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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조선제일검·무예도보통지의 근간이 된 척이지사(斥弛之士)김체건_검선 김광택과 무사 임수웅,백동수의 뿌리가 되다

by 마음heart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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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조선제일검·무예도보통지의 근간이 된 척이지사(斥弛之士)김체건

검선 김광택과 무사 임수웅,백동수의 뿌리가 되다



김체건(金體乾.생몰년도 미상)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자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인물로 무협지 같은 삶을 살았는데 보통 고려 시대를 넘어 한국 역사상 최강의 소드마스터로 유명한 척준경의 경우 체계적인 검술에 관한 기록은 없는데 김체건은 숙종때 군교를 지냈는데 숙종 23년엔 별무사로 재직하던 도중 장길산 일당을 체포 하기도 하였습니다.흔히 조선제일검을 뽑으라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 김체건이며, 그의 아들인 김광택은 검술의 지고한 경지에 올라 붙은 별칭인 검선(劍仙)으로서 검술의 달인으로 전해지는데 정조시대 쓰여진 김광택전의 저자 유본학이 劍仙之類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 비롯된 말로, 검선이라 직접 불리운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 김영호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집필한 이후입니다.야뇌(野餒) 백동수가 김광택의 제자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고려의 척준경과 조선제일검 김체건

건국 초기 군사력이 상당히 강했던 조선은 초기까지는 팽배수가 육성 되었지만 세조때 부터 전문 전투 집단인 갑사가 쇠퇴 하기 시작하는데 그나마 호랑이 때려잡는 착호갑사 정도만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전승이 끊기는 등 사실상 검술에 관한 분야가 퇴보하며 근접 백병전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오지 않았다며 한탄 하는 내용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군에서 전승이 끊겼다는 말일 가능성이며 민간에서 전승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의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임진왜란이 터지고 전국에 검술을 수소문 했다 하더라도 당시의 행정력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조선 중기가 넘어가며 조선에도 제대로된 무술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특히 임진왜란 후 일본의 검술에 감명을 받은 조선의 훈련도감에서는 일본 고류 검술을 익힐 자로서 무예에 상당히 능했던 김체건을 선발해 일본 검술을 익혀오도록 했으며 숙종은 일본과 청나라의 우수한 군사기법을 도입해 전투력을 향상하는데 노력했습니다.사실 임진왜란 때 항왜들에게 배운 검술들이 있었고 무예제보번역속집에도 실렸으나 이 당시에는 또 그것이 실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거리 무기 위주의 조선의 특이한 방어 체제상 이러한 일이 발생했던 것으로 조선은 대규모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을 상정한 궁기병 위주의 편제였습니다.이러한 일본 고류 검술을 익힌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의 출처로 나뉘는데 하나는 조선 내의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왜관에서 배웠다는 김광택 전에 따른 설과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사신으로 가서,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배워왔다는 무예도보통지에 따른 설로 이에 대해서는 한가지 어폐가 있는데, 당시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없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장군직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일이 있기 때문에 이때에 같이 들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임금의 앞에서 시연할 때에 워낙에 날래고, 대단하여 임금이 놀랐다고 합니다. 재 위에서 검술을 시연하였는데, 그가 한번 기합을 지르자 시범을 보던 이들의 정신이 아득해져 정신이 없었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재에 발자국 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날랬다고 합니다.

■조선제일검 김체건의 아들 검선 김광택

드라마 무사 백동수 중


김광택전은 유득공의 맏아들 유본학 개인이 쓴 것이라,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더 객관적 사료라고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나 실록의 기록으로서 추측해보자면, 김체건은 당시 일본으로 파견된 무리에 자신의 이름이나 정체를 숨기고 파견되었고, 이후 일본에서 수 년 동안 따로 떨어져 나와 시간을 보냈으며, 일본 전토를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 8년에 검무의 대가인 오순백이라는 이가 함께 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혹은 그가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며 또는 검보를 얻어 수행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전자와 후자를 절충하는 것도 가능은 한데 검보를 얻어 수련을 쌓다가, 이후 일본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김체건은 여덞 가지의 다른 종류의 유파를 배웠다고 하며 그 중 네 가지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습니다.무예에 재능이 뛰어나 조선 내에 민간에서 전해지던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에까지 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체건은 검(劍) 자체에 굉장한 재능이 었어, 저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오르기까지 걸린 기간이 고작 수 년에 불과했으며 이후에 조선으로 돌아온 후 청나라로도 보내져 청의 무예를 익혀왔다고 합니다.왜의 검술을 배운 이를 청으로 보내 그곳의 무예도 익히게 하자는 건의가 기록에 남아있으며 또한 '능허관만고'의 무예보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을 보면, 북벌론자 였으며 경신환국 이후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되었던 우의정 김석주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자리에 금위병(왕을 호위하는 직속무사)한명을 데려가 중국의 기예(무예)를 배워 오게 하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는데 이 금위병이 바로 김체건으로 추정됩니다.그리고 김광택전에 따르면 김석주의 지시로 김체건은 김석주와 함께 청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에 가게 되었는데, 꽤 긴 기간 청의 무예를 섭렵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청의 무예를 중앙 오군영(中央五軍營)의 병사들에게 가르쳤다라고 기술 되어있습니다.이렇듯 일본과 중국을 거치면서 동아시아 3국의 무예에 정통했던 김체건이 인생 후반부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다만 그의 무예가 아들인 김광택에게 전수되어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되었으며 장용영 무예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만약 김체건이 없었다면 무예도보통지 역시 없었을 것입니다.정조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는 김체건이 일본에서 배워온 왜검이 실려있으며 또한 조선내의 민간에서 전해지던 조선세법과 본국검법도 실려있으며 이외에도 중국 남부 절강성의 묘도를 다루는 장도술,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의 낙상지에게 전수 받았던 제독검법까지. 총 5가지의 검술이 실려있는데 김체건은 그야말로 한국의 무협 영웅 같은 존재이지만 이러한 김체건을 뛰어넘는 이로서 그의 아들인 김광택이 있지만 김광택의 경우 객관성 있는 사료의 서술이 좀 적은편이기도 합니다.

▥조선제일검 척이지사(斥弛之士)김체건에서 백동수까지

무사 백동수 속 김광택(전광렬과 최민수)

김체건(金體乾)은 고려 시대 척준경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인(劍人)으로 불리는데 훈련도감 교관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전설의 조선검으로 불리게 된 것이며 그의 아들 김광택은 영조의 호위무사이자 금위영 교련관으로 검선(劍仙)이라 불리기까지 합니다.물론 무를 숭상했던 고려 시대의 척준경과 문을 숭상하던 조선 시대 척준경과 김체건은 신분에서부터 무용에까지 큰 차이가 나지만 확실한 것은 조선은 전쟁이후 무를 융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김체건의 무예는 그의 아들 김광택에게 전수됐고, 김광택의 무예는 임수웅과 백동수에게로 전달되었습니다.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최측근 무사였고, 백동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최측근 무사였습니다.사도세자는 임수웅과 함께 1759년에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고, 정조는 백동수와 함께 1790년에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는 장용영의 기반 병서(兵書)로 신라의 무오병법(武烏兵法)과 고려의 금해병법(金海兵法)을 능가하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김체건에서 시작된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무예는 백동수에 이르러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조선 무예로 완성되었고, 장용영 모든 장교와 병사들의 무예가 된 것입니다.그렇다면 먼 훗날 장용영을 창건하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김체건은 어떤 인물이고, 그의 아들 김광택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조선의 협객으로 이야기되는 백동수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서 일반인들도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조시대 장용영의 초관(哨官·조선시대의 종9품 무관직)이란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체건과 김광택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들입니다.이 두 부자는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에 나온 적이 있지만, 실제와 너무 다르게 그려져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으며 이 두 부자가 조선의 무예사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김체건에 대한 기록은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조와 정조시대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유득공의 아들인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 실려 있으며 그리고 관찬사서인 숙종실록과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기록인 훈국등록(訓局謄錄)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이순신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처럼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실체를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만 일단 이 모든 기록을 종합하면 김체건은 매우 훌륭한 애국자이자 역사상 빼어난 무예인으로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서는 그가 달리기에 능하며 민첩하고 무예가 절묘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숙종대에 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검보(劍譜)를 얻어 기예를 수련하였는데, 이후 숙종(肅宗)이 김체건을 불러 시험해보니 칼을 들고 하늘에 매달려 허공을 나는 듯 돌고, 땅위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데 실제 엄지발가락 하나만 세운 채 무예 시연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짧은 기록을 보강하는 기록들이 바로 숙종실록과 유본학의 김광택전입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 중인 무예제보 표지 및 무예제보 속 내용

▩훈련대장 유혁연,_왜구를 막기 위해 김체건을 왜관으로 잠입시키다

숙종이 즉위하고 나서 조선은 효종의 북벌론(北伐論)을 계승하여 요동(遼東)을 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주로 영의정 허적과 훈련대장 유혁연 그리고 중국에 대한 조선의 자주를 주장하던 백호 윤휴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의해 굴욕적인 삼전도의 치욕을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인물들중에서 가장 주체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영의정 허적은 호방하기로 백성들 사이에서 알려졌고, 유혁연은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검술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예의 대가였습니다. 윤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저 주자의 학문만을 공부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던 어찌보면 조선 사대부중 가장 과격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강력한 북벌론은 주장했던 것입니다.숙종은 자신의 아버지 현종대에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유지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남인(南人)과 연대한 정치를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남인들의 북벌론을 받아들였으며 이때 유혁연이 주목한 무사가 바로 김체건이었습니다.유혁연은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무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숙종 8년에 있었던 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에 당시의 세력파이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된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탓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무인이었습니다. 그는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북벌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는 한편 경상도 해안가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에 대한 경계로 조선 전체 무사들의 실력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하였습니다.당시 왜구들의 조선 해안가 노략질은 임진왜란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왜구들의 난으로 인하여 조선 조정은 엄청난 고통을 당했고, 이들과의 대결은 거의 전쟁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혁연은 숙종에게 일본 군사들과 왜구를 제암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예인 ‘왜검(倭劍)’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건의하였는데 숙종실록에 실린 기록이기도 합니다.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에 모두 있는데, 일본이 가장 낫습니다. 우리나라만 홀로 전해 익히는 사람이 없어, (신의) 마음은 항상 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1인을 동래에 내려 보내 전하여 익히도록 하고자, 부사 이서우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형세를 살펴보라고 말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 답을 받아본 바 (검술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의 관리하에 배울 수 있는 1인이 있으니, 이 사람을 내려보내 검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좋다.”라고 하였다. 

이때 유혁연이 보낸 이가 바로 훈련도감의 군교(軍校) 김체건으로 숙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당시 동래부사가 이서우였는데, 이서우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실제 조선후기 기호남인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스승이었습니다. 실용적 사고를 지난 이서우는 남인이었기에 유혁연과 밀접한 인연이 있었고 그래서 이서우는 유혁연의 지시를 받아 몰래 동래에 있는 왜관으로 김체건을 잠입시킨 것입니다.유본학의 김광택전에 보면 이때 김체건이 동래 왜관에 노비로 들어가 수 년에 걸쳐 왜관의 무예수련장 옆에 구덩이를 파서 몸을 숨긴 채 일본 무사들의 검술을 보고 익혔다고 합니다.당시 동래 왜관에서 일본 무사들이 익혔던 검법은 신검술(神劍術)이라고 했는데 일본 무사들은 이 신검술을 비밀리에 익히고 전수해서 도저히 조선의 무사들이 알 수가 없었고, 왜관에 있다 하더라도 일본 무사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수련하고 있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체건은 낮에는 왜관의 노비로 일을 하고, 밤에는 비밀리에 파놓은 구덩이에 숨어서 무예를 관찰하면서 일본 무예를 익혔다고 합니다.이 과정에서 김체건이 어떻게 해서 일본 무사들의 비밀 수련 장소에 구덩이를 파고 무예를 보고 익혔는지 알 방법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 내용이 훈국등록(訓局謄錄)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유혁연의 지시를 받은 이서우는 김체건을 왜관에 보내 무예를 익히게 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는데 그래서 역관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일하는 김익하와 상의를 하였습니다. 김익하는 동래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훈도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동래 왜관의 일본인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김익하는 그중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을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김체건을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훈련도감 관리청에서 보낸 300냥과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일본인을 매수하였습니다. 그 일본인이 김체건을 왜관에서 은밀히 보호해주고 일본인들의 비밀 무예수련장으로 안내해 준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특급 비밀첩보작전인 셈인데 이렇게 일본인을 매수하여 익힌 왜검은 장차 조선의 병사들이 일본 무사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반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온 무예 동작.

 

■소드마스터보단 척이지사(斥弛之士)에 가까웠던 김체건

사실 김체건은 소드마스터보단 척이지사’(斥弛之士)에 가까웠는데 척이지사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물로, 성격이 호방해서 호랑이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강호의 무사가 나라의 국방을 위해 자신의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몇 년 동안 왜관에서 노비가 되어 천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일본의 검법을 익혀 조선의 병사들에게 가르쳐 조선의 무사들이 다시는 일본의 무사들에게 패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로 그 힘든 시기를 참고 버티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일본에 대한 전 백성들의 분노가 대단했기 때문에, 김체건은 백성을 위하여 그 어려움을 참은 것으로 김체건이 일본 왜관에 잠입하기 위해 사전에 김익하에게 일본어를 익히기까지 했습니다.그가 왜관에서 돌아와 숙종 앞에서 무예 시연을 보이자, 보는 이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이때의 무예 시연에 대한 모습이 무예도보통지에 언급되어 있으며 또한 유본학의 기록에 의하면, 김체건은 궁궐 마당에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 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체건의 무예가 이렇듯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었습니다.김체건은 동래 왜관에서의 특별한 경험 때문에 청나라의 무예를 익혀 조선의 무사들에게 보급하는 일도 맡게 되었는데 경신환국 이후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된 김석주의 지시로 김체건은 김석주와 함께 청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에 가게 되었습니다.김석주는 숙종 즉위 초반 남인의 실세인 허적과 유혁연, 윤휴와 함께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만들어 북벌을 준비했던 인물이었는데 그러나 청나라가 한족(漢族) 출신들의 반란인 ‘오삼계의 난’을 진압하고 안정되자, 김석주는 오히려 북벌론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북벌론자들을 역모사건으로 엮어서 죽이고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그럼에도 도체찰사부의 총사령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국방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었는데 그래서 김석주는 자신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행단에 김체건을 포함시켰고, 김체건은 비밀리에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무예를 섭렵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청의 무예를 중앙 오군영(中央五軍營)의 병사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그렇게 중국과 일본을 거치면서 동아시아 3국의 무예에 정통했던 그가 인생 후반부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그가 영조대 조선의 검선(劍仙)이라 불린 김광택을 낳았고, 그의 무예가 김광택에게 전수되어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되어 장용영 무예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제일검 김체건의 아들 검선 김광택


아버지 김체건의 무예를 전수받은 김광택은 당대 도가(道家)의 대가인 김신선(金神仙)에게 추가로 수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규장각 검서관인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 이야기하는 김신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암 박지원이 이야기한 김홍기나 이덕무가 이야기한 김홍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두 김홍기는 같은 김홍기인데,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고 한다. 김신선으로부터 몸을 가볍게 하여 나는 듯 빨리 걸어가는 일종의 축지법 같은 경신법(輕身法)을 배운 김광택은 그 또한 짚신 한 켤레로 금강산을 두 번을 오가고도 짚신이 닳지 않았다고 유본학은 쓰고 있는데 현실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유본학은 김광택의 이야기를 아버지 유득공으로부터 자세히 들었을 것으로 유득공이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와 같은 백탑파(白塔派·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으로 이루어진 지식인 집단)였기 때문에 백동수의 스승인 김광택을 직접 보았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유본학은 김광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도가의 인물로 덜 알려진 것을 안타까워하였으며 그가 80세가 넘을 때까지 어린 아이의 피부 같았을 정도로 도가의 수행을 높이 한 인물이라며 세상 사람들이 도가의 신선 같은 이는 김신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김광택 역시 김신선만 한 도가의 대가라고 한 것입니다.

▩김체건과 김광택_조선의 무술 무예도보통지의 근원이 되다

김광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체건의 모든 무예를 전수받았고, 그 과정에서 금위영 교련관의 역할도 하였지만, 관직에 있지 않고 은거해 있을 때는 명문거족의 식객으로 그들을 호위해주며 젊은 무사들에게 사적으로 무예를 지도해주기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후기 무사들의 일반적인 양상이었습니다.김광택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식객으로 있다가 1757년에 영조를 만나 금위영의 교련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김광택은 홍봉한의 부탁으로 여러 젊은 무인들을 지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그의 최측근 무사인 임수웅이았습니다.홍봉한은 임수웅을 김광택에게 지도받게 하고, 사도세자는 임수웅과 함께 1759년 무예신보를 편찬하였고, 무예신보는 1790년(정조 14년) 무인군주 정조의 명으로 김광택의 제자 백동수의 시연으로 장용영 서국(書局)에서 무예도보통지로 간행됩니다.김체건과 김광택 그리고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무예의 계보는 단순히 무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조시대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었으로 이들 무사들은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력을 이길 수 있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가 꿈이었습니다. 군사력이 약해서 일본과 청나라에 엄청난 수모를 겪고 수많은 이들이 죽고, 또 그들의 나라에 끌려가 노예처럼 살았던 것을 김체건과 김광택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외세에 대한 항거의 정신으로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이루어냈는데 아버지 김체건과 아들 김광택은 전설의 조선검, 또 검의 신선이라 불리며 조선을 지키기 위한 부국강병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운광류 검술:김체건이 배워온 검술 8개 중 4개가 왜검이라는 이름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렸는데 다른 왜검들에 비해 운광류는 비교적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보니, 군영에서 계속 훈련되고 있었다고 추측 되는데 운광류는 원래 운홍류라는 이름으로 카게류의 방계 유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검교전;김체건이 병사들을 훈련 시키기 위해 만든 체계 중 일부,왜검에 나온 여러 가지 공격기법과 방어기법을 총체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카타 수련이지만 일본의 카타 보다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칼을 직접 부딪히며 담력까지 기를 수 있는 실전적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둘이서 상대 검을 옆으로 치워 낸뒤 공격, 받아 흘리기, 검을 늘어틀이기 등등 여러 기술들과 이어지는 공방 및 패링 등의 훈련 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습니다.

단도법선(單刀法選);장도로 창을 상대 하는 방법으로 척계광이 왜구의 검술서를 노획하여 만든 검술인, 신유도법(신유년에 만들어진 도법이라고 하여 신유도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을 민간에서 정리한 체계인 단도법선,신유도법은 조선의 무예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조선에서는 신유도법의 체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다른 검술을 합체시키는 시도를 했는데 신유도법은 실용적이지만 비교적 단순한 검리를 가진편이다 보니, 조선에서는 신유도법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세법과의 융합을 시도했었습니다.

천일야화 153화에 등장하는 김체건,여기서는 왜관에서 일본 검술을 배웠다는 김광택전에 수록된 설을 차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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