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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뮤지엄

불온한 대한민국을 보며 죽어도 눈 못감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by 마음heart 201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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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청산은 이제 국민이 해야 한다.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잊혀진 이름들이 역사속에는 너무나 많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한 분이 홍범도 장군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글이 되겠네요

 

봉오동 전투하면 홍범도 장군이 연상되겠지만

그 훨씬 이전에도 독립 운동에 힘써왔던 분이시고, 당시 독립군의 명장으로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게릴라전에 강해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게릴라전 하면 홍범도 장군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년시절은 유복하거나 평탄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는데, 그것은 홍범도

장군 이전의 조상들부터 시작됩니다.

고조부는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홍경래와 가까운 친척이라하여 탄압을 받았으며, 일가를 이끌고 탄압을 피해

숨어 살았으며 설상가상 홍범도 장군의 아버지는 그 아버지, 즉 홍범도 장군의 할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머슴

살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홍범도 장군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출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홍범도는 갓난아기 시절 동냥젖을 먹고 자랍니다.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했으니 아버지의 정이라도 흠뻑 받아야 하건만 아버지조차 그가 9살 되던 해에

돌아가십니다.결국 어린 홍범도는 이런저런 잡일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때 그는 군대에 들어가는데, 당시 조선의 군대 병사및 썩어 있는 장교들의 모습에 분개해서 결국 탈영하고

맙니다.우리는 유년기가 불우하면 삐뚤어지거나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 말하고 확률적으로도 분명 맞는

말이지만 홍범도는 뼛속까지 의기로운 인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후 홍범도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악덕 공장주를 만나는 바람에 계속 삯을 받지 못하고 고생만 뼈빠지게

하고 맙니다.한 두 달이 아닌 오랜 시간 지속되니 참을 수 없었던 홈범도는결국 공장주에게 응징을 가한 다음,

금강산의 절로 들어가 중이 되겠다는 결심 아닌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불타는 패기와 열정이 피에 끓고 있는 홍범도는 정적인 절 생활을 오래 하기에는 체질적으로 시기적으로

무리가 있었습니다.결국 절을 나오고, 홍범도는 사냥꾼을 생업으로 삼습니다.  군대에서 쌓아 두었던 사격과 검술을

연마하며  무예를 익혀갑니다.

 

 

 

 

 

 

 

 

이렇게 평생 이름없는 야인으로 살아갈줄 알았던 홍범도란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건 을미사변

때였습니다.을미사변에 분개하여 의병들이 일어나느네 그들을 가리켜 '을미의병'이라 불렀습니다.

홍범도 장군 역시 그 때 항일 감정을 품에 안고 일어난 의병 중 한 사람이었으니 이 때부터 홈범도 장군의 천재적인

게릴라전이 빛을 발합니다. 진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본군을 괴롭히는데 당시 조선의 지리적

사정을 몰랐던 일본군으로선 버겨운 상대였습니다.

그후 일본은 홍범도의 가족을 인질로하여 유인계를 서보기도 하지만 뜻데로 되지 않자 그의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하기도 합니다

 

일본은 1907년에 총과 화약 류의 무기들을 압수하는 법을 시행합니다.

독립군의 싹을 뽑고자 한 것이었겠지만, 이에 홍범도 장군은 더욱 분개했고,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의 무기 압수를

계속해서 방해합니다.

국권을 빼앗긴 후, 연해주에서 후일을 기다리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전술도 훌륭했지만 후진 양성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 즈음 홍범도는 다시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1920년 6월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봉오동 전투의 대승이 이루어집니다.

100명이 넘는 일본군이 사살사키고 아군인 독립군에선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신식군대인 일본군을 초토화 시킨 그야말로 '대승'이었습니다.

 

하찮다 여긴 독립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일본군은 '간도 지방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뜻.) 초토계획'

을 짜서 그 첫 단계로 중국 도적떼를 매수합니다. 일본군의 매수로 중국 도적떼는 일본 영사관을 급습하고

(이때 일본 외교관도 죽었다는데,목적을 위해선 진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양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중국 측에 책임을 미루고 자기들이 만든 일을 구실로 삼아서 서북간도에 손을 뻗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움직임은 구국만을 원하고 있던 독립군들의 눈에 이미 포착되어 있었고, 그 결과로 또 다른

전설이 이루어 집니다. 바로 청산리 대첩입니다.

우리는 맨 앞줄의 김좌진 장군의 이름과 함께 이 전투를 기억하고 있지만, 홍범도 장군도 이 전투에 한 몫 했습니다.

(참고로 청산리 대첩은 어느 한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 싸움을 묶어서 말하는 겁니다. 당시 그 일대에서

일어났던 어랑촌 전투, 천수평 전투 등 10번이 넘는 싸움을 묶어서 청산리 대첩이라고 표현합니다.)

청산리 대첩의 이면에는 일본의 야욕을 막은 우리 독립군의 의기와 치밀하게 진행된 일제의 만행이 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들은 이후 함께 러시아의 알렉시예프스크라는 곳으로 가는데 자유시라고도 불리건 곳입니다.

당시 소련 정부의 도움도 조금 기대하기도 했고, 독립군들이 집결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기에 간 거였지만,

결과적으로 독립군에게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독립군을 무장 해제 시킨것입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알려져 있는 이 일은 독립군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무기 들고 싸워야 될 판에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말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나라 잃은 조선 독립군에게는 그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격렬한 무력 투쟁도 불사해 봤지만 결국 사상자만

많이 나왔고 독립군 부대들도 와해되면서 독립군의 전력이 완전히 공중분해되고 맙니다.

 

 

 

 

말년의 홍범도 장군

 

 

 

 

낙심한 홍범도 장군은 이때부터 독립 전쟁보다는 동포들을 챙기고 보호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농부가 되어 여생을

살아 갑니다.

스탈린이 한인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을 때에도 동포들을 챙기고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를 해갔으며

결국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로, 1943년에 낯선 땅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고 맙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먼저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일을 막고 싶지만

그것이 안된다면 진짜 광복 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일제 잔재청산만은 우리 스스로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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