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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고구려사략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_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by 마음heart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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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

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산상대제의 이름은 연우이다. 혹은 위거라고도 한다. 신대제의 서자이고 어머니는 주태후인데 황룡과 몸을 교합하였다가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서 바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우후가 산상대제를 좋아해 남몰래 상통하고 고국천제가 죽으나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산상대제를 궁중에서 맞아드리고 가짜 조서를 세워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생인 발기는 연우의 적형이므로 제위에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기에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두고 싸웠다. 

▣第十世<山上大帝>紀 제10세<산상대제>기

(좌)출처를 알수없는 산상왕 초상화와(우)중국화가가 그렸다는 산상왕 초상화

帝, 諱<延優>, 亦曰<位居>, <新大>之別子也. 母, <朱>太后, 夢黃龍纒其身而交之. <新大>奇其夢, 而當夕生之, 生而視人. 聰慧美容儀, <于>后, 愛之密相通, 及<故國川>崩, 秘其喪而密迎帝于宮中, 矯詔而立之, 然後發喪. <故國川>之胞弟<發岐>, 以嫡兄當立而不得立, 乃發兵圍宮城而爭立. 國相<乙巴素>曰;“國本已定. 爭之者賊也.” 國人乃戴帝而討<岐>.

제의 휘는 연우 또는 위거이며, 신대제의 별자{서자}이다. 모친 주태후가 꿈에 황룡과 몸을 섞어 교합하였다기에, 그 꿈을 이상히 여기어 바로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자 바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커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외모가 멋져서, 우후가 제를 좋아하여 남몰래 상통하였었고, 고국천제가 죽으매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제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나서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밖에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복아우 발기는, 연우의 적형이어서 마땅히 제위에 섰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고 제위를 다퉜다. 국상 을파소는; “나라의 주인은 이미 정해졌소. 제위를 다투는 자는 적이오.”라 하였고,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은 제를 받들고 발기를 쳤다.

<岐>走<杜訥>而自立, 求救于<公孫度>曰;“小國不幸, 兄死, 嫂姦矯詔立弟. 願大王助我. 得國則必報.” <度>曰;“烝母妻嫂, <句麗>之常習. 今, <發岐>, 不得妻其嫂, 而見奪于其弟, 格以禮者爭立也. 乘此機會, 聲言助<岐>而襲之, 可得其國也.” 其小厥曰;“<麗>有名臣<乙巴素>, 不可深入而衝其備. 宜與<岐>衆掠西邊而有之, 上策也.” <度>, 乃以兵三万, 聲言助<岐>, 而奄有<盖馬>・<丘利>・<河陽>・<菟城>・<屯有>・<長 岺>・<西安平>・<平郭>等郡, 而不助<岐>. <岐>憤而發疽. 帝, 憂<度>将侵, 遂築<淌南山城>, 常與<于>后, 居之, 以爲密都.

발기는 두눌로 도망하여 스스로 제위를 칭하고는, 공손탁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말하길; “소국은 불행합니다. 형이 죽자, 형수가 가짜 조서로 동생을 제위에 세웠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라 하였다. 공손탁이 “고구리에서는 증모처수{烝母妻嫂;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친모 이외의 여자나 형수 및 제수를 처로 거두는 것}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며, 지금 발기는 형수를 처로 삼지 못하고 동생에게 빼앗겼다. 예법을 따지며 제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때를 틈타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 하고 기습한다면 그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겠다.”고 말하자, 공손탁의 아들은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서 깊숙이 들어가 방비가 튼튼한 것을 치는 것은 가당치 않으니, 발기의 무리와 함께 고구리의 서쪽 변방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공손탁이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고 하면서, 개마,구리,하양,도성,둔유,장령,서안평,평곽군 등을 엄습하여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는 않았으니,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제는 공손탁이 곧 쳐들어 올 것이 걱정되어 창남산성을 쌓고{즉, 창수 남쪽에 성을 쌓고} 우후와 함께 항상 그곳에 머물렀으며, 그곳을 밀도{피난하는 도성}로 삼았다.

◎ 元年丁丑, 夏五月七日, <于>皇后, 迎上入<金川宮>, 以大行遺詔, 婚于殯宮. 太輔<麻靖>․左輔<穆天>․中畏大夫<尙薤>等侍立行禮. 上, 具皇帝冕袌而受皇后親上璽(<大武神>金璽)宝(<光明帝>釼■). 皇后四拜曰;“妾以大行寵妾, 未有子女. 宜當赴殉, 而大行常言;“汝當與吾弟婚而生子紹我. 中畏大夫<尙薤>在傍聞之, 臨崩, 以璽宝授妾以献于陛下. 願, 陛下, 燐此未亡, 早占聖子, 以慰大行之靈.” 上, 答拜受之, 曰;“當以嫂為妻, 早生太子, 以献于皇兄矣.” 太輔等皆俯伏賀呼. 上, 遂携<于>皇[后], 共登宝祚. 天将曙矣. 羽林․百寮擧爎山呼.

○ 원년{단기2530년/AD197}정축, 여름 7월,

우황후가 상을 금천궁으로 맞아들여, 대행{신대}의 유명에 따라 빈궁에서 혼인하였다. 태보 마정․좌보 목천․중외대부 상해 등이 시립하여 예식을 거행하였다. 상은 황제의 면포를 착용하고서 황후가 친히 바치는 새(대무신 금새)보(광명제 인■)를 받았다. 황후가 네 번 절하고 말하길; “첩은 대행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식이 없어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대행께서 이르시길 ‘당신은 마땅히 내동생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내 뒤를 이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중외대부 상해가 곁에 있다가 이 말씀을 듣고, 임종하여 새보를 첩에게 건네주고는 폐하{연우}께 바치라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따라죽지 못한 가련한 저에게 조속히 훌륭한 아들을 점지하여 주시면, 그로써 대행의 영혼을 위로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답하여 절하고 새보를 받고나서, 말하길; “형수를 처로 맞아들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오. 조속히 태자를 낳아 형황께 바치시오.”라고 하였다. 태보 등 모두가 엎드려 축하하였다. 이윽고 상이 황후를 데리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늘이 곧 밝아올 것이었다. 우림과 백료들은 섶을 불 놓아 하늘에 제사하며 만세를 불렀다.

◎ 上, 乃以母<朱>氏為太后, 以外祖<朱輅>為右輔, 后父<于素>為仙王, <朱回>中畏大夫, <朱同>羽林右将軍, <朱舌>左将軍, <尙薤>護城大加, <朱曲>護宮大加, 徵內外兵入衛. 皇弟<發岐>, 聞之大怒, 以其私兵三百人犯闕. 其妻<虎川>, 與子<驕位居>, 諫止之, 不聼. <虎川>乃走入告變. 時, 上, 與<于>皇后, 同寢未起. 太后, 乃與<于素>, 命<尙薤>嚴兵備之. <發岐>, 見宮門堅閉, 四面衛卒森立. <滿弓>, 以待之, 曰;“上, 以友仁之心, 恕汝. 一命, 可悔過而來.” <發岐>暴憤呼. 上, 大罵<朱舌>, 欲斬之. <薤>, 止之, 曰;“帝․后調子之時, 不可殺生.” 乃縛以流之, 其軍皆入羽林山呼新帝.

○ 상은 모친 주씨를 태후로 올리고, 외조부 주로를 우보로 삼고, 후의 부친은 우소는 선왕(仙王)으로, 주회는 중외대부로, 주동은 우림 우장군으로, 주설은 {우림}좌장군으로, 상해는 호성대가{성을 지키는 총책}로, 주곡은 호궁대가{궁을 지키는 총책}로 삼았고, 내외의 병사를 불러들여 지키게 하였다. 선황의 동생{신대제의 동생}인 발기는, 이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여, 자기의 사병 300명을 데리고 궁궐을 범하였다. 발기의 처 호천이, 아들 교위거와 함께, 그러지 말라고 말렸었으나,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호천은 궁으로 달려가서 고변하였었다. 이때 상과 우황후는 동침하여 깨어나기 이전이어, 태후와 우소가 상해에게 엄중히 무장한 병사로 하여 지키게 명하였다. 발기가 와서 보니, 궁궐은 문이 든든히 닫혀있고, 사면에는 위병이 빽빽이 지키어 서있었다. 만궁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르길; “상께서는 우애 있고 어지신 마음으로 당신을 용서하시었습니다. 명령 한마디에, 더 이상 다가오시면 후회하시게 됩니다.”라 하였다. 발기는 울분을 터뜨려 소리를 질렀다. 상이 주설을 되게 호통치고 주살하려 하자, 상해가 말리면서 아뢰길; “황제와 황후께서는 자식을 빗는 중이시니, 살생하셔서는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오라를 지어서 귀양을 보냈고, 그의 군대 모두는 우림으로 들어와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 上, 以<發岐>戇以無謀, 赦其罪, 以封為<裵川兄王>. <岐>, 不能悔過, 而與其徒謀反, 居<杜訥>而稱帝, 與<公孫度>相通.  六月, 葬大行于<故國川原>. 以<虎川>妻<乙巴素>, 而賜其財. 以后父<于素>為<朱>太后私臣.

○ 상은 발기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모의한 것은 아니라 하여, 죄를 면하여 주고 배천형왕을 봉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모반하여 두눌 땅으로 들어가서 칭제하였으며, 공손탁과 상통하였다.  6월에 대행을 고국천원{나라의 옛터, 또는 옛 나라의 터전에 있는 냇가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호천을 을파소에게 처로 삼아 주고는, {발기의} 재물도 내려주었다. 후의 부친 우소는 주태후의 사신{정부}으로 삼아 주었다.

◎ <朱>太后詔, 曰;“外戚弱則不能尊皇. 宜爾宗戚公卿納女于<朱>家, 可也.” 左輔<穆天>奏, 曰;“聖太后神詔美且真矣. 臣, 以左輔之位讓於<朱輅>, 以女<蜻>妻<朱回>. 太后大喜, 曰;“吾知<穆天>之忠久矣.” 乃<輅>為左輔, <尙薤>右輔. <天>為<沸流公>, 以<牛壤>為沐邑. 命<回>娶<天>女<蜻>. 是年三十, <回>五十六矣. <蜻>, 以宗室<{馬+白}>太子室, 徃来<馬山>, 與<回>交好久矣. <尙薤>, 以女<答>妻<朱舌>. <同>娶<尙庚>女<實>.

○ 주태후가 말하길; “외척이 약하면 황실이 존경받지 못합니다. 마땅히 당신들 종척 및 공경들은 딸들을 주씨 집안으로 보내줘야 할 것이오”라 하니, 좌보 목천이 아뢰길; “높으신 태후께서 하교하신 귀한 말씀은 아름답고 또한 진솔하십니다. 신은, 좌보 자리를 주로에게 넘겨주고, 저의 딸 청을 주회에게 처로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태후가 크게 기뻐하면서 “나는 목천의 충성됨을 안 지 오래였었소.”라고 말하고는, 주로를 좌보로, 상해는 우보로 삼았다. 목천에게는 비류공을 봉하고 우양을 목읍으로 주었다. 주회에게는 목천의 딸 청과 혼인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때 목청의 나이 서른이었고, 주회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목청은 종실인 {맥}태자의 여자였는데, 마산을 오가면서 주회와 함께 좋아지낸 지 오래였었다. 상해는 딸 답을 주설에게 처로 주었고, 주동은 상경의 딸 실에게 장가들었다.

◎ <朱>太后, 乃宴<尙>․<穆>兩氏, 曰;“卿等喬木世臣也. 宜接新芽而滌舊.” 皆俯伏稱慶. 主民大加<穆登>說太后, 曰;“<朱>․<于>, 雖新非舊沃, 則難{巸}聖太后之{霄}. 何以<于素>為夫耶. 願, 與我續舊好, 何如.” 太后, 黙然良久, 曰;“汝, 以<穆>太后勢, 蔑我而强烝. 今, 恃何人而敢凌帝母耶.” 遂命<朱同>拿下欲殺, <登>剛直不屈.

○ 주태후가 상씨․목씨 두 집안의 사람들에게 주연을 베풀고는, “경 들은 교목세신{누대에 걸쳐 중요 직책을 맡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집안 출신의 신하}이시오. 마땅히 새싹을 맞이하여 옛 것을 씻어내시오.”라고 하였다. 모두가 엎드려 하례하였다. 주민대가 목등이 태후에게 설명하여 아뢰길; “주씨 집안과 우씨 집안은 비록 새로우나 오래되지 않아서 윤이 나지 않으니, 성스러우신 태후의 운기를 넓게 펼치시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찌 우소를 사내로 삼으려 하십니까? 저와 함께 옛날의 호의를 지속하심이 어떠하십니까?”라 하였더니, 태후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말하길; “당신은 목태후의 힘을 빌려 나를 업신여기며 억지로 욕보였소. 이제 누구의 세도를 빌어 임금의 어미인 나를 감히 능멸할 것이오?”라 하고는 주동에게 명하여 붙잡아 끌어내리라 하였고 죽이려 하였으나, 목등은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다.

◎ <輅>, 聞之赴救, 曰;“太后, 雖尊, 本是吾女. 吾, 今雖貴, 本是馬巫. 陛下, 以萬乘之尊, 軫念私親與<尙>․<穆>結婚比於接芽. 而猝行此擧是非, 徒接不成, 反折其枝者也. <登>, 以國家名相, 雖有戱言. 陛下宜寬容而利國. 况其所言乃恃舊情者也. 人以情来我, 以怒投, 是「瓊琚之木瓜」. 願, 陛下愼之. <尙>氏․<穆>氏今日受禍, <于>氏․<朱>氏明日受禍矣. 戚與戚受萬年相保. 伏願, 深納老臣之言.” 執<登>而叩頭於地.

○ 주로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살리려 하여 아뢰길; “태후는 몹시도 귀한 몸이시나 본시 내 딸이시고, 저도 지금 몹시도 귀한 사람이나 본시 하찮은 사람이었습니다. 태후폐하께서는 만승지존으로서 친정  집안이 상씨․목씨 집안과 혼인하는 것을 접붙이기로 비견하시어 끔찍이도 생각하시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시비를 거론하시면, 오히려 접붙이기는 이루지도 못하게 되고 도리어 그 접가지를 부러뜨리는{못쓰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목등은 국가의 명망 있는 재상이오니, 비록 희언을 했더라도, 폐하께서는 마땅히 관용하시어 나라를 이롭게 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그의 말은 옛정을 믿고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정으로써 나에게 다가오는데 내가 노하였다하여 물리치는 것은 옥돌을 모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중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상씨와 목씨가 화를 당하게 되면, 내일에는 우씨와 주씨가 의당 화를 당할 것입니다. 척족과 척족은 서로를 도우면서 오래도록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늙은 신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소서.”라 하고는, 목등을 지키면서 머리를 땅에 짓찧고 있었다.

◎ 太后, 大驚跣下止之, 曰;“父主言至可. 女當奉之.” 乃携<輅>與<登>而上殿, 行酒, 曰; “若非吾父幾乎, 殺一賢相.” 遂謝於<登>, 曰; “恕我, 一時之怒. 豈無緣樹之期.” <登>感其再生之恩, 以<輅>為父. 或云太后欲殺<登>, <夐>公主․<最熟>等諫止之, 云.

○ 태후가 대경실색하여 맨발로 뛰어 내려가 말리면서 말하길; “아버님이 주장하신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 딸은 응당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주로를 목등과 함께 전각 위로 이끌어 올려서, 술을 따르며 말하길; “아버님의 말씀이 없으셨더라면, 어진 재상 한 분을 죽게 할 뻔하였습니다.”라 하였고, 목등에게도 사과하여 말하길; “저를 용서하세요. 잠시 노여워하였습니다. 그동안 어찌 그립지 않았겠습니까.”라 하였다. 목등은 다시 살아남에 감은하여 주로를 아버지처럼 여겼다. 혹자는 태후가 목등을 죽이려 하자, 형공주와 최숙 등이 간하여 말렸다라고 하기도 한다.

◎ 以<于術>為<息夫>妻.  七月, <朱曲><東海谷>太守.  納<明臨於姑>于仙宮.  九月, <罽須>伐<杜訥>, 拔之. <發岐>, 敗走<裵川>, 謂其子<駁固(駁位居)>, 曰;“吾, 以嫡長, 為<于>女所欺, 為庶蘖所逐. 國之西界亦為<公孫>之有. 何面目立于世乎.” 遂自刎, <駁固>救之, 不死. <岐>曰;“疽将發矣. 不死何為.” 匍入海中(套海). 追騎至, 已死矣. 上, 以王禮, 葬于<裵岺>立石曰“<裵川大王>之陵.” <駁固>, 守陵, 以漁為生, 自稱<渭>夫. 上, 累徵不至, 妻以<夐>公主.  <索頭>, <[梪]適>殂, <涉仁>立.

○ 우술을 식부의 처가 되게 하였다.  7월, 주곡을 동해곡 태수로 삼았다. 명림어고를 선궁으로 들였다.  9월, 계수가 두눌을 정벌하여 뿌리 뽑으니, 발기는 배천으로 패주하여, 자기 아들 박고(박위거)에게 이르길 “나는 적장{적실소생의 맏이}인데도, 우씨 딸의 거짓놀음으로 서얼에게 쫓겨났고, 나라의 서쪽 땅마저도 공손씨에게 빼앗겼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 하고는, 스스로 목을 칼로 그었으나, 박고가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발기가 말하길; “곧 종창이 도질 것이다. 죽지 않으면 무엇 하겠느냐?”라 하고는, 물속으로 기어서 물(투해){하투지역의 물}에 빠졌다. 잡으러 뒤쫓아 온 기마군사 들이 다다랐더니, 이미 죽어있었다. 상은 왕의 예법에 따라 배령에 장사하여 주고, “배천대왕지릉”이라는 비석도 세워주었다. 박고는 무덤을 지키면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였고, 자신을 위수{渭水}의 어부라 하였다. 상이 여러 번 불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형공주를 처로 삼아 보내주었다.  색두에서는 [두]적이 죽고, 섭인이 섰다.

◎ 二年戊寅, 二月, 築城於<牛山>.  四月, 赦二罪其下.  太輔<麻靖>薨, 年七十二. <穆崇>之子也. 從其外姓為<麻樂>之孫. 剛貞不屈, <次大>忌之. 從<新大>于<貊>部, 治績大著. <次大>欲害<新大>時, 有隱匿之功, 平<左可慮>以鎭外戚之奸.  <朱輅>太輔, <穆天>左輔, <穆登><東海>大使者, <朱回>主兵大加, <朱同>中畏大夫․九宮供使, <尙齊><南部>沛者.  以<于忝>妻<朱曲>, 太后命也. <忝>, <素>子<目>之女也. 年才十四, 遠赴<東海>. <朱曲>, 時, 已五十, 長於<目>九年. <目>不悅, 曰;“豈有年少之父哉.” <忝>曰;“太后欲結<于>․<朱>之親而固邦本. 何敢以年少年老謝之哉. 其母<苔>氏與<穆登>護去人. 以<烏孫>公主{為}<目>之{妻}.  <新羅>, 祖庙前臥柳自起. 五月, 其國西大水, 免調租. 七月, 派使問民, 云.

○ 2년{단기2531년/AD198}무인, 2월,

우산에 성을 쌓았다.  4월, 두 부류의 죄인을 제외한 모두를 풀어주었다.  태보 마정이 나이 72살에 죽었다. 목숭의 아들이었고, 외성{外姓; 他家姓氏}을 따르고 마락의 손자가 되었었다. 성품이 굳고 곧아서 차대가 그를 싫어했다. 신대를 따라가 맥부에서 쌓은 치적이 컸다. 차대가 신대를 해치려던 시절에 신대를 숨겨준 공이 있고, 좌가려를 진압하여 외척들의 간교함을 막았다.  주로를 태보로, 목천을 좌보로, 목등을 동해대사자로, 주회를 주병대가로, 주동을 중외대부․9궁공사로. 삼았다.  상제를 남부패자로 삼았다.  우첨을 주곡의 처로 삼았는데, 이는 태후의 명이었다. 우첨은 우소의 아들 우목의 딸인데, 나이 열 넷에 멀리 동해로 떠나게 되었다. 주곡의 나이는 이미 50으로 목보다도 아홉 살이나 많았으니, 목은 속이 상하여 말하길; “{남편보다} 나이가 적은 아비를 두게 되었구나.”라 하니, 첨이 말하길; “태후께서 우씨와 주씨를 엮어주어 큰 나라{邦}의 바탕을 튼튼히 하려 함이신데, 어찌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져서 거절하겠습니까?”라 하였다. 모친인 태씨는, 목등과 함께, 떠나는 사람을 호종하였다.  오손공주를 목의 {처로 삼아주었다}.  신라에서는 조상 묘당 앞의 누웠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고, 5월엔 그 나라의 서쪽 땅에 큰물이 져서 소득세와 토지세를 면하여 주었고, 7월엔 관리를 보내 백성의 살림을 살폈다고 한다.

◎ 三年己卯, 四月, 太后, 召<朱曲>為中畏大夫․九宮供使, 以<朱同>為<東海谷>太守.  是年, 三月, <駕洛>主<首露>殂, <居登>立.
九月, 田于<質陽>.  七月, <肖古>侵<羅>邊地, 地震而止.

○ 3년{단기2532년/AD199}기묘, 4월,

태후가 주곡을 불러들여 중외대부․9궁공사{아홉 궁전의 잔일을 총괄하는 관리}를 시키고, 주동을 동해곡태수로 삼았다.  이 해 삼월에 가락의 주인 수로가 죽고, 거등이 섰다.  9월에 질{質}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7월엔 초고가 신라의 변방을 침략하였으나, 지진이 일어 그만두었다.

◎ 四年庚辰, 正月, <盖馬>․<河陽>還附.  七月, 太輔<朱輅>薨, 年七十六. 以王禮葬于<馬山>.  <穆天>太輔, <尙薤>左輔, <朱回>右輔, <穆登>「西部」大使者, <于目><東海>大使者.
<新羅>, 太白晝見, 霜. 九月, 庚午朔, 日食. 大閱<閼川>.

○ 4년{단기2533년/AD200}경진, 정월,

개마와 하양이 환부했다.  7월, 태보 주로가 76살에 죽어, 왕의 예로 마산에 장사했다.  목천을 태보로, 상해를 좌보로, 주회를 우보로, 목등을 서부대사자로, 우목을 동해대사자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7월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렸으며, 9월 경오일 초하루엔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대규모 사열을 하였다.

◎ 五年辛巳, 二月, 賜<麻靖>妻<于>氏年穀.  <羅>, 與<加耶>和. 三月, 丁卯朔, 日食. <羅>, 大旱, 原輕罪.

○ 5년{단기2534년/AD201}신사, 2월,

마정의 처 우씨에게 매년 곡식을 주도록 하였다.  신라가 가야와 화친하였고, 3월 정묘일 초하루엔 일식이 있었다. 신라는 큰 가뭄이 들자 가벼운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 六年壬午, 十月, 太輔<于素>薨, 年六十五. <素>, 美容儀, 善仙術能治無何之疾, 公卿婦女仰之為神. 居家, 淡如與鹿鶴為友, 無一言及家事. 雖登三輔, 未嘗預政. <朱>太后, 慕之, 以為私夫同居<五雲殿>, 生子女. 敎太后以無多慾. 每朝, 必早起沐浴, 焚香塑坐, 誦經一萬遍, 不食肉類, 故太后畏之, 不敢[斟]情, 及其沒, 以素高足. 是{最}熟為私夫, 易與之.

○ 6년{단기2535년/AD202}임오, 10월,

태보 우소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우소는 용모와 거동이 아름답고, 선술{仙術}을 잘하여 어떤 질병이든지 능히 다스릴 수 있었기에, 공경들의 부인들과 딸들이 그를 신으로 여겼다. 집안에 머물 때는 사슴이나 학과 더불어 친구를 삼기나 하는 등 담담하여서, 집안의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삼보의 지위에 올라서도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주태후는 그를 연모한 나머지 정부로 삼아 오운전에서 동거하며 아들과 딸을 낳았다. 태후에게는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엔 반드시 일찍 일어나 목욕하였고, 향불을 피우고 지긋이 바라보고 앉아서 일만 편의 경을 암송하고 남의 살이라 생긴 것은 먹지 않았으니, 태후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감히 애틋한 정을 감추지는 아니하였다. 그가 죽으매, 소복 입고 죽은 이의 발을 들어 올려서 샛서방으로 각별히 지냈음을 드러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있었다.

◎ 七年癸未, 三月, 禱子于山川.  上, 與相國<乙巴素>從容論國事, 喟然歎, 曰;“先兄以嫂賜我而命占子, 于今七年而無産, 不得報兄之恩, 一不孝也. 與<發岐>相爭, 失國之西界, 二不孝也. 太后恣情, 使內外喧傳, 不能止之, 三不孝也.” <乙巴素>曰;“天人之數皆有定焉. 已徃之事無非運也. 陛下, 春秋方殷, 必有小后乃已.” 上笑, 曰;“相國果知吾心矣. 十五夜, 夢見天帝亦曰小后生子. 而無之奈何.” <乙巴素>沈吟良久, 曰;“臣, 夜観天文, 有龍光冲天. 使人逐之, 起于<酒桶村>. 是村長者<椽栢>, 本<灌奴>名族也. 忠孝爱人, 崇神報國. 聞有淑女才德俱備. 殆天之賜歟.” 上, 大喜, 使人驗之. <栢>, 果祀槐王, 而生女. 巫以為必為王后, 故名曰<后女>, 年今十五. 上, 遂微行, 而納之.

○ 7년{단기2536년/AD203}계미, 3월,

아들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빌었다.  상이, 국상 을파소와 함께 조용히 국사를 논의하다가, 한숨지으며 이르길; “앞서 간 형이 내게 형수를 맡기며 아들을 낳아달라고 하셨건만, 7년이 지나도록 낳지를 못하여 형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효의 하나요. 발기와 다투다가 나라의 서쪽 땅을 잃었으니 불효의 둘이요. 태후께서 자정하시어 내외의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이를 말리지 못하니 불효의 셋이오.”라 하였다. 이에 을파소가 아뢰길; “하늘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왕의 일들은 운 아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춘추 아직 젊으시니, 꼭 소후가 있으셔야 하오며, 그리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길; “상국께서는 과연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구려. 지난 보름날 밤 꿈에 천제를 뵈었더니 역시 소후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소. 허나 소후가 없으니 어쩐 단 말이오.”라고 말하였다. 을파소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는 아뢰길; “신이 밤에 천문을 보았더니 빈 하늘에 용광이 서렸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였더니만, 주통촌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우두머리는 연백이라 하는데, 본래 관노의 명족으로, 충성심과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을 아끼고, 신을 섬기며 나라에 보은할 줄도 압니다. 들어보니, 정숙한 딸이 있으며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내리신 뜻 아니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연백이란 자가 과연 괴왕에게 제사하고 딸을 낳았는데, 무당이 말하길 필시 왕후가 될 것이라고 하였기에 이름을 후녀라 지었다고 하였으며, 지금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상이 이윽고 미행하여 그녀를 거두었다.

◎ 八月, 國相<乙巴素>薨, 年六十五. <巴素>, 名相<豆智>之後也. 父, <魚>, 以<西河>太守不媎於外戚, 而見罷. <巴素>, 亦剛毅不屈, 與<采素>隱居山中而不出. <故國川帝>召為相國. 行「七政」; 尊君, 正民, 用賢, 訓育, 良才, 農獵, 邊塞, 是也. 於是, 國中大治. <發岐>之乱, 撫以鎭之. 西界失地, 徐用良策以復之. 憂國将絶, 勧上納小后而生<東川帝>, 其功大矣. <東[川]帝>․<桶>后, 常以<乙>公為恩, 立相而祀之. 時, 人以<于素>・<巴素>・<椽栢>為三王. <于>為神仙之王, <乙>為政敎之王, <椽>為隱逸德行之王. 三人皆素相善, 云.(<古記>作十七年癸巳.<卒本傳>作甲申八月薨.<三國史記>本紀及傳皆以七年卒.今姑依<史 記>).

○ 8월, 국상 을파소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을파소는 훌륭한 재상 두지의 후손이고, 부친 어는 서하태수일 때 외척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었다. 을파소 역시 강직하고 굳세어 뜻을 굽히지 않고는 채소와 함께 산중에 숨어살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고국천제가 불러내어 국상을 시키니 7정을 행하였다; 임금을 옳게 섬기고, 백성을 옳게 보살피며, 현자를 기용하고, 사람을 올바로 가르쳐 키우며, 좋은 기술과 재주를 함양하고, 농사와 수렵에 힘쓰며, 변방을 굳게 지켰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전차로 나라 안의 큰일이었던 발기{發岐}의 반란을 달래어 가라앉혔으며, 잃어버린 나라의 서쪽 땅에 대하여는 급하지 않게 좋은 계책으로 복구하였고, 나라의 후사가 끊길 것을 걱정하고는 상이 소후를 맞게 하여 <동천제>를 낳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동[천]제와 통후는 상시로 을공을 은인으로 여겨서 초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 시절 세상 사람들은 우소와 파소 및 연백을 '3왕'으로 여겼는데, 우소를 '신선지왕', 을파소를 '정교지왕', 연백을 '은일덕행지왕'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들은 평소 서로 간에도 잘 지냈다고 한다.(고기작십칠년계사.졸본전 작갑신팔월훙.삼국사기 본기급전개이칠년졸.금고의 사기).

◎ <高優婁>為國相, <尙齊>大注簿. <優婁>, <高婁>之後<福章>之侄也. 與<巴素>隱居. <巴素>出, 亦出為沛者․大注簿. 至是, 継<巴素>. 其母, <巴素>之妹也. <齊>, <庚>之子<優婁>之妻兄也. 其妻<於姑>以<答夫>之女美而有智, 上, 潛邸時, 累幸焉. 登極而納于<仙宮>而生女, <于>后妬之, 黜居<南部>. 至是, <于>后氣炎小摧, 乃復入京.

○ 고우루가 국상이 되고, 상제가 대주부가 되었다. 우루는 고루 후손 고복장의 조카이며, 파소와 함께 숨어살다가, 파소가 세상으로 나오매, 따라 나와 패자와 대주부를 지냈고, 파소가 죽으니 파소의 뒤를 이었다. 모친은 을파소의 여동생이다. 상제는 상경의 아들이고, 우루 처의 오빠이다. 처 어고는 답부의 딸이며, 예쁘고 지혜가 있어서, 상이 잠저에 살던 시절에 여러 번 찾아갔었고, 상이 등극하자 선궁으로 맞아들여 딸을 낳았으나, 우후의 투기로 쫓겨나서 남부에서 살고 있다가, 우후의 기세가 꺾이자, 도성으로 돌아왔다.

◎ 八年甲申, 春正月, 上, 與<于>后, 徃<溫水院>.  太輔<穆天>薨, 年七十七. <天>, <度婁>子. 其母, <麻樂>妻<烏>氏也. 以巨族之冑, 美鬚髥好風采善迎合, 而能画人物, 調小琴以娛上. 而其雖至太輔, 無所匡國. 其妻<松>氏, 年八十九而健如五六十. 賜米肉以慰之. 招其子<登>為主刑大加.  <尙薤>太輔, <朱回>左輔, <于目>右輔.  是年, <公孫度>死, 子<康>代之.

○ 8년{단기2537년/AD204}갑신, 봄 정월,

상이 우후를 데리고 온수원에 갔다.  태보 목천이 77살에 죽었다. 목천은 목도루의 아들이며, 그의 모친은 마락의 처 오씨이다. 거족의 자손으로, 멎진 수염과 호감 가는 풍채가 썩 잘 어울렸으며, 인물 그림도 잘 그렸었고, 소금을 잘 타서 상을 즐겁게 하여 주었었다. 비록 태보의 자리까지 올랐었어도, 나라의 정사를 바로잡은 것은 없었다. 목천의 처 송씨는 나이가 여든 아홉인데도 오륙십인 것 같이 건장하였다. 쌀과 고기를 주어 위로 하였다.  아들인 목등을 불러들여 주형대가로 삼고, 상해는 태보로, 주회는 좌보로, 우목은 우보로 삼았다.  이 해에 공손탁이 죽고, 아들 공손강이 대신하였다.

◎ 九年乙酉, 四月, 命鎮西将軍<朱舌>伐<西安平>, 戦于<平湖>十将軍死之. 上, 撫其孤, 而祿其妻. 以<舌>子<希>為羽林校尉, 妻以公主. <希>自願為邊将而報仇. 上, 與<于>后, 幸<息夫>苐, 賜其妻<于術>衣冠. 時, <術>生女<鱣>, 行百日宴. <術>, 后之妹, 而<鱣>于皇林時, 上有夢兆, 故累召<術>․<鳣>于宮中而寵愛之.  二月, <羅>, 以<真忠>為一伐飡․參國政. 七月, 霜雹殺穀, 太白犯月. 八月, 狐鳴于<金城>及其始祖庙庭, 云.
七月, 以<朱曲>爲鎮西大将軍伐<西安平>, 拔之. <尙齊>中畏大夫, <穆登>大注簿.

○ 9년{단기2538년/AD205}을유, 4월,

진서장군 주설에게 명하여 서안평을 정벌하게 하였더니, 평호에서 싸우다가 장군 10명이 죽었다. 상이 남겨진 자식들을 위무하고 처들에게는 녹봉을 주었다. 주설의 아들 주희를 우림교위로 삼고 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더니, 주희는 스스로 나서서 변방의 장수가 되었고 원수도 갚았다.  상이 우후를 데리고 {명림}식부의 집에 거둥하여 그의 처 우술에게 의관을 하사하였다. 그때, 우술이 딸 전을 낳아서 백일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우술은 우후의 동생이어, 전이 황림에 있었을 때, 상이 꿈에 본 징조가 있어서, 여러 번 우술과 전을 궁중으로 불러 아껴주었다.
신라에서는 2월에 진충이 일벌찬․참국정이 되었고, 7월엔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이 죽고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으며, 8월엔 금성과 시조사당의 마당에서 여우가 울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7월, 주곡을 진서대장군을 삼아 서안평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상제가 중외대부가 되고 목등이 대주부가 되었다.

◎ 十年丙戌, 正月, 太輔<尙薤>薨, 年七十一. 賜其妻<白>氏年穀. <薤>善於医․藥, <白>氏善於繪․{繡}. 女<鼻>為<穆登>妻, 亦以畵․藥名焉. 人稱三璧.  以<于目>為鎮西大将軍, <朱曲>右輔. <尙縉>太輔, 未幾薨, <禾白>代之.

○ 10년{단기2539년/AD206}병술, 정월,

태보 상해가 나이 71살에 죽어, 그의 처 백씨에게 매년 양곡을 주게 했다. 상해는 의․약에 능통했고, 백씨는 그림과 수놓기에 능숙하였으며, 딸 비는 목등의 처가 되었는데 역시 그림과 약에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은 이들{상해,상비,백씨}을 삼벽{옥구슬 셋}이라 불렀다.  우목을 진서대장군으로, 주곡을 우보로 삼았다. 상진은 태보로 삼았으나 오래지 않아 죽어서, 화백이 이를 대신하였다.

◎ 十一年丁亥, 四月, <于目>, 與<公孫友>, 戰于<平西><男山>克之. 時, <曹操>, 伐<袁尙>, 至<烏桓>界(<獨石口>或云<密雲>之西). <康>, 畏其襲己, 而不敢抗我, 乃誘<袁尙>斬之以献于<操>. 人以<康>必無後.  是年, 正月, <羅>, 以王子<奈音>為伊伐飡․知兵馬事.

○ 11년{단기2540년/AD207}정해, 4월,

우목이 공손우와 평서 남산에서 싸워 이겼다. 그때 조조는 원상을 정벌하고 오환의 경계(독석구,혹운밀운 지서)에까지 다다랐다. 공손강은, 조조가 자신을 습격할까 걱정하면서도, 감히 우리에게는 항복할 수도 없었기에, 원상을 유혹한 후에 원상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사람들은 공손강은 필히 뒷날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해 정월에 신라에서는 왕자 내음이 이벌찬․지병마사가 되었다.

◎ 十二年戊子, 二月, 上, 微行至<椽栢>家, 夜深而還.  <新羅>, <伐休>西巡郡邑浹旬而返. 四月, <倭>犯<羅>, <柰音(或作<利音>)>拒之. <百濟>, 旱, 登不登, 盜賊多起.  十一月, 郊豕逸, 掌者追至<酒桶村>, 一女子遮以獲之, 乃<后女>也. 上, 以為神, 而幸<酒桶村>賞<后女>. 槐花時, <后女>已娠上子. 故上為之, 作此云, <桓那>小守<尙寬>, 以上密命, 保護<椽栢>. 至是, 與<后女>之妹<槐萊>為妻.

○ 12년{단기2541년/AD208}무자, 2월,

상이 연백의 집에 미행하였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신라는 벌휴가 서쪽의 군과 읍을 두루 순시하여 십여 일이 되니 돌아갔고, 4월엔 왜가 신라를 침범하자, 내음(혹작 리음)이 이를 막아냈다. 백제땅에 가뭄이 들어, 곡식은 익는 둥 마는 둥하였고, 도적들이 많이 일었다.  11월, 교제를 지낼 돼지가 도망하여, 담당관리가 이를 쫓아 주통촌에 다다랐더니, 한 여자가 그 돼지를 가로막아 붙잡았는데, 바로 후녀였다. 상이 신기하게 여겨 주통촌으로 거둥하여 후녀에게 상을 내렸다{거두었다}. 괴목{느티나무}에 꽃이 필 무렵, 후녀는 상의 아들을 가졌고, 상이 이러하게 한 까닭에, 환나의 소수{태수보다 하위의 관직} 상관이 상의 밀명을 받아 연백을 보호하였었다고 한다. 이때{괴목에 꽃필 때}에 이르러, 후녀를 후녀의 동생 괴래와 함께 처로 맞아들였다.

◎ 十三年己丑, 五月, <于>后使人欲殺<后女>, 與<尙寬>等相戰, 互有殺傷. 上, 乃納<后女>于後宮.  七月, <浦上八國>伐<加耶>, <加耶>請救於<羅>. <羅>, 以<奈音>救之, 殺<八國>将軍, 奪所虜<加耶>人六千, 還之.  <公孫康>, 割<屯有(遼中)>以南地, 為<帶方國>.  九月, <后女>生子<郊彘>, 封為小后.  十月, 移居于<淌>南<牛山>, 改為<丸都>, 本<桂婁>之都也.  <濟>有大風拔木.

○ 13년{단기2542년/AD209}기축, 5월,

우후가 사람을 시켜서 후녀를 죽이려고 상관 등과 싸웠는데, 상호간에 살상자가 있었다. 상이 후녀를 맞아 후궁으로 들였다.  7월, 포상8국이 가야를 침범하니, 가야는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고, 신라는 내음을 시켜 돕게 하여, 포상8국의 장수들을 쳐 죽이고, 사로잡혀갔던 가야 사람 6천명을 되찾아 주었다.  공손강은 둔유(요중)이남의 땅을 차지하고 대방국이 되었다.  9월,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고 소후가 되었다.  10월, 창남의 우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환도라 바꿨다. 이곳은 본래 계루의 도읍지였다.  백제에선 큰 바람으로 나무들이 뽑혔다.

◎ 十四年庚寅, <公孫康>, 来侵<西安平>, 不克而去. <河陽>在水邊不利, 故命築<新城>, 於<南蘇>之西・
<安平>之北, 以[掎]角之. <羅>, 春夏旱, 赦二罪以下. <濟>築<赤峴(一作<沙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十月, <靺曷>焚<沙道城>而掠去.

○ 14년{단기2543년/AD210}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고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 안평[성]의 북쪽에 새로이 성{신성}을 쌓아서,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봄과 여름이 가뭄이 들어, 두 가지 죄를 빼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백제는 적현(일작<사현>)과 사도 두 곳에 성을 쌓고, 동부 사람들을 옮겨서 살게 했다.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불태우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 十五年辛卯, 正月, <羅>使來朝, 言;'伊飡<萱堅>使一吉飡<允宗>來審境界. <羅>人, 為<濟>所困, 欲以其失地献于我也.' 上, 命賓部厚待, 而送之.  八月, <濟>, 國南, 蝗, 飢, 而十一月, 無氷, 云.

○ 15년{단기2544년/AD211}신묘, 정월,

신라의 사신이 래조하여 말하길;“이찬 훤견이 일길찬 윤종에게 {고구리에} 찾아가 나라의 경계에 대한 판단을 받게 시켰으며, 신라사람들은 백제 때문에 곤혹스러워, 백제에게 빼앗긴 땅을 우리에게 바치고 싶다.”고 하였다. 상이 빈부에 명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8월에 백제국의 남쪽엔 황충이 일어 굶주렸고, 11월에도 물이 얼지 않았다 한다.

◎ 十六年壬辰, 正月, 宮人<於姑>生女. 上, 望之以子而生女, 故名曰<越主>. <於姑>, <尙濟>妻也. 雖入後宮, 而與夫續好, 不可以其女封{公}主. 上, 不聼, 曰;“汝等以我為不知其出乎.” 乃倍置官僚以供<於姑>等, 小后禮.  <朱曲>, 以其妻<于忝>賜<乙大非>.  四月, 上, 與<酒桶宮>小后及<郊彘>太子, 西巡, 問民閱兵, 遊溫泉五日而還.  是年, 三月, <加耶>質子于<羅>而請伐其仇, <羅>以<奈音>伐<保羅>․<古自>․<史勿>․<草八>․<骨 浦>․<漆浦>․<加利>․<星山>等國, 降之. <勿稽子>功最高而無報. 人勧較之則曰;“為人臣而忠, 乃[分]內事也. 豈望報哉.” 却之而不顧. 國人, 賢之, 揭其寃于壁而無問. 天以大雨漂屋, 咸以為其{蘖}.  六月, 庚寅晦, 日食.

○ 16년{단기2545년/AD212}임진, 정월,

궁인 {명림}어고가 딸을 낳았다. 상은 아들을 바랐지만 딸이었던 고로 이름을 월주라 하였다. 어고는 상제의 처였다. 비록 후궁으로 불려 들어갔지만 남편과는 계속 좋아 지냈었으니, 그 딸을 {공}주로 봉하여 줄 수 없었다. {공주로 봉하여 달라는 청을} 상이 들어주지 않고는; “당신들은 내가 그 딸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오?”라고는 하였으나, 관료를 배로 늘려주고 어고를 소후와 동등한 예절로 모시게 하였다.  주곡이 처 우첨을 을대비에게 주었다.  4월, 주통궁 소후와 교체태자를 데리고, 서쪽을 순시하며 백성의 안위도 묻고 열병도 하였으며, 온천에서 닷새를 놀다가 돌아왔다.  이해 3월에 가야가 신라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는 원수를 갚아주길 청하였더니, 신라는 내음을 시켜서 보라,․고자,사물,초팔,골포,칠포,가리,성산 등의 나라를 쳐서 항복시켰다. 물계자의 공이 최고였으나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따져보라고 권하였더니, “신하 된 사람은 충성하여 나라 안의 일을 분담하는 것이오. 어찌 보답을 바란단 말이오?"라 말하여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았다. 나라사람들도, 그를 현명하다고 여기고, 원통함을 벼랑에 내어 걸고는 묻지는 않았다. 하늘이 큰 비를 내려 집들이 물에 떠내려갔더니, 모두들 그 일로 인한 재앙이라 여겼다.  6월, 경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十七年癸巳, 春正月, 立<郊彘>爲正胤, 置東宮官三十人, 小后官二十人, 皆用<椽>氏.  七月, <濟>「西部」人<苩會>獲白鹿以献<肖古>. <肖古>以為瑞而賞穀百石.

○ 17년{단기2546년/AD213}계사, 봄 정월,

교체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에 관료 30인을 딸려주고, 소후에게도 관료 20인을 딸려주었는데, 모두 연씨들로 하였다.  7월, 백제의 서부사람 백회가 흰 사슴을 붙잡아 초고에게 바쳤더니, 초고는 상서로운 일이라 여기고 곡식 100석을 상으로 내렸다.

◎ 十八年甲午, 三月, <羅>, 大風折木. 七月, <濟>攻<羅><腰車城>. 城主<薛夫>, 背水而戦, 兵寡而死之. <羅>, 為其仇, 而使<奈音>率六部精兵伐<沙峴城>破之, 虜獲甚多. 是謂<沙峴大戦>. 十二月, <羅>, 雷. 九月, <濟>「北部」<真果>, 領兵一千, 欲襲<沙峴>, 聞<靺曷>來侵<沙道>, 追擊至<石門城>殄滅之. 十月, <靺曷>, 欲報其仇, 以勁騎來侵, 相戦于<述川>之上破之. 十一月, <肖古>殂. 子<仇首>立, 身長七尺, 威儀秀異.

○ 18년{단기2547년/AD214}갑오, 3월,

신라에서는 큰 바람이 나무를 부러뜨렸다. 7월, 백제가 신라의 요거성을 공격하니, 성주 설부가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병력이 모자라서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를 원수로 여기고, 내음을 시켜 6부의 정예병을 몰고 가서 사현성을 쳐서 깨뜨렸고, 사로잡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이것을 사현대전이라 부른다. 12월에 신라땅에 우레가 일었다.  9월, 백제의 북부사람 진과가, 일천 병을 이끌고 사현성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말갈이 사도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추격하여 석문성에 이르러서 말갈을 짓뭉갰다. 10월, 말갈이 원수를 갚으려고 굳센 기병으로 쳐들어와 술천 위쪽에서 어울려 싸워서 백제의 군대를 깼다. 11월, 초고가 죽었다. 그 아들 구수가 섰다. 구수는 키가 일곱 척에 위엄이 있었고 아주 뛰어나 보였다.

◎ 十九年乙未, 二月, 太輔<禾白>薨, 年八十五. <白>, <直>之子也. <乙布>之外孫也. 恭儉敬人, 廉謹孝友, 善用兵, 能<漢>語, 破<幽州>建大功. 懷<漢>人興農工孜孜, 一生卑己尊人如一日. 國人稱以賢宰相. 賜其[妻]<白>氏年穀.  <朱回>太輔, <于目>左輔, <穆登>右輔. <朱曲><馬山>公․鎭西大将軍, 賜<黃山>・<馬山>二郡為沐邑.  是年, <骨浦>・<漆浦>・<古史浦>等侵<加耶><竭火>. <勿稽子>, 擊破之, 又無報, 乃携琴入<師彘山>彈古調. 悲竹[梪]之性病, 擬溪澗之咽響, 粗衣菜食晏如也. 上, 聞其賢, 欲迎之. <勿稽子>曰;“忠臣不事二君. 雖無寵幸, 豈敢改嫁哉.”  

○ 19년{단기2548년/AD215}을미, 2월,

태보 화백이 나이 85살에 죽었다. 화백은 화직의 아들이며 을포의 외손자이었다. 공손․검소하며 사람을 공경하고, 청렴하며 근면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좋고, 용병을 잘하고 한어에 능통하였으며, 유주를 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한인들을 마음으로 아껴서 농공을 흥하게 함에 부지런하였고, 일생동안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길 하루같이 하였다. 나라사람{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들이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칭송하였다. 그의 [처] 백씨에게 매년 양곡을 내렸다.  주회를 태보로, 목등을 우보로 삼았다. 주곡은 마산공․진서대장군으로 삼고 황산과 마산 두 군을 목읍으로 주었다.  이해에 골포,칠포,고사포 등이 가야의 갈화를 침범하였다. 물계자가 그들을 쳐부수었으나, 또한 보답이 없었다. 그리하여 물계자는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으로 들어가 옛 곡조를 탔다. 서글픈 죽두 같은 성품이 병이되어, 산골짝의 시냇물이 토해내는 소리를 본뜨면서, 거친 옷 입고 채소를 먹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냈다. 상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맞아들이고자 하였으나, 물계자가 말하길;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주인이 아껴주지 않는다하여 어찌 감히 개가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 二十年丙申, 正月, 太輔<朱回>薨, 年七十五, <麻弈>代之. <朱曲>左輔, <于目>鎭西大将軍.  以<朱回>妻<穆蜻>為宮人, 命保護東宮. 先是, 上, 微行<回>家, 累幸<穆蜻>生女二人, 故有是命.
以<穆蜻>女<朱鴒>為上女封公主, 妻<朱舌>子<菖>為<馬川>都尉. <菖>母<答>, <尙薤>女也. 亦經上寵而生女. 至是, 封為公主. 乃<菖>妹, <朱萬>也.
八月, <末曷>, 侵<濟><沙峴城>, 圍之数匝. 城主以死抗之. <仇首>, 自将勁騎八百衝其圍, 賊亂走, 追至<沙道城>下殄滅之, 獲其兵仗馬匹無数. <末曷>, 居不毛之地, 以槍掠為業. 自為國家領民, 雖不作乱於國中, 浮海遙侵<羅>․<濟>邊邑. 以制其抗北之志, 國家亦不禁之, 故来居<順奴>者亦多.

○ 20년{단기2549년/AD216}병신, 정월,

태보 주회가 나이 75살에 죽어, 마혁이 이를 대신하게 하고, 주곡을 좌보로 우목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았다.  주회의 처 목청을 궁인으로 삼아 동궁을 보호하게 하였다. 애초에 상이 주회의 집에 미행하여 여러 번 승은을 베풀어 목청이 딸 둘을 낳았더니,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목청의 딸 주령을 상의 딸로 삼고 공주로 봉하여서 주설의 아들 주창에게 처로 내어주고는, {주창을} 마천도위로 삼았다. 주창의 어미는 답으로 상해의 딸이며, 역시 상의 승은을 입고 딸을 낳았는데, 이때를 즈음하여 {그 딸도} 공주로 봉하였다. 바로 주창의 여동생 주만이다.
8월, 말갈이 백제의 사현성에 쳐들어와 여러 겹으로 둘러싸니, 성주가 죽기로 맞섰다. 구수가 손수 굳센 기병 800을 이끌고 가서 그 포위를 깨뜨리니, 적들은 어지러이 도망하였다. 사도성 아래까지 쫓아가서 모조리 뭉개버렸다. 거두어들인 병장기와 마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말갈은, 불모지{초목이 없는 땅}에 살고 있어서, 창 들고 노략질하기를 업으로 삼았다. {말갈은} 나라를 이루어 백성을 거느린 이후엔 나라{고구리} 안에서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나, 배를 타고 멀리 나가서 신라와 백제 변경의 읍들을 노략하였다. 그들{백제와 신라}이 북쪽{고구리}에 항거하려는 싹을 다스릴 요량으로 나라{<고구리>}가 이를 금하지 아니 하였더니, 순노땅에 들어와서 사는 이들 또한 많았다.

◎ 二十一年丁酉, 正月, <麻弈>薨. <朱曲>太輔. <曲>, 以<于忝>之故, 常任<目>下. 至是, 為太輔而居<目>之上. <目>, 不快之, 謝[左]輔而不出, 曰;“吾女未甞棄<曲>. 而<曲>, 自棄吾女, 敢為其父之上. 是逆天也.” 勸<于>皇后亦出宮中. 上, 不得已, 免<朱曲>而以<于目>為太輔. <曲>, 怒, 發疽而薨, 年六十九. <曲>, 豪放有武藝, 因其妹<朱>太后而得志, 秉政以來, 多改民瘼戚弊, 邊備軍習有補于時. 然, 性貪財好色, 公卿之妻女亦多被汚. 功過半半. <于目>, 剛正, 常責<曲>, 曰;“吾女, 皃不足歟, 才不[足]歟, 德不足歟, 年己老歟. 汝, 何淫人之妻耶.” <曲>, 以是, 與<目>, 相左而倒. 以此<朱>・<于>, 雖相婚, 常有內爭. 人以為<朱>氏之敗. 不徒太后之乱政, 亦<曲>之荒淫.  <穆登>左輔, <尙齊>右輔.  八月, <平州>人<夏瑤>等千余家來投, 置之<柵城>.(此時有<平州>之名乃<公孫度>之私稱也.<右北平>界).
十月, 雷, 地震, 星孛東北. <朱同>右輔.  是年二月, <濟>, 設二柵于<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沙峴>卒守之.  <索頭>, <涉仁>殂. <涉真>立, 献駱駝五十匹.

○ 21년{단기2550년/AD217}정유, 정월,

마혁이 죽어, 주곡이 태보가 되었다. 주곡은, 우첨의 전 남편으로, 항상 우목의 아랫자리에 있었는데, 이때가 되어 태보가 되니 우목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우목은 이것이 불쾌하여 [좌]보 자리를 내어놓고 출사하지 않으면서, “내 딸은 아직 주곡을 저버린 적이 없었는데, 주곡은 스스로 내 딸을 저버리더니, 감히 그 딸의 아비 위에 올라앉았다. 이는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우황후에게도 권하여 궁을 나와 버렸다. 상도 어쩌지 못하여 주곡의 태보 직을 물리고, 우목을 태보로 삼았다. 이에 주곡은 노여워하다가 종창이 생겨, 69살에 죽었다. 주곡은 호방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의 여동생이 주태후인고로 뜻을 이루어 정권을 잡은 이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과 척족들의 폐단을 바로잡은 바도 많았고, 변방의 군사를 조련하여 필요시에 대비케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은 재물욕심이 많고 호색하여, 많은 공경들의 처와 딸들이 몸을 더럽혔으니, 공과 허물이 반반이었다. 우목은 강직하고 올곧아서 늘 주곡을 나무라길; “내 딸이 외모가 부족하오? 재주가 부족하오?! 덕이 부족하오? 나이가 이미 늙었소?! 그대는 무슨 일로 딴 사람의 처와 놀아나오?!”라 하였었다. 주곡은 이 일로 우목과 어그러져 서로를 자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주씨와 우씨는, 서로 통혼하였어도, 속으론 항상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씨가 싸움에서 진 것이라고 여겼다. 단지 태후만 정사를 어지럽혔던 것이 아니었고, 주곡 또한 황음하였기 때문이었다.  목등이 좌보가 되고, 상제가 우보가 되었다.  8월, 평주사람 하요 등 천여 집안이 투항하여 왔기에, 책성에서 살게 하였다.(차시유<평주>지명.내<공손도>지사칭야.<우북평>계).
10월, 뇌성이 울리고, 땅이 흔들리고, 혜성이 동북방에서 흘렀다.
이해 2월에 백제는 사도성 옆에 동서로 10리가 되게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사현성의 수졸을 덜어다가 지키게 하였다.
색두에선 섭인이 죽어, 섭진이 섰고, 낙타 50필을 바쳐왔다.

◎ 二十二年戊戌, 二月, 小后生<龍>公主. 上, 以小后所生<尊>公主․<桶>公主皆無療官, 命有司置官供. 上, 以宮人<尙答>所生<朱萬>公主為<朱回>子<元>妻. 皆太后命也.  三月, 大閱<西河>, 下勧農詔.
七月, <新羅>武庫兵物自出, <濟>人圍其<獐山城>不克.

○ 22년{단기2551년/AD218}무술, 2월,

소후가 용공주를 낳았다. 상은 소후가 낳은 존공주와 통공주가 모두 딸리어 모시는 관료가 없었기에, 유사에게 명하여 관리를 딸리어서 모시게 하였다. 상이 궁인 상답 소생 주만공주를 주회의 아들 주원에게 처로 주었다. 모두 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3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고, 농사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렸다.  77월, 신라에서는 무고의 병물들이 스스로 걸어 나왔는데, 백제사람들은 신라의 장산성을 에워싸고도 이기지 못하였다.

◎ 二十三年己亥, 二月, 壬子晦, 日食.  上, 以太后命, 修<馬山>山宮, 飾以金碧・丹靑・香檀・宝玉者, 十有余年矣. 至是, 始完成. 與太后, 宴諸仙人․宗戚․百僚十日, 賜邊戌衣酒以差.  送<太祖>神象于<裶>公主.

○ 23년{단기2552년/AD219}계해, 2월,

임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태후의 명에 따라 마산의 산궁을 보수하면서, 금벽・단청・향단・․보옥 등으로 장식하길 10여년이 되어왔는데, 이때가 되어 비로소 완성되었다. 태후와 함께, 모든 선인과 종척 및 백료들에게 열흘간 잔치를 베풀었으며, 변방의 수자리들에겐 차등 있게 옷과 술을 나누어주었다.  태조의 신상을 비공주{색두}에게 보냈다.

◎ 二十四年庚子, 四月, 異鳥集王廷, 以為瑞, 選東宮人<明臨鳣>, 賜奴婢田庄, 仍謂東宮, 曰;“<鳣>之生也. 吾夢異鳥如彼. 今日又至, 殆天之賜歟. 汝, 其愛之, 生子生女, 上答祖宗, 下繁我孫, 至嘉至嘉.” 太子拜伏受命. <鳣>, <于>后妹<于術>之出也. <于>后, 欲固其寵, 而常使<于術>受幸, 而又以<鱣>為東宮妃, <于術>為東宮大夫以主東宮之事. <于>・<明>相結之策也, 以破<朱>太后・<于>・<朱>相結之策. 太后已老不能禁之.  三月, <羅>, <奈音>死, <忠萱>伊伐飡․知兵馬事.  七月, 上, 與<于>后․<于術>等, 率東宮及<鳣>妃, 入山宮謁太后. 太后, 欲以<朱希>女<南>為東宮妃, 命定約. 上, 以夢事告之. 太后曰;“以<南>為正妃, <鳣>為妾, 可也.” 時, <息夫>亦至密奏於帝, 曰;“太后不容臣女, 不可使置於山宮. 臣欲率皈.” 上, 然之. 乃經八日大祭而率皈. 東宮與<鳣>同車, 而不顧<南>. 太后怒, 曰;“當斬<酒桶>女, 而辨<郊彘>.” <希>止之, 曰;“不可以私動國本. 人稱其賢.”
<羅>大閱于<楊山>西.  十月, <濟>城西門火. <末曷>自海入寇北邊而去.

○ 24년{단기2553년/AD220}경자, 4월,

처음 보는 새들이 궁의 뜰에 모여들었기에 길조로 여기고, 동궁의 궁인 명림전을 간택하여 노비와 전장을 하사하고는, 동궁에게 이르길; “전이 태어날 때, 저와 같은 이상한 새 꿈을 꾸었다. 오늘 또 새들이 왔으니, 자못 하늘이 내려주심인 가보구나! 너는 그녀를 아끼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서, 위로는 조종님들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내 자손을 번성케 하여서 기쁘고 기쁘게 하라.”하니, 태자가 엎드려 명을 받았다. 전은 우후의 여동생인 우술의 소생이다. 우후는, 상의 총애를 확고하게 하고 싶어서, 항상 우술이 상을 모시게 하였다. 또한 전을 동궁비로 만들고, 우술을 동궁대부로 삼아서, 동궁 내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우씨와 명씨 집안을 결속시킬 책략이었으며, 주태후와 우씨・주씨 집안 사이의 결속을 깰 속셈이 있었다. 주태후는 이미 늙어서 이를 말릴 수 없었다.  3월에 신라에서는 내음이 죽어, 충훤이 이벌찬․지병마사가 되었다.  7월, 상이 우후 및 우술 등과 함께 동궁과 전비를 데리고 산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찾아뵈었다. 태후가 주희의 딸 주남을 동궁비로 삼고 싶어 정혼하라고 명하여, 상이 꿈을 꾼 이야기를 태후에게 아뢰었더니, 태후가 이르길; “주남을 정비로 하고, 전은 첩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바로 이때 식부가 도착하여, 제에게 슬며시 아뢰길; “태후께서 제 딸을 용납하지 않으시니, 제 딸을 산궁에 놔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딸을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라 하였고, 상은 그리 하라고 하였다. 8일 간의 큰 제사를 치르고 나서, 동궁과 전은 같은 수레에 태우고, 남은 내버려 두었다. 이에 태후가 화가 나서 “주통년을 목 베고, 교체{태자}의 잘잘못을 가려라!”라고 하니, 주희가 이를 말리며 아뢰길; “사적인 일로 국본{임금 될 사람, 즉 동궁}을 흔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칭송합니다.”라 하였다.
신라가 양산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했다. 10월, 백제에서는, 도성의 서쪽 문이 불탔고, 말갈이 바다를 통해 쳐들어와서 북쪽 변방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 二十五年辛丑, 正月, <朱>太后崩, 春秋六十七. 后, 猿臂狼目, 老益鐵面. 以<鳣>事, 怨<于>后而疾作, 山宮陰冷遂至大故. 上, 哀慟, 依遺命, 置梓宮於山宮三年不甦, 然後乃移于<新大帝>陵中, 合其骨焉.  三月, 十八日, 行東宮婚禮, 以<明臨鳣>・<朱南>為左․・右妃. 上, 重太后旨, 幷納<希>女. 東宮不悅, 皆受巹禮, 爵以四品奉禮, 賜翟衣・金花紫羅冠.
五月, <濟>, 國東大水, 山崩四十余所. 六月, 戊辰晦, 日食. 八月, 大閱<漢水>西.
<公孫康>死, 弟<恭>代之. 時, <漢>亡, <曹丕>・<劉備>・<孫權>等稱帝.

○ 25년{단기2554년/AD221}신축, 정월,

주태후가 춘추 67에 죽었다. 주후는 길고 힘센 팔에 욕심 많은 눈매를 가졌었고, 늙을수록 철면피가 되었었다. 전의 일로 우후를 원망하다가 병이 들었는데, 어둡고 추운 산궁에 있다가 끝내 큰일을 당한 것이다. 상이 이를 애통해 하며, 유명에 따라 재궁을 산궁에 두어 삼년을 가득 채운 연후에 신대제 무덤 중으로 옮겨 합골하여 주었다.  3월 18일에 동궁의 혼례를 치렀다. 명림전과 주남을 좌비와 우비로 삼아 주었다. 상이 태후의 뜻을 중히 여긴지라 주희의 딸도 함께 맞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동궁은 불쾌해 하였으나, 모두가 근례를 받았고, 4품인 봉례의 작위를 주었으며, 적의{꿩 깃으로 치장한 옷}・금화자라관{금화로 장식한 자색 비단 모자}을 내려주었다.
5월, 백제에서는 동쪽 땅{또는 도성의 동쪽}에 큰물이 가서 산이 마흔 군데에서 무너졌고, 6월 무진일 그믐엔 일식이 있었으며, 8월엔 한수{漢水}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공손강이 죽고, 그의 동생 공이 섰다. 이즈음에 한{,東漢}이 망하고, 조비,유비,손권 등이 칭제하였다.

◎ 二十六年壬寅, 三月, <于目>病免. <穆登>太輔, <朱同>左輔, <尙齊>右輔, <于目><西川公>封<杜訥>․<珠原>為食邑.  <濟>, 修堤防以勸農.  四月, <羅>, 霜雹殺菽麥. <南新>人死歷月而活.  六月, <濟>都雨魚.  十月, <濟>伐<羅><牛頭鎭>, 抄掠民戶. <忠萱>, 戦于<熊谷>而失利, 單騎敗走, 貶為鎭主. <連珍>, 伊伐飡․知兵馬事. 十一月, 庚申晦, 日食.

○ 26년{단기2555년/AD222}임인, 3월,

우목이 병들어 물러나니, 목등을 태보로, 주동을 좌보로, 상제를 우보로 삼았고, 우목은 서천공으로 삼고 두눌과 주원 땅을 식읍으로 봉하여 주었다.  백제는 제방을 고쳐쌓고 농사에 힘쓰게 하였다.  4월, 신라에서는 우박과 서리가 내려 콩과 보리가 죽었고, 남신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살아났다.  6월, 백제의 도성에 물고기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10월, 백제가 신라의 우두진을 치고 민호를 초략하였다. 신라의 충훤이 웅곡에서 맞싸우다가 패하여 단기로 도망쳤고, 때문에 충훤은 우두진 주로 지위가 떨어졌고, 연진이 이벌찬․지병마사가 되었으며, 11월엔 경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二十八年甲辰, 二月, 東宮妃<明臨鳣>生皇孫<然弗>.  七月, <連珍>, 侵<濟>戰于<烽山>下, 殺獲千余級, 而八月, 改築<烽山城>. 十月, <濟>, 太白晝見.

○ 28년{단기2557년/AD224}갑진, 2월,

동궁비 명림전이 황손 연불을 낳았다.  7월, 연진이 백제에 쳐들어가 <봉산> 아래에서 싸워 천여 급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8월에는 봉산성을 고쳐쌓았다. 10월, 백제에서는 '태백주현'이 있었다.

◎ 二十九年乙巳, 正月, 東宮大夫<于術>生東宮子<又弗>. 東宮, 納<鱣>以来, 連幸<于術>及生<然弗>. 專房受寵, 至是, 生子. 上, 嘉之, 賜<于術>田庄奴婢, 爵三品尙禮.  二月, 以<鱣>氏為東宮大妃, 賜<皇林>・<陽原>二邑為沐邑, 築<鴨宮>於二邑之間.  五月, 東宮右妃<朱南>生子<朱根>. 東宮, 重太后遺詔, 以亦懷<朱>妃而生, 故亦稱皇孫.

○ 29년{단기2558년/AD225}을사, 정월,

동궁대부 우술이 동궁의 아들 우불을 낳았다. 동궁이 전을 맞아들인 이래, 연거푸 우술을 가까이 하여 연불을 낳고, 총애를 독차지하였더니만, 이 때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상은 이를 기쁘게 여겨 우술에게 땅과 집과 노비를 내렸으며, 작위도 3품인 상례로 하여주었다.  2월, 전씨를 동궁대비로 삼고, 황림과 양원 두 읍을 목읍으로 하사하였으며, 이 두 읍 사이에 압궁을 지었다.  5월, 동궁우비 주남이 아들 주근을 낳았다. 동궁이, 태후의 말을 중히 여겨, 주비 또한 보살피다가 낳았기에 역시 황손으로 불러주었다.

◎ 三十年丙午, 十月, <鱣>氏生皇子<預物>.  <羅>, 自春不雨, 至七月乃雨. 民飢, 發倉賑給. 十月, 錄內外囚, 原輕罪.  <于目>左輔.

○ 30년{단기2559년/AD226}병오, 10월,

전씨가 황자 예물을 낳았다.  신라에서는 봄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고, 백성이 굶게 되자 창고를 열어 양곡을 나누어 주었으며, 10월에는 내외의 죄수를 심사하여 가벼운 죄는 모두 풀어주었다.
우목이 좌보가 되었다.

◎ 三十一年丁未, 夏五月, 上崩於「西 都」<金川宮>, 春秋五十五, 葬于<山上陵>.

○ 31년{단기2560년/AD227}정미, 여름 5월,

상이 서도의 금천궁에서 춘추 55세에 죽어, 산상릉에 장사하였다.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산상왕릉으로 추정되는 칠성산 871호 전경.

산상왕은 고구려의 제10대 군주로 휘는 연우 혹은 이이모이며 신대왕의 넷째 아들로 되어 있지만 발기의 반란 사건 기록의 연대적 모순 때문에 실제로는 신대왕의 셋째 아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삼국사기 즉위조에 산상왕은 태어날 때부터 눈뜬게 증조부 궁(태조대왕) 같아서 이름을 따 '위궁'으로 이름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에는 완전히 똑같은 기록이 동천왕과 관련된 내용에 기록되어 있는데 김부식이삼국지를 참고하다가 고국천왕이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유 기록에 끼워 맞추다가 실수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산상왕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추정할 수가 없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 등을 검토해 추측은 가능합니다.우선 아버지 신대왕이 태어난 때와 자신이 죽을 때의 나이 차이가 140여 년이 납니다.그렇다면 위에 형이 발기, 고국천왕,발기 3명이 있다 치고, 신대왕이 늦게 장가를 갔다고 쳐도 90세입니다. 이리 되면 아들 동천왕이 209년생인데 상식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입니다. 재위에 오른 뒤 동천왕을 낳았으니 죽을 당시 나이는 50세 전후이거나 많이 잡아도 60대로 실제로 아들 동천왕은 성인이 되어 즉위하여 40대에 사망했고, 뒤를 이은 손자 중천왕은 즉위 당시 20대였습니다. 이리 되니 태조대왕에서 차대왕, 신대왕에 이르는 왕들이 형제들이 아니라 할아버지 - 아버지 - 아들 3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중국 사료들을 기준으로 차대왕은 95~96년생이고, 신대왕은 113~114년생이며, 165년(52세)에 즉위해서 179년(66세)에 죽었을 것으로 산출되며 신대왕과 고국천왕의 나이차를 24살로 추정하면 이미 179년 즉위할 때 42살 근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따른다면 고국천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137년생일 것이고, 197년 60세 나이로 사망한 것입니다. 선대 왕들의 나이가 계속 24살이나 18살로 조작되는 흔적을 감안하여 출생년도가 고국천왕과 부자 관계라면 173년 근처이며, 형제 관계로 보면 155년생이라 추정해볼 수가 있습니다.

■산상왕의 왕위 계승전 승리

둘째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넷째 동생인 연우가 형수인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산상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더불어 산상왕은 형수인 왕후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택합니다.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산상왕의 셋째 형 발기(發岐)가 거세게 반발,고국천왕에게 반기를 들은 첫째 형 발기(拔奇)와 한글 독음이 같은데다가 첫째 발기는 기록상 모순이 있어서 현재는 김부식이 정사 삼국지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진수가 누락한 고국천왕에 산상왕 시기의 사건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처음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이 승하하자 발기에게 먼저 찾아갔다고 합니다.하지만 당시 왕의 승하 소식을 알지 못했던 발기는 형인 고국천왕이 자신을 떠보려는 줄 알고 거절하였고 하는 수 없이 발기의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는데 연우가 직접 고기를 써는 식으로 정중히 대접하다가 손을 다치게 되었고 이를 본 왕후 우씨가 직접 치료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결국 발기가 소노부(消奴部) 세력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왕궁을 포위했으나 따르는 자가 없어서 실패했는데 다만 발기가 망한 건 맞는데 산상왕도 이 일로 꽤 내상을 입었는데 발기가 산상왕의 처자식을 다 죽여버린 탓에 산상왕은 10년 넘게 독수공방하며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결국 발기는 요동으로 도망쳐 당시 그 곳에서 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공손씨 정권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당시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을 공격하였으나 산상왕이 자신의 동생인 고계수(罽須)를 시켜 반격하면서 발기는 참패했고 이때 발기를 추격하던 계수가 발기한테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계수가 형제의 정을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말하였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이 한때의 분함을 못 이겨 나라를 멸하려 함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뵐 것입니까?”

쉽게 말하면 "아무리 연우 형님이 왕위에 오른 게 괘씸하다 해도 외세를 끌어들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며 형을 질타한 것입니다.결국 꿈도 희망도 없게 된 발기(發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렇듯 맏이 발기(拔奇)와 셋째 발기(發岐)는 여러 차이가 있는데 맏아들 발기는 연나부(=절노부)의 세력을 끌어모았고, 셋째 발기는 소노부(=연노부)의 세력을 끌어모았으며 맏이 발기는 공손씨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계수가 이기지 못해 고국천왕이 좌원 전투에서 격파했습니다. 이후 맏이 발기의 최후는 요동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고국천왕이 용서하고 투항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맏이 발기는 배신하기는 했어도 그냥 말 그대로 '배신'이지 셋째 발기처럼 군대를 이끌고 '변란'은 안 일으켰으니 이런 얘기가 나왔을 수 있습니다. 또 고국천왕이 인자한 성격이었다고도 하니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셋째 발기의 반란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5부 중 왕을 배출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했던 연나부(=절노부)가 작당해 왕위 계승자를 정한 것에 완전히 배제된 발기(拔奇)와 소노부(=연노부)가 이 결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소노부가 원래 고구려의 서쪽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어 요동의 공손강과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 이 사건으로 소노부는 고구려에서 완전 이탈해 요동의 공손씨 정권에 신속합니다.

▣산상왕의 정치와 내정

198년, 국내성 바깥쪽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丸都城)을 쌓았으며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세상을 떠나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즈음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후녀 소후를 작은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삼국사기에 그 비화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을파소는 왕후 우씨의 압박속에서도 산상왕이 소후를 들이는 걸 지지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설화에 따르면 그 소후는 평민 출신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한 처녀가 떡으로 돼지를 사로잡으니 신하가 처녀의 지모를 눈여겨봐, 이를 산상왕에게 알려서 몰래 바람피는 걸 주선했다고 합니다.결국 산상왕의 아이까지 가지는데 이에 우씨가 분노해 자객까지 동원, 그녀를 죽이려했지만 ''폐하의 아기가 있는 나를 죽이면 당신들도 무사치는 못할 것이다."라고 해 자객들을 몰아냈다고 합니다. 이후 산상왕의 노력까지 더해져 마침내 소후가 되어 아들도 낳았습니다.한편, 소후에게서 태어난 동천왕은 왕후 우씨가 사망할 때까지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왕후 우씨는 동천왕이 태자였을때 자주 때리고 왕이 되었을때도 궁녀를 시켜 왕의 옷에 뜨거운 국을 엎질르게하고,왕이 말을 못타게 할려고 말의 갈기를 자르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환도성을 쌓은 10년 뒤인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고는 하나 이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는데 217년에는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000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고 산상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습니다. 227년에 산상왕이 승하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고, 그 이름을 따서 '산상왕'이라고 불렀습니다.여담으로 산상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자식이 이미 있었으나 즉위 과정에서 일어난 난리통에 형 발기가 처자식을 모두 살해해버리는 바람 동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산상왕 5년에 "제발 아들 갖게 해주세요"라고 산천에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그러고도 7년 ~ 8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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