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궁예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건은 대장군으로 남았다면?

250x250
반응형
세로형
반응형

만약 궁예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건은 대장군으로 남았다면? 

역사란 사실(fact)의 연속이지만,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유의 장을 넓힐 수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10세기 초 한반도를 무대로 활동했던 두 인물,

궁예왕건의 운명이 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해보며,

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는 대체역사 시나리오를 고찰해봅니다.


1. 실제 역사 속의 궁예와 왕건

1.1 궁예는 누구인가?

궁예(弓裔, ?~918)는 신라 왕족의 핏줄로 태어났으나, 왕위 계승의 경쟁에서 밀려 어릴 적 버려졌고,

이후 승려가 되었다가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 무장으로 부상한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수립했으며, 나중에는 이를 마진국이라 부르다가 태봉으로 개명했습니다.

1.2 왕건은 누구인가?

왕건(877~943)은 원래 궁예 휘하의 해상 무장으로,

상업과 군사에 능한 능력자였습니다. 궁예가 점점 폭군화하고 측근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918년 그의 휘하 장수들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웁니다.


2. 가정: 궁예가 실각하지 않고 삼국을 통일했다면?

918년 궁예가 실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왕건과 함께 후백제(견훤)와 신라를 무너뜨려

삼국을 통일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 가상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정치, 군사, 문화, 외교, 종교라는 다섯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2.1 정치 구조: 신권 통치의 강화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의 화신이라 칭했고, 통치에 있어 종교적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삼국 통일 이후에도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정정치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왕건의 유교적, 귀족 중심의 균형 정치와는 큰 차이를 보이며, 더 강력한 중앙 집권 왕권의 출현을 뜻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숙청과 비합리적 통치는 곧 내부 균열을 초래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2.2 군사 구조: 왕건은 계속 충성했을까?

왕건은 궁예에게 충성을 맹세한 대장군이었지만,

궁예가 견훤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실책을 범하고 측근 숙청을 일삼자 그를 몰아냈습니다.

만약 궁예가 통일 후에도 왕건을 중용했다면, 왕건은 해상 무역, 군사 재편, 영토 확장 등에서

실질적인 실권을 행사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궁예는 왕건을 위협적인 실권자로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며,

결국 왕건도 또 다른 정변의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3 문화 구조: 불교 일변도 사회로?

궁예는 왕사 제도를 만들고, 절과 승려들에게 막대한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그가 통일한 국가에서는 불교가 국교 이상의 지위를 가지며, 문화·건축·교육 분야까지 지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불교 외 타 사상(유교, 도교 등)의 발달이 억제되고,

종교 권력이 과도하게 비대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문벌귀족 사회의 출현 대신 종교 권력 중심 사회가 고착되었을 수 있습니다.

2.4 외교 정책: 폐쇄적 혹은 종교 중심 외교

왕건은 고려 왕으로 즉위한 후 송나라와 친선을 유지하고 거란과의 충돌도 조율했습니다.

반면 궁예는 불교적 이상 세계관을 강조했기에 자문화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외교를 펼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고립되었거나, 불교국가와의 종교적 동맹 위주 외교로 제한되었을 수 있습니다.

2.5 경제 구조: 궁예 vs 왕건

왕건은 해상 교역에 강점을 두고 있던 가문 출신으로,

실제 고려 초기 상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궁예는 종교 중심 정치와 내부 숙청에 몰두해

경제에 대한 체계적 정책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왕건의 상업 기반과 실용적 경제정책이 배제되었다면

조세 체계는 미약하고 귀족 중심 경제 구조로 편향되었을 수 있습니다.


3. 시나리오 결과 요약 - 고려가 없었다면?

분야 궁예 통일 시나리오 왕건의 고려
정치 체제 신권 정치, 절대왕권 유교+불교, 문벌귀족 체제
군사 구조 강한 중앙집권, 왕건 숙청 가능성 왕건 중심 해상군 강화
문화/교육 불교 중심, 종교 권력 확대 유교 교육 확대, 과거제 정비
외교 정책 폐쇄적, 종교 중심 동맹 송과의 외교, 거란 대응
경제 기반 종교기관 중심 조세 상업과 세금 균형 운영

4. 역사적 교훈과 흥미로운 상상

이러한 가상 시나리오는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줍니다.

리더십의 성격 하나가 한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전체에 어떤 파장을 주는지를 보여주며,

포용과 균형, 현실감각을 갖춘 지도자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왕건은 궁예보다 능력이 뛰어났을까?

왕건은 세력 간 조율, 외교적 유연성, 문화적 포용력에서 궁예보다 월등했습니다.

궁예는 초기에는 이상주의적인 지도자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의심과 폭정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만약 고려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조선의 건국 기반이 되는 "고려의 법제, 제도, 불교와 유교의 조화, 문벌귀족 전통" 등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즉, 궁예의 삼국통일은 단기적 성공일 수는 있어도,

한국 중세사의 구조적 안정은 위태로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무리하며

궁예와 왕건.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다면 우리는 '고려'라는 이름도,

그 후의 '조선', '대한제국'도 전혀 다른 형태로 만났을지 모릅니다. 역사의 한 줄기 속에서

인간의 선택, 리더의 성향, 정치의 흐름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되새겨보며, 오늘의 가정을 마칩니다.

 

 

#궁예 #왕건 #고려건국 #가상역사 #후삼국시대 #한국사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이 글이 흥미로웠다면 댓글로 여러분의 상상도 공유해보세요!
티스토리 블로그 구독과 공감도 부탁드립니다.

교차형 무한
사업자 정보 표시
옥탑방 바카시온 | 최창열 | 22309 | 사업자 등록번호 : 708-28-01499 | TEL : 070-4517-4074 | Mail : sysy2202@naver.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22-인천중구-0183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