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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 죽음의 미스터리_중국 왕망에게 처형당한 고구려후 추(騊)는 추모왕이었을까?유리왕일까?

by 마음heart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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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망에게 처형당한 고구려후 추(騊)는 추모왕이었을까?유리왕일까?

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 죽음의 미스터리



맨몸으로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창업한 불세출의 영웅 고주몽은 추모왕이 되어 고구려 700년의 기틀을 다지고 40세의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같은 해 부여에서 자신을 찾아온 아들 유리에게 태자의 지위를 준지 5개월만으로 이 급작스러운 추모왕의 죽음은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3]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유리가 부여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아버지가 있는 고구려로 온지 불과 5개월만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록은 충분히 수상하고 의문점이 있는데 유리가 만약 진짜 추모왕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을 사칭한 후 추모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지만 이후 고구려 6대 태조대왕 이후로 추모왕을 고구려 시조로 모시는 분위기에서 만약 유리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면 그 기록을 온존하게 남겨뒀을까라는 또다른 의문에 빠지게 되는데 이즈음에서 기이한 기록을 발견하게 됩니다.당시 고구려는 전한 및 신나라와도 재위 기간 내내 불편한 사이를 유지했는데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강제로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해 가려 하고 심지어 고구려 장수를 죽이자 유리명왕이 신나라를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끝내 양국의 관계는 파탄 나고 맙니다.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31년(12)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1]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반란을 일으키면]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삼국사기 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31년

고구려후 추(騊)를 처음으로 기록한 역사서는 한서인데 한서는 전한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서 반고(32년~92년)가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반고가 짓다가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자 여동생 반소(45년~116년)가 완성시킨 것으로 한서 왕망전에는 다음과 같이 서기 12년 고구려후 추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 도(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라고 아뢰었다.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우(尤)는 구려후 도(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한서 왕망전

이 기사들을 요약을 하면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흉노를 치러가기 위해서 고구려인들을 징발하려 했지만 고구려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고구려인들을 강압적으로 끌고 갔더니 고구려인들이 탈출하여 중국 변경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이에 요서 대윤 전담이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사살이 당하고 중국측은 전담 사망의 책임을 고구려의 지도자 '추'에게 전가시켰다고 합니다.이때 엄우라는 중국인이 추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추에게 잘못을 씌우면 큰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 상부에 보고했더니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습니다.엄우는 추에게 만나자고 유인한 다음 목을 베어 왕망에게 목을 보냈고,왕망은 '추'의 목을 목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바꿔 부르게 했다는 내용입니다.이 기사의 내용이 충격적인 것은 왕망이 고구려 사람들을 강제로 징발할 정도로 고구려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과 고구려의 지도자인 '추'의 목을 잘랐다는 내용입니다.더군다나 추의 사망 시점이 서기 12년이라 하는데 그로부터 가까운 시기에 한서에 그 내용이 실려 신빙성이 더 하는데 물론 삼국사기에는 다른 내용으로 고구려 추가 아닌 장수 연비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왕망의 신나라는 한고조 유방에 의해 기원전 206년 건국된 한나라는왕망이라는 외척이 잠깐 반란을 일으켜 건국한 신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뉩니다. 기원 후 280년까지 존속했으며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합니다.해당 지도에 한반도 북부쪽이 한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는 듯 합니다.

삼국사기와 한서 왕망전은 분명히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내용은 물론이고 문장 구조까지 대동소이합니다.하지만 목이 잘린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있습니다.왕망은 분명 엄우가 보내온 머리를 보고 크게 좋아했다고 합니다.이 목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연비와 고구려후 추 중에서 누가 과연 목이 잘린 것일까요?여기에는 세명의 인물에 대한 설들이 존재합니다.

▣장수 연비 설

삼국사기에는 목이 잘린 인물이 고구려 추가 아닌 연비라는 장수로 나오며 주석으로 한서에는 구려후 추로 되어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역사서를 만들 때 중국계 역사서의 기사와 국내 역사서를 조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서 왕망전을, 인물 이름은 현대에는 전해지지 않는 국내 역사서를 참고한 듯 보이는데 연비라는 이름은 중국계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설은 아래의 고구려 왕 설들에서 발생하는 여러 연대적 모순에 저촉되지 않고, 내적 명분이 필요했던 왕망과 엄우 입장에서의 전과 과장 욕구와 합치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얻습니다.한편, 이런 기록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고 싶었던 고구려인들의 조작이라는 설도 존재합니다. 왜냐면 삼국사기의 서술이 목이 잘린 주체를 제외한 99퍼센트 한서의 서술이랑 동일하다는 것은 김부식이 참고한 고구려 자체 기록이 한서에서 카피했음을 의미하며, 즉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바꾸고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구려후 추를 연비라는 장수로 바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사건의 전말을 좀 더 알기 위해 당시 고구려의 사회 구조를 살펴보자면 당시 고구려는 여러개의 나(那) 연합체로 이뤄졌습니다.비록 여러 나(那)의 연맹체 장으로서 고구려 임금이 존재하긴 했지만 여러 나(那)는 독립적으로 외부 활동을 할 정도였으니 고구려 사회가 중앙집권화된 것은 아닙니다.중국측은 전담이 사망했을 때 모든 책임을 '추'에게 전가하려고 했습니다.'추'가 고구려 연맹체의 장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엄우만큼은 '추'에게 잘못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어쩌면 전담의 죽음은 '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사고였을지도 모릅니다.엄우는 이러한 고구려의 사정을 정확히 직시하여 추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보고하지만 엄우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고구려 공격 명령을 내리고,엄우는 추에게 만나자고 유인한 후에 목을 베어버리는데 그렇다면 구려후 추가 어떤 왕인지의 문제가 남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

■유리명왕 설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정진영이 연기한 고구려 유리왕 瑠璃王과 동명왕릉 능문 제당에 그려진 유리명왕 벽화

구려후 추가 목이 잘린 시기가 서기 12년인데, 삼국사기에서 서기 12년에 재위중이었던 왕은 유리왕이었습니다. 사실상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일 셈인데, 그렇게되면 삼국사기에서 나온 유리왕의 사망연도인 18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할 수 있지만 중국 측 사서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누락된 유리의 막내 여진으로 비정되는 고여울의 존재를 삽입하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즉, 유리가 서기 12년에 사망 -> 유리의 막내 여진, 즉 여율이 즉위 -> 서기 18년에 사망 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의 기록이 무슨 이중인격을 보는 것마냥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재위처럼 기록되어있기에 이대로 해석한다면 실제로 위에 서술된 것처럼 일이 일어났지만 후일 고구려인들이 왕이 중국인들에게 목이 잘리는 것도 모자라 국명까지 강제로 개조당한 전대미문의 치욕을 숨기려 목이 잘린 주체를 연비라는 인물로 바꾼 뒤 여율을 삭제하고 서기 18년까지 유리의 생년을 늘인 것으로 즉, 고구려인들이 여율을 삭제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리왕 37년(서기 18) 여름 4월,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임금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알렸다.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겨울 10월, 임금이 두곡의 이궁에서 돌아가셨다.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유리왕

 

▩동명성왕 설

유리왕설의 논거는 상당히 그럴 듯하지만 크나큰 허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서기 12년에 재위한 고구려 왕을 유리왕이라 확신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사실 위의 유리왕설에서 구려후 추를 유리왕이라 비정한 근거는 단순히 당시 재위중이었던 왕이 유리왕이라 삼국사기에 나와있다 하나뿐인데,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보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고구려 자체 기록을 신뢰한데다가 술이부작의 방법을 취해 이것들을 수정없이 기록하다 보니 고구려 왕조가 왜곡한 역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위에서 중간에 삽입한 고여율의 존재도 그걸 입증하는데 그렇다면 구려후 추는 누구냐? 주몽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추'가 동명왕의 다른 시호인 '추모왕'의 앞글자이며, 고구려 당시에는 동명왕보단 추모왕이 더 많이 쓰였다는 점을 들어 동명왕이라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주장합니다. 이렇게되면 주몽이 서기 12년까지 재위했다는게 되는데, 삼국사기에 나온 주몽의 사망 연도와는 서기 0년을 제외하여서 무려 30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대무신왕 어머니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오류로 삼국사기가 20년 정도 기년 오류가 있다는것이 확실한데다가 삼국사기에 따른 주몽왕의 사망 시점이 유리가 주몽을 찾아온 그 해라는 점에서 고구려인들이 후일 국가의 시조가(정확히는 계루부의 시조지만) 이런 치욕을 당한 것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유리가 찾아온 그 해에 사망한 것처럼 만들고 유리의 재위 기간을 앞당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논리대로라면 주몽이 71세까지 살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것도 좀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고구려사 권위자인 노태돈 교수는 추를 주몽으로 보았지만 진짜로 추모(주몽)와 동일인물로 보고있지는 않고 당시 고구려 지배자의 호칭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병도 교수도 기사 내용 자체를 그대로 믿기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과장된 사건으로 보았으며 노태돈 교수는 정사 삼국지, 후한서의 고구려 왕력보다 자체 전승된 고구려 왕가의 전승이 실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왕력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실제 고구려가 기원전 30~40년대에 건국된 것은 위서 고구려전, 일본서기, 당나라 고자묘지명 등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나 고구려 관련 금석문에서도 교차검증되기 때문에 추모왕의 사망연대가 30년 이상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이게 사실이라면 추모성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50년에 달하는 장기 재위기간이 되는 것으로 한국사에서 검증이 되는 인물들 중에 50년 이상 재위한 왕은 고구려 장수왕,신라 진평왕,발해 문왕,조선 영조 밖에 없습니다.그리고 모두루묘지명에서는 추모(주몽)가 부여를 탈출한 해가 기원전 40년경이라 적고있어 고구려 당대 기록이 오히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다도 시기가 훨씬 앞서며 고구려 멸망 20여년 후에 제작된 고구려 고자묘지명에선 고구려가 기원전 40년에 건국되었다고 나오고 일본서기에선 고구려가 건국된지 이미 700년이 지났으니 망할 때가 되었다고 나옵니다. 위서 고구려전의 고구려 건국년도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동일하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건국년도는 해동고기 등 자체적인 기록 외에 고구려 양원왕 시기에 제작된 위서 고구려전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주몽 신나라 황제 왕망설

한국의 재야사학자 이중재가 주장한 고주몽 신나라 황제 왕망설은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 10월 6일)이 곧 주몽이라는 설로 왕망은 친가론 한나라 황실의 외척이자 한반도의 평양에 낙랑군을 세운 산동의 왕씨 귀족의 혈통을 잇고 외가로는 흉노의 김일제 왕자 후손인 김씨 일가의 혈통을 이었다고 전해집니다.기원전 1세기 왕망은 한나라의 정권을 독차지하고 황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왕망이 황제가 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 한국의 재야사학자 이중재는 그가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이중재의 증거는 빈약하며 역사 기록의 자세한 논거를 들지 않고 왕망이 어느 산동의 지방 명칭을 동명(東明)이라고 바꿨다는 이유,왕망하고는 연대가 백여년도 더 넘게 차이나는 신대왕(新大王)을 신(新)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왕망이 주몽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중재의 주장처럼 왕망이 주몽이란 증거를 들자면,삼국지,후한서의 동이전의 고구려전의 기록을 보면 한나라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가 설치한 현도,낙랑,진번,임둔의 4군현 중에서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이 있었는데 이 고구려현은 한무제가 고조선 안에 소속되어 살던 '고구려'라는 소국을 '현'으로 만든데서 유래했는데 구려현은 현도군이 통치하는 만주의 토착 조선인들 중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책)을 받아 갔습니다. 고구려현에는 한나라가 임명한 고구려현령이 고구려현을 다스렸는데 차츰 교만,방자해져 다시는 현도군으로 나아 오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를 한국 국사학계는 유리왕으로부터 태조왕 사이로 보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유리왕이 고구려현을 쳤다는걸로 보아 고구려현에서 독립국 고구려를 선포했다는걸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삼국사기는 서기 12세기 고려시대에 나온 것이고, 중국의 삼국지,후한서의 동이전들이 서기 3세기에 나온 것이니 연대적 신뢰성은 중국 기록이 훨씬 높고 중국것이 사실에 가깝다 볼 수 있습니다.즉 고구려는 초기에 한나라가 세운 지방자치단체였으며 이 지방자치단체의 초기 수령은 주몽이었고 주몽 때부터 한나라의 현도군을 등 뒤에 엎고 주변 부족들을 서서히 규합 이용하여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아는 주몽은 제1대 고구려 왕으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부르며,성이 고씨(高氏)이며 이름이 주몽(朱蒙)이었는데 주몽의 아들이자 고구려의 2대 왕인 유리왕은 성이 해(解)씨입니다.중국 삼국지,후한서의 고구려전들에는 고구려의 초기 왕실은 소노부(비류부:해씨)가 쥐었고,그 후 왕실은 태조왕 때 계루부(고씨)가 쥐었다고 나옵니다.즉,주몽 때에는 고씨 왕은 절대 있을 수가 없으며 주몽의 아버지라는 천제 해모수도 성이 해씨이며 고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또한 주모에게 붙는 동녕왕이란 호칭 자체도 주몽과 관련이 없는데 서기 1세기 후한 시대의 역사서 '논형'에서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로 나오며 동명왕도 주몽처럼 여자의 알에서 태어나고 고리국 왕에게 미움을 받고 도망치다가 강을 건너 부여국을 세웁니다.주몽 설화는 고구려인들이 부여의 동명왕의 신화를 고대로 갖다가 베낀 표절이라는 것입니다.중국 역사기록들에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고구려후 추라고 나오지만 주몽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주몽은 도대체 누구일까? 초기 고구려는 한나라의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이었고 고구려현에는 한나라가 임명한 현령이 있었는데 이 현령이 주몽으로 추측된다는 것입니다.현령은 당연히 중국계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 한나라 입장에선 만주를 통치하는데 더 적합한 정책으었으며 현도군의 남쪽에는 진번,임둔이 있고 진번 임둔의 남쪽엔 낙랑군이 있었는데 낙랑군은 현도군 다음가는 막강한 군현으로 그곳의 유력 세력은 산동의 왕씨 귀족들이 그 곳에서 무역을 하며 동방 무역을 관장하고 있었습니다.그렇다면 현령은 왕씨였을까?광개토왕비에선 기원전 19년에 주몽이 황룡을 타고 승천해서 시체도 안남겼다고 하며 KBS 역사스폐셜의 고구려 다큐에서 주몽 무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무덤이 나왔는데 역시 시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5자 불명)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머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느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광개토왕비릉 일부

주몽의 사후 몇년이 흘러 기원전 8년, 한나라에서는 대규모 정변이 일어나 왕망이 한나라 황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신(新)나라를 건국합니다.그리고 왕망의 외척인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인 산동 김씨 가문과 친가 산동 왕씨 귀족이 정권을 잡습니다.왕망과 주몽은 '몽'과 '망'이 발음이 비슷하며 게다가 왕망은 '황룡'이 곳곳에서 나타나서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원한다는 신하들의 간사한 말들을 듣고 이를 받아들여 황제에 오르는데 중국 기록 곳곳에 왕망의 상징은 황룡으로 나옵니다.

"황산궁에 황룡이 떨어져 죽었다 하옵니다”
천봉(天鳳) 2년(15년) 황산궁(黃山宮 섬서성 흥평현)에
황룡(黃龍)이 떨어져 죽었는데 이를 목격한 백성이 만이 넘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토(土)를 상징하는 황색의 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왕망은 몹시 불쾌했다. 자신이 토를 숭상하고 황색을 높였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문무왕릉비에서는 신라의 왕족 김씨는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며,자신들이 과거에 황룡을 맞이하여 주몽을 태웠다는 암호적인 문장을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신라 역시 신나라처럼 국호가 신(新)으로 시작된다.)이 암호의 뜻은 간단한데 자신들 김씨 가문은 과거 한나라에서 황룡국(신나라)을 건국하는데.그 황제로 주몽을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주몽은 '금金'와의 아들이라는데. 왕망의 외척은 김씨 가문이다.)

【金張】“漢金日磾家, 自武帝至平帝, 七世爲內侍, 張湯後世, 自宣帝元帝以來爲侍中,中常侍者十餘人, 後因以‘金張’爲功臣世族的代稱.”文選三國魏應休璉(璩)與從弟君苗君冑書:“且官無金張之援, 遊無子孟(霍光)之資, 而圖富貴之榮, 望殊異之寵, 是隴西之遊, 越人之射耳.文選晉左太沖(思)詠史詩之二: ”金張籍舊業, 七葉珥漢貂.“

【金張】한나라 김일제의 집안은 무제로부터 평제까지 7대에 걸쳐 내시를 지냈다.
장탕의 후세는 선제와원제 이래로 시중, 중상시를 지낸 자가 10여인에 이른다.
이로 인해 훗날 김씨와 장씨는 공신의 세족적 대명사가 되었다...
문선에는 진나라 좌사의 영사시 2편에는
“김씨와 장씨 집안은 김일제와 장탕의 업적덕분에 한나라의 7대 임금 치세기간 동안
고관대작을 지냈다.”고 기록했다.

/사원의 왕망 당시 김씨 귀족에 대한 기록.

주몽의 죽음이 왜 모호하고 죽음 당사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다는 것입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황룡국'이라는 정체불명의 나라가 나오는데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때 갑자기 등장하는 나라인데 황룡국왕의 위엄에 유리왕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그러나 황룡국이란 나라는 실체가 확인되지도않은 나라에다 유리왕과 3대 대무신왕 당시 고구려의 주적은 부여였습니다.황룡국이 그렇게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나라라면 왜 유리왕 때에 황룡국 관련 사건은 한번만 등장하고 유리왕 이후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며 황룡국이라는 나라는 고구려가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나라가 왜 중국기록에도 없는 것일까? 바로 황룡국이 왕망의 신나라이기 때문입니다.유리왕 때 등장하는 왕망과 관련된 사건은 단 하나로 다음의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27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졸본)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센 활을 선사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룡왕이 부끄러워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 버리라”라고 말했다.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간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드디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 보냈다.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태자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했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전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활을 잡아 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태자는 여진 동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식으로 동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땅을 창원이라 하였다.

유리왕의 아들 해명이 유리왕이 두려워하는 황룡국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황룡국 왕이 아주 센 활을 보내서 평소 힘세기로 유명하단 해명을 시험하자 해명은 망설임없이 활을 꺾어버렸으며 이에 아버지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해명을 보내 죽이라고 했지만 황룡국 왕은 해명을 죽이지 않고 그냥 보내자 유리왕은 해명에게 자결하라 명령하고 이에 해명은 군말없이 자살해 버립니다.그런데 해명이 죽은 장소가 여진이란 곳으로 유리왕 제위 37년 여름에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습니다. 왜 물에 빠졌는지,그것이 자살인지 아님 사고사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같은 해인 제위 37년에 유리왕도 갑자기 죽습니다.이에 대한 답으로 

황룡왕=왕망   
황룡국=신나라  
유리왕=여진=해명

황룡왕이 센 활을 보냄=활 잘쏘는 자 주몽의 상징인 활
해명이 활을 꺾음=유리왕이 왕망(주몽)하고맞짱뜰 작정하고 절교함.
황룡왕이 해명을 자기 나라로 초대함=왕망이 유리왕을 협상장소로 호출함.
해명이 초대에 응하고 감=유리왕이 의심없이 감

해명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공자  "하늘도 날 죽이지않는데. 아무개가 날 어찌하겠는가?"(공자의 경전 논어)

☞유리왕이 공자의 격언을 인용.
유리왕이 한나라 문화에 익숙했단 사람이란 증거(삼국사기에서 유리왕은 한나라 여자하고 고구려 여자를 둘다 사랑하는데 고구려 여자가 한나라 여자를 박대해서 한나라 여자가 도망치자 울면서 시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해명 자살=여진 물에 빠져 죽음(자살인지 타살인지 이유도 안적음!)=유리왕이 왕망에게 처형당함.

위에 대한 중국 사서 기록을 살펴보자면,

중국 정사 전한서(前漢書)의 기록 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 嚴尤奏言怷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

한서에서 말하기를,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들을 내어 호胡(흉노)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자
(신제국에 명령 불복종), 군현郡縣의 위세로 고구려를 강제로 핍박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서서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게 되었다.
주州와 군郡에서 모든 허물을 고구려후 추騶에게 돌리자 엄우가 천자에게 아뢰기를,
맥인들이 법을 어기며 추騶(유리왕)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그를 위안하여 주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後前書] 권85 동이전 / 고구려王莽初, 發<u>句驪兵</u>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誘句驪侯騶入塞,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u>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u> 於是貊人寇邊愈甚. 

왕망 초에 구려병(句驪兵)(고구려 병사)을 뽑아 흉노를 정벌하려 했다. 구려(句驪)인들이 따르지 않자
강박(彊迫)하여 파견했는데 모두 새(塞) 밖으로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다.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에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구려후 추(騶)를 새(塞) 안으로 유인하여 참하고
그 수급을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였고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불렀다.
이때부터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약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즉, 여기에서의 고구려후(侯) 추가 바로 유리왕이라는 것으로 왕망 당시 중국은 사방의 나라의 왕들을 모두 제후인 후(侯)라고 불렀으므로,고구려후는 당연히 고구려왕이며 왕망 당시의 고구려왕은 유리왕이기 때문에 고구려후(侯) 추가 바로 유리왕이라는 것입니다.(황룡국이 유리왕 때에만 나오는 것 역시 왕망의 신나라가 유리왕하고 대무신왕 초기 쯤에 멸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중재가 주장한 고주몽 신나라 황제 왕망설을 요약하자면,

신나라 황제 왕망이 바로 고구려 시조 주몽으로 왕망은 자신의 이름을 주몽으로 바꾸었으며(망'과 '몽'은 발음이 비슷함)주몽 설화는 동명왕 신화 복사판으로 바로 표절아며 고구려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한사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에서 출발했다고 중국 정사 삼국지,후한서에서 기록하고 있으며(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거짓말)고구려현은 고조선인들을 식민 통치하기 위한 당시의 조선 총독부의 산하기관 종로경찰서에 해당하며 왕망은 산동과 낙랑군(평양)의 유력 장사꾼 귀족인 왕씨 가문 사람으로 고구려현의 총책임자 현령으로(고구려현의 현령은 일제시대 종로경찰서 대장으로 비유할 수 있음)부여로 가서 부여와 고구려현의 돈독한 친선을 맺고 고구려현으로 돌아오지만 고구려현령 일이 지겨워서 한나라로 복귀하면서(이 부분을 광개토왕비에선 일이 지겨워서 황룡타고 승천했다고 미화했다고 봄)고구려현은 자기 아들 유리에게 맡기는데 아버지 주몽(왕망)이 크게 키워놓은 고구려현을 나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고 자기는 고구려왕이 되지만(이때까지 유리왕은 충성스런 한나라의 개였음)왕망은 한나라로 돌아가 한나라 유씨(劉氏) 황제를 쫓아내고 친가 왕씨 귀족과 외가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 김씨 귀족과 함께 신(新)나라를 세웁니다.왕망은 신나라를 세울 때 자신과 제국의 트레이트 마크를 '황룡黃龍'으로 내세우는데(광개토왕비에서 주몽은 황룡을 타고 승천하고, 흉노 김일제의 후손인 김법민(문무왕)의 비석엔 자신들 김씨 가문이 과거에 주몽을 황룡에 태웠다고 나오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제2대 유리왕 때에만 정체불명의 나라 '황룡국'(신나라)이 나옴.)중국 기록에서 왕망이 고구려왕(유리왕)을 불러다 목베는 장면이 나오는데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불려간 후에 해명이 자살했다라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입니다.왕망이 흉노를 작살내려고 고구려병사를 징발하려 하고 아들 유리왕이 거절하자 왕망의 부하 엄우가 유리왕을 꼬드겼고 유리왕은 협상테이블에 방심하고 나갔다가 처형당하고 잘린 유리왕의 목은 신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이송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이중재가 주장한 고주몽 신나라 황제 왕망설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중국인을 시조로 여기고 모셨다는 것이 됩니다.

 

▦고구려 후 추의 죽음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먼저 왕망은 엄우가 보낸 추의 머리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을 보면 왕망은 그 머리의 주인이 추라고 인식했다는 점은 아주 확실하다고 보입니다.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습니다.우선 고구려는 전담의 사망 이후 대중국관계가 극도로 악화가 되었는데 고구려의 지도자가 중국측 장수를 직접 만났다는 것이 의문입니다.아무리 엄우가 추에 대한 변호를 하였다곤 하지만 추가 직접 엄우를 만나러 갈 정도로 순진했나 싶기도 하고 또한 엄우는 추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고구려의 반란이 두렵다고 한 인물인데 추를 직접 잡아 죽였다는건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하기도 합니다.물론 왕망의 명령이 있었으니 생각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엄우가 추를 죽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망에게 추를 죽였다고 허위보고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당시 중국은 군지휘관에게 감찰원을 붙여놓기 때문에엄우가 허위보고를 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고구려후 추가 사망한 것이 맞다는 견해의 경우  보통 중국, 일본 학자들 그리고 한국 학자분들 중에서도 중국측 기록을 따르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한서 왕망전이 왕망의 사후 수십년 만에 작성이 되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만 삼국사기는 1천년 뒤에 작성되었고 김부식이 참조한 고구려측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수치스러운 역사를 감추기 위해서 연비가 사망한 것으로 조작했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에 더해 엄우가 허위보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고구려 후 추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엄우이기는 하지만 굳이 허위보고라는 모험을 할 필요가 있겠냐는 반론입니다.중국 입장에서 고구려가 머나먼 변경이라지만 그래도 이민족의 지도자를 죽였다고 허위 보고를 하는건 충분히 발각될 염려가 있고 위험부담이 큽니다.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허위보고를 할 이유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그리고 아예 고구려후 추가 엄우를 만나지 않았다는 견해의 경우 엄우가 추를 죽였다고 인식했지만 실제론 추가 아닐 가능성입니다.당시 엄우가 '추'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고구려측 최고 지도자가 적장을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상식 밖입니다.고구려측은 한명의 장수를 '추'로 가장하여 엄우에게 보냈고 엄우는 그가 '추'라고 인식한 상태에서 사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엄우는 '추'를 죽였다고 철썩같이 믿은 상태에서 왕망에게 '추'를 죽였다며 목 벤 머리를 장안에 보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물론 가설이고 이를 문헌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말 고구려후 추는 주몽이 맞는지,목이 잘려 처형 당했는지에 대해 쉽게 결론을 내릴 순 없습니다.모두 그럴듯하게 서술해놓기는 했지만 사실 현재 학계에서 확정적인 정설은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려후 추의 존재를 삼국사기를 신뢰하여 연비라 보는 견해도 국내에 소수 존재하며, 이 경우 연비(延丕)는 연타발(延陀勃)과 성씨가 같아 소서노 측 부족장으로 보는 추측이 있습니다. 만약 주몽설을 따를 경우 고구려 초기사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기에 구려후 추의 존재만 놓고 함부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물론 구려후 추가 주몽을 호칭하는 기록이라는 학설이 일단 현재로서 주류설이기는 하나, 저 기록 자체가 프로파간다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라 저 기사 자체를 그대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삼국사기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치욕을 감추기 위해 어느정도 조정해 기록한 기록을 따랐기에 오류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반대로 중국 사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위 시점보다 더 뒤인 정사 삼국지도 기리영 전투 같이 중국측 전공이 과장해서 서술한 기록이 많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의 전투에서 붙잡힌 것이 실제로는 고구려의 지도자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며 특히 왕망이 다스리던 신의 여론과 분위기 등을 고려하면 프로파간다가 분명히 필요하긴 했다는 것입니다.또한 여기서 언급되는 추=주몽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정말 인물로서 동명성왕 주몽을 뜻하는지, 고구려군의 지휘관을 일컫는지, 혹은 고구려의 당시 지배자를 뜻하는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때문에 고구려와 신의 전쟁 중에 고구려의 군을 이끄는 누군가가 잡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사실상 신에 의해 격하 되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나 그 대상이 고구려의 지도자였는지 장군 중 한명이었는지, 지도자였다면 주몽인지 유리왕인지 등은 모두 현재 추가 사료 없이는 명확한 정답이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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