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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3대 대무신제기_부여를 복속하고 정복국가 고구려로 거듭나다

by 마음heart 2023.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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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3대 대무신제기

부여를 복속하고 정복국가 고구려로 거듭나다



○ 대무 원년{단기2361년/AD28}무자, 11월

연호를 대무로 고쳤다. 다물후인 송의를 태보 겸 주민대가로 삼고, 모친인 송후를 태후로 올렸으며, 비{妃}였던 진 공주를 황후로 올렸다. 용산{동명릉}에 가서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이해에 나이 25세였다.

◎ 元年戊子, 十一月, 改元<大武>. 以<多勿候><松義>為太輔․主民, 以母<松>后為太后, 以妃<珍>公主為皇后. 如<龍山>, 告卽位. 時, 年二十五.

○ 대무 2년{단기2362년/AD29}기축, 정월

황후가 아들 대해를 낳았기에, 천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한남{汗南}국이 가물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의지하려는 이들이 1,000여 호가 되었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서하에서 살도록 하였다.  12월, 한{汗}수변에서 크게 병마 훈련을 하였다. 오루를 우보로 삼고 군사도 주관케 하고, 송옥구는 비류패자를 삼고 형벌도 주관케 하였다.  온조가 나라이름을 한남{汗南}에서 백제로 바꾸었으며, 해루를 태보로 삼았다. 해루는 해소의 둘째 아들이다. 대불이 대소의 딸 고야를 후로 삼았다.

◎ 二年己丑, 正月, 皇后生子<大觧>, 大赦天下.  <汗南>, 旱蝗民飢, 来投者千余戶. 賑恤而置之<西河>.  十二月, 大鍊兵馬于<汗>濱. <烏婁>右輔․主兵. <松屋勾><沸流>沛者․主刑.  <溫祚>改國號曰<伯濟>, 以<觧婁>為太輔. <婁>, <觧素>之次子也.  <帶弗>以<帶素>女<高耶>為后.

○대무 3년{단기2363년/AD30}경인, 3월

오루의 딸을 받아들여 제3황후로 삼았는데, 그녀의 모친은 람 공주이다.  11월, 비류수 위쪽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저절로 끓는 큰 솥을 얻게 되어 모든 군사가 배불리 먹었으며, 이 솥을 지고 다닐 사람도 얻었다.

◎ 三年庚寅, 三月, 納<烏娄>女為苐三皇后. 其母, <藍>公主也.  十一月, 鍊兵于<沸流水>上, 得自熱大鼎, 一軍飽食, 又得負鼎者.

○ 대무 4년(단기2364년/AD31)신묘, 12월

우보 을두지를 행군대주부로 삼고, 친히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이물림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쇠붙이 소리가 들리기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더니, 금인장과 보인{보검} 등과 병물을 얻게 되었다. 고루는 “하늘이 내려 준 것입니다.”라 하였고, 상은 엎드려서 받았다. 다음날엔 북명사람 괴유를 얻어 선봉으로 삼고, 적곡{赤峯부근?}사람 마로를 얻어 유격으로 삼았더니, 진격하여 가와 송강을 취하여 감독하였다.  이 해에 상은 추각소의 처를 맞아들여 대실부인으로 삼았다.

◎ 四年辛卯, 十二月, 以右輔<乙豆智>為行軍大注簿, 親征<東扶餘>. 至<利勿林({舂}得利界)>宿夜, 聞金聲, 使人尋之, 得金璽宝釼等兵物. <高婁>曰;“天賜也.”, 上拜受之. 翌日, 得<北溟>人<怪由>為先鋒, <赤谷>人<麻盧>為遊擊, 進援括<街(撫遠)>․<松江>.  是年, 上納<芻殼素>妻為<大室>夫人.

○ 대무 5년{단기2365년/AD32}임진, 2월

책성의 남쪽까지 진군하여 높은 언덕에 진영을 차렸는데, 사면이 진창이어 인마가 모두 진창에 갇히게 되었다. 고루태자의 군대가 진창 속에서 대불{<동부여>왕}과 맞붙어 싸웠다. 태자가 군대의 앞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으나, 병사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이 괴유를 불러 태자를 구하라 명하였더니, 괴유가 칼을 빼어들고 크게 고함지르며 진탕을 넘어 들어가 대불의 군사를 무찔렀다. 한 무리의 군사들이 이에 힘입어 적의 본진으로 곧바로 들이쳐 대불을 잡아서 목을 치고 나왔더니, 살아남은 대불의 본진 군사들은 놀라서 무너졌다. 대만의 군대 역시 아수라장에서 물러나더니만, 자기의 형이 죽은 것을 알고는, 울부짖으며 죽기를 맹세하고, 모든 군사를 진격시켜, 그 높은 언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 五年壬辰, 二月, 進軍於<柵城>之南, 營于高丘. 四面泥濘, 人馬俱沒于泥中. <高婁>太子軍, 與<帶弗>, 戰于泥中. 太子, 立於軍前督軍, 中流矢而落馬, 兵不能, 故不能救之. 上, 召<怪由>命救之, <怪由>拔劒號吼越泥擊之, 一軍賴鎰力, 直衝本陣, 執<帶弗>斬頭而出, 餘衆驚潰. <帶万>軍亦披靡而退已, 而知其兄死, 號哭誓死而進諸軍, 圍高丘数匝.

◎ 上, 憂惧, 曰;“恨, 不用<溫祚>之諫.” <乙豆智>曰;“聖母之神必有陰助. 陛下, 勿憂.” 果然, 大霧七日不辨呎尺, <帶万>恐有變而少退, 乃立萬偶疑兵于營而潛出. 天且凍泥得脫其圍, 暗夜倉皇, 失神馬․大鼎, 及至<利勿>. 兵飢不興. 得野獸而犒軍.

○ 상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온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 일렀더니, 을두지가 “성모의 신령께서 반드시 뒤에서 도우실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아뢰었다. 과연, 7일간이나 큰 안개가 끼어 지척도 분간할 수 되었더니, 대만도 변을 당할까를 걱정하여 좀 물러나기에, 병사의 모습을 닮은 수많은 허수아비를 진영에 세워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하늘{날씨}이 잠시 진창을 얼어붙게 하여 그 포위망을 벗어나긴 하였으나, 캄캄한 밤중의 창황 중에 신마와 큰솥을 잃어버린 채 이물림에 다다르게 되었다. 병사들도 굶주림에 힘을 낼 수 없게 되어, 들짐승을 잡아서 군사를 먹였다.

◎ 旣皈「北都」, 宴赴戰将卒数日. 吊死問疾, 慰其父母, 曰;“朕以不德, 輕伐<扶余>, 難殺<帶弗>, 未滅其國, 多失我軍. 朕之過也.” 國人, 感帝德義, 皆許殺身於國事, 稱曰<朱留>民志, 以為國士之本義.

○ 이윽고 북도{위나암}로 돌아오자 전장에 임했던 장졸들에게 여러 날 동안 먹고 마시게 하여 주었다. 죽은 이를 조문하고 상한 이를 살폈으며, 그 부모들을 위무하며, 이르길; “짐이 부덕하여, 부여를 가벼이 보고 치려하였다가, 대불{<동부여왕}은 가까스로 죽였지만 그 나라는 멸하지도 못하고서, 우리 군사는 많이 잃었소. 짐의 과오이오.”라 하였다. 이에 나라사람들은, 황제의 덕과 의에 감복하여, 모두가 나랏일에는 몸을 바치겠으며, “주유백성들의 뜻”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들의 본분이 되었다.

◎ 葬<高娄>太子于<桂>后陵. 上, 謂<珍>皇后, 曰;“<桂>后母子為國而死. 生子當如<桂>后.” <珍>后曰;“為人妻․子, 皆欲為夫而死. 陛下棄妾而遠征, 妾焉得死乎.” 上, 笑, 曰;“汝乃再生之人, 不亦可愛乎.” <珍>, 以<召>后之出, 容皃絶美, 性媚嫵要寵而己. 初為<解明>妻, 而不死不勤守寡. 上, 十歲, 以嚴命娶之. 生子女, 雖有外華皆近不肖, 故上言如是.

○ 고루 태자를 계 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상이 진황후에게 “계후 모자가 나라를 위해 죽었소. 당신도 마땅히 계후가 낳은 아들 같은 아들을 낳아주시오.”라 일렀더니, 진후 왈; “당신의 처․자들 모두는 지아비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내버려두고 멀리 정벌에 나서셨으니, 제가 어떻게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라 하니, 상은 웃으면서 “그대는 다시 사는 사람이니, 그 또한 사랑스럽지 않겠소?”라 하였다. 진후는 소후의 소생인데, 그 용모가 지극히 아름답고 성품도 애교가 있으면서 아리따워서 총애를 받았다. 애초엔 해명의 처였었는데, 따라 죽거나 과부로 수절하지도 아니하였다. 상이 10살 때 엄명으로 그녀를 취하였었다. 그녀가 낳은 자녀들은 겉치레는 번듯하였으나 모두가 불초에 가까웠었다. 그리하여 상이 이런 말을 일렀던 것이었다.

◎ 三月, 失馬<巨婁>, 将<扶余>馬百匹, 俱至<鶴盤岺><車回谷>. 上出郊迎之. 撫鬣而慰之, 曰;“馬至, 而鼎不皈耶.”  夏四月, <曷思王><山解>, <解素>之子也, 知國之将亡, 與從者百余人, 至<鴨淥谷>, 見<海頭王(末曷酋長)>出獵. 而請同獵, <海頭>傲而無禮, 遂殺之, 而取其百姓. 請都于<曷>濱, 以治<河>北<布倫(水名)>之地(<海頭>之故地), 許之. <觧素>, 聖母所生<蛙>王之子也, 常諫<帶素>之無道而庇我及其沒次子. <解婁>皈我而輔<溫祚>. <山海>, 亦至是而皈, 以女納後宮. 以其艶而有德, 封為皇后. 皇后, 身香而皎潔如魚, 得傳上寵.

○ 3월, 잃었던 말 거루가 부여의 말 백 마리를 이끌고 함께 학반령 거회곡에 도착하였다. 상이 교외로 나가서 이를 마중하고, 갈기를 어루만져 위로하며, 말하길; “말이 돌아왔으니, 솥도 돌아오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여름 4월, 해소의 아들인 갈사왕 산해가, 자기의 나라가 곧 망할 것을 알고는, 따르는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러서 해두왕(말갈추장)이 사냥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함께 사냥하자 청하였더니, 해두가 오만하고 무례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백성도 빼앗았다. 갈{曷}수변에 도읍하고 하북의 포륜(수명)땅(<해두>지고지)을 다스리며 살고 싶다고 청하였더니, 허락되었다. 해소는, 성모가 낳은 금와왕의 아들인데, 늘 대소의 무도함을 간하면서 우리를 두둔하더니 둘째 아들을 잃게까지 되었다. 해루는 우리에게 귀의하여 온조를 도왔고, 산해 또한 이때에 귀의하여 딸을 후궁으로 바쳤다. 그 딸은 요염하기도 하였지만 덕망이 있어서 황후로 삼았더니, 몸에서는 향내가 나고 살결도 물고기 같이 희고 깨끗하여, 상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 七月, <曷思王>從弟<絡文(<解素>弟<解万>亦聖母所生也.<絡文>,<解万> 子)>, 亦将万余人来降, 曰;“願, 為聖人之民.” 上, 出郊迎之, 待以賓禮, 尋封為<安西>大王, 置之<掾那部(<勾茶國>地西)>. 時, <東扶余>大亂, 自相殘滅.  十月, ‘征<余>将軍’<怪由>卒. <由>, 以巨力之人, <柵>南之戰, 身被重創, 至是, 卒. 以一品大加禮, 葬于<北溟山>陽.

○ 7월, 갈사왕의 종제인 락문(해소,제,해만,역성모소생야.낙문,해만 자)> 또한 1만여 명을 이끌고 찾아와 항복하면서, “성인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교외로 나가 맞이하여 손님으로 대접하고, 안서대왕으로 삼아서 연나부(<구다국>지서)에 살게 하였다.  이때 동부여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나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다.  10월, ‘정 여장군’ 괴유가 죽었다. 괴유는 힘이 엄청 센 사람이어, 책성남쪽에서 전쟁할 때, {고루태자를 구하다가} 창을 여러 개나 맞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죽었다. 1품 대가의 예로써 북명산 남쪽에 장사하였다.

◎ 六年癸巳, 正月, <[曷思]>后生子<好童>.  十一月, 遣使如<漢>, 求兵書․農書․孝經․史記等書, ■■通<漢>之■.

○ 대무 6년(단기2366년/AD33)계사, 정월

갈사후가 아들 호동을 낳았다.  11월, 한에 사신을 보내서 병서,농서,효경,사기 등 서적을 구하고, 

◎ 七年甲午, 五月, <松>太后崩, 春秋六十七. 后, <松讓>之女. <光明帝>自<扶余>時, 依於后家. <義>薦之, 及卽位, 納之而生<都助>․<觧明>․帝及<解邑朱>․諸公主. 端麗有德, 好神仙, 善畵能樂, 以淡素養之.  十月, <松義>病欲請免. 子<純>隣於<秀>, 尋敗死.

○ 대무 7년{단기2367년/AD34}갑오, 5월

송태후가 춘추 67세에 죽었다. 후는 송양의 딸이다. 광명제가 부여에서 나와 송후의 집에 의탁한 적이 있다. 송의가 그녀를 천거하였고, 상이 즉위하자 불려 들어가 도조,해명,제{대무}․해읍주 및 여러 공주를 낳았다. 용모와 품행이 단려하고 덕성스러웠으며 신선에 탐닉하였고, 그림 솜씨도 좋았고 기악에도 능하였으며, 담담하고 소박하게 자식들을 길렀었다.  10월, 송의가 병들어 물러나고 싶어 하였고, 아들 순은 인접한 유수{동한 광무제}>에게 끝내 패하여 죽었다.

◎ 九年丙申, 十月, <盖馬>主<小噲>妻<半乙>, 殺<噲>, 而立子<叔乙>. <噲>子<厚滿>․<狗文>等相爭, <厚滿>先入城, 殺<叔乙>. <半乙>與<狗文>潛通而納之. <厚滿>来奔, 上親征誅<狗文>, 以其國為<蓋馬郡>.  十二月, <勾茶王><厚燐>聞<蓋馬>滅, 擧國来降. <厚潾>, <閃尼>子也. 以其<掾那部>讓於<絡文>, 而陰有反意. 及<噲>死, 援<狗文>而約伐<西河>․<南口>, 事發而國除, 以其都為<南蘇>. 西路皆拓.  太輔<松義>薨, <松>太后胞兄也. 其母<貫貝>氏, 勸<松讓>献國, 戒<義>以忠, <義>守其母訓, 為國盡忠, 持身儉約, 歷事三世, 德望蘇然, 勝於父矣. 以其弟<屋句>為左輔, <乙豆智>太輔. <麻勁>右輔. <勁>, <摩離>子也. <盖馬>反衆與<漢>人来侵<句麗城>, <玄菟>太守<勾鄒>徃救, 疾作而薨, <松屋勾>代之而平之.
<劉秀>使<吳漢>滅<蜀>, 殺<公孫述>夷其族.

○ 대무 9년{단기2369년/AD36}병신, 10월

개마주 소쾌의 처 반을이 소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을 세웠다. 소쾌의 아들인 후만과 구문은 서로 다투었는데,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 죽였더니, 반을은 구문을 밀통하여 맞아들였다. 이에 후만이 도망해 오자, 상이 친히 구문을 정벌하고 개마국을 개마군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왕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음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의 아들이다. 후린은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겨주었었지만,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다. 소쾌가 죽자 구문을 도와주고 나서는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였었으나, 이 일이 발각되어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들여졌고 그 도읍도 남소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리의} 서쪽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리게 되었다.  태보 송의가 죽었다. 송태후의 동복 오빠이다. 그 어미 관패씨는 송양에게 나라를 {고구리에} 바치라 권하였었고, 송의에겐 충성하라고 가르쳤었다. 송의는 모친의 훈계를 잘 따라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자신은 검약하여 3대가 벼슬을 하였더니, 덕망이 소연하여 아비를 능가하였다. 그의 동생 옥구는 좌보가 되었다. 을두지를 태보로, 마경을 우보로 삼았다. 마경은 마리의 아들이다.  개마의 반중과 한인들이 함께 구려성에 쳐들어 왔는데, 현도태수 구추가 달려가서 구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고, 송옥구가 대신하여 싸워서 이를 평정하였다.유수가 오한을 시켜서 촉을 멸하게 하고, 공손술을 죽이고 그의 족당들을 평정하였다.

◎ 十年丁酉, 七月, <漢>兵又猝至<丘利城>, 上親至<南口>督戰. <屋句>曰;“被今盜賊蜂起, 何暇無名之戰哉. 此皆邊将之窺利擅侵也. 待其師老, 而出奇破之必矣.” 乃入<蔚岩>, 而斷其来路. 賊拔<盖馬>, 而馳至圍<蔚岩>数里, 日加而兵益多. 盖以為城中無水而攻之愈急也, 乃用<豆智>計, 以魚酒饋之, 賊知有水而退. 時, 上, 自<南口>来援, 夾擊大破之. 是謂<蔚岩大戰>. 賊慮其中斷而不直至<南口>, 與小城虛勞而致敗. <盖馬>諸城悉平.  冬, <溫祚>傳位<多婁>.

○ 대무 10년{단기2370년/AD37}정유, 7월

한의 병사들이 또다시 구리성에 갑자기 밀려들어서, 상이 친히 남구에 나아가 독전하였다. 옥구가 아뢰길; “저쪽 나라{東漢}는 지금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명분 없는 싸움을 걸어오겠습니까? 이런 싸움은 대개 변방장수가 {개인의} 이득을 엿보며 제멋대로 {조정의 뜻과 무관하게} 침입한 것이니, 저 군사들의 사기가 무디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가서 기발나게 쳐부수어야 합니다.”라 하고는, 울암으로 들어가 그들이 들어올 길을 끊었다. 적은 개마를 뭉개고 치달아와서 울암 밖 수{数} 리를 겹겹이 포위하더니, 날이 갈수록 병사의 숫자는 많아졌다. 대략 성 안에는 물이 없었음에 공격을 점점 서둘렀음 이었다. 이에 을두지의 계략을 쓰기로 하고, 적에게 물고기 안주와 술을 먹였더니, 적들은 성 안에 물이 많은 줄 알고 물러났다. 이때, 상이 남구로부터 구원하러 왔기에, 협격하여 적들을 크게 쳐부쉈다. 이 전쟁을 울암대전이라 한다. 적은 침로의 중간이 끊김을 걱정하여 더 이상 남구로 곧장 쳐들어오지는 못하고 작은 성{울암}과 헛고생만하다가 패하였다. 개마의 여러 성들 모두가 평온하게 되었다.  겨울에 온조는 다루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 十三年更子, 四月, <乙豆智>薨. <松屋句>太輔, <麻勁>左輔, <烏娄>右輔.  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堂弟<于刀>等, 率衆千余․牛馬萬余頭, 而来謁. 以<尙須>為大畜大加. <買溝谷>卽<水谷城>也.

○ 대무 13년{단기2373년/AD40}경자, 4월

을두지가 죽었다. 송옥구를 태보로, 마경을 좌보로, 오루를 우보로 삼았다.  7월,매구곡 사람 상수가 친동생인 위수와 종제인 우도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사람들과 소와 말 만여 마리를 끌고 와서 알현하였다. 상수를 ‘큰짐승대가’로 삼았다. 매구곡은 곧 수곡성이다.

◎ 十四年辛丑, 冬十一月, 有雷無雪. 是歲, <淹淲>大漲, <彌鄒忽>盡被水害, 移其民於<西河>. 以<淹淲王><虎力>為<龍山公>. 初, <芻牟帝>, 以<沸流>為<淹淲>沛者, 食其邑. <光明>初, 進封王, 娶<曼>公主, 生<昜人>. <昜人>, 娶<真>公主, 生<虎力>. 三世六十七年而國除.  以<涉得>為<紫蒙王>. <得>, <臣>之子也. 其母<乙蒸>, 賢, 敎<得>以禮義. 為人忠厚.  上, 以<紫蒙>反復無常, 遣<得>治之.  <烏>皇后生子<解憂>.

○ 대무 14년{단기2374년/AD41}신축, 겨울 11월

천둥은 치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해에 엄표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로 옮겼다. 엄표왕 호력은 용산공으로 삼았다.  애초에 비류는, 추모제 시절엔 엄표패자가 되어 그 읍을 다스렸고, 광명초엔 봉왕되었었다. 만 공주와 혼인하여 양인을 낳았고, 양인은 진 공주와 혼인하여 호력을 낳았다. 3대 67년 만에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들여진 것이었다.  섭득을 자몽왕으로 삼았다. 섭득은 섭신의 아들이고, 그 모친 을증은 현명하여 섭득에게 예의를 가르쳤다. 사람됨이 충성심이 두터웠다.  상이, 자몽은 배반하기를 밥 먹 듯 하여, 섭득을 보내 다스리도록 한 것이었다.  오 황후가 아들 해우를 낳았다.

◎ 十五年壬寅, 三月, 黜大加<仇都>・<逸苟>・<焚永>等為庶人. 三人, 皆以<召>皇后舊臣, 奪人妻妾財貨, 恣其所慾. 人皆忿死, 以致洪水, 使<沸流國>除. 法當斬誅, 以其為<東明>舊臣不忍極法, 放為庻人. 以<南部>使者<鄒殼素>為<沸流部>長(<順奴>沛者也), 以化之.  九月, 行<東明大祭>于<龍山>.  <多婁>献<汗南>故地, 而南下.  遣兵伐<新羅>, 以助<多婁>.

○ 대무 15년{단기2375년/AD42}임인, 3월

대가 구도,일구,분영 등을 서인{벼슬 없는 평민}으로 만들어서 내쳤다. 세 사람 모두 소 황후의 옛 신하이었는데, 사람들의 처․첩․재물․돈 등을 강탈하여 욕심 내키는 대로 방자하였다. 이에 {이 꼴을 당한} 사람들 모두가 울화통이 터져 죽는 일이 마치 홍수 같았기에, 비류국을 시켜서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법을 따르면 응당 목 베어 죽일 일이었으나, 동명의 옛 신하는 극형을 면하게 되어 있어, 내쫓아서 서인으로 만든 것이었다. 남부사자 추각소를 비류부의 우두머리{순노 패자야}로 삼아서 이들을 교화하게 하였다.  9월, 용산에서 동명대제를 지냈다.  다루가 한남{汗南} 옛 땅을 {고구리에} 바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쳐서, 다루를 도왔다.

◎ 十七年甲辰, 七月, 小<松>太后崩. <松>太后之妹, 而上之乳母也. 上長於后, 以后五女皆為妃. 春秋六十八.

○ 대무 17년{단기2377년/AD44}갑진, 7월

작은 송태후가 죽었다. 송태후의 여동생이며 상의 유모였다. 상은, {작은 송태}후의 품에서 자라났고, 이 작은 송태후의 딸 다섯 모두를 비로 맞았었다. 춘추 68세였다.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

○ 대무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 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 二十一年戊申, 四月, <曷思>后生<再思>太子.  <松屋句>薨. <麻勁>太輔, <烏婁>左輔, <松宝>右輔.

○ 대무 21년(단기2381년/AD48)무신, 4월

갈사후가 재사태자를 낳았다.  송옥구가 죽었다. 마경을 태보로, 오루를 좌보로, 송보를 우보로 삼았다.

◎ 二十二年乙酉, 正月, 遣将軍<于刀>․<烏義>等伐<戴升>于<潛支落河>柵, 斬于柵南(<奈曼王>府), 進拔<赤城>・<蠶支>, 遂率<紫蒙>王<滿離斯古>․<涉得>等, 分四道進攻<右北平>・<漁陽>・<上谷>・<太原>等地, 奪其宝玩․美色․絹織․珍味等多数.  歲, 以為常<蔡彤>大惧, 約修年貢, 乞和.  是年, <芦花>太后生於<柵城>. <王文>女也. 母<高耶>, <帶素>女也.

○ 대무 22년{단기2382년/AD49}을묘, 정월

장군 우도와 오의 등을 보내 잠지락하 책에서 대승을 쳐부수고 목책의 남쪽에서 목을 베었으며, 진격하여서 적성과 잠지를 빼앗고는, 자몽왕들인 만리사고와 섭득 등을 이끌고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우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략하고 그곳의 보물․노리개․미색․비단․진미 등 다수를 빼앗았다.  년 중 내내 이리하였더니, 채동은 늘 크게 두려워하였던 나머지 매년 조공하기로 약속하며 화친을 구걸하였다.  이 해에 책성에서 호화태후가 출생하였다. 왕문의 딸이고, 모친은 대소의 딸 고야였다.

◎ 二十四年辛亥, 三月, <東部>雹. <扶余>太師<王文>卒. <加順>․<富覃>等作亂, 上遣<松宝>․<絡寄>定其亂, 而擒其女主<高耶>為后. <東扶余>四十七國, 皆為國土. 自<觧夫婁>歷<金蛙>・<帶素>・<高耶>, 四世百十年, 而國除. 中間<帶弗>竊位十九年.

○ 대무 24년{단기2384년/AD51}신해, 삼월

동부에 우박이 내렸다.  부여태사 왕문이 죽었다.  가순과 부담 등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송보와 락기를 보내서 이를 평정하고, 여주인 고야를 잡아다 후로 삼았다. 동부여 47개의 나라 모두는 나라{고구리}의 땅이 되었다{해부루로부터 금와,대소,고야를 거쳐서 4대 110년을 이어오다가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들여진 것이었다. 중간에 대불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었다.

◎ 二十七年甲寅, 四月, <好童>太子, 将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其}女, 為之, 破鼓角, 而迎王師大軍. 自<沃沮>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皈, 以其地為<竹岺郡>. <樂浪>, 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七月, <大解>太子薨.

○ 대무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好童}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崔理}의 새 도읍(압구){남옥저}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리고, 왕이 거느린{또는, 왕사의} 대군을 받아들였다.옥저{沃沮= AD47년 3월까지는 최리 낙랑의 도읍}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배로 물을 건너 들어가서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그 땅은 죽령군{竹岺郡}으로 삼았다.낙랑{현금의 요동반도; 화북・화남・동해곡 평원에 해수가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시절?}은 시길{柴吉}로부터 4대 80여년에 나라의 문을 닫은 것이었다.  7월, 대해{大解}태자가 죽었다.

◎ 二十八年乙卯, 二月, 築<盖馬>・<河城>・<丘利>・<高顯>・<南口>・<紫蒙(昆都)>・<句麗>・<車蘭>・<河陽>・<西安平>等十城, 以備<漢>及<鮮卑>.  <麻勁>病免. <烏娄>太輔, <松宝>左輔, <乙祥>右輔.

○ 대무 28년{단기2388년/AD55}을묘, 2월

개마,하성,구리,고현,남구,자몽(곤도),구려,거란,하양,서안평 등 10성{요서10성}을 쌓아 한과 선비에 대비하였다.  마경이 병으로 물러나니, 오루가 태보로, 송보가 좌보로, 을상이 우보로 되었다.

◎ 二十九年丙辰, 七月, <楽浪>餘衆與東<沃沮>反. 遣将軍<菸卑神>伐<東沃沮>, 拔之, 為<海西郡>. 置<楽浪>余衆于<桓阿(桓因界)>.

○ 대무 29년(단기2389년/AD56)병진, 7월

낙랑의 남은 무리들이 동쪽의 옥저{=남옥저?}{무리}와 함께 반란하였다. 장군 어비신{菸卑神}을 보내서 동쪽의 옥저를 빼앗아 해서군{海西郡; 대략 현금 嫩河 및 遼河 以西?}으로 만들고, 낙랑의 남은 무리들은 환아{桓阿}에서 살게 했다.

◎ 三十二年己未, 四月, 如<孤岸淵>觀魚, 釣赤翅白魚薦于庙.  七月, 「西 都」大水, 漂沒民屋.

○ 대무 32년{단기2392년/AD59}기미, 4월

고안연에 가서 물고기 잡이를 보았다. 붉은 지느러미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서 묘당에 올렸다.
7월, 서도{<芻牟>末都, <光明>初都}에 큰물이 져 민가가 뜨고 잠겼다.

◎ 三十三年庚申, 十一月, <好童>伏劒而死. <好童>顔色美好. <烏>皇后, 愛而欲狎之不得, 反讒于上, 曰;“<好童>無禮.” 上不肯罪之, 后乃聲言于外. <好童>, 不自釋, 曰;“我若釋之, 顯母之惡而貽父之憂” 遂自殺.

○ 대무 33년{단기2393년/AD60}경신, 11월

호동이 칼에 엎어져 죽었다. 호동의 안색은 곱고 호감을 샀다. 오황후가 호동을 탐내어 희롱하고 싶었었는데 그리 되지 아니하였더니, 상께 거꾸로 “호동이 무례하였다.”고 참소하였고, 상은 그 말을 곧이들어 호동을 벌주려 하지 않으니, 황후가 언성을 높여 소리가 밖으로 나갔다. 이에 호동은 스스로 밝히고자 하지 않으며, 말하길; “내가 밝히면 어머니{여기서는 오후, 호동의 생모는 갈사후}의 잘못이 드러나게 되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시게 된다.”라 하고는 스스로 죽어버린 것이었다.

◎ 三十四年辛酉, 四月, <松宝>妻<乙蒲>生子<豆智>. <蒲>以為上子, 不受. 自先帝時, 公卿之妻被幸者, 多献子. 至是, 弊益甚, 故廢其風.

○ 대무 34년{단기2394년/AD61}신유, 4월

송보의 처 을포가 아들 두지를 낳았다. 을포가 상의 아들로 하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선제 때부터 공경들의 처가 승은을 입으면, 많은 이가 {이 일 후에 낳은} 아들을 {상에게} 바쳐왔었는데, 이 때에 이르자 그 폐단이 아주 심하였기에, 이 풍속을 폐한 것이었다.

◎ 三十七年甲子, 八月, <多婁>與<新羅>爭<蛙山>.  <涉得>遣子<射旭>來朝.  冬十月, 上, 崩於「西 都」. 遺命傳位於皇太弟<解邑朱>. 春秋六十一, 葬于<大獸林原>.

○ 대무 37년{단기2397년/AD64}갑자, 8월

다루가 신라와 와산을 놓고 싸웠다.  섭득이 아들 사욱을 보내 입조하였다.  동10월, 상이 서도에서 죽었다. 황태제인 해읍주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남겼다. 춘추 61세였으며, 대수림원에 장사했다.

※ 論曰; <大武>, 勇毅沈鷙, 能成大業, 継<光明>守成之後, 征<扶余>, 討<盖馬>, 遠及<上谷>・<太原>, 使<漢>人膽寒. 又能孝友, 見其子之不肖而傳于弟, 可謂知大體. 然, 溺於<烏>后而殺<好童>. 縮<濟>․<羅>而遺禍于後. 盖英雄有惟薄之患, 聖人養兄弟之禍者. 此歎.  <東明>・<光明>・<大武>三代之治, 謂之<三代鏡>. <麗>人以之為<政經>, 能傳七百年.  <光明>・<大武>不愧為<東明>之子孫.

※ 대무는 용감하며 굳세고 심히 사나웠으며, 능히 대업을 이루었다. 광명을 이어서 지키기를 이룬 후에 부여를 정벌하고 개마를 토벌하였으며, 멀리는 상곡과 태원까지 정벌하여 한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었다. 또한 효심과  우애가 있었으며, 자신 아들이 불초하였음에 동생에게 제위를 넘겼다. 대업에 대한 큰 틀을 알고 있었다 할 만하였다. 오후에게 빠져서 호동을 죽게 했으며, 백제와 신라를 다스림에서는 후세에 화를 남겼다. 대개 영웅들은 가벼이 생각한 것들로 하여 우환이 따르게도 하는데, 성인{대무}도 형제들에게 닥쳐올 화를 키웠으니, 이것이 한탄스러웠다.  동명,광명,대무,3대의 치적을 일컬어 삼대경이라 한다. 고구리사람들은 이를 정경으로 삼아서 능히 7백년을 이어 나아갔었다. 광명과 대무는 동명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았었다.”고 하였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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