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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전쟁의 판도를 바꾸어버린 곡산의 치우천황

by 마음heart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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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버린 곡산의 치우천황



척준경이란 인물이 얼마나 강한지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얼추 유추되는데 척준경의 후손인 척사광의 재능이 생전의 척준경을 연상케 한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척사광이 드라마 내에서 경험조차 부족하지만 재능만으로 이방지,무휼을 크게 상회하며 카르페이와 동급으로 여겨지는데 거기에다 여자였다는 점은 척준경이 남자로서 체력도 우월했을것이고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일생을 바친만큼 경험 역시 척사광을 상회했을테니 사실상 넘사벽인 장삼봉과 동급이라고 보는게 타당할만큼 무력 하나는 괴물급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척준경은 고려 시대의 무관으로 문산계라 문관이라고 착각하지만 척춘경은 중앙 정부의 무관들이 밟는 행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무관으로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군기(軍機)·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 등을 수행하던 관청이었으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후계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뿐인 직위였었습니다. 고려에서 중앙 정부에 속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있었으며, 무산계는 군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 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으므로 척춘경은 무관이 맞습니다.척준경의 경우 국사시간에 비중이 크지않아 넘어가기 쉽지만 현대에는 척씨가 없어서인지 쉽게 잊혀지지 않기도 하는데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탁'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고려 시대의 무장 척준경은 도무지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만화 같은 무력의 소유자인데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명장들은 대부분 최고 사령관의 위치에서 활동하였고, 따라서 일신의 무력보다는 전략 전술에 능한 유형들이었는데 한반도 역사상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은 최고의 무장들(살수 대첩의 을지문덕이나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당나라와 일촌즉발의 전쟁을 수행한 연개소문 등)은 용력도 용력이지만 전쟁을 읽는 수나 판도 자체를 뒤바꿀 전략,전술이 능숙한 반면 척준경은 본인의 무력 그 자체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척준경과 같이 소드 마스터라고 불릴만한 용력의 소유자로 삼국지의 여포나 조자룡 그리고 초한지의 항우 등이 떠오르지만 척준경은 그 중에서도 전투 및 전쟁의 양상을 뒤바꿀만큼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기도 합니다.그래서 매니아들이 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무력만 파고들었는지 정치나 세상을 파악하는 식견은 어두운 편이라 이자겸을 그저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뒤늦게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타이밍이 늦어 결국 말년은 유배 생활로 마감하게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속 척준경의 후예 척사광은 경험도 전무하고 여자이지만 최강의 우예를 선보여준다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으로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는데 이전까진 상장군 출신 왕국모가 숙종의 참지정사 직에 임명된 게 최고였지만 척준경이 참지정사 위의 평장사가 되면서 기록을 깨기도 합니다. 고려 최고 정부 기관인 중서문하성은 장관이 문하시중,차관이 평장사, 서열 3위가 참지정사입니다.이 기록은 척준경이 실각하여 취소되지만 사후 인종이 또 평장사 직을 추증함으로써 다시 유지되었습니다. 허나 무신정권이 시작되면 정중부가 문하시중을 얻고 이후 무신 집권자들도 모두 높은 직위를 얻게 되면서 기록이 깨져 버립니다.척준경은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으나 본인이 실각하고 이자겸과 똑같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지만 척준경은 이자겸 실각의 주역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으며 이자겸도 인종의 외조부라 사후 검교태사-한양공에 추증되었습니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어린시절

척준경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호장, 부호장 정도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었는데 신라 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서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은 가병들도 뺏기고, 신분도 격하됐지만, 고려까지 호장(戶長)은 세력을 갖춘 지역 토호들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었습니다.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 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 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척준경은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고려 시대는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었습니다.고려의 무과는 예종 때 무학재와 함께 잠깐 생겼다가 인종 때 혁파되고 이후 공양왕 때 가서야 잠깐 생기지만 고려가 바로 멸망허고 맙니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는데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가 계림공이던 시절,후에 숙종이 되는 왕희는 1077년부터 1095년까지 계림공으로 불렸는데 척준경이 차후에 활약한 나이를 감안하면 척준경은 대략 1070년 생이고 1090년 정도에 계림공 소속 종자로 들어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때 왕희의 저택은 계림부라 하였는데 고려에서는 3등작을 받은 왕족에게 제왕부를 봉해 관저로 삼게 해주었는데 척준경은 이 계림부의 소속 종자로 들어갑니다.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추밀원 별가(別駕) 즉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업무 등을 하는 주로 남반으로 지냈습니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전설의 시작,여진과의 전쟁(1차 여진정벌)

척준경은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는데 이 직책은 향리(鄕吏)의 자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벼슬이었습니다.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는데 품계도 없는 무명에 불과한 소졸이 사령관에게 바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내는 활약을 펼칩니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 오자 또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는데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 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입니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되며 척준경이라는 이름 석자를 고려 조정에 각인시키게 됩니다.이때의 전공으로 하급 남반 신세에서 벗어나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錄事)가 되는데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로 핵심 전투 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나 치안 부대인 금오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떨어지나 엄연히 6위의 일원으로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습니다.별무반 대원수 윤관과 친해진 척준경은 천우위에서 중군(中軍) 소속 녹사로 보직을 바꾸어 참전했는데 중군은 2군 6위처럼 특정 부대가 아니며 고려의 전시 편제인 오군 중 하나로 6위의 병력이 수도 혹은 북방에서 부병하다 전시에는 오군으로 편성되는 방식으로 척준경의 소속 부대는 여전히 천우위였습니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2차 여진 정벌(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 때 윤관은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키는데 이 일화를 가지고 윤관과 고려는 정말 비겁하다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에서 비겁하거나 치졸한 방법을 쓰는 것은 결코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싸움을 하는 자는 속임수나 기이한 꾀를 써야 한다(兵者詭道也)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의를 따지며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과정이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물리치는 결과인 것입니다. 한 예로 1518년 여진족 속고내의 토벌 사례에서 여진족 추장인 속고내를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에서 조광조가 도적의 꾀로 엄습한다면 의리에 어긋납니다, 선비로써 체면이 있는데 기습은 예의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어떤 방식이 더 옳은가를 고르기 쉬울 것입니다. 또 항우가 미리 준비한 병사들을 숨겨놓고 유방을 잔치에 초대하여 죽이려 했던 홍문의 연이나 아랍의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잔치에 불러서 대접하고 있다가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풀어서 모두 죽였던 사건들이 있듯이 고대 동양에서 잔치를 가장하여 적을 불러들여 죽이는 일은 일상화된 풍습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심지어 홍문의 연을 두고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항우더러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우가 유방과 그 부하들을 왜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느냐며 그의 결단력이 없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암튼 이때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웁니다.가장 먼저 성벽에 돌격하는 병사들은 전사할 경우 대부분 해당 병사의 가족을 국가가 평생 부양해 준다는 약속을 해줄 정도로 공성전에서 먼저 성벽을 오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해전술로 몰아붙여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일을 혼자 해낸 것도 모자라 성벽을 올라 체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추장과 병사들을 죽인 척준경의 전공을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켜 버립니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 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가한목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 당하는데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합니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척준경이 여진군 10여 명을 해치우며 결사적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물러가는 여진족을 추격해 36명의 머리를 베어 버립니다. 이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영주성 전투와 공험진 전투,웅주성 전투(1차),길주 전투

이후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뒤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옵니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는데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아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라며 홀로 반대하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습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합니다.2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는데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고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습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는데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 줍니다.동년 2월 알새는 수만에 달하는 대병을 동원하여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는데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80여 명의 적병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고, 병거 50여 량과 중거 200여 량, 군마 40필 등을 노획하는 등 한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며 도움을 요청했고, 척준경은 이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간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한 뒤 그들을 이끌고 통태진·야등포·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조리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하고 웅주성을 구해내는데 이것이 1차 웅주성 전투이며 2차 웅주성 전투 때는 임언과 최홍정이 구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했다 참패해 위기에 처했으나 오연총이 정예군 1만 명을 데리고 개경에서 급히 달려와 27일 만에 포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 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9성 원정 후반부는 고려군이 갈라수에서 참패하는 등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기동대를 이끈 척준경과 왕자지는 소소하게나마 전과를 낸 것입니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함주군)·영주(英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원)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_인생 후기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척준경은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해 위위경(衛尉卿)- 직문하성(直門下省)직위에 오릅니다.하지만 척준경은 여진과의 전장에서 세운 전공으로 승진했지만 여진의 강대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후일 이자겸과 함께 대금 사대를 주도했는데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여진과 직접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척준경의 이러한 행보는 고구려 말기 전쟁 영웅이었던 영류왕의 친당 행보와도 비슷한데 전쟁을 경험했기에 전쟁의 위험성과 상대의 막강한 힘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일 것입니다.척준경이 비록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로는 전문가인 만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금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여기에 척준경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찬찬히 뜯어보면, 여진 정벌의 성과는 척준경 개인의 무예에 크게 의존했으며 당시 고려군 전체로 보면 실책이 많았던 데다가 여진족의 전술로 고려군 일부가 곤경에 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위기 때마다 척준경 본인의 힘으로 타개했는데, 바꿔 말하면 척준경이 아니었다면 크게 패하고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입니다. 척준경이 자기가 활약한 것만 생각하는 바보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전체적인 전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없었을 경우 여진족과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그것이 대금 사대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사실 전쟁 경험이 없는 문관들이나 정치인들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반면 전쟁에 직접 참전한 군인이나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오히려 유화책을 쓴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외로 흔한데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보면 군인 출신 콜린 파월은 걸프전 때부터 온건파였고 징병제를 시행하던 시절 5번이나 병역을 연기해 끝내 가지 않은 체니가 매파였으며 이스라엘의 장군이자 후에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도 총리가 된 후에 팔레스타인과 적극적인 평화 무드를 조성하지만 군대조차 가기 싫어하면서 대책 없는 극단 정책만 요구하는 유대교 원리주의인 하레디 청년에게 암살당했습니다.꼭 전쟁 경험이 있다고 해서 강경책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척준경은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권세를 지켜냈고 이자겸의 지원으로 무신으로서는 꿈도 못꾸던 정2품 벼슬까지 올라갔지만 이로 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습니다. 또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하는데 척준경은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척준경은 고려사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궁성에 불을 지른 뒤에 척준경은 말을 타고 자신의 친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수춘궁 정문에서 기습을 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분노한 척준경은 수춘궁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으며 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갔지만 왕의 호위 무사 2명에게 패하여 퇴각하기도 했습니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 ~ 1135),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 ~ 1126)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 1126)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 ~ 1126), 장군(將軍) 고석(高碩, ? ~ 1126)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그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 ~ 1126)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문하시랑평장사 -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것입니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인종은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 ? ~ 1135)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 난을 성공시킨 지 3개월 후인 1126년(인종 4년)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 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 수태보(守太保)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그러나 1127년(인종 5년) 3월 정지상,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인종도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전라남도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를 보내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는 것입니다.모종의 이유로 군권을 빼앗겼거나 홀로 인종에게 직접 반기를 드는 행동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는데다.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경우 서경 천도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며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 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최고 무관직 품계를 넘는 정2품의 벼슬이었는데 중서문하성 차관인 평장사. 최고 무관직인 상장군은 정3품으로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받은 신하는 숙종 대 상장군 출신 왕국모로 종2품 참지정사였으며 이것을 천우위 녹사 출신인 척준경이 깬 것입니다.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는데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기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척준경을 고향 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에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되며 심지어 1144년(인종 22년)에는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또한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의 벼슬을 주라는 황명을 내리기도 합니다.그러나 척준경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수십 일 만에 등창으로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한 역사적 평가

척준경은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으로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시기 여진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과 양규 그리고 후기의 최영,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려의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습니다.또한 척준경은 군대를 통솔할 때도 혁혁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단신으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말이 안 되는 몬스터 수준으로 혼자서 공성전의 판세를 뒤엎고, 전멸 직전의 상황에서 10명 남짓한 결사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으며, 성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결사대와 함께 무장한 병사 십여 명을 거뜬히 베어넘겨 포위진을 와해시키고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국경까지 내달려 구원군을 편성해 왔다는 믿기 힘든 공적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단순히 동네 주먹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서 세운 공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죽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향을 끼쳤느냐인데 전투와 전쟁의 판도까지 바꿀만큼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전공을 세운 척준경은 1, 2차 정벌 동안 재상인 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됩니다. 동북9성을 세울 곳의 지형조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채 벌어졌던 9성 정벌은 그가 없었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입니다.척준경은 인종대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권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 당하는데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아마추어였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무예만 놓고 보면 척준경은 따라올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무사였으며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및 지휘의 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개인의 무력만으로 따진다면 척준경은 기록된 것만으로도 한국사 뿐 아니라 동북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맹장으로 소설속의 여포나 조자룡보다 더 뛰어났을 것이며 초한지의 항우 이상가는 무력을 가진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척준경은 순수한 무인이었을 뿐 정치적 식견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척준경은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서는 일당백이었으나 배움이 짧고 인간됨이 맞지 않아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척준경에 비교되는 무인들을 봐도 유금필,최영,이성계는 모두 장군으로서 백전불패에 가까운 명장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최소한 큰 누가 될 만한 행동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척준경에겐 그러한 감각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맙니다.척준경은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이후엔 권세를 쥐었지만 결국 몰락하고 마는데 권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던, 전장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고, 강력한 무용을 지녔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쥔 사람에 의해 그 쓰임새가 바뀌는 검 그 자체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척준경은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는데 
행정업무 외에도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했다.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后妃)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게 자연스러웠다. 태조의 아들 중 3명이 모두 왕위에 올랐고,현종의 아들 중에서도 3명이 왕이 되었으며 문종의 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3명이 왕이 되었다.단, 꿈 이야기 중 후비의 경우에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그녀의 친정인 장흥 임씨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일찍이 이자겸과 충돌한 가문이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원후는 이자겸과 대립하다가 밀려서 개성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이자겸을 척준경의 손으로 축출한 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공예태후를 왕비로 들이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척준경이 임씨를 왕비로 들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척준경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 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 걸고 구출한 일화, 전투 중에 말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 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환관이 아니라 내직관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내시란 흔히 아는 내시가 아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자인 내시(환관)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그때 정착된 것이다. 물론 고자인 인물이 당시에 환관으로 궁에서 일하기는 했으나 조선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게 아니라 사고로 그렇게 된 자만 이를 채용했다. 조선도 원칙적으로는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채용했지만 뽑는 인원이 고려 때보다 많다 보니 몰래 거세해서 들어온 경우가 허다했으며 걸렸을 경우 내시에서 짤렸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고려의 척준경, 금의 사묘아리, 송의 한세충. 만인지적의 용장 3명이 동시기를 살다 갔으며 시기상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전장에서 부딪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딪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다 보니 이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역덕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온다.
※윤관과의 관계나 이후의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이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 강유와 비슷한데 척준경과 강유 모두 유능한 상관 밑에서 공을 세웠고 그 상관이 죽자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도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권신이 되어 반역 열전에 올랐지만 강유는 유선을 보필하며 30년 동안 북벌을 이끌고 자신의 모든 것을 촉한을 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심지어 강유는 죽어서도 촉에서는 충신으로 추앙받았는지 사후 약 30년 뒤 그 지역에 성한이 건국되는데 당시 촉의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제갈량을 그리워하며 강유가 촉한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만 강유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기에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유는 배신자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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