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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추모왕의 롤모델 부여시조 始祖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_잊혀진 부여왕국 두막루

by 마음heart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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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추모왕의 롤모델 부여시조 始祖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

잊혀진 부여왕국 두막루



동명왕 고두막한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전하는 부여의 시조입니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나 현재 역사학에서는 추모와는 다른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해석상의 차이로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주몽(추모)과 동일시되지만 주몽을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 동명으로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미흡합니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를 보면 주몽이(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졸본부여 왕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옵니다.즉 졸본 도착 이전 졸본부여라는 나라는 이미 있었으며, 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계승자이지 건국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세기 후한 시대의 저서인 논형(論衡) 권2 길험 편에 부여 동명왕 설화가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북이(北夷) 고리국 왕의(영품리왕 추정)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북부여조-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주림전-

고려 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기도 합니다.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지와 탁본

결국 고구려, 부여의 설화가 구분되지 않았던 이유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비슷한데다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왕명도 같아 구분하기 쉽지 않고, 고구려가 부여에서 파생되어 길게 존속했다는 점에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 부여의 동명이 고구려의 주몽으로 귀속되어 두 인물이 한 명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이에 대해 '동명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당시에 '태조'를 뜻하는 부여계 고유어라서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동명' 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습니다.조선 후기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품은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비판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한민국에 들어서도 기존의 동일인물설에 비판이 가해지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일단 부여가 고구려보다 먼저 존재했다는건 진실이기에 부여 건국설화가 고구려 건국설화보다 앞선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이 현재의 시선이기도 합니다.고구려의 주몽 설화는 동명왕 설화와 거의 흡사하여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동명왕 설화와 주몽 설화는 거의 흡사하나 주몽 설화에서는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와 그의 아들 해부루가 주몽의 혈족으로 묘사되었고, 강의 신인 하백이 추가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아예 동명과 주몽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된 건 외부에서 졸본부여에 정착한 계루부 세력의 왕가가 졸본부여의 왕위를 계승했기에 부여계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동명왕 설화를 차용해 계루부의 시조인 주몽의 신성성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고구려란 국명 자체도 동명왕의 탄생지인 고리국의 '고리'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다만 주몽 설화에서 북부여는 고구려가 계승해야 할 부모국이라기보단 시조 주몽을 괴롭힌 적대국으로 등장합니다. 설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에도 북부여와 많은 전쟁을 벌여야 했으며 또한 해모수-해부루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계보는 북부여가 아닌 고구려에서 후대에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예를 들면 해부루 또한 천손임에도 불구하고, 주몽이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계시가 있자 천도를 해야 했고 그 후손인 북부여 왕족들도 찌질하게 묘사되는 등 아무리 봐도 주몽보다 못한 2류 천손 정도로 묘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동명왕 설화가 고구려에서 왜곡하지 않은 순수한 북부여의 시조 설화였다고 한다면 고구려에서 동명왕 설화를 찬탈하여 주몽 설화에 써먹은 뒤, 북부여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해모수-해부루-금와왕 설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후대에 북부여, 동부여는 쇠약해지다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역내 세력권은 모두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만큼 고구려 우위가 아닌 설화는 거의 남지 않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부여시조 始祖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의 실제 삶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와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부자(父子)관계로 만들어 놓으면서 부여의 역사는 엉망이 되어 버리는데 원래 동명왕으로 불린 졸본부여의 시조는 고두막한인데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둔갑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한나라 무제(유철)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려다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참패하고 그냥 돌아갔지만 한나라 무제의 사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하지도 않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를 중국과 일제 식민사학은 한반도에 갖다 놓았습니다.한漢나라 무제(유철)은 우거 정권(위만의 손자)을 무너트리기 위해 쳐들어옵니다.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연패를 당합니다. 1년 넘게 계속된 전쟁에서 우거 정권의 내부 분열과 이간책으로 한漢나라 무제는 결국 우거 정권(옛 번조선)을 점령합니다.한무제는 한漢나라의 군현을 설치하려다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韓민족의 강한 저항에 번조선(위만이 침탈한 고조선의 변방)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하지만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한漢나라 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켰으며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지게 되고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 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답습한 결과라는 것입니다.강단사학자들은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아버지로 설정합니다.'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북부여 해모수와 고구려 추모왕을 동시대 인물로 만들어 버리면서 무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입니다.

■고조선의 끝나지 않은 한무제와의 전쟁_동명왕 고두막한의 투쟁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무너트린 후 동북아의 패권을 잡으려고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게 됩니다.당시 북부여 4세 고우루는 한漢나라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사(病死)하고 맙니다.북부여가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는 최대의 위기 속에서 한漢나라 무제의 군대를 물리쳐 북부여를 구한 분이 바로 동명왕 고두막한입니다.고두막한이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었다 하여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합니다.동명왕 고두막한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인물로 백성들에게 구국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북부여 4세 고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잠시 보위에 있었으나 동명왕 고두막한의 등장에 가섭원(동쪽 차릉)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우게 됩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어린 시절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이 바로 동부여(가섭원 부여)입니다.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 무제)이 평나(平那, 現 하북성 창려)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 왔다.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 연산군 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동명계기혁업 주몽승기여파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上 255쪽,주註 282쪽

그런데 동명이라는 호칭은 몽골어에서 흔히 발견되는 Tumn의 음역(音譯)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칭호는 대족장,만호장이라는 뜻으로 흉노제국의 두만선우(頭曼單于)처럼 유목 군장의 이름에서 자주 발견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 252~256쪽

비록 위서로 낙인 찍혀 천대받는 환단고기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무작정 위서라고 할 것 없이 우리 상고사의 모든 기록은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해모수는 북부여의 창업자이며 동명왕 고두막한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사군을 설치하지만 고조선 유민들을 규합한 동명왕의 활약에 한무제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는 기록은 분명 의미있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동명왕 설화의 기록에서 동명왕은 어미가 몸종이라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고두막은 부여라는 나라에서 왕권을 넘볼 수 없는 가장 천한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한무제와의 전투를 통해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 부여 왕가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면서 결국에는 졸본부여를 창업하고 동명왕이 됩니다.그리고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는 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6대 고무서와 정을 통하여 추모를 낳았으니 추모왕은 부여 해모수의 직계혈통 4세손이라는 것입니다.즉,동명왕과 추모왕은 약 100여년의 시간의 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동명왕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면 그 용맹은 입에서 입으로 살을 더하고 부풀려져 어린 추모왕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을 것입니다.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이 오직 개인의 기량 하나만으로 졸본부여를 창업했다는 사실은 추모왕 같은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슈퍼 히어로급 로망을 키워주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며 추모는 동명왕 루트를 따라 결국 졸본부여까지 따라와 소서노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동명왕이 창업한 졸본부여를 이어받고 다시 고구려를 재창업하며 700년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몽이 동명성(금성)을 뜻하는 말'이며 그러므로 주몽이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대 기록인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오히려 '주몽'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풀고 있을 뿐 금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접근하는 이러한 가설은 역사적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경우, 굉장히 조심해야 하며, 실제 고대 언어의 음가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심각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대 사료에서 주몽 = 동명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등장한 이상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의 태조로 도모대왕이라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제 역시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왕실의 기원을 부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도모가 주몽이 아닌 동명왕 설화의 부여 시조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도모와 관련된 설화에 부여 동명왕 신화에는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 주몽 신화에만 등장하는 하백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 있어 도모왕은 부여의 동명왕보다 고구려의 주몽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모왕을 제1대 왕으로 하고, 근구수왕(근귀수왕)을 제16대 왕으로 하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도모왕은 기원전 1세기때의 인물이 되므로 도모는 주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백제와 고구려가 동명왕 설화를 자신들의 시조 설화에 차용하거나 족보의 가장 위에 위치시켰을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후대에 "동명=주몽"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백제에서도 동명=주몽=도모가 삽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류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또한 동명왕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한성백제를 건국한 두 지배층 중 하나인 고구려인들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기원후 2세기에 내려온 이들로 드러났으나 온조왕의 아버지가 동명성왕이 아닌 이 동명왕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비류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동명성왕 주몽과는 혈연 관계가 없고 해모수-해부루-우태의 후손이 됩니다. 계보를 동명왕~연타발-소서노-비류/온조로 보아 비류와 온조를 동명왕의 혈연적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정작 졸본부여의 군주였던 연타발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백제는 훗날 성왕이 부여의 이름을 따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던 만큼 부여를 다소 적대적으로 보았던 고구려에서와는 다르게 백제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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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잊혀진 왕국 두막루

두막루(豆莫婁)는 만주 북단에 위치했던 국가로 달말루(達末婁),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라고도 합니다.기록 상으로는 송화강 이북의 소흥안령 산맥 지방에 위치했던 듯 한데 두막루가 사료의 기록대로 정말 부여의 후계국가가 맞는다면 한국사 중 가장 최북단에 위치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만주 서북단의 대흥안령 산맥에 위치했을 듯한 고리국(탁리국)도 엄청나게 북쪽이지만, 고리국은 신화 속 국가라 실체가 불분명하고 위치 비정도 애매합니다.두막루가 퉁구스나 몽골계 민족인 실위,거란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있고, 멸망 이후 몽골로 이주된 흔적이 있는 등 몽골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듯 싶습니다.위서 두막루전이나 신당서 기록과 종합하여 성립시기를 빠르게 잡으면 5세기 초 또는 중엽 이전이라고 추측합니다. 485년과 486년 물길은 북위에게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아마도 두막루인 듯한) 대막로국(大莫盧國)이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태화(太和) 9년(485)에 (물길에서) 또 사신 후니지(侯尼支)를 파견하여 조회(朝會)하였다.
그 이듬해에 다시 입조(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복종국(覆鍾國)·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소화국(素和國)·구불복국(具弗伏國)·필려이국(匹黎尒國)·발대하국(拔大何國)·욱우릉국(郁羽陵國)고복진국(庫伏眞國)·노루국(魯婁國)·우진후국(羽眞侯國)이 있는데, 연이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朝獻)하였다.

/위서 물길전

그런데 두막루를 설명한 위서 두막루전의 내용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하다시피 똑같아서 사료의 신뢰성이 의심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을 가지고 '부여 풍습과 두막루 풍습이 비슷하니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국가가 아닌가?'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풍습이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한문으로 씐 서술 자체가 거의 똑같기 때문에 무성의한 복붙으로 보일 여지가 큰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두막루가 부여계가 아니라 단지 부여계를 자칭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부여계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래 써 있다시피 학계에서도 인지도가 듣보잡인지라 논쟁은 그냥 정체 상태입니다.위서 실위전에서도 두막루가 나오는데, 동호 계통인 실위와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고 기록했으므로 부여계와 동호계의 언어가 같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위서 문서에서도 소개하였듯, 이 책 자체가 가짜는 아니지만 '더러운 역사서(穢史, 예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도나 공정성이 전체적으로 낮아  계속 까여왔다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두막루는 당나라에도 조공했기 때문에 신당서 열전에도 남아있는데 여기서 달말루(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는데, 달막루인의 '자칭(自言)'이라고 써서 신당서 편찬자도 신빙성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그런데 수,당이  만주를 공격하던 6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는 이들의 조공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 때문에 이 시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조공 기록이 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쯤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8세기 초반은 때마침 발해 무왕과 흑수말갈이 충돌하던 시기인데 두막루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가 없지만 발해와 흑수 말갈 사이에 끼어 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두막루를 연구한 내용 자체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지만. 멸망 이후 실위와 함께 몽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그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실위,고막해,거란과 같은 말을 썼다는 기록으로 봐선 몽골 지방으로 이동 후 몽골계 민족들에게 동화된 것 같습니다.영토는 사방 이천 리로 서쪽에 실위,남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는데, 동쪽 바다라는 게 아무르강인지 오호츠크해인지 동해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두막루를 연구한 유태웅 교수의 두막루국 흥망사 시론 연구(2004)에서는 724년 즈음 발해와 흑수말갈의 대립으로 중간에 낀 두막루는 멸망한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註 等國, 諸國亦患之. 去洛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 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校勘,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水, 闊校勘三里餘, 名速末水.

/위서 물길전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 衣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2천 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아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오과가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신충하고 중후하니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서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위서 두막루전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達姤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姤,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개원 11년(723)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당서 권 220

▩두막루는 부여의 후예일까?

두막루를 북)부여의 후계국가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부여계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기록도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막루 한국사설은 정설 단계로 올라서진 못했습니다. 지명이나 인명이 '루' 자로 끝남은 부여와 고구려,백제 등 만주와 한반도에 있던 부여계 국가들의 한 가지 언어적 특징으로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관직명인 대막로와 발음이 연관성이 보인다며 여기서 국호가 유래하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있습니다.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두막루의 틀 / 한국사 잔존 여부와 두막루가 부여계 국가인가 아닌가로 엄청난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고 대부분 판단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이 나무위키에서도 틀;한국의 역사 문서에 두막루가 있었으나 저명성 부족과 한국사 여부 불분명으로 틀에서도 제외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사에서 이름 없이 등장했다 사라진 소국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런 나라들을 다 적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두막루는 적시해야 할 근거가 부족하고 무엇보다 영토 전역이 중국에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부여 및 두막루 연구자료

노태돈.〈부여국의 강역과 그 변천〉, 《국사관논총》 제4집, 국사 편찬 위원회.1989년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국사 편찬 위원회, 1991년 12월
박경철, 〈부여사 전개에 관한 재인식 시론〉, 《백산학보》 제40호, 백산 학회, 1992년
干志耿, 김영수(번역), 〈고대 탁리 연구〉, 《백산학보》 제44호, 백산 학회, 1994년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백산 학회, 2004년 12월
강인욱, 〈삼강 평원 곤토령⋅봉림 문화의 형성과 물길⋅두막루⋅말갈의 출현〉, 《고구려발해연구》 제52집, 고구려 발해 학회, 2015년
이종수, 〈부여 강역 연구현황과 쟁점〉, 《백산학보》제110호,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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