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를 찾아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일까?
패수 또는 패강(浿江), 패하(浿河)는 고대 상고사 고조선부터 한국사 문헌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강의 이름으로 패서 지방이나 패강진 등은 여기서 파생된 지명으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조선전(朝鮮傳)에 기록된 고유명사로 열수(列水)와 아울러 일찍이 중국에도 그 이름이 알려진 강이기도 합니다.그 위치에 대하여는 학설이 다양하며, 패수를 어디로 비정하느냐에 따라 고조선과 한 나라의 강역이 달라질 수 있어 매우 중요하기도 합니다. 또한 패수라는 이름은 시기별로 그 지칭 대상이 다른데 대략적으로 한반도 서북지역의 강으로 비정되나, 고조선대에는 주로 압록강 또는 청천강으로 삼국시대 이후로는 대동강이나 예성강 등을 말하기도 하고 고조선 때의 패수는 요하유역으로 볼 수 없고 청천강이나 압록강으로 봐야한다는게 일반적이다라는게 위키에 비정된 패수 위치에 대한 글입니다.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 명백히 나옵니다. “진나라에 뒤이어 한나라가 서면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고조선과 경계를 삼았다”고 밝혀놓았고, 또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해인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사신 섭하가 고조선의 우거왕을 회유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던 중 자기를 바래주려 나왔던 고조선의 비왕 상을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도망쳐 들어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한나라 초기부터 고조선 말기까지 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가 오늘날 어떤 강인가 하는 것은 후조선과 만조선의 강역을 정확하게 밝히는 문제이자, 고조선-한 나라 전쟁의 전쟁터가 어디인가를 좌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또한 고조선 붕괴이후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비정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패수의 위치비정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역사학자들이 들여다본 패수의 위치로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하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대동강에서 난하까지 대다수의 큰 강들은 모두 그 후보지에 올라있습니다. 패수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하려면, 후조선시기 서변(서쪽 경계)의 위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이후 고조선 연의 경계, 만조선 시기의 서변의 위치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패수가 압록강,청천강이라 주장하는 주류 사학자들
우선 위키에는 패수가 지금의 청천강이나 압록강이라 비정짓고 있는데 고조선은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된 이후 중국의 성장과 발전에 따라 서기전 2세기에는 패수라는 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의 한(漢)나라 초기 제후국인 연(燕)나라와 마주하게 되는데 당시 연나라의 위만이 경계인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망명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위만조선을 세우면서 이 위만의 조선에 대해 기록한 역사서가 사마천의 사기 중 조선열전입니다.조선열전을 통해 패수의 위치를 확인해 보면, 학계에서 위키에다가 패수를 압록강이나 청천강 등 한반도의 강이라는 주장이 명백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조선열전에는 중국 연나라의 위만이 동쪽으로 경계인 패수를 건너 고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했는데 만약 패수가 일제 식민사학자나 지금 학계의 주장처럼 압록강이나 청천강.대동강 등 한반도의 강이었다면 그 강들이 동에서 서로 흐르기 때문에 위만이 남쪽으로 건넜다고 해야 평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위만이 조선에 와서 도읍했다는 왕험성(평양)의 위치에 대해 사기의 주석서를 보면 신찬이라는 학자가 패수의 동쪽이라 했으므로 역시 위만이 동쪽의 조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왕험성이 요동군이나 창려군의 험독현이라고 주석했으므로 그곳이 만주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왕험성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는 학계의 주장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추종한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관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또한 한(漢) 무제가 서기전 109년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칠 때 수군대장 양복이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從齊浮渤海)’ 열구라는 곳에 상륙작전을 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지금 중국 산동성 해안을 따라 안 쪽의 발해만으로 들어가 톈진 부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일제 강점기에 쓴 패수고에서 이 구절의 발해 다음에 괄호 속에 황해라고 써넣어 사료를 조작했습니다. 발해와 황해는 별개의 바다인데 같은 바다로 만들어, 양복이 황해를 건너 대동강 입구의 열구(列口)로 왔다는 것이며 대동강이 열수(列水)라는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설을 추종하여 그 입구인 대동강 하구가 열구라는 허위 주장을 한 것입니다.
열수의 북쪽에는 열양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산해경을 보면 이 열양이 중국 연나라의 땅이라 했으며 그 동쪽에 조선이 있다고 했는데 즉 연나라의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왔다는 사기의 조선열전 기록처럼, 이 기록도 역시 연의 동쪽이 조선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약 이병도의 주장처럼 열수가 지금의 대동강이라면 그 북쪽의 열양은 연나라가 되는데, 그곳은 평양과 거의 같은 곳으로 또 조선이 되어야 하므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연나라의 열양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으며, 그 동쪽의 조선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패수에 대한 기본 사료인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패수 위치를 보하이(발해·渤海) 연안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를 더욱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 한서의 지리지 중 낙랑군 조를 보면 25개 속현의 이름과 각 현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렵습니다.게다가 낙랑군을 흐르는 패수,대수,열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어 이 강들이 한반도의 강인 것처럼 조작했는데 이 강들은 한반도에 있을 수 없음은 이미 밝혀졌습니다.그런데 한서의 지리지에 동북쪽의 유주(幽州)와 북쪽의 병주(幷州)에 속한 15개 군들을 보면 군 안에 도위를 따로 두어 군의 일부를 다스리게 했는데 그중 낙랑군을 제외한 8군은 모두 동부·서부의 두 도위를 두었으나 유독 낙랑군에는 동부와 남부도위의 둘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15개 군 중 왜 낙랑에만 남부도위가 있는 이유는 바로 군의 관할 지역이 특수하게 ‘「’ 형태여서 동부와 남부에 보조할 도위를 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낙랑군은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이 형태가 나올 수 있는 곳을 찾자면 톈진을 둘러싼 보하이의 서(북)안 지역 외에는 없습니다. 한반도에서라면 함경남도 해안에 있을 수 있으나 서해안에서는 이런 형태가 나올 수 없으니, 낙랑이 평안도라는 설은 틀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수경 권13의 누수인데, 습수라고도 하는 이 강은 지금의 융딩허(영정하·永定河)로서 베이징을 지나 톈진으로 흘러 바다(보하이)로 들어갑니다. 장안(張晏)은 이 습수와 그 지류인 습여수(선수) 그리고 열수(고하)의 세 강이 합하여 흐르는 곳이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했습니다. 패수 역시 낙랑군을 흐르는데 수경에는 “패수가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기록에 맞는 강을 찾자면 차오바이신허(조백신하·潮白新河)밖에 없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강은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는 것은 아니고 차오바이허(조백하·潮白河)의 하류의 흐름에 새로운 다른 강줄기를 만들어 붙인 이름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오바이허이며 또 거슬러 올라가면 상류는 바이허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이허 상류로부터 차오바이허를 거쳐 옛 물길로 흐르는 전체의 강은 하이허(해하·海河) 또는 구허(고하·沽河)로, 결국 패수는 위의 열수와 같은 강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낙랑은 텐진 해안이고 요동은 그 서북 쪽의 베이징 부근이었으며 한나라의 요동,현도가 베이징 부근임을 수경이 위와 같이 충분히 증거하고 있는데도 주류사학계에서는 지금도 패수를 청천강,압록강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의 위치
◐이병도가 주장한 패수 청천강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패수를 청천강에 비정했으며, 이를 사학자 이병도가 고고학적으로 고증,중국 계통 유물(명도전이나 철기 등)과 조선 계통 유물(세형동검 등)의 출토지가 청천강을 경계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병도는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의 흔적(연화보 - 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며 청천강설을 주장하는데 위의 지도는 이병도의 패수 청천강설에 따른 진과 고조선의 국경을 표시하고 있습니다.보통 청천강 설의 경우 연나라와의 경계를 청천강으로 여겨지고 진과의 국경선은 더 한반도 안쪽에 있다고 봅니다.그런데 만일 고조선과 한 나라의 국경선이 저리 된다면 대동강 이북에 왕검성(왕험성)이 있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기에 왕검성이 대동강 남안, 즉 낙랑토성 부근에 있었다고 해야합니다.
◑패수 청천강설에 따른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
패수 청천강설에 따른 한나라와 고조선(이 시점에는 이미 위만조선)의 국경 경게선을 표시한 지도로 당시 한나라는 먼 곳을 지키기 힘들어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어 패수를 경계로 했다 합니다. 패수 청천강 설에 따르면 패수는 청천강이니 국경도 청천강입니다.
●노태돈, 이종욱, 오강원의 패수 압록강설
노태돈 교수에 따르면 연진장성의 동단이 요하 이동까지 미쳤으므로 패수를 요하 이서에서 찾을 수는 없고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또한 진의 침식선을 청천강으로 보는데 연의 침식선은 천산산맥 일대로 보며 이 경우, 왕검성(왕험성)이 대동강 북안에 위치했다고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그리고 명도전을 비롯한 중국계 유물의 분포가 청천강을 경계로 하므로 청천강이 진나라와의 경계였다고 주장하며 또한 중국은 진나라 이후 한나라 때 경계를 후퇴하여 패수를 경계로 했는데 이때 패수로 비정할 수 있는 강은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패수 압록강설은 현재 남한 학계의 다수설이기도 합니다.
◎서영수, 박준형, 오현수, 조원진의 패수혼하설
혼하는 요하 바로 동쪽에 있는 강으로, 소요하라고도 불리는데 혼하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성해응(1760~1839)으로 연경재전집권 15 패수변에서 고조선의 패수는 혼하라는 것을 논증했으며 근현대에 들어서 남한에서는 서영수가 혼하설을 최초로 주장했으며 이후 박준형은 전한기의 기록을 근거로 혼하설을 주장하였는데 패수 혼하설은2010년대부터 학계의 대세로 떠올랐습니다.
◐북한 리지린의 패수대릉하설
패수 대릉하설은 리지린을 포함한 여러 북한학자가 주장한 설입니다.북한 학계에서는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대릉하설이 주류 학설이며 남한에서는 신용하가 이 설을 지지합니다. 패수 대릉하설의 경우
◐윤내현의 패수난하설
패수난하설은 국내의 윤내현이 주장한 설로 그에 따르면 난하가 고대의 요수이며, 패수라고 합니다. 이 패수난하설을 이덕일, 복기대, 김종서 등이 지지하고 있으며 이덕일은 조백하설을 덤으로 넣기도 합니다.이렇게 고조선과 한 나라의 국경 경계선으로 중요한 패수에 대해서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물론 고대에는 거주지 이동에 따라 옮겨 살기 이전의 명칭을 새로운 정착지의 지명으로 계속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고조선과 한 나라의 전쟁이후로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지명으로 패수는 특정한 하나의 강이 되기도 합니다.패수 대릉하설의 경우 부연설명을 하자면,연나라 소왕이 장수 진개를 보내 후조선 서쪽 변방을 치고 2000여리의 땅을 차지하고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지 한전에 인용된 위략에 나오는데 후조선은 이 전쟁의 결과 2000여리에 달하는 서쪽 영토를 잃고 만반한을 경계로 연나라와 접하게 되는데, 이 때 빼앗긴 2000여리의 땅은 당시 연나라의 2000여리는 오늘날의 길이단위와는 다릅니다.오늘날의 잣대로 계산하면 착오가 발생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압록강 또는 청천강까지 고조선이 후퇴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당시 연나라의 통치력으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지역을 장악 지배할 수 는 없었는데 그랬다면 연나라가 소왕이 죽은 후 다시 조그마한 나라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기원전 232년경 연나라가 존재하던 시기 진나라 사람 감라가 강한 조나라, 약한 연나라라고 한 것(사기 권 71 감라전),연나라의 마지막 왕 희의 아들 단이 자기 나라는 판도가 작고 국력이 약하다고 한 것(사기 권 86 자객전), 진나라 말기 농민전쟁을 계기로 기원전 209년에 연나라를 재건한 이전 연나라 귀족들이 고국을 회고하면서 연나라는 작은 나라였다고 한 것(한서 권 31 진승항적전)등은 연나라의 장성과 그에 따르는 동방에로의 영토 확장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나라가 압록강 청천강 까지 진출했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는데 당시 2000여리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반세기전에 소진이 당시 연나라 땅이 사방 2000여리에 해당된다고 묘사한 것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연나라 한변의 길이만큼의 거리를 난하 중류로부터 재어 보면, 당시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 땅은 난하 중류로부터 요하하류(서쪽 요양하계선)에 이릅니다.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고조선의 서변은 요하하류(요양하) 계선으로 후퇴했지만 연나라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해졌고 이때를 틈타 동호는 다시 빼앗긴 지역을 되찾고 기원전 273년 대지방(베이징 근처)까지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 때 고조선 역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유역까지 서쪽으로 다시 진출했으며 그 결과 패수가 연나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되면서 그 이후 진한 시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놓고 보면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어야 하며 한서지리지에서 만왕의 구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는 기사에서도 확인됩니다. 요동군 험독현은 현재 요하의 서쪽에 있으므로 만조선 시기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패수가 오늘날의 대릉하였다는 것은 요동고새와 패수, 열수의 상대적 위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역사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패수의 서쪽에는 한나라의 요동고새, 동쪽에는 고조선의 열수라는 강이 있었습니다. 즉 패수는 요동고새와 열수 사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 열수는 오늘의 요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요하가 고조선 말기의 열수였다는 것은 ‘요동성이 본래 오렬흘이었다’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요하를 일명 압록수라고도 한다’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렬이나 압록은 고대 우리말로 열과 통하며, 따라서 요하를 한 때 열수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진나라 시기 곽박은 방언의 조선 열수에 대해 주석하면서 열수는 요동에 있었다고 강조했고, 산해경에서는 패수가 ‘열도에 흘러든다’고 했는데, 이 ‘열도’를 열수의 하구의 충적지대(니토지대)를 말하며, 이는 열수와 패수가 하구를 가까이 하고 있는 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조선 말기 열수가 요하이고, 요동고새가 산해관일대에 있었던 만큼 그 사이에 있었던 패수는 대릉하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또 패수가 오늘날 대릉하라는 것은 패수에 관한 수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수경은 중국의 강줄기를 기술한 책인데, 요서 요동의 물줄기를 설명하면서 큰 강의 하나인 대릉하를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패수가 대릉하이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만약에 패수가 청천강이나 대동강이라면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기술하지 않은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강들은 중국 땅에 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술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또 수경에서 묘사된 패수의 강줄기의 모습을 놓고 볼 때 이에 부합되는 강은 대릉하 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패수의 위치가 오늘날의 대릉하라면 고조선- 한나라 전쟁의 주요 전쟁터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이며, 고조선이 패망한 이후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 설치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중국 산해경에는 "동해(황해)의 안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나라 이름을 조선 천독(하늘이 다스리는 나라)이라고 한다.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패수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학설을 의심하게 하는 기록이며 단채 신채호는 평양과 패수는 조선 문명상 중요한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1천여년간 그 본래의 위치를 상실하고 1천여리나 이사하여 한 작은 지방인 것처럼 알려졌다고 개탄해 마지 않았습니다.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고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고하면 이를 믿고,평양에 정전이 있다고하면 이를 믿으며,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하면 이를 믿어서,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숙신,예,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또 오라,영고탑,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아아,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에다 몰아 넣어서,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되,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며 열하일기의 박지원은 한탄하고 있습니다.화하족의 후예들은 동북공정으로 자신들의 땅이 아닌 곳도 자신의 땅이자 역사라고 우기는 판에 배달의 후예들은 선조들의 땅도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다며 중국에 갖다 바치는 만행을 저지르며 박지원이 한탄한 것처럼 싸워보지도 않고 우리 선조들이 누비며 지켰던 땅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선조들이 명명백백하게 우리의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뭐가 무서워 의심하고 지레짐작으로 원래부터 대국이었던 중국땅이라 하는 것인지,고조선과 한 나라의 경계 패수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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