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동북아 역사 10년 전쟁
탁록 대전의 승패와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적 진실①부
우리에게 치우천황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치우 응원으로 더욱 유명하고 친숙하지만 치우천황은 동북아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10년간의 전쟁을 통해 결국은 패배한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렇다면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은 왜 10년간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우선 치우천황의 라이벌 황제헌원부터 알아보자면,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군주로, 사마천은 삼황오제에서 삼황 부분은 전설이라고 치부해 아예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오제부터는 본기(本紀)로 저술했으므로 이 부분부터는 역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사실 사마천도 이 부분에서는 고민이 많았는데 사기는 본디 서주 시대부터 비로소 진정한 역사 시대로 간주하지만,유교적인 정통성 계승의 관점에서 최소한 한 가지 구심점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오제는 예외적으로 본기를 서술, 역사 시대처럼 묘사했습니다.황제라는 칭호는 '황천상제'(黃天上帝)를 줄인 것으로 '천상의 위대한 신'이란 뜻으로 이에 걸맞게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였다고 합니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을 묘사할 때에는 한손에 항상 헌원검(황제 공손헌원의 칼로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칼이라고 한다.그 당시에 강한 철이라는 것은 농업과 전쟁의 필수요인이었기에 황제의 검은 전쟁은 물론 농경에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물건이다.)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전쟁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황제 헌원은 소전의 아들이자 중국 신화의 신이자 현효와 청양(후대에 황제 헌원씨 공손헌원의 아들 소호 금천씨 공손현효와 제곡 고신씨 공손준의 아들 제지 청양씨 공손지가 동일인으로 간주되었다)의 아버지. 요(삼황오제)임금과 우(하나라)임금의 고조부이기도 합니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헌원씨(軒轅氏)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하고 제홍씨(帝鸿氏)라고도 부릅니다.(여기서 씨(氏)는 중국 상고시대 인물들에게 상투적으로 붙이는 호칭으로 그래서 황제와 맞서 싸웠다는 치우를 '치우씨'(蚩尤氏)라고도 부른다.)흔히 알려진 명칭인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에 황룡이 나타나 토덕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들의 첫 번째 왕이며, 사실상 신화로 여겨진 삼황과 다르게 황제를 필두로 한 이들 오제(五帝)들은 실존한 제왕들로 추앙되었고, 그중에서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습니다.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언급되는데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의 필두며 황보밀의 제왕세기에서는 삼황의 첫 번째로 언급됩니다. 전국책, 주역,예기,회남자에서는 오제의 세 번째, 나머지 기록에서는 오제의 첫 번째입니다. 사후 신니라를 세운 왕망이 '태초조'(太初祖)로 추존했습니다.황제 헌원은 중국에서는 그리스의 제우스같은 존재로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인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6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고, 119세가 되는 기원전 2598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합니다. 황제 헌원씨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가 황제기원입니다.본래 황제 헌원씨는 고대 중국에서 받들던 신격이었다고 추정하였는데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신격이 점차 신이한 힘이 있는 위대한 인간 군주로 격하되어 고서에 기록되었습니다.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씨는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 제(帝)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였으며, 좀 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자(子)성 왕실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따라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지만 이 존재를 고대의 위대한 인간 군주로 보는 시각이 퍼진 이래로,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는 것입니다.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개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습니다. 참고로, 상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성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하였으며 천자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황제 공손헌원은 신화적으로 창조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기도 하며,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배포한 것은 물론, 천문과 역산 등의 다양한 기술과 생활양식을 구성해내어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었다고 합니다.신화상에서 황제, 즉 신으로서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개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에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합니다. 황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왕위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합니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관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즉, 황제는 비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으며 오행 중에 토를 관장하며,전쟁의 신이었다고도 묘사합니다.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는데 천하를 순시하다 동해 바닷가에 이를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만 1520종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인 후토는 유명(幽冥)세계의 통치자이자 귀신나라의 왕으로 황제는 신도와 울루에게 세계를 떠도는 귀신들을 다스리게 했다고도 합니다.그러면서, 염제 신농의 뒤를 이어 차지한 중앙의 상제자리를 물러난 이후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신 중 중앙의 자리에서 사방을 관리하는 신이 되었다고 하며 거기에다 황제는 백성들의 질 높은 삶을 구축해낸 인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망이 높았던 임금이라고 합니다.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황제를 위대한 인간 황제 공손헌원으로 역사화했는데 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였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는데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나면 먹고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창,방패,수레(바퀴),옷,글자,거울,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는데 그야말로 전지전능 황제 헌원,안 만든게 없다는 만능의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또한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고, 그 중 14명이 부왕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시조가 되었으며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고양씨,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대홍수를 다스린 곤과 우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 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가 됩니다.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동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는데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3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 치우와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이 죽을 날을 선택하고 용을 타며 승천하였는데 그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아내는 총 4명이 있었는데 그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 번째 부인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인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으며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고 하는 여자인데 외모가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합니다. 황제 헌원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라 하여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며 황제 헌원이라는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헌원이라는 완벽한 존재고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었는데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나 황제가 분실했는데 한 신통한 여인이 이 구슬을 얻어 황제가 되찾으려 군사를 보냈으나 여인은 이 구슬을 삼키고 바다에 몸을 던졌고, 곧 말의 머리를 한 해룡이 되었다고 합니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황제 헌원은 진짜 중국의 천자였나?
황제 헌원씨는 천자(天子)로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의 시작이었는데 또한 중국 한(漢)족의 전신인 화하족의 시조로추앙받는데 하지만 이와 다른 기록들도 존재하는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인 사기집해에는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헌원의 직책에 대해 운사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하였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자로 이름하였다.
/춘추좌전 소공 17년
사기 오제본기에도 헌원의 직책이 운사라고 나오며 또한 상고시대의 기록인 금문을 보면 헌원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 고대 왕의 계보는 신농으로부터 시작하며 신농 열산씨-소호 금천씨-전욱 고양씨-재곡 고신씨-제지 청양씨-제요 도당씨-제순 유우씨-우-백익으로 나옵니다. 또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나 한나라 태조인 유방이 전쟁 전에 헌원이 아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들도 나오는데(어쩌면 치우가 이겼고 황제 헌원이 졌지만 관우처럼 결과적으론 패배한 장군인데도 후대에 추앙받은 케이스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고 진시황제나 유방은 그래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승리를 기원하며)그래서 헌원과 치우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한편, 청나라 말기 강유위,고힐강 등의 의고학파에서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 정도로 판정하기도 했는데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치무라 신지로, 이이지마 타다오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이런 황제가 다시 역사적 실존인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 학계가 정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 영향이 크며 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워 권위를 얻으려 했을 뿐, 실제 저작은 한나라 시기로 추측되며 황로백서라고도 불리는 황제사경을 비롯한 다른 황제 저작의 서적들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황제헌원의 무덤이 산시성 옌안 시에 있는데 실제 황제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등선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이며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었습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천하제일릉이라고도 부릅니다.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이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사실 황제기원은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받은 중국 지식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일본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를 보고 '황제기원'을 다시 떠올린 것으로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사람에 따라 수백 년씩 널뛰기를 했으나 1905년부터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습니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요와 우가 실존했다면 훗날 헌원씨로 불리게 되는 요와 우의 고조부는 황제기원보다 훨씬 수백년 뒤에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다.
▨고대사 시조부터 동북공정을 시작한 중국의 종특
하지만 일부에서는 황제헌원도 동이족이며 실체가 없던 하화족(夏華族, 화하족華夏族)의 조상으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합니다.즉,중국 한족(漢族)을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염황(炎黃)의 자손으로 조작한 시조공정이 그것으로 나카 미치요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이 고대 야마토 왜의 식민지였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소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창했으며 또한 중들이 날조한 망령된 이야기라고 주장하며 단군조선의 실존 역사를 부정하고 이른바 단군은 신화다라고 주장한 대표적인 일제 식민사학자입니다.해방이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은 단군왕검의 실존성과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단군신화를 학계의 정설로 만들었습니다. 식민사학을 계승한 한국 주류 역사학계가 우리의 뿌리 역사와 시조를 부정할 때 중국은 우리 선조인 동이족 혈통을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로 만드는 이른바 시조공정(始祖工程)을 완성하기에 이릅니다.사마천 사기史記를 두고 중국 최고의 역사서,동양 최고의 역사서 혹은 전무후무한 최고의 역사서라고까지 극찬하는데 사마천의 사기는 황제와 제후와 신하와 저명한 특정인 등 인물 중심의 본기와 세가와 열전 및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과 제도를 기록한 지와 표 등으로 서술한 기전체(紀傳體) 방식의 역사서입니다.
사마천은 기전체 방식의 역사서 사기에서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가 약 4,700여 년 전 황제헌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사기오제본기에는 신농씨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다가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헌원과 싸워 패했고,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이 합작해서 치우천황을 물리쳤다고 나오지만, 사실 황제헌원과 동시대 인물은 염제신농씨가 아니고 8대손인 제유망입니다.사마천은 사기에서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이 맺은 부락연맹은 화하족(하화족)의 주요 구성원이 됐고, 화하족은 다시 한족(漢族)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는데, 한 마디로 현재의 중국 한족은 모두 염황의 자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의 활동 시기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중국은 오류와 허점투성이인 사마천의 사기를 바탕으로 역사를 조작해 중국 한족의 시조를 창조해냈다는 것입니다.
염제신농씨(BCE 3218 ~ BCE 3078)는 신시 배달국 8세 안부련 환웅천황(BCE 3240~BCE 3078) 때의 인물인 반면 황제헌원(공손헌원, BCE 2692 ~ BCE 2593)은 신시 배달국 14세 자오지천황(치우천황, BCE 2749 ~ BCE 2598) 때의 인물로 염제신농씨의 아버지 소전(小典)씨는 배달국 안부련 환웅천황의 명을 받고 산시성 강수(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했으며 소전씨의 큰아들이 염제신농씨, 둘째 아들이 욱(勖)으로 욱은 공손씨의 조상이 되고 황제헌원은 욱의 10대손입니다.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의 조상은 같은데 염제신농씨는 고시씨에서 소전씨로 이어진 적통 후손이며 황제헌원은 고시씨와 소전씨의 후손이지만, 방계 혈통으로 중국에서 염황이제상을 세운 이유는 한족(漢族)이 염황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인데 사실 중국에서 또 다른 한족의 시조라고 말하는 태호복희씨는 배달국 5세 태우의 환웅천황님의 막내 아들이기도 합니다.황제헌원과 염제신농이 생존했던 시대도 다른데 태호복희씨의 부인인 여와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三皇五帝) 모두가 동이 배달족으로 중국 정부는 1958년 경제적 고도성장 정책, 이른바 대약진운동때 동이족 출신의 황제헌원과 소호금천 등 인물은 한족(漢族)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덤이 파헤쳐졌고 당시 공자묘는 파묘되지 않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기도 합니다.중국은 한족(漢族)의 시조는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이라고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데 중화민족은 모두 염황(炎黃)의 자손이라는 시조공정(始祖工程)을 완성하기 위해 2007년 하남성 정주시 인근에 20년의 공사를 끝내고 미국 자유의 여신상보다 8m나 높은 106m 높이의 거대한 조각상 염황이제상(炎黃二帝像)을 완공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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