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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태양의 나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_추모왕이 국호를 고구려라 이름 지은 의미와 뜻

by 마음heart 202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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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이 국호를 고구려라 이름 지은 의미와 뜻

위대한 태양의 나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한국의 고대사를 비롯하여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진취적이면서 대외적으로 가장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쳤던 국가가 고구려입니다.물론 고구려 멸망이후로 한국의 역사는 점차 한반도로 영역이 축소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잃어버린지 오래지만 한류가 전 세계를 휘몰아치는 현상을 목격하는 21세기에 들어서 군사력으로 중국과 동북아 영토 전쟁을 벌였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문화적인 기상으로 부활한듯한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고구려는 기원전 37년, 22세 되던 해에 주몽이 건국한 고대 국가입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졸본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홀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두 번째 부인 소서노를 맞이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재물이 많아 주몽의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선 주몽이 졸본부여에 오자 그곳의 왕이 그를 큰 인물이라 여겨 자신의 둘째 딸을 주어 결혼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2006년 방송한 드라마 주몽-송일국과 한혜진 등이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고증 자체는 판타지물에 가까웠다

▣부여의 주몽,고구려 건국시조 추모왕이 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에 의하면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구려라는 나라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추정되는데 한 국가의 시조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서 상당히 흔했으며 해모수의 하늘과 유화의 물이라는 상징으로 볼 때, 고구려의 뿌리는 농경 사회라는 설도 있습니다.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박(狛)=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구려도 고조선처럼 곰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이외에도 부여, 고구려, 고조선 모두 소 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으며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경에 작성된 위략에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삼국지가 편찬되었을 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합니다.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고 하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윷놀이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부여에서 유래한 놀이가 아닌 고조선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추정컨데 두 국가 간의 친연성은 상당했다고 볼 수 있으며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일본어에서 고구려= 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입니다. 狛의 경우에도 일본어 훈독은 koma라고 합니다. 후에 안장왕의 후손이 도일하는데, 그들은 狛으로 개칭했으며, koma라고 읽힌다고 합니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어로 정착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백제의 경우, 웅진은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합니다.

1854년 막부 말기의  우키요에 작가이며 그림책 《조선정벌기》에서 사용한 필명은 '하시모토 교쿠란'(橋本玉蘭)인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貞秀)의 그림책 《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조선정벌 과 관련된 내용들을 삽화와 함께 담고 있다.특이하게 임진왜란뿐 아니라  기자조선의 전설이나 백강 전투 등  삼국시대 의 일화들도 삽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繪本(에혼, 현대  신자체 로 絵本)은 한자 뜻 그대로 그림책을 의미. 위의 그림의 내용은 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느 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 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고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다가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가가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는데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으며 이후 유화는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알을 낳게 됩니다. 알의 크기는 5되였는데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이었습니다.동국이상국집 동명왕 편에 따르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걸으며 말을 깨우쳤고 자라서는 힘도 굉장했는데, 어느 날 왕자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왕자들이 하나도 못 잡아 쩔쩔매고 있을 때 혼자 노루를 무더기로 잡고 있었습니다.이에 샘이 난 왕자들이 노루를 모두 빼앗고 주몽을 나무에다 묶어놓고 돌아가 버렸는데 다음 날 주몽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는 묶여서 나무를 등에 진 채 그대로 걸어 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를 비롯한 동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피살당할 뻔했고, 부인 예씨와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배 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 떠나게 됩니다. 이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 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습니다. 위에 소나무(기둥)가 있는 칠각형 돌(주춧돌) 아래에 부러진 칼의 일부를 묻어뒀으니 찾을 나이가 되거든 그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는 것으로 동명성왕은 떠날 때 오이,마리,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자신이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동부여를 탈출하였는데 동부여를 탈출할 때 깜빡하고 곡식을 놓고 왔는데 유화부인이 그걸 알고 비둘기 한 쌍에게 오곡을 전해주게 했다고 합니다. 동명성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비둘기 한 쌍을 보고는 어머니가 보낸걸 알아채고 활로 쏴서 떨어뜨렸고, 오곡을 얻은 후 물을 뿜어 비둘기를 다시 살려서 날려보냈습니다.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 땅에 도착하였고, 훗날 이곳을 도읍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구삼국사를 보고 쓴 이규보의 동명왕 편에도 거의 동일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존재합니다.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도 해당 설화가 나와있지만 다만 광개토왕릉비는 왕의 권위와 그의 신성함에 대해서만 적혀있을 뿐 시련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주몽설화 해석 

주몽설화는 일단 부여 동명왕 설화를 차용했다는 것입니다.여기에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호하고 어머니만이 명확하다는 점인데 이것에 대해 사가들은 모계 사회의 유풍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게다가 이런 구조가 영웅의 신비성을 더해주는 구조적 장치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 혹은 동부여의 금와왕이라 암시하고 있으며 한단고기라는 사서에는 해모수의 증손인 고모수 즉,불리지가 바로 주몽의 아버지라고 적혀있습니다.이렇게 주몽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모호한 이유는 당시 주몽이 부여에서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에 기인합니다.부여에서 인정받지 못한 주몽은 천신만고 끝에 낯선 땅에 고구려라는 나라를 건국하였고 부여와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고대 역사를 보면 고구려와 부여의 공방전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주몽은 자신을 낳은 부여에 대해서 적대감까지는 아니라해도 부여를 뛰어넘고 싶었을 것입니다.비록 자기 자신을 낳았지만 자신을 죽이려한 부여를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렇기에 주몽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은 것일 것입니다.당대 고구려인이 남긴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주몽의 아버지가 일월지자, 즉 천제의 아들이라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군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주몽의 혈통이 천제지자라는 점을 미루어 주몽의 아버지는 최소한 부여의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또한 주몽 설화를 보면 유화부인의 임신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해모수와 관계를 맺어 집에서 쫓겨난 유화가 우발수에서 금와왕을 만나게 되고 금와왕이 그녀를 왕국으로 데리고 옵니다.금와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여자를 방안에 가두었더니 여자에게 햇빛이 비추었고,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가면서 비추었다!는 기록에 대해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였습니다.

여자를 방안에 가두었다.→유화를 강제로 방으로 끌고 갔다.
여자에게 햇빛이 비추었고, 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가서 비추었다.→유화를 욕보이려 하니, 유화는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피했으나 결국은 욕을 당하고 말았다

위 해석에 의하면 해로 상징되는 고귀한 인물,즉 해모수라 자칭하는 부여의 왕족이 하백의 딸 유화를 강제로 임신시킨 것이고, 유화가 알을 낳았을 때 금와왕이 그 알을 버리라고 한 것은 금와왕으로 상정된 주몽의 친아버지가 그 아이를 버리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백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백은 물의 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백이 물, 즉 강가를 기반으로 하는 대호족이었음을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물고기와 자라가 도왔다는 것은 하백 세력이 외손주인 주몽을 도와준 것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덧붙여 하백은 고대의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대인에게 있어 물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 물을 다스리는 하백은 고대인들이 숭상한 집단이었을 것입니다.고조선을 세운 왕검의 부인이 하백의 딸이라는 점을 보면 하백의 혈통은 고귀한 신분이었을 것입니다.유화가 아버지인 하백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하백이 화를 내며 유화를 쫓아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유화와 해모수로 상징되는 부여의 왕족 사이에 태어난 주몽은 날 때부터 그 자질이 특출났는데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주몽이 영웅으로써의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나라를 호령한 서나라의 서연왕 역시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고, 부여를 세운 동명왕 역시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영웅으로써 자질을 보인 주몽은 7세의 나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신궁으로써 이름을 드높였는데 주몽의 본래 이름은 추모로, 주몽은 그가 활을 잘쏘는데서 유래한 그의 별명이기도 합니다. 부여어로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나고 자라면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는 주몽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부여의 대소왕자와 그의 6형제들로 대소는 틈만 나면 아버지인 금와왕에게 주몽을 죽이고자 하였지만 그때마다 금와왕의 보호로 주몽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와왕은 주몽을 대소로부터 지켜내고자 주몽을 목장 마굿간지기로 보냈는데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서 준마와 비루먹은 말을 구분시켜 준마에 게는 먹이를 조금 주어 야위게하고 비루먹은 말은 살을 찌워 금와왕으로부터 준마를 선물로 하사받기도 합니다. 활을 잘 쏘고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주몽이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특출함을 의미하며 군사적으로도 특출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원전 59년(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한단고기의 기록을 따르면)주몽은 마침내 절친한 벗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탈출하는데 어머니 유화부인이 대소와 일곱형제들이 주몽을 죽이려는 것을 알아내고 주몽을 탈출시킨 것입니다.이 때 주몽은 부여에 예씨라는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기에 주몽은 훗날 자신의 자식이 찾아올 수 있도록 자신의 신표를 일곱모난 돌 위의 소나무에 묻고 부여를 탈출하 였습니다.동부여를 탈출한 그는 북부여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북부여는 고무서란 임금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주몽의자질이 특출함을 알아본 왕은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둘째 딸을 주몽에게 주어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기원전 58년 고무서는 후사가 없어 사위인 주몽에게 북부여를 맡기고 세상을 떠납니다.기원전 58년 주몽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고구려를 세운 시조 추모왕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반이 없는 주몽을 북부여의 원로대신과 귀족들이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고 결국 주몽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지지해줄 사람을 물색했고, 그 사람이 바로 졸본부의 수장 연타발이었습니다.연타발은 소금과 생선장사를 통해 거대한 부를 얻은 사람으로 주몽은 연타발의 딸이자 과부인 소서노와 정략결혼하였는데 소서노와의 결합으로 주몽은 왕으로써 입지가 강화되었고, 고구려의 국력 또한 강해졌습니다.

주몽은 맨 손으로 고구려라는 제국을 세운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수성가형 인물로 물론 소서노라는 조력자와 고무서의 사위라는 특권이 있었지만, 주몽의 고구려 건국은 맨 손으로 이루어낸 신화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뛰어난 자질로 나라를 건국한 영웅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몽은 여타 다른 나라들의 창업군주와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고구려 건국후 주몽은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펼칩니다.주변의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개마국, 말갈족 등을 접수하고 한나라의 현토군과 맞서 대승을 거두는 등 주몽은 군사적 인 면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군주의 정복 전뱅은 왕권 강화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자신의 군대 혹은 호족의 군대를 자신의 수하에서 부리면서 영토를 복속시키면서 주뭉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졌을 것입니다.건국한지 얼마 안된 고구려가 이처럼 왕성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고구려의 모태가 된 북부여(구려국)의 국가적 역량과 소서노와의 결합으로 막대해진 재정력이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지만 정복군주로서의 주몽의 자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구려 정복군주의 상징인 광개토태왕 역시 몸소 군사를 이끌고 정복전쟁에 나선 걸로 확인할 수 있는데 주몽은 여기에 더해 신이한 탄생, 신궁으로서의 기량, 준마를 알아보는 능력 등 고대 영웅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들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주몽은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주몽은 맨손으로 나라를 건국한 자수성가형 창업군주이자 동시에 정복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주몽은 고구려를 부여와 한나라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만들어내고, 부여에서 온 아들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40세의 이른 나이에 붕어합니다.

▤추모왕_고구려 주변국들 병합하다

주몽은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과 성을 수축했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과 송양을 굴복시킨 후, 비류국을 다물도로 삼았는데 이때 비류국왕인 송양과의 일화가 구삼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류국 송양이 "너네 나라보다 우리 나라가 더 오래됐거든? 만든 지 얼마 안 된 너네 나라가 우리 나라 밑으로 들어오는 게 맞는 거 같은데."라고 하자 동명성왕 "나는 하늘의 자손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깝치는 꼴이 우습구나."라고 반박한다. 이에 송양이 활쏘기 대결을 청하는데 송양은 사슴 그림을 100보 밖에다 두고 활시위를 당겼으나 힘겨워했다고 한다. 반면 그 모습을 본 동명성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들고 오게 하고 100보 밖에 매달아 놓게 했는데 활을 쏘자마자 옥가락지가 박살이 나버렸다. 그걸 본 송양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송양이 떠나고, 동명성왕은 신하들에게 "저놈이 날 무시하는 건 우리나라에 멋진 뿔피리가 없어서 그래."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분노가 "제가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라고 한다. 그 말에 동명성왕은 "걔들이 꽁꽁 숨겨놓았을 물건인데 어떻게 가져오려고?"라고 하자 "왕께서는 천제의 아들이기에 각종 고난을 이겨내고 오셨습니다. 천제가 우리를 돌봐주는 한,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져온다. 한편 자신의 북이 사라진 걸 알게 된 비류국에서 고구려에 따지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동명성왕은 북에다 시커멓게 칠을 해 오래된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습을 본 비류국 사신은 데꿀멍해 버렸고 그 소식을 들은 송양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송양이 "고구려와 비류국, 어느 나라의 수도가 먼저 세워졌는지 확인해서, 더 일찍 세워진 나라 쪽을 섬기도록 하자!"고 주장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동명성왕은 궁궐 지으면서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마치 1,000년도 넘는 듯한 모습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걸 본 송양은 데꿀멍했다.

한편 동명성왕은 비류국 이후 행인국과 북옥저 역시 병합하며 고구려 700년의 기틀을 다지게 합니다.

冬十月 王命烏伊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겨울 10월, 임금이 오이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十年 秋九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태자 유리와 주몽의 죽음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고, 동명성왕 사후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와 그 두 아들 비류,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또한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주몽이 40세 때 승하하여 용산(龍山)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구삼국사의 동명왕 편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하며 제왕운기에선 특이하게도 동명성왕이 재위 중에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정치를 배워 내려왔고, 재위 19년 9월 하늘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아 거룩한 아들 유리(聖子 類利)가 보위를 이어 남은 옥편을 무덤에 묻었고 그것이 지금 용산(龍山)의 무덤이라고 한다.(제왕운기 하권 고구려기)또한 삼국사기기록엔 아들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손자 대무신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웁니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昨過永明寺작 과 영 명 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잠 등 부 벽 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는데
城空月一片성 공 월 일 편  성벽 하늘엔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석 로 운 천 추  오래된 조천석 위엔 천 년 세월의 구름이 흐르네.
麟馬去不返인 마 거 불 반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天孫何處遊천 손 하 처 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가?
長嘯依風岉장 소 의 풍 물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山靑江自流산 청 강 자 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더라.

/이색(李穡), 부벽루(浮碧樓)

주몽이 승천했다는 설화가 굉장히 많은데 어느 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편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옥편을 모셔서 묘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이 옥편은 비류국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지며 광개토대왕릉비와 문무왕릉비에서는 황룡을 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양에는 구제궁 옆에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 말엽에는 민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동명성왕이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기록상으로 동명성왕은 평양에 와 봤을 리가 없는데 왜 평양에 유물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기린굴은 몰라도, 조천석 정도는 평양에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는데 동명성왕은 살아 생전에 요동성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 성의 사당에서는 동명성왕의 갑주와 창을 모셔두고 있었다고 합니다.후대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봤을 때, 고구려가 장수왕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뒤 시조 신으로 동명성왕을 모시고, 이후 고려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평양, 즉 서경을 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유물일 가능성도 있으며 창이나 칼도 아니고, 국조가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어마어마한 성물을 옛 수도라고는 해도 수도가 아니게 된 곳에 계속 두는 것이 더 이상하기도 합니다.한편 고려비기라는 책에서 조천석은 연개소문이 초청해서 중국에서 불러온 도사들이 깨버렸다고 쓰여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멀쩡히 평양에 남아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생명이 그리 길지많은 않았던 동명성왕은 40세경에 병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정되며 평양에는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동영왕릉이 있는데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1994년에는 크게 개건하였는데 단군릉 수준의 리모델링까지는 아니지만 남한의 천마총을 의식하여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산성 오녀산성(졸본성) 전경

■주몽이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한 의미와 이유

주몽은 구려왕의 사위가 돼, 구려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됐는데 주몽은 왕권을 물려받은 후 구려라는 나라이름에 고자를 붙여 고구려라고 정했습니다. 이는 국호를 정할 때 구려라는 나라이름을 존중하고 계승했지만 새로운 나라 건설을 지향했던 주몽은 구려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지 않고, 구려의 앞에다 새롭게 고자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라 이름을 바꾼데 그치지 않고 그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국호에는 어떤 의미와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고구려라는 국호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졸본지역에는 일찍부터 고구려 족이 살았는데, 고구려라는 국호는 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는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역사서들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한데서 추론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기원전 108년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이후 한 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할 때 그 수현(중심현)으로서 고구려 현을 두었다는 기사가 후한서 등의 중국 역사서에 나옵니다. 고구려의 건국 기년을 기원전 37년으로 못 박아 놓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기사를 해석할 수 없어 편의적으로 고구려 건국 이전에 고구려 족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데 삼국사기를 비롯한 모든 국내외 역사책들에서는 일치하게 고구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 주몽이 나라를 세우면서 구려에 고자를 붙여 고구려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는 바, 고구려라는 말은 주몽이 건국하기 이전에는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나라의 조선 침공(기원전 108년) 훨씬 이전부터 주몽이 세운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이며 또 고구려의 구려(句麗)는 구루(溝婁)와 통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구루는 성을 뜻하는 고구려의 옛말로 성을 많이 쌓았던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을 잘 나타내며, 돌로 성을 쌓던 문화를 가지고 있던 구려 사회가 주몽을 만나 높을 고를 더해 고구려라 새로이 칭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으로 여진어, 만주어, 몽고어에서 고려를 솔코(솔호, 솔롱고스)라고 했다는 것과 연관시켜 고구려는 높은 성(높이 솟은 성)이라는 뜻을 가진 솔골(솟은 구루)의 한자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구려 백암성(본계에 위치해 있으며 연주성이라고도 하며 약 2km의 협축식 산성이다)


돌로 성을 많이 쌓았던 것은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이지,구려의 문화적 특징은 아닌데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구려까지 확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유적 유물적 자료에 의하면 구려시대에 쌓았던 성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에서 구려 사람들이 성을 많이 쌓았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성을 많이 쌓은 것은 구려와는 다른 고구려의 새로운 문화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몽이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했다’(광개토왕릉 비문)는 기사에서 주몽의 업적 중에 산성을 쌓았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여기로부터 고구려의 산성 쌓는 문화적 전통은 주몽 때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구려라는 국호의 유래를 구루(성)와 연관시키는 것은 아무런 타당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구려를 고을 골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수십 개의 고을들이 있었고, 골(골짜기)은 이르는 곳마다에 있었으니, 그것이 국호로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한자에서 ‘구’는 구부러진 물체를 가리키는 글자이고, ‘려’는 여행한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니 고구려 사람들이 살던 고장에 산이 많아 구불구불한 길로 다녔기 때문에 그 지세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한자의 뜻으로 나라 이름을 해석한 시도인데, 구려라는 한자표기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자의 뜻을 가지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또한 고구려라는 국호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이지 구려는 아니므로 이 견해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고려’는 산고수려(산은 높고 물은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지은 국호라고 해설해 놓았는데,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국호를 좋은 뜻을 가진 ‘고려’로 약칭한 것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고구려’ 라는 국호에 대한 해설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거루, 거허, 주리, 과하 등 한자 단어의 뜻과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견해도 있으나 억지로 한자의 뜻, 중국의 옛 일과 연결시켜 본 해석으로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고구려 국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고구려라는 국호가 후세의 호칭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지은 자기 나라 이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다. 구려와 고구려는 명백히 자기 나라 이름으로, 그 작명자는 당사자들입니다. 구려라는 나라이름은 구려 왕실에서 자기 나라 이름으로 지은 것이며,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고구려의 창건자인 고주몽이 자기 나라 이름으로 지은 것으로 다른 나라 사람이나 후세 사람들이 나라 이름을 지어주는 법이란 없습니다. 후세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지어 부른 이름은 국호가 아니라 별칭에 불과합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후세사람들이 단군조선 시기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가리키는 별칭이었지, 당시 고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정한 국호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정식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은 모두 국호이고, 해당 나라 왕실에서 지어 부른 이름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이두식으로 표현된 것도 있는데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도 이두식으로 표현된 나라 이름입니다.그리고 어느 나라나 국호는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지향을 담아내며, 나라를 세울 때 지배세력들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명명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 문화적 특징이 자연스럽게 국호로 되는 법이란 없습니다. 물론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자기 나라의 자연지리적 특징이나 문화적 특질을 반영할 수 있지만 자연지리적 특징이나 문화적 특질을 반영할 때에도 자연스럽게 국호로 되는 것이 아니며 그 나라를 창건한 세력들에 의해 창건의 뜻과 지향이 반드시 담기기 마련입니다. 

▧고구려 국호의 의미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 광개토왕릉비


고구려라는 국호의 유래를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국호가 제정된 과정을 알아야 하는데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는 바대로 고구려라는 국호는 기존에 있었던 구려라는 국호에다 고자를 붙여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라는 국호의 유래와 뜻을 해석하려면 구려라는 국호의 뜻을 파악해야 하며, 동시에 고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구려라는 말은 우리나라 고어에서 거루, 거르, 거룩하다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오늘날의 언어로 해석하면 위대하다, 성스럽다, 크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 쓰이는 신물로 청동거울을 사용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청동거울을 매우 신성한 존재로 귀중히 여겼기 때문인데 고대에서 거울은 거우로(훈몽자회)라고 불렸습니다. 즉 구려라는 말과 거우로라는 말은 어원이 같으며 양자 모두 신성하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려는 위대한 나라,신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말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다음으로 우리나라 고어에서 고(高)는 해(解)와 같이 ka로 발음됐고, 그 뜻은 해(태양)를 가리켰습니다. 고(高)와 해(解)가 같은 말을 한자로 옮길 때 다르게 옮겼을 뿐이라는 것은 고주몽의 후손인 유리명왕, 대무신왕, 모본왕의 성씨가 해(解)였다는 삼국사기 왕력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 기사에서 주몽이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정하고 고로 성씨를 삼았다고 했는데, 고주몽의 직계 후손들인 유리명왕 대무신왕 모본왕의 성씨를 해(解)씨로 했다는 것은 고씨가 곧 해씨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高)와 해(解)는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옮겨 놓은 것으로 나라 이름에서 고는 태양의 나라, 으뜸가는 나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라는 나라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태양의 나라,신성한 나라,태양(신)의 후손이 다스리는 신성한 나라라는 뜻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는 광개토왕릉비에 추모왕(주몽왕)은 천제의 아들이라고 했고, 모두루 묘지명에서는 고구려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나라이고 시조 동명왕은 해와 달의 아들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과 부합됩니다. 고구려와 조선은 모두 태양의 나라라는 뜻을 함께 담고 있는 나라 이름으로 단군 조선의 국호는 조선이었는데, 이는 밝게 빛나는 아침의 나라,태양이 솟는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대 우리나라의 나라 이름들에는 모두 태양이 솟는 나라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국호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지향, 사상관념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법인데, 우리나라의 역대 국호에 태양이 솟는 위대한 나라라는 의미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밝음(태양)을 숭배하는 사상과 신앙 체계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러한 밝음(태양) 숭배 사상과 정서, 신앙체계는 멀리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가까이는 신석기 시대에서부터 형성되어 계승됐습니다. 이러한 밝음 숭배 사상과 정서, 미감, 신앙체계를 갖고 있던 우리 선조들은 동아시아 최고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국호에 담았던 것이며, 그 이후 모든 국가들이 이러한 뜻과 지향을 반영해 나라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이러한 연유로 우리나라 역대 국가의 명칭에 이러한 의미가 담기게 된 것입니다.고구려는 약칭으로 구려,고려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구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전신국가 이름을 그대로 눌러쓰는 버릇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유연에서는 고구려를 조선이라고 했고, 중국에서는 이씨조선을 고려라고 불렀던 관례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고구려를 구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고려는 고구려사람 자신들이 늦어도 5세기 이후 약칭으로 쓴 말입니다. 중원고구려비에서 이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는데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5세기 후반에 세워진 고구려 석비인데, 비문의 서두 부분에 고려대왕이라는 문자가 보입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람 스스로 자기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약칭해서 불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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