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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계승한 숨겨진 고구려의 전신 고대국가 구려_700년 역사의 고구려가 아닌 900년 역사의 고구려를 발견하다

by 마음heart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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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역사의 고구려가 아닌 900년 역사의 고구려를 발견하다

주몽이 계승한 숨겨진 고구려의 전신 고대국가 구려



동부여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내려온 고주몽은 고구려를 창업한 뒤 강력하게 성장합니다.이런 고구려 성장의 비밀은 기존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구려에 있습니다. 고주몽의 고구려는 맨손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구려의 왕권과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고주몽은 부여의 망명 정치세력의 대표자로 망명한 지 2년 만에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고주몽이 빠르게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주몽이 구려왕의 사위가 되어 구려 왕이 죽자 구려의 왕권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몽은 구려의 왕을 물려받으면서, 구려라는 나라 이름에 고자를 붙여 고구려를 국호로 삼았습니다. 이때부터 구려라는 고대 국가는 사라지고,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대국가 구려는 우리들에게 매우 생소하면서 낯선 나라이기도 합니다. 역사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전무하다 보니 구려를 모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구려를 모르고서는 고구려의 건국과 초기 성장발전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이전의 국가 구려는 이미 노예제 국가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로서 고대국가 구려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체제설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원시시대 말 또는 막 계급사회로 접어든 사회발전 단계에서 고대 노예제 국가로서 고구려가 출발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을 당시에는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서 고대국가의 면모를 채 갖추지 못했으며, 기원 후 2~3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서 고대국가로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그런데 고대 노예제 국가로서 구려가 이미 1천여 년 동안 존재해 왔다면, 고구려 성립 당시 사회발전 단계는 막 계급사회로 접어들어선 그런 단계를 훨씬 뛰어넘을 뿐 아니라, 노예제 고대국가의 말기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바로 이점에서 고구려의 전신 국가로서 고대 노예제 국가인 구려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려는 고구려의 전신 고대국가로서, 지금 남아 있는 역사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원래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출발했다가 기원전 15세기 중엽 고조선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전신 고대국가로서 구려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의 경우 후한서 예전에서는 ‘예, 구려 및 옥저는 다 본래 조선땅이었다’고 구려의 존재를 밝히고 있으며, 한서 권28 지리지 현도군 고구려 현조에 대한 후한 말 응소의 주석에서 ‘옛 구려호(호는 이민족에 대한 비칭)’라고 했고, 고구려가 구려의 왕권을 이어받아 구려 국호에 높을 고자를 덧붙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상서 권11 주관에 대한 주석에 ‘해동의 여러 이족들인 구려, 부여, 한, 맥’이 주나라 성립시기 중국과 통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일주서 왕회해편에 성주(주나라 동도 낙양)의 낙성식에 ‘고이’가 축하하러 왔다고 했는데 진나라 사람 공조가 ‘고이는 곧 고구려(구려를 지칭)이다’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삼국지 후한서에는 계루부(주몽이 왕이 되면서부터 계루부에서 왕이 배출됨)에서 왕이 나오기 전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다고 해 주몽 이전에도 연노부(연나부,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던 나라가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계루부에서 왕이 나오기 전에 연나부의 우두머리가 국왕으로 되었던 나라인 구려국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고성자 성터(구려시대부터 있었던 성)

▒고조선의 후국에서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한 구려

구려가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보지만 그 이전에도 원시 씨족사회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구려지역(오늘의 요녕성 환인지방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동풍현, 해룡현, 서쪽으로는 청원현, 신빈현 지방, 동쪽으로는 정우현, 무송현 일대, 남쪽으로는 북한(조선)의 자강도 양강도 지역을 포괄)에 청동기 문화가 전파되고 계급사회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3000년기 중후반(기원전 23세기경)입니다. 이는 이 지역에 분포돼 있는 돌관무덤과 고인돌 무덤들을 통해 확인되는데 이들 무덤에서는 단군조선에서 발굴되는 것과 똑같은 비파형 동검과 비파형 창끝, 청동 도끼, 미송리형 토기 등이 수없이 발굴되는데 대다수가 단군조선 시기 무덤 형식과 부장품들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23세기경에 계급사회로 진입한 구려 지역은 처음에는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출발했는데 이것은 역사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 권85 예전에는 “예, 옥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단군조선)의 땅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제왕운기가 인용한 본기에서는 “단군이 고조선(단군조선)뿐 아니라 시라(신라),고례(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및 맥을 모두 다스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보다 많은 재부를 축적한 후왕을 비롯한 구려 지역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당시 쇠퇴 몰락해 가던 단군조선 왕조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라나게 됐고, 고조선의 왕조교체 시기인 기원전 15세기 중엽에 고조선에서 분립해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구려의 성장

구려는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러서는 주변 나라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고대 중국의 역사를 전하는 일주서 권7 왕회해편에서는 기원전 1059년에 건설된 성주(주나라 제2의 도읍인 낙양에 붙여진 명칭)의 낙성식에 초청받아 참석한 주변 여러 나라들과 종족들의 명칭을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에 고이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진나라(동진, 317~420년) 오경박사 공조는 이 고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고이는 동북이로서 고구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고구려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고이는 고구려가 아니라 구려를 가리킨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원전 11세기 서주의 동도인 성주의 낙성식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당시 구려가 서주와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던 독자적인 나라였으며 또 구려가 기원전 11세기경에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져 있다는 것은 상서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상서전(권11 주관22)에는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부여, 구려, 한, 맥 등 동방 나라들이 서주 왕실과 통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고구려가 고대국가 구려를 계승해 세워진 봉건국가인 만큼 고대국가 구려의 정치적 중심지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와 관계가 있는데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동시에 구려의 정치적 중심지로 볼 수 있는 졸본(홀본)지역은 고구려 초기 유적 유물들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환인지역입니다. 환인 일대는 고구려 적석총을 위주로 하는 무덤들이 1천수백기가 발굴되었고, 구려말 고구려 초기의 무덤들인 무기단 돌무지무덤들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고구려 초기 산성으로 보이는 흑구산성에서 고인돌 무덤과 함께 자그마한 규모의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인돌 무덤과 함께 돌무지무덤의 원초형이 유행되던 시기에 환인지방이 이미 구려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구려의 정치경제체제

구려는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를 계승해 자체 중앙통치기구와 지방통치기구를 갖추었는데 고대국가 구려에서 최고 통치권자는 국왕이었습니다. 국왕은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과 후국 왕들을 지휘 통솔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모든 국가 활동을 주관했습니다. 구려국에서도 말기에 최고통치자를 왕으로 불렀다는 것은 삼국지나 후한서 고구려전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려에서 왕의 지위는 세습되었는데 구려 말기 국왕은 5부 가운데에서 오직 연나부의 적통대인만이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은 중국의 옛 역사서인 삼국지(권30 위서 고구려전)에 “본래 5족(부)이 있었는데... 연나부가 왕으로 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에서 졸본 부여왕이 자기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사위인 주몽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도 고대국가 구려에서 왕위가 세습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구려에서도 부여에서와 같이 마가, 우가, 양가, 구가 등 가(家)로 불리는 중앙급 관리들과 그 아래 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통전 권186 동이 동옥저전에 나오는 주석에서 확인됩니다. 구려의 관직은 부여의 관직과 같으나 관직 명칭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부여에서는 저가가 있었지만, 구려에서는 저가 대신 양가가 나옵니다. 이러한 관직제도는 단군조선 시기 관직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구려에서도 고대 부여와 마찬가지로 중앙의 최고 관직명인 가들과 그 밑의 여러 관직을 두었을 뿐 아니라 제가평의회도 설치되어 가들과 고위급 귀족들이 성원으로 참여해, 국가 대사를 토론하고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시행했다는 사실이 여러 역사자료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구려는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후 높은 경제 문화발전을 이룩함으로서 매우 앞선 시기에 철기문화를 창조해 나갔는데 구려에서는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해서는 선철을 널리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서는 강철 생산단계로 발전했습니다.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 유적들인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풍청리, 심귀리, 증강군 토성리, 중국 요녕성 환인현 대전자 돌무지무덤 등지에서 나온 쇠활촉, 쇠도끼, 쇠창, 꺽쇠, 띠고리, 비수 등 철제품들은 구려의 철 생산 기술력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나온 선철(주철)제품, 강철제품(주강 및 단조품)들을 보면 그 용도에 맞게 서로 다른 다양한 재질의 철제품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처럼 구려 지역에서는 기원전 4~3세기경에 이르러서부터 철기가 광범히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사회경제 발전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또한 이는 낡은 노예제적 생산방식을 허물고 봉건적 생산양식이 도입, 확산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됐는데, 이것이 고구려 건국의 사회경제적 물질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4~3세기의 자강도 위원군 용연구 돌무지무덤에서 나온 쇠로 만든 호미, 괭이, 낫, 도끼, 반달칼 등은 철제품 농기구들이 광범하게 사용됐다는 것을 실증해줍니다.

상고성자 무덤떼(구려말 고구려 초기 무덤)

▤구려의 몰락

구려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지만 고구려의 역사자료에는 구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구려를 연장한 나라가 아니라 구려와는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구려를 계승한 듯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구려가 붕괴되고 고구려가 건국된 것입니다.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주변나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고대국가 구려가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구려의 약화 몰락과정은 구체적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지만,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의해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발생한 제철 수공업은 기원전 5세기를 기점으로 강철제 농공구를 발명해 보급되었는데 철제농공구의 광범한 보급은 농업에서 새로운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농경지 개간이 용이해졌고, 단위 면적당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줬습니다.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노예 노동에 의한 농업경리의 몰락과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수립을 촉진시켰는데 노예들의 강제노동에 의존해 농업경리를 운영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토지를 일정하게 떼어 맡기고 가족별로 농사를 짓게 해 지대-소작료를 받는 편이 훨씬 유리해졌기 때문이며 게다가 고대국가 말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노예들의 저항과 투쟁의 확산으로 봉건적 경리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제농공구의 확대, 봉건적 제 요소들의 성장은 노예제적 생산관계에 기초하고 있던 고대국가, 구려의 약화와 몰락을 촉진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새로운 생산관계의 발생 발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데 낡은 노예제적 생산관계에 기초하고 있던 고대국가 구려 왕의 통치력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생산력 발전에 힘입어 지역 정치세력들이 급격히 성장합니다. 구려국 말기에 이르러 구려왕의 통제 밑에 있었던 비류국 양맥국이 떨어져 나갔고, 오늘날 양강도 지역에 있었던 후국들인 개마국, 구다국, 조나국 등이 독자적인 소국들로 떨어져 나갔으며, 북부지역은 부여의 영역으로 돼 버렸습니다. 그 결과 구려는 중심 지역인 5부 지역, 즉 압록강 중류지방- 혼강 유역과 자강도 지역, 혼하 상류, 휘발하 상류 유역에 국한된 크지 않은 나라로 전락했으며 5부 지역 역시 형식적으로는 국왕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소국 연합체 형식으로 결합돼 있었습니다. 구려국 말기까지도 5부 지역의 결합이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5부의 지배계급 집단들이 혈연적으로 가까운 문벌들이었고 자기들끼리 주로 혼인함으로써 친연관계가 깊었던 사정과 관련 있습니다. 구려국 말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5부 영역의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① 연나부(연노부; 소노부)- 요녕성 환인현, 신빈현, 청원현 지역 

② 과루부(계루부)- 길림성 집안시, 통화시 일대

③ 제나부(절노부)- 길림성 매하구시, 류하현일대

④ 환나부(순노부)- 자강도 만포시, 시중군, 자성군, 화평군, 성간군, 요림군, 진천군

⑤ 관나부(관노부)- 자강도 위원군, 초산군, 우시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

▤고구려 건국 기원전 37년설과 기원전 277년 건국설에 대한 차이

고구려의 건국년대가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는 설은 고려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른 것으로 참고로 삼국사기에서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역시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이 외에도 건호 원년(기원후 25년),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등의 연호도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현대 사학계에서는 소수설이지만, 고구려보다 늦게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가 먼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기원전 37년보다 1~200년은 더 빨리 건국됐을 거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은 계보상 역산해 보면 추모왕의 13세손이지만,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에 대해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이 왕업(基業)을 이어 발전시켰다.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고구려의 존속기간이 800여 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면서 내린 책문에 다음과 같이 나오기도 합니다. "공의 태조인 중모왕(추모왕)은 덕을 비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웠으며, 위풍을 청구에 떨치고 어진 교화는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대를 이어 본지가 끊어지지 않고 천리 땅을 개척하여 '800년'이 가까웠다(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즉, 당대 신라인이 생각한 고구려의 건립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부터 800년을 소급하면 서기전 132년 쯤이 된다는 것으로 이는 현재의 고구려 건립연도인 기원전 37년보다 100여 년 앞서는데, 광개토대왕비의 4세손 누락분과 맞아 떨어지지기도 합니다.한편, 북한에선 기원전 277년 건국설을 주장하는데, 신당서,삼국사기에 당나라 시어사(侍御史)였던 가언충이라는 사람이 당태종과 고구려 비기를 말하는 도중 "고구려가 900년이 되기 이전 80세된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고씨(주몽)가 한대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요. 우리의 장수 이적이 80입니다." 라고 하는 대화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900여 년간 존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북한은 고구려를 '동방의 천년강국'이러 부르기도 합니다.(여기에 더해 북한은 고구려가 저 때 건국되었으니 백제도 앞에서 5대 정도 누락된 왕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삼국사기의 추모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소서노 일가가 군림하던 졸본부여 체제를 그대로 흡수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는 암시가 많습니다. 후에 추모왕이 이 졸본부여(구려국)를 그대로 흡수 하였고, 고구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것으로 즉, 졸본 부여 시절까지 소급한다면, 여러 사서와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존속 900년 설이 설득력을 얻기도 합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타지 출신이며 고구려로 이주하여 고구려 여자와 결혼하여 연타발의 데릴사위를 하다가 고구려를 물려 받은 것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인데 소서노를 고구려 여자라고 규정하는 점에서 고구려란 나라가 이전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는 늬앙스이지만 이 설은 주류설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1. 고구려가 신라보다 먼저 국가로 발전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그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라 왕실의 계보가 선대로 소급되었다고 볼 뿐,고구려의 건국이 후대로 늦춰졌다고 보지 않는데 가령 249년 또는 253년 죽었다는 석우로의 아들인 홀해 이사금이 310년에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 많은 사람의 덕이 있다'며 즉위하는, 문면 그대로는 황당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입니다. 이래저래 보완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정상적인 해석이나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구려본기의 기년을 문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2. 광개토왕릉비의 '17세손' 언급은 세대 수로는 물론 맞지 않지만, 왕대를 기준으로 하면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해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이 왕업(基業)을 이어 발전시켰다.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 왕이고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 왕이다. 위 문장에서 '17세손'의 수식어를 '대주류왕'으로 보고 그로부터 17대째를 광개토대왕으로 본 후, 앞에서 등장하는 추모왕-유류왕(유리왕)을 합산하면 19대 왕이라는 대수와 부합합니다.정론에 따라 해석하면, 아래 800년 존속설 내지 900년 존속설이 도리어 붕 뜬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3. 고구려의 800년 존속설은 해당 구절을 언급한 삼국사기에서 '현도'가 등장하는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세워졌는데, 그 밑에 고구려현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설명하였듯 고구려현의 존재와 국가로서의 고구려의 성립은 동일시할 수 없지만, 기원전 107년부터 고구려라는 '지역'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고구려가 존속했다고 하면, 고구려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107년~기원후 668년, 775년이 되는데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구려의 장구성을 선전한다는 것입니다.신당서에서 언급한 900년설은 '고씨(주몽)가 한대로부터 나라를 세워'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쉽게 풀리는데 이러한 관념은 고을덕 묘지명에서도 보입니다.
 '옛적 적제(赤帝)를 이어 왕자(王子)의 기운이 흥해 한(漢)을 건국하고, (동이) 오랑캐는 삼한(三韓)의 땅에 살면서 (서로) 패권을 차지하고자 다투었을 때, 사해(四海)가 파도를 일으키고 순백의 태양이 정기를 내려주니,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연(燕) 땅을 크게 다스려 요양에 왕통(王統)을 세웠다(㫺火政龍興炎靈, 虏據三韓𧫘覇, 四𣴴騰波, 白日降精, 朱蒙誕□, 大治燕土, 王統遼陽)."
다시 말해 '고구려가 전한과 같은 시대에 건국되었다'는 관념이 있었던 것인데 고구려가 전한(기원전 206~기원후 8)이 존속한 기원전 37년 건국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짓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교묘하게 고을덕 묘지명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고제와 주몽이 서로 대응되는 시기에 활동했다는 왜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전한의 기원부터 고구려의 멸망까지(기원전 206~기원후 668)를 세면, 이는 총 874년으로 900년에 근접하며, 이는 고구려 900년설이 '한 대부터 존속했던 고구려'라는 관념에 입각해 왜곡되어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원전이지만 성립 연대가 더 빠른 당회요에서는 '900년이 되기 전에'라는 문구가 '1000년이 되기 전에'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961년 완성된 당회요에서 1060년 완성된 신당서로 넘어가면서 '1000년이 되기 전에'라는 문구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900년이 되기 전에'로 수정 되었는데, 이렇게 (당이 멸망한 이후에야) 마음대로 바뀐 자료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이는 고구려의 장구성을 내세워 중국에서 자신들이 이토록 큰 업적('1000년/900년이나 간 왕조를 정복했다'는)을 이루었다는 식의 선전을 하기 위한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4. 삼국사기의 고구려 존속 기간(기원전 37~기원후 668, 704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 유민이었던 고자(高慈)의 묘지명(700년 작성)에서 보이는 '고구려가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일본서기(720년 작성)에는 '고려 중모왕(仲牟王, 주몽)이 처음 건국했을 때 천 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세기(日本世記)》를 기록한 도현(道顯)을 비롯해 고구려 유민의 기록을 일본서기 작성에 참고한 것이기 때문에, 고자 묘지명과 마찬가지로 당대 고구려 유민의 계보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정확히 704년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1대수 이상 고구려의 왕계와 존속 연대가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임을 보여줍니다.나아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원전 자료는 유난히 미천왕 대까지의 것이 설화적인 것이 많고 또 상세하며, 그 뒤의 왕들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를 다수 참조한 영양왕 대 이후에야 다시 분량이 늘어나지만 그 사이의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서 옮긴 조공 기록 등을 빼면 상당히 빈약합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노태돈을 비롯한 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미천왕 대까지의 원전이 소수림왕 대 작성된 유기일 것이며, 그렇기에 소수림왕 대까지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미천왕 대까지의 역사가 유난히 상세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신라가 고구려의 역사 기록을 전해서 이어받았고, 그것이 삼국사기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이는 김부식 등의 삼국사기 편찬자가 임의로 역사 연대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원전에 충실하였을 것임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중요한 제사 '동맹'을 지내던 곳인 '국동대혈'의 내부 모습- 10월마다 왕이 직접 유화 부인과 주몽에게 제사를 올렸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학계의 주류는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의 왕계보나 연대가 고구려 당대에 정리된 것으로부터 크게 왜곡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압록강 중상류에 계단식 돌무지무덤 등을 표지 유물로 하는 인적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고구려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및 구삼국사에서 등장하는 비류국(졸본부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졸본부여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에서는 주석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고 처리되었고, 자세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백제본기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백제본기는 후대에 정통성 문제를 정돈해 놓기 위해 이리저리 손이 간 흔적이 보이는데 가령 백제 건국 설화에서는 온조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고 하여 한강 남쪽에 처음부터 도읍한 것으로 말하지만, 온조왕 13년(기원전 6)에는 온조왕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피해 한수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모순 기사가 버젓이 등장한다. 현재의 백제 건국 설화는 백제 스스로가 부여로부터의 정통성을 자칭하기 위해 왜곡한 기록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도 고구려 이전의 현지 정치체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부터 '연노부(涓奴部)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適統)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 (따로) 종묘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게 따로 제사 지낸다'고 하였듯, 계루부 왕실과 종실을 달리하는 계루부 이전의 왕실도 존재하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계루부 왕실은 '계루부 이전의 고구려'와 자신들을 분명히 나누어 본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고구려 스스로가 현도군 밑의 고구려현을 근거로 연대를 소급시켜 볼 수 있는 기원전 107년이나 그 이전이 아닌, 기원전 37년 전후에 (보장왕 대까지의 고구려 왕실과 이어지는 인물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자칭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계루부 이전의 고구려'가 존재했고, 그 이후에는 '계루부가 세운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오녀산성 성곽

하지만 고구려 건국 277년설을 주장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33년(14년) 조에는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삼으면서 군사와 국가에 관한 일을 위임했다고 밝혀져 있는데 대무신왕(무휼)의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인데, 기원전 17년에 사망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휼이 태자로 될 때 나이는 적어도 31살 이상이 돼야 맞지만 대무신왕(무휼) 즉위년조에서는 그가 태자로 될 때 나이가 11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1살 때 태자가 된 대주류왕과 31살 때 태자가 된 대무신왕이 서로 다른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삼국사기는 두 왕을 한명의 왕으로 만들어 놓고 두 왕 때 일어났던 일들을 짜깁기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에 관한 사실로 대무신왕 15년(32년) 11월 조에는 갈사왕의 손녀(대무신왕의 차비)가 낳은 왕자 호동의 활약상이 기록돼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려면 3세대이니까 최소 60년이상 되어야 하지만 바로 10년전인 대무신왕 5년(22년) 4월조에 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갈사국들 세웠다는 기사가 적혀 있으니, 10년만에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아이가 다 자라 20세의 청년을 되었다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갈사왕이 왕이 되기 수십년 전에 그의 손녀가 있었고, 그 손녀가 대무신왕의 차비가 돼 호동을 낳았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지만, 당시 고구려 부여 관계를 보면 별로 타당성이 없습니다.이처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는 5세대 왕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는데 고구려 본기의 앞부분의 몇 명의 왕을 빼버리고 그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 중 빼놓을 수 없었던 몇몇 사건과 사실들을 유리명왕기 대무신왕기 등에 옮겨 놓았던 것으로 이렇게 초기 5세대 왕들이 고의적으로 누락됐다 보고 있습니다.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누락된 5세대 왕들을 국내외 여러 사료들을 통해 밝혀냈는데 이렇게 밝혀낸 5세대 왕들을 차례로 넣어보면, 추모왕 – 유류왕 – 여를왕 – 대주류왕 – 애루왕 – 중해왕 - 유리명왕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어디까지나 왕위 상속이 부자계승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어떤 왕조이든지, 왕위계승이 부자로만 이어지지 않고 형제계승으로 이루어진 사례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5세대 5명의 왕들 외에 또 다른 왕들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락된 왕 대수는 최소 5세대 5명으로부터 5세대 7~8명에 많으면 10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 사이의 불일치는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작됐다는 점으로 이러한 조작은 후기 신라 역사편찬자들에 의해 일찍이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 시작됐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쓸 당시 구삼국사를 참고 했을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이러한 조작된 사실이 기술돼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역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당시만 하더라도 고구려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서술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작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로서 부끄럽게도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기존 역사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앞뒤와 아퀴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순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아 버렸단 것입니다.우리 상고사는 기록의 부재 및 왜곡으로 인해 다양한 추측을 불러 일으키지만 고구려 건국 277년 900년이 중요한 이유는 한사군 설치 이전이냐, 이후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역사학계에서는 한사군 설치이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건국됐으며, 여기에는 한사군 설치로 인한 정치적 문화적 충격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중국의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은 중국 문물의 한반도 유입의 통로역할을 했고, 이러한 문물의 영향으로 한반도 각 지역에서 문명화의 흐름이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며 이 흐름들이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고사판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이러한 역사관의 뿌리는 일제 식민사관에서 시작됐으며 일제는 한사군의 설치는 우리나라 역사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변했으며 일제의 조선합병 역시 이와같은 맥락으로 합리화시킨 것입니다.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277년이라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기원을 중국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는 논거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 중국은 전국 칠웅이 다투는 내전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우리나라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고 당시 사회발전 수준 역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철기문화의 중국기원설 역시 사실과 다른데 우리나라 철기문화는 중국과 관계없이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창조돼 발전해 온 것으로,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강철생산단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면 온갖 철제 농기구들이 대량으로 생산됐다고 합니다.이처럼 삼국형성의 원동력으로 얘기되고 있는 철기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형성발전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우리겨레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되고 발전된 토착문화라는 것입니다.고구려 건국 연대 기원전 277년은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기원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고구려의 탄생은 그 어떤 중국 문명의 전파와 영향과 관련 없으며, 오로지 우리나라 자체의 역사 발전의 법칙과 경로에 따른 자생적인 것으로 고구려 시대 더 나가 삼국시대의 정치와 문화의 원형은 토착적인 것이며, 경제와 문화의 원동력 역시 자체의 힘으로 독창적으로 마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구려의 계승국으로 고구려의 모든 것들은 구려 사회 발전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들이며 더 나가 구려의 모든 정치 문화제도가 고조선에서 형성된 한반도 고대문명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볼 때 고구려의 모든 것 역시 고조선으로부터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고구려라는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가 중국 대륙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 자긍심을 잃지않고 투쟁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 대한민국은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한국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라는 문화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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