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
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신대제의 이름은 백고인데 태조대제의 별자이다. 어머니는 상온의 딸 천화인 상태후이다. 의표가 영특하여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워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제가 무도하자 백성과 신하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꺼렸다. 화를 당할까봐 백고도 맥부에 사자로 갔다가 산속에 피했었다. 이때 차대가 백고를 의심해서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의 자식인가?"라고 묻자 상후가 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차대가 화를 내어 백고가 태어났을때 그대는 상황 태조의 총애를 받던 후였는데 어찌 백고가 仙제의 자식이 될수있냐고 하였다. 그래서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던 백고는 위급해졌고 상후는 명림답부에게 도움을 청하고 차대에게 독을 먹였으나 죽지 않았다. 이에 명림답부가 차대를 죽이고 채대의 심복들을 모두 척살하였다. 이후에 즉위하게 되었다.
第八世新大帝紀 제8세 신대제기
帝, 諱<伯固>, <太祖>之別子也. 母, <尙>太后, <溫>之女也. 儀表英特, 性仁恕有大志. <次大>無道, 民臣不親. 恐禍及己, 使「貊部」而不返遯于山谷. <次大>, 疑之, 問於<尙>后, 曰;“<伯固>, 誰子.” 后, 欺以為<仙帝>出. <次大>, 怒, 曰;“<伯固>生時, 汝爲上皇之寵后. 胡云<仙帝>出乎.” 遂, 與后相隔索, <伯固>甚急. 后, 乃通<明臨答夫>為援, 進毒于<次大>, 毒而未薨. <答夫>, 乃入帳中, 刺脅殺之, 秘不發喪, 捕<次大>心腹壯士, 凡十日而盡殺之. 然後, 迎帝于<淌水宮>卽位.
제의 휘는 백고이고, 태조의 별자이다. 모친은 상온의 딸{천화}인 상태후이다. 의표는 영특하고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가 무도하자 백성과 신하들이 가까이 지내길 꺼려하였다. 화를 당할까 두려워 {백고도} 맥부에 사자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산곡에 피해 있었다. 이에 차대가 백고를 의심하며,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후가 선제{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더니, 차대가 화를 내며 “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상황{太祖}의 총애를 받던 후였었는데, 어찌 백고가 선제의 자식이란 말을 하시오?”라고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백고는 상황이 위급하여졌다. 상후는, 명림답부에게는 연통하여 도움을 청하고, 차대에게는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독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이에 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제를 창수궁{=탕수궁?}으로 맞아들여 서 즉위하게 되었다.
◎ 元年乙巳, 十一月, 右輔<箊疾>献璽于帝, 曰;“先君, 不幸棄世, 有子不肖, 天人之心皈于陛下. 願, 為億兆, 登祚.” 上, 俯伏三讓以後受寶, 登壇而受百官万民之山呼. 天日復明. 以<穆度婁>女為皇后. <松奇>太輔, <箊疾>左輔, <尙庚>右輔. <答夫>, <淹淲>沛者, 妻以帝女. <索頭>, <[梪]山>殂. 子<真>立, 以<裶>公主妻之. 太史<米肯>請改元<光國>. 上, 曰;“德不稱位, 猶恐背天違民. 何敢改元, 效嚬哉.” <[梪]真>, 分其國為三部. 自<扶餘>至<烏孫>, 云.
○ 원년{단기2498년/AD165}을사, 11월,
우보 어질이 제에게 옥새를 바치며 아뢰길; “선군{차대제}께서는 불행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며, 아들이 있으나 불초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뜻이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원하옵건대, 억조창생을 위하여 황제의 위에 오르십시오.”라 하였다. 이에 상은 부복하여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새보를 받고, 등단하여 백관과 만민의 만세를 받았다. 하늘의 해가 밝음을 되찾았다. 목도루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송기를 태보로, 어질을 좌보로, 상경을 우보로 삼았다. 답부는 엄표패자로 삼고, 제의 딸을 처로 삼아주었다. 색두의 [두]산이 죽어, 아들 [두]진이 섰기에, 비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태사 미긍이 연호를 광국으로 바꾸자고 청을 하였더니, 상이 답하길; “덕이 제위를 칭할 만큼 되지 못하니, 오히려 하늘의 뜻을 등지고 백성의 뜻을 거스를까 걱정스럽소. 어찌 연호를 바꾸어 비웃음 사겠소!”라 하였다. 두]진이 자기의 나라를 세 부로 나누었다. 부여에서 오손까지였다고 한다.
◎ 二年丙午, 正月, 辛亥朔, 日食. 大赦<次大>之囚, 而兼赦<次大>之族. <次大>子<芻安>来謁請罪, 勞之, 曰;“叔父不仁妄殺無咎, 天人怒矣. 汝則無罪, 不須逃匿.” 乃賜<狗山瀨>․<豆婁谷>二所爲食邑, 號以<讓國君>. 命<答夫>緫執兵馬之権兼統<梁貊>諸國事. 位與三輔齊, 三輔之権盡皈於<答夫>. 是, 乃國相之始. <答夫>時, 稱以「輔外太大加」. <乙巴素>時, 號以「國相」.
○ 2년{단기2499년/AD166}병오, 정월,
신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차대가 가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풀어주고, 겸하여 차대의 가족들도 풀어주었다. 차대의 아들 추안이 찾아와 죄 주기를 청하니, 위로하며 이르길; “숙부는 어질지 못하여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죽였기에 하늘과 사람들이 노하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쓸데없이 도망하여 숨지 말거라.”라 하고는 구산뢰와 두루곡 두 곳을 식읍으로 주었으며, 양국군이라 불렀다. 답부에게는 군권을 총괄하게 하였고, 겸하여 양맥국의 모든 정사도 맡아보게 하였다. 지위는 삼보와 나란하였으나, 삼보의 권한은 모조리 답부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국상제도가 시작되었음이고, 답부시절엔 보외태대가라 불렀고, 을파소시절엔 국상이라 불렀다.
◎ 三年丁未, 二月, <松奇>薨. <箊疾>太輔, <尙庚>左輔, <白面>右輔, <淵合>大注簿. <幽州><公孫域>, 自稱<玄菟>太守, 来侵<丘利>. <禾晉>擊破之.
七月, <濟>, 伐<羅>國西二城, 虜千余人[而]去. 八月, <羅>一吉飡<興宣>二万兵圍<濟>東六城, 其主自将八千勁騎掩至<漢水>. <濟>人, 大惧還其所俘, 而和.
九月, 如<卒本>祀祖庙. 十月, 還.
○ 3년{단기2500년/AD167}정미, 2월,
송기가 죽었다. 어질을 태보로, 상경을 좌보로, 백면을 우보로, 연합을 대주부로 삼았다. 유주의 공손역이, 현도태수를 자칭하면서, 구리에 쳐들어왔다. 화진이 이를 격파하였다.
7월에 백제가 산라의 서쪽 두 성에 쳐들어가 1,000여 명을 잡아갔더니, 8월에 신라의 일길찬 흥선이 2만병으로 백제의 동쪽 여섯 성을 포위하였고, 그의 주인이 굳센 기병 8,000을 이끌고 한수에 엄습하여 다다랐다. 백제인들은 크게 두려워서 잡아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약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고, 10월에 돌아왔다.
◎ 四年戊申, 五月, <濟>人<都彌>來降, 置之<蒜山>. <羅>, <継元>死, <興宣>伊飡. <穆>后生女<玉陽>.
十二月, <禾白>・<禾晉>・<高德>・<穆巴>等, 分四道伐<幽>・<幷>二州, 驅其大姓十二家而来. 命與公卿相婚. 櫛․梭․萡․織․金․銀諸工, 使居<西河>. 經籍医薬之士, 皆授以官.
命<白面>畵<東明>像, 頒于仙院, 曰;“<芻牟>, 神而非人也. 夙興孜孜二十余年如一日. 况吾輩乎, 仙院政院一律, 夙興孜孜克己, 然後可答聖像及修鏡五十七繪卷.”
○ 4년{단기2501년/AD168}무신, 5월,
백제사람 도미가 항복하여 왔기에 산산에 살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계원이 죽어, 흥선이 이찬이 되었다. 목후가 딸 옥양을 낳았다.
12월, 화백,화진,고덕,목파 등이 네 길로 나누어 유주와 병주 두 주를 정벌하고, 큰 성씨 12 집안을 몰아왔기에, 공경들과 서로 통혼하여 살게 하였으며, 즐사{櫛梭; 두터운 천을 짜는 일}・박직{箔織; 얇은 비단 천을 짜는 일}・금은{金銀; 금과 은을 야금하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들은 서하에 살게 하였고, 모든 경적{經籍}・의약{医藥} 관련 관리였던 이들에게는 관직을 주었다.
백면에게 동명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선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이르길; “추모께서는 신이셨지 인간이 아니시었소.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시길 20여년을 하루같이 하시었소. 나를 따르는 무리들이여! 선원과 정원 모두 하나같이 일찍 일어나 부지런 하여 자신을 극복한 연후에 성상{聖像}에 답하고{은혜에 보답하고} 대경 그림 57권도 닦아 나갑시다.”라 하였다.
◎ 五年己酉, 二月, <幽州>賊<喬玄>來寇<句麗城>, <禾晉>擊其軍於<河山>破之.
四月, 閱兵於<西河>, 詔曰;“兵者, 國之元氣也. 朕, 與士卒同甘苦, 以禦賊. 大小官民, 悉體此旨.”
<漢>人<耿臨>, 自稱<玄菟>太守, 與<喬玄>, 來寇<丘利>地. <禾白>, 擊退之, 獲其妻子圖釼.
○ 5년{단기2502년/AD169}기유, 2월,
유주적 교현이 구려성에 쳐들어와 노략질하기에, 화진이 하산에서 그 군대를 쳐부쉈다.
4월에 서하에서 열병하고, 조서로 이르길; “군병은 나라의 근본을 지키는 힘이오. 짐도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도적을 막을 것이오. 대소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는 이 뜻을 새기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한인 경림이, 현도태수를 자칭하고, 교현과 함께, 구리의 땅에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다. 화백이 이를 쳐서 물리치고 그들의 처자와 인장{또는, 그림} 및 보인을 노획하였다.
◎ 六年庚戌, 正月, 以<紇>氏為宮人, <于恢>為使者. <紇>氏, <桶口王>妃也. 年五十.
三月, 丙寅晦, 日食.
十月, <濟>侵<羅>邊.
○ 6년{단기2503년/AD170}경신, 정월,
흘씨를 궁인으로 삼고, 우회를 사자로 삼았다. 흘씨는 통구왕의 비였으며, 나이는 50이었다.
3월, 병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0월,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 七年辛亥, 五月, <箊疾>夢見<高福章>疾作将移水閣, <福章>子擊殺之. 朝廷難其事. 命移于<柵城>.
<尙庚>太輔, <白面>左輔, <穆崇>右輔, <陽弼>・<高衡>左・右大評者, <穆天>中宮大使者. <羅>, 穀貴民飢.
○ 7년{단기2504년/AD171}신해, 5월,
어질이 꿈에 고복장을 보고나서 병이 들어 곧 물가의 정자를 옮기려 하자, 복장의 아들이 이를 죽였다. 조정은 이 일로 난감하였다. 책성으로 떠나라고 명하였다.
상경을 태보로, 백면을 좌보로, 목숭을 우보로, 양필과 고형을 좌・우 대평자로, 목천을 중궁의 대사자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곡식이 귀하여져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 八年壬子, 正月, <穆>后生<晉岐>太子. 九月, <公孫域>・<耿臨>・<喬玄>等, 與<索頭>, 合兵来寇<句麗>・<盖馬>等城, 皆潰. <禾晉>自<丘利>退保<河城>, <答夫>徃<南口>淸野以待之, 不過旬月果飢而退. 此, 所謂“千里運糧勢, 不能久者.”也. 乃以勁騎七千, 擊之. <禾晉>亦至, 合擊于<坐原>, 大破之, 匹馬不得返. 是謂<坐原>大捷. 賜<答夫><坐原>地, 後改以<質山>. 是年, <羅>, <仇道>海飡, <仇須兮>一吉飡. 二月, <羅>, 大疫, 禱其祖庙.
○ 8년{단기2505년/AD172}임자, 정월,
목후가 진기태자를 낳았다. 9월, 공손역,경림,교현등이, 색두와 함께, 병력을 합하여 쳐들어와 구려,개마성 등을 궤멸시켰다. 화진은 구리에서 물러나 하성을 지켰고, 답부는 남구로 가서 들판을 불태워 비우고 기다리니, 불과 한 달도 아니 되어 먹을 것이 떨어지니 물러갔다. 이를 두고, “군량을 1,000여 리나 실어 날라야 할 형세라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답부가} 굳센 기병 7천으로 몰아치고, 화진 또한 답지하여 함께 쳐서, 좌원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더니,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이를 두고 좌원대첩이라 한다. 답부에게 좌원의 땅을 주었고, 후에 질산 땅으로 바꿔주었다. 이해에 신라에서는 구도가 해찬이 되고, 구수혜가 일길찬이 되었다. 2월에 신라에서는 돌림병이 크게 돌자, 조상의 사당에 빌었다.
◎ 九年癸丑, 正月五日, 宮人<朱>氏生<延優>太子, 香滿室. 上, 大喜, 封爲<馬山宮>妃, 以其父<輅>為採供使. <輅>, <文>之別子也. 五月, <倭>女主, 與<羅>, 修好.
○ 9년{단기2506년/AD173}계축,
정월 5일에 궁인 주씨가 연우태자를 낳았는데, 방 안이 향기로 가득하였었다. 상이 크게 기뻐하며 마산궁비로 봉하여 주고, 그녀의 부친 주로를 채공사로 삼았다. 주로는 주문의 별자{서자}였다. 5월, 왜의 여주{=卑彌呼?}는 신라와 잘 지내기로 하였다.
◎ 十年甲寅, 正月, <尙庚>病免. <白面>太輔, <穆崇>左輔, <陽弼>右輔, <米肯>大評者. <肯>, <漢>人也. 通天文, 明<史記>, 精律令. 上, 以寡公主妻之, 遂大用能. 謙讓勤儉, 敎誨不倦. 是月, <羅>雨土, 而二月, 旱, 井水渴. 置評府・劾府・供府・採府・賓府・奴府・王子私兵府. 皆, 以大加, 領之. 次以大評・[大]劾・大供・大採・大賓・大奴・将軍等, 主其事. 乃<米肯>之奏也.
○ 10년{단기2507년/AD174}갑인, 정월,
상경이 병들어 물러나니, 백면을 태보로, 목숭을 좌보로, 양필을 우보로, 미긍을 대평자로 삼았다. 미긍은 한인인데, 천문을 달통하고, 사기에 밝았으며, 율령에 정통하였다. 상이 홀로 된 공주를 처로 삼아주고는 그의 능력을 크게 썼다. 겸양근검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이 달{정월}에 신라에서는 흙이 비처럼{심한 황사? 화산재?} 내렸고, 2월에는 가뭄에 우물물이 말랐다. 평부・핵부・공부・채부・빈부・노부・왕자사병부를 두었다. 모두 대가들이 수령을 맡고, 대평・[대]핵・대공・대채・대빈・대노・장군 등이 차석이 되어, 그 부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일 또한 미긍이 아뢴 것이었다.
◎ 十一年乙卯, 三月, 上, 以<玄>太子徒善而好仙, 欲立<男武>太子為東宮. <男武>曰;“不可以越兄.” 按行州邑, 至<提那>而淹留. <玄>太子徃諭, 而還. <發岐>娶<虎川>. <朱>氏生女<夐>.
○ 11년{단기2508년/AD175}을묘, 3월,
상이, 현태자는 선하기는 하였으나 선(仙)하기를 좋아하기에, 남무태자를 동궁으로 삼으려 하였더니, 남무는 “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주와 읍을 두루두루 살피며 제나에 이르러서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으며, 현태자가 찾아가서 알아듣도록 하였더니, 돌아왔다. 발기가 호천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씨가 딸 형을 낳았다.
◎ 十二年丙辰, 三月, 以<男武>為正胤, 后兄<穆天>為東宮大夫, <于素>東宮皂衣. <白面>薨, 年八十, 美容儀, 善画繪. 以<尙>太后外族, 居中用事六十年, 未有一失. 人稱其難, 然, 德不普身, 器不容國, 非宰相才, 云. <穆崇>太輔, <陽弼>左輔, <高衡>右輔. <盖婁>殂, <肖古>立.
○ 12년{단기2509년/AD176}병진, 삼월,
남무를 정윤으로 삼고, 후의 오라비 목천을 동궁대부로, 우소를 동궁 조의로 삼았다. 백면이 나이 80으로 죽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가지런하였으며, 비단 폭에 그리기를 잘 하였다. 상태후의 외가 식구로, 벼슬살이를 60년이나 하면서도, 허튼 일은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하면서도, “덕이 몸에 널리 배어있지 않고, 그릇이 나라를 담아내지 못하여 재상감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목숭이 태보가, 양필이 좌보가, 고형이 우보가 되었다. 개루가 죽고, 초고가 섰다.
◎ 十四年戊午, 三月, 以 東 宮 皂衣<于素>女為東宮妃. 加<素>爵為<提那>沛者. 十月, 丙子晦, 日食. 上, 泫然流涕, 曰;“朕, 以不德, 忝居寶位. 上不能孝母, 下不能慈民. 昔, 我<東明仙皇>, 日行百善而猶以為不足. 朕, 欲日行一善而不及, 豈不悲哉.” 左右悚然. 是日, 太輔<穆崇>薨, 年六十九, <弼>代之. <高衡>左輔, <穆天>右輔.
○ 14년{단기2511년/AD178}무오, 3월,
동궁 조의 우소의 딸을 동궁비로 삼았다. 우소에게는 작위를 더하여 주어서 제나패자로 삼았다. 10월, 병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이르길; “짐이 부덕하여 보위를 더럽히고 있소. 위로는 모친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였소. 일찍이, 우리 동명선황께서는 하루에 백 가지의 좋은 일을 하시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셨소. 짐은 하루에 한 가지의 선행을 하고자 하여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소!”라 하였다. 좌우가 송연해 하였다{송구해서 등골이 오싹했다}. 이날, 태보 목숭이 죽어, 양필이 대신하게 되었고, 고형이 좌보가, 목천이 우보가 되었다.
◎ 十五年己未, 九月, <梁貊公>・摂政<明臨答夫>暴薨, 年五十二. 葬以<梁貊大王>・駙馬都尉之禮于<質山園>. 有膽力権智, 謀事必成. 人以為天. 得<尙>太后寵, 專國政十五年, 內外洽然.
十二月, 上, 崩於「西 都」<鸞宮>, 春秋五十九, 葬于<故國谷>. 上, 寬厚好仁, 喜聞<漢>人經籍, 擇師而講. 欲行聖人之治, 而権委於<尙>太后・<明臨答夫>, 故不得如意而終. 惜哉.
○ 15년{단기2512년/AD179}기미, 9월,
양맥공이며 섭정이었던 명림답부가 나이 52살에 갑자기 죽어, 양맥대왕․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에 장사하였다. 담력 있고 권도{위급 시에는 변통하는}의 지략이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었다. 사람들이 하늘처럼 여겼다. 상태후의 총애를 받아, 국정을 15년이나 도맡아 보았는데, 도성 안팎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12월, 상이 서도의 란궁에서 춘추 59세로 죽어, 고국곡에 장사했다. 상은,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한인들의 경적 내용을 즐겨 들었고, 스승을 두어 강의하게 하였으며, 성인의 다스림을 펼치고 싶어 하였으나, 정사를 상태후와 명림답부에게 위임하였던 까닭에, 뜻과 같이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서글픈 일이었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삼국사기 신대왕
신대왕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제8대 군주로 휘는 백고 혹은 백구로 왕호 자체가 새로운 군주입니다.태조대왕과 신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으로,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서자로,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옵니다. 이에 대한 현재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먼 방계쯤 된다는 것입니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라더라도 후일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뒷 시기의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대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조-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보다 수백년 앞선 중국기록인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사망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여러모로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의심되며 단재 신채호는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주장했습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명림답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임금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합니다.당시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죽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으로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 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나이 차를 감안한다면 차대왕의 출생연도는 113년쯤으로 추정되며,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우가 아니라 차대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을사년(165년) 국조왕(태조왕)의 나이가 119세였는데 두 선왕((태조왕,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
/삼국유사 왕력
라는 기록이 있는데 차대왕 시기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그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합니다.아무래도 아버지(혹은 형, 혹은 삼촌)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한데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형 또는 아버지인 차대왕처럼 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 있는 정치를 부탁하였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해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하였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 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며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입니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하였고, 이후 장남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기록이 남겨진 아들이 4명이나 되고 그중에 2명이 왕이 되었지만 장자 계승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형제 간에 골육상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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