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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 계보 미스터리_유리왕은 추모왕의 진짜 아들이었을까?

by 마음heart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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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 계보 미스터리

유리왕은 추모왕의 진짜 아들이었을까?



고구려는 기나긴 역사만큼 뛰어난 왕들이 많이 배출된 나라이지만 그만큼 긴 역사 속에 고구려 왕들의 계보에는 수많은 미스터리가 있기도 합니다.특히 고구려를 창업한 주몽 추모왕과 그 뒤를 이은 유리왕은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추모왕과 유리왕의 혈통에 대한 의문점 역시 존재하기도 합니다.삼국유사 왕력 유리왕 부분에 ‘유리왕의 성은 해씨(解氏)이다.’라는 기록도 있는데 동명성왕은 고씨이고 유리왕은 해씨이므로 동명왕과 유리왕은 혈통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습니다.해씨 고구려설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지만 반면 동명성왕이 원래 해씨였으나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세우면서 고씨로 성을 바꿨고 아들인 유리왕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부여에 남아 있다가 탈출한 것이므로 여전히 해씨를 사용했던 것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고대에는 현재처럼 성씨 문화가 엄격하게 정착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동명성왕이 부여에 있을 때 함께했던 부여 왕족들 또한 성씨가 이름과 같이 표기되지 않습니다. 후대에 성씨가 기록된 것들도 많아서 같은 계통이라도 다른 성씨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중에 바뀐 성씨와 옛 성씨가 혼재되기도 하는 등 확실히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여기에다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 및 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관계에 있는 인물로 여겨 유리왕과 주몽을 부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동명왕의 성(姓)이 고씨(高氏)이자만,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지는 해씨(解氏), 그리고 제6대 태조대왕 이후는 다시 고씨로 되어 있는데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보기도 합니다.이렇게 혈통이 다른 이유를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소노부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소노부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지만 최근에는 주몽과 유리왕, 태조왕이 각각 성씨가 달랐으며, 고구려 초기 왕계를 신라처럼 3성 교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그러나 이와 달리 후대까지 주몽과 유리왕이 초기 왕계에 편입되어 숭앙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 계루부 내의 각기 다른 씨족집단 출신일 뿐 왕위 교체는 없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나타나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교체는 주몽시대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소노부 해씨는 송양왕(松讓王)의 비류국(沸流國)이거나 그 외의 다른 소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이러한 초기 왕계는 대체적으로 소수림왕대에 1차적으로 연결,정리되었다고 보며,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친 왕계 정리 작업에 의해 삼국사기의 왕계가 성립된 것으로 봅니다. 각각의 왕계 정리 작업은 당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계루부 왕실의 신성화 및 계루부 내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광개토왕릉비 탑본 1면 상단 일부 : 추모왕, 유류왕, 영락태왕(광개토왕) 이름이 보인다.

5세기 초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비문(이하 비문) 첫머리에서 건국시조와 초기 왕계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중략)…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왕위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하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딛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고명세자(顧命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동명성왕)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유리명왕(琉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다.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발췌

백제 건국 설화에서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부여에서 유류(孺留)가 남하하여 태자가 되었기 때문인데 고구려 건국 설화에서도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내려와 주몽의 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류(孺留)와 유리(類利), 이름이 살짝 다르지만 동일한 인물인데 그러다면 유리는 주몽의 진짜 아들일까?라는 의문이 들이기도 합니다.

가을 9월 왕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마흔이었다. 태자(유리왕)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

/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추모왕의 죽음은 비문의 내용과 달리 매우 건조한데 "용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과는 달리, 그냥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데 이와 달리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에서 인용한 '구삼국사'에서는 좀 더 설화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구삼국사의 내용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은 비문과 통하고, 용산에 장사지냈다는 기술은 고구려본기와 통합니다. 시조 추모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구려 건국 설화나 시조 전승이 여러 계통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건국 설화 등을 살펴볼 때 하나의 고정된 내러티브에 얽매이지 않고, 엄격한 태도로 사료를 비판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고구려본기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 기사를 살펴보면,먼저 유리왕의 또 다른 이름인 '유류(孺留)'는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서 보입니다. 아마도 고구려본기 편찬자도 비류시조 전승 계통의 자료를 보고 유류(孺留)라는 이름을 병기했을 것입니다.유리의 어머니가 '예씨(禮氏)'라는 기록 역시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서 보이는데 동명성왕 19년 4월조 기사에서는 유리의 어머니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기사에서도 유리의 어미니가 예씨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유리왕 즉위년조 기사와 서로 다른 자료에 의거한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고구려본기에서 유리왕의 혈연관계에 대한 기술 중에서는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백제 시조 전승에 보이는 내용을 반영하여 기록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리가 주몽의 '맏아들'이라는 기록 역시 백제 시조 전승의 온조와 비류라는 두 형제를 의식한 표현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따라서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유리가 주몽의 맏아들이라는 기사를 절대시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보다는 주몽과 유리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백제 시조 전승에 보이는 추모(鄒牟), 유류(孺留)라는 이름이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과 동일하다는 점으로 오히려 주몽, 유리(類利)라는 이름을 전하고 있는 고구려본기의 전거자료보다 더 오래된 자료에 의거하여 백제 시조 전승이 구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에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고구려본기 유리왕

유리(類利)가 어렸을 때 기이한 일이라고 한다. 어려서 일삼아 참새를 쏘았는데 한 아낙이 이고 있는 물동이를 쏘아 깨뜨렸다. 아낙이 화를 내며 욕하기를 "아비 없는 놈이 내 물동이를 부수었다"고 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진흙 탄환을 쏘아 물동이의 구멍을 막으니 본래와 같아졌다.집에 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내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어미가 유리가 어리다고 여겨 장난으로 말하기를 "네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하니 유리가 울면서 말했다. "사람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무슨 면목으로 남을 대합니까." 드디어는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하였다.

어미가 크게 놀라 말리며 말했다. "아까 한 말은 놀리느라 한 말이었다. 네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시다. 부여의 신하 신세를 원망하여 남쪽으로 떠나가 나라를 세웠다. 네가 가서 뵙겠느냐."유리가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남의 임금인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어미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떠나시며 이런 말씀을 남겼다.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일곱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었다. 이것을 얻어야 내 아들이다'."유리가 산골짜기로 가 찾다가 못 찾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는 집 건물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 기둥은 바로 주춧돌 위 소나무였고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면 일곱 모서리이다. 돌 위의 소나무라면 기둥이다." 일어나 가 보니 기둥에 구멍이 있었고, 부러진 칼 한 도막을 얻고서는 크게 기뻐하였다.전한 홍가(前漢 鴻嘉) 4년 여름 4월 고구려로 달아나 칼 한 도막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 한 도막을 꺼내 서로 맞추어보았다. 피가 나면서 이어져 온전한 칼 한 자루가 되었다.왕이 유리에게 말하였다. "네가 참으로 나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성한 재주가 있느냐." 유리가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날려 솟아올라 창을 타고 햇빛을 가려 신통한 이적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구삼국사 동명왕편

두 전승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을 있는데 첫째, 주몽의 부인이자 유리의 어머니가 '예씨'라는 내용이 고구려본기에만 기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명왕편에 인용된 내용이 구삼국사 전체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기록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씨'라는 정보는 나름 중요하기 때문에 구삼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면 이규보가 이를 굳이 빼놓을 리가 없으며 더구나 이규보는 고구려본기를 읽었기 때문에 '예씨'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유리의 어머니가 '예씨'라는 기록은 이전에 살펴본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도 보이는데 고구려본기의 '예씨'라는 기사는 백제본기 비류시조 전승을 참고하여 정리한 결과로 유리전승에는 어머니 성씨가 '예씨'라고 기록된 계통과 기록이 없는 계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둘째, 어머니가 유리에게 아버지 주몽을 소개하면서 고구려본기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구삼국사는 "네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주몽의 신성성에 대한 표현에서 두 기사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구삼국사의 전승 대목이 주몽전승과의 관련성도 더 깊고, 동시에 신화적 색채 또한 훨씬 두드러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문처럼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천제의 손자'라는 표현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의식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셋째, 주몽은 물론 유리의 신성성을 강조함은 구삼국사에서 주몽이 유리에게 마지막 테스트로서 스스로 신성한 재주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대목에서 가장 고조되는데 유리는 "몸을 날려 솟아올라 창으로 비치는 햇빛을 타는 신성한 이적"을 펼쳐서 주몽의 혈통임을 인정받습니다.사실 유리는 주몽을 만나기 전에 주몽의 혈통다운 능력을 증명하는 과제를 부여받았습니다. 주몽이 아내에게 전한 과제는 반으로 잘린 단검을 찾기 위한 수수께끼 풀이였는데 고구려본기에는 그 수수께끼를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七稜石上松下]"로 기록하였고, 구삼국사에는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七嶺七谷石上之松]"라고 하였는데 고구려본기 내용이 다소 싱겁다면, 구삼국사 내용이 훨씬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수수께끼 풀이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영웅이 통과해야 할 일종의 관문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은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인 예로 수수께끼 풀이는 하나의 난관을 돌파하면서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유리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아버지 주몽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됩니다.구삼국사에서 유리가 화살을 쏘아 물동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화살로 그 구멍을 메꾸는 대목은 유리의 활 쏘는 재능이 아버지 주몽으로부터 물려받았음을 암시하는데 이점에서도 구삼국사의 전승이 전체적으로 고구려본기의 전승보다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잇는 신성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는 면에 보다 충실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즉위년조

유리왕의 두 전승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지만, 구삼국사의 유리전승이 주몽과의 관련성이 더 두드러지고, 또 유리의 신성한 능력을 강조하는 내러티브가 훨씬 생동감이 있고 풍부하다는 점에서 두 전승 중 후대에 성립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유리전승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은 오히려 고구려본기의 유리전승 쪽으로 구삼국사가 삼국사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역사서이지만, 수록된 전승은 이와는 다른 문제인데 두 전승 내용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구려본기에만 보이는 내용으로 유리가 부여를 떠날 때,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동행했다는 점으로 이 대목은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세 사람과 동행했다는 점과 상통합니다. 이들 3인의 동행은 단지 세 사람만이 아니라, 세 사람으로 대표되는 일정한 세력집단을 거느렸다고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보여집니다.즉 유리도 주몽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으로 여기서 유리가 단지 주몽의 아들로서 그 뒤를 잇기 위해 남하했다기보다는 유리 역시 주몽과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남하하는 하나의 세력집단이며, 그렇다면 주몽과는 다른 건국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왕 재위 19년 4월에 유리가 부여에서 주몽을 찾아와 태자로 삼은 뒤 곧이어 9월에 주몽이 승하하여 유리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구심을 불러일으킬만큼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추모왕의 죽음을 구삼국사에서는 "왕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추모]왕이 왕위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중략)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갔다는 신성한 측면만이 아니라, 주몽왕이 스스로 왕위를 그만둔 듯한 표현이 눈길을 끄는데 주몽에서 유리에게로 왕위 계승이 부자연스러워서 어찌 보면 주몽왕과 유리왕의 관계를 의제적인 부자 관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분위기라는 것입니다.사실 유리전승의 내용을 보면, 주몽전승과 통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주몽이 홀어머니 유화부인 아래서 자랐는데, 유리 역시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예씨 아래에서 자란 면과 통하며 유리의 활쏘기 재능을 주몽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보지 않고 유리 독자의 재능으로 본다면, 이 역시 주몽전승의 주인공 모습과 통합니다. 또 부여로부터 고구려지역으로 남하하였다는 점, 그리고 부여를 탈출할 때 3인과 동행한다는 점도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다만 주몽전승의 핵심 모티브인 엄시수를 건널 때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드는 장면이 유리전승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큰 차이인데 대신 유리전승에는 부러진 칼을 찾는 대목이 핵심 모티브라는 것입니다.즉 핵심 모티브의 면에서는 두 전승이 전혀 다르지만다 유리전승은 신화적인 면이 탈색되어 있고, 현실에서 있을 법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몽전승보다는 후대적인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유리전승이 주몽전승과 달리 신화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지만, 나름 주몽전승과 통하는 내용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 독자적인 시조 전승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유리전승만으로는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또 다른 시조라고 볼 근거는 그리 충분치 않지만 단순히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라 부여에서 고구려로 오자마자 태자가 되고 왕을 승계했다는 사실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여러 변수요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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