관리에게 물었더니 “요망하고 괴이한 일이며, 흉조입니다. 그러나 덕을 쌓으면 복으로 변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주가 화를 버럭 내며; “흉사는 흉사고, 복은 복이다. 너는 어찌 어지러운 말을 해대는가!”라 말하고는, 그 점치는 관리를 죽여 버렸다. 주는 스스로 지은 죄가 무거워 덕을 쌓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뉘우치라 한 말에 해코지 한 것이었다.  <[두]건>의 아들 산이 찾아와 흰 낙타를 바치니, 비공주를 처로 주었다.

◎ 己丑, 正月, <{孺[儒]}>左輔, <箊疾>右輔.  四月, 丁卯晦, 日食.  五月, 五星聚東方. 太史誣以為吉. 主, 喜.  十二月, 無氷.  <羅>, 正月, <得訓>沙飡, <宣忠>柰麻. 八月, 星孛<天市{巿}>. 十一月, 雷, 京都大疫.

○ 기축(단기2482년/AD149), 정월, 미유를 좌보로, 어질을 우보로 삼았다.  4월 정묘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5월, 오성{수・금・화・목・토성}이 동방에 하늘에서 한데 모였다. 태사{점치는 관리의 우두머리}가 거짓으로 길조라 아뢰었더니, 주가 기뻐하였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신라는 정월엔 득훈을 사찬으로 선충을 내마로 삼았고, 8월엔 혜성이 천시{불}좌를 범했으며, 11월엔 우레가 일고 경도에서는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 庚寅, <羅>, 自四月旱, 至七月而始雨.  <松奇>左輔, <彌儒>右輔.

○ 경인{단기2483년/AD150}, 신라에서는 4월부터 가뭄이 들어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송기를 좌보로, 미유를 우보로 삼았다.

◎ 辛卯, 九月, 地震. <羅>, 二月, <雄宣>死, <大宣>伊飡․知兵馬. 三月, 雹. 先是, 上皇在<鶻川宮>, 夢見豹嚙虎尾. 問於<高福章>曰;“人君之禍福在德, 不在夢.” 巫則以為同類相殘之兆, 故心頗不悅. 主, 使<尙>后謁上皇而請璽. 上皇, 言夢及<高>․巫之釋. 后曰;“<福章>旣己善解, 何信離間之巫乎.”  十二月, 受宝于<鶻川宮>.

○ 신묘{단기2484년/AD151}, 9월, 지진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2월에 웅선이 죽고, 대선이 이찬․지병마가 되었다.  3월엔 우박이 내렸다. 이전에, 상황은 <골천궁>에 기거할 때 꿈에서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물어뜯는 것을 보았었고, 고복장에게 물었더니, 아뢰길; “인군의 복과 화는 덕을 행하느냐에 있지 꿈에서 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었는데, 무당이 동류상잔{같은 부류 서로간의 죽임}의 징조라 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즐겁지 않았었다. 주가 <상>후더러 상황을 찾아가서 옥새를 달란다고 말하라고 시켰더니, 상황이 꿈 이야기와 <고복장>과 점치는 이의 해몽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상후가 아뢰길; “복장이 이미 깔끔하게 해몽하였습니다. 어찌 이간질하는 무당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12월, 골천궁에서 어보를 받았다.

◎ 七年壬辰, 四月, 田<倭山>戱雪多選民女. 助戱<麻正>諫, 曰;“<東明>之田, 有三. 一曰天, 二曰軍, 三曰賢. 今, 以農時, 奪民妻女以戱謣如是, 非<代鏡>也.” 主, 怒, 以為吠主之狗, 射殺之.
<白面>左輔, <尙曲>右輔. 先是, <白面>上<三代鏡>繪五卷于上皇而右輔至, 又上「釼璽玉鞭之圖」及「<大武神><利勿>繪」卷而陞左輔.
<白面>画璽于<鶻川宮>時, 勧上皇曰;“権皈而璽不皈, 徒失和而己, 不如授之以安其心.” 上皇, 可, 云.
<守禮>生女, 于<錦林院>.  七月, 后父<尙溫>薨, 年七十二, 翌日<曲>又暴死, 年才四十六. 皆以后故驟貴登相, 故人望之絶, 反有快其雹者.  主, 欲收拾人望, 以<穆度婁>爲太輔, <度婁>稱病不出. 以<高福章>爲右輔.  十二月, 晦, <穆度婁>薨, 年七十九. 主, 聞之, 安心.

○ 7년{단기2485년/AD152}임진, 4월, 왜산에서 사냥하며, 민간에서 차출된 많은 여인들을 희롱하여 욕보이니, 놀이를 돕던 일을 맡았던 마정이 아뢰길; “동명께서는 세 가지의 사냥을 하셨는데, 그 하나는 천제를 지내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군사훈련을 위함이었고, 셋째는 인격수양을 위함이었습니다. 농사철에 민간의 처와 딸들을 빼앗아 이와 같이 망령되게 희롱하심은 대경에 어긋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주가 노하여 주인에게 짖는 개라면서 쏘아 죽였다.  백면이 좌보가, 상곡은 우보가 되었다. 애초에 백면은 상황께 3대경 그림 다섯 권을 바치고 나서 우보에 이르렀고, 「인새옥편도」와 「대무신 이물회」를 바치고 좌보로 승차하였었다. 백면이 골천궁에서 옥새를 새기던 때, 상황께 권고하여 아뢰길; “권력은 주고 옥새는 주지 않으면, 단지 화평하지 못하게 될 뿐이니, 옥새를 주어서 그들이 안심하게 함 만 같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황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한다.수례가 금림원에서 딸을 낳았다.  7월, 상후의 아비 상온이 72살에 죽고, 다음날엔 상곡이 갑자기 겨우 46살에 죽었다. 두 사람 모두가 상후로 인하여 높은 자리를 빨리 얻고 재상에 오르게 된 까닭에, 다른 사람들의 우러름은 끊기고, 반대로 그들 집안이 부서짐을 반기었다.  주는 인심을 수습하고자, 목도루를 태보로 삼았으나, 도루가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더니, 고복장을 우보로 삼았다.  12월 그믐날에 목도루가 나이 79살에 죽자, 주는 도루가 죽었다는 소리에 안심하였다.

◎ 八年癸巳, 正月, <彌儒>太輔, <箊疾>左輔, <尙岑>右輔, <尙蕃>中畏大夫.  六月, 霜.  <箊疾>, 欲奪<高福章>之妻, 讒<福章>勧上皇勿授璽之事, 誅之而有財及妻女其子流散. 國人哀之.

○ 8년{단기2486년/AD153}계사, 정월, 미유를 태보로, 어질을 좌보로, 상잠을 우보로, 상번을 중외대부로 삼았다.  6월, 서리가 내렸다.  어질이 고복장의 처를 빼앗으려고, 복장이 상황{태조}에게 옥새를 수성에게 주지 말라고 청한 것을 참소하여 주살하였더니, 재산과 처첩 및 자식들이 흩어져 버렸다. 나라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였다.

◎ 九年甲午, 二月, <福章>奴義人刺<箊疾>于途, 不中而死之.  <羅>, <逸聖>殂. 子<達那>立, 身長七尺, 豊準奇相. 伊飡<継元>秉軍國政, 一吉飡<興宣>佑之.  <索頭>, <[梪]健>殂. 子<山>立.

○ 9년{단기2487년/AD154}갑오, 2월, 복장의 가노였던 의로운 사람이 어질을 길에서 칼질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신라에서는 일성이 죽어, 아들인 달나가 섰는데, 달나는 키가 7척인데다 풍준하고 기이한 얼굴이었다. 이찬 계원이 군권과 정사를 잡았고, 일길찬 흥선이 도왔다.  색두에서는 [두]건이 죽고, 아들 산이 섰다.

◎ 十年乙未, 正月, <尙岑>薨. 弟<蕃>, 代右輔, 娶<岑>妻<米>氏.  <達那>赦.  四月, 主, 以<太祖>長子<萬勒>爲反而殺之. <勒>弟<莫德>, 恐禍而避之, 困而自縊于野. 國人痛哭, 上皇莫知.  五月 <守禮>生子<男武>. 夢見黃竜纒身. 乃<萬勒>, 云.

○ 10년{단기2488년/AD155}을미, 정월, 상잠이 죽었다. 동생 상번이 우보자리를 대신하고, 잠의 처 미씨에게 장가들었다.  {신라에서는} 달나가 갇힌 자들을 풀어주었다.  4월, 주가 태조의 맏아들 만륵을 반란한 것으로 꾸며서 죽였더니, 만륵의 동생 막덕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피해 다니다가 힘이 겨워 들판에서 목매어 죽었다. 나라사람들이 통곡하였으나, 상황{태조}은 이를 몰랐다.  5월, 수례가 남무를 낳았다. 꿈에 황룡과 몸을 섞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만륵이었다 한다.

◎ 十一年丙申, 四月, <羅>, 霜. 開<鷄立岺>.  

○ 11년{단기2489년/AD156}병신, 4월, 신라에서는 서리가 내렸고, {신라가} 계립령 길을 확보했다.

◎ 十二年丁酉, 二月, <羅>, 置<甘勿>․<馬山>二縣. 三月, 勞<長岺鎮>戍卒, 賜征袍.

○ 12년{단기2490년/AD157}정유, 2월, 신라가 감물과 마산 2현을 설치하였고, 3월에는 장령진의 수졸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나누어주었다.

◎ 十三年戊戌, 三月, <羅>, 開<竹岺(非<高句麗>之<竹岺>也)>. <倭>使至<羅>.

○ 13년{단기2491년/AD158}무술, 3월, 신라가 죽령(비 고구려 지 죽령 야)길을 확보했다. 왜의 사신이 신라에 왔다.

◎ 十五年庚子, 四月, <羅>, <閼川>水溢, 人家漂流, <金城>北門自毁.

○ 15년{단기2493년/AD160}경자, 4월, 신라에서는 알천의 물이 넘쳐 집들이 떠내려갔고, 금성의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 十六年辛丑, 七月, <尙>后生子<{馬+白}>.  <羅>, 蝗, 而海魚多死.

○ 16년{단기2494년/AD161}신축, 칠월, 상후가 아들 맥을 낳았다.  신라가 황충 피해를 당하고, {바다 또는 호수나 강에서 사는} 많은 물고기가 죽었다.

◎ 十七年壬寅, 四月, 「北部」大使者<尙蕃>入為左輔, <伯固>「北部」大使者. 時, <箊疾>, 與<彌儒>爭權, 迎<蕃>而入. <蕃>, 己亥五月, 讓右輔於<陽神>而出「北部」, 務拾人心三年, 頌聲大振. <箊疾>勧主為太輔以副人心. 然, <儒>無辞意, <疾>自免. 人以爲<疾>欲陷<儒>自陷. 初, 主, 以<伯固>爲己子. 至是, 以為上皇子而欲害之, 密遣人圖之.  <羅>勞<沙道城>戍卒.  主, 强報<守禮>爲宮人.

○ 17년{단기2495년/AD162}임인, 4월, 북부 대사자 상번이 들어와 좌보가 되고, 백고가 북부 대사자가 되어 나갔다. 그 시절 어질이 미유와 권력을 다투다가 상번을 맞아들였다. 상번은 기해년{14년/단기2492/AD159} 5월에 우보 자리를 양신에게 내어주고 북부로 나가서 힘써서 인심을 수습하길 3년에,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었다. 어질이 {상번을} 태보로 삼아서 인심에 부응하라고 권유했었는데, 미유가 자리를 내놓지 않았으니, 어질이 자리를 내놓게 되었었다. 사람들은 어질이 미유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가 자신이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고 여겼었다. 당초에 주는 백고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었는데, 이제 와서는 백고를 상황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백고를 해치고자 남몰래 사람을 보내 도모하게 하였다.  신라가 사도성 수졸들을 위무하였다.  주가 {손아랫사람인} 수례{伯固 妃, 南武 母}를 억지로 치붙고 궁인으로 만들었다.

◎ 十八年癸卯, 二月, 以<麻靖>為「[貊]部」使者. <尙>后, 密命護<伯固>, 又以<明臨答夫>爲<椽那宮>皂衣.  三月, <尙蕃>薨, 年六十一. <蕃>, 沈重下人, 爲<尙>氏之柱亦中途而折.  主, 惡<箊疾>, 以<陽神>爲左輔, <尙庚>爲右輔.

○ 18년{단기2496년/AD163}계묘, 2월, 마정이 「[맥]부」의 사자가 되었다. 상후는, {마정에게} 밀명으로 백고를 보호하라 하였으며, 또한 명림답부를 연나궁의 조의로 삼았다.  3월, 상번이 나이 61살로 죽었다. 상번은, 하인들을 매우 중히 여겼으며, 상씨 집안에서는 기둥이 되었었으나, 역시 중도에{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주는 어질이 싫어서 양신을 좌보로, 상경을 우보로 삼았다.

◎ 十九年甲辰, 二月, <守禮>生女. 主, 大喜, 封爲<尊昜>公主. 加<守禮>庄・園・奴婢, 寵幸漸加. 時, <尙>后寵衰唯白雲. ㉮<守禮>, 專房, 遂成大事.{또는, ㉯<守禮>專房<遂成>大事. 또는, ㉰<守禮>專房, <遂成>大事.}  <羅>都, 龍見.

○ 19년{단기2497년/AD164}갑진, 2월, 수례가 딸을 낳자, 주는 매우 기뻐하여 <존양>공주로 봉하였다. 수례에게는 장과 원 및 노비를 더하여 주더니, 수례를 찾는 일이 점차 빈번하여졌었다. 이때, 상후는 찾아주는 횟수가 줄어들어 흰 구름만 바라볼 뿐이었다. ㉮수례는 수성을 독차지 하게 되었고, 마침내 큰일{수성을 제거할 준비}을 이루었음이었다.{㉯<수례는 수성을 독차지 하고 대단히도 섬겼다. 또는; ㉰수례가 총애를 독차지하고, 수성도 크게 잘 해주었다.}  신라에서는 도성에 용이 나타났다.

◎ 二十年乙巳, 正月晦, 日食. 上皇, 病. <尙>后徃慰之. 上皇, 曰;“我, 以母后遺詔, 兄弟相傳, 以汝讓之. 汝, 惑於<遂成>而殺我子, 又逐<伯固>耶.” 后泣, 曰;“此, 非妾志也.” 上, 曰;“吾雖死, 可以見汝.” 后曰;“吾, 當殺<遂成>, 以報汝恩.” 上皇, 大喜, 遂復幸后而崩. 乃三月朔頭也, 春秋九十八. 殯于<鶻川宮>. 十月, 以遺詔以宮為陵. <尙>后, 自以爲弑上皇之功臣, 復得主寵, 進「茛實膘卵」. 主, 毒不足而不死, 欲執戟害后而倒. <明臨答夫>, 遂入帳刺脅而殺之, 秘不發喪召<箊疾>于內, 盡誅<彌儒>・<陽神>之黨及主心腹壯士数十人. 凡十日而盡, 然後, 迎<伯固>太子卽位. <尙>后, 與<箊疾>, 列擧主惡. 以上皇遺詔, 廢之, 曰;“<神明仙皇>戒以不可照惡, 故廢之.”

○ 20년{단기2498년/AD165}을사, 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상황이 병이 들어서 상후가 찾아가 위로하였더니, 상황이 이르길; “나는 모후가 남기신 명에 따라 형제간에 옥좌를 전위하고, 당신도 그에게 양보하였소. 그런데 당신은 수성에게 빠져서 내 아들을 죽이고, 백고도 내쫓았소.”라 하였다. 후는 울면서 아뢰길; “그것은 제 뜻이 아니었었습니다.”라 하였고, 상황은 “나는 죽어서도 당신을 지켜 볼 것이오.”라 하였더니, 후가 아뢰길; “제가 곧 수성을 죽여서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황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금 후와 정을 나누고 생을 마쳤다. 때는 3월 초두였고, 춘추 98세였다. 골천궁에 빈소를 차렸다. 10월, 유언에 따라 골천궁을 릉으로 만들었다. 상후는, 상황을 죽인 공신이 된 이후, 주의 총애를 회복하고는 「간실표란{소의 갈비 살에 독초인 미나리아재비의 씨앗을 넣어 만든 경단}」을 내었다. 주는, 독이 부족하여 죽지 않았으며, 갈래창{미륵창}을 집고 후를 해치려고 다가왔다. 명림답부가 이윽고 장막으로 들어와서 수성을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이를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은 채로 어질을 불러들여서, 미유 및 양신과 그 무리들 및 주의 심복 장사들 수십 명을 모조리 주살하였다. 열흘이나 걸려서 끝을 냈으며, 그런 연후에 백고를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였다. 상후는, 어질과 함께 주의 죄악을 열거하고, 상황{신명선황}이 남긴 조서에 따라 수성을 폐위시키며, “신명선황께서는 악행을 뒷바라지 하지 말라 하셨소. 그런 까닭에 수성을 폐위시킨다.”고 말하였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나는 너무 늙어 만기(萬機)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역수가 네 몸에 있다. 게다가 넌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총괄하니 오랫동안 사직에 공을 쌓았다. 신민의 소망을 채웠으니 내가 부탁할 인물을 얻었다고 가히 이를 수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니,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이다!”

"吾旣老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其卽位 永孚于休!"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아우 고수성에게 전한 양위의 말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에는 태조대왕이후 8대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제7대 군주이며 한국사에 등장한 최초의 역사왜곡 논란이 없는 폭군이라 불리는 인물로 왕호 자체가 태조대왕 다음(次) 대의 군주로 진시황의 다음 황제라는 뜻의 이세황제와 같은 식입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동복동생이자 신대왕의 형이지만 중국 측 사서인 범엽의 후한서에는 수성(차대왕)이 궁(태조대왕)의 아들이자 백고(신대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어 국내 기록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진수의 삼국지나 이연수의 북사에서는 고수성이 아예 등장하지 않고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고 하며 한편 삼국지와 북사에서는 동천왕을 궁의 증손으로 기록해 놨는데, 동천왕은 신대왕의 손자이므로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아들이 됩니다. 이 경우 차대왕의 족보는미궁에 빠져, 태조대왕의 형제일 수도 아들일 수도 있게 됩니다.단재 신채호는후한서나 삼국지가 더 현실적이라 보고, 이를 채택해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봤으며 연대상으로 후한서나 삼국지측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사실 태조대왕의 연대가 불확실해서 차대왕이 태조대왕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애매한 상황으로 일반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무지하게 큰 동생임을 인정하거나 서자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채택되기도 합니다.

次大王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太 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굳세며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이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2년(147년)
봄 2월에 관나부 패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 3월에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殺太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3년(148년)
여름 4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메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차대왕조-

만약 태조대왕-차대왕이 형제가 아닌 부자 관계라면 차대왕과 고막근은 형제 관계가 되며 차대왕이 자신의 아들인 고추안을 태자로 삼으면서 숙청된 것으로 보입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은 즉위 후에 별다른 정복 사업을 벌이지 않은 듯 하며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우보 고복장과 이복형 또는 조카 고막근,고막덕을 죽이고 동생인 고백고를 견제하는 등 왕권 강화에 주력했으며 또한 멋대로 신하들을 처형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걷었으며 천재지변까지 일어나면서 조정의 신망을 잃게 되면서 결국 165년 10월,이를 참지 못한 조정 관료들이 명림답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 속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후 고백고가 신대왕으로서 왕위를 잇게 됩니다.후한서에는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마저 미워해 아들인 신대왕이 아버지를 두려워해 숨었으며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후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태조대왕의 장수 기록이 워낙 쩔어줘서 그렇지 이사람도 만만치 않은데 신대왕과 더불어 소위 장수 형제로 취급되는 왕 중에서 유일하게 제 명에 못 죽은 케이스인데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오래 살았으며 더구나 후한서에 기록된 즉위년을 기준으로는 무려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하지만 태조대왕과 더불어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재위 기간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삼국사기  -태조대왕조-에 김부식이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오는 후한서에 따르면 121년 궁(宮 태조왕)이 승하하고, 수성(遂成 = 차대왕)이 뒤를 이었는데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를 궁의 사자(嗣子 = 대를 잇는 아들)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146년에 양위하고 이후 165년에 승하한 것과 모순되는데 삼국사기의 내용은 구삼국사와 해동고기에 잘못 적힌 내용을 그대로 적어버린 탓에 그렇게 된 것으로 추측되며, 후한서 등 당대의 중국이 남긴 기록을 보면 121년 태조대왕은 이미 승하했고 그 뒤를 차대왕이 이어받았는데 이것이 후대에 연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76세에 왕위를 이어받은 것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차대왕의 나이는 원래보다 대략 24년~25년 정도 많게 나이를 조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에서 24년을 낮춰보면 후대의 왕과 나이차가 그나마 현실적인 나이차가 됩니다.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신대왕이 형제 관계로 모두 고재사의 아들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각각 24년과 18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 이걸로 보아 이들의 수명은 후대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말로 형제 관계인지는 불투명합니다. 다만 요즘에는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먼 방계거나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아니며,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형제가 맞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최소한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수명이나 재위 등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은 당대의 기록인 후한서나 삼국지의의 내용이 맞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내용이 꼬여버린 것은 김부식이 연도를 잘못 썼거나 착각해서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미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 참조한 국내 문헌부터가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김부식 본인이 이에 대해 -태조대왕조-에도 "후한서 기록이랑 우리쪽 기록이랑 비교해보니 앞뒤가 안맞는데 어느 쪽이 맞는거야?"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론을 남겼습니다.특히 이 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요 인물인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명립답부 등은 수명 부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긴 수명을 자랑한다는 점도 조작 의심을 부채질하는 부분으로 결론은 차대왕이 121년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해 165년에 쫒겨나거나 하는 등 모종의 방법으로 왕위에서 내려왔으며, 차대왕이 저지른 폭정이 실제 일인지 조작인지는 불투명하다는 것입니다.태조대왕 출생년이 47년(삼국사기 기록)이며 사망한 해가 165년으로 118살을 살았다고 하지만 차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추측되는 121년에 태조대왕이 74세가 되고 71년에 태어난 차대왕은 50살이므로 이때 무력을 사용하는 등 반 강제적으로 태조대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165년 명림답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쫒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무려 44년간 왕위를 유지했으며 그때 나이도 94세이기에 엄청난 장수왕이기도 합니다. 이 당시 고구려 인물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인데 동생 신대왕은 179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차남인 고국천왕이 176년 태자에 책봉되어 179년에 왕이 되고, 197년 사망합니다. 아버지 신대왕과 나이차를 현대식으로 30년으로 잡아도 고국천왕 역시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결론이 되며 다음왕인 산상왕은 신대왕의 4남으로, 197년 즉위해 30년 후인 227년 죽습니다. 명림답부는 113세까지 살았다고 적혀 있으며 명림답부는 신대왕과 같은 해에 죽고 태조대왕은 차대왕과 같은 해에 죽습니다. 태조대왕부터 산상왕 시기의 비정상적인 연령대는 동천왕때에 비로소 끝이 나는데 이런 비정상적인 수명이 실존했던 기록인지 아니면 고구려내의 어떠한 사건들을 감추기 위해 비정상적인 왕의 수명을 조작해낸 것인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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