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어용사가들이 왜곡한 낙랑군 재평양설
낙랑은 고조선 문화이다!
우리 한민족의 고대사는 중국의 동북공정 뿐 아니라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일제의 가르침을 신성처럼 떠받드는 일제 어용사가들에 의해 확대되어 현대 국사 교육에 활용되어 오고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낙랑군 재(在)평양설의 경우 일제 때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중국 한서 지리지에서 부터였는데 한서 지리지 저자 반고(32~92년)가 낙랑군의 위치를 아리송하게 만들어 놓은 데서부터 시작됐지만 결정적으로는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466?~527년, 북위의 지리학자)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이후 낙랑군 위치문제에 대한 논쟁이 세기와 세기를 거듭하면서 계속돼 왔으며 조선시대에도 대체로 낙랑군 재평양설을 신봉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낙랑군 재평양설은 일제의 조선 침략 책동의 산물
하지만 낙랑 문제가 오늘날처럼 첨예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일제의 조선 말살책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말살하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제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식민사관을 확립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환으로 현재의 평양시 낙랑구역 토성을 비롯한 서북한 일대의 고대 유적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거기에서 드러난 유물들을 ‘한식 유물’이라고 단정하면서, 그것을 기초자료로 한나라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해 냈습니다. 그들은 한나라가 낙랑군이라는 식민지를 두고 400년 동안이나 지배했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명은 ‘한사군’ 특히 낙랑군 설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왜곡하고 우리나라 역사가 외세의 지배와 간섭, 외세의존과 굴종의 역사로 점철된 것처럼 묘사하기에 이릅니다.일제의 어용학자들이 고심 들여 체계화한 낙랑군 재평양설은 세 가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첫째, 오늘날 요동지역은 당시 고조선 땅이 아니라 한나라 요동군이 설치돼 있었으며, 고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내에 국한돼 있었다. 둘째, 낙랑 무덤은 한나라의 무덤양식이다. 셋째, 낙랑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한식 유물이다. 이상의 세 가지 점에 비춰볼 때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이상이 낙랑군 재평양설의 논리구조이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오늘날 요동지역은 고조선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핵심적 토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고조선-한나라 전쟁 이전 요동군의 진짜 위치
낙랑군 재평양설의 허구성을 밝히는 중심고리는 고조선-한나라 전쟁 이전 요동군의 진짜 위치 문제입니다. 일제가 조작해내고, 지금까지 횡행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은 연, 진, 한초기 시대의 요동군이 오늘날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너지면 낙랑군 재평양설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이것이 낙랑군 재평양설의 허구를 푸는 첫 번째 열쇠로 많은 사람들은 요동군이 처음 설치될 당시부터 오늘날의 요동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고조선의 영역을 압록강 이남지역에서 찾은 견해에 의하면 진·한대 요동은 현재 요하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해하며, 또 고조선 영역을 청천강 이남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요동의 위치는 요하 이동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요동군이 현재의 요동지역에 자리 잡게 된 것은 고조선-한나라 전쟁으로 고조선이 망한 이후의 일이고, 연, 진 시기 이래 한나라 초기까지 요동군은 현재의 요동지역이 아니라 난하 부근의 산해관 일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요동군이 처음 설치된 것은 연나라 때로 기원전 3세기초 연나라는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군 등과 함께 요동군을 설치했습니다.(사기 권 110 흉노열전).이 때 처음 설치된 요동군은 요수 동쪽이라는 지명에 기초하고 있는데, 기원전 3세기 당시 요수는 지금의 난하이므로 당시 요동군의 위치도 난하(요수)의 동쪽 가까이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요동군의 위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려면 연나라 장성과 요동군 사이의 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 좋은데 연나라가 장성을 쌓고 그 일대에 새로 설치한 5개 군 가운데서 요동군이 제일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즉 연나라 장성 끝 부근에 요동군이 설치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 장성의 동쪽 끝(동단)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갈석에 있었습니다. 이 점은 만리장성의 폐허 위에 다시 장성을 복구한 진(晉. 265~420)나라 당빈의 활동내용을 전하면서 ‘온성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고 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진서(晉書) 권 42 당빈열전). 이것은 수경주를 비롯한 다른 기록들에도 나오는데 만리장성 동쪽 끝이자, 연장성의 동쪽 끝 지점인 갈석은 지금의 산해관 지방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근래 이 일대에서 새롭게 발견된 진, 한대의 건축유적에 의해 확증됐습니다. 최근(1982~1984년)에 산해관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요녕성 수중현 만가향에서 2개의 큰 궁전급 유적이 발굴됐는데 하나는 갈석궁(진시황의 갈석 행차 때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문제의 갈석 행차 때 건설한 망해대 유적으로 확인됐습니다. 연나라 장성의 동단 갈석이 지금의 산해관 일대였던 만큼 장성의 동단에 위치했던 연나라 시기 요동군 역시 난하 동쪽 산해관 일대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연나라 때 처음 설치한 요동군은 진나라, 한나라 초기 시기에도 산해관 일대에 붙박여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의 동단 갈석이 있는 산해관 일대는 진나라 시기에도 요동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이를 통해 확증할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 축조를 직접 책임지고 지휘한 몽념은 자기가 쌓은 만리장성이 ‘임도에서 시작해 요동에 이르렀다’고 말했고, 사기의 저자도 진나라 대신 이사 등이 갈석에 가서 그곳 비석에 2세 황제의 조서를 새겨놓은 사실을 전하면서 ‘요동에 갔다 돌아왔다’고 써 놓았습니다.
▣요동지역은 고조선 땅
요동군은 전한 전기에도 여전히 산해관 일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진(秦)나라 말기 혼란한 정세를 이용해 연나라 귀족들은 연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기원전 206년에 항우는 이를 제압하고 둘로 나눠 ‘연국’과 ‘요동국’을 세웠는데, 이 요동국은 오늘의 옥전지방으로 비정되는 무종에 도읍한 나라였습니다(사기 권 16 전초지제월표) 이것은 한나라 초기의 요동(국)이 산해관 안팎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195년 로완의 반란사건과 관련된 사기의 기사나 기원전 135년에 있었던 요동 고묘 화재사건과 관련된 한서의 기사를 분석해 봐도 같은 결론에 이르는데 제반 사실은 연, 진 시기 이래 전한 전기에 이르기까지 요동군이 오늘날 산해관 일대 만리장성 동단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줍니다.위만조선 시기 한나라의 요동군이 산해관 일대 만리장성 동단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으로 되는 패수가 산해관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산해관 동쪽 국경으로 될 만한 강은 오늘날의 대릉하뿐입니다. 그러므로 패수는 곧 대릉하이며, 대릉하 동쪽 지역은 고조선의 땅이었습니다. 대릉하 이동지역이 고조선 땅이었다는 것은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험독현은 오늘의 북진 동남쪽에 있는 요동군 소속 현으로 대릉하 동쪽, 요하 서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후한의 응소(?~ 204년?)는 이 험독현에 대해 주석하면서 험독현은 ‘조선왕 만의 도읍’(한서 권 28 지리지)였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왕 만의 도읍이라는 것은 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차지하기 이전 후국 당시의 도읍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색은의 저자가 응소의 이 주석을 인용하면서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옛’자를 첨부했던 것입니다.요동군 소속의 험독이 만의 도읍이었다고 한 응소의 주석의 의미는 첫째, 패수 동쪽에 있던 요동군 험독 지역이 고조선 멸망 이전까지는 한나라 땅이 아니라 고조선 땅이었으며, 둘째, 요동군은 원래 오늘날 요동지역에 처음 설치됐던 것이 아니라 대릉하 서쪽지역에 설치됐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어느 때에 패수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것은 고조선과 한나라 국경선인 패수는 대릉하라는 것도 확인해줍니다. 응소는 후한 때 사람인데, 그 당시에 요동군이 과거 고조선 때에는 고조선 땅이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요동 땅은 과거 고조선 땅이었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공유돼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요동지역이 과거 고조선 땅이었다는 것은 수없이 많이 발굴되는 그 지역 유적유물들을 통해서도 확증되는데 심양 정가자와 6512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잔줄무늬 거울, 비파형동검 등 고조선식 유물을 통해 이 지역이 후조선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개현(개주시) 일대에 고인돌 무덤이 밀집돼 있고 개현의 석붕산에는 굉장히 큰 특대형 고인돌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개현 일대가 고조선 당시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던 고장으로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대련지역에서 발굴된 강상 무덤과 누상 무덤은 고조선의 순장무덤으로 확증됐습니다.이처럼 수없이 발굴되는 요동지역의 고대 유적유물들은 이 지역이 고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조선 멸망 직후의 낙랑군의 위치
고조선-한 전쟁 이후 한 무제는 요동군(당시 요동군은 대릉하 서쪽지역에 있었음) 바로 이웃에 새로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설치 당시 낙랑군은 패수(대릉하) 바로 동쪽 요동지역에 있었습니다. 낙랑군이 평양지역이 아닌 요동지역에 설치됐다는 것은 그 소속 현들의 위치를 따져봐도 명백합니다. 낙랑군 소속 현들 중에 패수현, 열구현이 있는데, 이는 패수와 열수에 설치됐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낙랑군의 속현인 패수현은 패수 근처에서 찾아야 하며, 열구현은 열수(요하) 근처에서 찾아야 합니다. 패수와 열수는 한반도가 아닌 요동지역에 있는 강이므로 당연히 낙랑군 역시 요동지역에 설치됐다고 봐야 합니다.낙랑군은 처음 설치된 이후 요동군의 동천(기원전 75년경)으로 위치를 변경하게 되는데 낙랑군과 현도군은 자기 군의 많은 지역들을 요동군에 자리를 내주고 동쪽으로 밀려나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랑군은 여전히 요동지역에 있었습니다. 이는 여러 역사자료에 의해 확인되는데 기원 후 30년에 후한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파견해 낙랑군에서 일어난 왕조의 폭동을 진압한 일이 있는데, 이 때 왕준이 거느린 군대가 폭동군을 치면서 ‘요동에 이르렀다’고 한것 입니다. 이것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데 당나라의 두우는 통전 권 178유수조의 주석에도 원도(현도), 낙랑 등 군들은 다 ‘지금의 요수(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썼습니다. 당나라의 이현 역시 왕조의 폭동에 대해 주석하면서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썼는데 이것들은 낙랑군이 요동군 동천 이후에도 여전히 요동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제반 역사적 사실들은 낙랑군 재평양설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조작해낸 소위 ‘평양 낙랑유적의 중국적 성격’을 신봉하고, 낙랑군 재평양설을 금과옥조로 내세우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낙랑무덤에서 몇 몇 중국산 칠기, 청동기가 나오고 중국 출신인물의 이름을 새긴 벽돌이 나왔다고 해 낙랑문화가 한나라식(중국식) 문화라고 주장했고, 이것들을 낙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내세웠지만 해방이후 낙랑 무덤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일제는 300여기 발굴했지만, 해방이후 북한에서는 3000여기의 낙랑무덤을 발굴함)과 연구를 통해 낙랑무덤의 형식 변천과 구조형식, 출토유물에서 중국 한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평양일대 낙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 낙랑유적에서 나무곽무덤(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기원전 1세기말)의 기원은 이미 후조선 때인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정가자와 6512호 나무곽무덤)의 장례 풍습을 계승해 평양일대에서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지배적 무덤 형태로 됐기 때문에 중국의 한사군 설치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무곽무덤(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기원전 1세기말), 귀틀무덤(기원 전 1세기말, 기원후 1세기초~1세기말, 2세기초), 벽돌무덤(2세기초~2세기말)은 서로 계승관계에 있으며 또한 평양일대 낙랑유적에서 주목할 점은 1세기 전반기부터 고구려식 돌각담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2~3세기에는 벽돌무덤과 함께 고구려 돌칸 흙무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이처럼 평양일대의 나무곽 무덤은 그 기원에서부터 중국(한나라)과는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생겨났을 뿐 아니라, 무덤의 형식 변천의 시기와 내용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에서는 나무곽무덤(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기원전 1세기말)- 귀틀무덤(기원 전 1세기말, 기원후 1세기초~1세기말, 2세기초)- 벽돌무덤(2세기초~2세기말)의 과정을 거쳤으나, 중국(한나라)에서는 나무곽무덤(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지방에서는 나무곽무덤은 공심전무덤과 교체되거나 공존하다 전한 중기(기원전 134년~기원전 48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는 전한 전기(기원전 206년~기원전 134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공심전무덤이 지배적인 형태로 됨) - 공심전무덤(전한 전기에 지배적 형태) –벽돌무덤(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지배적 형태)의 과정을 거쳤습니다.이렇듯 평양일대 낙랑무덤의 나무곽무덤의 기원이 한나라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후조선 시기에 발생한 나무곽 무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한사군 설치당시 중국에서 지배적 무덤형태였던 공심전 무덤이 평양일대 낙랑무덤에서는 단 한기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또한 평양지방 벽돌무덤의 출현 시기가 중국보다 무려 2세기 이상 늦게 나타나는데 2세기부터 평양일대에서 고구려의 돌각담무덤 양식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양자 사이의 정치적 문화적 차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평양일대의 낙랑고분은 중국 한나라식 묘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조선식 묘제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이것은 평양일대에는 낙랑군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나라와는 독립적인 독자적 정치세력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무덤의 구조 형식을 통해 본 평양일대 낙랑무덤의 성격
무덤의 형식 변천과정과 함께 구조 형식 또한 중요한데 일제 어용사가들은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을 ‘한식무덤’으로 규정해 놓고 낙랑군 재 평양설의 기초 자료로 써먹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결론적으로 낙랑무덤은 무덤의 형식 변천에서 뿐 아니라 구조형식 역시 중국 한나라 것과 달랐습니다.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의 구조형식은 말할 것 없고 벽돌무덤의 구조형식 역시 중국의 것들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으며, 고유한 민족적 형식과 매장풍습을 담고 있습니다.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구조 형식 역시 중국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첫째 무덤 칸의 배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평양의 낙랑무덤은 기본적으로 외칸 무덤인데 반해 중국의 무덤은 두칸 무덤과 여러칸 무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평양일대 벽돌무덤은 거의 모두가 궁륭식 천정인데 반해, 중국 벽돌무덤 천정은 기차굴식 천정, 무지개식 천정 궁륭식 천정들이 혼재하며, 그중에서도 기차굴식 천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무덤의 측선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은 모두 밖으로 휜 호형인 반면, 중국의 벽돌무덤은 거의 모두가 직선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무덤칸 벽체의 축조방법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평양일대는 아주 작은 무덤 일부를 제외하고 벽돌을 눕히고 모로 세우는 것을 반복하면서 1~1.5m 높이까지 수직으로 쌓고, 그 위부터는 점차 안으로 기울어지게, 벽체를 쌓았지만 반면에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벽체를 벽돌을 눕혀서 수직으로 올려 쌓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무덤칸의 위치도 달랐는데 평양에서는 무덤칸이 반지하인데 반해, 중국에서는 거의 모두가 지하에 파묻혔습니다. 여섯째 중국의 벽돌무덤은 경사진 무덤길이 붙어 있는데, 평양의 벽돌무덤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이처럼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은 구조 형식에서 중국 한나라 시대의 무덤형식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같은 재료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무덤의 구조형식이 다르면 매장풍습이 다릅니다. 매장풍습의 차이는 서로 다른 생활풍습과 혈통의 차이를 반영하며 따라서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은 한나라의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반대로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은 중국 한나라와 다른 민족적 전통과 혈통, 문화와 매장풍습을 가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평양일대 낙랑무덤의 유물
평양일대 나무곽무덤에서는 좁은 놋단검, 좁은 놋창끝, 놋과, 쇠단검, 쇠창끝, 쇠장검, 농공구 형태 무기, 쇠갑옷, 질그릇, 마구와 수레 부속 등이 유물들이 출토됐습니다. 이 유물들중 좁은 놋단검, 좁은 놋창끝, 놋과는 후조선의 고유한 무기들이며, 쇠단검, 쇠장검 역시 조립식으로 제작돼 있어, 중국식과는 다른 고조선의 무기 제작기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쇠갑옷은 당시대 중국의 한나라 무덤에서는 발굴된 바 없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갑옷입니다. 그리고 나무곽 무덤에서 나온 질그릇들은 회분형 단지, 배부른 단지, 회백색 단지, 회색단지들인데 모두 중국식 질그릇 형식과는 다른 고조선의 고유한 질그릇 형식을 계승한 것들입니다. 또한 마구와 수레 부속 역시 중국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나라 시대 무덤에서 반드시 나오는 나무 또는 흙으로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도용과 목용들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반량전과 오수전과 같은 명전들 역시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나무곽무덤에서 나온 대부분의 유물들은 중국의 전통과 문화와는 전혀 관계없이 고조선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반영한 조선식 유물들로 밝혀졌습니다.평양일대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에서 나온 유물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귀틀무덤은 나무곽 무덤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서 두 무덤 사이에는 유물 갖춤새, 유물의 종류와 생김새 등에서 계승성이 많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좁은 놋단검, 좁은 놋창끝, 쇠담검(좁은 쇠단검)과 쇠창끝(좁은 쇠창끝), 쇠갑옷, 농공구 형태의 무기 등이 양 무덤에서 다 같이 나오는데 질그릇 역시 나무곽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분형 단지와 배부른 단지, 회백색 단지, 회색단지 등이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밖에 마구와 수레부속, 띠고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몸치레거리에서도 계승성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틀무덤의 유물들은 고조선의 고유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중국 한나라 식 유물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평양일대 벽돌무덤에서도 마찬가지로 벽돌무덤과 귀틀무덤 사이에도 유물갖춤새, 유물의 종류와 생김새 등에서 계승성이 확고히 드러납니다. 만약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있었다면 이와 같은 근본적 차이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조선 유민집단이 창조한 조선식 낙랑문화
일제 식민지 어용사학자들이 낙랑고분에서 중국식 유물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대다수 조작과 왜곡의 산물이며 당시의 정세와 상황에서 우리나라 고분들내에서 일부 중국식 유물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사이에 중국내의 사회적 혼란으로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망명해왔으며,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고조선 멸망이후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의 다양한 교역과 문화교류가 확산돼, 중국식 유물들이 우리나라 각지에서 발굴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중국식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낙랑군 재평양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보다 중요한 것은 평양일대 낙랑무덤의 전체적 성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해방이후 북한에서 평양일대 낙랑고분에 대한 전면적 발굴과 조사 작업을 벌였는데 그 결과 평양일대 낙랑고분은 중국식 고분이 아니며,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절대 다수의 유물들 역시 중국의 것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한 조선식 유물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무덤의 주인공들은 중국인들이 아닌 고조선 유민집단이었습니다. 고조선 멸망이후 한나라는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압록강 북쪽 지역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라가 진출하지 못한 옛 고조선 영역에는 황룡국(고구려 서남, 압록강 중하류 지역), 안평국(애하하구를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봉성현 동부, 남쪽에서는 평북 의주 신의주 용천 피현등지), 낙랑국(평양을 중심으로 서북한 일대), 맥국(강원도 중부 영서지방), 예(오늘의 강원도 북부지역), 남옥저(오늘의 함경남도지역) 등의 소국들이 성립됐습니다.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일대에는 최씨를 왕으로 하는 낙랑국이 수립됐습니다.
낙랑국은 기원전 1세기 초에 성립해 기원 전후 수십년동안 그 국력이 현저히 강화되고 영역도 확장되어, 오늘날 한반도 중북부지역(오늘날 강원도 영서지방 북부일대)으로까지 영역이 확장됐지만, 기원후 37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최씨 왕조는 멸망했고, 평양일대는 고구려의 후국으로 조선 후국이 성립됐다가 고구려에 흡수됐습니다. 이후 낙랑국은 살수이남지역에서 그 명맥이 유지됐습니다. 평양일대에서 발생한 낙랑문화는 중국식 문화가 아니라,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사이에 고조선 유민들이 평양일대에서 창조한 지방적 특색의 문화로서 선행한 고조선 문화를 직접 계승 발전시킨 문화이며, 고구려 남방진출에 따라 고구려에 흡수된 문화이기도 합니다.고구려는 기원후 37년 최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평양지역을 차지하고 조선 후국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평양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됐으며, 고구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됐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동천왕이 기원 247년(3세기 중엽) 평양에 천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삼국사기의 기사에서 나온 평양이 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삼국사기에 명백히 ‘평양은 선인왕검(단군)의 택’이라고 나와 있듯이 오늘의 평양임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원 후 3세기 중엽경 평양일대에 대한 고구려의 정치적 지배가 확고히 정착됐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를 뒷받침해줄 고고학적 발굴도 나왔는데 “北, 평양 외곽서 고구려 벽화무덤 발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최근 북한은 평양시 낙랑구역 보성리에서 기원 후 3세기 전반기 고구려 벽화무덤을 새로 발굴했는데 이 무덤은 지하에 돌로 무덤칸(묘실)을 만들고 흙을 씌운 외칸 돌칸흙무덤인데, 검은 색 안료로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평양 낙랑구역에서 3세기초 고구려 벽화무덤이 발굴됐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당시 고구려의 지배하에 확고히 장악돼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동천왕이 247년에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사실임을 보증해줍니다. 이 벽화무덤은 또한 평양지역에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증해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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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급상승!최수종 주연 고려거란전쟁 속 거란에 대해 알아보기 (0) | 2023.11.30 |
고구려 추모왕의 롤모델 부여시조 始祖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_잊혀진 부여왕국 두막루 (0) | 2023.11.22 |
고구려와 백제,발해는 모두 부여의 별종이다_고조선 계승국 부여 이야기 (0) | 2023.11.21 |
고-한(漢)전쟁·최후의 왕험(검)성 전투 그리고 고조선의 패망_역사학자들이 비정한 한사군 실제위치와 단군조선를 계승한 부여의 탄생 (0) | 2023.11.20 |
우리 고대사에 기자조선은 없었다!_기자조선의 허구성과 5천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0) | 2023.11.17 |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_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0) | 2023.11.16 |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_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 (0) | 2023.11.15 |
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 (0) | 2023.11.03 |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일까?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를 찾아라! (2) | 2023.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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