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4대 민중제기
짧은 재위기간으로 명을 다하다
帝, 諱<解邑朱>, <光明帝>之季子也. 母, <松>太后. 性, 寬厚好賢. <大武>之伐<扶余>時, 守都得宜故信其能, 而臨崩, 寄以大事. 群臣, 以<慕本>為不肖, 而立之. 卽位於<鸞臺>. 以<解憂>為太子, 戒之以善.
민중제의 휘는 해읍주이며, 광명제의 막내아들이고, 모친은 송태후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현명한 이를 좋아했다. 대무가 부여를 정벌할 때, 민중은 도읍을 {잘} 지켜내었기에 마땅히 그 능력을 인정받았었고, 선제가 임종할 때 큰 일{나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 군신들도, 모본이 불초한 까닭에, 해읍주{민중}를 보위에 세웠다.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해우{<모본>}를 태자로 세우고, 선{善}한 방도로 그를 타일렀다.
◎ 元年甲子, 十一月, 大赦. 群臣請改元, 辭以無德. 以<烏>后為皇后, <解憂>為嗣. 是年, <濟>攻<羅><蛙山>․<狗壤>. <漢>, <陰麗華>死, 與<匈奴>合市.
○ 민중 원년{단기2397년/AD64}갑자, 11월
크게 사면하였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자 청하였으나, 그럴만한 덕이 없다 하며 고사하였다. 오후를 황후로 삼고, 해우를 후사로 정하였다. 이 해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과 구양을 공격하였다. 한{東漢}은 음려화{광무제 유수의 두 번째 처}가 죽자, 흉노와 저자를 함께 열었다.
◎ 二年乙丑, 三月, 宴群臣於「西 都」. 五月, 「東部」大水. 上, 與皇后, 問民賑飢. 九月, <烏>皇后生<鶴>公主. 以后兄<烏芾>為右輔.
<漢><度遼營>斷南北<虜>.
○ 민중 2년{단기2398년/AD65}을축, 3월
서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5월, 동부에 큰물이 났다. 상이 황후와 함께 백성들을 안부를 살피고 굶는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었다. 9월, 오황후가 학공주를 낳았다. 오후의 오빠 오불을 우보로 삼았다.한의 도요영이 남북로들의 교통을 끊었다.
◎ 三年丙寅, 七月, 與<烏>皇后, 東狩. 獲白獐, 飼之. <濟>, 取<蛙山>, 置戌二百人, 尋失. 「東都」無雪. <漢><昜>殺其弟<荊>. <荊>, 以皃類於<秀>, 言三十得天下, 欲起兵而伏罪. 弟莫好佛■■助<■>.
以后弟<烏希>為, 中畏大夫, <麻勁>太輔, <松宝>左輔.
○ 민중 3년(단기2399년/AD66)병인, 7월
오황후와 함께 동쪽으로 몰이사냥{군사조련 사냥}을 나갔다. 흰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백제가 와산을 {신라>로부터} 빼앗고 수자리 200명을 두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동도에 눈이 오지 않았다. 한의 양이 동생 형을 죽였다. 형은, {아비인} 수{광무제}와 모습이 비슷하였으며,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하려 하였다가 죄를 받았던 것이다.오후의 남동생 오희를 중외대부로, 마경을 태보로, 송보를 좌보로 삼았다.
◎ 四年丁卯, 四月, 與<烏>后, 田于<閔中原>, 祀<烏伊>祠. 七月, 又田, 見石窟而謂<烏>后, 曰;“吾死, 宜葬于此.” 后曰;“粗殘, 奈何.” 上, 曰;“<東明>茅茨不剪, <松讓>朽木為宮. 吾安敢奢其死骨哉. 汝亦從我于斯, 可也.” 后笑, 曰;“女必從夫. 陛下雖無言, 妾當自從.” <解憂>太子遊三賢古基, 尋<熊心山>聖母古宅, 名其地曰<慕本原>. 九月, <東海>使人<高朱利>献鯨目于<烏>后. 夜有光當燭. 時, <烏>后又産<悅>公主. 上謂后, 曰;“<解憂>改過, 而孝我夫妻. 可以傳位. 與汝為仙, 何如.” 后曰;“<解憂>, 雖吾出, 其心未可測. 待我産一男子傳之未晩.” 上, 笑, 曰;“汝亦老矣. 安能久産哉.” 后不悅. <扶余>內亂, 命<再思>・<麻[樂]>等, 率<達賈>・<穆卓>・<杜魯>徃鎭之. <羅>, 以<順貞>為伊飡, 委政.<漢>置五經師. 羽林通<■經>. <匈奴>入學.
○ 민중 4년{단기2400년/AD67}정묘, 4월
오후와 함께 민중원으로 가서 사냥하고, 오이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7월, 다시금 사냥을 나갔다가 석굴을 발견하자, 오후에게 이르길; “내가 죽거든 꼭 이곳에 나를 장사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더니, 오후가 답하길; “조악하고 헐었는데, 괜찮겠습니까?”라 하자, 상이 “동명께서는 갈대로 지붕을 잇고 끝도 다듬지 않으셨고, 송양은 썩은 나무로 궁을 지었소. 내 어찌 감히 내 죽은 몸을 호사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도 나를 따라 이곳으로 왔으면 하오.”라 하였더니, 후가 웃으며 답하길; “여필종부입니다. 폐하의 말씀이 없으셔도, 첩은 응당 알아서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우 태자가 세 현신{재사, 무골, 묵거}의 옛터에서 노닐다가, 웅심산의 성모고택을 찾아보고는 그곳을 모본원이라 이름 붙였다. 9월, 동해의 사인 고주리가 오후에게 고래의 눈알을 바쳤는데, 밤이 되면 빛이 나서 촛불을 켠 것 같았다. 이때 오후가 또 열공주를 낳자, 상이 후에게 이르길; “해우가 개과하여 우리 내외에게 효도를 하고 있으니, 임금 자리를 물려줘도 될 것 같소. 당신과 선(仙)이나 했으면 하는데, 어떻겠소?”라 하였다. 이에, 후가 “해우는 제가 낳긴 하였어도 그 속내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내자식 하나를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 답하자, 상이 웃으면서; “당신 역시 이미 나이가 많은데, 어찌 능히 오래도록 낳을 수 있겠소?”라 말하였더니, 후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여에서 내란이 일어, 재사와 마[락] 등에게 달가,목탁,두로를 데리고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신라는 순정을 이찬으로 삼아서 국정을 맡겼다. 한이 ‘오경사’를 두었다. 우림들이 ■경에 통달하였고, 흉노도 입학하였다.
◎ 五年戊辰, 正月, <扶余>亂平. <再思>請娶<王文>女, 許之. 五月, 上崩[于]「東都」, 春秋六十二. 遺命立<解憂>太子. 太子, 卽位於東都神宮, 改元<慕本>, 葬帝于石窟. 群臣欲作陵, <烏>后曰;“吾止禪位之事, 以違夫志. 且作新陵, 是重違夫志也. 吾亦死, 當皈此. 使後人知帝之儉德, 而為皇后者勿違夫志, 可也.” 群臣拜伏.
○ 민중 5년{단기2401년/AD68}무진, 정월
부여의 내란이 수습되었다. 재사가 왕문의 딸과 혼인하고자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5월, 상이 동도에서 춘추 62세에 죽었다. 해우태자를 임금으로 세우라고 명을 남겼다. 태자는 동도 신궁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모본으로 바꿨으며, 제를 석굴에 장사했다. 여러 신하들이 새로이 릉을 만들려 하자, 오후가 이르길; “나는 양위하시겠다는 것을 말려 지아비의 뜻을 어긴 바 있소. 새로이 릉을 만들게 되면 지아비의 뜻을 또 다시 어기는 것이 되오. 나 역시 죽으면 응당 이곳으로 올 것이오. 후세 사람들에게 선제의 검소하신 덕을 알게 하고, 황후가 되는 이들도 지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하시오.”라 하였다. 신하들이 절하며 엎드렸다.
※ 論曰;“<閔中>, 受顧命, 行「伊周之事」以傳位於<慕本>, 則賢矣. 不識其詐則惛矣. 戒之以善則好矣. 不擇師以敎之設官以制之, 則欠矣.”
※ “민중이 고명을 받아, 이주지사를 행하여 모본에게 보위를 물려 준 것은 현명한 것이었고,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음은 혼미하였음이었다. 선한 방도로 타일렀던 것은 잘 한 일이었으나, 적절한 스승을 두어 가르치지도 관리를 두어 견제하지도 않은 것은 흠이었다.”라고 하였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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