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이 비정한 한사군 실제위치와 단군조선를 계승한 부여의 탄생
고-한(漢)전쟁·최후의 왕험(검)성 전투 그리고 고조선의 패망
고-한(漢)전쟁 최후의 왕험(검)성 전투는 한나라와 총 2차례 펼쳐졌습니다.당시 한나라는 정점으로 치닫는 황금기의 한무제 시기였고 인구나 국력이 고조선을 크게 압도했습니다. 또한 한무제는 주변국 정복에 의욕이 넘쳤는데 한나라 건국 시점부터 골칫덩이였던 흉노를 막북전투 끝에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베트남의 남월도 기원전 111년에 멸망시킨 상황이었습니다. 흉노에 복속되어있던 서쪽 실크로드 도시국가들도 한나라의 영향력에 들어왔으니 중국의 서남북이 평정된 상황에서 한무제에게 남은 건 오로지 동쪽의 고조선 뿐이었습니다.고조선에 갔던 사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한무제는 이를 빌미로 고조선을 침공하기에 이릅니다. 1년간의 대치 끝에 우거 왕이 태자와 대신들의 배신으로 시해당하고, 고조선은 한나라에 투항하지만 이후 우거왕의 충신 성기가 군사들을 독려하여 왕험(검)성에서 한나라에 다시 대항하였지만 성기 역시 배신자에 의해 살해되고 왕험(검)성은 함락당하고 맙니다.
▤고-한의 대립과 전쟁 발발 원인
한나라의 요동 태수는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 요새 밖의 만이를 다스리도록 하고 그 부족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저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군사와 재물을 동시에 얻게 되었고 그 위력으로 이웃에 있는 작은 고을을 쳐서 세력 확장을 꾀하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속했는데 그 영역이 수천 리에 달했다. 위만 임금은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넘겼고 그의 아들은 우거에게 계승케 하니 한나라에서 우거에게로 망명해 가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한 무제 원봉 2년, 한나라 사신 섭하가 조서를 (고조선에) 들고 우거 임금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황제의 조서를 받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에서 마부를 시켜 자신을 배웅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이고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는 더이상 죄를 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 도위로 삼았다. 조선의 병사들이 섭하를 습격해 죽였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고조선의 왕이 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예,맥,진 등과 한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고조선을 강성한 나라로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한나라는 건국 때부터(백등산 포위전)한무제 시기까지(막북 전투)줄곧 북방의 흉노족에게 신경을 쏟느라 여유가 없어 고조선의 이러한 성장을 막지 못했습니다.이 틈에 고조선은 한나라의 유민과 정치적 망명객들을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이를 완전히 방치한 것은 아니라 고조선을 경계하고 있던 한나라는 요동 태수가 직접적인 공격 대신 고조선의 약화를 위해 기원전 128년에 요동 지역(압록강 상류 혹은 동가강(佟佳江) 유역 일대로 추측)에 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를 포섭하여, 우거 왕에게 반기를 들게 했습니다. 예군은 예족의 족장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 시기 위치적으로 고조선 혹은 한나라에 간섭을 받던 지역으로 추측되는 만큼 고조선이나 한나라가 내린 칭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포섭된 남려는 요동 태수의 후원을 받으며 거대한 폭동을 일으켰고, 그가 지배하던 28만여 명의 인구를 이끌고 한나라에 복속되었습니다.그 다음 한나라는 남려가 지배하던 지역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 고조선의 힘을 빼놓기 시작했습니다.다만 이 일은 실패했는데 창해군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연, 제 지역이 피폐해져 봉기가 일어나는 등 변경개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며 마찬가지의 이유로 서남이 개척도 중지되었습니다.하지만 이런 한나라의 책동에 분노한 우거 왕은 한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차단하고 고조선을 거쳐 한나라에 입조하려는 여러 나라들을 막았습니다.기원전 109년,한무제가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어 고조선에게 이러한 상황을 바꾸도록 했으나, 우거 왕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에 섭하는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한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엄호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패수에서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섭하는 장을 살해한 것을 왜곡하여 무제한테 보고했고 무제는 이 말만 믿고는 이 공을 높이 사 그를 요동(遼東)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합니다.그러자 분노한 우거 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쳤으며 섭하를 죽여 버립니다.여기엔 두가지 설이 있는데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하지만, 섭하를 죽였다고 할 뿐 요동에서의 군사작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섭하 역시 "습격해 죽였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의 병사들을 자객으로 보내서 섭하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한나라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입니다.사실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면 명분은 그저 침공을 위한 도구일 뿐인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명분이 된 사라예보 사건,중일전쟁의 명분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 등이 그 예이지만 심지어 침공할 명분이 없어도 따지지않고 공격하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왕험(검)성 전투
한나라는 총 57,000명의 병력을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고조선을 침공했습니다. 50,000명의 육군은 좌 장군 순체가 이끌었고, 7,000명의 수군은 누선 장군 양복이 이끌고 발해만을 거쳐 고조선의 수도인 왕(험)검성을 향했습니다.하지만 우거왕의 지휘 아래 고조선은 항거는 강력했습니다.오히려 좌장군(左將軍) 휘하의 졸정(卒正) 다(多)의 병력을 격파하고 발해만을 거쳐 왕험(검)성을 포위한 양복의 수군도 무찔렀으며 그 기세를 몰아 육로로 오던 순체의 육군 병력도 패수에서 저지했습니다. 이러한 기세에 당황한 한무제는 위산(衛山)을 우거왕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하려고 했습니다.우거왕은 그의 태자를 보내 항복할 의사를 내비쳤고 우거왕의 태자가 1만의 병사들과 함께 협상을 하러 갔지만 위산과 순체는 태자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수상하게 여기며 고조선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태자도 한나라를 의심하며 협상은 깨지고 전쟁은 재개되었습니다. 왕자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무제는 분노하여 이를 전한 위산을 처형해 버립니다. 이때 조선상(朝鮮相) 역계상(歷谿卿)이 왕에게 건의를 했는데 어떤 건의인지는 알 려지지는 않았으나화친과 비슷한 방향의 제안인듯 보이는데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자신의 집단 2,000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 진국으로 망명해 버립니다.
■제2차 왕험(검)성 전투
한나라는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순체는 패수에서 가진 두 번째 교전에서 고조선군을 격파하고 왕(험)검성의 북서쪽을 포위했으며, 양복은 성의 남쪽을 포위했습니다. 왕(험)검성을 포위한 한나라 군대는 왕(험)검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조선의 저항과 더불어 양복과 순체의 갈등으로 왕(험)검성은 몇 달 동안이나 이들의 공격을 저지했습니다.이러한 상황은 순체가 한무제가 보낸 감찰관 공손수와 공모하여 양복을 잡아 가두고 군대 통솔권을 본인이 직접 가지게 되면서 급반전하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고조선 내부에선 주화론(主和論)파와 강경파로 나뉘게 됩니다. 108년 4월, 주화론을 주장하던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중앙 장관), 한음(韓陰), 장군 왕협(王唊), 니계상(尼谿相), 삼(參, 지방 장관 격) 등이 한나라에 항복하며 배신을 했고 그해 6월, 삼(參)이 보낸 자객이 우거 왕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허나 삼은 후일 다시 한나라를 배신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그럼에도 왕(험)검성은 왕의 측근인 대신(大臣) 성기(成己)를 중심으로 저항하자 이를 초조해한 순체가 노인의 아들 최(最)에게 성안의 주민들을 이간질 시키게 했습니다. 최는 성 안의 사람들을 이간질시켰고 우거 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도모해 성을 지키던 성기를 살해했습니다. 장항은 곧바로 한나라에 투항했고 결국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수도 왕(험)검성이 함락되면서 위만조선은 3대 8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좌 장군은 일찍이 연과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린 경험이 있고 천자를 직접 모셔서 총애를 받은 적도 있으나 성질이 사나웠다. 더욱이 작은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서 교만하게 조선을 급히 공격하도록 군사의 출동을 서둘렀다. 누선은 우거와의 싸움에 패하고 나서 제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도망가는 병졸들이 많았고, 병졸들이 모두 우거를 포위하고 있기는 했어도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우거의 대신이 누선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시도했다. 좌 장군은 수차례 누선에게 같이 싸우자고 재촉했으나 누선은 우거와 화해할 의사를 가지고 있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좌 장군이 우거의 항복을 받으려 해도 우거는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두 장군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고조선의 멸망과 그 이후의 부흥운동
한무제의 한 나라는 고조선과의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고 고조선은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지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한무제의 한나라 군대가 철저하게 고조선과의 전투에서 참패한 결과는 이후의 농공행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장수명 | 직책 | 전쟁 후 결과 |
섭하 | 한나라 사신 | 전쟁 중 사망 |
졸정다 | 한나라 사신 | 전쟁 중 패전의 책임으로 참수 당함 |
공손수 | 한나라 사신 | 극형에 처함 |
위산 | 한나라 사신 | 극형에 처함 |
순체 | 육군 사령관 | 극형에 처함 |
양복 | 해군 사령관 | 극형에 처함 |
전쟁에 참여한 한무제의 부하들은 모두 참수나 극형에 처해 우거왕의 아들 장(장항/장강(長降)은 왕(험)검성 함락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나라의 기(幾) 지역을 다스리는 기후(幾侯)에 책봉되었으며 최는 열양후(涅陽侯)에, 한음은 적저후(荻苴侯)에, 삼은 홰청후(澅淸侯)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들 중 삼은 기원전 99년에 도망친 고조선인 포로를 숨겨준 죄로 잡혀 투옥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고조선 내부에서 분열만 없었다면 고-한(漢)전쟁은 더 오래 갔거나 한나라 측에서 보급문제가 발생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인해서 군사를 물려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나라는 전쟁이 길어지고 보급문제로 재정이 나빠지기 시작해 전쟁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결국 고구려 및 고려처럼 고조선 역시 외부의 침략에 내부 분열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한 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고, 그들의 관리를 파견하여 고조선의 영토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우리 민족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임둔군과 진번군을 곧 철폐시키고, 이어서 현도군도 통구 지방에서 요동 방면으로 몰아 냈지만 낙랑군은 여러 차례 우리 민족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지속되다가, 고구려에게 망하게 됩니다.
한사군 위치
한사군(漢四郡)은 한무제가 고조선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 다섯 개의 군급 행정구역으로 한사군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진번군이 폐지된 자리에 대방군이 세워졌기 때문에 총 5개 군이 있었으며, 보다 앞선 4개 군의 경우에도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으로 매우 짧아, 대신에 '한군현'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거나 '동방변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은 한사군입니다.인접해 있는 부여,고구려 등과는 직접적으로 대치 및 교류하기도 했고, 한반도 중남부에 정도한 백제와도 적극적으로 철재 등을 교역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중국이 위진남북조시대의 난세로 접어들며 약화되고 고구려가 성장하며 흡수, 소멸합니다.
낙랑군(기원전 108년~313년) | 한사군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는 행정구역.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수복됨 |
진번군(기원전 108년~기원전 82년) | 토착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이 폐지되고 낙랑군에 편입, 낙랑군 남부도위가 설치됨. |
대방군(204년경(?)~314년 | 3세기 초 한(韓)족 및 예족의 세력이 강해지고 삼한으로 망명하는 유랑민의 수가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낙랑군 남부도위에 해당하는 7개현을 독립시켜 진번군 자리에 재설치. 낙랑과 함께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수복됨. |
현도군(기원전 107년~404년) | 창해군 자리에 설치되었다가 기원전 75년 고구려,옥저등 토착민의 저항을 받아 한반도에서 후퇴, 요동 근방으로 이전됨. 이후 1세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무순(撫順) 지역으로 재이전되어 4세기 이후 모용선비의 지배하에 놓임.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의해 수복됨. |
임둔군(기원전 108년~기원전 82년) | 현도군에 편입됨 |
고대의 요동은 주나라 한나라 진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권인 장안 낙양등에서 먼 동쪽인 북경 주변으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거치면서 잠시 빼앗긴 것을 고구려와 백제 등이 수복 및 침탈당했던 최전방 전선지역을 일컫습니다.
한사군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한나라가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고 이듬해 (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는데 사기에서부터 한사군의 설치가 언급되지만 각 군의 이름은 명확히 등장하지 않으며, 고조선 땅에 설치한 한사군의 명칭이나 상황은 일단 한서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해 인접한 요동군 출신을 관리로 데려왔습니다.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고 왕망 때까지만 해도 우리 기록에서도 고구려 병사들을 징병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왕망에 반발하여 대항한 연비가 대패하여 목이 잘리거나 그에 응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고구려인들이 공격해서 습격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실제로 한나라의 법률을 적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으로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협박에 데꿀멍하는 기록, 초기 백제와 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입니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삼한,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이며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신나라-후한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王調)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 사실상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서기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 왕조가 세운 독립 낙랑은 마침 내분이 일어나 군삼로 왕굉(王閎)이 군결조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살해하고 왕준을 맞이해 5년만에 싱겁게 멸망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게 됩니다.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한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며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탄생
철기 문화는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의 남부 지방에 보급되어, 김해, 웅천, 마산 등의 조개무지에서는 이 때의 철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고조선의 멸망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현상도 나타났는데 철기 문화의 발전과 사람들의 활발한 이동으로 성읍 중심의 강력한 부족 국가들이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습니다.우리 나라의 부족 국가들은 이보다 앞서 청동기 문화의 발달로 성립을 보았으나, 그 후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곳에 새로운 부족 국가들이 차차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옥저, 동예가 나타나고 부여가 탄생하게 됩니다.부여는 현재 만주의 북쪽 지역인 송화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한민족의 고대국가이자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칩니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럼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왕험(검)성에 도읍을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 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했던 고대 국가였습니다.주몽이 부여에서 왕자들의 질투를 받아 죽을 위험에 처하니 부여를 떠나 졸본부여(고구려)를 세우고,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고구려 2대왕)가 오니, 찬밥 신세가 된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한반도로 내려가서 각각 인천(미추홀)에 비류국, 한성(위례)에 백제국을 세웁니다. 후에 부여, 비류국, 백제의 위례지역, 동예, 옥저는 고구려에 흡수되고 백제는 고구려에 땅을 빼앗겼기에 남하해서 수도를 옮깁니다.고조선과 더불어 부여는 한민족의 조상격인 국가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고조선이라는 시원 국가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정복 국가 틈엣 잊혀진 국가이기도 합니다.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졸본부여,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詩폐라뮤지엄 > 우리 고대사 역사 바로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몽이 계승한 숨겨진 고구려의 전신 고대국가 구려_700년 역사의 고구려가 아닌 900년 역사의 고구려를 발견하다 (0) | 2023.12.02 |
---|---|
위대한 태양의 나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_추모왕이 국호를 고구려라 이름 지은 의미와 뜻 (0) | 2023.12.01 |
인기급상승!최수종 주연 고려거란전쟁 속 거란에 대해 알아보기 (0) | 2023.11.30 |
고구려 추모왕의 롤모델 부여시조 始祖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_잊혀진 부여왕국 두막루 (0) | 2023.11.22 |
고구려와 백제,발해는 모두 부여의 별종이다_고조선 계승국 부여 이야기 (0) | 2023.11.21 |
일제 어용사가들이 왜곡한 낙랑군 재평양설_낙랑은 고조선 문화이다! (0) | 2023.11.18 |
우리 고대사에 기자조선은 없었다!_기자조선의 허구성과 5천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0) | 2023.11.17 |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_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0) | 2023.11.16 |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_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 (0) | 2023.11.15 |
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 (0) | 2023.11.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