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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_고구리 왕조 900년의 기틀을 다지다

by 마음heart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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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

고구리 왕조 900년의 기틀을 다지다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2대 광명대제

광명대제의 원년은 임인년(BC19)이다. 추모임금을 룡산(龍山)에 장사지냈으며 추모임금의 명에 따라 순장을 하지 않았다. 아이비가 아들 도절을 낳았고 예후를 태후로 승격시켰다. 이해 12월에 오이를 황룡왕으로 삼았고 마리를 비리왕으로 삼았다. 2년은 계묘년(BC18)이다. 정월에 연호를 유리광명으로 바꾸었다. 재사를 태보로 삼았다. 협보를 좌보와 주민대가로 삼았다. 부분노를 우보와 주군대가로 삼았다. 고구를 주궁대가로 삼았다. 옥지는 곡물을 담당하게 했다. 구추는 형벌을 담당하게 했다. 도조는 의약을 담당하게 했다. 송의는 보빙을 담당하게 했다. 구도는 제신을 담당하게 했다. 이해 3월에 강가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했다. 9월에 소후와 함께 서쪽 강가의 땅의 농사를 살피고 온탕에 가서 흰노루를 얻었다. 10월에 난새가 궁궐의 새뜰에 모였다.


◎ 元年壬寅, 九月, 葬先帝于<龍山>, 以遺命禁殉.  <阿爾>妃生子<都[切]>.  以<禮>后爲太后.  十二月, <烏伊><黃龍王>, <摩離><卑離王>.


○ 광명 원년{단기2315년/BC19}임인, 9월

선제를 룡산{龍山}에 장사하고, 선제의 유명으로 순사{殉死}를 금했다.  아이{阿爾}비가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예{禮}후를 태후로 올렸다.  12월, 오이{烏伊}를 황룡왕{黃龍王}, 마리{摩離}를 비리왕{卑離王}으로 삼았다.

◎ 二年癸卯, 正月, 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主宮大加. <屋智>主穀, <勾鄒>主刑, <都祖>主藥, <松義>主賓, <仇都>主神.  三月, 閱水陸軍於<河>濱.  九月, 與<召>后, 觀稼<西河>, 而如溫湯, 獲白獐.  十月, 鸞集新庭.

○ 광명 2년{단기2316년/BC18}계묘, 정월

년호를 유리광명{琉璃光明}으로 바꿨다.  재사{再思}를 태보로, 협보{陜父}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분노{芬奴}를 우보 겸 주군대가로, 고루{高婁?}를 주궁대가로 삼았다. 옥지{屋智}는 곡물담당, 구추{勾鄒}는 형벌담당, 도조{都祖}는 의약담당, 송의{松義}는 보빙담당, 구도{仇都}는 제신담당 대가의 일을 맡았다.  3월, 하{河}변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9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 }땅의 농사를 살피고, 온탕엘 가서 흰 노루{=<召>后?}를 손에 넣었다{小湯山 溫湯?}. 10월, 란새가 궁궐의 새 뜰에 모였다.유리가 의모 소황후와 혼인의례?}

◎ 三年甲辰, 正月, 以<順奴>・<絶奴>爲<沸流>治, 都<彌鄒忽>.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 <涓奴>・<黃龍>・<荇>・<茶>・<卑離>, 上與<召>皇后治之, 以慰<召>后之心.  三月, 納<禾姬>.  五月, 與太后・皇后, 如<海山>, 鹽[좌石우族]而還.  <東明神宮>成.  七月, 以<松>氏爲妃. 作<鶻川>離宮, 上與<召>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 入朝, 請移都于<尉那城>, 許之.  十月, <溫>公主崩, 春秋二十. 上減食二日, <召>皇后慰止之.

※비류의 초기 치도 미추홀{彌鄒忽}은 <흥제{興濟}>?, 온조의 초기치도 우양{牛壤}은 우산{牛山}주변 평지인 임치{臨淄}? 또는 제{齊}?, 온조의 위나성{尉那城}은 제하{濟河}남변 제남{濟南}지역?, 해산{海山}은 <낭야산{琅邪山}?정도, 汗水는 상간하{桑干河}?;온조가 한남{汗南}땅을 헌납하고 남하하여서, 신라 무리는 배미산 {陪尾山=舟尾山}주변에서 다시 남하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음.▶동국여지승람,공주/웅주 부분 대조 권장됨.{지리명이 유사한 음가나 뜻의  글자로 바뀌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음!}.

○ 광명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순노{順奴},절노{絶奴}는 비류가 미추홀{彌鄒忽;☞興濟?}>에서 다스리게 하고, 관노{灌奴},계루{桂婁}는 온조{溫祖}가 우양{牛壤;☞牛山주변평원?}에서 다스리게 하였으며, 연노{涓奴},황룡{黃龍},행인{荇人},구다{句茶},비리{卑離}는 상이 소황후와 함께 다스리기로 하여서 소후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3월, 화희{禾姬}를 거둬들였다.  5월, 태후 및 황후와 함께 해산{海山}엘 갔다가 소금과 돌화살촉을 가지고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東明陵}이 완성되었다.  7월, 송{松}씨를 비로 올렸다. 골천{鶻川}에 이궁을 짓고, 상이 소황후 및 온{溫}공주와 함께 기거하였다. 한남왕{汗南王}온조가 입조하여 위나성{尉那城; 尉禮城≒圍籬城?}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하여서, 허락하였다.  10월, 온{溫}공주가 나이 스물에 죽어, 상이 이틀을 감식했더니, 소황후가 위로하며 그만하시라 하였다.

● 四年乙巳, 二月, 勸耕巡戍.  八月, <劉河>蚕師.  九月, <馬>公主及<雉姬>入宮.  <平>氏生女.  十二月, <芬奴>伐<北沃沮>・<敦河>平之.

○ 광명 4년{단기2318년/BC16}을사, 2월

농경을 권장하며 수자리를 순시했다.  8월, 유하{劉河}를 누에치기 스승으로 삼았다.  9월, 마{馬}공주와 치희{雉姬}가 입궁했다.  평{平}씨가 딸을 낳았다.  12월, 분노{芬奴}가 북옥저{北沃沮}와 돈하{敦河}를 쳐서 평정하였다.

● 五年丙午, 正月, 以<香>公主妻<高婁>.  三月, <紫蒙>王<涉臣>女<皐豆{=皐頭}>妻<乙豆智>, <曼>公主妻<沸流>.  置車騎府.  五月, 互市<溝婁>. 八月, 與<召>后, 勸稼<西河>獎十羊五豕. 十月, 大閱<滸口>.

○ 광명 5년{단기2319년/BC15}병오, 정월

향{香}공주를 고루{高婁?}의 처로 삼았다.  3월, 자몽{紫蒙}왕 섭신{涉臣}의 딸 고두{皐豆}를 을두지{乙豆智}의 처로 삼고, 만{曼}공주를 비류{沸流}의 처로 삼았다.  거기부{車騎軍隊, 또는 수레・말 관리부서}를 두었다.  5월, 구루{溝婁}에 호시{互市; 市場}를 열었다.  8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에서 농사를 권장하고, 양 열 마리와 돼지 다섯 마리씩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10월, 호수{滸; 淮水의 지류, 혹은 滹水=滹沲河}하구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 六年丁未, 四月, 增「漢舘」, 而招一技者, 厚祿給妻.  爲<松>妃築<豆谷>行宮.  七月, 拔<蓋馬城>, 虜其王<小噲>, 約貢牛馬.

○ 광명 6년{단기2320년/BC14}정미, 4월

한관{漢館}」의 수를 늘리고, 한 가지 기술에라도 능통한 자는 불러들여서 후하게 녹봉을 주고 짝도 지어 주었다. 송{松}비를 위해서 두곡{豆谷}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7월, 개마성{蓋馬城; 蓋馬國 在 最彘 인근!}을 빼앗고, 그 곳의 왕 소쾌{小噲}를 붙잡았더니, 소와 말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 七年戊申, 正月, <艴>太子薨, 四歲. 皇后如<汗南>.  五月, <解明>生. 上, 如<汗南>, 迎后而歸. 有<魚遊詞>.

○ 광명 7년{단기2321년/BC13}무신, 정월

불{艴}태자가 네 살에 죽었다. 송황후가 한남{汗南; ☞汗水=永定河下流? 濟水下流?}으로 갔다.  5월, 해명{解明}이 태어났다. 상이 한남으로 가서 송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어유사{魚遊詞}라는 노래가 생겼다.

● 八年己酉, 五月, <柴吉>子<昌特>立.  <翊>公主入宮.

○ 광명 8년{단기2322년/BC12}기유, 5월

시길{柴吉}의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익{翊}공주가 입궁하였다.

● 九年庚戌, 四月, 田于<箕山>七日, 得眞珠於<桂>后陵, 返于<凉谷(鶻川行宮)>. <雉姬>, 與<禾姬>相罵, 而去. <雉>, <鄭共>女也. 家在<汗>濱上, 追之樹下, 有<黃鳥詞>.  八月, <素奴>女<可治>妻<羊>太子.  太輔<房良>請退, 不許.

○ 광명 9년{단기2323년/BC11}경술, 4월

기산{箕山; ☞南箕山?;}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桂}후의 무덤가에서 진주를 주워서 량곡{凉谷}(골천행궁)으로 돌아왔다.치희{雉姬}가 화희{禾姬}와 서로를 욕하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치희는 정공{鄭共}의 딸이었고, 친정집은 한{汗}수변 위쪽에 있었다. 그녀를 뒤쫓아 가다가 나무 밑에 이르러서 황조사{黃鳥詞}를 지었다.  8월, 소노{素奴=비리왕}가 딸 가치{可治}를 양{羊}태자에게 처로 주었다.  태보 대방량{房良}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十年辛亥, 正月, <沸流>太輔.  四月, 鍊于<南口>.  <解術>生.

○ 광명10년{단기2324년/BC10}신해, 정월

비류{沸流}를 태보로 삼았다.  4월, 남구{南口}에서 군사를 훈련하였다.  해술{解術}이 태어났다.

◎ 十一年壬子, 四月, <涉臣>反, <芬奴>拔其都城(昆都), <臣>南莽.  <雉姬>・<鵲姬>皆生女.

○ 광명 11년{단기2325년/BC9}임자, 4월

섭신{涉臣=자몽왕}이 반란하여, 분노{芬奴}가 그의 도성(昆都){河套包頭근처?}을 쳤더니, 섭신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치희{雉姬}와 작희{鵲姬}가 모두 딸을 낳았다.

● 十二年癸丑, <漢>, <驁>, 無子, 以其侄<欣>爲太子.

○ 광명 12년{단기2326년/BC8}계축

한{漢=西漢}의 유오{鷔=成帝}가, 아들이 없어, 조카 유흔{欣=哀帝}을 태자로 삼았다.

◎  十三年甲寅, 正月, <阿爾>后崩, 春秋三十三. 后, 皇后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 生<都切>太子及三公主.  <金蛙>王殂, <帶素>立.

○ 광명 13년{단기2327년/BC7}갑인, 정월

아이{阿爾}후가 춘추 서른에 죽었다. 아이후는 소황후 전 남편 구태{仇台}의 딸이다. 성품은 따뜻하며 자애롭고 정숙하며 영리하였고, 도절{都切}태자와 공주 셋을 낳았다.  금와{金蛙;☞東扶餘}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  十四年乙卯, 正月, <都切>如<柵城>娶<帶素>女.  七月, <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 <帶素>, 引五萬軍入寇<松江(通江}{松花江?}>, 大雪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觧素>之諫.

○광명 14년{단기2328년/BC6}을묘,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柵城; 東扶餘都城}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온조{溫祚}가 한산{漢山}땅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再思}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  10월, 대소가 5만군을 끌고 들어와 송강(통강){송화강?}에서 노략하다가 큰 눈이 7일간을 내려서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 되자, 해소{觧素}의 간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

◎  十九年庚申, 八月, <託利>・<斯卑>傷逸豕于<長屋澤>, 命坑之. 而不豫, 皇后與巫跌禱謝之.  <武骨>左輔, <高婁>右輔.
<漢>, <欣>死. 從弟<衍>立, <董賢>夫妻自殺, <王莽>女專政.

○ 광명 19년{단기2333년/BC1}경신,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달아난 제사희생용 돼지를 장옥택{長屋澤}에서 상하게 하였기에, 그들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다. 이후 상의 목숨이 위중하여 졌더니, 황후와 무당이 탁리와 사비를 땅에 묻어 죽인 제{=유리}의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무골{武骨}을 좌보로, 고루{高婁}를 우보로 삼았다.  한{漢}에서는 애제 흔이 죽고, 종제{4촌동생}인 평제 연이 섰다. 동현 부처가 자살하고, 왕망의 딸이 정사를 도맡았다.

◎  二十年辛酉, 正月, <都切>太子, 自<柵城>歸未幾, 薨. <帶素>, 自愧其失, 而還<都切>而留其女, 故<都切>悲傷不起.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上, 減食以慰皇后, 以<阿爾>女<眞>公主妻<沸流>子<昜人>.  <曼>公主改嫁于<都助>.  <陜父>太輔. 太輔<大房良>薨, 年八十二. 賜其妻<掩>公主年穀.

○ 광명 20년{단기2334년/AD1}신유,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柵城}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니, 대소{帶素}는 이 일을 자괴하여, 도절의 시신은 돌려보내고, 자신의 딸은 데리고 있으려 하였더니, 죽은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5월, 비류{沸流}가 37살에 죽었다. 상은 감식하며 소황후를 위로하였고, 아이{阿爾}의 딸 진{眞}공주를 비류의 아들 양인{昜人}에게 처로 삼아 주었다.  만{曼}공주가 도조{都助}에게 개가하였다.  협보{陜父}를 태보로 삼았다. 태보 대방량{大房良}이 82살에 죽었다. 그의 처 엄{掩}공주에겐 매년 양식을 주도록 하였다.

※현금 북경 동북에 사물택{沙勿澤}과 유사한 사물촌{沙勿村}이 있다.

◎  二十一年壬戌, <絶奴>掌牲<薛支>遂逸豕, 至<國內><尉那岩>, 見麋鹿魚富裕, 宜五穀, 多茂林大樹, 藥泉, 神山, 以爲可都地. 三月, 謁上, 請建都.  四月, 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與皇后, 相都于<國內(解慕漱與柳花相逢故曰國內)>.  九月, 與皇后, 又如<國內><熊心>・<合歡>・<尉那岩>等地, 而仍遊<沙勿澤>, 訪隱者<位沙勿>于澤畔石. 上載而歸, 皇后曰;“山間賤夫, 何用乎.” 上曰;“不然, <伊尹>・<呂尙>, 皆此類也.”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公主生<溫祚>子<多婁>.  
<漢>, <衎>以<王莽>女爲妻. <莽>召又■■女■, ■居次.

○ 광명 21년{단기2335년/AD2}임술

제사 희생물을 관장하는 절노{絶奴}부의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좇아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岩}에 다다랐더니, 큰사슴 작은 사슴 물고기가 풍성하고 넉넉하며, 오곡을 가꾸기 적당하고, 무성한 숲과 큰 나무가 많고, 약수가 샘솟고, 신성한 산이 있어, 도읍으로 하기에 합당한 곳임을 발견하였다. 3월에 상께 도읍을 세우기를 주청하였다.  4월, 위중림{尉中林}(재위나암근지)으로 사냥을 나가서, 황후와 함께 국내(해모수여유화상봉,고왈국내){北扶餘古都?}가 도읍으로 삼기에 어떠한 지를 살폈다.  9월, 황후와 함께 국내의 웅심{熊心},합환{合歡},위나암{尉那岩} 등의 땅을 살피러 갔다가, 사물택{沙勿澤}을 유람하고, 은거하고 있던 사람 위사물{位沙勿}을 늪의 반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상이 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왔더니, 황후가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상은 “그렇지 않소. 이윤{伊尹; 湯을 도와서 夏를 멸하고 殷을 세우게 한 賤出의 어진 宰相}이나 여상{呂尙; 周를 도와서 殷을 멸하고 齊를 세운 姜太公 子牙}>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소.”라 답하였다.  현{玄}공주를 작{鵲}태자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가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한{漢}의 연이 왕망의 딸을 처로 삼았다. 왕망은 또 ■■의 딸■을 불러들였다. ■는 둘 째 처가 되었다.

◎  二十二年癸亥, 十月, 移居<尉那岩>, 是爲「北都」.  作新宮於<銀川岺>下.  十二月, 田于<質山>陰, 五日不返. <陜父>諫曰;“天子之畋在於鍊兵. 今, 風雪如此, 暴露獵騎而行樂, 可乎”. 上, 以<陜父>初附於<沸流>, 有蘊意, 至是, 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 광명 22년{단기2336년/AD3}계해, 10월

위나암{尉那岩; ≠溫祖尉那城}으로 이거하니, 이곳이 북도{北都}이다.은천령{銀川岺; 赤峰西方?, 北京北隣?}아래에 새 궁전을 지었다.  12월{=한겨울}에 질산{質山; 吉山?}북쪽에서 사냥하며 닷새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협보{陜父}가 “천자가 사냥을 함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풍설에 사냥마를 심하게 내돌려서 행락하심이 가당하신지요?”라 아뢰었다. 상은, 비류{沸流;松讓據都地}에서 협보{陜父}를 처음 만나고서부터 마음속에 쌓여 온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자, 그를 파면하였다. 협보{陜父}는 작은 배로 물{하천・호수・바다}을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  二十三年甲子, 二月, 以<解明>爲東宮. 宝算十七. 母, <松>后, 夢鸞乘日, 而出. 性英明好勇, 形皃亦多肖上, 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松>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 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 故名岺曰<鶴盤>.  <鵲>太子浮海入<新羅>.

※은천령{銀川岺}이 은산{銀山}고개이고, 옛 은산{銀山}이 현금의 은산이라면,그 은산 남쪽엔  행궁이 두 개가 있는데, 모두가 고려영 지근의 거리에 있다. 같은 지도의 적봉서방엔 銀川과 유사한 銀河川도 있으며, 또 다른 군사지도상의 고려영 서편 11Km쯤엔 소탕산도 있다.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위치한 고려영(高麗營)


○ 광명 23년{단기2337년/AD4} 갑자

2월, 해명{解明}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고, 모친 송{松}후가 란새가 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서 낳았다. 성품은 영명하며 씩씩하고, 얼굴도 상을 많이 닮았다. 이에 황후의 딸 진{珍}공주로 처를 삼아 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널리 풀어 주었다.  송{松}후가 은천{銀川; 銀山주변 하천이고 銀山은 高麗營에 北接한 산?; 赤峰西方의 銀河川?}의 새 궁전에서 무휼{無恤}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비췄다.’하여 궁의 이름을 주유{朱留}궁이라 하였고, ‘흰 학이 고개 위를 선회하였다.’하여 고개 이름을 학반{鶴盤}령이라 하였다{주유궁과 학반령은 지근간이다}.  작{鵲}태자가 물{하천・호수・바다}을 건너서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 二十四年乙丑, 九月, 田于<箕山>, 得<羽澤>, 妻以<鱒>公主. 有畜獸才.

○ 광명 24년{단기2338년/AD5}을축, 9월

기산{箕山; 南箕山?}에서 사냥하다가 우택{羽澤}이라는 사람을 얻었고, 준{鱒}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다. 짐승을 길들이고 가두어 기르는 재주가 있었다.

◎ 二十六年丁卯, 四月, <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 以助伐<韓>. 三年継之.

○ 광명 26년{단기2340년/AD7}정묘, 4월

해읍주{解邑朱}가 태어났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泰山주변?}땅으로 이거하였다.  대소{帶素}의 형제 여덟이 보위를 다투며 서로를 죽였다.  병사와 식량을 보내서 온조의 한{韓; ☞馬韓?, 新羅?}정벌을 도왔다. 3년을 계속하였다.

◎ 二十七年戊辰, 三月, 賜<觧明>死. 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宝弓授<觧明>. <解明>, 折之, 曰;“非我有力也. 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 曰;“<解明>, 不愛其妻, 而侮辱國老. 陛下, 何不責之.” 上, 乃召<觧明>責之, 曰;“不愛<珍>女, 違父母也. 侮辱國老, 輕社稷也. 交通後宮, 淫亂之兆也. 寧其生, 不若死.” <觧明>, 悲憤, 立槍於<礪津>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新羅>, 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  七月, <都助>太子薨, 年二十四, <觧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 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觧明>之死, 慾爲東宮, 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 曰;“在自修, 而不在請.” 煩悶自焦, 觸暑而吐歐, 不起. 時, 人曰;“勇亦死, 懦亦死.”

○ 광명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해명{觧明}>을 자진하게 했다. 이때 21살이었다. 황룡왕{黃龍王}오이{烏伊}가 보궁{宝弓}을 해명에게 주었더니,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고 활이 튼튼하질 못했소.”라고 하였더니, 오이는 엄청 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는데도, 폐하는 어찌 해명을 꾸짖지 않으십니까?”라 주청하니, 상은 해명을 불러서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함이며,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함이고, 후궁들과 교통함은 음란할 징조이다. 정녕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책망하였더니,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했으나 려진{礪津}에서 창을 꽂아놓고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사람들은 용감하게 자진하였음을 좋게 여겼다.  신라{新羅}가 왕녀를 작{鵲}태자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東泰山주변?}땅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24살이었다. 해명의 동복형으로, 성품은 외조부 송양{松讓}을 닮아서, 자신을 과시하다 여러 번 질책을 받았다. 해명이 죽은 것을 보더니 동궁이 되고자, 자기 처 만{曼}공주에게 상께 청하라 하였더니, 만 공주가 “동궁자리는 스스로를 닦아서 차지하는 것이지 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라 하자, 번민하여 스스로 달아오르더니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토악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용감해도 역시 죽고, 나약해도 역시 죽음뿐이다.”라고 하였다.

◎ 二十九年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 <鏖>之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 광명 29년{단기2343년/AD10}경오, 6월

모천{茅川;茅山주변하천; 河北省 興隆・平谷間 泃河 最上流 茅山 곁 물줄기?}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더니, 오{鏖; =鏕=鉅鹿=秦置戰國時趙邑. 項羽曾大破秦兵於此. 地, 當今河北省平鄉縣?}땅의 사람이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동부여 남쪽과 북쪽에 사는 금와 아들 간의 싸움?; 삼국사기엔 북부여로 나옴!} 재사{再思}공주가 래조하였다 돌아갔다. 작{鵲}태자가 신라{新羅}의 태보가 되었다.

◎ 三十一年壬申, 七月, ※<漢>人<田譚>, 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 使<延丕(召后侄子)>擊<譚>殺之, <嚴尤>來寇, 虜其將卒二千餘・馬仗無數・印顆十二, 拓地七百餘里.  十月, 以<昜>公主妻<乙豆智>.

○ 광명 31년{단기2345년/AD12}임신, 7월

한{漢}인 전담{田譚;王莽 新 遼西大尹}이 색두{索頭}와 싸우다가 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구추가 연비{延丕}(소후의 조카)를 보내서 전담을 공격하여 죽였더니, 엄우{嚴尤}가 쳐들어왔기에, 엄우의 장졸 2천을 사로잡고 무수한 병마와 병장기 및 인과 12개를 노획하였으며 땅도 7백여 리를 빼앗았다. {또는, 엄우가 쳐들어와서 구추의 장졸 2천을 사로잡고, 무수한 병마와 병장기 및 인과 12개를 노획하고, 땅도 700여리를 빼앗아 갔다?}  10월, 양{昜}공주를 을두지{乙豆智}에게 처로 주었다.

※이 기록에 대한 얘기가 왕망이 高句麗를 下句麗로 하였다는 기사에 상당하며, 혹자가 고구려=후한이라는 주장을 한 것과 후한서등 기록의 진위에 유관한 구절임!}  

◎ 三十三年甲戌, 正月, 以<無恤>爲東宮, 敎以弓馬用兵之術.  七月, 以<豆>公主妻<高婁�>.  八月, <烏伊>, 領兵二萬, 伐<涉臣>, 拔<勾麗城>, 虜<涉臣>而歸. <紫蒙>十二國悉平. 十月, <摩離>, 亦引兵二萬, 拔<貊窟>・<貝沙>, 而還.  <帶弗>殺<帶素>而自立(弗, 帶伯之子, 一作金蛙子).

○ 광명 33년{단기2347년/AD14}갑술, 정월

무휼{無恤}을 동궁으로 삼고, 활쏘기 및 말 타기와 용병술을 가르쳤다.  7월, 두{豆}공주를 고루{高婁}에게 처로 주었다.  8월, 오이{烏伊}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섭신{涉臣=자몽왕}을 쳐서 구리성{勾麗城; 或 <鄒牟>以前 <句麗>의 要衝地?}을 빼앗고, 섭신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자몽{紫蒙} 12국을 모두 평정한 것이었다. 10월, 마리{摩離}가 군사 2만을 이끌고 맥굴{貊窟}과 패사{貝沙}를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돌아왔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를 죽이고 보위에 올랐다(불,대백지자,일작금와자).

◎ 三十七年戊寅, 四月, <觧術>溺死<礪津>, <祭須>尋其尸, 葬<王骨岺>.  七月, <烏伊>薨. <宝得>子<毛獜>立. <伊>之婿也.

○ 광명 37년{단기2351년/AD18}무인, 4월

해술{觧術}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였다. 제수가 그 시신을 찾았으며,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하였다.  7월, 오이{烏伊}가 죽고 보득{宝得}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다. 모린은 오이의 사위이다.{이하 삼국사기와 편년에 차이 있음!}

◎ 三十八年乙卯, 正月, 「北都」大震, 移于「東都」.  <黙居>太輔.

○ 광명 38년{단기2352년/AD19}을묘, 정월

북도{北都=위나암}에 큰 지진이 있었기에 동도{東都=初都}로 이거했다.  묵거{黙居}를 태보로 삼았다.

◎ 三十九年庚辰, 三月, 立<東明神廟>于<龍山>中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以<蘚>・<苩>兩公主妻<多婁>, 而賜正胤冠釼, 以爲<汗南>傳國之璽.  九月, 田于<骨句川>, 東宮得神馬, 狀如<巨婁>. 上曰;“<東明>復興之兆.  十月, <扶余>獻赤烏一頭二身.

○ 광명 39년{단기2353년/AD20}경진, 3월

룡산{龍山}의 가운데 고개에 동명신묘{東明神廟=사당}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궁에 들어왔기에, 선{蘚},백{苩}공주 둘을 다루의 처로 삼아 주고, 정윤관인{正胤冠釼; 보위계승자 표식인 관모와 보검}을 주어서, 한남{汗南}국의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 동궁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를 얻었더니, 상이 “동명{東明}이 부흥할 징조로구나.”라 하였다.  10월, 부여{=東扶余}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 四十年辛巳, 二月, <摩離>薨, 子<義鹿>立. 其母<素奴>女也.

○ 광명 40년{단기2354년/AD21}신사, 2월

비리왕인 마리{摩離}가 죽어, 아들 의록{義鹿}이 섰다. 의록의 어미는 소노{素奴}의 딸이었다.

* 四十一年壬午, 七月, <劉秀>起兵{伐}<王莽><新>■■■從之.  九月, 戊申朔, 斬<王莽>於<浙臺>.

○ 광명 41년{단기2355년/AD22}임오, 7월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왕망의 신을 토벌하였다. ■■■가 그를 따랐다.  9월, 무신일 초하루, 왕망이 절{대}에서 참수 되었다.

◎ 四十二年癸未, 十一月, <帶弗>來侵. 大破其軍於<鶴盤岺>下.

○광명 42년{단기2356년/AD23}계미,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왔기에, 학반령{鶴盤岺} 아래에서 그 군대를 크게 쳐부쉈다.

◎ 四十四年乙酉, 二月, <高婁>太輔, <松義>左輔, <乙豆智>右輔・主兵.

○ 광명 44년{단기2358년/AD25}을유, 2월

고루{高婁}를 태보로, 송의{松義}를 좌보로, 을두지{乙豆智}는 우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 四十七年戊子, 八月, 太后崩, 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十月, 上, 與皇后, 崩于<豆谷>離宮. 上春秋六十八, 皇后八十三. 皆葬于太后陵內.  東宮卽位於<豆谷>離宮.

○ 광명 47년{단기2361년/AD28}무자, 8월

예태후가 춘추 여든다섯에 죽어, 두곡{豆谷} 동쪽 언덕에 장사했다.  10월, 상과 황후가 두곡 별궁에서 죽었다. 상은 춘추 예순 여덟이었고, 황후는 춘추 여든 셋이었다. 둘 다 태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동궁이 두곡 이궁에서 즉위하였다.
{예태후와 광명대제=유리명제 및 소황후의 무덤이 두곡 한 곳에 몰려 있음! 두곡은 유리하진 인근임! 왜, 한 해에 모두 죽었나? 殉死?!}

※ 論曰; <光明>嚴毅少許, 謹於守成, 勸於擢才, 治天下四十年, 兵精粮足, 可謂賢矣. <陜父>・<解明>・<召>后之事, 皆有欠焉.

※ 광명{光明}은 엄하고 굳세어 너그럽진 않았으나 지켜 이룸에 충실하였고, 인재 발탁을 권장하여 천하를 47년간 다스렸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했으니 현명하였다 할 만하다. 협보{陜父},해명{解明},소{召}후 관련 처결은 모두 흠결이 있었다고 하였다.

유리명제{琉璃明帝=類利}:북경 서남 근지 유리하 지경에 아바마마제단, 어마마마제단, 유리 제단 및 무덤이 있었다함.장수왕 후손의 증언과 국회 교육위 권철현 의원의 현지답사 보고 있었음!이후 기록들에서도 동도는 지진이 다발하였으니 지진 다발지역이었을 것임!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2대 광명대제 편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소후의 존재입니다.소후는 소서노를 지칭하는데 추모왕 사후 소서노는 유리왕의 황후가 되었으며 비류는 미추홀을 다스리고 온조는 한남왕으로 봉해졌다는 것입니다.물론 나중에는 독립하지만 소서노는 유리왕과 같은 곳에 묻히는 등 기존에 알고있는 사실 등과 많이 다른 사실들이 고구려사략에 전해지는 데 지금같다면 이해가지 않지만 몇천년 전 형수취사제와 같은 문화가 존재했던 고구려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모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광명대제 유리왕

유리왕은 사실 추모왕보다는 크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추모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19~기원후18년으로 40년간의 통치기간을 자랑합니다.아버지 고주몽을 찾아 기원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기원전 9년 선비를 쳐서 항복을 받았고 13년 부여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14년에는 양맥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는 등 재위 기간에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으며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다고 하는 집안시 국내성(?)잔해

▩유리왕의 국내성 천도의 미스테리

광명대제 유리왕은 왜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현재 환인이라 불리는 곳)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을까?주몽이 소서노 세력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곳으로 의미있기도 하지만 사실 이곳은 소서노의 근거지였습니다.처음 도읍했다고 여겨지는 오녀산성은 산정상에 있는 산성이고 주몽과 소서노는 이 곳에서 6칸 정도의 건물을 짓고 살았습니다. 오녀산성은 방어용 산성으로 피난처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절벽 위에 지어져 남북 1km 동서 300m의 규모의 작은 성이었습니다.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녀산성과 더불어 평지성으로 하고성자성지가 있는데 동벽 226m, 서벽 264m, 남벽 212m, 북벽 237m인 이 하고성자성지를 오녀산성과 세트를 이루는 성으로 보이는 이유는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오녀산성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고구려 시대의 무덤인 적석묘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곳이 초기 고구려왕궁으로 볼 지는 무리인데 산으로 둘러싸인 곳도 아니고 강이 넘치면 범람할 수 있는 곳이며 유사시에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오녀산성과도 꽤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졸본성이 가지는 지형적 불편함은 고구려 2대 유리왕 대에 국내성 천도라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교시(郊豕 :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풀려나 도망을 가자,
왕이 희생(犧牲)을 맡은 설지(薛支)를 시켜 뒤를 쫓아가게 하였다.
설지는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잡았다.” 『삼국사기』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삼국사기/고구려 사략 중』


기록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을 실행한 유리왕은 재위 기간동안 만주 지방에 있었던 예맥족(濊貊族)의 부족 국가인 양맥국을 복속시켰으며 한나라 땅으로 복속된 고구려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동부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리왕은 국력을 강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는데 아마 국내성으로의 천도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여기서 위나암성은 환도산성의 본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역시 졸본에서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국내성이 평지성으로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위나암성은 국내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위나암성이 그 역할을 해왔다면 그것은 국내성이 수도로서 중국의 많은 위협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역사에서는 서기 244년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기도 했으며 서기 343년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다시 수리하여 이곳으로 천도하였으나 연왕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환도성이 불에 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시거처인 환도산성은 왕과 대신들이 피난하여 고구려의 재건을 꿈꾸는 곳이기도 했습니다.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기존의 수도 졸본이 중국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안보상이 위험이 많았고 공간이 좁아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하지만 건국하지 얼마 안된 고구려가 수도를 천도한다는 것에는 다른 명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천도를 단행했을 때에는 졸본 지역 사람들이 반발했을 것입니다.고구려 건국의 중심세력이자 예로부터 졸본부여라고 했으니 고대 부여사람들이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리왕의 고구려 집권을 피해 소서노 세력이 남하했는데 유리왕에 대한 반대세력 모두가 다 이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들이 국내성에 계속 남았다면 이것은 유리왕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미 복속된 비류국사람들도 있었으며 삼국사기에는 졸본부 여왕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이는 부여에서 졸본으로 와 왕이 된 자입니다. 이들과 주몽세력간 결합으로 고구려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고구려 내에서는 정치세력들 간에 권력투쟁도 심했을 것입니다. 유리왕의 수도 천도 정책에는 유리왕이 아끼는 해명태자도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리왕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만들고 안보에 안정을 기하기 위해 수도 천도를 단행합니다. 천도 5년이 지난 후에도 해명태자는 국내성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국내성 천도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해명태자는 단순하게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자결하는데 징치적인 이슈 역시 존재했다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조선 시대에도 당파싸움으로 희생된 세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두번째 수도 '국내성'
왼쪽 산성이 전시수도 환도성 , 아랫쪽 평지성이 평시수도 국내성(우)집안시에 남아있는 옛 고구려 국내성 성벽

국내성이 위치한 곳은 집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한자로 집안(輯安)인데 ‘어루만져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풍수적으로 편안했다는 이야기이고 실제로 집안시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곳은 주변에 비해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성에는 압록강이 있는데 이 곳은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수로망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압록강은 외교를 할 수 있는 교통로 역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성은 군사적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면서 대피가 용이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쪽으로의 방향에는 산들이 겹겹이 있었고 이곳에 산성이 위치하여 방어에도 더 견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중국 왕조들의 침입이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국내성이 방어에 취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400년이 넘는 기간 국내성은 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3,4천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고 이후에는 맥족이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장수왕대에는 평양성으로 천도합니다. 하지만 국내성은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고구려는 3경 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국내성이 북평양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연개소문 사후에는 그의 아들 연남생이 평양에 있는 그의 동생들과 싸울 때 근거지로 삼은 곳이 바로 국내성이며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압록강 이북 지역의 성들은 계속 부흥운동을 펼쳤으니 국내성은 그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국내성과 가까운 거리에 환도산성이 있습니다. 이 성에서는 점장대라는 곳이 있어 이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장수가 이곳에서 지휘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 피난하는 임시터이기도 했지만 여러 채의 건물터가 보여 왕궁이 있었을 것이며 와당이 유물로 출토되었으니 생각보다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와당에는 고구려의 관직이름이 적혀 있어 아마 이곳에서 정치적인 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국내성 일대에는 많은 고분들이 있었으며 그 수가 1966년 조사 때 1만 1280기, 1997년 통계는 6854기입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많이 파괴되었지만 이를 추정하여 생각하면 아마 고구려 시대에는 2만기가 넘는 고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초기의 돌무지 무덤은 땅 위에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무덤인데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과 그 이후 수도 국내성 그리고 그 근처의 지역에서 이러한 돌무지 무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돌무지 무덤의 위치를 그려보면 초기 고구려의 영역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덤들 중에 유명한 것이 바로 장군총입니다. 한 때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했으며 지금은 이곳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있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기도 하며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로 보고 있습니다. 한 학자는 광개토대왕이 또다른 고구려고분인 천추총을 개보수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곳에서 영락(永樂)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제작 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태왕릉에서도 같은 문양과 방식의 모양의 연꽃무늬 와당이 나왔습니다. 그럼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기에 개보수한 것으로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의 무덤의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구려 최고 전성기 시절 중 하나인 광개토대왕시기의 도읍지가 바로 국내성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마 유리왕이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고구려 900년 사직의 성공적인 업적이기도 할 것입니다.(물론 국내성이 수도가 아니라 고구려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 혹은 소도(성스러운 곳)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유리왕의 흔적들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이름으로 지은 강 유리하(琉璃河):북경 서남쪽 위치



북경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사당 유리묘(琉璃廟)의 경우 국회 교육위원장인 권철현 의원이 직접 답사하고 현지인의 증언을 들었는데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사당 유리묘(琉璃廟)가 있던 곳이 현재의 북경 유리하(琉璃河)였으며 현지인을 만난 권철현 의원은 현지인에게서 유리왕 무덤 앞에 세개의 제단이 있었으며그 제단의 이름을 들어보니 생생한 한국어로 각각 아바마마제단, 어마마마제단, 그리고 유리제단이었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유리묘는 문혁(문화대혁명) 때 비석이 뽑히고 파헤쳐졌다고 합니다.고구려의 옛 흔적들이 모두 중국 북경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정말 우연일까?아니면 역사의 그늘에 숨겨졌지만 필연적으로 보이는 증거들일까?그 해답은 우리 후손들이 찾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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