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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공정과 국내 주류사학자들에 의해 지워진 단군조선_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잠든 한민족 고대사

by 마음heart 2023.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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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공정과 국내 주류사학자들에 의해 지워진 단군조선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잠든 한민족 고대사



고조선 특히 단군조선의 탄생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아래로는 부여와 고구려의 선대 문명이며 위로는 환단고기의 환국과 배달국이라는 문명의 하위문명이자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고조선이 요하문명 홍하문화의 계승자이거나 그 주인공이라면 우리 나라의 상고사는 더욱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고조선 자체를 신화 내지는 전설의 영역에 놓아버리면 우리 역사는 영토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간들도 반토막내기 때문입니다.

▣중국 동북공정으로 지워진 고조선의 존재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조선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지워진 상태입니다.중국인들은 동북공정이라는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고조선 자체를 모르기도 하고 안다고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한민족의 시원이기도 한 고조선은 흔히 삼조선으로 나뉘는데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바로 그것입니다.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는 단군 조선을 지워버리고 중국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만이 조선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중국 동북공정은 주로 역사서를 인용하여 벌어지고 있습니다.그 중 하나가 고조선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전국시대의 연나라에 대한 기록과 강역들입니다.

연나라는 조양(4복)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 하였다.” /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트팝)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귀속시켜 관리를 설치하고
요새에 성을 쌓았다. /사기 조선열전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 강역도. 랴오둥은 물론 한반도 청천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랴오닝성 박물관의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의 경우 그 경계가 랴오둥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물론 이 지도는 중국 정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이자 역사 왜곡이기도 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의 사료가 워낙 빈약하여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하지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치며 내민 역사적 사료에 도 허점은 있기 마련입니다.중국측 자료는 중국 자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 기 위한 양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단군 조선이후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중국 지린대 역사교과서인 동북사에는"주나라 초기의 기자국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이다.(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즉,기자가 은(상) 주왕의 폭정을 피해 본향, 즉 은(상)나라의 옛 고향인 랴오닝성 서부지역으로 간 뒤 곧바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면서 중국 교과서는 랴오닝성 카줘 등에서 나온 '기후명' 청동기 등 청동예기들을 그 증거로 들었는데 하지만 교과서는 여전히 기자조선의 영역=대동강 유역설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지만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은 랴오허 동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고고학적 자료들이 기자가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으로 대신 기자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 으로 한 난산건 문화가 성행했으며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 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는데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 석을 연에 봉했다는 기록입니다.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지금의 허난성 산센)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기도 합니다.

차오양에서 확인된 춘추시대 청동단검 거푸집과 차오양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또한 전국시대를 합종연횡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은 BC 334년,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 하는데 그러면서 앞세운 말이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순서대로 조선과 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데 당시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에 있었다는 증거이며 또다른 해석은 이 시기,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연나라의 전성기

중국 동북공정측 사료였던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의 진위는 어찌 된 것일까?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사기 연소공 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으로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와 진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니.."사마천의 논평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BC 316년, 연왕 쾌가 재상인 자지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습니다.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고(314년) 연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릅니다. 이 때 등장 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재위 BC 311~BC 279년)입니다.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으며 군사전략가인 악의 (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우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습니다.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는데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습니다. 

▨진개의 침략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오는데 “연나라 명장 진개가 흉노에 인질로 가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를 수행해서, 진왕(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진개는 언제적 사람인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 미수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나라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진개란 인물이 또 한번 등장하는,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를 보면 "조선후 준이 감히 왕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라는 기록인데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옛. AD 233~297년)는 위락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합니다.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 나라가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에서 부분 발췌)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입니다.하지만 연 나라가 소왕 이후 4대 희(喜)왕(서기전 254년 ~ 서기전 222년)에 이르러 진나라에 멸국되었기에 고조선의 영토를 온존히 지킬 수 있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일부에서는 고조선이 빼앗긴 영토를 바로 되찾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있는 것은 바로 연 나라의 내부 사정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가 어디까지 였는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였습니다.

▥고조선과 연나라 경계-허베이성 동남쪽 친황다오시 인근 vs 랴오닝성 첸산산맥 일대

만번한은 연나라와 고조선 두 나라의 전쟁 이후 경계가 됐는데 서쪽 영토를 잃기 전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고대사의 쟁점 가운데 하나지만 정확한 위치를 놓고 학계의 견해가 엇갈립니다.과연 고조선과 연의 경계,만번한은 어디였을까?재야,강단 사학계가 고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너무나 다른데 재야 사학계에서는 사고전서로 살펴 본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에서 두 나라가 갈석산 남쪽, 현재의 베이징 서남쪽에서 마주하고 있다가 전쟁 이후 국경이 허베이성 동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추정했습니다.(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또한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쌓아 조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이르렀으며…'라고 기록돼 있는데 연나라가 쌓았다는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의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당나라 때 학자 두우가 쓴 통전'(通典)은 연나라가 설치한 5군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었던 요동군 양평현을 지금(당나라 때)의 안동부라고 했습니다.통전과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 등을 분석해 양평이 현재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루룽현 서남쪽이라고 파악했으며 랴오닝성 첸산(千山)산맥 일대를 만번한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이후석 박사-고고학을 통해 본 만번한)친황다오시에서 한반도쪽으로 상당히 물러선 위치이기도 합니다.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 이후 물질문화 경계 [이후석 박사 제공]

 
또한 고조선-연나라 전쟁 전후로 첸산산맥 일대의 물질문화 분포가 달라진 점을 근거로 들었는데 고조선계 세형동검문화와 연나라 계열 물질문화의 경계는 전쟁 이전 허베이와 요서의 접경지역이었습니다.이 경계는 전쟁 이후인 기원전 3세기 즈음 첸산산맥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이 경계 부근에서 연나라 귀족층 무덤도 발견됩니다.기본적으로 '위략' 등 관련 기록을 중시해야 하지만 서술 내용이 소략하고 그나마도 일치하지 않아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고고학적 물질문화 경계를 찾고 문헌기록과 대비해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고조선의 탄생은 우리 문화의 시발점이자 중국이 아닌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선진 문명의 게승자라는 점 때문입니다.문제는 한국의 주류학파가 아직도 식민사학의 강한 영향을 받고 고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과 똑같은 주장을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학자가 주류학파인지, 반식민사학 성향의 비주류학파인지를 구별해볼려면, 단군조선을 인정하는지 안하는지를 물어보면 간단할 것입니다.주류학파는 고조선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 고조선이 단군조선이었다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습니다.단군 조선을 인정 하지 않고 부정한다면 고조선의 역사는 B.C 10세기에서부터 시작되지만 단군조선을 인정하면 한국의 역사는 당연하게도 5천년이 됩니다.한국의 주류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국의 역사를 3천년으로 본다는 것입니다.중국의 동북공정이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주류학파가 인정 하지 않는 단군 조선의 역사를 중국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며 한국의 기원은 중국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주류학파는 그냥 지켜볼 뿐인데 이들은 단군조선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발표해온 자신들의 석,박사논문들이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들부터 쓰레기통으로 쳐박아야 하겠지만 아직까지 그들은 기득권층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단군 조선은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더불어서 중국은 국내 사학자들의 단군 조선 지우기에 무임승차하여 단군 조선 뿐 아니라 부여와 고구려사를 동북공정을 통해 기존의 일사양용론의 입장에서 벗어나 중국사에 완전히 편입시키려고 하는데 단군 조선이 지워진 한국 고대사는 중국계 유민이 세운 기자 조선으로 시작하였다고 특정지으며 단군 조선을 비롯하여 부여,고구려,발해 등 한국고대사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동북공정이 역사왜곡이 아니라 순수한 학술적인 연구라고 강변하만 실제로는 동북지역의 정치적 안정, 나아가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장기적인 국가 전략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면서 단군 신화는 믿을 수 없는 신화이기 때문에 단군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단군 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대신에 중국 은 나라 말기 주 나라 초기에 실존 인물이었던 기자에 의해 건국된 기자조선
이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한국사가 시작부터 중국에 종속되었다고 보았습니다.또 중국계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정권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번속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결국 한의 군현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동북공정은 이제 중국의 모든 교과서에 수록되어 교육 아닌 세뇌로 인해 모든 중국인들은 우리 한국이 태생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단군조선이 지워지면서 부여 역시 한의 지방 민족정권이었다고 치부하는데 고조선과 부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이전부터 제시되었던 것입니다.반면 한국학계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단군신화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기자에 의해 건국된 기자조선을 고조선 의 시작이라고 보는데 결국 한국사는 고대 중국인이 세운 지방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중국과의 종속관계는 고구려,발해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특히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단군 신화가 고조선 시기의 산물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으며 단군신화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로 볼 때 평양 지역에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후대인의 가공을 거쳐 13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판본 양식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단군 신화의 내용 중에서 왕검이란 이름은 중국식 성명이며, 풍백,우사,운사는 중국식 신선명이며 중국 고사에 보이는 산 지명과 부인도 중국식 용어이며 중국식 간지로 연대를 표기한 것은 단군신화가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며 신화적 소재를 분석하여 단군 신화가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보았으며 한중 의학교류를 고려할 때 쑥과 마늘의 조합이 형성된 시기는 중국 의학에서 그것이 조립된 것이 육조 시기 이후에 가능하기 때문에 단군 신화에서 쑥과 마늘의 요소는 4세기 이후에 들어갔다고 주장합니다.또 천부인 3개는 삼신기가 아니라 불교적 부인으로 불교 수용 이후에 추가된 요소라고 보기도 합니다.이처럼 단군신화의 불교 및 도교적 요소를 강조하여 적어도 기원전 4세기 이후에 단군신화가 조작되었다고 주장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논리로 이어지고 동시에 기자조선의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한국사가 기자조선에서 시작한다는 논리를 강조하는 것이며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이 기존의 주류사학자들이기도 합니다.한편 기자조선의 초기 위치에 관해서는 중국학계에서도 여러가지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단군조선을 지우고 기자조선을 한민족의 시작으로 삼는 이유와 문제점

동북공정 전후로 기자조선과 관련된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 인 것은 기자조선의 초기 위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여러가지 학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기자가 요서지역에 기후국을 세웠으며 그 후 기원전 4 세기 후반경에 요동지역에서 기후국이 조선국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연의 침략으로 평양으로 그 중심을 옮겼다는 설,하북성과 요동을 거쳐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 등 기자조선의 위치는 고조선의 세력범위 및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역의 고문화 주체 등의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중국은 이렇게 동북공정을 통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모두 중국의 지방전권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중국의 대외관계의 성격에 집중하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 역시 여러가지 학설이 있습니다.고조선과 춘추시대 제와의 관계(관자 규탁편에 언급된 내용을 참고)는호간의 무역관계로 보았습니다.위략에서 고조선이 중국왕실을 존중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선후,제후의 신분이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조선과 한의 관계에서도 위만이 고조선의 왕권을 장악한 이 후 한과 외신의 맺었는데 한무제는 위만이 외신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사군을 설치하였고 따라서 고조선이 한의 직접적인 군현 통치의 대상으로 편제되었다고 보았습니다.당시 한은 내부적으로 제후들의 반란과 숙청이 있었으며 고조 사후에 정국이 매우 불안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흉노와의 대치상태에서 관심을 북방 이외의 변경으로 돌릴만 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위만은 이러한 국제관계에서 외신의 지위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진번, 임둔 등 주변국을 복속하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외신이 갖는 외형적 의미만을 강조하는 중국학계의 견해는 위만 조선이 기자조선을 이어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다분히 단선적이고도 일방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흥리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고조선의 후예 부여에 대한 짧은 단상

고조선의 문화를 이어받은 국가로 보통 고구려를 연상하지만 그전에 부여라는 국가가 이미 존재했습니다.물론 고구려의 추모왕이 다물을 국시로 내세운 이유는 부여가 문화적인 부분은 상당부분 고조선의 뒤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고조선의 영토 회복에서는 미흡했기에 추모왕은 고구려를 건국하며 엣 땅을 회복하려는 다물을 국시로 내세운 것이라 여겨집니다.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산해경 등을 근거로 동북공정 이전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최근에는 언어학적인 근거로 부여가 맥족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그러나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가 예족이라는 것이 명백한데 발음이 유사하다고 해서 부여를 맥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또 다른 학자는 부여가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원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오나라가 망한 후에 그들이 예맥의 땅으로 들어가서 부여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역시 부여 지역에 오나라 문화의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둘을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부여를 비롯하여 북부여,동부여의 관계 및 왕성의 위치의 경우 사료상에 부여 외에도 북부여, 동부여가 더 있어서 그 실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혼란스러운데 이 중 동부여는 아예 한국측 사료에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명칭에 관해서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보는데 일단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를 따로 떼어서 이해하는 방법으로 대체로 요령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후기 중심지를 요령성 북부로 비정함으로써 부여사를 요령성 내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다른 한가지는 부여와 북부여를 별개의 실체로 보는 방법으로 대체로 흑룡강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초기 중심지를 흑룡강성 내로 비정하기도 합니다.마지막 세번째는 세 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방법인데 주로 길림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전기 중심을 길림시 일대로, 후기 중심지를 농안 일대로 비정하여 중심지를 길림성 내에 두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또 다른 견해는 중국에서 잘 인정하지 않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한국측 사료를 인정하면서 해부루가 가섭원에 가서 동부여를 세웠다는 신화를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즉,왕위 계승 과정에서 하나의 부여가 해모수의 북부여와 해부루의 동부여로 갈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동부여의 위치는 동옥저의 북부로 현재 허천강(함경남도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 드는 강) 유역에서 동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았습니다.

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동부여와 3세기경 부여 세력권


중국의 고조선,고구려 왜곡 및 역사 지우기와 마찬가지로 동북공정 이후 부여사 연구는 현도군, 모용선비, 동한과의 관 계에 집중했는데 진대까지 부여는 번속체제에 속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즉,부여는 고구려의 배후에 있다는 점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중요한 지방 민족정권이라 보고, 멸망시 최종적으로 중화민족의 한 구성 성분으로 융합되었다고 보았습니다.동북공정에서 부여사를 주로 맡았던 조홍매는 부여가 한의 책봉을 받고 조공했던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광무제부터 한의 번속체제로 편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부여가 고구려에 비해 중원세력과 화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부여는 111년 낙랑을, 167년에는 현토군을 공격하여 한과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중국학자들은 부여의 중원 왕조와의 관계를 "조공과 책봉 맞 군사투쟁관계"로 보기도 합니다.그렇다면 고조선이나 고구려와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부여의 고고학적 문화는 어떨까? 부여의 고고학 문화는 길림시 일대에서 나타나는 한의 철기문화를 부여문화로 이해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부여 토기의 제작방법과 장식도안이 모두 중원의 것과 같다는 점에서 부여 문화 유물과 한문화 유물이 공존공생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여의 토기는 한 문화 뿐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문화 요소의 영향을 받은 것 또한 이 사실이며 또한 토기를 포함 한 부여 문화에서 한문화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부여의 한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너무 짙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나아가 중국이 변강의 소수민족사회까지 모두 중원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중국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예와 맥이 동북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인정하면서 이들이 예맥으로 민족적 융합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원 문화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와 맥을 종족적 기반으로 해서 일어났던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이 모두 중원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마음이 꺽여있으면 100대군으로도 필패하지만 마음이 꺽이지 않는다면 100대군도 이길 수 있습니다.우리 역사 고구려는 현실에서 이를 증명해 보였습니다.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전쟁은 싸워보지도 않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지고 있습니다.중국은 동북공정이후 각종 교과서에 우리 고대사인 단군 조선을 지우고 기자조선부터 한민족이 중국에 예속된 국가라고 세뇌시키고 있으며 이런 세뇌는 결국 가깝게는 중국 소수민족의 분열을 막고 미래에는 한번도 북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120여년전에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국권을 강탈 당하고 나라 없는 백성이 무기력하게 당하는지 체험했습니다.그럼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대사를 축소하고,중국에 예속 시키는 식민 사학자들의 만행에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문화를 빼앗기지 않는 것과 우리 고대사를 지키는 것 역시 현재 우리들의 전쟁이자 투쟁이기도 합니다.눈뜨고 코 베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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