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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발해는 모두 부여의 별종이다_고조선 계승국 부여 이야기

by 마음heart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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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발해는 모두 부여의 별종이다

고조선 계승국 부여 이야기



▒고조선 멸망 후 열국시대에 접어들다

우리 나라 상고사는 단군조선 이전의 국가부터 고조선의 멸망이후 고구려가 등장하기 전까지 부여라는 고대 국가를 비롯하여 많은 기록이 유실되어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우리 한민족의 최초의 국가라고 말하는 고조선 멸망이후에 대한 기록 자체도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진조선辰朝鮮(만주), 불조선卞朝鮮(요서), 말조선馬朝鮮(한반도)의 삼조선으로 분립하였으며 이후 열국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신조선 지역에는 해부루解夫婁가 동부여東扶餘를 건국하여 후에 동북부여, 동남부여로 분리되었고, 해부루와 동족인 해모수解慕漱는 북부여北扶餘를 건국했는데 해모수와 서민 출신의 유화柳花 사이에 아들 추모鄒牟(주몽)가 태어났으나 장자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추모는 해모수에 이어 왕좌에 앉은 금와왕에 쫓겨 졸본부여로 가서 과부이자 실력자인 소서노召西努를 만나 결혼하는데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재산을 상속받은 소서노에게는 전남편 우태優台와의 사이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추모는 소서노와 함께 흘승골 산위에 도읍을 세워 국호를 ‘가우리’라 하고 이두자로 高句麗(고구려)라고 썼습니다. 추모왕 사후 유류왕과 대주류왕이 차례로 왕위를 잇고 대주류왕은 동부여와 낙랑국을 정복합니다.평양을 수도로 한반도 지역에 있던 말조선은 후에 마한馬韓으로 국호를 바꾸고 남쪽의 월지국月支國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마한이 월지국으로 옮겨간 뒤에 평양에는 최씨가 일어나 낙랑국을 세움에 따라 마한은 임진강 이북의 땅을 잃게 됩니다.한편 중국과 흉노의 난을 피해 신조선과 불조선의 유민들이 마한지역으로 이동해오자 신조선유민에게는 낙동강연안 오른편에 진한부辰韓部를 세우게했고 불조선유민에게는 연안 오른편 일부지방을 갈라 변한부卞韓部를 세우게 했습니다. 이 진한부와 변한부는 나중에 각각 신라와 가야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고구려에서 추모왕의 친자인 유리왕이 왕위를 잇게되자 소서노와 비류·온조 두 아들은 고구려를 떠나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가 미추홀彌鄒忽과 하남위례홀河南慰禮忽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이라 칭하고 백제百濟를 건국했는데 소서노 사후 비류는 미추홀을 온조는 하남위례홀을 차지하여 동·서 백제로 나누어졌는데 비류 사후에 온조로 다시 통일이 되었고 이후 온조는 마한을 정복하고 백제의 기틀을 닦았다는 것입니다.요서 지역의 불조선에는 기원전 194년 연나라 왕 노관과 한편인 위만이 귀화해 들어와 불조선왕 기준箕準(준왕)에 의해 등용되었지만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의 도성 왕검성을 습격해 정권을 차지하자 기준왕은 위만에 맞서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궁인들과 잔병들을 거느리고 해로를 따라 마한의 왕도인 월지국으로 들어가 그곳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성을 한씨라 하여 자손에게 전하던 마한은 온조의 백제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삼조선 유민의 한반도 이주


윤내현 교수도 새로운 한국사에 고조선 이후의 열국시대에 대해서 고조선은 많은 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거수국제국가渠帥國制國家(중국식으로는 봉국제국가封國制國家)형태였다고 주장하는데 고조선 서쪽 변경 난하灤河유역에 기자箕子일족이 이주해와 고조선의 거수국이 되어오다 준왕 때 서한을 피해 망명해온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겼으며 이후 기원전 108년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의 세 개군을 설치하고 여세를 몰아 고조선 서부를 침략하여 랴오허까지 차지해 기원전 107년에는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조선은 위만조선·서한과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내부사회의 동요로 기원전 100년을 전후해 붕괴되었으며 이에 따라 요서遼西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거수국들이 요동遼東 지역으로 이동해왔고 단군이 통치능력을 상실함에 따라 거수국들이 독립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서 지역에 있던 거수국들과 주민들이 랴오허 동쪽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동부여,고구려,읍루(숙신이 명칭을 바꾼 이름),동옥저,동예,최씨 낙랑이라는 예전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요서 지역 정치세력과 주민들이 랴오허 동쪽에서 이동해오자 그 지역 주민 중 일부는 연해주, 시베리아와 한반도 등지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 끝에 랴오허 동쪽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정치세력은 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조선,최씨낙랑국,동예,대방국,한,백제,신라,가야 등의 나라로 재편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들이 민족통합과 영토전쟁을 거쳐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네 나라가 남아 한국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고조선 붕괴 후 고조선 지역에서 열국들이 일어났고 이 열국들은 다시 우리의 고대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고구려,신라,백제,가야로 이어진 것으로 고조선의 후예들은 한국사의 고대 국가들을 건설합니다.

▣고조선의 계승자 부여

부여는 기원전 2~3세기경에서 발원하여 멸망한 494년까지 약 600~700년가량 지속돤 예맥족의 나라이며, 이후의 동부여와 구별하여 북부여라 하기도 합니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우리 모든 고대사가 그렇지만 부여 역시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남부여,졸본부여,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하기도 합니다.삼국사기에서 난립하는 북부여와 동부여의 문제에 관해선 밑부분의 모용선비의 침략 문단처럼 동부여는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부여만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구려 후기 고구려의 정계에 깊숙히 파고든 동부여 계열 귀족들이 선조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냈거나, 아니면 그냥 동부여 사람들 자체적으로 신화를 조작했는데 그게 고구려 자체 기록과 구삼국사를 거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는 것입니다. 남부여 백제에서 제26대대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부여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의 다른 이름이라고는 것입니다.(북부여=원부여, 동부여=동부여 귀족들의 자체 조작,남부여=백제 성왕시기 일시적인 국호,졸본부여=고구려,갈사부여=갈사국)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였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후 국력이 점차 약화되고, 선비족이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습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오환-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숙신-읍루-물길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고구려와 접했습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는데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과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고 합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인 5세기경에는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으며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말갈,발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로 보고 있습니다.

서단산 문화는 길림시(吉林市) 를 중심으로 길림성 중부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청동기 시대 고고학 문화


서주~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했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요 줍니다.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 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 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포자연 문화권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구류가 하필이면 삼국사기 상 고구려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압록강 유역 적석총에서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학계에서는 이것이 고구려 건국 지배층과 대단히 유관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부여 출신 전사 집단이 주축이 되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부여의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지만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사기,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됩니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었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대신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으며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인 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청동기 시대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여의 건국신화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추모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한데 이에 반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비교했을 때 매우 다릅니다. 특히 백제의 건국 설화는 난생설화가 아닌데, 부여,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도 난생설화인 걸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건국 설화가 난생설화가 아닌 나라는 고조선과 백제 둘뿐입니다.동한대의 논형에 처음 부여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고구려 동명성왕 신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여 동명왕이 시조이지만 소수림왕 대에 주몽 신화를 만들고 초기 역사를 정비하면서 동명왕 신화를 배껴 주몽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동명왕을 천제의 아들로 설정한 해모수로 바꾸거나 교체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것 이외에도 천제의 혈통이란 설정을 부여해 주몽의 고귀함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동명왕 신화에 따르면 동명왕은 탁리국(글자 모양이 비슷해 고리나 색리라고 쓰기도 한다.고리국이 원래 발음에 가장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에서 탈출해 엄호수를 건너 남쪽에 나라를 세웠다는데, 여기서 동명왕의 도읍지는 길림시, 엄호수는 눈강 또는 제1송화강, 탁리국은 눈강 북쪽의 송눈평원에 있었다는 것에 한국과 중국 사학계 모두 이견이 없습니다.또 부여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4~3세기로 추정되는데, 이 당시 단군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패권을 차지했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으로 한반도 서북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다가 다시 중흥하고, 또한 단군조선이 위만조선으로 교체되는 혼란기 속에 고구려의 원형이 된 구려족처럼 이때 즈음에 건국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근데 문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 다음왕 해부루 대에 가섭원으로 천도했다면서 '동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동부여와 북부여가 혼재할 뿐 아니라 분명히 동쪽(함경북도 북옥저 쪽으로 추정)인데 고구려는 북벌을 한다든가 등의 이유로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후 금와왕 때는 북쪽으론 제1송화강에 이르고, 동쪽으론 읍루를 복속시키는 등 당대 최강자로 거듭납니다.

북이(北夷) 탁리국 임금 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9년) 4월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부여왕과 귀족의 무덤 길림 모아산 고분군 18호 목관묘 및 모아산 고분군 출토유물
▧부여의 전성기

부여의 전성기는 1세기~3세기로 부여 남쪽에 위치했고, 오랜 역사와 강성한 국력으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고조선(위만조선)이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의해 멸망(BC 108)하면서 한사군이 설치되었지만, 한나라도 흉노와의 오랜 전쟁과 토목공사 남발로 인한 과도한 국력소모에 시달린 탓에,기존에 발휘했던 영향력을 고조선에 온전히 발휘하는 데에는 부담이 컸던 상황이었습니다. 후한 말기에는 낙랑군의 태수인  공손도가 동탁의 전횡에 칭왕을 하고, 독립국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부여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인구를 늘렸고, 동시에 한나라 및 조위와의 친선관계를 도모하여 안보 보장을 받고,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힘의 공백을 메우고, 전성기를 이룩해냅니다.부여라는 나라가 한민족의 역사에 크게 부각되지 못했던 이유 중 친중적인 성향도 분명 한몫하기는 하지만 부여가 중국세력과 항상 핑크빛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어서 후한 안제 때인 111년에 기병과 보병 7~8,000명을 이끌고 낙랑군을 쳐들어가기도 합니다.이 기록은 하필이면 부여와 낙랑군의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낙랑군재요서설의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합니다.부여가 잘나갈 때는 옆나라 읍루를 복속시키기도 했지만 읍루가 조위 황초(黃初,220~226) 연간에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로부터 독립하기도 합니다.진서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0,000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0,000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었습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했는데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당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실제 부여는 선세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습니다.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습니다.부여는 최대 영토가 2,000리에 이르렀는데 학계 일부에서는 동명성왕~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부여의 몰락_모용선비의 침략

잘 나가던 부여도 285년 선비족 모용부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쇠락기를 맞이합니다. 서기 285년, 모용외(285~333 재위)의 침공으로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했습니다.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했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는 기록이 있습니다.한편 일부 무리는 북옥저에 정착하여 동부여가 되었고, 훗날 고구려 초기의 기록을 정비하는 과정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북부여랑 동부여가 섞이게 됐다고 보기도 합니다.한편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芦岛市) 젠창현(建昌县, 건창현) 라마동진(喇嘛洞镇, 나마동진)의 선비계 유적을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고 본 견해도 있는데 이들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까지 내려왔다는 내용이 역사 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합니다. 이를 부여족 남하설이라 부르는데 이말대로면 금관가야는 삼국사기 건국년도인 42년이 아닌 285년이 성립년도로 잡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285년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옥저 지역으로 도망한 부여 유민들이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설이 정설입니다.

고구려나 중국보다 선비족과의 악연이 더 깊었던 부여

◐부여의 몰락_전연의 침략

모용외의 침공에 타격을 받은 부여는 국가의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서쪽의 농안 지역으로 옮겼으나, 346년,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333~348 재위)의 대공격에 참패해 부여왕 현을 포함한 무려 50,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습니다.이때 끌려간 인구가 50,000명이 아니라 50,000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구당서를 신당서로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미천왕(제15대, 300~331 재위)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전에 부여를 침공했던 모용외의 모용선비(훗날의 전연)가 요동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도루 묘지명에 미천왕 다음 왕인 고국원왕(331~371 재위) 시기에 대형 관직을 맡은 염모라는 인물이 전연이 북부여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하여 '북부여 수사'라는 관직에 임명되고, 제19대 광개토태왕(391~412재위) 시기의 그 후손인 모두루까지 대대로 북부여 수사의 관직을 맡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346년 부여의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갔지만,  410년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동부여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것마저 맥이 끊기게 되었습니다.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북부여는 이후 452년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상태에 돌입할 때쯤 북위로 사신을 보내고는 다음 기록이 없다가, 고구려가 전쟁하는 틈을 타 독립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후 494년 물길의 침입을 받고,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491~519 재위)에게 투항하기에 이릅니다(494). 일부 세력은 북부여가 멸망하기 이전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부여의 귀족정치 체계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였는데 부여의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군주왕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의 가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습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등의 제가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고 합니다.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는데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습니다(다만 하호와 별개로 노비층도 있고, '하호'라는 계층은 고구려에도 있었습니다. 부여 하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했습니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으로 이로 미루어 보아 부여는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귀족 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이었으로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했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습니다.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가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는데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어디까지나 귀족대표로써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했습니다.이런 부여의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습니다.또한 부여 사회는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으며 간음을 엄격히 금지해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습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 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인 형사취수제 있었는데 고구려의 사회법 중 대부분이 부여와 유사한 걸로 보아 고구려의 사회법도 부여에서 따온 걸로 추정됩니다.추수가 끝난 후 영고라고 불리는 제천 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동예의 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부여의 영고는 유목 민족의 수렵제적인 성격이 남아 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습니다.부여는 노비 제도가 존재했는데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습니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 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기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했는데 이 12배 변상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여의 언어

부여의 언어는 예맥 계통인 고구려어와 비슷했을 거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부족한 관계로 얼마나 유사성이 높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당대의 중국 측의 사료에서 꾸준하게 부여와 고구려,옥저,동예 등의 예맥계 국가들의 언어가 유사하다고 언급하고 있어 서로 같은 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며, 이에 따라 주류 언어학계는 잠정적으로 이 어족을 부여어족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부여어족이 어느 어족과 동계인지가 언어학계의 화두인데, 미국의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퍼 벡위드가 삼국사기의 몇몇 기록을 토대로 부여어족이 일본어족과 동계라는 설을 제안했으나, 고유어를 한자에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한국 한자음의 재구가 엉터리라는 점때문에 바로 부정되었습니다.반면 똑같은 미국인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부여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에 한국어에서 볼 수 있는 요소가 대거 존재하는 점을 들어서 양자를 동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때 보빈이 선비족의 언어인 선비어를 부여어족으로 주장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며 논문을 오독한 것으로 실제 내용은 선비-거란 계통의 언어에 고구려어가 외래어로 차용되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부여 사람이 쓰던 성 해씨에서 '해'가 태양을 뜻하는 현대 한국어 '해'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근거가 부족한 탓에 주류 학계에서는 해당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성씨를 지닌 사람은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아홉 명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순우리말 해(日) 흰(白)은 어원이 같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 백의민족 기록이 부여에서도 나타나는데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포목으로 만든 소매가 넓은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 (삼국지 부여)

고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여인들도 상투를 틀었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言語 食飮 居處 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동예의) 노인이 스스로 말하길 (고)구려와 동종이며, 언어와 법속이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전

또한 부여의 경제는 만주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사를 주요 산업으로 한 농경 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에 말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주요 수출품으로는 말,붉은 옥(적옥, 赤玉;실제로 부여 유물 중 붉은 옥이 들어간 장신구가 많다),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여우,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력했던 부여의 군사력

부여는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이 발달했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습니다.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이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양국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는데 111년에는 7,0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했습니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는데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합니다.부여는 선비족과의 충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부여, 오손, 정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부여를 끝장낸 285년, 346년의 모용선비 침공이 대표적입니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부여인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여로 되돌려보낸 일화도 고려하면 기록이 안된 모용선비족의 약탈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그 외에도 동한 초기에 읍루를 복속시켰으나 3세기 초 읍루가 부여의 지배권에서 이탈하면서 읍루와도 전쟁을 벌였는데 다만 읍루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습니다.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가 동한측으로부터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나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일부 주장도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과 부여 병사

 

▤부여인은 현대 한국인과 가장 닮은 유전형태

고대사 속 한국의 모든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에 영토가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부여는 (동부여를 제외하면)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던 데다가 여러 전란으로 사서가 유실되어 남아있는 기록들도 부실하여 한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부여 역시 왕을 칭한 연맹왕국을 이루는 데 성공했고 두 후계국이 메이저급으로 성장했으니 군장국가 수준에 그친 다른 원삼국시대 소국들보다는 훨씬 네임드하 할 수 있습니다. 백제를 누를 잠재력이 있었던 마한의 맹주 목지국은 결국 본격 영토국가로는 성장하는 데 실패해 지명도가 크게 떨어지는데 고조선 준왕 집단의 직계이자 목지국보다 먼저 마한을 영도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건마국도 너무 이른 시기에 몰락해 지명도가 아예 없습니다.그에 비교하면 부여는 가장 북쪽 끝의 국가였다는 개성을 가진데다 발해도 부여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고려에도 부여공/후란 작위가 존재했고 백제 덕에 한반도에 부여군이라는 명칭을 무려 현대까지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부여의 왕들인 해부루나 금와왕,대소왕은 알겠지만 그에 비해 한때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한 강국이었던 가야 반파국(대가야)의 왕들의 이름은 거의 알지 못합니다.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았는데 한국의 전통놀이 문화인 윷놀이의 기원론 중 하나가 부여기원론이며 윷놀이 용어는 부여어라는 게 중론이며 중국 북송 때의 백과사전 태평어람에서도 부여 관련 얘기로 나옵니다.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한반도 사람들은 부여에서 내려온 북방계로(남부는 남방계와의 혼혈) 부여인의 유골이 형질인류학 연구상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두막루도 부여의 후계국이라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부여는 삼국 고대왕국 고구려,백제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발해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외에도 부여, 고구려, 고조선은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는데 토원책부와 삼국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 경에 작성된 위략에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삼국지가 편찬 되었을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합니다.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 이었다고 합니다.또한 윷놀이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부여에서 유래한 놀이가 아닌 고조선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추정컨데 두 국가간의 친연성은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조선 준왕이 남하하여 형성된 삼한의 소국들 중에는 벌, 비리, 부루, 불, 부리 등의 지명이 많이 보이는데 여러가지 부여의 어원설 중 우리말 벌,벌판 그리고 영남 해안 사투리 등이 부여의 어원이라는 설이 맞다면 부여-고조선-삼한 간에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부여의 별종임을 자처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에서 나왔음을 자처했는데 1차 사료인,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내는 국서(472)가 있습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북위서 열전,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쓰여 있으며,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에게서 따왔고, 건국신화 또한 동명왕 신화를 차용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백제같은 경우는 왕실의 성이 부여씨였고,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꾼 적도 있을 만큼 부여로부터의 정통성을 중요시했으며 이로 인해 사비성이 있었던 지역의 현대 명칭도 부여군입니다.고구려의 경우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과 부여 왕실의 혈연관계(고주몽과 해부루는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이복형제 관계가 된다)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부여 왕실보다 위상이 높은 다른 계파로 두어 계승성을 주장하긴커녕 오히려 우월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부여와 적대관계를 거듭했던 고구려 초창기의 역사 및 후에는 쇠락한 부여를 압도하게 된 것의 영향이기도 합니다.다만 고구려와 백제가 둘 다 부여의 후예라는 것과 별개로 이들의 사이는 영 좋지 않았는데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 막판의 여제동맹 구도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한 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멸망 이전 몇 십 년 정도에 한정된 관계였고 이것도 긴밀하기보단 이해관계 때문에 일시적으로 뭉친듯한 모양새였으며 오히려 동맹의 긴밀함은 한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국 왕족끼리 서로 통혼을 한 백제, 신라의 경우가 유별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동맹이 깨진 뒤론 원수가 되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왕조 존속기간 수백년을 통틀어 보면 이들이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기간보다 여•제가 서로 원수지간이던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고구려 같은 경우 그 건국 초기 지배층이 묘제는 비록 부여와 같지 않지만, 지배층의 묘소에서 발견되는 무구류와 장신구는 모두 부여 포자연 문화권의 것이기에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부여 지배층의 그것과 강력한 연속성이 발견되는데 이는 고구려 지배층이 부여에서 온 전사 집단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는데 별다른 이견이나 반박은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원류 소수맥 지역은 주몽이 오기 백 년 전인 기원전 2세기에도 부여로부터 내려온 집단의 남하가 또 한 번 확인되는데 이들은 문헌 사료와 맞춰서 이해하면 홀본부여 건국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즉,고구려를 건국한 자들은 부여에서 온 게 문헌 분야와 고고학 분야 모두에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백제는 그렇지 못함이 의외의 사실이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연결성은 묘제의 연결성이 너무나도 분명하니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건 고고학적으로 결코 부정할 수 없으나, 이것이 백제 왕실의 공식 주장, 즉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오지 않았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에 고구려와 대등하다는 주장에 부합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합니다.흔히 알려져 있는 온조시조설의 백제 건국신화에서는 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홀본부여에 남하해 소서노와 혼인,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와 온조를 낳고 후에 북부여에서 내려온 장자 유리명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남하해 백제로 떨어져나갔다는 게 골자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왕대가 2대가 될까 말까한 초기에 일어난 일이니만큼 북부여가 아닌 '홀본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거의 동시에 나왔으면 백제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와의 물질 문화 연계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그러나 고고학 연구가 진전될수록 백제와 고구려의 연결성은 입증되어도 백제와 부여 사이엔 그런 게 되질 않으니, 결국은 온조 설화의 내러티브 자체도 상당 부분 의문시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즉, 백제가 부여의 계통을 이었다는것이 거짓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부여씨가 고구려에서 몇세대 동안 정착했다가 서기 2세기 중후반이 되어서야 고구려에서 빠져나와서 백제의 지배세력이 되었는데, 고구려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정통성을 끌여올리기 위해 건국연도를 올려잡는 과정에서 부여를 바로 이은 것처럼 신화를 만들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여기에 더해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했는데 발해는 옛 부여의 땅에 부여부와 막힐부를 두었고, 부여부 부주 부여현은 후기 부여의 중심지 농안일대로 보기도 합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발해 부여부가 요녕성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요사에 기록된 발해 여러부의 요동 위치설은 거란이 발해를 정복하고 발해인들을 집단이주시켜 주군현을 이치한 결과로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고려 역시 문종의 왕자 왕수의 봉국명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국 왕조가 전왕조들의 국호를 제후에게 봉한 사례를 따른 것으로 왕수의 작위는 후작에서 진작된 부여공(扶餘公)이었습니다. 또한 중국 송나라의 고려도경엔 고려가가 제후에게 준 부여궁(扶餘宮)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부여궁은 부여국에서 따온 것입니다.

발해의 석등-발해는 고구려뿐 아니라 부여의 계승의식도 국가적으로 밝히고 있다

▣부여를 향한 중국의 동북공정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최근 아무리 계속하여 밀어붙여도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 인정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구려보다 비교적으로 한국 학계에서 역사적 연구 및 자료가 빈약한 부여를 중국 한나라 한사군에 소속되었던 중국의 왕조였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비중을 옮겨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즉,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의 왕조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예 고구려와 백제의 선조격인 부여를 중국 왕조라고 주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부여를 한국 발음인 부여가 아니라 중국식 발음인 푸위(Fuyu)라고 불러야 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어 위키백과 항목에 부여 항목을 점거한 뒤 위의 주장들을 기재하여 부여를 중국의 왕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한국의 역사로 수정하면 다시 중국 역사로 바뀌는 등 한국 유저와 중국 유저 간의 수정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현재는 부여와 관련된 문서 일부가 아예 보호 처리되었습니다.우리 고대사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구려,백제,신라는 물론이고 부여 역사도 그 어느것 하나 중국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지금은 문화 전쟁,역사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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