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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_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

by 마음heart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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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

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燕王 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度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위만도 망명하였다. 그는 무리 천여명을 거느렸는데,
상투를 하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고조선(古朝鮮)
 

상투하면 우리는 보통 100여년전 조선 사람들의 상투를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상투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해오던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문화였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상투(Sangtu)를 우리 민족만 해왔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 상투는 한민족 뿐 아니라 고대 수메르 문명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의 왕 그림에서 모두 상투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투는 고대 이집트를 비롯하여 소아시아(고대 터키), 흑해 연안(소그디아 포함), 고조선 모두 상투를 튼 것으로 상투문화는  태양 숭배 사상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지구랏트로 대변되는 고대의 태양 숭배는 곧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이었으며 오벨리스크란 돌기둥은  우리의 솟대(소도) 문화와 그 맥을 같이 하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상이었다는 것입니다.오늘날 거석숭배라고 하는 고인돌 세움과 태백(Tebe, Tepe, Tepec, Tebec)의 태양 숭배와 한얼님 숭배는 이집트 , 그리스, 고대 터키, 중앙아시아, 멕시코에 이르기 까지 세계적인 광명사상이었습니다.상투를 튼 사람들은 다른 종족에 비하여 특별한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는 편두풍습이 있으며, 천문을 아는 깨우친 사람들이었고, 하늘과 교통하기 위하여 머리 정수리 위에 안테나 구실을 하듯 상투를 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부여 얼굴모양 금동장식

오늘날 유럽이나 북미에서 사용 중인 상트 , 세인트(Saint)도 모두 상투를 뜻하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Saint_Petersburg)는 약 540 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발트해의 핀란드만의 머리인 네바 강에 위치한 도시인데 해석하면 “상투-아버지 달의 새 광명 집단”이 됩니다. 미국 풀로리다(Florida-광명의 머리)주에 똑같은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그(Saint_Petersburg)가 있는데 사람들이 북미로 진출하면서 지명 이동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오늘날 Saint 는 ‘St’로 줄여 부르는데 환인 12분국으로 파미르에서 동,서양에 진출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검은 머리 사람들이므로 상투 풍습과 편두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된 문명이자 지금은 볼 수 없는 앞짱구, 뒷짱구의 인공 두개골 변형(편두)은 풍습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우리의 문신 풍습도 예전에 유행했던 풍습으로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풍습이 그대로 전해져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좌)고대 메소포타미아 신을 묘사 한 구리 합금 재단( 기원전  2130 년경)-머리의 형태는 머리를 동여 매어 위로 올린 것으로 ‘상투’의 역할로 본다.(우)히타이트의 ‘하튜샤(Yazılıkaya)’에서 12 신의 행진으로 모두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모두 상투를 한 이유로 고깔모자를 사용한 것이다.
(좌)Ptolemaic bronze(기원전 3세기)  Harpocrates-소장: 포르투칼 , 리스본  상투 모양(우)바그람 , 아프가니스탄 , 2 세기의 청동 조각상(Harpocrates)-상투

상투를 튼 뒤에는 갓,문라건,조우관 등 두건이나 모자를 함께 착용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때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으며 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도 상투를 가리는 용도인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서도 여러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합니다.나이가 어려도 일찍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는데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 불렀습니다. 한동네 살면서 이런 저런 사정 다 아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안 통했고, 보부상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얕보이지 않기 위해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관직으로 진출하거나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상투에서 망건을 두르는 스타일은 조선시대 동안에도 계속 변화했는데 세대마다 유행이 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개인마다 두상차가 존재하므로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인물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남아 있는 양반들의 수많은 초상화들을 보면 이마를 거의 덮는 스타일부터 이마를 거의 드러낸 스타일까지 다양한데 조선시대 초상화는 극사실주의로 유명한데, 점 하나 털 하나까지 사실과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다룬 드라마 아스달연대기 속 송중기는 상투머리가 아닌 더벅머리를 하고있다.고증오류일까?
(좌)갓을 벗고 상투를 보인 사진과 (우)신미양요 때 조선 사람들로 인물들의 상투 크기가 각각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에서는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있는데,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조치의 영향 때문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당장 주상인 고종의 의복부터 곤룡포의 용배 사이즈, 소매, 익선관까지 다 사이즈를 대폭 줄였는데 고종의 사진과 영조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고 합니다. 태조나 영조 등 이전 왕들과 달리 고종은 이마를 거의 까는 수준이 되면서 다른 양반들도 전부 갓 사이즈를 확 줄이고 망건을 높여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다른 것을 다떠나서 긴 머리카락을 관리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묶는 것인데 우리 선조들은 고조선 시기부터 상투를 틀며 관리해왔다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의식주_의복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잠업(누에치기)을 관장하게 한 기록 (단군세기)으로 볼 때, 고조선 이전 시대 때부터 한민족은 옷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양잠의 증거물로 보아도, 고조선은 상당한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고조선 후기 유적인 중국 길림성 후석산猴石山 유적에서 출토된 방직기를 사용하여 짠 마포는 당시의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고조선에서는 삼베, 모직, 명주 등의 옷감이 생산되었으며 바느질을 사용한 흔적도 보이는데 고조선 사람들의 바느질 솜씨는 상당히 꼼꼼했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 범의 구석 8호 집자리에서는 봇나무 껍질을 누빈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솜씨가 쇠바늘을 쓴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밀하였다고 합니다.함경북도 서포항 유적의 고조선 문화층에서는 뼈로 만든 바늘통 안에 바늘들이 보관된 것이 출토되어 고조선 사람들이 바늘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단추를 비롯한 치장용품이 발견되는데 당시 사람들이 단순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치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조선은 의복 제작기술이 발달해 있었고 길쌈하고 옷 짓는 것이 매우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는 것입니다.

서포항 침통과 군곡리 뼈바늘

고조선 시대의 복식에 관해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에는 “머리에 개수(蓋首)하는 법을 가르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의복의 정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의하면 “연(燕)나라 장수 위만(衛滿)이 조선에 입국할 때 추결만이복(椎結蠻夷服)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추결은 고대 우리나라 수식(首飾, 머리 장식)인 상투를 말하며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도 나타나는데 만이복은 중국 복식과는 다른 호복을 착용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따라서 고조선의 복식도 한족과는 달리 스키타이계 호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흰색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여기에 여우나 흰색 또는 검정색의 담비 털이 붙은 장의를 입었고, 머리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모자를 썼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은 부여의 의복 문화를 말한 것이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고조선의 복식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복식 문화에서도 백색의 광명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복식과 부여인의 복식

▒고조선의 의식주_주식

고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기록은 거의 없어 정확히 알길은 없지만 대신 당시의 유물이나 중국의 옛 역사 기록, 또는 고조선 멸망 후에 나타난 부여,고구려,동옥저 등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고조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후한서에는 고조선의 땅이 오곡을 재배하는 데 알맞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조선 사람들은 벼,조,기장 ,수수,콩 등을 주식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 외에도 개,돼지,소,말,양,닭 등 가축을 길러 고기를 얻고, 때로는 사냥을 나가 멧돼지,여우,곰,노루 등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얻었을 것입니다.평양시 남경유적에서 5천 년 전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벼의 종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短粒種이며 야생 벼가 아닌 재배종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 땅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고조선 사람들은 벼 외에도 조, 기장, 콩, 팥, 피, 수수 등의 잡곡도 재배하였으며 또한 개,돼지,소,말,양,닭 등 가축을 기르고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기도 합니다.또한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는데 고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무 외에 바리, 접시, 굽접시, 시루, 단지, 항아리 등 여러 가지 그릇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해줍니다.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 평안북도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입니다.압록강 상류,대동강 유역 외에 요서,요동반도 일대에서 출토

시루 : 고조선 사람들은 시루를 이용해서 곡물을 쪄 먹기도 했는데 시루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구멍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와 음식을 쪄먹을 수 있었다고 함.

민무늬 토기 :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토기임.붉은 간 토기와 가지무늬 토기는 무덤 속에 함께 묻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됨.

▒고조선의 의식주_주거지

고조선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집에서 살았으며 마을도 훨씬 컸을 것입니다.또 함경북도 웅기 지방과 평북 강계, 자성, 영변 등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고조선 시대의 주거 문화에서 이미 추운 북쪽 지역에서는 온돌을 만들어 난방을 했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고조선 후기부터 사용되어 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조선 성터 복원도와 청동기 시대 마을 상상도

고조선 역시 집을 짓고 성을 쌓었는데 집터의 경우 대부분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만은 남아있는데 움집의 형태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대전자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성터의 경우 판축(흙을 단계적으로 다지고 쌓고를 반복하는 방식)방식으로 성을 쌓았는데 이 방식은 진시황릉에서 사용된 방식으로 무려 진시황보다 1,800년전에 이미 우리의 선조들이 판축 방식으로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또한 지가영자 마을의 성터의 경우 현재는 2~3미터가 남아있을 뿐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터의 폭이 4~5미터에 달하며 성터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정도로 폭이 넓다고 합니다.흙을 중심에 쌓고 양 옆으로 돌을 흙과 함께 쌓은 협축성벽이라고 합니다.이 지가영자 마을의 고조선 성터의 경우 3만평에 달하며 성 안에는 600여기의 집터가 발견되었습니다.오늘날의 가족 구성원보다는 많았을 것이니 최소 6명으로만 잡아도 3,600명이라는 인구가 성 안에서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게다가 이 지가영자 마을의 성 주변에는 여러개의 작은 위성 성터가 발견되어 지가영자 마을의 성의 주인은 매우 세력이 강력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여기에 더해 고조선은 제정일치 국가이기에 예약 역시 발달했다고 하는데 만주 요령성 조양 하가점하층문화로 불리는 BCE 2000년경 청동기 시대 초기것으로 궁중 음악이나 제사 의례에 사용되는 악기인 석경이 출토되었는데 능원현 삼관전자에서는 편종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BCE 2000년경 전반기의 뼈피리가 발견되면서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예약이 발생해 독자적인 민족적 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입증해주고 있기도 합니다.음악으로는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서 공수,두열이 있었고 어아가는 신시(배달국)의 옛 풍속에 심신을 제사하고 맞이하는 음악으로 신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천자를 지낸 때마다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 신(삼신상제)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화합하였다 합니다.일반 백성들도 음악을 즐기고 가무를 즐기었을 거라 추정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후인 또는 공무도하가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진졸이었던 곽리자고가 어느 날 새벽에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하얀 미친 노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잡고 험하게 흐르는 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 아내가 따라와 말렸으나 듣지 않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그러자 그 노인의 아내가 공후를 타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를 부른 뒤에 그 아내도 물에 빠져 죽었다.곽리자고가 집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아내 여옥에게 하니 여옥은 공후를 타면서 그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공후라는 악기는 현악기로 중국에서는 서한 무제 때인 BCE 106년에 처음 만들어 진것으로 나옵니다.BCE 106년는 위만조선이 망하기 2년전으로 공후는 공후는 고조선에서 흔한 악기였기 때문에 반대로 고조선에서 서한으로 역수출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고조선에서는 공후,비파같은 현악기와 북,석경,편종과 같은 타악기,피리 등의 관악기를 골고루 갖추어 의례용 예악과 백성들이 즐기는 서민 음악이 함께 발달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천문학

단군조선 시기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에는 천문도가 새겨진 것들이 수없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면, 5~6 가지의 서로 다른 크기로 별자리들을 새겨놓았는데, 이것은 근대 천문학의 1~6 등급으로 별의 밝기를 나타낸 별자리 등급과 같은 것으로 단군조선 시기 고대 천문학은 고구려로 계승 발전돼 고구려에서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천문석각도를 남겼습니다. 국보 228호로 지정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본은 이조 태조 때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로서, 이것은 고구려의 천문학의 발전 수준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성좌도가 새겨진 고인돌 무덤과 향목리 2호 고인돌 무덤 별자리 실측도

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과 제첼제강기술_최강의 무기를 제련한 군사강국

청동가공기술은 단군조선 이전 시기에 벌써 시작됐지만, 단군조선 성립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청동기술을 보유하게 됐는데 고조선 청동기술은 다른 나라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구리 주석의 이원소 합금법을 사용한 반면, 고조선의 경우에는 구리 주석 납의 3원소 합금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합금 원소들 각각의 성질을 파악한 데 기초해서 용도에 맞게 합금비율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고조선의 청동기술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실증해주는데 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의 선진성과 높은 기술 수준은 청동거울과 검집에 새겨진 번개무늬가 매우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데서도 확인되며, 직경이 0.25mm 밖에 안되는 가는 구리실을 뽑아서 천을 짜듯 엮어 만든 강상무덤의 청동그물 장식품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는 구리실을 뽑아서 그물을 엮는다는 것은 고도로 높고 섬세한 제련가공기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의 백미는 잔줄무늬 거울입니다. 1960년대 충남에서 발견된 잔줄무늬 거울은 서기 전 4세기경의 유물인데, 지름 21.2cm의 이 거울 안에는 모두 1만3300개의 가는 선과 100여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0.3∼0.5mm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주물품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잔줄무늬거울은 고대 우리 선조들의 청동가공기술과 문화예술수준의 우수성을 보여주는데 잔줄무늬거울은 그 형태와 도안의장에서의 독특성, 무수한 잔줄의 세밀한 조직구성과 한점 티도 없이 주조한 주조술의 정교성 등을 통하여 고조선의 고대청동공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의 나라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인돌들은 강력한 왕권이 아니라면 곳곳에 세울 수 없는 것이며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은 세밀한 청동가공기술이 필요한 당시의 반도체 기술력의 집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다뉴세문경이라는 이름은 유가 많고 세밀한 문양이 있는 거울'이란 뜻으로 여기서 鈕(뉴//유)란 한자는 거울을 매달 수 있도록 옛날 거울의 뒷면에 만든 고리, 또는 도장의 손잡이(인꼭지) 부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다뉴(多鈕)'란 거울 뒷면의 고리가 많다는 뜻입니다.이름처럼 거울 뒷면에 유가 2개 있으며 현재는 '다뉴세문경'이라는 이름보다는 '정밀한 문양이 있는 거울'이란 뜻인 정문경(精文鏡) 또는 잔무늬거울이라는 우리말을 정식명칭으로 사용합니다.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청동거울'은 한반도 남부지역과 중국,일본에서도 흔하게 출토되는 대표적인 고대유물로 알려져 있는데 1960년대 논산시에서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청동거울 한 좌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름 21.2 cm 안을 큰 원 세 개로 구획을 나누고 0.3 mm 간격으로 선 1만 3천여 개로 세밀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적이 전혀 없는 새로운 청동거울이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이후 이런 '다뉴세문경'들은 전남 순균 대곡리 마을(1971년),충남 예산군 동서리 마을(1978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갈동 유적(2007년) 등 한반도 곳곳에서 추가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다뉴세문경은 북방계 청동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중국보다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진보한 당시 청동가공기술의 집약체였다 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제철제강기술

고조선의 제철제강기술은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사대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학자들은 중국 연나라로부터 철기문화가 수입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고조선의 제철제강 기술은 고조선 사람들의 독자적 발명품으로 고조선 시기 연철이 생산된 것은 기원전 2000년기 후반입니다. 철은 자연계에 가장 많고 널리 분포돼 있지만 쓸모가 있으려면 철과 탄소의 합금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고조선 주민들은 처음 연철을 만들고 그것을 여러 번 열처리하는 방식으로 강철을 얻어냈다는 것입니다.고조선에서 연철생산단계를 지나 용해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단계로 발전한 것은 2000년기 말경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 2호 집터(기원전 2000년기 말)에서 나온 쇠 조각과 쇠 슬래그(광물을 제련할 때, 금속을 빼내고 남은 찌꺼기)를 통해 확인됩니다. 이 쇠 슬래그는 이곳에 철광석을 녹이는 용해로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고조선 영역은 아니었지만 고조선의 영향 하에서 경제와 문화가 발전했던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 구역 제5문화층(기원전 2000년기 말~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 유적)에서는 쇠도끼가 발굴됐는데 이 쇠도끼는 완전히 녹은 상태의 선철로 주조된 것이었으며, 제 6문화층(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에서는 강철제품도 발굴됐습니다.

고조선 시대의 석궁과 석궁에 들어간 부속품
고조선 중장보병과 기병의 고증 복원도-고조선의 갑옷이 인상적인 것은 고조선의 투구로 추측되는 둥근 형태의 유물은 요서 지역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시기는 대력 BC 1000년~BC 600년대로 상당히 이른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조선의 갑옷은 가죽 위에 원판 형태의 둥근 청동 유물(청동 단추)들을 이어붙여 미늘 형태의 갑옷으로 비록 상상도이기는 하지만 당시 고조선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에 가깝게 고증에 맞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연철 및 선철생산에서 쌓은 오랜 경험과 기술에 토대해 기원전 7세기경 마침내 주강기술을 개발 도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러한 주강제품은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에서 나온 쇠도끼, 요녕성 무순 연화보 유적, 평양일대 나무곽 무덤에서 발굴된 철제 무기 및 공구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죽리 부락터 유적에서는 도끼 수십개, 낫 5개, 괭이 3개, 호미 1개가 드러났고 연화보 유적에서는 도끼 60여개, 괭이 1개, 호미 2개, 낫 2개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고조선 주민들이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부터 주강기술 공학상 선철을 강철로 전화시키는 방법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기술공정이 줄기차게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고조선 이웃 지역인 구려영역에 속해 있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유적(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서는 강철 주조품이 주머니 쇠도끼가 발굴됐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고조선의 제철 제강기술이 이웃 지역인 구려나 부여, 진국지역으로 광범히 전파돼 우리나라 전역에서 주강제품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됐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주강제품의 생산과 그 광범한 보급은 고조선 국가의 경제와 문화,그리고 군사력을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고조선식 마차 혹은 전차 복원도
고조선 마차에 사용되었던 청동 부속품들
고조선 마차 및 기병마에 사용한 말 얼굴 가리개

고조선은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으로 2000리 영토를 빼앗겨, 요양하까지 밀렸지만 연 나라의 부흥기를 이끈 진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화됐고, 고조선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대릉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패수를 경계로 삼은 후 약 200여 년 동안 중국(연, 진, 한)과 큰 전쟁은 없었지만 중국 한 무제에 들어서 고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고조선 침공을 결심하고 전쟁 명분을 찾으려고 섭하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으며 항복을 강력히 요구하지만 고조선이 크게 반발하자 성과없이 돌아가기 두려웠던 섭하는 국경선인 패수에서 고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 도망쳐 버립니다.고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에 이러한 행동에 대한 단호한 보복조치로서 군대를 동원해 불의에 요동군 동부도위를 습격해 살인자 섭하를 처단하게 됩니다.우거왕의 섭하 처단 행동은 고조선이 한나라를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자신감은 고조선의 제철제강기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결국 한 무제는 섭하 처단사건을 구실로 기원전 109년 가을 육군과 수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고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합니다.누선장군 양복은 약 수군 5만명을 이끌어 나오며 육군 역시 이에 준하는 병력 정도로 최소 10만명에서 12만명 선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좌장군 순체는 요동(만리장성 동단 끝 안팎)과 연, 대(베이징 부근) 지방의 군대를 긁어모아 패수(대릉하)를 건너 육로를 통해 고조선을 공격했는데 한 무제의 군사들은 여러 해 동안 북쪽의 흉노와 남쪽 남월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투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에 고조선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었습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한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어전투를 벌였고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전쟁은 한해가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고조선-한 나라 전쟁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 단계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의 수륙병진공격을 좌절시킨 시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강화교섭 시기이며, 세 번째 단계는 한나라 침략군의 내부 알력과 모순을 이용해 왕검성 포위공격을 저지,파탄시키기 위해 투쟁한 시기이며, 넷째 단계는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 결전을 벌인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고선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결사항전을 지휘하던 성기 장군이 살해 당하면서 전쟁의 승리는 한 나라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표면적으로는 한 나라의 승리였지만 전쟁 결과를 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의 서북쪽 일부 지역에 기원전 107년까지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을 설치했을 뿐이고, 고조선의 대부분 지역은 고조선 군민들이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조선 전 지역을 장악,지배하려던 한 무제의 전쟁 목표는 실패하고 만것이었습니다.사마천의 사기에 나와 있듯이 고조선은 한 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고조선–한 전쟁을 이끌었던 한나라 측 장수들 대부분이 전쟁패배 책임을 물어 사형되거나 서민으로 강등됐다는 사실이 명확히 증명해줍니다. 당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군사력은 대등한 상태였고 전투력 역시 고조선이 높았으면 높았지 약하지 않았지만 고조선 통치집단 내부에서 나타난 변절자들의 투항과 배신 때문이며 이는 고구려 멸망 원인과도 일맥 상통합니다.아무리 고도의 문명과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꺽이고 약해지면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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