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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_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by 마음heart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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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

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한민족의 고대국가를 형성한 고조선은 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이라는 세 왕조가 있었는데, 이를 삼조선이라고도 합니다. 기원전 15세기경 단군조선은 내부적 모순의 축적으로 약화 몰락하고, 후조선이 성립하는데 후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의 영토였던 부여, 구려, 진국 등이 분리 독립해 나가 영토가 축소됐지만, 왕조 성립 이후 신속히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의무려산맥 서쪽지역(요서지역)으로 광범히 진출해 난하 중류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연나라 소왕 때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요하 서쪽 지역 2000여리의 땅을 연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가 약화됩니다. 후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 때에 이르러 서변의 제후로 있었던 위만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194년으로 이로부터 후조선 왕조는 만조선 왕조로 됩니다.

BCE 108년 당시 고조선 세력도,위 지도에서 고구려라고 표시된건 삼국시대의 고구려 왕조가 아니라 예맥족의 원고구려 집단이다.

만조선 혹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부르는 고조선의 두번째 세습 왕조(기자조선은 허구라 삼조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위만(衛滿)을 시조로 하며, 사기 조선전(朝鮮傳)과 한서 조선전 등의 중국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대략 기원전 194년에서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했습니다.지금의 베트남 일대에 조타가 현지인에 동화되어 세웠다가 한무제에 의해 멸망한 남월과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성립 정황과 멸망 과정이 비슷하다고 합니다.만조선의 시조인 위만(衛滿)은 연나라(燕) 출신의 사람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사기에서는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 나라에 반(叛)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조선은 비왕의 뒤를 이어 평안도 지역에 정착한 준왕의 시대로, 위만은 요동 태수(遼東太守)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외신(外臣)의 직함을 받았습니다.이에 대해서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로 취수(패수)를 건너 준에게로 가서 항복했다. 그가 준왕을 설복해 서쪽 변경에 살면서 옛 중국의 망명자들로 조선의 울타리를 삼겠다고 하니 준이 그를 믿고 박사벼슬을 주고 규를 주었으며, 백리땅을 봉토로 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만은 원래 연나라에 살다가 진승오광의 반란으로 중국 내부가 소란스러워지자 지지자들을 끌고 고조선 땅으로 망명했는데(기원전 209년) 후조선으로 온 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후왕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변방 백리 땅을 통치하는 권력을 갖게 됐습니다.

위만이 후조선에 망명하고 준왕에게 받은 서쪽 변경 백리 땅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그 위치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하는 ‘진고공지 상하장’ 즉 패수(대릉하) 동쪽, 요양하 서쪽 지역이며, 후국 수도는 험독에 두었다. 만이 후조선 준왕으로부터 받은 후국 수도인 험독의 위치가 나온 역사책은 한서 지리지로 요동군 험독현 조에는 응소가 “조선왕 만의 수도이다”라고 했다는 주석이 붙어 있고, 사기색은(당(唐, AD 618 -907)나라 시대 때 유명한 사학자인 사마정(司馬貞)이 쓴 사기 주석서)에는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조선 왕의 옛 수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왕의 옛 수도라는 것은 고조선(후조선)의 왕으로 되기 전 후왕(제후 왕)으로 있었을 때의 후국(제후국)의 수도라는 의미로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요동군 험독현으로 된 지역(요양하 서쪽 지역)이 후조선 말기에는 중국이 아닌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었고, 연나라 당시, 그리고 진나라 한나라 초기의 요동군과 훗날 고조선 멸망 이후의 요동군의 위치가 달랐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덧붙여 만이 후조선 왕으로부터 받은 변방 백리 땅이 요하 이서 패수(대릉하) 이동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패수가 대릉하라는 것을 말해주는 유력한 증거이기도 합니다.위만은 후조선 서쪽 변경 100리 땅을 봉지로 다스리면서, 10여 년 동안 자체적인 정치,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구축하며, 후조선을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드디어 기회가 왔는데 기원전 195년 한나라에서는 연왕 로완의 반역사건이 일어났는데 한나라 중앙정부는 주발을 총지휘자로 하는 중앙토벌군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토록 했습니다. 중앙토벌군이 연왕 르완이 다스리던 지역(옛 연나라 땅으로 대릉하 서쪽지역)으로 물밀 듯 들어오자 연나라 땅은 전쟁터로 변하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살길을 찾아 후조선으로 넘어왔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사람을 시켜 후조선의 왕 준에게 “한나라 군대가 10개의 길(방향)로 쳐들어오니 내가 가서 왕궁을 지키겠다”고 거짓보고를 하게 하고 많은 무력을 이끌고 불의에 왕검성(평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후조선 준왕은 한나라 대군이 접경지대인 연나라땅에 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군대가 임의의 시각에 이웃나라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에 허위보고를 믿고 위만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오는 것에 대해 방심하고 맙니다. 위만의 기병대는 며칠 안에 왕검성에 당도해 공격을 개시했으며 방어대책을 치밀하게 세우지 못한 준왕은 허망하게 왕검성을 내주고 부랴부랴 몇몇 신하들과 호위군사들을 이끌고 배에 올라 대동강으로 내려가서 바다길로 진국의 마한 땅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리하여 만은 힘들이지 않고 후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만왕조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때가 중국 한나라 효혜제 1년(기원전 194년)으로 위만은 중국어(상고 한어)와 고조선의 언어에 능통했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 주위의 진번국,임둔국,옥저 등을 복속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그렇게 큰 전투 하나 없이 왕검성을 차지한 위만은 자기를 왕으로 선포했으며 이로써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두 번째 왕조인 후조선은 종말을 고하고 만왕조가 수립됐습니다. 만왕조는 수도를 왕검성에 두었으며, 후조선 시기의 통치체계와 질서를 기본적으로 그대로 유지했는데 만은 기존 정치세력들 가운데서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나라의 정치정세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무력을 강화 발전시켜 나갔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사방 수천리나 되는 큰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만조선의 강역도

▒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조선인이었을까?_옷차림이 조선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만왕조를 위만조선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왕조를 세운 만왕이 연나라 출신 위만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역사서들에서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은 중국 사람일까? 아니면 고조선 사람일까?이것이 핵심 쟁점으로 위만이 연나라 땅에 살고 있었던 고조선 사람이었다고 추측하는 이유로는 위만이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가 있습니다. 교과서에 따라 '조선인의 옷'이나 '흰 옷'이나 '만이복'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위만은 당시 조선의 정권을 뺏은 이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한 것으로 보아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자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요즘의 '위만 = 조선인'설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인 요동 => 평양 중심 이동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으로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당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하에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 지방의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에 귀순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근거로 고조선 ~ 삼한 시절처럼 왕권이 약할 때는 듣보잡이 왕위에 오르면 쫒겨나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하기 쉽기 때문에 자기 수족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강화시키려 할 텐데 현지인들이 높은 관직에 많이 올랐다는 기록도 있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위만을 중심으로 해서 유이민 세력과 고조선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것입니다.만약에 위만을 비롯해 함께 망명했던 세력이 중국 사람들이었다면, 그 당시의 중화적 사고의 흐름으로 볼 때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고 백번 양보해서 국호는 내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대로 뒀더라도 각종 정치, 사회제도는 반드시 중화적인 것으로 바꾸려 노력했을 것이지만 모든 기록과 유적 유물적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만왕조가 중국식으로 사회제도와 문화를 바꾸려 노력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후한의 응소가 한서음의라는 책에서 만조선의 관직제도를 논할 때 “오랑캐들이 관직의 규범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모두 상”이라고 칭했다고 했는데, 이는 고조선의 관직제도가 중국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제도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조선인이었을까?_중국식 성을 쓰지 않았다

위만에게는 원래 중국식 성이 없었다는 것인데 사기나 한서의 조선 열전에서는 그를 조선왕 만이라고 했지 성을 쓰지 않았습니다.후한서나 삼국지에서는 만을 위만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그가 연나라 땅에 살고 있었을 때 쓰던 성씨였을 뿐이고 고조선에 들어온 이후에는 성씨를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진짜 성이 있었고 위씨가 맞다면 중국적인 것을 내세우기 좋아하던 중국의 사가들이 사기나 한서같은 역사서에서 성씨를 빼놓았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후조선의 마지막 왕들인 부왕 준왕의 경우에도 성씨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에 중국식 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인데위만도 연나라에 살 때는 편의상 중국식 성을 사용했다가 고조선에 망명한 이후에는 성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원래 중국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성을 쓰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중국 사람이었다면 당시 성을 쓰지 않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조선인이었을까?_후조선 준왕의 대우

결정적으로 만이 고조선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한족)이었다면, 후조선의 준왕이 그를 중국과의 변경지역에 후왕으로 보냈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당시는 중국이 통일된 이후 후조선 왕조는 중국의 침략에 대해 고도로 경계하고 있었을 때이기에 만이 중국 사람었다면, 그를 신뢰할 리 없으며, 그를 후왕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준왕이 그를 신임하고 후왕으로 임명해 변경지역을 다스리도록 한 것은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맡긴 것으로 그가 고조선 사람이면서도 중국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조선인이었을까?_중국인이라 주장하는 근거들

위만이 호복을 입었다거나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남월(현재의 베트남)에 간 조타도 연나라 출신이지만 현지인의 모습을 하고, 현지인에 어우러져 지배자가 된 역사가 동시대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한 것은 위만보다 80여 년 전인 BCE 281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만일 위만이 지금과 같은 민족주의적 개념이나 국적이 없던 그 시대에 3대가 외국에서 산 사람이었다면 그런 그를 굳이 조선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위만 = 조선인'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도 이 이동설을 토대로 연나라 출신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과 접촉하여 어느 정도 조선의 문화에 동화된 상태였다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다만 연인이 당시 중국인을 의미하는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 그 당시 연나라는 현대 개념의 중국 한족들이 살았던 지역도 아니고 연나라 지역은 북방 민족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단, 이것이 위만이 한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될 수 있어도 조선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남월에 진나라 장군 출신인 조타가 갔다고 해서 그 당시 베트남이 진나라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그가 조선인이든 아니든 위만의 출신 성분이 그 당시 조선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만조선의 마지막왕 우거왕과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 다시 손자에 이어 주었는데 아들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그 손자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입니다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진번, 임둔 등 주변지역을 복속해 현재의 한반도 북부 대부분 지역 및 남만주 일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한반도 남부 지역과 중국간의 교류를 방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09년 ~ 108년 중국의 위만조선에 대한 원정이 있었으며, 왕검성 전투 등 원정 자체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왕자인 장을 비롯한 주요 세력의 자발적 이탈이 빌미가 되어 위만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해 가을,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으로 하여금 제나라 지역으로부터 발해를 건너가 우거를 치도록 명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에게는 5만의 병사를 주어 요동으로 나아가 우거를 치도록 했다.

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臣)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을 받아주길 청합니다."하면서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軍糧)을 내어 주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병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 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 장군이 속임수를 쓰는 것인 아닌가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좌 장군은 일찍이 연과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린 경험이 있고 천자를 직접 모셔서 총애를 받은 적도 있으나 성질이 사나웠다. 더욱이 작은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서 교만하게 조선을 급히 공격하도록 군사의 출동을 서둘렀다. 누선은 우거와의 싸움에 패하고 나서 제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도망가는 병졸들이 많았고, 병졸들이 모두 우거를 포위하고 있기는 했어도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우거의 대신이 누선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시도했다. 좌 장군은 수차례 누선에게 같이 싸우자고 재촉했으나 누선은 우거와 화해할 의사를 가지고 있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좌 장군이 우거의 항복을 받으려 해도 우거는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두 장군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하지만 고조선 멸망에 공헌해 봉직 / 직위를 수여받은 자들 중 일부는 부흥 운동으로 추정되는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사군이 설치된 지 3년 만인 기원전 105년, 기후(幾侯)에 봉해졌던 우거왕의 아들 장항(張降)이 모반을 꾀하다가 참수당했으며, 고조선 멸망 당시 한나라에 내통했던 니계상 참은 기원전 99년 조선인을 숨긴 죄로 하옥되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고조선·한(漢) 전역도

위만조선과 전한은 초반에는 사람들이 많이 귀화도 하고, 교류도 활발히 하는 등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는데 위만왕 대에는 전한에 외신으로서 조공하고, 그 대가로 주변 한반도 서북 지역에 대한 우위권을 인정받으며, 선진 문물을 교류하는 등 한 제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포함되어 발전을 했지만 제3대 우거왕 대에 들어서면서 진국과 한 제국간의 직접 교역을 막고, 무역을 독점하는 등 반한 노선을 추구하자, 분노한 전한에서 군사적, 외교적인 압박을 주며 신하국이 되라는 등 마찰이 점차 생기자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국력에서 열세였던 위만조선은 당해낼수가 없다 그로 인한 내분으로 우거왕이 살해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는데 이 중 많은 고조선 유민들은 진한의 사로국(신라)에 정착했는데, 신라의 기원인 6부촌이 고조선 유민들이었다고 합니다.

▩만조선은 철기 시대

위만조선째부터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기 문화란 단조 철기의 사용을 말하는 것으로 초기 철기시대에 틀에 부어 만드는 철도끼와 같은 작은 공구류가 아닙니다. 즉 철제 장검, 철제 투겁창, 철제 괭이와 같이 두들겨 만든 철기를 사용한 시기를 말하는데 사기 조선 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혜제~여후(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0년) 시대에 '병위재물'(兵威財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근거해 비로소 한반도에도 철기 문화가 수입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위만조선 시대에는 위의 철기 문화와 관련한 유적이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고조선에 대한 유적들이 발굴되고는 있지만 북한학계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져서 신용을 못얻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낙랑군 유물 / 유적으로 보고 있는 일부 유적의 연대를 끌어올려서 위만조선 시대의 유적이라고 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근거가 부족하고,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보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위만조선은 후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며, 한반도 임진강 이북지역과 만주 일부지역에 걸쳐 영토를 갖고 한나라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거대한 고대국가였습니다. 정변에 성공한 이후 국내정세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군사력을 강화해 옛 후조선 지역을 거의 장악했는데 이를 두고 사기 조선 열전에서는 “만이 군사적 위력과 재물을 가지고 주변의 작은 고을들을 쳐서 항복시키니 진반과 임둔 등이 모두 복속되어 영토가 사방 수천리에 달하게 되었다”고 평했습니다.만조선은 후조선과 똑같이 수도를 평양으로, 두고 후조선의 통치체계와 지배질서를 그대로 계승해, 중앙과 지방에 보다 정연한 지배체제를 구축해 갔습니다. 왕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전제권력을 행사했으며, 왕위는 대대로 세습했습니다. 만의 왕위는 우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계승됐고 우거왕도 자기의 왕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만조선의 지방 통치체제는 크게 국왕의 직할지와 후왕들이 관할하는 후국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또한 직할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도 외에도 부수도 제도를 두었습니다. 만조선 시기 부수도로 대표적인 곳은 고조선-한나라의 격전이 펼쳐졌던 요동지방에 있는 왕검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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