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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의 원류를 찾아서,제 5의 문명 요하문명 홍산문화_중국의 요하공정과 동북공정에 지워진 한민족의 실제 역사지도

by 마음heart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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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요하공정과 동북공정에 지워진 한민족의 실제 역사지도

고대 한반도의 원류를 찾아서,제 5의 문명 요하문명 홍산문화



현재 우리나라의 상고사 역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지워지고 삭제되고 왜곡되며 한반도 속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역사학자도 아니고 관련 지식이 특출나지도 않지만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신화로 치부되는 단군의 고조선에 의해 시작되어 부여-고구려,백제,신라-발해와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집니다.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고려 시대까지 우리 나라의 활동 영역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조선 시대 역시 지금 현재 한반도 영토보다는 간도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고려 시대까지는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토보다 넓게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백제와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라 불리던 대진국(고구려 계승국)까지 200여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역사에서 사라지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중화사상으로 무장한 중국은 자신 이외의 세력은 무조건 오랑캐로 치부했는데 고구려와 백제 등이 중국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고대의 기록들을 삭제하거나 지역 등을 이동시키고 이에 더불어 일제 강점기동안 일제가 10여년 차지한 중국 등지에서 한국 고대사를 삭제하고 왜곡 시키며 현재 한국의 상고사는 한반도로 축소,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한반도 상고사가 기록한 서적들을 압수하고 불타우며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비교도 되지않을만큼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모두 지워버렸는데 그 지워진 고대사에 한민족의 시초와 대륙의 일부분까지 차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한반도 식민사관으로 우리 민족을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민족으로 만들어 조선 민중의 역량을 말살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비록 식견이 짧기는 하지만 그렇게 지워지고 왜곡된 우리 고대 상고사와 그 시원이 어디서부터 였는지를 살펴보고자 여러 기록 및 지도들을 살펴보고 지금 21세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사와 지워졌다 의심되는 숨겨진 우리 고대 상고사 역사를 다시보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년전 일본 학자가 발견한 제 5의 문명 요하문명 홍산문화

그런데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1908년 일본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가 기존에는 발견하지 못한 홍산문화를 처음 발견하는데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입니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으며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고고학도 량쓰용(梁思永(liángsīyǒng)· 중국 철학자 량치차오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결국 1930년 귀국한 량쓰용은 그해 겨울에 적봉으로 향했으며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헤이룽장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이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보고서엔 동북 4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고 합니다.실제적인 발굴은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로 당시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전후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으며, 채도와 세석기의 특징을 가진 이 문화는 1954년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 문화라고 명명되었습니다.뉘우허량 유적: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의 유적을 발견하였으며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홍산 문화는 옥(玉) 문명(文明)으로 유명하며 홍산 문명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싱룽과 문화(興隆窪文化), 훙산 문화, 자오바오거우 문화(趙寶溝文化), 신러 문화(新樂遺跡)등으로 이어지는 요하 일대의 신석기 문화를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 (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랴오허 문명(요하문명)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이것은 당연히 역사왜곡으로 이 시기는 고조선(단군)시대 이전의 환웅시대와 동일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영역은 고조선이 지배한 영역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중국은 기존의 황하문명보다 오래된 요하문명 홍산문화의 발견에 요하공정을 발동하여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요하문명 홍산문화를 중국 문화의 시발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하문명은 그 옛날 고조선,고구려 영역이며 황하문명은 중국 화하족이 살던 지역이었다

▶요하문명 홍산 문화를 중국 문명이라 억지를 쓰는 중국은 마치 현재의 영토가 고대에도 당연하다는듯 주장하지만 요하문명 홍산 문화는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라 할만하고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 추측할 수 있는데 요하문명 홍산문화가 기후의 변화 등으로 남하하여 1500년 이상 앞섰던 문명의 힘으로 기존 토착세력이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황하 문명을 새롭게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요하문명 홍산 문화 지역은 고대 중국 동이지역(중국 중부와 동부)과 한반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갈판과 갈돌(고대 맷돌),홍산 문화 지역은 중국에서 최초의 주거지(중화제일촌)와 중국 최초의 옥기,용무늬 토기 등이 발견되어 중국 문명 기원지로 밝혀졌는데 상나라는 이곳에서 남하하여 중원을 정복하였다가(BC1600)주나라에 망하면서 자신들의 기원지인 총산문화(고조선 지역)으로 돌아갑니다(BC1046)

우리들은 역사 교과서에서 세계 4대 문명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을 배웠습니다.황하 문명은 지도에서처럼 중·하류 유역의 황토 지대에서 발달한 세계 4대 문명중 하나이지만 사실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은 본래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량치차오가 정의한 개념으로, 서구에서는 "문명의 요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인더스 문명은 자연지리적인 장벽이 없었기에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지만, 황하 문명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그러지 못했는데 유라시아의 다른 주요 문명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발전 방향을 보였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또한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황하 문명이 다른 주요 문명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서구에서 4대 문명 대신 사용하는 개념인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에는 아메리카 대륙 문명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석기 시대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속칭 세계 4대 문명과 함께 문명의 요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청동기가 문제가 아니라 문자,도시,하수도,성문법의 발달 등 일반적으로 문명의 요소라 여겨지는 것들의 발굴연대가 아무래도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등에 비해서 늦기는 합니다.때문에 중국에서도 하상주단대공정을 시행하여 중국문명의 성립역사를 이집트 수준으로 늘리려는 국가단위의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 중입니다.주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황하가 범람원을 형성하는 지금의 산시성,허난성 부근으로 황하 문명의 근거가 되는 황하 근방은 홍수가 수시로 일어나 흙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이때 농사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도 같이 실려오기 때문에 농지가 발달하였고 또한 이러한 범람은 관개와 치수 기술, 건축 기술 및 대형 정치 권력의 출현을 촉진시켰는데 고대 하왕조 전설의 개조인 우임금이 치수를 중시한 것이 고대의 치수 중요성을 설명해줍니다.하지만 현재는 황하 이외에도 장강 일대나 쓰촨 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추세인데  황하문명보다 1500년 이상 빠른 홍산문화의 발견으로 요하문명 홍산문화를 중국문명에 귀속시켜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동조하는 의견이기는 하지만 요하 문명 홍산문화의 사람들 일부가 기후 등 환경변화로 인해 대량 남쪽으로 이동하여 황하 인근 토착민들을 거의 다 몰아내고 황하 지역에 정착하여 황하문명을 이뤄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습니다.홍산문화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나 황하지역에서 오랜 시간 지나면서 황하문명이 나타났고 황하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갑골문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왜냐면 홍산문화 유물이 시간을 지나 장강까지 나타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대표적인 유물로는 청동기,귀갑이 있습니다.

귀갑은 거북이 등껍질에 한자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은 요하문명 홍산문화를 발견한 뒤 곧바로 요하공정(遼河工程)을 계시하는데 요하공정이란,중국 동북부 요하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련하여 제시된 공정의 하나로 정식 명칭은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며 일명 뿌리찾기 운동이라 말하기도 합니다.중국은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빠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중국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기도 한데 이런 중국의 요하공정의 목적은 결국 중국의 시간적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으로 평가하고 동북·서남·서북공정은 공간적 영토를 넓히려는 작업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중국은 선사시대에 중국에서 발생한 3대 문명을 모두 엮어서 중국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황하문명은 황하의 역사이고 장강은 장강의 역사이며 요하문명은 둥베이의 역사(둥베이: 东北, 東北: Dōngběi)은 중국의 6대 (중국지리대구:中國地理大區)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합니다. 청나라 만주족들이 최초로 이 지역을 통틀어 동북 지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지린,헤이룽장의 3개 성이 포함되며 내몽골 자치구 동북부 동사맹지역 (후룬베이얼시,싱안맹,퉁랴오시,츠펑시)을 포함하기도 합니다.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이며 그 외에 하얼빈,창춘,다롄,치치하얼,지린 등의 도시가 있고. 우리 한민족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 및 고구려,부여와 연관이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요하문명 홍산문화의 실체

1983년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기존의 홍산 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은 5km2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었으며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습니다.요하문명의 대표적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여신상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남신상이 발견된 것은 최초로 이에 중국에서는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중화조신(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기존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요녕성박물관)을 개축하여 건축면적 2만 8900m2, 12개 전시실에 전람면적 8530m2에 이르는 신관을 개관하였고 2010년에는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하였습니다.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좌)여신상과 복원도 (우)남신상

뉘우허량 유적:홍산문화(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고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습니다.여신묘 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는데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기도 합니다.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여신묘에서는 채도도 발견되었는데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으며 근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 홍산 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추론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하량 유적에서 발견된  곰발바닥과  실물 크기의 곰 형상 조각-우하량 유적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을 낳은 웅녀의 실체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되기도 합니다.맥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요하 문명에서 발견된 남신상(일명:배꼽 손 사람)의 경우 돌조각은 이후 다른 문명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스트섬의 모아이와 제주도 돌하르방 등이 그렇습니다.1만년 전 남신상과 태평양 한가운데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있는 섬의 조각이 모두 배꼽 손 형식이라는 것입니다.물론 단순하게 숭고한 대상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경외감이 비슷한 조각상을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높지만 충분히 연구해봐도 좋을만큼 유사성이 높기도 합니다.

▶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와 주요 유적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의 기원과 연대

중국에서는 요하 유역에서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도리이 류조의 처음 발견 당시의 추정보다 연대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8000년까지 인상되었으며 홍산 문화에 기원전 8000년경의 신러 문화까지를 포함시켜 요하 문명으로 간주하여 홍산 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고 중국 학자 량쓰용은 중국어족과는 다른 랴오허 지역의 사람들이 남하하여 현 쓰촨성 북부의 중국티베트어족을 지배하고 황하문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훙산 문화에서는 수렵, 채집 중심으로 후기에 기초적인 농작생활상도 보이는 등 신석기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가축을 사육한 축산도 발달하고 있어 돼지나 양도 길러졌습니다. 한편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으로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집하기도 했습니다.요하문명 홍산문화의 유적,유물로는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마제석기,세석기 등으로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의 농기구이며, 돌보습(石耜),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습니다.옥들과 용등을 본떠 만든 비취 등의 구슬로부터 현재 중국에 연결되는 문화나 종교의 존재도 볼 수 있다.홍산 문화의 도기는 진흙 홍도 및 협사회도(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고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체도(채문 토기)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협사회도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도기에서는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홍산 문화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같은 채도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 문화와 흑도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졌으며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환도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용의 기원_요하문명 홍산문화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돼지,호랑이,새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인데 저룡(猪龍) 또는 옥저룡(玉猪龍)이나 옥웅룡(玉熊龍)등으로 불리는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 문화가 이후 중국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또한 홍산문화에서 적석총(돌무지무덤)과 옥기가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 등의 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다양한 옥기들

요하문명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을 짐작케 하는데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몇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며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여신묘와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많은 인원을 필요하므로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고 있으며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습니다.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였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있는 다량의 옥기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이 뉘우허량 유적의 발견이후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요하문명 홍산문화는 언어적으로도 황하문명 지역과는 별개인 독자적 문명

언어적으로도 요하문명 홍산문화는 중국 황하 문명과 독자적인 별개의 것으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지로 밝혀진 9000년 전 서요하 유역의 기장 농업 지역이 요하문명(遼河文明)지역입니다. 결국, 9000년 전 서요하 유역의 기장 농업 지역이란 바로 요하문명 지역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요하문명의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고고학문화인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 7000 - BC 6500)의 시작이 바로 9000년 전입니다.또한 이 요하문명 지역에서 세계 최초의 재배종 기장[黍]이 출토됩니다.구체적으로 요하문명의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BC 6200 - BC 5200)에 속한 흥륭구(興隆溝)유적에서 발견된 8000년 전의 세계 최초의 재배종 기장(黍: 1,460알 중 1,400알, 96%)과 조(粟: 1,460알 중 60알, 4%)는 이미 2012년에 유엔(UN)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세계 중요 농업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북경 서쪽 동호림(東胡林)유적(BC 9000-BC 7000)에서 발견된 기장은 시기는 앞서지만, 재배종이 아니라 아직 야생종에 가까운 순화 과정에 있는 것이어서 지정되지 못했습니다.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언어가 4000년 전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유목-목축민이 전파했다는 기존의 유목민 가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어서야 서요하 지역과 중앙아시아-서유라시아의 유전 계통이 섞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곧, 유목-목축민들이 서요하 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에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안으로 9000년 전 서요하 지역의 농경민에게서 기원하여 확산되었다는 농경민 가설을 새롭게 제시한 것입니다.요하문명 지역은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기원지일 뿐만이 아니라 (1) 9000년 전 최초의 빗살무늬토기, (2) 8000년 전 최초의 재배종 기장과 조 (3) 8000년 전 최초의 옥결(玉玦: 옥 귀고리) (4) 8000년 전 최초의 적석묘, (5) 7000년 전 최초의 복골(卜骨: 점을 친 뼈), (6) 7000년 전 최초의 흑도(黑陶), (7) 5500년 전 최초의 계단식 적석총(8) 4300년 전 최초의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_고구려의 치를 갖춘 석성과 동일 (9) 3000년 전 최초의 비파형동검 등의 기원지이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1), (4), (6), (7), (8), (9)는 요하문명과 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황하문명 중심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입니다.요하문명’은 전형적인 북방문화 계통으로 황하문명과는 확실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네이처 논문에서도 황하문명 지역은 ‘중국-티베트어족 언어의 기원지이고, 요하문명 지역은 트랜스유라시이어족 언어의 기원지라고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곧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은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명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하문명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편두(偏頭=褊頭)전통

홍산문화 시기에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편두(偏頭=褊頭)전통도 주목해야 합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진한(辰韓) 사람들은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했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兒生 便以石壓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가야 시대 김해시 예안리고분(禮安里古墳)유적에서도 10점의 편두 두개골이 확인되었는데 이후에는 경북 경산시의 임당동고분군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확인되었습니다. 경상 남북도 지역에 편두 전통이 확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한이나 변한뿐만이 아니라 흉노, 가야, 신라, 일본 등의 편두 전통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그런데 홍산문화 후기의 대표적 유적지인 우하량(牛河梁)유적에서 발견된 남녀 두개골 17개 가운데, 76.47%에 달하는 13개가 편두임이 밝혀졌습니다. 남녀가 모두 편두를 했었고, 홍산인들에게 편두가 유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최근 길림성 대안시(大安市) 후투목알(後套木嘎, 허우타오무가)유적의 발굴(2011-2015) 과정에서 편두가 이 지역에서 12000년 전에 기원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11점의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고 12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 70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편두 전통은 (1) 요하문명 지역의 동북쪽 끝인 후투목알유적에서 12000년 전에 기원하여 7000년 동안 지속되었고 (2) 홍산문화 후기인 5500-5000년 전에는 보편화되었고 (3) 이후 서쪽으로는 ‘몽골 초원→유라시아 초원→유럽’으로 (4) 동쪽으로는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5) 동남쪽으로는 ‘한반도→일본’으로 확산된 것입니다.12000년 전 후투목알유적의 편두 모습은 우리나라 예안리에서 발굴된 것과 마찬가지로 편두가 뚜렷합니다. 홍산문화의 편두 두개골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지만 인공적인 변형이 분명하게 확인되었고 발굴보고서에서도 학자들이 편두로 판정한 것입니다. 결국 편두 전통도 요하문명 지역에서 기원해서 사방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요하문명 홍산문화가 수천년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유?


서요하 지역은 요하문명이 꽃피는 시기에는 한반도 중부 지역과 기후 조건이 비슷했고 농경을 하면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5000년 전을 기점으로 기온이 급강하하고, 건조한 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런 건조화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서요하 지역 요하문명의 한 가운데는 동서 약 500km 남북 약 200km의 거대한 카라친사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석기 말부터 이런 건조화-초원화-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인구 밀도도 낮아지고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면서 점차 잊혀지게 된 것입니다.어쩌면 현재 발굴되고 발견된 유적들보다 거대한 사막 아래에 더 놀랍고 거대한 유적들이 묻혀있을 지도 모릅니다.네이처 논문은 한국어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사실뿐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역사-문화 연구의 방향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첫째, 동북아시아 상고-고대사, 문화사, 종교사 등등의 연구에서도 그 출발은 요하문명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둘째, 요하문명 지역은 언어적으로도 황하문명 지역과는 별개의 독자적 문명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요하문명이 중국보다는 한반도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셋째, 결국 이제는 요하문명을 모르고서는 동북아시아의 언어, 역사, 문화, 철학, 종교 등을 논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하문명 홍산문화는 분명히 우리 민족과 같은 결을 지닌 문명이며 우리 민족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고조선의 뿌리라는 것입니다.아이의 탄생에 부모가 있듯 모든 문명에게도 뿌리는 존재합니다,우리 민족은 분명 중국과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동안은 마치 거대한 중국 문화의 아류이자 사생아처럼 행동했으며 중화사상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요하문명 홍산문화에서보듯이 분명히 우리 민족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영유해 왔다는 것입니다.일제 잔재의 식민사관은 120여년전부터 진행되어 현재 모든 역사 교과서를 그들 입맛대로 고쳐왔으며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 상고사-단순히 고구려 뿐 아니라 고조선 그리고 고조선의 뿌리인 요하문명 홍산문화까지 중국 문화라고 주장-를 자신들 것으로 만들어 결국 요하 일대와 만주 그리고 현재 북한 일대까지 중국의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음모이기 때문에 상고사를 잃어버리면 결국에는 한반도까지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중국은 그렇게 고구려-발해,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대륙의 역사를 한반도로 몰아넣으며 소정의 목표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그렇게 동북공정의 목표를 달성한 중국은 이제는 문화공정까지 단행하며 한국의 모든 문화는 결국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문화가 중국에서 왔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진짜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는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요하 문명 홍산 문화의 뒤를 이은 고조선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 전통의 문화이자 북방 민족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은 중국 역사학자들도 인정한 것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정치화된 중국 학자들은 요하문명 홍산문화가 동이족의 문명이자 문화라고 했던 주장을 철회하고 중국문명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그 이유는 수,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이기도 하며 일본이 고조선과 단군을 신화나 전설로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출처 : Zhang Q, Liu P, Yeh H-Y, et al. Intentional cranial modification from the Houtaomuga Site in Jilin, China: Earliest evidence and longest in situ practice during the Neolithic Age. American Jounal of Physical Anthropology. 2019;169:747–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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