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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양녀가 된 16살 의순공주義順公主_39살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아내에서 환향녀가 되다

by 마음heart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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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양녀가 된 16살 의순공주義順公主

39살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아내에서 환향녀가 되다 


영화 조선 마술사에서 의순 공주 역의 고아라


의순공주(義順公主:본명 이애숙(李愛淑)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양녀로 애숙(愛淑)이라는 이름은 1681년(숙종 7)에 간행한 선원록에 나옵니다.본래 성종의 서9남 익양군의 증손이자 성종의 서7남 봉안군의 양증손인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 ? ~ ?)과 부인 문화 류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왕실의 족보인 돈녕보첩은 여계 후손도 기재하는데, 의순공주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누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종 이혈-봉안군 이봉-흥원군 이경 - 기성군 이현- 금림군 이개윤(서자) -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은 성종과 후궁 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익양군의 후손이며 익양군의 이복형 봉안군의 양증손입니다. 따라서 혈통상으로든 법적으로든 성종의 현손이며 효종에게는 10촌 종조부입니다. 그러므로 의순공주는 효종의 11촌 고모가 되나 도리어 효종의 양녀가 되었으니 이는 항렬을 따지지 않은 비정상적인 입적이었습니다. 의순공주의 삶을 요약하면 종실의 딸로 태어나 공주가 되고,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이 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1637년(인조15) 9월, 청은 조선의 여자를 요구했는데 화친을 맺을 때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 이라는 조항이 있었던 탓에 청의 타타라 잉굴다이와 마부타가 "비록 황제의 분부가 없지만 조선이 성의가 있다면 이치상 먼저 스스로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조선에서 혼인은 큰일이라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다고 쳐냈지만, 잠깐 수습한 것 뿐이었습니다.그해 11월 20일, 청은 다시 타타라 잉굴다이를 통해 칙서를 보냈는데

"시녀를 뽑아 보내는 일은 근거할만한 문적(文籍)이 있다. 재상의 딸은 몇 사람이나 거두어 기르고 있는가?"

당시는 병자호란 직후였기 때문에 오랑캐를 향한 증오와 반감이 매우 높았습니다. 오죽하면 청의 사신과 정명수가 기생을 바치라고 요구하니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할 정도였습니다.천민에 속하는 기생조차 싫다고 자살하는데, 양반들이 자신의 딸을 선뜻 내놓을 리 없었지만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6명의 여자를 뽑았지만 정실부인이 낳은 적녀는 죽어도 안 보낸으며 그래서 서자의 딸이 공주까지 된 것입니다.

비국이 결혼할 여자 여섯 사람을 뽑아 아뢰었다. 나이 8세인 첩손녀(妾孫女)를 변개한 우의정 신경진의 양녀, 8세인 전 판서 이명(李溟)의 첩녀, 8세인 공조 판서 이시백의 양녀, 12세인 전 첨지 이후근의 첩녀, 11세인 전 판서 심기원의 첩녀이며, 종실의 딸 한 사람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상이 명하여 빼게 하고 드디어 평안 병사 이시영의 첩녀로 그 간선(簡選)을 채웠다.

/인조실록 인조 15년 11월 27일

다행히 마음이 바뀐 숭덕제의 명령으로 혼인은 취소되지만 시녀는 뽑아 보내라고 닥달을 해서 각사(各司)의 여종으로 10명을 보냈습니다.1638년(인조 16) 9월 12일, 숭덕제는 조선이 보낸 시녀 10명 중 4명은 궁중에 들였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도르곤에게 1명씩, 나머지는 다른 곳에 분배했습니다.그로부터 13년 후인 1650년(효종 1) 3월 다시 청이 여자를 요구하자 3월 5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던 사환사 내궁 나업(羅嶪)이 같이 오던 청의 사신 파흘내(巴訖乃) 등이 한 말을 효종에게 전합니다.

구왕(九王)이 부지(夫之)를 갓 잃어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우리들이 모두 안다. 만일 혼인이 성사되면 여러 신하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대국에서도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효종실록 효종 1년 3월 5일

이에 나업이 "현재 있는 공주는 두 살" 이라고 하니 도르곤은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宗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자 사실 내관 나업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했는데, 효종에게 혼인 적령기에 해당하는 공주가 없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인조의 고명딸 효명옹주는 이미 가례를 치렀고, 효종의 장녀 숙신공주는 어려서 죽고 없었지만, 차녀 숙안공주의 나이가 15세였으며 소현세자의 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왕녀를 보낼 생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3월 20일 청 사신이 창덕궁으로 들어와 후보자들을 보고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최종 선택했습니다. 효종은 그녀를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책봉하고, 생부 금림군은 종1품 가덕대부로 품계를 올려주고, 그녀의 오빠 이준은 장릉 참봉으로 이수는 전설사 별검으로 삼았습니다. 딸 덕분에 집안이 번성하게 된 셈입니다.그런데 금림군의 딸을 데리고 갈 때는 인평대군도 같이 가야한다는 것과 대신들의 딸을 시녀로 충당하라는 추가 요구까지 했는데 당장 시녀 선발이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앞다투어 혼인할 정도였고, 이런 현실을 효종도 알고 있었습니다.민간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는데 당시 조선의 반청 분위기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도르곤은 '섭정 도르곤'이라고 불렸는데, 어린 조카 순치제를 대신해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어서 거의 황제와 다름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

/타타르 전기 마티노 마티니.

사실 여기에는 먼저 효종이 즉위하고, 반청복명 성향의 김상헌,송시열,김집을 등용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청은 이외에도 여러가지를 트집 잡았는데, 그 중에는 탄핵당해 관직에서 쫓겨난 김자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청에서는 그가 큰 공이 있는 사람인데 쫓아낸 이유가 무엇이며, 누가 쫓아내라고 탄핵했는지까지 고하라고 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김자점 부자가 조정의 일을 청에 누설한 것으로 의심했습니다. 효종도 마찬가지로 김자점을 의심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처벌하지는 못했는데 이를 통해 청이 효종의 반청 분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조기에 제압하고 사대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국가 간의 혼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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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가 시집 간 청나라 도르곤

의순공주는 4월 고국을 떠나 청으로 갔습니다. 이날 효종이 서대문 밖 근교까지 나와서 공주를 전송했고, 공조 판서 원두표가 공주를 호위했으며, 시녀 16명과 의녀, 유모, 몸종, 수모(首母)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도르곤은 버일러들과 사냥을 한다고 산해관 밖으로 나와 있다가 5월 21일 공주가 도착하자 맞이하여 당일에 성혼했습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이역만리로 떠나 39세의 도르곤과 부부가 된 것인데 무려 23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 생활은 원만했는데 후일 도르곤은 공주를 맞이할 때 육례를 순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이해해달라고 했고, 먼저 사신을 보내고 친영을 하려고 했는데 조선은 길이 멀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조선으로 돌아온 원두표가 도르곤이 처음에는 만족스러워 했으나 연경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꾸어 공주와 시녀들이 못생겼다고 불만족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도르곤의 말을 보면 도르곤의 '진짜 불만'이 무엇인지 속내가 드러납니다.

"선한(先汗) 때부터 본국에 은혜를 베푼 것이 매우 두터웠고, 나도 국왕에게 사사로이 베푼 은혜가 있다. 그런데 번번이 왜적과 흔단이 있다는 핑계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겠다고 청하니, 이는 필시 그대 나라가 상하 간에 모두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녀를 선발하여 올리는 일은 명나라 때부터 이미 구례(舊例)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일은 그대 나라의 행동을 보려는 것인데, 그대 나라가 정밀하게 선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주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시녀 역시 못생긴 자가 대부분이다. 그대 나라의 불성실함을 여기에서 더욱 볼 수 있다."

/효종실록 효종 1년 8월 27일

도르곤은 실제로 의순공주의 외모가 못생겨서가 아니라, 조선의 북벌준비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불만을 공주의 외모핑계를 대면서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실학자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에서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백송골'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백송골은 조선 특산의 사냥용 매로, '흰 빛깔의 매'를 말하는데 몽골과 만주에서 귀하게 쳤으며, 이는 자태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뜻입니다. 즉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으며 정실부인의 으뜸인 대복진에 둔 것입니다.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의순공주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입니다.하지만 12월 31일, 도르곤이 열하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혼인한지 단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시집와 과부가 된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도르곤의 장례를 치르고 한달 반 만에 순치제가 숙청 작업을 시작했는데 도르곤의 묘호, 시호, 존호를 박탈하고 위패를 부수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목을 잘라 효수했습니다. 잔혹하지만 도르곤이 조선에서도 주제 넘었다고 평가할만큼 쌓아온 업보가 있었고, 순치제의 통치에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하지만 그러는 동안 의순공주는 다른 황족과 재혼했는데 본래 조선의 종실 여성으로 태어나 교육받은 그녀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지만 청나라는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사취수제도 있거니와, 역대 중원 왕조들의 화번공주들도 사정에 따라 두 번이든 세 번이든 혼인했습니다.이 재혼을 도르곤 사후 불어닥친 역풍에서 보로가 의순공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보는 설도 있습니다. 허나 이런 시각도 약간 미묘한 게 이 단친왕 보로는 도르곤이 죽자마자 도르곤의 다른 첩을 건드려서 스캔들이 났던 적이 있고, 도르곤 사후 줄을 갈아타며 도르곤의 정적 지르가랑과 함께 도르곤의 탄핵 상소를 올렸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정백기에서 군왕까지밖에 못 올랐던 아버지보다 높은 작위까지 오를 정도로 도르곤 밑에서 열일했던 부하임은 사실이지만 두번째 남편 역시 1652년에 죽어서 또 다시 과부가 되었습니다.이런 가운데 사신으로 청을 오고 가던 금림군은 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데려오고자 순치제에게 요청했고 청의 입장에서는 의순공주는 더이상 이용 가치가 없었습니다.그런데 이 귀국이 조선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금림군이 독단적으로 추진한 일이고, 일이 잘못 되었으면 청의 질책이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청에서는 '과부로 혼자 사는게 가여우니 특별히 돌려보낸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효종의 동정으로 의순공주는 정기적으로 쌀을 지급받았고, 금림군이 죽었을 때는 현종의 뜻에 따라 예장되었습니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의순공주에 대한 조정의 여론도 완전히 바뀌었는데 현종이 즉위하자 공주 작위를 몰수하고, 공식명칭은 효종의 수양딸이 아닌 '이개윤의 딸'이라고 썼으며, 아버지 이개윤도 금림군의 작위를 잃고 삭탈관직되어 평민이 되었습니다. 이용할대로 이용하다 필요없으니 줬던 것들을 모두 빼앗아 버리는 조선조정의 파렴치함의 극치였다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하여 의순공주는 귀국한지 5년만에 주변의 냉대속에 28살의 한창 나이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으며 아버지 이개윤도 딸이 죽은지 1년만에 사망했습니다.조선 조정은 그래도 미안한 감은 있었는지, 1662년(현종 3년)현종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특별히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고 했습니다.정략결혼이었지만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며, 설화에 의하면 의순공주가 귀국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여 무당을 불러 도르곤의 넋을 불러오기도 했다고 합니다.야사인 연려실기술에서는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여 딸을 보냈는데,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한 일이 아니고 청나라에서 보내는 비단이 많은 걸 탐낸 것이었는데 금림군은 지극히 가난했다가 부유해졌으며 딸은 도르곤이 소박놓고 도르곤의 하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금림군이 의순공주를 데려왔을 때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했다라는 이야기인데 야사이므로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이개윤의 실제 의중도 확신할 수 없지만 당시 왕실 족보에 아들이고 딸이고 다 기록되어 있는지라 당시 조선에서 이개윤과 의순공주가 얼마나 욕 먹는 분위기였는지 알 수 있다었습니다.그래도 의순공주는 조선의환향녀들 중에선 대우가 좋은 편에 속했는데 다른 환향녀들은 의순공주보다도 더욱 박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환향녀에서 화냥년이 된 국가와 역사의 참혹한 피해여성들

병자호란은 47일만에 인조의 항복으로 끝나버리지만 임진왜란의 기나긴 7년여 전쟁과는 또 다른 피해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마는데 1만 3천여 명의 군사로 남한산성에 진을 치고 12만 대군의 청나라와 대치했지만 결국 삼전도에서 인조가 무릎을 굻고 군신의 의를 맺는 치욕을 당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가기도 하지만 이 짧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힘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단기간에 끝난 전쟁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끌려간 백성의 수가 무려 50여만 명이었으며 이들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청나라가 조선 백성들에게 매긴 등급에 따라 돈을 지불해야 했던 것입니다. 힘을 잃어버린 국가나 군주가 해결해 줄 수 없던 이 상황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을 팔거나 빚을 내어 청나라에 끌려간 누이나 아내들을 데려오고는 하였으며 이렇게 힘겹게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하여 온 동네의 사람들은 고생하였다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많은 환향녀還鄕女들은 원치않게 뱃속에 오랑캐의 아기들을 임신을 한 상태였고 그렇게 환대받던 환향녀는 화냥년이라 하여 멸시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환향녀 중에 어우동처럼 색에 밝은 여자들은 온 동네의 남자들을 섭렵하기도 하는데 이런 일부 여인들로 인해 환향녀는 더욱 치욕과 멸시의 날들을 보내게 되기도 합니다. 거기에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호로자식이라 하여(호로胡虜라 함은 오랑캐라는 뜻으로 결국 오랑캐의 자식이란 뜻이다) 사회 전체가 환향녀와 그 자식들에게 냉혹한 시선과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선 사회 전체 문제로 대두되기도 합니다.환향녀에서 화냥년이라는 냉대와 비난은 비단 힘없는 일반 백성뿐만이 아니라 사대부의 여자들도 피해 갈 수 없었으니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의순공주였습니다.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의 여인들은 모두 환향녀라는 멸시와 모욕 속을 살다 갔으며 의순공주의 조선에서의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아버지 이개윤은 딸을 오랑캐에 팔아먹은 인물로 매도 당하였고 의순공주 역시 환향녀라는 따가운 질책과 모멸 속에 28살을 끝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굴욕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조선의 여인들, 환향녀 그리고 의순공주,만일 오늘날 병자호란과 같은 재앙이 한반도에 반복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국가가, 남자들이 자신들의 무능으로 전쟁 속에 내몰리고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대신 여인들에게 왜 자결이라도 해서 순결을 지키지 못했냐고 여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중적 잣대가 과거 속 일일뿐이라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한반도의 힘없는 백성들은 일제의 대동아전쟁 속에 끌려가 정신대라는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백여년전 이 나라는 여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슬픈 땅이었으며 원한의 역사만을 남기고 있습니다.지키려는 의지와 생각 그리고 힘이 결여되어 있다면 불과 몇백 년의 시간차만 존재할 뿐, 불행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우리는애국을 말하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지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약자가 강자들에게 유린 당해왔는지, 그리고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는지를 역사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며 힘없는 정의가 얼마나 무력한지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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