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 詩폐라뮤지엄/우리 고대사 역사 바로보기

왕이 된 승려 궁예_미륵불 신앙을 내세운 개혁군주였을까 아니면 왕건의 역성혁명에 의해 폭군으로 내몰린 비운의 지도자였는가?

by 마음heart 2024. 1. 20.
728x90
반응형
728x170
BIG

미륵불 신앙을 내세운 개혁군주였을까 아니면 왕건의 역성혁명에 의해 폭군으로 내몰린 비운의 지도자였는가?

왕이 된 승려 궁예



우리나라 역사에서 성군이 흔하지 않듯이 폭군도 마냥 흔한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폭군하면 연상되는 군주들은 몇몇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가 광해군이 그러하고 신라말 고려초의 궁예 또한 폭군의 대명사처럼 남아 있습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 폭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는데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의 경우 승자에 의해 입맛대로 광해군을 폭군으로 만들며 반정 세력의 명분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그렇다면 왕건이 창업한 고려 이전 궁예로 대표되는 후고구려의 경우 궁예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한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더 중 왕건에 의해 쫒겨난 궁예는 왜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정말 궁예는 폭군이었는지,아니면 광해군처럼 기존 세력의 반발로 인해 왕권을 상실하고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덧칠되어 버린 것이라는 말이 있도 있습니다. 역사에서 패자의 경우, 그 기록은 상당 부분 왜곡돼 기록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을 비롯하여 신라에 패한 고구려 연개소문과 백제 의자왕의 경우가 대표적 예시이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경우는 당대 중국및 일본 사서 등에 소략의 기록이라도 남아 있습니다.승자 쪽 기록만 남을 경우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를, 고려의 실질적 창립자인 궁예에 대한 후대 서술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자신을 발탁해준 궁예를 제거해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태조 왕건의 왕조와 신하였던 사가들이 그려놓은 궁예의 이미지는 태생적 악인이자 폭군의 대명사나 다름없지만 21세기에 바라본 궁예가 정말 폭군인지 아니면 당시 시대를 뛰어넘은 혁명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결국 기존 세력에 의해 제거된 비운의 군주였는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궁예 혹은 궁예왕(정식 묘호나 시호가 없는 군주는 왕호로 그냥 휘호가 사용됐다)은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후고구려,마진,태봉의 유일한 국왕이자 한국사 유일의 승려 출신의 군주였습니다.통일신라의 일개 떠돌이 승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력적 소양과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만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불려 당시 한반도 천하의 삼분의 일을 평정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떨쳤지만 재위 말년에 가혹한 폭정을 실시했는데 각종 전쟁과 후삼국의 정치를 겪으며 오늘날 의학적 개념으로는 편집성 성격장애 같은 정신병이 발병하였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궁예는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에다 독선적인 정치 철학에 염증을 느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고려의 실질적인 건국자 궁예

궁예는 신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헌안왕인지 경문왕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일관(주술 담당 관료)의 권유로 왕실에서 죽이려 함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죽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애꾸눈이가 되었다고 합니다.물론 당시 혼란한 신라 말기 족보 및 조상을 조작하는 풍조가 만연했고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신라의 성골 호경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때문에 궁예의 신라왕의 아들이라는주장에 대한 옹호론과 부정론도 존재합니다.궁예는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냈으며 법명은 선종(善宗)이었습니다.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891년 절을 뛰쳐나와 가사를 입은 채 반(反)신라 대열에 나서게 되는데 죽주(현 경기도 안성시)의 초적(草賊) 세력 기훤(箕萱) 밑에 잠시 있다가,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梁吉) 부하로 있으면서 2년 만에 치악산 석남사와 영원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영월·평창·울진 등 강원도 남부 일대를 복속시켰습니다.894년 궁예는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릉에 들어갔는데, 토호 김순식의 도움으로 3500명 대군으로 거듭나 장군 칭호를 얻게 되었는데 궁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평등사상에 깊이 감동받은 농민군들이 앞 다투어 그의 부대로 합류할 정도였습니다.삼국사기는 “궁예가 사졸들과 즐거움과 괴로움, 힘듦과 편안함을 함께하고 사사로움 없이 상벌을 공정히 하여 부하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에 추대”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대부분의 기록이 궁예에 대해 왜곡·폄하하고 있지만 이 부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895~896년 인제·화천·금성·김화 지역을 아우르고 단숨에 철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군세가 커지자 황해도·평안도 호족들과 왕건 부자가 귀부하여 군사력과 경제력은 더욱 커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898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부 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된 궁예는 901년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습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 속 김영철이 연기한 궁예

■궁예의 철원 천도_마진·태봉국 선포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궁예는 904년 철원 북방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청주 지역민 1000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지었습니다. 이 무렵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태봉국(泰封國)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도읍지는 수로를 이용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운반하기 좋은 곳이어야 하지만 철원은 그럴만한 수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를 강행했는데 그 이유는 왕건이 장악하고 있는 송악에서 왕권 강화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궁예의 태봉국 철원도성_3.8선을 경계로 나뉘어져 있어 발굴 자체가 힘들다
철원군 홍원리에 위치한 궁예도성

철원 천도에 따른 민심 이반

 궁예는 고구려 유민이 많은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까지만 해도 국호를 고려라 하여 옛 고구려 땅 회복과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뜻을 분명히 하지만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다시 태봉으로 바꾸면서 건국 정체성을 의심받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고구려 유민 중심으로 반궁예적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고, 패서(浿西) 지역 고구려 유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왕건에게 힘이 쏠리기 시작합니다.궁예는 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처했는데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반대 세력 탄압을 위해 미륵불과 미륵관심법을 활용했으며 왕건에게 모반을 음모했다며 추궁할 때도 미륵관심법을 내세웠습니다. 스스로 미륵불의 화신이라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궁예의 승려 석총과 왕비 살해한 이유

궁예는 불교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는데 불경을 재해석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어 20여권의 경전을 지어 자주 강론했다고 합니다. 불교국가였던 신라 왕들 중에도 불교적 저술을 직접 남겼다는 이는 없었습니다.삼국사기 열전에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자신의 불경(佛經)으로 강설(講說)하자 진표율사(8세기)의 계승자 석총(釋聰)이 이를 사설괴담(邪說怪談)이라고 비난했다가 격노한 궁예에게 철퇴로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궁예는 진표나 석충처럼 법상종에 속했음에도 그 계통을 달리했는데 진표와 석총의 불교는 미륵과 지장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한데 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아미타보살과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이름(신광보살·청광보살)을 지은 궁예의 불교는 미륵과 아미타, 관음 중심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석충이 왕건과 내통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점까지 감안하면 석총 살해에는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궁예가 부인과 아들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충격적이지만 왕비 강씨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왕건과 결탁한 호족 집안의 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런 평가는 달라지는데 단순한 왕비 살해가 아니라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 다툼의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을가능성도 제기됩니다.

▩폭군의 대명사 궁예는 쿠테타를 일으킨 왕건이 조작했다

궁예가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후대에 궁예를 몰아낸 고려 왕건에 의해서 왜곡되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궁예가 부인 강씨와 그 두 아들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 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 것도 아니었거니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강씨와 그녀의 두 아들을 앞세워 순군부를 설치해 호족들의 군권을 뺏으려던 궁예의 왕권 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추측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을 숙청하는 일과 해괴망측한 불경을 저술한 것도 당시 교종에 익숙한 불교계에 선종을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있던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으면 태조 왕건 역시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 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 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준의 상서문에 궁예는 1경의 토지에서 6석을 세금으로 수취하였으며, 이에 반해 왕건은 천하통법인 1/10세를 기준으로 1부의 토지에서 3승을 수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예와 왕건의 세금 부과기준이 경과 부로 단위기준이 상이함에 착안하였다. 궁예는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많은 수취를 하였으나, 1경 이하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면세를 해주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왕건은 3/10세를 1/10세로 감면해준다는 조치를 표방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유리한 조치였으나 토지를 적게 경작하는 농민들에게는 불리한 조치였던 것이다.

궁예의 면세조치 혜택을 받은 농민은 어느 정도였을까를 알아보기 위하여 궁예의 전제권력 강화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통하여 전제권력을 강화하면서 호족들의 농민 직접지배권을 점차로 중앙정부로 귀속시킴에 따라 면세혜택을 받은 농민들도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김주성,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139 - 157 (19 pages)

▦나주 경락 주인공은 왕건이 아닌 궁예

궁예가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폄훼되었다는 증거는 나주 경략의 주역이 왕건이 아닌, 궁예임을 입증하는 당시 전라도 고승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탑비 내용으로 확인됩니다.선각대사는 당나라에서 10여년 유학한 뒤 귀국한 당대의 큰스님으로 고려 건국 이전 왕건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이를 시기한 궁예에 의해 태봉국 수도 태봉(철원)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 교수는 비문 내용을 정밀 판독한 결과 10세기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원정하고 비석의 주인공 선각대사를 태봉국에 데려간 이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선각대사 형미의 탑비에서 새로 밝혀진 사실은 태봉의 국왕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으며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법경대사(경유·慶猷)비문을 통해서 908년에도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했고, 무주 근처에 은거했던 경유를 만난 궁예의 요청으로 태봉의 수도로 갔다는 점이 파악되었습니다.두 비문은 기존 사서보다 먼저 기록된 1차자료. 이 자료들은 나주와 무주에 대한 공략계획과 지휘를 궁예가 했고, 왕건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대의 자료들은 왕건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또한 궁예에 관해서는 기성의 불교와는 다른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사상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왔지만 궁예는 형미와 경유의 예처럼 선종 승려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형미의 비문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왕건의 선종 승려들에 대한 우대는 궁예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합니다.삼국사기와 고려사등이 왕건의 업적으로 제시하는 태봉의 남부공략은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볼 수 있는 심각한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각대사비에 전라도 지역을 원정한 후 선각대사를 泰封으로 모셔간 인물로 나오고 있는 大王은 지금까지 고려태조 王建으로 생각되었지만 비문의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태봉의 국왕이었던 弓裔로 확인된다. 후에 선각대사를 처형하는 大王과 동일 인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선각대사비에 의하면 大王 즉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羅州와 武府(광주) 등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였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궁예의 親征사실은 형미와 함께 雲居道膺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慶猷의 행적을 기록한 法鏡大師碑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던 경유 역시 이 지역에 원정 온 궁예를 따라 태봉의 수도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들 자료로 볼 때 현재 『삼국사기』와 『고려사』등에서 왕건의 업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태봉의 전라도 남부지역 경략은 실제로는 궁예의 직접 지휘 하에 행해졌던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태조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던 것이다.

선각대사비와 법경대사비에 보이는 궁예의 선종 승려에 대한 우대 조치는 궁예의 불교정책에 대해서도 재검토하게 한다. 지금까지 궁예의 불교정책은 주로 미륵신앙이나 토착신앙 등의 신비적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왔지만 두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궁예는 선종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종교 정책의 특징이라고 생각된 선종 승려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도 실제로는 전임자인 궁예의 정책을 계승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선각대사비는 나말여초 시기의 불교사는 물론 정치적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미 많은 연구들에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해석상의 작은 착각으로 인해서 자료가 담고 있는 정보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였다. 이 자료는 후대의 사서에 말살되어 버린 궁예의 행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보다 면밀히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碑를 통해 본 弓裔 행적의 재검토, 최연식,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제7호, 2011.06, 203 - 222 (20 pages)

후삼국 시대의 궁예는 왕건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역사 속에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 궁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궁예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긴 자의 편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통치를 했던 철원지역에 구전되는 설화는 궁예에 대한 상반된 가치 평가를 수반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지만, 대체로 궁예를 긍정적인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궁예에 관한 진실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궁예 관련 역사 기록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궁예에 관한 구전 설화 역시 설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그 문맥의 의미를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궁예와 왕건에게서 유사한 탄생의 이야기를 볼 수 있지만, 궁예의 신비로운 탄생은 상서롭지 못한 징후로 판단되어 궁예의 불행한 삶의 근거로 작용하고, 왕건의 경우 전형적인 영웅의 탄생이 되는데 유사한 탄생 비화에 대한 이런 상이한 해석은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예이며, 궁예에 대한 역사의 악의적인 횡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역사 기록은 특히 왕건이 세력을 확장하여 궁예를 전복시킬 즈음부터 궁예의 비인간적인 포학무도한 면을 부각하는 서술에 치중하고 있는데 궁예의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기술은 왕건이 고려태조로 등극한 사실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합니다. 즉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과 잔학함은 왕건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며 반면에 왕건에 대한 역사의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평가는 과장되었다고 볼 만큼 매우 호의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왕건이 집권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을 위해 설화적 서술을 활용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철원지역 궁예 관련 구전 설화의 전승자들은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이라든가 백성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혹평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혹평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철원지역에서 궁예는 나라를 세웠다가 몰락하고 패배한 인물이었지만 백성들의 편을 들어줄 민중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던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궁예의 죽음을 비장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으로 승화시키고, 또한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신라시대 신분의 장벽이었던 골품제도를 없애고 백성들을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는 논평에 가까운 전승자들의 진술은 궁예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실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궁예의 미륵사상은 사이비 종교가 아닌 신정정치 국가 통치 이념

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된 이래 국가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왕이 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은 신라 왕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불, 부모를 석가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이라고 했으며 당나라 여황인 측천무후(則天武后)도 중국사 유일한 여황제가 됐을 때 궁예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륜성왕’을 자칭하고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설을 퍼뜨려 ‘일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인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려 한 것입니다.궁예의 ‘미륵관심법’이 남을 학대하는 데만 이용되었다면 어떻게 민심을 모아 후삼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정치의 한 표현이었으며 국가 통치이념이기도 했습니다.궁예 불교는 하층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궁예 주변 인물들 중에는 내원(궁중 사원) 허월,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 등 어려서부터 절에 기식할 수밖에 없었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현실 정치와 궁예 미륵사상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하층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는데 미륵불은 미래불로서 현실적 조건이 좋지 않을 때 등장했는데 신라 말기 진골 귀족 정권의 혹독한 가렴주구로 새 시대를 열망했던 민초들에게 유교적 도덕주의보다는 군주가 종교적 ‘구세’까지 약속해주는 불교적 ‘종교국가’가 더 가까이 와 닿았을 것입니다.

▦궁예의 최후에 대한 기록들

궁예는 송악을 근거로 하는 패서(浿西) 세력의 수장 왕건 세력의 반란으로 918년 왕위에서 쫓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왕(궁예)이 어찌할 줄 모르다가 미천한 차림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궁예는 산골로 도망했으나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가 바로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승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궁예의 죽음을 비참하고 부끄럽게 그려야 했을 것입니다.삼국사기는 한 나라의 제왕이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했으며, 고려사는 한술 더 떠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부정적으로 각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기록물은 승자 위주로 서술되어 전하지만, 패자의 모습은 설화의 형태로, 산이나 강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아있기도 한데 폭군과 패륜으로 낙인찍힌 궁예는 철원 일대에서 수많은 전설로, 그리고 명성산 울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기도 합니다.궁예에 대한 전설은 육당 최남선이 먼저 기록했는데 1924년 10월 4일, 최남선은 금강산 가는 길에 경원선 삼방역 근처에 있는 한 서낭당을 찾아갔습니다. 궁예를 서낭신으로 모시는 서낭당이었는데 궁예왕은 죽어서도 삼방지역의 화복을 지배하는 신(神)으로 받들어졌는데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고구려)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당시 최남선은 그 서낭당을 안내한 사람으로부터 궁예의 최후에 대해 듣고 풍악기유를 남겼는데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강원도 세포군 세포읍(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삼방산(三房山) 삼봉까지 홀로 쫓겨 온 궁예는 한 중을 만나 후일을 도모할 방도에 대해 묻는다. 중이 어리석다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궁예는 왕건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심하고 분노해 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산 아래 물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러나 궁예는 물에 빠지지 않고 산기슭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우뚝 선 채로 죽은 궁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누이려 해도 시신이 꿈쩍하지 않았기에 금으로 관을 만들어 시신 위에 씌운 후 위에 큰 돌을 놓았다.

그 후 도적들이 금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돌을 걷어 내다 하늘과 땅이 요동치자 도망을 가는 일이 있었다. 또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굽이 땅에 붙어 못 지나가다 말에서 내려서 걷자 겨우 말굽이 떨어졌다고도 한다. 이후로 궁예의 무덤 앞은 누구든지 말을 타고 지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에 대한 모든 기록들은 모두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과 그 후손들이 기록한 고려측의 기록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궁예를 배신한 왕건측의 역성혁명과 왕조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며 실제로 학계에서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 같은 1차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궁예에 대한 고려측의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등 고려측이 남긴 궁예에 대한 여러 기록들에 대해서 반론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즉,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실제로 학계내에서도 꽤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철원 지역 궁예 민간전승의 경우 궁예에게 좋은 민간 전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의 곤암산 전설이나 또 궁예가 궁예의 왕후로 둔갑한 구미호에 홀려 재위 기간에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와, 한 대신이 이 구미호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잡으려 다리가 3개밖에 없는 전설상의 신비한 개인 삼족구를 구해 구미호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심지어 이 사건 이후 궁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무당이 18세된 여성의 유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인육을 먹었다눈,철저하게 고려의 입장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궁예전보다 더한 만행도 구전되어오고 있고, 또 고려말에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손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손자라는 이야기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조작되고 일어난 '김저의 옥사', '윤이, 이초의 옥사'와 더불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신랄히 비판한 사안이고 또 오늘날의 한국 역사학자들도 조작이라고 보는 공민왕 말기 자제위 사건이 연상되는 궁예가 자신의 아내와 왕건을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이야기와 또 이후 왕건에게 축출되어 쫓기게 되었을 당시 한탄강의 곰보돌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 지역의 민간 전승들이 궁예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들을 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져 민간의 궁예 신앙과 궁예에 대한 민간 전승들을 가지고 무조건 궁예가 폭군이 아니고 비운의 창업 개혁 군주라고 주장하기도 모순점이 있기는 합니다.또한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 집행과 공포 정치로 패서 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강비가 죽은 915년 궁예의 나이는 이미 46세로(869년설을 따를 경우. 857년설의 경우 58세)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육성시킬 궁예의 수명 자체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정비 소생의 아들 둘을 스스로 죽여버린 것으로 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에서 태자를 핍박하긴 했지만 끝내 죽이진 않은 광종과 비교되는데 결국 후계자가 사라지면서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여건을 궁예 스스로 만들어준 꼴이기도 합니다.

함남 안변 전 궁예묘

▦궁예에 대한 현대의 평가

궁예가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출발해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도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개 정변 이후에는,구 지배 체제를 격하하고 업적 같은 것들을 깎아내리는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전주(大王前主)"라고 일컬어졌는데 즉 당시 국왕(대왕)인 왕건 즉위 이의 군라는 의미로 이 호칭은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 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까지도 궁예의 영향력이 남아있었다는 추측의 반증이 됩니다.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종교학자들은 궁예가 치성광여래 신앙,법상종의 미륵신앙,도교 사상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으며 형미와 같은 선사를 한때나마 중용했던 것을 보면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은 가졌을 여지가 있습니다.철원군에서는 군부 대접을 받고 있는데 지금의 철원군 지역이 태봉의 수도가 되면서 이후 태봉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입니다.궁예 연구자인 슬픈 궁예의 저자 이재범 경기대 교수는 “궁예의 포악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사서에 기록됐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인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궁예는 신라말 혼란기 속 민중을 위한 개혁군주였을까? 궁예는 왕건의 고려에 의해 폭군으로 비운의 군주였을까 아니면 신라말 혼란기 속 민중을 위한 개혁군주였을까?

궁예의 왕국 태봉,마진 속 인물들

궁예의 부인 강씨

기록에 나오는 궁예의 부인은 그녀뿐이기 때문에 태봉의 왕비로 여겨지지만,시호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에 현대엔 왕비 강씨나 강비, 왕후 강씨라고 불리는데 이 중 강비가 가장 많이 쓰인다.정확치는 않지만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라고 한다.기록상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지리적인 여건이나 그녀가 신천 강씨 집안사람으로 추정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송악의 왕건과 집안끼리 교류했거나 적어도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그녀가 언제 궁예의 왕비가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송악에 도읍하면서 왕비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궁예가 신천 출신인 그녀를 왕비로 삼은 것은 지금의 황해도,평안도 일대인 패서(浿西, 평안도) 호족들과의 연합을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그런 그녀가 정사 기록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부분은 삼국사기 궁예열전의 단 몇 줄뿐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강비가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한다"라고 간했다고 한다.그러자 궁예는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면서 강비의 음부에 쇠방망이를 달궈 쑤셔 죽였다는 끔찍한 기록이 그것이다.게다가 그녀가 낳은 궁예의 두 아들인 청광과 신광도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일반적으로 왕비를 폐해 쫓아내는 일은 있어도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문 데다가, 왕비가 낳은 아들들까지 모조리 죽였다는 점에서 궁예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고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해석도 있긴 하다.강비가 패서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었을 것이고 궁예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패서 호족들이 밀리게 되자 이를 막으려다가 궁예가 그녀를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게다가 태자들까지도 죽음을 당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궁예를 밀어내고 태자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액션을 취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패서 호족들과 궁예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묘하게도 설화에서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다르다.강원도 철원군 쪽의 설화에서는 그녀가 원래 왕건의 배필감이었다가 궁예에게 시집갔지만 왕건을 못 잊어서 왕건과 밀통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궁예의 폭정이란 것도 실은 궁예의 잘못이 아니라 강비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반면 경기도 가평군 쪽의 설화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강비가 궁예에게 폭정을 그만둘 것을 간하다가 궁예의 노여움을 사서 역사와는 달리 가평의 산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후에 궁예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도망치게 되면서 자신에게 충언을 한 강비를 잊지 못해 강비가 유배된 가평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강비는 죽은 뒤였다고 한다.가평에는 강비가 유배된 산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강씨봉이 있으며 궁예는 강씨봉을 내려와서 다른 산으로 올라갔는데 이 산에서 강비의 죽음과 망국의 슬픔에 대성통곡하자 산도 따라서 울었다는 명성산이 있다.

 환선길
 
고려 초기에 반란을 일으킨 호족으로 동생 환향식(桓香寔)과 함께 왕건을 섬겨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공을 세웠으며, 마군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왕건의 심복이 되어 항상 정예군을 거느리고 숙위하도록 했다.그러나 환선길의 부인이 재주나 용력이 남들보다 뛰어나 남들이 복종하거나 큰 공을 세웠는데도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았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냐고 꼬드기자 병사들을 집결했다가 변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마군장군 복지겸이 이를 알고 왕건에게 보고했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왕건이 궁전에서 학사 몇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할 때 부하 50여 명과 무장해 동쪽 곁채에서 안뜰로 돌입해 해치우려고 했는데, 왕건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너네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내가 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냐" 라며 "천명이 정해졌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일갈하자 그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군사를 매복시킨 것으로 의심해 달아났다.그러나 왕건의 호위병들에게 격구장까지 추격을 받아 그 와중에 죽었다.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환선길의 부인이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즉위 후 겨우 4일 지나 아직 혼란한 정국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논공행상에 불만 품고 난을 일으킨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첫날에 왕을 바꾸고, 둘째 날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셋째 날에 모의해서, 넷째 날에 쳐들어갔으니 사흘 간의 행적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일이다.이 때문에 환선길이 왕건의 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이흔암처럼 궁예의 핵심적인 지지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심지어 그 모든 것이 복지겸의 모략이었다는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흔암
 
고려 초기에 반란을 일으킨 호족으로 궁술,기마술을 일삼을 뿐 남다른 재주와 식견은 없었고 이득만 재빨리 챙기는 기회주의자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궁예를 섬기다가 기회를 보아 계책을 내어 벼슬을 얻었다.궁예가 쫓겨나기 전에는 웅주를 습격해 점령하면서 그 곳을 수비했다.왕건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흉계를 품고 도성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사졸들이 모두 달아나 웅주를 후백제에게 빼앗겼으며, 한찬이자 수의형대령인 염상이 그의 흑심을 알아차리고 왕건에게 알렸지만 모반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염상이 이흔암을 감시할 것을 건의하자 사람을 보내 염상의 집에서 몰래 엿보게 했는데, 마침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며 내 남편의 일이 제대로 잘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결국 전말을 보고받은 왕건의 명으로 하옥되었다가 역모를 자백하게 되었으며, 큰 거리에서 참수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그런데 모반의 증거가 이흔암의 처 환씨가 "남편 일이 잘 되어아 할 텐데."라고 말한 것뿐인데, 감옥에 가두고 이 자백을 받았기 때문에 이흔암의 역모는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거기다 왕건은 마지막으로 이흔암과 면대하여 구체적인 역모 이야기보다는 "니가 평상시 하던 꼬라지가 널 이꼴로 만들었지!"라는 식으로 꾸짖는다.즉,이흔암이 구체적으로 역모를 꾸몄다기보다는,궁예나 환선길과 가까웠던 처지라 정치적으로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전방 요충지인 웅주의 수비를 아무한테나 맡길 일이 없으니 궁예의 신임이 두터웠고 무력도 뛰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반응형
그리드형
LIST
사업자 정보 표시
옥탑방 바카시온 | 최창열 | 22309 | 사업자 등록번호 : 708-28-01499 | TEL : 070-4517-4074 | Mail : sysy2202@naver.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22-인천중구-0183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댓글


.myredbtn{ -webkit-text-size-adjust: 100%; word-break: break-word; background-color: #e00d0d; border-radius: 28px; border: none; display: inline-block; cursor: pointer; color: #faf8f8 !important; font-family: Arial; font-size: 20px; font-weight: 550; text-align: center;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white-space: nowrap; padding: 10px 35px; box-shadow: 2px 4px 6px #646363; text-shadow: 0px 1px 0px #bb2154; width: 80%; height: 40px; line-height: 40px; overflow: hidden; transition: background 0.3s, transform 0.3s; text-decoration: none; } .myredbtn:hover{ transform: scale(1.05); background-color: #fc6565; text-decoration: under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