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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6대 신명선제_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다

by 마음heart 2023.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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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6대 신명선제

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다



신명선제의 이름은 재사인데 혹은 록신이라고도 한다. 대무신제의 별자 즉 서자이다. 어머니는 갈사태후라고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해소인데 유화부인이 금와에게서 난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어진 것을 좋아하며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다. 또한 병사를 이용하는데 능하다.  언변이 좋고 항상 아는 것도 모르는듯하였다. 동복형인 호동이 비명에 죽어 슬퍼하였다. 민중제가 죽으매 나랏사람들이 재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지만 거절하며 말하기를 "적자가 있고 서자의 마땅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났다. 모본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어 선왕(仙王)으로 봉하였다. 부여를 평정함에 공이 있었다. 모본이 시해되자 마락 등이 그를 모시니, 동도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고, 연호를 신명으로 고쳤다.

帝, 諱<再思>, 又曰<鹿臣>. <大武神帝>別子也. 母, 曰<曷思>太后, 其父<解素>, <柳花>夫人所生<金蛙>子也. 性, 聰悟好仁, 讀仙書, 通医藥, 又能用兵. 善辯而常黙然如不知. 哀其胞兄<好童>死於非命故也. <閔中帝>崩, 國人欲立之, 固辞, 曰;“嫡子在, 非庶子之所勘當也.” 遂奉母而走. <慕本>, 亦義其志, 封為<仙王>. 平<扶余>乱有功. <慕本>被弑, <麻楽>等迎之, 卽位於「東都」神宮. 大赦. 改元曰<神明>.


◎ 元年癸酉, 冬十二月, 以<麻勁>為大芻加․<淹淲公>. <松宝>太輔. <烏希>左輔. <羽真>右輔. <麻楽>主兵大加․大注簿. <松豆智>中畏大夫. <穆卓>・<達賈>左․・右将軍. 以<葦花>․<芦花>為皇后. <麻>氏․<羽>氏副后. <葦花>, <好童>女也. <芦花>, <王文>女也, <曷思>太后之弟也. <麻勁>女․<羽真>女, 皆<慕本>后也. 因太輔之請, 皆納後宮.  以<慕本>子<翊>為太子.  <■林>使<八阪比邪>来朝.

○ 신명 원년{단기2406년/AD73}계유, 겨울 12월

마경을 대추가․엄표공으로, 송보를 태보로, 오희를 좌보로, 우진을 우보로, 마락을 주병대가․대주부로, 송두지를 중외대부로, 목탁과 달가를 좌・우 장군으로 삼았다. 위화와 호화를 황후로 삼고, 마씨와 우씨를 부후로 삼았다. 위화는 호동의 딸이다. 호화는 갈사 태후의 남동생인 왕문의 딸이다.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은 모두 모본의 후였었는데, 태보의 요청에 따라 후궁이 되었다.  모본의 아들 익을 태자로 삼았다.■림이 팔판비사를 시켜 래조하였다.

◎ 二年甲戌, 正月, 立<宮>太子為東宮. 與<芦>皇后習政事. 是年, 七歲, 能知大體, 事多得中.  八月, <濟>侵<羅>邊.  十月, <朱那>反.
<漢>, 攻<西域><車師>, 破之.

○ 신명 2년{단기2407년/AD74}갑술, 정월

궁 태자를 동궁으로 세웠는데, 호황후와 함께 정사를 익혔다. 그 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능히 정사의 큰 줄거리를 깨달았고, 운영함에 적중함이 많았다.  8월, 백제가 신라의 변방을 침입했다.  10월, 주나가 반란하였다.한이 서역의 거수를 쳐서 파하였다.

◎ 三年乙亥, 三月, 開仙院. 以<尙仁>為師. <仁>能通<漢>音及字, 以畵敎人, 人皆仰之如神.  <羅>, 飢, 賑. 十月, <濟>奪<蛙山>.  平<朱那>.
八月, <漢>主<{昜}>死, 年四十八. 子<明帝><子炟>立, 年二八. ■■■■.

○신명 3년{단기2408년/AD75}을해, 3월

선원을 열고, 상인을 스승으로 삼았다. 상인은 한의 음{읽는 법}과 자{쓰는 법}에 능통하여,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더니, 사람들은 인을 신과 같이 추앙하였다.  신라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10월엔 백제가 와산을 빼앗았다.  주나를 평정하였다.  8월, 한주 {양}이 나이 48살에 죽어, 아들인 명제 자달이 16살에 섰다. ■■■■.

◎ 四年丙子, 十月, <東沃沮>反, 討平之.  九月, <羅>復<蛙山>.

○ 신명 4년{단기2409년/AD76}병자, 10월

동옥저가 배반하여, 토벌․평정하였다.  9월, 신라가 와산을 되찾았다.

◎ 五年丁丑, 二月, <松宝>薨. <烏希>太輔, <羽真>左輔, <高敬>右輔.  八月, <羅><吉門>, 與<加耶>戰于<黃山津口(<漢江>․<昭陽江>合水地)>, 獲千餘級, 為海飡.  十月, <扶余>献三角鹿․長尾兎, 以為太后瑞, 大赦.  至月雪三尺.

○ 신명 5년{단기2410년/AD77}정축, 2월

송보가 죽어, 오희를 태보로, 우진을 좌보로, 고경을 우보로 삼았다.  8월, 신라의 길문이 황산진구에서 가야와 싸워, 천여 급을 베고 해찬이 되었다.  10월, 부여가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태후{曷思태후는 왕문의 누이; 동부여 태생}의 경사{환갑?}를 위함이었다. 죄수들을 크게 풀어줬다.  눈이 달포가 되도록 내리더니 3척이나 쌓였다.

◎ 十年壬午, 正月, 設五部仙院. 雖執戟之士亦授仙道. 以仙師<尙仁>為<海山>高士以摠仙政. 以寡慾(愼食色權)・靜黙(不動不言)・合天(窮理自知)為其仙要.  <羅>, 勸農桑, 整兵仗.  <麻>后生女<芸>.  復<烏>氏為太后.

○ 신명 10년{단기2415년/AD82}임오, 정월

5부에 선원을 두었다. 미륵창{끝이 둘로 갈라진 창}을 잡은 남자{무사} 또한 선도를 가르쳤다. 선사 상인이 해산고사가 되어 선정을 총괄하였다. 과욕(신식색권)・정묵(부동불언)・합천(궁리자지)함이 선의 요체였다.  신라가 뽕나무 키우기를 권장하고, 병장기를 정비하였다.  마후가 딸 운을 낳았다.  오씨가 태후로 복위되었다.

◎ 十四年乙酉, 五月, 築<南蘇城>.  <麻>后[生]子<邯>.  <羅>․<濟>相爭.

○ 신명 14년{단기2419년/AD86}을유, 5월

남소성을 쌓았다.  마후가 아들 감을 낳았다.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웠다.

◎ 十六年丁亥, 正月, 命<尙仁>修<三代鏡>.  <烏希>薨. <羽真>太輔, <高敬>左輔, <乙祥>右輔, <乙景>主兵大加.  <羅>築<加召>․<馬頭>二城.

○ 신명 16년{단기2421년/AD88}정해, 정월

상인에게 3대경을 다듬으라고 명하였다.  오희가 죽어, 우진을 태보로, 고경을 좌보로, 을상을 우보로, 을경을 주병대가로 삼았다.  신라가 가소와 마두 두 성을 쌓았다.

◎ 二十一年癸巳, 四月, 巡觀五部. 選民俊才, 敎爾德․六藝. 禁民崇尙淫乱․賣子․賣妻.  <羽真>薨. <高敬>․<乙祥>陞, 拜<扶謙>右輔, <高英>主宮.  <羅>, <允良>伊飡, <啓其>海飡. <濟>, <橫岳>大石一時墜落.

○ 신명 21년{단기2426년/AD93}계사, 4월

5부를 돌아보고, 재능이 뛰어난 민간인을 선벌하여 도덕과 6례를 가르쳤다. 민간에서 음란함을 숭상하거나 자식과 처첩을 파는 것을 금하였다.  우진이 죽었다. 고경과 을상을 승차시켰고, 부겸을 우보로, 고영을 주궁{대가}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윤량을 이찬으로, 계기를 해찬으로 삼았다. 백제에서는 횡악{=橫山}의 큰 돌들이 일시에 추락하였다.

◎ 二十二年甲午, 二月, <乙祥>薨. <扶謙>左輔, <乙景>右輔.  <羅>, <吉元>, 與<加>戰于<馬頭城>, 大捷.  <烏>太后崩, 葬于<閔中原>. 年八十.

○ 신명 22년{단기2427년/AD94}갑오, 2월

을상이 죽어 부겸을 좌보로, 을경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의 길원이 가야와 마두성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오태후가 죽어 민중원에 장사하였다. 나이 80이었다.

◎ 二十四年丙申, 七月, <曷思>太后崩, 春秋七十七. 上, 减食遠色, 葬于<大武獸林陵>.  七日, 仙人會者万数.  <羅>, <加召城>主<長世>, 與<加耶>戰死. <紫蒙>主<射旭>殂. 弟<射滿>立.

○ 신명 24년{단기2429년/AD96}병오, 7월

갈사 태후가 죽었다. 춘추 77세였다. 상은 감식하고 색을 멀리했다. 대무수림릉에 장사했다.  7일{칠석}, 선인들이 모였는데 그 숫자가 만을 넘었다.  신라의 가소성주 장세가 가야와 싸우다 죽었다.  자몽주 사욱이 죽고, 그의 동생 사만이 섰다.

◎ 二十五年丁酉, 正月, 詔曰;“御園長尾兎․三角鹿, 似是年久之物, 能知人意. 况民年久者, 豈無可師者. 其令中外年老有識者, 敎其所長於隣里, 以為文․字, 以記之.”  <加耶>, 與<羅>修和.  <濟>, 有二竜見於<漢水>, 云.  <旭>子<鷄山>殺<滿>而自立.  <應黙>奔漠北.

○ 신명 25년{단기2430년/AD97}정유, 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어원의 ‘장미토’와 ‘삼각록’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사람의 마음을 잘도 알아채고 있소. 하물며 민간의 나이 많은 사람이 가르치지 못할 리 없다. 도성 안과 밖에서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은 좋은 사람으로, 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 글과 문자를 가르치는 영향력이 있는 자들을 기록하여 올리라.” 하였다.  가야가 신라와 화친하기로 하였다.  백제에서는 용 두 마리가 한수에 나타났다고 한다.  욱의 아들 계산이 만을 죽이고 위에 올랐다.  응묵이 사막 북쪽으로 도망했다.

◎ 二十六年戊戌, 三月, 上, 東巡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入城, 宴父老․守吏․有道之士, 賜物暇有差, 紀功于大岩. 十月, 還. 是行, 上, 遠至<東海谷>, 望日岺壮観湖, 受<藻那>・<朱那>・<貫那>之貢. 諸島酋之献白熊․膃肭者亦多.  以<穆卓>為<沸流>沛者. <卓>, <東明>功臣<黙居>之女孫也, 鎭<扶余>之乱而有功.  鸞集于「西 都」王庭. 命有司祭之.

○ 신명 26년{단기2431년/AD98}무술, 3월

상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아서 성에 들어가, 나이 든 부로와 수자리 관리 및 도리를 지키고 사는 선비{有道之士}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 있게 재물과 말미{휴가}를 주었으며, 그 공적을 큰 바위에 새겨 주었다. 10월, 순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금번 순행에서 상은 멀리 동해곡{동북평원 저지대?; 또는, 흥개호 주변?}까지 행차하여 해 뜨는 고개와 장관인 호수도 둘러보았으며, 조나,주나,관나의 공물도 받았다. 여러 섬의 추장들이 바친 흰 곰과 물개도 또한 많았다.  목탁을 비류패자로 삼았다. 목탁은 동명의 공신 묵거 딸의 손자이다. 부여의 반란을 진압함에 공이 있었다.  란새가 「서도{<芻牟>末度, <光明>初都}」의 왕궁 뜰에 모여들었다. 관리에게 명하여 란새 들에게 제사하게 하였다.

◎ 二十九年 辛丑, 二月, <高敬>薨. <扶謙>太輔, <乙景>左輔, <禾玄>右輔.  <羅>移<月城>, 周千二十三步, 云.

○ 신명 29년{단기2434년/AD101}신축, 2월

고경이 죽었다. 부겸을 태보로, 을경을 좌보로, 화현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가 월성으로 이사했다. 월성의 둘레는 1,023보가 된다고 한다.

◎ 三十年壬寅, 正月, 以<高朱利>為<東海谷>太守, 使鎭<北海>及島酋. <朱利>, <高娄>之孫也, 質重似愚而內明. 上, 以<東海谷>為可守而設官, 遠無欲去, <朱利>自請徃之. 人皆危之.  八月, 遣使<朴>者于[<柵城>]賑民失農者, 給牛羊而勧蓄.  十月, 行<東明大祭>. <扶余>姬子八人呈舞. 神馬五十匹犍于<巨婁原>.

○ 신명 30년{단기2435년/AD102}임인, 정월

고주리를 동해곡태수로 삼아 북해와 섬들의 추장을 잘 다독거리라고 하였다. 주리는 고루의 손자인데, 본바탕이 묵직하여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속은 명철하였다. 상은 동해곡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여겨 관리를 두려 하였는데, 멀다고 아무도 가려하지 않고 있던 중에, 고주리가 자청하여 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동해곡으로 부임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8월, 박이라는 사람을 [책성]으로 보내서, 농지를 잃은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소와 양도 나누어주어 짐승을 키우도록 하였다.  10월, 동명대제를 치렀다. 부여의 여인과 사내아이 여덟이 춤을 바쳤다. 신마 50필을 거루원에서 거세했다.

◎ 是年八月, <音汁伐國>興, 與<悉直谷國>, 爭彊. <羅>, 召<首露>決之而還, 使六部餞之. <韓祇>獨以位卑者待之, 他皆伊飡待之. <首露>奴<耽下里>, 殺<韓祇>守<保齊>, 而逃依于<音汁伐>主<他鄒干>家. 索之, 不送. 故<羅>遂伐<音汁伐國>滅之.  是年, <羅>又使<居道>滅<悉直>․<押督>. 先是, <羅>, 使<居道>牧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馳戱樂以為常事. 二國, 在傍, 見之而不怪, 曰;“馬叔之, 年例.” 至是, 其兵士遂襲二國, 云.

○ 이 해 8월 음즙벌국이 흥성하여, 실직곡국과 땅을 놓고 다투었다. 신라가 수로를 불렀고, 수로가 이 일을 처결한 후 돌아갔다. 6부에게 송별연을 베풀게 하였는데, 한기부 혼자만 직위가 낮은 사람을 내어 접대하려 했고, 다른 부들은 모두 이찬을 내보냈었다. 수로> 종자 탐하리가 한기의 수{관리} 보제를 죽이고 도망하여 음즙벌국주인 타추간의 집안에 의탁하였다. 샅샅이 뒤져도 내어놓지를 않자, 신라가 음즙벌국을 쳐서 없애버렸다. 이 해에 신라는 거도를 시켜 실직과 압독도 쳐서 없애버리라고 했다. 이에 앞서 신라는 거도를 시켜 장토벌에서 말을 키우게 하였었고, 병사들이 말달리는 놀이를 즐겼다. 이런 일이 항상 있어 왔기에, 이웃한 두 나라{마을}는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말을 모으는 일은 매년 있던 일이었다.”라 하였는데, 이번에는 {신라의} 병사들이 끝내 두 나라{마을}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 三十二年甲辰, 正月, <扶謙>薨, <乙景>太輔, <禾玄>左輔, <尙仁>右輔.  三月, <麻>皇后崩, 春秋六十二. 后以<勁>之女, 忠直好善. 初為<慕本>后, 生子<翊>及<典>公主・<宋>公主・<馬>公主, 而以直諫見廢. 上, 卽位之初, 納之為副后. 以年高, 以有德, 諸后皆敬之以兄. 豊富而善産生, 上七子二女, 皆賢. 上, 以是益賢之, 封為第三皇后.  <羅>, 與<悉直>, 相戰.  <射滿>子<應默>, 立國於漠北, 遣子<[梪]功>献駝五匹.

○ 신명 32년{단기2437년/AD104}갑진, 정월

부겸이 죽어, 을경을 태보로, 화현을 좌보로, 상인을 우보로 삼았다. 3월, 마황후가 죽었다. 춘추 62세였는데, 마경의 딸이었고, 충직하고 선한 것을 좋아했다. 애초에는 모본의 후가 되어 익태자와 전공주・송공주・마공주를 낳았는데, 직간하다가 폐위 당했었다. 금상이 즉위 초에 거두어 부후로 삼았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어 여러 후들이 형으로서 존경하였으며, 몸이 풍만하고 여유가 있어, 아이를 탈 없이 잘 낳아, 7남 2녀를 {더} 낳아 바쳤는데, 모두가 현명하였다. 상은, 마황후가 점점 현숙하여 짐을 보아, 셋째 황후로 봉하였었다.  신라와 실직이 서로 싸웠다.  사만의 아들 응묵이 사막 북쪽 땅에 나라를 세우고, 아들 [두]공을 보내 낙타 다섯 필을 바쳤다.

◎ 三十三年乙巳, 正月, <扶余>献丈二黃虎․丈一白熊毛色明無尾. 使御苑大壯虎, 字之以取種.  三月, 鎭北将軍<麻樂>重修<盖馬>諸城, 率<貊>騎, 伐<遼東>取<白岩>・<長岺>・<菟城>・<汶城>・<章武>・<屯有>等六城, <漢>人大驚慌忙, 以<耿夔>為守而来戰. <宮>太子, 與使者<穆度婁>, 率輕騎深入敵陣, 左右衝突而大破之.  <羅>・<濟>復和.

○ 신명 33년{단기2438년/AD105}을사, 정월

부여가 두 길이나 되는 누런 호랑이와 털의 색깔이 밝고 꼬리가 없는 한 길 되는 흰 곰을 바쳤다. 크고 우람한 호랑이를 어원에서 길러서 새끼를 내게 하였다.  3월, 진북장군 마락이 개마의 여러 성을 고쳐 쌓고,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장령,도성,문성,장무,둔유 등 6 성을 빼앗았다. 한인들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고, 경기가 수장{守将}이 되어 나와서 싸웠다. 궁태자가 사자 목도루와 함께 날랜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 들이쳐서 크게 파하였다.  신라와 백제가 다시 화친했다.

◎ 三十四年丙午, 正月, <白岩>太守<鄭元>, 與<耿夔>戰于<章武>失利, <宮>太子親征復之. 以<松豆智>為<遼東>太守.  左輔<禾玄>薨, <尙仁>代之. <麻樂>右輔.  <羅>, 賑<押督>, 而命<馬頭城>主伐<加耶>.

○ 신명 34년{단기2439년/AD106}병오, 정월

백암태수 정원이 경기에 맞서 장무에서 싸우다 밀려나니, 궁태자가 친히 정벌하여 복구하였다. 송두지를 요동태수로 삼았다.  좌보 화현이 죽어 상인이 대신하게 하고, 마락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가 압독사람들을 진휼하고,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쳤다.

◎ 三十五年丁未, 七月, <乙景>薨, <尙仁>代之, <高德>左輔.  九月, 獵<質陽>, 獲紫獐雌雄, 育之.


○ 신명 35년{단기2440년/AD107}정미, 7월

을경이 죽어 상인이 대신하게 하고, 고덕을 좌보로 삼았다.  9월, 질양에서 사냥하여 자색 노루 한 쌍을 잡아, 이를 길렀다.

◎ 三十七年乙酉, 三月, <麻樂>伐<右北平>, 虜生口二千․經{籍}之士七人, 而皈.  <羅>, 幷<比只>・<多伐>・<草八>三國.  秋, 飢賑民.  <末曷>掠<濟><牛谷>.七月, <漢>使<張吉>来, 献檀香及道德, 言請和.

○ 신명 37년{단기2442년/AD109}을유, 3월

마락이 우북평을 쳐서 생구 2 천과 경적지사{經籍之士} 일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비지,다벌,초팔 세 나라를 병합하였다.  가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말갈이 백제의 우곡을 노략하였다.  7월, 한{漢}이 장길을 시켜 찾아와, 단향과 도덕경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 三十九年辛亥, 二月, <松豆智>, 與<漢>約和定彊, 有失. 上怒, 配<豆智>于<沸流>.  三月, 置<大藥>・<肖門>・<孝經>等院, 敎民<本草>․造象․孝道.  命<麻楽>伐<漢>.  四月, <尙仁>病退, <高德>代之. <麻楽>左輔, <羽靖>右輔. <好万>中畏大夫, <葦>皇后弟也.

○ 신명 39년{단기2444년/AD111}신해, 2월

송두지가 한{漢}과 화친을 약속하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잃은 것이 있었다. 상이 이에 노하여 두지를 비류로 귀양 보냈다.  3월, 대약원,초문원,효경원 등의 학원을 두었고, 민간에게 본초와 상{象} 만들기 및 효도를 가르쳤다.  마락에게 명하여 한{漢}을 치게 하였다.  4월, 상인이 병들어 물러나니, 고덕이 대신하였고, 마락이 좌보를, 우정이 우보를 맡았다.  호만이 중외대부가 되었는데, 위황후의 동생이었다.

◎ 四十年壬子, 二月, <羽靖>薨, <好萬>右輔.  五月, 上, 幸<海山>. 禅位于<宮>太子, 自為<海山>仙皇, 總執內外仙政. 以<尙仁>․<高德>, 左․右太師. <好万>為仙相. <葦>皇后․<羽>皇后為左․右仙后. 以<芦>后為攝政太后. 於是, 軍國之政總皈於太子, 卽位於「西 都」<鸞臺>.

○ 신명 40년{단기2445년/AD112}임자, 2월

우정이 죽어 호만이 우보가 되었다.  5월, 상은 해산으로 납시었다. 궁태자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해산선황이 되어 내외선정을 총괄하신 것이었다. 상인과 고덕을 좌․우 태사로 삼았고, 호만을 선상{仙相}으로 삼았으며, 위황후와 우황후는 좌․우 선후로 삼고, 호후를 섭정태후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군국정사는 태자{宮 태자}에게로 돌아가게 되어서, 서도의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의 기록이 다른 것 중 삼국사기의 6대 태조왕이 고구려사략에서는 신명선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고구려 태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는데 조선 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인데 여기에는 평균의 함정이 숨어있습니다.바로 태조왕과 차대왕,신대왕의 3대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후대의 고려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태조대왕의 비상식적인 재위기간은 논란이 끊이질 않으며 여러 의문점을 보여주는데 47년에 태어나서 53년부터 146년까지 총 93년을 재위했으며 심지어 165년에 사망해 무려 118세를 살았는데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며 6대 군주인데 왜 시호가 한나라를 건국한 태조인가하는 점이며 2대 군주 유리명왕부터 5대 군주 모본왕은 삼국사기에 '해씨'라고 나오는데 왜 6대 군주 태조대왕부터는 '고씨'라고 기록되었나?하는 것입니다.고구려사략에서는 신명선제의 재의 40여년이 태조대왕 이전에 등장하면서  태조대왕의 비상식적인 재위기간이 53년으로 줄어들면서 현실성있는 재위기간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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