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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주몽)의 고구려 최초 도읍지_졸본성은 환인 오녀산성이 아니라 중국 대륙 산둥성에 있었다!

by 마음heart 202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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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주몽)의 고구려 최초 도읍지

졸본성은 환인 오녀산성이 아니라 중국 대륙 산둥성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최초로 졸본이 등장하는 졸본성은 7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가진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로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이후 제2대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40여 년간 초창기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동명성왕 고주몽은 세 현자를 만나 신하로 삼은 뒤, 아래의 선언을 하며 공식적으로 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궁전을 지을 겨를이 안되어 졸본천 비류수 가에 초가집을 지어 임시로 거주했다고 합니다.

"난 경명(景命)①을 받들어 원기(元基)②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급하게 궁실(宮室)을 만들지 않고 단지 초가집을 지어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거주하였다.

①천명의 다른말
②원대한 기틀, 즉 국가를 의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중

동명성왕 고주몽은 고구려를 창업한 뒤 비류국도 장악하고, 이런저런 기후도 나타나던 재위 4년째 되는 해, 드디어 성곽을 세우고 궁궐을 지었는데 이때 지은 성을 졸본성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엔 궁정(宮庭), 왕대(王臺)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성곽(城郭), 궁실(宮室)을 세웠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4년(bc 34) 7월 중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중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삼국유사는 아예 "고구려가 졸본부여다!" 하고 단정짓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 설화는 이런 게 있고 저런 것도 있더라~" 하는 것이 차이입니다. 어쩌면 고구려 시조는 졸본에 와서 바로 고구려라는 독립 국가를 세운 게 아니라 일시적으론 '졸본 지역의 부여국'이라는 부용국인 척 했을 수도 있습니다.

(왕께서) 비류곡(沸流谷)에 있는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수도를 건설 하셨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을 밟고 승천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세 사람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거주하였다.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중

고구려의 국가 공식 표기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엔 '홀본'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졸본'과는 앞의 ㅈ, ㅎ 차이가 있는데 이는 옛 지명이 전부 순우리말이었고 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서로 대충 비슷한 한자들을 썼기 때문으로 사실상 졸본 = 홀본인 셈입니다.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선 동명성왕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흘승골성에 도착해 거주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조상 우대를 위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왕호로만 부르는 것과 대조적이며 또한 졸, 홀본과 전혀 다른 흘승골성이란 지명을 언급하는데 어째서 이런 발음상의 큰 차이가 나는 지역명이 나오는지는 아직 미상입니다.삼국유사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승골성(升骨城)에 내려 왔다고 했는데 해모수 설화와 헷갈렸을 수도 있습니다.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 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는데 '골'이라는 말이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고 합니다.그렇다면 동명성왕 고주몽이 창업한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는 대충 비슷한 지역을 소개하고 있는데 '비류수(비류곡) 위에 있는 졸본(홀본)으로,광개토대왕릉비는 조금 더 자세한데 홀본 서쪽에 있는 산에 성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산성을 현재 한•중 양국 사학계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보고있습니다.그런데 왜 굳이 '홀본 서쪽 산'이라고 했을까. 광개토대왕릉비는 시조 추모왕이 '홀본 동쪽'에서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즉 홀본이 단순히 오녀산성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녀산성과 다른 성들을 아울러 불렀을 수도 있으며 또한 고구려의 전기 ~ 중기 수도는 평지성과 산성 두 성이 동시에 쓰였습니다. 이를 통해 현재의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이 오녀산성의 짝인 평지성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하고성자토성과 오녀산성은 '혼 강'이라는 강을 따라 가면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하고성자토성은 초기 한성 백제의 위례성과 같은 거대한 토성이며, 국내성과 비슷하게 네모난 모양이었으며 나합성(喇哈城)역시 평지성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고구려 첫번째 수도_졸본성(卒本城)/오녀산성(五女山城) / 흘승골성(紇升骨城)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졸본성에 위치하는 산성으로 메사 지형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本溪市)가 관할하는 환런 만(주)족 자치현(桓仁 滿族 自治縣)에 위치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졸본이라는 수도 자체에 피난성으로서 오녀산성이 존재했으며 이와 반대되는 개념의 일상적인 도성이었던 평지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보로는 하고성자토성, 나합성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현재 오녀산성의 원래 명칭으로는 흘승골성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흘승골성이라는 명칭이 지칭하는 대상이 오녀산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에 가까울 뿐 완전히 맞는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은 오녀산성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오녀산성이라는 이름답게 중국 현지에서는 오녀산성에 오녀(五女) 설화와 관련된 석조물을 설치한 바 있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시도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흘승골성(紇升骨城): 위서 열전 제88 -고구려조-에서의 명칭.
: 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다. 오녀산성이 졸본성이 맞다면, '골'이라는 말은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오녀산성(五女山城): 현재는 이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오로산성(五老山城),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녀산성이 소재하고 있는 환인현 일대가 졸본으로 비정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사실에 수렴하므로 이 일대를 졸본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서에 등장하는 "졸본성"의 실물로서 오녀산성이 거론될 수는 있지만 오녀산성 말고도 하고성자토성이라는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졸본성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역사적으로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맨 처음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웠으며 이후 기원전 37년, 동명성왕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수도로 삼은 졸본성(卒本城)이 바로 이곳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40여 년 후 제2대 유리명왕 대에 이곳에서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 위치한 국내성과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훗날 고려시대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 불리게 되는데 안정복이나 정약용 등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이 우라산성의 이름에서 유추해서 우라산성이 고구려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비정하기도 했습니다.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때 요동성을 공략하기 이전의 선발작업으로 이성계가 병력 15,000명(기병 5,000명, 보병 10,000명)을 이끌고 이 성을 공략하여 함락하고는 요동정벌의 중간기지로 활용했습니다.그 외에도 세종대왕 시대에 4군 6진을 개척할 당시 윤관의 동북 9성 중에서 최북단에 있는 공험진까지 우리의 영토라고 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라고 한 기록도 있지만 세종 대에도 공험진 위치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을 만큼 위치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이렇게 세종 대에 압록강 유역으로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적이 여진족 소굴이었던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고, 이어서 평안도 도절제사가 된 이천(李蕆)이 다시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며, 오녀산성 인근까지 진출하여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최윤덕, 이천이 4군을 개척했으며 두만강 유역으로는 김종서,이징옥,황보안이 여진족을 정벌하며 6진을 개척했습니다.오녀산성은 탁자 모양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에 남북 1.5 km, 동서 0.3 km, 전체 약 8 km의 규모에 주변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과 동가강이 흐르고, 200 m 높이 절벽 위에 산성이 있어서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오녀산성 안에는 마르지 않는 천지(天池)란 연못이 있어서 비상시에 성의 식수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오녀산성 전경
오녀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혼강

오녀산성 성벽의 축성방법은 남벽과 동벽의 일부는 협축으로 구축되었으며 서벽과 동벽의 나머지 구간은 편축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성벽에 대한 단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 내부의 구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면석이 무너지고 노출된 뒷채움돌의 상태로 보아 편축성벽이라고 하더라도 경사면을 ㄴ자 형태로 파고, 양끝단에 면을 맞추어 정연하게 석축을 하되 위로 올라가면서 좁혀쌓아 사다리꼴 모양이 되도록 하고, 내면은 흙으로 다져서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오녀산성의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대략 6가지 정도로 구분되는데 장대석과 쐐기모양의 성돌, 길쭉한 북모양의 뒷채움성돌, 판석, 잡석, 쇄석 등으로 이러한 성돌은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되었는데 성벽의 기단부에는 가공하지 않은 장대석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위로 올가가면서 점차 작고 가공된 성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녀산성에 사용된 쐐기형 성돌의 크기는 너비 50cm, 길이는 55cm, 두께는 20cm 정도의 성돌이 많으며 외면의 중간부분이 주변보다 약간 도드라지도록 다듬은 것이 특징입니다. 뒷채움돌은 길이가 63~76㎝로 면석보다 길이가 길고 너비 19~26㎝, 두께 12~18㎝ 정도이며 성벽은 한단 한단이 수평을 유지하도록 한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들여쌓기를 하여 성벽의 기울기는 대략 80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위가 있는 부분은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여 성돌을 바위의 형태에 맞추어 다듬어서 쌓았습니다.

(좌)오녀산성 정상부에 형성된 암벽(가운데)오녀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좁은길(우)복원된 오녀산성 건물
(좌)오녀산성 연못 천지(가운데)오녀산성 건물지(좌)산성내에서 발굴된 주거 유적
(좌)오녀산성 동문지(가운데)오녀산성 서문지(우)오녀산성 남문지
오녀산성내에서 발굴된 주거 유적

성벽의 정상부에는 여장이 구축되어 있는데 여장은 성가퀴 또는 화살을 막는 곳이라는 뜻에서 ‘살받이터’라고도 합니다.
여장은 삼국시대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녀산성에는 이러한 여장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동벽의 일부구간에서 확인되는 여장의 현존 높이는 80cm 정도이며 너비는 대략 1-1.5m 정도로 타구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여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어떤 형태의 총안이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성벽의 여장 안쪽에는 특이하게도 주통이라고 하는 너비 30cm 정도의 방형 구멍이 있었는데 이러한 주통시설은 오녀산성외에도 환도산성과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등 고구려 전기의 산성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오녀산성에서는 2구간과 5구간에서 19개가 발견되었으며 주통과 주통의 간격은 0.8~2m 정도로 일정치 않으며 구멍의 크기는 대략 20-30cm 정도이며 깊이는 70-80cm 정도이며 평상시에는 덮어놓았던 뚜껑돌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너진 오녀산성 성벽의 모습
복원된 오녀산성 성벽 부분
일부 원형을 보전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벽

이러한 주통의 용도에 대해서는 쇠뇌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와 굴림통나무(滾木)를 매다는 밧줄을 묶는 기둥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발굴보고서에서는 구덩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에 나무판을 연결하여 몸을 숨기기 위한 치첩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녀산성에는 정상부와 동벽 내부 두 곳에 샘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성정상부에 있는 집수시설은 길이 11.5m 너비 5m 깊이 1m 정도의 장방형으로 구축되었으며, 집수시설의 동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이 흘러들도록 하였습니다.오녀산성에서의 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 등 3개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 동문은 어긋문 형태의 성문으로서 후기의 성문처럼 옹성형태를 취하지는 않고 있으나 ㄱ자 형태로 회절한 동벽이 1자형의 남쪽성벽과 90도 정도의 각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문구부양쪽 성벽이 치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문구부의 너비는 4.3m 정도로 서문은 오녀산 정상부의 서쪽에 있는데 서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너비는 3m 이며, 문의 남쪽과 북쪽에는 성벽을 이어 쌓았는데 북쪽의 성벽은 ㄱ자 형태로 회절하도록 하여 마치 치나 적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성돌의 면석은 쐐기모양의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으며, 뒷채움돌은 길쭉한 마름모꼴의 성돌을 사용하였습니다. 문지의 바깥쪽 양쪽바닥에는 구멍이 파여진 확돌이 놓여있고, 문 안쪽부분의 양쪽에는 凹자 형태의 위실(衛室)이 구축되어 있습니다.남문은 남벽의 동쪽 끝에 있는데 산성의 동남모서리에 해당한다. 남벽의 동쪽은 절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쪽부분만 높이 4.3m 정도의 지상성벽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문지부분의 남벽 마감부분은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쇄기형의 성돌로 협축 성벽을 구축하였습니다.

오녀산성 성벽의 수구로 보이는 구멍

▨졸본의 고구려 평지성 하고성자토성

하고성자토성은 중국 길림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판축법으로 축조된 평지 성곽,토성으로 혼강(渾江) 서쪽의 평지에 자리잡은 육도하자향(六道河子鄕) 하고성자촌에 위치하는데, 여기서 혼강을 따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오녀산성(五女山城)에 도달합니다. 성 북쪽 1.8km 지점의 상고성자촌에는 고구려의 고분군이 있는데 성의 평면은 방형(方形)에 가까우며, 70∼80년 전 대홍수로 혼강이 범람하면서 성의 동벽과 동쪽 일부분이 유실되었으나 다른 세 성벽의 기초부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 성벽 길이는 성벽 전체가 남아 있는 서벽의 길이는 264m이고, 일부가 유실된 남벽과 북벽의 현재 길이는 212m와 237m이며, 전체가 유실된 동벽은 226m로 추정됩니다.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판축법(版築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기초부는 매우 견고하며, 단면이 노출된 어떤 곳의 층위는 수십층에 달하기도 합니다. 성문은 원래 동문과 남문 2개가 있었으나 동벽에 있었던 동문은 홍수로 유실되었고, 남문도 심하게 파괴되었습니다.유물은 대체로 서북쪽과 동남쪽에서 출토되었는데,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요(遼)·금(金)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지표 아래 2척 깊이에서 요·금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여기에서 다시 1m 정도 판 지점에서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습니다.

하고성자토성

▣오녀산성과 하고성자토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이 맞을까?

환인 지역에서는 또 다른 평지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고성자토성을 오녀산성과 세트를 이루는 평지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그런데 "비류곡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도읍하였다(忽本西城山上而建都)"는 광개토왕비문의 내용과 하고성자의 지리적 위치가 잘 맞지 않습니다. 즉 오녀산성을 기준으로 보면 홀본은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하고성자 토성은 오녀산성의 서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광개토왕비문에는 홀본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또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는 문장에 이어서  "(추모)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이에 따르면 추모왕(주몽왕)이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승천지,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추모왕의 장지는 홀본의 동쪽 언덕으로 홀본 서쪽에는 건국지인 오녀산성이 있고, 홀본 동쪽 언덕(홀본동강)에는 승천지(주몽왕릉)이 위치하였다는 뜻으로 홀본은 오녀산성과 주몽왕릉이 있는 '동강' 사이가 됩니다.오녀산성은 그 위치를 알고 있으니 '동강'의 위치를 찾으면 홀본의 위치도 알 수 있을 것인데 과연 주몽왕릉이 있는 '동강'은 어디였을까?이와 관련하여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의 장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주몽왕 재위) 19년 가을 9월에 왕이 승하하셨다. 그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냈다." 주몽왕의 장지가 있는 용산은 광개토왕비문의 '홀본동강'과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주몽왕의 장지인 용산을 산꼭대기로 볼 수 없으니 아마도 용산 산기슭쯤 위치하였을 터이고, 이런 구릉 지형을 '강(?)'='강(岡)'이라고 합니다.가장 대표적인 예가 집안시 용산 산기슭에 위치한 장군총으로 이를 광개토왕릉에 비정하면, 광개토왕 왕호에 있는 '국강상(國岡上)'이 장군총이 위치한 지형과 일치합니다. 장군총의 입지를 염두에 두면 주몽왕릉이 위치한 '홀본동강'의 지형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습니다.

환인의 고구려 유적 분포지도

환인 지역 고구려 유적 지도를 살펴보면,오녀산성의 동남쪽으로 고력묘자(古力墓子)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분군은 지금은 환인댐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에 잠겨 있습니다. 이 고력묘자 고분군 동쪽과 남쪽에는 산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줄기를 주몽왕의 장지로 기록된 용산쯤에 비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몽왕의 장지 역시 아무래도 당시 공동 장지였을 고력묘자 고분군 안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시에서도 거대한 왕릉이 다른 고분들과 함께 고분군을 이루고 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고력묘자 고분군의 범위는 남북 1㎞ 정도로 앞서 본 상고성자 고분군보다 훨씬 컸으며, 1963년 북한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40기의 적석총과 봉토묘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고분 성격으로 보아 상고성자 고분군보다는 중심 시기가 늦고 중후기까지 지속된 고분군으로 고분군의 규모나 조영 시기로 보아 고려묘자 고분군을 환인현의 중심 고분군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합니다.오녀산성에서 동쪽을 보면 물속에 잠겨 있는 고분군의 능선이 내려다보이는데 갈수기에는 몇몇 무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오녀산성과 고력묘자 고분군 사이 혼강변 일대가 홀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까?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홀본서성산'과 '홀본동강'이란 문구 그대로 해석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 문구는 홀본이란 지역 내에서 서쪽 성, 홀본이란 지역 내에서의 동쪽 언덕으로 해석함이 타당한데 즉 홀본은 오녀산성과 용산과 고력묘자 고분군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되지만 홀본의 지역적 범위를 넓게 본다고 하더라도 그 지리적 환경이 산세로 둘러싸인 좁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환인 지역 위성 지도를 다시 살펴보면,

환인 일대 위성 지도

수몰로 인해 원래의 지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환인 저수지에서 가장 넓은 수면을 보이는 부분이 고력묘자 고분군을 포함하여 평탄지를 포함하고 있는 '홀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으로 오녀산성 아래와 그 건너편의 평지를 주변 산세가 둘러싸고 있는 형세입니다. 방어상으로는 유리하겠지만, 그래도 도읍지로서는 폐쇄적이고 비좁아 보입니다.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지금의 환인시가지가 있는 곳과 하고성자 토성이 위치한 곳에는 제법 너른 평탄지가 펼쳐져 있습니다.게다가 이곳은 육도하 등 혼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를 통해 주변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을 놔두고 산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서 도읍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여러 의문이 남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리적 환경은 그리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환인시가지가 있는 곳이 고구려 시대에도 가장 좋은 도읍터였을 것입니다.고구려 건국 초기에 방어상의 이점으로 고력묘자 일대에 거점을 마련했을지라도 얼마 뒤에는 보다 넓고 개방적인 지금 환인시가지 일대 역시 졸본 도성의 범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할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환인시가지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조사된 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고성자 토성이나 상고성자 고분군이 졸본 도성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역시 졸본 도성의 의문을 풀 열쇠는 고려묘자 고분군에 있는데 이 고분군의 수몰로 인해 더 이상 해답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과 환인

▤고구려 첫 수도는 산둥성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하북성 고조선 및 고조선의 정통 후예국인 부여에서 출발한 관계로 이 선조국가의 옛 영역을 회복하고자 건국 위치인 산동성에서 이곳 하북성으로 진출한 것이 확인되는데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요동 진출 확보와 백제의 요서 진출이지만 중국 측은 이러한 사실 즉, 산동성 건국 및 하북성 진출 사실을 혼동하여 모르거나 아니면 고의로 배척하고자 사서 기록상에 그 혼란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을 조작 내지는 왜곡함이 확인되는데 대표적인 사항이 백제 요서진출 시기로 확인되는 백제 근초고왕의 20년 기간의 누락과 중국사서 남제서의 백제 요서 진출 기록 훼손이며 또한 고구려는 산동성 및 하북성 지역에서 활동하였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그동안 왜곡 해석하여 한반도로 고착시켰다는 것입니다.먼저, 고구려 첫 도읍지 기록을 살펴보면,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에 대한 중국 사서 기록과 이를 그대로 인용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하북성 현토군 고구려현에서 탄생한 구려 및 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이 나오는데 이를 나중의 선비족을 고구려로 착각한 채, 고구려가 이곳에서 첫 도읍한 것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한서지(漢書志)에서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無慮)가 있다.”고 했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또 한서지에] “현도군(玄菟郡)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속한 현이 셋이며, 고구려가 그중 하나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大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遼)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지리 고구려’ 고구려 초기 도읍 홀승골성과 졸본

이러한 위치 기록을 그동안 중국측이 역사왜곡한 바에 의하여 이와 관련된 사실 즉 현토군, 요나라 동경 등을 요령성 요하 인근이나 한반도 북부로 위치로 옮겨 해석하여왔으며 그러나 이에 의하더라도 그 위치는 요령성 요하 서쪽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사학들이 전혀 사서 기록과 관계없이 요령성 환인시 오녀산성으로 위치시켰다는 것입니다.이와같이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는 하북성 위치에서 요령성 요하 서쪽으로 옮겨지고 여기서 다시 한반도 북부지방으로 왜곡 이동시켜져 왔음이 확인됩니다.그러나 고구려의 건국 관련 기록과 고구려 위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위치 중 하북성 위치도 확인되지만, 산동성에서의 건국과 위치 기록이 명확히 확인되는데 먼저 고구려 건국 과정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그 건국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중국사서가 없지만 삼국지와 후한서가 고구려를 구려와 착각함으로써 현토군 고구려현에서 건국한 것으로 기록한 것 이외에는 단지 건국 후 고구려의 위치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건국과정 기록은 압록강 인근에서 활동하던 선조인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부여에서 출발하여 엄리(대수)(엄사수. 개사수, 엄리대수, 엄체수, 엄수)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이는 하북성 압록수인 지금의 호타하 이북 지방에서 이 호타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산동성 지방의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지방에서 건국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위치는 이후 중국사서가 기록한 고구려의 위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구려 자체 역사활동은 물론 백제와 신라와의 역사적 활동으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우선, 고구려의 위치 기록을 확인하면 그 혼란상이 확인되는데 하북성 고구려와 산동성 고구려 위치가 각각 혼재된 채 기록되였는데 이러한 혼란은 고구려가 하북성 및 산동성에 있음으로 해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명백히 산동성 기록으로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기록이 확인됩니다.위서와 북사 기록상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소해 즉 작은 바다인 어느 하천을 경계로 백제와 경계하고 있다는 기록이 그중 하나인데 이러한 고구려전 기록은 백제의 북쪽에 역시 소해가 있다는 위서, 북사. 신당서, 구당서 백제전 기록에 의하여 이곳이 한반도가 아님이 입증된다는 것입니다.한반도에서는 바다(海)에 대한 해석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하천을 기준으로 고구려와 항상 맞붙어 있지를 아니하였으며 주서와 북사의 동쪽으로 신라에 이른다는 기록이 그 다른 하나인데 이러한 고구려전 기록은 신당서, 구당서 상의 동쪽으로 바다를 지나 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 바다(海) 해석 여부에 따라 이곳이 한반도가 아님이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고구려의 건국과 위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하북성 및 산동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산동성이 고구려 건국지역이라는 것은 이후 고구려 역사적 활동 기록으로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역사적 활동을 같이한 백제와 신라의 건국과 위치 기록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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