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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2대 중천대제기_애첩 관나부인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위나라 군대를 물리쳐 아버지 동천왕의 복수를 하다

by 마음heart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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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2대 중천대제기

애첩 관나부인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위나라 군대를 물리쳐 아버지 동천왕의 복수를 하다


중천대제의 이름은 연불인데 동천대제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림전 후로 태보 명림식부의 딸이다. 갑진년(AD224) 2월에 산속 궁궐의 마을에 불이 번지는 태몽을 꾼 후에 중천대제를 낳은 것이다. 차분하고 의지가 강하여 지략이 있었다. 무리들을 잘 다스렸었다. 그런데 관구검이 침략한 후에 동천대제가 서안평으로 급하게 진공하였음을 후회하면서 임금께 "魏와는 싸우지 말고 잘 살펴서 신라와 백제를 복속하라"고 말하였었다. 군사를 씀에 신중하고 다만 전렵과 황색하기를 삶에 다 바쳤다. 동천대제를 효성스레 섬기고 그 뜻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했다.

사진출처;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

 

▣第十二世 中川大帝紀 제12세중천대제기

帝, 諱<然弗>, <東川>之長子也. 母, <明臨鳣>后, 太輔<息夫>之女也. 甲辰, 二月, 夢見火然山宮之洞壑, 而生帝. 及長, 儀表俊爽沈毅, 有智略, 能御衆. 而<毌>乱後, <東川>頗悔急進, 戒上;“以勿與<魏>爭, 修內政, 服<羅>・<濟>.” 故愼於用兵, 只以畋獵荒色而終其身. 然, 事<東川>至孝, 未甞遺其旨, 故人多稱之. <預物>・<奢勾>之乱出於不倫, 可勝歎哉. 當時, 儒道未興, 黃老管楽之學, 只以長生不死富國强兵為第一故也.

제의 휘는 연불이고 동천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명림전후로 태보 명림식부의 딸이고, 갑진년{단기2557년/AD224} 2월에, 꿈속에서 산궁이 있던 마을 골짜기에 불이 퍼지는 것을 보고 제를 낳았다. 자라서는 의표는 뛰어나게 시원스러웠고, 차분하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지략이 있어 무리를 잘도 이끌었다. 그런데 관구검의 난리를 겪고 난 후, 동천이 {서안평으로} 급하게 진공하였음을 후회하면서, 상에게 “위와는 싸우지 말고, 내정을 잘 살피되, 신라와 백제는 복속하라.”고 타이른 까닭으로, 용병함엔 신중하였으며, 다만 전렵과 황색하기로 그 삶을 마쳤다. 그러나 동천을 섬기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유지를 저버리지 않았음에,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예물과 사구가 난을 일으킨 것은 불륜에 따른 것이어, 한탄할 일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세상은 유도{儒敎}는 아직 흥하기 전이었고, 황노{道敎}는 즐기며 사는 것만 맡았었으니, 다만 장생불사와 부국강병을 제일로 여겼을 뿐이었다.

◎ 元年戊辰, 九月, 大行帝自<狐川>興疾而皈, 召太子授神鐱而不能言, 須臾而崩, 太子卽位. 時, 年二十五.  冬十月, 葬<東川>. <鱣>皇后欲殉下, 上扶止之, 尊為天宮皇太后. 其他後宮一如大行時.
以<要>公主為上皇后, <蚕>氏為中皇后, <葉>氏為下皇后.  十一月, 王弟<預物>・<奢勾>等, 揚言鴆帝之說, 而發兵犯闕, 官軍擊破之. 上, 命勿害<預物>・<奢勾>竟死於乱矢之下, 赦其妻子, 而厚葬之.  上, 昌雪, 如<朱>后宮. 后曰;“妾, 已四十五. 願守墓.” 不許.
<羅>, <沾解(二)>, 正月, 伊飡<長萱>為舒弗邯・叅政, 力主和北, 乃有定界之論.
<濟>, <古爾[一五]>, 春夏旱而冬饑. 發倉賑恤, 復其年租調

○ 원년{단기2581년/AD248}무진, 9월,

대행제가 호천땅에서부터 병을 얻어 돌아와서, 태자를 불러서 신검을 넘겨주고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채 조금 있다가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고, 이때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동10월, 동천을 장사하였다. 전황후가 따라죽으려 하자, 상이 붙잡아 따라죽지 못하게 말리고 천궁황태후로 높였다. 이외의 다른 후궁들은 대행의 시절과 같게 하였다.  요공주는 상황후로, 잠씨는 중황후로, 엽씨는 하황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선제가 짐독을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고, 관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상이 예물과 사구를 해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끝내 어지러이 쏟아지는 화살 아래에서 죽어 구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여 주었으며, 이들은 후하게 장사하여 주었다.  눈이 많이 내리자, 상이 주후의 궁으로 찾아 갔다. 주후가 “신첩은 나이가 이미 마흔 다섯이니, 무덤이나 지키게 하여 주시지요.”라고 말하였으나, 상은 들어주지 않았다.신라(첨해2년)는 정월에 이찬 장훤을 서불감・참정으로 삼아 북쪽과의 화친에 주력하더니, 경계를 정하자는 얘기가 있었다.백제(고이[15]년)는 봄여름이 가물어,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그 해의 세금{곡물과 특산물}을 돌려주었다

◎ 二年己巳, 春正月, 上, 與<鳣>后, 如<卒本>謁庙告卽位而還.  太輔<明臨小塔>薨, 年八十六. <達夫>代之, <方丑>左輔, <須古>右輔, <貢夫>大注簿. 以宝儀小后<貫那>氏為<鳣>后宮小后.  冬十月, <鳣>后生子<素勃>.
<濟>, <古爾(一六)>, 正月, 甲午, <太白>襲月.  四月, <倭>人殺<于老>.  七月, <羅>作<南堂>於宫南, 以<良夫>為伊飡.

○ 2년{단기2582년/AD249}기사, 춘정월,

상이 전[태]후와 함께 졸본으로 가서 사당을 배알하여 즉위를 고하고 돌아왔다. 태보 명림소탑이 나이 86살에 죽어, 달부가 이를 대신하고, 방축이 좌보를, 수고가 우보를, 공부가 대주부를 맡았다. 보의소후인 관나씨를 전[태]후궁의 소후로 삼았다.  동10월에 전[태]후가 아들 소발을 낳았다.백제(고이16년)는 정월 갑오일에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4월, 왜인이 우로를 죽였다.  7월, 신라는 궁의 남쪽에 남당을 짓고, 양부를 이찬으로 삼았다.

◎ 三年庚午, 春正月, <蚕>皇后生子<若信>, <葉>皇后生子<若民>. 上, 宴<明臨>氏・<穆>氏・<椽>氏, 曰;“先皇惡生女, 今我後宮皆生子, 乃皇靈之所祐也.” 命中畏大夫<穆萇>徃告<東川陵>.  二月, 國相<於漱>兼知內外兵馬事. 詔曰;“先皇自主兵久勞, 聖躬四十而夭, 朕甚哀痛. 自今以徃, 朕以兵事委於叔父, 俾無後愆.”  以<麥>氏兄<牟太>為<東海>沛者, <葉>氏父<椽况>為「中部」大使者, <淵>氏父<淵岳>為「中部」沛者. 上, 燐<淵>氏, 欲以<淵>氏妹代納後宮, 有此擧群臣諫之, 不聼.  <朱>后生<朱邦>太子.  三月, 以<穆平>爲「北部」大使者.  冬, 多雪.

○ 3년{단기2583년/AD250}경오, 춘정월,

잠황후가 아들 약신을 낳았고, 엽황후가 아들 약민을 낳았다. 상은, 명림씨・목씨・연씨들에게 잔치를 베풀고는, “상황께서는 딸 낳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지금 들어 내 후궁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소. 이는 황령들께서 보살펴주심일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중외대부 목장에게 명하여, 동천릉에 가서 고하라고 하였다.  2월, 국상 어수가 내외병마사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조서로써 “선황께서는 병마의 일을 손수 주관하시어 오랫동안 애쓰시다가 춘추 40에 요절하셨으니, 짐은 매우 애통합니다. 지금부터는 짐이 숙부께 병사를 맡길 것입니다. 훗날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하시오.”라 하였다. 맥씨의 오빠 모태를 동해패자로, 엽씨의 부친 연황을 「중부」대사자로, 연씨의 부친 연악을 「중부」패자로 삼았다. 상은 연씨를 측은히 여겨서 연씨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대신하여 거두어들이려 하였더니, 이 일로 여러 신하들이 들고일어나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주후가 주방태자를 낳았다.  3월, 목평을 「북부」대사자로 삼았다.  겨울엔 많은 눈이 왔다.

◎ 四年辛未, 春正月, 以<淵甘>爲宝儀小后. <甘>, 以<淵>氏妹, 得寵超為尙禮, 而娠躍登后位. 宮中皆驚. 時, <貫那>, 專房, 與<椽>皇后, 作巫蠱, 互相攻擊. 故, 上, 忽移于<甘>.  夏四月, 上, 與<甘>后, 畋于<箕丘>而還, 投<貫那>于水. 初, <貫那>, 以<杜訥原><達泊湖><鯉宅>之女, 顔色佳䴡髮長九尺. <貫[=毌]>賊之乱, 隋帝入<壅口>, 得寵為<葉>妃奉禮, 緣因<葉>妃而得謁故也. <葉>妃亦因<貫那>而得寵, 互作同穴之誓. <葉>妃生<逸友>, <貫那>生<貢>, 皆登小后. 今上卽位, <葉>, 以<若友>太子之故躍爲皇后, 下視<貫那>. <貫那>, 以此含之, 每當夕細陣<壅口>納媚受幸之事. 上, 鄙<葉>而疎之. <葉>, 亦怒, 每當夕奏<貫那>之髮不利於夫. 先帝之畋于<狐川>時, <貫那>從之得幸, 時, 其髮化為蟒繞上数重乃得疾矣.” 上, 知其讒言, 故不信, 又言;“西<魏>求長髮. 可献此女.” <葉>, 肥豊. 故, 上笑, 曰;“吾聞, <魏>求肥豊. 故當择日送汝. 汝, 得<魏>主寵, 勿忘朕恩.” <葉>, 大驚, 抱帝而哭, 曰;“妾罪當死. 奈<若友>何.” 上, 惻然良久, 曰;“<壅口>之事, 非汝之罪也. 只可勿妬.” 自是, <葉>后不敢言<貫那>. <貫那>, 以是專寵, 欲奪<葉>后之位, 假裝有娠而媎上, 曰;“皇后, 罵妾以田舍女, 伺陛下之出獵而殺妾. 願, 隨陛下于<箕丘>.” 上, 性不好讒, 故遂與<甘>后去及還. <貫那>, 将革囊而迎哭, 曰;“皇后, 以此欲咸妾而投海(以<胡>稱為<海>). 妾欲皈家.” 上, 怒, 曰;“汝欲入海, 海卽汝家也.” 命<虎句>投之<西河>. 時, 年二十一, 色冠當世而夭折. 故, 國人哀之作<長髮曲>.

○ 4년{단기2584년/AD251}신미, 춘정월,

연감을 보의 소후로 삼았다. 감은 연씨의 여동생인데, 승은을 입자 뛰어넘어 상례가 되었고, 애가 생기자 뛰어올라 후가 되었다. 궁중이 모두 놀랐다. 이때 관나는, 승은을 독차지 하고서도, 연황후와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면서, 서로를 해하려고 하였다. 이에 상은 홀연히 감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하4월, 상이 감후를 데리고 기구로 사냥을 다녀와서 관나를 물에 던져버렸다. 애초에 관나는 두눌원 달박호에 있는 리택사람의 딸이었는데, 얼굴이 곱고 맑았으며 머릿결은 아홉 자나 되었었다. <관구검>의 난리 중에 <옹구{5녀산성?}>로 제를 따라 들어가서 승은을 입고 <엽>비 봉례가 되었으며, <엽>비와의 인연으로 제를 곁에서 모시게 되었고, <엽>비 또한 <관나>로 인하여 총애를 받았더니, 서로 간에 동혈지서{같은 토굴에서 잘 지내자는 맹세}를 하였었다. <엽>비는 <일우>를 낳고, <관나>는 <공>을 낳았더니, 두 사람 모두를 소후가 되었었다. 금상이 즉위하자, <엽>은 <약우>태자의 어미인 까닭으로 뛰어올라 황후가 되더니만 <관나>를 깔보았다. <관나>는, 이런 억울함을 삼키고는, 밤을 맞을 때마다 <옹구>에서 예쁜 여인들이 불려 들어가서 승은을 입던 일을 시시콜콜 되뇌었더니, 상이 <엽>을 천하게 여겨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이에 <엽> 또한 약이 올라, 밤을 맞을 때마다 상주하길; “<관나>의 머리카락은 지아비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선제께서 <호천>에서 사냥하시던 시절, <관나>가 따라 들어가서 승은을 입던 때, 그 긴 머리채가 구렁이로 변하더니 상{동천제}을 여러 겹으로 감았었고 그 때문에 병이 드셨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그것이 참소하는 것임을 알아서 믿지 않았더니, 또한 참소하길; “서쪽의 <위{前魏}>가 머리 긴 여자를 구한다고 하니, 그 여자{관나}를 바치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엽>비는 몸집이 좋아 푸짐하였기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내가 듣기엔 <위>가 살지고 푸짐한 여자를 찾는다고 하니, 당장에 날을 잡아서 당신을 보내주어야겠소. 당신은 <위>주의 승은을 입게 되거든 짐의 은혜를 잊지 마시오.”라 하였다. 이에 <엽>은, 화들짝 놀라 제의 품에 달려들어 꼭 껴안고 소리 내어 울면서, 말하길; “신첩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약우>는 어쩌시렵니까?”라 하였다. 상은, 측은히 여기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하길; “<옹구>에서의 일은 당신의 잘 못은 아니오. 다만 좀 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소.”라 하였다. 이때부터, <엽>후는 감히 <관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관나>는, 이에 힘입어 총애를 독차지 하더니만, <엽>후의 지위까지 빼앗고 싶어서 거짓으로 아이를 가진 척하고는, 애교떨며 상주하기를; “황후가, 신첩을 촌뜨기계집이라고 험담하고, 폐하가 사냥 나가시는 틈을 타서, 신첩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습니다. <기구>까지 폐하를 따라가고 싶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참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어, 끝내 <감>후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환궁하였더니, <관나>가 가죽자루를 가지고 나와 울면서 상을 맞이하며 말하길; “황후가 이것에다 신첩을 집어넣어서 큰물(이<호>칭위<해>)에 던져버리려 하였습니다. 신첩은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당신은 너른 물에 빠지고 싶어 하니, 너른 물이 당신의 집일 것이오.”라고 하고는, <호구>에게 명하여 <서하>에 던져버리게 하였다. 이때 나이 스무 한 살로 한참 물오른 나이인데 일찍 죽은 것이다. 이에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이 이를 가엽게 여기고 <장발곡>을 지었다.

◎ 秋八月, 觀稼<西川>, 詔曰;“近年, 豆麥稍減, 黍粱不實, 人口漸繁, 牛羊如舊. 衣帛者衆, 而蚕業未達. 宜令「五部」畯官, 加力督民. 黃金白銀, 我國之寶, 無使私相賣買流出國外, 民間女子無令金花首飾.”
<羅><沾解(四)>献其女于後宮, 命為茶儀. 四月朔日, <沾解>始政於<南堂>. <漢祇部>人<夫道>者家貧無謟工書算著名於時, 徵為阿飡委以物藏庫事務.

○ 추8월, <서천>땅의 농사를 살피고, 조서로 이르길; “근년 들어, 콩과 보리 소출이 줄어들고 기장과 조도 잘 여물지 않는데, 먹여야 할 입은 점점 늘어나고, 소와 양의 숫자도 옛날과 다름이 없소. 비단 옷을 입을 사람은 많은데, 누에치는 일도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소. 마땅히 명을 내려서 「5부」의 권농 관리들이 백성들을 힘써 독려하게 하시오. 황금과 백은은 우리나라의 보배이오. 사사로이 서로 사고팔거나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고, 민간 여인들은 좋은 금화로 머리를 장식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신라(첨해4년)가 딸을 후궁으로 바쳐왔기에, 다의{차와 술 시중드는 궁인}로 삼으라 하였다.  4월엔 <첨해>가 비로소 <남당>에서 정사 살폈다. <한기부>사람 <부도>가, 가세는 빈한하나 믿지 못할 구석이 없고, 물건을 만들거나 글자를 쓰거나 셈을 잘 하기로 유명하여, 그를 불러들여 아찬으로 삼아서 장부와 곳간을 살피는 일을 맡겼다.

◎ 五年壬申, 春正月, 始設典農部, 以<穆濬>為典農大卿, 掌農・桑・牧・畜・人蔘・甘草之事. <濬>, 以<輝陽(<穆>后出<新大>女)>之子, 能精于此道, 不楽, 賢達.  二月, <鳣>后, 生子<豪勃>, 多用蔘鲤. 上為之親煎. 后曰;“妾, 以向衰之質, 得陛下之優潢, 無以結草也.” 上曰;“諺言, 母子三生. 后, 何言耶. 遂以為常.” 夏六月, 故太輔<尙齊>妻<明臨於姑>沒于注簿<陰友>家, 年七十六, <答夫>女也. 精敏善蚕織, 率後宮・宮人助<鳣>后親蚕, 封國大夫人. 其女<尙觧>奔<陰友>以來, 遂居於<友>而營護如子. 故, 國人以為<陰友>母.

○ 5년{단기2585년/AD252}임신, 춘정월,

비로소 전농부를 설치하고, 목준을 전농대경으로 삼아, 농・상・목・축・인삼・감초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목준은 휘양(목>후출<신대>녀)의 아들이며, 이 방면의 일에 능숙하고 면밀하였다.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나 현명하여 달통하였다.  2월, 전[태]후가 아들 호발을 낳고는 인삼과 잉어를 여러 번 먹었다. 상이 친히 고아주었더니, 전[태]후가 “첩은 이미 체질이 쇠하여 가고 있어서, 폐하께서 보살펴 주심이 넉넉하고 깊고 넓은 연못 같으시나, 결초보은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 말하였다. 이에 상은 “속된 말에도 모자는 3생{前生-此生-来生}이라 하거늘, [태]후께는 지금 무슨 말을 하십니까. 이전과 같이 쾌차하시기나 하세요.”라고 하였다.  하6월, 작고한 태보 상제의 처 명림어고가 주부 음우의 집에서 76살에 죽었다. 답부의 딸이었다. 세세하고 민첩하였으며 누에 키워 천짜기를 잘하여, 후궁들과 궁인들을 이끌고 전[태]후의 친잠을 도왔으며, 국대부인으로 봉함을 받았다. 어고의 딸 상해가 음우의 집으로 도망간 이래로, 따라가서 음우의 집에 기거하며 음우를 아들처럼 돌보았더니,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은 어고를 음우의 모친으로 여겼었다.

◎ 秋八月, 始行<月歌會>, 以<沾解>女<精>為<月仙>. 是, 本古俗, 今為<羅>俗. 上, 欲慰<月精>, 而行之.  改六儀復置八部; 曰香部・丹部・道部・藏部・藥部・茶部・醞部・饍部. 小后為少儀, 以<回同>妻<方乙>為香部少儀. <方乙>, 年十四入內儀, 端麗貞淑為宮人之懿範, 與<要>公主, 為雙璧. 上卽位, <要>公主年才十二而與<方乙>專寵. <要>登后位. <方乙>下嫁<回同>至是生子<方回>, <要>皇后常無子女. 上, 見<方回>豊壯, 頗悔前事, 復召幸之, 有是命.  <朱>后生<朱瑗>太子, 加食邑・奴婢.  
宴孝子・順孫于<鳣>后宮.

○ 추8월, 비로소 월가회{月歌會}를 행하고, 첨해의 딸 정{월정}을 월선{月仙}으로 삼았다. 이것은 본시 옛 풍속이었었으며, 오늘날에는 신라의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상은 월정을 위로하려고 그 자리에 납시었다.  6의를 고쳐서 8부를 되살렸으니; 향부・단부・도부・장부・약부・다부・온부・선부가 그것이다. 소후는 소의로 하였으며, 회동의 처인 방을은 향부의 소의로 삼았다. 방을은 나이 14살에 내의로 들어왔는데, 모습이 단아하고 맑았으며 행실이 정숙하여, 궁인들의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고, 요공주와 쌍벽을 이루었다. 상이 즉위하니, 요공주는 나이 12살에 방을과 함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었다. 요공주는 후위에 올랐다. 방을은 회동에게 하가하여 지금 아들 방회를 낳았고, 요황후는 아직껏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더니, 상은 방회의 모습이 넉넉하고 장대함을 보더니만 지난 일을 후회하고, {방을을} 다시금 불러들여 정을 나누었으니, 이것도 운명이었다.  주후가 주원태자를 낳자, 식읍과 노비를 얹어주었다.효자들과 순손들에게 전[태]후의 궁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 十月, <沾解>, 與其<玉帽>, 来朝于境上. 上, 與<鱣>后・<月精>, 迎于<河>上, 大宴三日, 賜<玉帽>貂裵・金釧・硨磲・香盒・真珠項飾・珂勒・白馬等四十餘事, 盖為<月精>母. 故上以太后尊敬之, 欲納後宮, <鱣>后妬之不得. <沾解>将皈, 上, 握手泣別親扶<玉帽>上車, 遂賜<竹岺>之地而皈<羅>, 人皈化者八千余戶. 世為兄弟之國, 書于鐵券.

○ 10월, 첨해가, 옥모를 모시고, 나라의 경계까지 찾아와서 래조하니, 상이 전[태]후와 월정을 데리고 하 상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사흘간 크게 연회를 벌여주었으며, 옥모에게는 치렁치렁한 담비가죽 옷과 금팔찌・옥귀고리・향합・진주머리장식・백옥목걸이・백마 등 40여 가지의 선물을 주었다. 대략 월정의 모친을 위함이었다. 이미 상은 옥모를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옥모를} 후궁에서 거두고 싶어하자, 전[태]후가 이를 시샘하여 그리하지는 못하였다.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상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며 각별하게도 친히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하더니만, 이윽고 죽령의 땅을 하사하여 신라땅이 되게 하였더니, 이에 돌려보낸 이들{고구리 백성으로 되었다가 신라 백성으로 된 사람들?}이 8,000여 호나 되었다. 평생토록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고 쇠판에다 새겼다.

◎ 六年癸酉, 春正月, 送人參・甘草・膃臍・駱駝于<玉帽>太后, 親書慇懃, 曰;“更逢于<白玉樓>中.” <羅>人, 不觧其意, 欲作<白玉樓>以迎上, 借玉于我, 送釼匹治工十二人. 命置五部以示範. 去年<河>上之會, 上, 見<羅>人劍戟精銳, 命<沾解>送之. 至是至.  二月, 命弓匠行[左石右族]祭.  四月, 遣使于<玉帽>太后問起居, 送黃金五百兩・錦絹各百匹・羊五千頭. 是月, 有龍見于<玉帽>宮東池, <金城>臥柳自起. <玉帽>親書于上, 曰;“昔, 我「月白仙皇」, 駕雙魚而登仙, 植杖開花至今不絶, 去年夢敎妾事陛下, 得寵隆厚賜, 以<竹嶺>之地為妾湯邑. 父臨<沾>, 夫臨臣妾. <周>室備王母瑤池之儀, <漢>家有<呂雉>・<冒頓>之典. 臣妾, 窈有慕焉, 納女後宮. 願, 得皇子皇女, 世世作親, 永為舅甥.” 上, 大喜, 南向跪拜, 曰;“吾太后真聖人也. 國有如此大聖, 龍見柳起, 不亦宜乎.”

○ 6년{단기2586년/AD253}계유, 춘정월,

인삼・감초・물개배꼽・낙타를 옥모태후에게 보내주면서, “백옥루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은근한 글을 손수 써넣었다. 신라사람들은, 그 말뜻을 몰라서 백옥루를 만들어서 상을 맞이하고자 우리에게서 옥을 꿔갔으며, 인필{칼과 칼집}을 만드는 치공 12명을 보내왔다. 명을 내려서 {이 야공들을} 「5부」들에게로 나누어 보내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지난해 하상에서 만났을 때, 상은 신라사람들의 칼과 미륵창이 정교하고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첨해에게 보내달라고 명하였더니, 지금 도착하였던 것이었다.  2월, 활 만드는 장인에게 명하여 촉제{돌화살촉제사}를 지냈다.  4월, 옥모태후에게 사신을 보내, 다시금 일상의 안부를 물었다. 황금 5백 냥, 비단・명주 각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내주었다. 이 달에 옥모의 궁 동쪽 연못{또는, 해자}에 용이 나타났고, 금성의 누운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옥모가 친히 상에게 글로 쓰기를; “예전에 저의 「월백선황{助賁}」께서 쌍어를 타고 선계로 올라가시며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꽃이 피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지난해엔 꿈속에서 가르침을 받아서 폐하를 섬겼더니 총애와 융숭한 선물을 받게 되었고 죽령땅도 첩의 탕읍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구도}께서 첨해를 어루만지셨더니{첨해가 조분의 양자가 되어 보위를 차지하게 된 것} 지아비께서 신첩을 어루만지셨으며, 주{周}실에 왕모의 아름다운 연못을 준비한 예법{주목왕과 서왕모가 그윽한 연못에서 연애한 것}이 있었더니 한{漢}실에선 여치{呂雉; 유방의 처}와 모돈{冒頓; 흉노의 선우} 사이의 법도{한고조가 흉노와의 싸움에서 지고 나서 흉노선우 모돈에게 자신의 처와 딸을 바친 사건}가 있었습니다. 신첩도 마음속으로 원하는 바 있어서 제 딸을 후궁으로 보내드렸던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황자와 황녀를 보시고, 세세토록 장인과 사위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상은, 크게 기뻐하며 남쪽을 향해 무릎 꿇어 절하며, 말하기를; “나의 태후께서는 진정한 성인이시다. 나라에 이와 같은 큰 성인이 있으셨으니, 용이 현신하고 버드나무가 일어선 것 역시 마땅하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 是年, 五・六・七月, 不雨, <沾解>禱其祖庙而雨, 穀不登而民饑盜熾. 上, 命發船百隻, 送麥·粟·粱←等三千石于<玉帽>太后, 曰;“自離母側, 去益思慕. 聞値荒年民多不炊. 慈母之情當何如哉. 爰命有司送此, 不腆如助, 賑給幸何如之.” <玉帽>, 答, 云; “<堯>九雨・<湯>七旱, 乃妾之謂也. 「仙皇」以来百姓謳歌. 又有陛下之寵, 乃發龍柳之祥. 豈意妖蘖猜作. 妾崇爱我夫皇逮漕天糧拯我黎庻, 俾妾佩銘.”  命「五部」, 冬貯肉塩, 夏貯麥粮, 選民才藝, 敎以經史・弓馬・孝義之節, 無失其宜.

○ 이 해, {신라>에서는} 5・6・7월 내내 가물고 비가 아니 와서, 첨해가 조상의 묘에 빌었더니, 비는 내렸지만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이 굶고 도적이 불길같이 일었다. 이에 상이 명하여 100척의 배를 띠워 맥・속・량・두 등 3천석을 옥모태후에게 보내며 말하길; “모친의 곁을 떠난 이래 더욱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불을 지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어지신 어머니의 정이야 지금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에 관리에게 명하여 이것들을 보내드리니, 도움치고는 넉넉지 않은 것이오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시겠는지요.”라 하였다. 옥모가 답하기를; “요임금 9년 큰비와 탕임금 7년 가뭄이 이제 첩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황{조분}」이래로 백성들은 풍요로이 살아왔었습니다. 또한 폐하의 총애가 있었더니, 용과 버드나무의 상서로움이 나타났었습니다. 어찌 요사스런 재앙이 시샘하여 일어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첩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 부황께서 멀리서 하늘같은 양식을 보내주시어 저의 백성을 구제해주셨으니, 첩은 각골난망입니다.”라 하였다.  5부에 명하여, 겨울엔 고기와 소금을 저장하며, 여름엔 보리와 조를 저장하라 하였고, 재주 있고 법도를 아는 백성을 가려 뽑아서, 그들에게 경사{經史}・궁마{弓馬}와 효의{孝義}의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한 것들을 잃지 않게 하라 하였다.

◎ 七年甲戌, 四月, 國相<明臨於漱>薨, 年五十七. <漱>, 以<鱣>后之兄, 久執國政. 大使・沛者皆出門下, 太守・将軍亦多其人, 「五部」之貢倍於御庫. 上, 以<鱣>后至親, 委以不問. 臨終, 擧<沸流>沛者<陰友>代之. <友>, 以貢吏之子, 為<漱姑>・<於姑>之婿. 父事<於漱>. <漱>, 至是, 擧之. 其才能堪其後故也. <於漱>專政以来, 三輔, 無力, 或補或缺, 有名而無實.
<鱣>后生子<宝弗>.  七月, 地震.  以<鱣>后為天后, <要>后為地后, <葉>后為人后, <蚕>后為日后, <月精>為后. 時, <月精>生太子<鳳>而憂, 曰;“不如生女而嫁人.” 上, 知其見{斥}, 乃尊其位為皇后, 列于五后. 群臣不敢諫.  大閱于<中川之原>

○ 7년{단기2587년/AD254}갑술, 4월,

국상 명림어수가 나이 57살에 죽었다. 어수는 전[태]후의 오빠이며, 오래도록 국정을 잡고 있었다. 대사자와 패자 모두가 그의 문하이며, 태수와 장군에 그의 사람들이 많았었더니, 「5부」가 나라에 바치는 공물이 배증하였다. 상이 전[태]후의 지친에게 맡기고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더니, 죽음에 임박하여서는 비류패자 음우를 천거하여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음우는,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관리의 아들이었는데, 수고와 어고의 사위로 있었고, {음우의} 부친은 어수를 모시었다. 수가 이때에 이르러 음우를 천거하였음은, 그의 재능이 자신의 후임으로 자리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수가 정사를 도맡은 이래 삼보들은, 무력하였으며, 임명하기도 하고 말기도 하였었는데, 유명무실하였었다.전[태]후가 아들 보불을 낳았다.  7월에 지진이 있었다.  전[태]후를 천후로, 요후를 지후로, 엽후를 인후로, 잠후를 일후로 삼았고, 월정도 후로 삼았다. 그때, 월정이 태자 봉을 낳아놓고 걱정하며 “딸을 낳아 평범한 사람에게 출가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 말하였더니, 상은 그녀가 배척당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그녀의 지위를 다섯 후의 반열인 황후로 올려주었다. 군신들도 감히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중천의 언덕에서 군사사열을 크게 벌였다.

◎ 八年乙亥, 春正月, 以太子<若友>為正胤, 置東宮官寮. 年十六. 俊秀仁厚, 衆望蔚然. <桶>公主所生<門夫>太子, 長于<若友>, 而知上之意, 自晦以讓位. <若友>生時所見白竜, 至是又現, 大赦國中, 徵賢取才.  <朱>后生<茜>公主, 難産. 上, 親自勧薬而慰之.
<古爾>, 侵<沾解>, 戰于<槐谷>西. 九月, <羅>一伐飡<翊宗>戰死. 十月, <濟>移攻<烽山城>. <玉帽>, 親至境上, 請救. 上, 與<月>后・<鳳>太子, 會于<河>上. 命<穆萇>伐<古爾>. <古爾>乃觧<烽山>而請和, 兩軍持久.
<鳣>后生<莫>公主.

○ 8년{단기2588년/AD255}을해, 정월,

태자 약우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에 관료를 배치하였다. 나이는 16살이었고, 준수하고 인후하여, 많은 이들의 기대함이 좋아보였다. 통공주 소생의 문부태자는, 약우보다 나이가 많았는데도, 상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스스로 물러나서 양위하였다. 약우가 태어날 때 나타났던 그 백룡이 이때에 이르러 또 나타났기에,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으며, 현명한 이를 불러들이고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들였다.주후가 천공주를 낳았는데, 난산이었다. 상이 친히 약을 권하여 위로하였다.고이가 첨해를 침략하여 괴곡의 서쪽에서 싸웠다. 9월에 신라의 일벌찬 익종이 싸우다가 죽었고, 10월엔 백제가 봉산성으로 옮겨서 공격하니, 옥모가 손수 국경으로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월후와 봉태자를 대동하고, 하상으로 나와서 만났고, 목장에게 명하여 고이를 치게 하였더니, 고이는 봉산의 포위를 풀고 화친을 청하였고, 양군은 오랫동안 대치하였다.전후가 막공주를 낳았다.

◎ 九年丙子, 春三月, 上親送<玉帽>于境上, <沾解>来迎. <沙道海>上有三大魚出, 長三丈高丈二尺. 人, 以三聖之瑞, 歌曰;“天有三星, 地有三聖, 海有三魚.”  秋八月, 以<于漱>女<五斗>為皇太子妃. 其母, <山上>女<桶>公主也. 曾, 以 東 宮 尙禮, 生<門夫>, 有德而讓位. 故上以其女為正{娟}, 以慰其心也.  <玉帽>生皇子<達賈>. 上, 遣使, 冊<玉帽>為皇后, <沾解>為皇子. 十月, 祭天, 送肉于<玉帽>. <玉帽>, 择宗室女三人, 献之. 命置于天宮・月宮・東宮. 聞, 是月之晦, <羅>日食.  十一月, 以<椽邦>為<獐>公主駙馬, 稱<狐川>都尉. <邦>, <酒>后姪<白>之子也. 各置宮僚・奴婢・庄園.  十二月, 無雪大疫.

○ 9년{단기2589년/AD256}병자, 춘3월,

상이 친히 옥모를 국경까지 나와서 전송하였고, 첨해가 와서 맞이하였다. 사도해 위쪽에 큰 물고기 세 마리가 있었는데, 길이는 3장에 높이는 1장 2척이었다. 사람들은 성인 셋이 나타날 징조라 하며, 노래하기를; “하늘엔 별 셋이 있고, 땅에는 성인 셋이 있으며, 물에는 물고기 셋이 있다.”라 하였다.  추8월, 우수의 딸 오두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그녀의 모친은 산상의 딸 통공주이다. 일찍이 동궁 상례시절에 문부를 낳았더니, 덕이 있어 양위를 하였기에, 상이 그 딸을 정연{정윤의 배필}으로 삼아서 그녀{통공주}의 마음을 위로한 것이었다.  옥모가 황자 달가를 낳았다. 상은 사신을 보내서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는 황자로 삼았다. 10월에 하늘에 제사하였고, 옥모에게는 고기를 보냈다. 옥모가 종실의 딸 셋을 가려 뽑아 바쳐 와서, 천궁・월궁・동궁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달 그믐에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11월, 연방을 장공주의 부마로 삼고, 호천도위로 삼았다. 연방은 주후의 조카인 연백의 아들이다. 각각에게{방과 백에게} 궁료・노비・장원을 딸려주었다.  12월, 눈은 오지 않고,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 十年丁丑, 春正月, <鱣>后生<駱>公主于<笏覩>苐<淹淲宮>. 上, 幸其苐, 洗之賜衣.  <索頭>, <應鹿>殂, <鹿豚>立.  夏四月, 與<玉帽>會, 獵于<大嶺>. 上, 射一鹿, 命<玉帽>射之. <玉帽>曰;“陛下射之, 鹿已伏. 妾當受之献于天.” 名其地為<献天溝>. 國人立<二聖祠>于其上. 後人有詩, 曰;“庙岺春風, 鹿自肥献天, <玉>后佩皇皈.”  時, <百濟>, 大旱, 樹木皆枯. 人以為二聖合, 西泽乾. “黑竜與蒼竜交, 白竜焦.”之謠行.  殺<高顯>部小加<鄭熙>. <熙>臣<王簡>負入<幽州>.  命, 新「五部」兵仗.
<東海>大豊.  <桶>公主生皇太子女<少斗>於東宮. <鳣>后洗之賜衣.

○ 10년{단기2590년/AD257}정축, 춘정월,

전후가 홀도의 집 엄표궁에서 락공주를 낳았다. 상이 그 집으로 가서 씻어주고 옷을 하사하였다.  색두에서는 응록이 죽고, 록돈이 섰다.  하4월, 옥모와 만나 대령에서 사냥하였다. 상이 사슴 한 마리를 쏘고 나서, 옥모에게도 그 사슴을 쏘라고 명하니, 옥모가 말하기를; “상께서 쏘셔서 사슴은 이미 쓰러졌습니다. 응당 소첩은 그것을 거두어 하늘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 땅의 이름은 헌천구가 되었다.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이 헌천구 위쪽에 2성사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사당 고개에 춘풍이 부니, 사슴은 자신을 살찌워서 하늘에 바쳤고, 옥후는 황상을 모시고 돌아갔다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백제는 크게 가뭄이 들어 수목이 모두 말랐다. 사람들은 두 성인이 교합하여 서쪽 택지의 물이 말랐다고 하였으며, “흑룡{고구리}과 창룡{신라}이 교합하니, 백룡{백제}이 애태운다.”는 노래가 번졌다.  고현부 소가 정희를 죽였더니, 정희의 신하 왕간이 그 시신을 들러 메고 유주로 들어갔다.  「5부」들에게 병장기를 새롭게 하라고 명하였다.  「동해」에 땅에 대풍이 들었다.  통공주가 황태자의 딸 소두를 낳았더니, 전{鳣}[태]후가 씻어 주고 옷도 내려 주었다.

◎ 十一年戊寅, 春二月, <末曷><長羅湯>等, 與<古爾>相通, 欲共伐<沾解>. 命伐<長羅湯>斬之, 捕<古爾>使及其土物送于<沾解>. <古爾>, 以其所受海馬十匹, 換使.  五月, 上送<玉帽>于<海>上. 自<大嶺>獵後, 二聖同居<沸流>行宮, 至是, 從海路皈國. 有歌, 曰;“山有花兮, 水有魚. 奈何, 朕躬無花魚.” 上泣, 玉帽亦泣.

○ 11년{단기2591년/AD258}무인, 춘2월,

말갈의 장라탕 등과 고이가 상통하여 함께 첨해를 치려하였다. 명을 내려 장라탕을 쳐서 목 베었고, 고이의 사신을 사로잡았으며, 고이의 토산물은 첨해에게 보냈다. 고이는 이전에 받았던 해마 10필로 사신을 바꾸어 갔다.  5월, 상이 옥모를 해상에서 돌려보냈다. 대령에서 함께 사냥한 이후 두 성인은 비류행궁에서 함께 지냈었고, 이때가 되어 해로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상은 “산에는 꽃이 피고, 물에서는 물고기 헤엄쳐 노는데, 어이하여 내게는 꽃도 물고기도 없단 말인가.”라 노래하였다. 상이 눈물 흘렸더니, 옥모 또한 눈물 흘렸다.

◎ 十二年乙卯, 春正月, 遣<椽邦>于<玉帽>, 賜衣・肉・匹段・玉佩・薬物等百事. 封<沾解>為<新[羅]國>皇帝・<東海>大王・右衛大将軍, 賜金・銀印二顆.  <玉帽>生皇女<雲>公主.  二月, 上親耕耤田, <鱣>后親蚕. 命典農大卿<穆濬>, 祭于<卒本><麥鳩祠>.  <朱>后生<朱起>太子.  <尙齊>子<克> 為尾署大加, 製五色璫・磚及紋尾・熊脚等, 送于<新羅>, 命修<玉帽>新宮. 上, 送黃金千兩・白金萬兩・工人二百名于<玉帽>, 聞<羅>有旱・蝗・多盜, 命<穆濬>送穀二萬石・牛羊八千頭・酪酒・皮幣・雜物無算.
<沾解>送<吳>人釼師・蠶師各二人.  時, <駕洛><居登>殂. <麻品>立, 與其母<慕貞>来献土物. 從<羅>使徃返.  九月, 東宮妃<于>氏生子<相夫>.  冬十二月, 畋于<杜訥之谷>, 祀<貫那>后于<湖祠>. 忽聞<魏>兵入寇, 上, 命衛尉将軍<穆遠>, 簡精騎五千, 逆擊于<梁㹮之谷>大破之, 斬其将<尉遲稭>, 斬八千餘級, 兵仗馬匹無数. 是謂<梁谷大戦>. 反賊<王簡>逃. 上, 乃以<穆遠>為<玄菟>太守<冨山公>, 後改<馬山公>.

○ 12년{단기2592년/AD259}을묘, 춘정월,

연방을 옥모에게 보내어 의・육・포목・옥패・약물 등 백 가지를 하사하고, 첨해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고, 금・은 도장 2개를 내려주었다. 옥모가 황녀 운공주를 낳았다.  2월, 상이 손수 밭갈이를 하고, 전[태]후가 친히 누에를 쳤다. 전농대경 목준에게 명하여 졸본의 맥구사에 제사하였다.  주후가 주기태자를 낳았다. 상제의 아들 극을 미서대가로 삼아, 5색 당・전과 문미・웅각 등을 만들어서 신라로 보내고, 옥모의 새 궁전을 고쳐주라 명하였다. 상이 옥모에게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인을 보내주었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이 일어 도둑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목준에게 명하여 곡식 2만 석, 소와 양 8천 두, 짐승 젖으로 담근 술, 피륙으로 만든 옷가지 등과 잡다한 물건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게 하였다.첨해가 오나라 칼을 만들고 양잠을 가르치는 벼슬아치를 각각 2인씩 보내왔다.  이때 가락의 거등이 죽었다. 마품이 섰으며, 모친인 모정과 함께 찾아와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의 사신을 따라왔다 돌아간 것이었다.9월, 동궁비 우씨가 아들 상부를 낳았다.  동12월, 두눌곡에서 사냥하고, 호사에서 관나후를 제사하였다. 갑자기 위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노략한다 하기에, 위위장군 목원을 시켜서, 날랜 기병 5천을 추려서 양맥곡에서 거꾸로 들이쳐서 대파하였다. 위군의 장수 위지개를 목 베고, 8천여 급을 베었더니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양곡대전이라 한다. 반적 왕간은 도주하였다.  상은 목원을 현도태수로 삼고 부산공으로 봉하였으며, 후에 마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 十三年庚辰, 春正月, 詔曰;“國家設官久矣, 制度未備. 宜令, 三輔・國相・大主簿・中畏大夫斟酌<漢>典, 以定新號.” <陰友>奏, 曰;“國情不同, 不可一依<漢>制. 以三輔為三公, 國相為丞相之說, 已自<山上>時議定, 而因於慣而尙未改矣. 今「五部」之學未達. 國家, 尙武而左文, 不待百年, 文物難與中原比肩.” 上, 然之, 乃止.  <鱣>后, 生<越>公主, 入山宮.  二月, 「北部」大使者<穆平>卒, 年七十二.  命「五部」採金<東海>捕膃狗, 送于<玉帽>. <鱣>后諫, 曰;“妾聞<衛>王嗜<夏姬>為其子所弑. 今, 陛下, 妾<玉帽>而子<沾解>. 是, 抱老狐而柔勁猫也. 妾不敢忘其危也.” 上曰;“臣, 有此疾, 每貽母憂. 然, 臣有母后, 豈敢溺於彼哉. 倂合之計耳.” 七月, <玉帽>, 遣使献土物, 曰;“頼我夫皇造此新宮. 欲迎天子. 叙此鴦情.” 上欲徃之, <鱣>后諫, 曰;“陛下若去, 妾當墮樓.” 上, 不得已, 答曰;“吾妻之國, 夏, 雨, 山崩四十余所. 秋, 星孛東, 以示餘蘖. 非無「<尾生>之信」, 謹戒「<衛><靈>之轍」. 卿若涉<溱>, 應有「孝橋」. 願, 入<巫山>, 再結雲雨.” 九月, 如<卒本>, 祀<東明庙>, 行<巨婁祭>.

○ 13년{단기2593년/AD260}경진, 춘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나라가 관리를 둔 지 오래되었으나, 제도를 갖추기는 미흡하였소. 마땅히 명하노니, 삼보・국상・대주부・중외대부는 한의 예를 살펴서 새로운 관직의 호칭을 정하시오.”라 하였더니, 음우가 상주하여 아뢰길; “나라의 사정이 한과 똑같지 않으니 한의 제도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삼보를 삼공으로 하고, 국상을 승상으로 하자는 얘기는 일찍이 산상시절에 논의하여 정하였던 바 있었으나, 관습에 부합하지 않은 이유로 아직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5부」들의 학문은 아직 달통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나라가 무를 숭상하고 문을 그르치면, 백년이 되기도 이전에, 문물을 중원과 견주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그렇다고 여기고는 그만두었다.  전[태]후가 월공주를 낳고는 산궁으로 들어갔다.  2월, 북부의 대사자 목평이 나이 72살에 죽었다.  명을 내려서 5부는 금을 캐고 동해는 물개를 잡아 옥모에게 보내주라고 하였더니,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신첩은 「위왕이 하희{春秋戰國시절 夏御叔의 총첩으로 왕 및 대신들을 닥치는 대로 농락한 요부}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지금 폐하는, 옥모를 첩으로, 첨해를 아들로 삼고 있소. 이것은 늙은 여우를 품에 안아주고 사나운 고양이를 달래려는 격이오. 신첩은 이 일의 위험함을 감히 잊을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아뢰길; “신에게 이런 병이 있어서 매번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하지만 신에게는 모후께서 계시온데, {제가} 어찌 감히 옥모에게 푹 빠져버리기만 하겠습니까. 신라를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입니다.”라 하였다.  7월,옥모가,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친애하는 지아비 황상(중천제)의 도움으로 이렇듯 새 궁전을 지었습니다. 천자를 여기에 모시고 싶습니다. 이렇게 앙이의 정을 써서 보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그곳으로 가보려 하자,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폐하가 거기에 가시면, 첩은 응당 누대에서 투신하겠소.”라 하였다. 상은 하는 수 없어 답하여 아뢰길; “제 처의 나라가 여름엔 비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고, 또한 가을엔 혜성이 동쪽으로 뻗쳐서 재앙이 남아있음을 알렸습니다. 「미생의 믿음{어리석은 믿음}」이 없지는 않으나, 「위령지철{어머니의 병病 때문에 미자하{靈公의 男色美少年}가 위영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급히 달려가다 행적(철)을 남긴 실수와 관련된 고사}」은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경께서 진수{춘추전국 시절에 鄭나라를 흐르던 하천}>를 건너시겠다면, 응당 효교{미자하가 어머니를 위해 위영공의 마차를 훔쳐 타고 건넌 그 강의 다리}를 놓아드릴 것이니, 원하건대 무산{원래 巫山은 四川省 巫山縣의 남동쪽 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에 들어가시어서 다시금 대업을 이룰 기회를 매듭지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동명사당에 제사를 올리고, 거루제도 지냈다.

◎ <古爾>置六佐平, 一品; 曰內臣宣納號令, 曰內頭掌庫財, 曰內法掌禮儀, 曰衛士掌宿衛, 曰朝廷掌刑獄, 曰兵官掌兵. 其下; 曰達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扞率五品, 柰率六品, 将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六品以上服紫銀花飾冠, 十一品以上復緋, 十六品以上服靑. 上, 聞之笑, 曰;“誠奴風也.” <古爾>以其弟<優壽>為內臣佐平.

○ 고이가 여섯 좌평을 두었다. 1품으로; 내신은 조칙을 받아 호령함을 맡고, 내두는 창고와 재물관리를 맡고, 내법은 예법과 의장을 맡고, 위사는 숙위를 맡고, 조정은 형옥의 일을 맡고, 병관은 군사를 맡게 하였다. 그 밑으로는; 2품 달솔, 3품 은솔, 4품 덕솔, 5품 한솔, 6품 내솔, 7품 장덕, 8품 시덕, 9품 고덕, 10품 계덕, 11품 대덕, 12품 문독, 13품 무독, 14품 좌군, 15품 진무, 16품 극우를 두었다.  6품 이상은 자색 옷에 은화 관모를, 11품 이상은 비색 옷을, 16품 이상은 청색 옷을 입도록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성실한 놈의 풍모로구나.”라고 하였다. 고이가 자신의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 十四年辛巳, 春二月晦, 上, 與<玉帽>, 會于<卒本海>上, 觀漁. 聞<羅><達伐城>以柰麻<克宗>為城主.  命<南部>採蔘以尉<玉帽>.
三月, <古爾>, 請和于<沾解>, 送女及馬, 却之. 時, <古爾>, 以<真可>為內頭, <優豆>為內法, <高壽>為衛士, <昆奴>為朝廷, <惟己>為兵官. 皆云, <羅>・<麗>相婚, 非國家之福. 離間而請和者也.
十二月 二十八日, <沾解>暴殂. <助賁>婿<味鄒>立, <玉帽>之弟也.  上書請立, 曰;“姪皇棄國. 群臣以臣監國. 臣才庸劣不足以立. 姊后・兄皇, 宜择可人.” 上, 與<玉帽>同寢于<檀宮>, 聞此急報, 問於<玉帽>, 曰;“爾弟<味鄒>謹厚長者也. 不亦可乎.” <玉帽>泣, 曰;“妾已負國從夫, 夫皇之心乃妾之心也.” 上, 乃使<明臨於潤>, 封勅徃<羅>, 封<味鄒>為<新羅國>皇帝・<東海>大王・右衛大将軍, 賜金・銀印・袌・冕. 此乃壬午正月二十五日也.
<索頭>, <伊鹿肥>遣子<沙漠>于<魏>, <魏>留之.

○ 14년{단기2594년/AD261}신사, 춘2월, 그믐날,

상이 옥모와 함께 졸본해 위{북}쪽에서 만나 고기잡이 하는 것을 돌아보다가, 신라의 달벌성이 내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부에 명하여 삼을 캐서 옥모를 위안케 해주었다.3월에 고이가 첨해에게 화친을 청하며 딸과 말을 보냈으나, 물리쳤다. 이때, 고이는 진가를 내두좌평으로, 우두를 내법좌평으로, 고수를 위사좌평으로, 곤노를 조정좌평으로, 유기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가 신라와 고구리가 서로 혼인을 하는 것은 나라{백제}에 복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간하고자 청혼한 것이었다.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옥모와 단궁에서 동침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는, 옥모에게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기가 가장 나으니, 또한 해 볼 만하지 않겠소?”라 물으니, 옥모가 눈물 흘리며 답하길; “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아비이신 황상의 뜻이 소첩의 뜻이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그날이 바로 임오년{단기2595년/AD262} 정월 25일이었다.색두의 이록비가 아들 사막을 위에 보냈더니, 위가 그를 가두었다.

◎ 十五年壬午, 正月, 會<明臨>氏・<椽>氏・宗戚女子, 宴<玉帽>皇后于<大角宮>.  聞<沾解>喪, 上, 與<玉帽>, 擧哀于<檀宮>.  二月, 上, 與<玉母>皇后, 如「溫湯」. 命画<玉帽>像十幅, 立<鷄林聖母祠>, 揭之. 幷祀<閼智>・<勢漢>・<阿道>・<首留>・<旭甫>・<仇道>六祖. 上, 與<玉帽>, 献酌于<仇道>, 曰;“久聞<仇道>大王之英雄矣. 今為吾父. 可不敬愛歟.” <玉帽>曰;“妾亦願<東明>神祖之庙.” 上, 許之, 乃如<卒本>, 生<檀>太子.  秋七月, 上, 與<玉帽>, 畋于<箕丘>, 得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羅>使来献土物, 言;“是年, 三月, 龍見宫東池. 七月, <金城>西門災, 延燒民家百余區.”

○ 15년{단기2595년/AD262}임오, 정월,

그믐날에 명림씨와 연씨 및 종척의 여인들을 대각궁에 모아놓고 옥모황후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첨해를 장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은 옥모와 함께 단궁에서 거애하였다.  2월, 상은 옥모황후를 데리고 온탕으로 가서, 옥모의 초상 열 폭을 그리게 하고는, 계림성모사를 세워서 거기에 걸어 놓았다. 여섯 조상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를 한데모아 제사토록 하였다. 상이 옥모와 함께 구도에게 술을 따라 올리더니, 말하길; “구도대왕이 뛰어나게 용맹하셨음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고, 지금은 나의 부친{=장인}이 되셨는데,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되겠소?”라 하였다. 이에 옥모가 말하길; “첩 또한 훌륭하신 조상님이신 동명의 사당에 가서 술을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이를 허락하자, 졸본으로 갔다가, 단태자를 낳았다.  추7월, 상은 옥모를 데리고 기구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동11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금년 3월에 궁궐의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으며, 7월에는 금성의 서쪽 문에 불이 났는데, 민가 100여 구역을 연이어 태웠다.”고 하였다.

◎ 十六年癸未, 春正月, <味鄒>, 遣使献土物, 曰;“以伊飡<良夫>為舒弗邯兼知內外兵馬事.” 乃<玉帽>之命也. 二月, <味鄒>, 祀其祖庙, 祔<仇道>葛文王. 上, 遣<門夫>太子, 傳香.  四月, 上, 與<玉帽>, 入山宮, 謁<鱣>太后.  命「五部」採金.

○ 16년{단기2596년/AD263}계미, 춘정월,

미추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길; “이찬 량부를 서불감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옥모의 명이었었다. 2월에 미추가 자신의 조상 사당에 제사하고, 구도갈문왕 사당에 함께 모셨다. 상은 문부태자를 보내어 제사지낼 향을 전하였었다.  4월, 상과 옥모가 산궁으로 들어가 전태후를 찾아뵈었다.  「5부」에 명하여 금을 캐게 하였다.

◎ 十七年甲申, 春二月, 如<卒本>祀<龍山陵>, 立<召>太后廟.  <味鄒>東巡望海, 三月至<黃山>, 問貧老賑其窮.  <鱣>后生<趙>公主.

○ 17년{단기2597년/AD264}갑신, 춘2월,

졸본에 가서 용산릉{芻牟陵}에 제사하고, 소태후{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  미추가 동쪽으로 순시하여 바다를 보았고, 3월에는 황산에 이르러서 빈한한 노인들을 찾아보고 궁한 이를 진휼하였다.  전후가 조공주를 낳았다.

◎ 十八年乙酉, 二月, 命磁器・玉器以鹿・麟為坮<玄武>, 為繪鷄冠為盖.  <朱>后生<花>公主. 后, 年六十一. 上, 賜衣酒, 以慰之.  始火・米・雉・龍為袌, 金冠玉花為冕.

○ 18년{단기2598년/AD265}을유, 2월,

자기와 옥기를 만드는 이들에게 명하여 사슴과 기린을 만들어 현무의 받침으로 하고, 닭의 벼슬을 비단에 그려서{수를 놓아서} 덮개로 하라고 명하였다.  주후가 화공주를 낳았다. 후의 나이는 61살이었다. 옷과 술을 내려 위로하였다. 비로소 “화{火}・미{米}・치{雉}・용{龍}”의 문양이 들어간 곤룡포를 입고, 옥화로 꾸며진 금관을 면류관으로 쓰게 되었다.

◎ 十九年丙戌, 二月, <金人城><周>, 以黃金七斤製雙柱金冠, 以紫玉為花, 名曰<歡喜天冠>.
八月, <濟>攻<羅><烽山城>. 城主<真萱>, 率壯士二百人擊破之, 進一吉飡.
東宮如<朱>后宮, 以后宜男, 而善子.

○ 19년{단기2599년/AD266}병술, 2월,

금인성의 주가 황금 일곱 근으로 쌍기둥을 세운 금관을 만들고, 자색 옥화로 장식하였다. 그 이름을 환희천관으로 하였다.  8월에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니, 성주 진훤이 장사 200인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고는, 일길찬으로 승진하였다.  동궁이 주후의 궁을 찾아 갔으며, 주후는 남자라면 가리지 않았기에, 유감없이 즐겼다.

◎ 二十年丁亥, 四月, 流<杜訥原>主<虎句>於<新城>. <虎句>潛通<貫那>, 事發. 欲誅評者, 以功臣之子, 竄之. 而欲復召<貫那>, <要>皇后諫, 曰;“天子, 不可無信於民.” 乃止.  <朱>后生東宮女<敦>公主.

○ 20년{단기2600년/AD267}정해, 4월,

두눌원 주 호구를 신성으로 유배를 보냈더니, 호구가 관나와 몰래 연통하였다. 일이 드러나서, {관나의} 평자를 주살하려 하였더니,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내치기만 하였다. 관나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였더니, 요황후가 말리며 말하기를; “천자는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아니 됩니다.”라고 하기에 그만두었다.  주후가 동궁의 딸 돈공주를 낳았다.

◎ 二十一年戊子, 三月, 送<勧善文>于「五部」, 坊坊習之. 一曰忠, 二曰孝, 三曰貞, 四曰友, 五曰悌.
<新羅>, 春夏旱, 問政得失, 察民疾苦.

○ 21년{단기2601년/AD268}무자, 3월,

권선문을 「5부」에 보냈더니, 동네마다 그것을 익혔다; 하나는 충성, 둘은 효, 셋은 정절, 넷은 우애, 다섯은 화평이라고 되어 있었다.신라에서는 봄과 여름이 가물자, 정사의 잘잘못을 묻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다.

◎ 二十二年己丑, 九月, <百濟>, 星孛于<紫微宮>. 十月, <明臨>太后崩, 春秋六十五. 上, 以<濟>孛應於后, 異之. 皆云, 子國之星應於母國, 何異之有.

○ 22년{단기2602년/AD269}기축, 9월,

백제에서는 혜성이 자미궁으로 흘렀다. 10월에 명림태후가 춘추 예순다섯에 죽었다. 상이 백제에서 혜성이 흘렀는데 명림후에게서 조응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다고 여겼더니, 모두들 자식나라에서 혜성이 흐르고 모국에서 조응하였음을 어찌 이상하게 여기느냐고 하였다.

◎ 二十三年庚寅, 冬十月, 幸<杜訥原>, 與<貫那>遊連十日, 疾作而崩. 又云, 灌太后於<靑木宮>而崩. 春秋四十六. 葬於<中川之原>. 是年四月, 畋于<平山>, 載<觧熟>女<門>而皈, 年十五. 至是娠.

○ 23년{단기2603년/AD270}경인, 동10월,

두눌원으로 거둥하여 관나와 함께 연달아서 즐기기 열흘에 병들어 죽었다. 청목궁에서 태후에게 정성을 쏟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춘추 46세였다. 중천원에 장사했다. 이 해 4월에, 평산에서 사냥하고 나서 해숙의 딸 문을 태워서 돌아왔었는데, 나이 열다섯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아이가 생겼다.

■중천왕

중천왕은 224년에 출생하였고 243년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248년 동천왕이 붕어하자 즉위했습니다.248년 11월 동생들인 고예물(預物)과 고사구(奢句) 등이 모반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모두 처형당했는데 이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일어난 왕족간의 다툼이 발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의 고구려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부자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중천왕의 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며 250년 국상(國相)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국상은 명림어수였습니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王后 椽氏)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대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는 극형을 내렸으며 254년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습니다. 256년 공주를 연나부 출신인 명림홀도와 혼인시켰습니다.259년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본인이 친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되는 양맥에서 친정해 이들을 격파하고 8,000여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선왕인 아버지 동천왕이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침략을 당해 작살이 났던 것을 생각해보면 단단히 복수를 한 셈으로 263년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중국의 통일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중천왕도 이에 대비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270년 승하했고 중천(中川)의 들에 장사지냈습니다.중천왕은 인생에 꽤나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데 어렸을 때는 위나라의 침입으로 크나큰 고초를 겪었고 장성하여 왕이 된 후에는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동생들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왕을 두고 여인들의 암투도 겪었습니다.대무신왕과 파란만장한 일생이 비슷한데 결국 위나라 병사들을 괴멸시키고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도 합니다. 그의 장남은 요절하여 사후에 차남인 서천왕이 즉위했습니다.정사를 제대로 펼쳐 인재를 잘 골라 쓰고 순장을 금지시키며 역사서에도 언급될만큼 지혜롭고 총명한 성군이었고 게다가 고구려에게 굴욕을 준 위나라를 격파하여 8,000여 명의 수급을 베는 등 활약상이 컸던 왕이었습니다.

※삼국사기 중천왕 본기

一年秋九月 중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연씨를 왕후로 삼다
一年冬十一月 왕의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을 일으키다
三年春二月 국상 명림어수에게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다
四年夏四月 왕이 관나부인을 죽이다
四年夏四月 음우를 국상으로 삼다
四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다
八年 약로를 왕태자로 삼다
九年冬十一月 명림홀도가 부마도위가 되다
九年冬十二月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전염병이 유행하다
十二年冬十二月 조위의 침략을 물리치다
十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十五年秋七月 왕이 흰 노루를 잡다
十五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冬十月 중천왕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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