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고조선의 수도 위치
오늘은 단군조선 혹은 고조선의 수도라고 알려진 왕험성(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현재 왕험성의 위치는 북한에 위치한 평양이었다는 것이 20세기 근대역사학이 정립된 이래 철벽처럼 군림해온 학설 중 하나로 정확히는 대동강 북쪽 평양 일대에 있다가, 한 제국이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강 남쪽으로 거점(낙랑군 치소)을 옮겼다는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추정이 100여년간 건재해왔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이후 남북한 학계에서는 요동이 중심지였다가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공에 따라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나왔지만, 최종 입지가 평양이란 결론은 굳건했습니다.그런데 왕험성(왕검성)은 평양에 애초 없었고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에 있었다는 학설이 처음 공론화(2017년 제41회 전국고고학대회)되었는데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과 5세기 중국지리서 수경주의 왕험(검)성 고증 기록에 기대어 고조선을 연구해온 문헌사학자들은 당혹감에 빠졌지만 반면, 왕검성 요동설을 주장해온 재야 학자들은 “강단사학이 양심선언을 했다”며 반색하기도 합니다.그런데 지금의 평양이 위만 조선의 수도 왕험(검)성이라면 고고학적으로 위만조선의 유적, 유물이 나와야 하는 데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왕험성은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으로 중국은 요녕성 안산(案山)시 산하의 ‘태안(台安)현 손성자(孫城子)’가 위만조선의 왕험성 자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북한 지역까지 자국 영내라고 우기는 동북공정 학자들도 왕험성 자리는 요녕성 태안현이라는데,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만 “아닙니다. 왕검성 자리는 지금의 평양이고, 북한은 모두 중국땅입니다.”라고 우기는 블랙 코미디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도쿄대에서 일제강점기 평양 출토 낙랑 유물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도쿄대 소장품 분석 성과와 요동·요서의 고조선계 청동기, 토기에 대한 현장 조사를 토대로 논문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과 낙랑’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한나라가 요동 왕검성을 무너뜨린 뒤 평양에 낙랑군 치소를 따로 설치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으로 기존 왕검성 대동강 북안설과 요동요서를 포함한 고조선 강역 논란 등을 검토하고, 최신 고고자료를 종합한 결과 평양성은 왕검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근대 발굴이 시작된 이래 10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껏 평양에서 고고학적 물증이 안 나왔다는 게 근거로 “1905년 경의선 부설로 평양역 부근을 굴착한 이래 대성산성, 청암리토성 등 대동강 북안의 조사가 진행됐으나, 왕성으로 볼 만한 어떤 유적, 유물도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잣대는 왕성 성곽의 자취인데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 한나라에 복속된 남월국(베트남)도 왕성 성곽이 중국 문물들과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조선도 성곽 중심으로 실체를 검증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정 교수는 나아가, 위만조선이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의 나라이므로 연, 제의 유물문화가 확인되는 요동 유적 일대에서 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고고학적 견지에서,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은 폐기해야 하며, 왕검성은 요동에 존속하다 한나라 군현 설치 뒤 중심지가 대동강변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입니다.한나라가 서쪽에서 바다 건너 왕검성을 공격했다는 사기 기록과 고구려인이 왕검성을 평양성 일대로 묘사한 전언을 담은 수경주 내용을 정 교수의 설이 깡그리 부정하자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청암리 토성 등 발굴하지 않은 평양 성곽들이 남아 있는데, 물증이 없다고 단정하는 건 거친 해석”이라며 “요동에 왕검성이 속했다면, 역사적으로 확증된 한나라 요동·요서군 위치도 수정해야 하는데, 근거를 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으며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도 대회 토론문에서 “요동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면, 왜 수천리 떨어진 평양에 굳이 낙랑군을 두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국내 기존 사학자들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중국학자들이 왕험성을 요녕성 태안읍이라고 보는 것은 최소한의 학자적 자존심 때문으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1차 사료인 한서(漢書) 지리지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 조선현과 요동군 험독현을 각각 다른 곳으로 보고 있는데, 요동군 험독현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후한(後漢:서기 25~220) 때인 서기 181년에 태산(泰山)태수를 역임한 응소(應劭)는 요동군 험독현이 위만조선의 도읍지 자리라고 설명했으며 위만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세운 왕험성이 ‘요동군’ 소속이므로 지금의 평양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동북공정 추진 학자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험성(요동군 험독현)이 한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중국학자들은 중국역사지도집 이론서인 석문회편(釋文滙編)에서 “요동군 험독현만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지금의 ‘요녕성 안산시 산하 태안현 손성자(孫城子)’를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요동군 험독현 자리라고 비정한 것입니다. 한나라 때의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보다 수백 km 서쪽의 하북성 일대를 뜻하지만 지금의 요동이라고 쳐도 위만조선의 수도 자리에 세운 험독현이 지금의 평양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으로 왕험성=요동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학자들조차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강단사학계는 위만조선의 도읍지=낙랑군=평양일대라고 지속적으로 우기고 있는데 한국교원대학교의 송모 교수는, “평양 부근에 고조선 왕검성이 있었고, 그 뒤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왕검성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평양 지역인만큼 역시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다( 고조선의 위치와 중심지 문제에 대한 고찰,2010)에서 말했는데 합리적,순리와 같은 비학문적 용어를 남발하면서 평양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우기고 있으며 중국 동북공정에서도 왕검성은 요녕성 태안읍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이 아무런 근거 사료도 없이 없이 평양이라고 우기는 중이며 고고학대회에서 토론자로 나오기로 했다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화여대 오모 교수도 마찬가지로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는 왕검성임이 분명하며, 그 자리에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되었으므로, 평양 일대에서 발굴 조사된 낙랑군 관련 유적으로 통해 볼 때, 왕검성=낙랑군 조선현=평양이 자연스럽게 인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론이 평양설이나 이동설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오○○,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에서 주장하기도 합니다.또한 오모 교수는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앞의 문장은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데 위 문장을 1차사료에 근거해서 바꾸면 괄호 안의 내용처럼 되야 합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는 왕검성임이 분명하며, 그 자리에 낙랑군 조선현(요동군 험독현)이 설치되었으므로, 평양 일대에서 발굴 조사된 낙랑군 관련 유적으로 통해 볼 때, 왕검성=낙랑군 조선현=평양이 자연스럽게 인정(부인)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론이 평양설이나 이동설의 근간(을 모두 무너뜨리는 근거가)이 되는 것이다.”
중국의 사료는 물론 동북공정, 그리고 현재 평양지역의 고고학유적, 유물 발굴결과도 왕검성은 평양이 아니다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지만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1차 사료를 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왕험성은 요동’에 있었지만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절충설에 대해서 검토해보면 낙랑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의 고대 사료는 무수히 많지만 그러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문헌 사료는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중국 고대 역사학자인 신찬(臣瓚)은 “왕험성(요동군 험독현)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말했고, 당나라 때 주석가인 안사고(顔師古)는 “신찬의 설이 맞다”라고 동의했습니다. 낙랑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던 험독현보다 서쪽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왕험성이 지금의 요동에 있었다면 낙랑군은 최소한 그 서쪽 만주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험성이 요동에 있는데,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중국 고대 사료가 말하는 왕험성과 낙랑군의 위치이기도 합니다.
■사료에서 말하는 고조선의 수도 위치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위서 전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 년 전에 단군왕검 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 이라고 하니 중국의 요와 같은 시대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위서에는 단군조선의 도읍지가 아사달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또한 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요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리기 1천 5백년이 지나,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단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즉,고기에는 단군조선의 도읍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평양=백악산 아사달(궁홀산, 금미달=장단경=아사달 순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위서에서는 도읍지를 아사달이라고 하고, 고기에서는 첫 도읍지를 평양성이라고 한 것을 들어, 아사달과 평양성을 동일한 곳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지만 위서가 아사달을, 고기가 평양성을 첫 도읍지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 지역이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편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위서는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아사달만 거론하고 있는데 반해, 고기는 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단경=아사달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위서보다는 고기가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위서의 편찬자는 어느 시점에서의 정보를 근거로 도읍지를 아사달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즉,전체를 모르고 부분적인 사실만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에서는 별칭이 있는 경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백악산 아사달은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평양성이 아사달이라고도 불렸다면 이러한 설명을 덧붙였을 것라는 것입니다.평양이란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지형 을 가진 곳이라면 얼마든지 평양(포트)이나 양평 이라 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고려시대만 해도 지명이 어느 정도 굳어져서 고유명사화 되었을 것입니다.
일연이 이러한 지명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지, 아니면 훗날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러한 인식이 없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대의 평양을 자신이 알고 있는 평양으로 한정 해서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평양이라고하면 북한의 평양만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일연 역시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를 고려 당시의 서경,즉 평양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라 주장한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현재의 평양으로 받아 들여지고 일제와 강단 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는 것입니다.당시 일연이 주장한 서경이라 불리던 평양과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은 같은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열하일기의 박지원은 "평양은 대동강 부근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당서에는 봉황성을 왕검성이라 하기도 한다.당서 지리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성이라 하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봉황성은 요녕성에 고구려 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은 대동강 부근의 평양만 평양인 줄 알고 한사군을 압록강 안쪽으로 몰아넣고 패수를 한반도에서 찾고 있다"라고 한탄했는데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강단 사학계의 모습이기도 하여 씁쓸하기도 합니다.
고고학적 근거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만 년전에, 바이칼호 부근에서 신석기문명을 가지고 남하한 북방계 인종은 만주,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까지 흘러갔다고 합니다.이들은 요하문명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문명을 만들었고, 중국의 황하문명과 장강문명을 이룬 남방계와는 차별화 된 정체성을 지닌 문명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특히 서쪽이 사막이나 산맥으로 가로막힌, 황하문명이나 장강문명보다, 요하문명을 이룬 이들은 앞선 청동기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수한 청동기 문명를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가 바로 단군조선이라는 것입니다.(결코 중국으로부터 청동기 문명을 받아 들인 후진적인 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요하문명이 중국보다 먼저 청동기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지역에서 고대국가가 먼저 출현하는 것이 더욱 상식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문명이란 중심지에서 주변으로 흘러가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이러한 상식으로 볼 때 단군조선과 같이 당시로서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요하문명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서북부에서 발생하였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의 경우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도읍지로 해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세력이 힘을 키워 만주에서 요서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도읍지를 평양에서 요서로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 홍산문화 유적 부근(요서)에서 고조선이 발생하여 한반도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는 것이 더욱 상식에 부합하는 견해라고 판단 됩니다.그렇다면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인 평양성은 홍산문화 유적의 중심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단군조선은 첫 도읍지를 평양성에 두었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는 구절에서 고조선의 첫 수도 평양성은 홍산문화 유적 부근인 요하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단군 조선의 두번째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의 위치
●하북성 창려현
낙랑군 조선현으로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에는 25개현이 있었는데, 그 수현이 조선현이라는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진, 한 당시의 해안선을 고려하면 현, 창려로 비정되는 지역은 해수에 잠겨있어야 함으로, 당시 해안선을 고려하면 창려는 훨씬 내륙으로 이동되어야 합니다.
후한의 학자인 응소는 조선현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봉했던 곳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진서 지리지에도 “조선현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낙랑군의 수현인 조선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서기전 195년경에 연나라의 위만은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후 정변을 일으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세웠습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왕험성 혹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왕험성은 기자조선의 도읍지와 같으므로 낙랑군 조선현에 위치하였을 것입니다.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다. 물이 험한 것에 의지하므로 험독 이라고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사기의 주석에서 서광은 험독현이 창려에 있다고 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하북성 창려현에 있었다고 본 것으로 창려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므로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갈석산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인데 지금의 요서지역으로 윤내현 교수님은 북대하에서 발굴된 고대의 궁궐터를 왕험성의 유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고조선의 한군현 위치
위서에 "조선현은 전한과 후한 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폐지되었다. 서기후 432년에 조선현의 주민들을 비여현으로 이주시켜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당하자 북위가 조선현을 비여현으로 옮기고, 북평군에 소속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비여현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즉, 조선현의 원래 위치가 난하의 동쪽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난하를 중심으로 창려지방에서 조선현 즉, 아사달과 낙랑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이 옮긴 장단경의 위치
◈유주의 당장경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세우자 단군조선은 그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에서 장단경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허목의 미수기언에는 장단경을 당장경이라고 표시하였으며, "유주에 당장경이 있었으니 고려사에서는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주는 창려의 서쪽에 있슴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즉. 단군조선이 도읍지를 옮긴 것은 힘의 원리에 의해 기자조선에 의해 밀려났기 때문으로 기자조 선이 도읍한 곳은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악산 아사달은 낙랑군 조선현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도읍지에서 단군을 밀어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며 기자가 서쪽으로부터 왔으므로 단군조선은 동쪽으로 옮겨갔을 것입니다.
◇대능하 금서시 설
중국의 고고학자 복기대는 대능하 유역을 주목했는데 조양 부근에 금서시가 있는데 1997년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에 있는 고 성터에서 임둔태수장이라고 쓴 봉니를 발견합니다.금서시는 지금의 호로도시(중국명;후루다오시)로 서요녕성 서쪽에 위치하는데 복기대는 "봉니와 함께 수습된 유물들에 대한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제 3 기층의 제 2단에서 토착문화(고조선)로부터 한문화로 크게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지배계층이 사용했던 유물이 많이 수습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 여아가 태집둔 소황지 지역에서는 제 3기층 후반기인 중국의 전한시대에 와서 한의 지배계층이 많이 이주하여 거주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즉,이 지역에서는 토착문화인 고조선문화가 있었는데 그 후 한문화가 대거 유입되었다는 것입니다.부근의 고분에서는 고조선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고조선의 영역이 어느지점에까지 이르렀는지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양 인근 본계시 설
윤내현 교수는 험독은 검독을 의미하며, 검독은 조선의 옛 도읍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리고 이에 터잡아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두 곳의 후보지를 물색하였는데 요사 지리지에 집 주회중군은 지금의 심양시 동남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윤내현은 심양시 동남쪽에 있는 본계시를 지목했는데 본계시에는 조선령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대청일통지에 험독 옛 성이 광녕현 동남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릉하 동부 연안에 있는 지금의 북진 근처로 윤내현의 고증에 따르면 장단경은 지금의 본계시나 북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단경 위치에 대한 결론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밀려서 비록 도읍지를 옮겼지만, 그 도읍지가 대능하 유역이나 요하 유역 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낙랑군의 위치도 요서지역에 위치해야 한다든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단군왕검 멸망에 대한 추론
고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장단경에서 다시 아사달로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표현을 살펴보면 “장단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이 장단경에 서 멸망하지 않았나하는 추론을 해보게 합니다.단군조선이 멸망한 후,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단군의 추종자들이 옛 본거지로 돌아왔고, 단군의 사당을 지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따라서 단군조선은 장단경에서 멸망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진개의 침략에 의한 고조선의 수도 이동설
서울대학교 교수 노태돈은 연나라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지금의 요동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B포, 서기전 312-279년) 때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고 땅 2천여리를 차지하였으며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는 기술이 있습니다.만번한은 행정구역인 요동군에 속해 있는 문현과 번 한현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며 요동군은 중국의 동북변경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서, 원래는 만리장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사실상,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진개가 빼앗은 땅은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에 위만이 망명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패수 동쪽에 진나라의 빈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국경 방어의 편의를 위해 국경 부근에 살고 있던 고조선 주민들을 소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진개의 이 공격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진개에 의해 침탈되었다거나 위협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도읍지를 옮긴다는 것은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도읍지를 옮겼다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한데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데 고조선(기자조선)의 도읍지는 위만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낙랑군 조선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왕성을 빼앗아 한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는데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갈석산이므로 왕험성은 갈석산의 동쪽지 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들은 모두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서기전 24세기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 부근에서 나라를 열었으며 첫번째 도읍지인 평양성과 두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은 모두 홍산문화 유적 즉, 요하에 근접해 있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지에서 나라를 일으켰다가 나라가 커지면서 방어에 편리한 산성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이는데 백악산 아사달은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다가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되었으며, 후에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는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 갈석산 동쪽,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기전 12세기에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단군조선의 근거지를 장악하고 기자조선을 세우자, 단군조선은 장단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장단경은 지금의 대능하 또는 요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조선의 적통을 두고 대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후한의 왕부가 편찬한 잠부론에 "옛날 주나라 선왕 때 또한 한 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에 가까웠다. 옛 시에서 말하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군 사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노래했다.그 후 한(후)나라 서쪽도 역시 성이 한이었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해서 바다 가운데로 옮겨 거주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후는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위만에게 정벌당한 서쪽의 한이라는 성을 가진 나라는 기자조선을 의미합니다.이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상당기간 공존하였음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무엇이 역사적 진실이던간에 우리 한민족의 시원으로 여겨지는 단군조선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지워지고,강단 사학자들에 의해 훼손되어 우리 이후의 세대들에게서는 단군조선이 역사가 아닌,신화가 되거나 아예 지워질 수도 있기에 중국과 국내 강단 사학자들과의 전쟁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우리가 70여년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해온 사이 고대 역사는 찢기고 상처 입은채 지워져가고 있기 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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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漢)전쟁·최후의 왕험(검)성 전투 그리고 고조선의 패망_역사학자들이 비정한 한사군 실제위치와 단군조선를 계승한 부여의 탄생 (0) | 2023.11.20 |
일제 어용사가들이 왜곡한 낙랑군 재평양설_낙랑은 고조선 문화이다! (0) | 2023.11.18 |
우리 고대사에 기자조선은 없었다!_기자조선의 허구성과 5천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0) | 2023.11.17 |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_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0) | 2023.11.16 |
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 (0) | 2023.11.03 |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일까?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를 찾아라! (2) | 2023.11.02 |
고조선 단군왕검 신화에 대한 역사적이면서 매우 사실적인 해석 (0) | 2023.11.01 |
고조선의 건국과 탄생_역사학자들이 본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선 및 최대 영토 (0) | 2023.10.28 |
중국 동북공정과 국내 주류사학자들에 의해 지워진 단군조선_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잠든 한민족 고대사 (0) | 2023.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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