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
조선의 러브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공주의 남자라는, 일명 공남으로 불리며 박시후와 문채원, 홍수현과 이민우가 출연한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사실 1873년 의령 현감을 지낸 서유영이 쓴 문헌설화집 금계필담 錦溪筆談을 모티브로 창작된(물론 등장인물의 99%는 실존 인물이고 나머지는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이긴 합니다.) 이야기인데 바로 가상의 인물인 김승유(박시후 분)와 세령(문채원 분)의 러브 스토리와 한 축을 이루는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정종(이민우 분)의 사랑 이야기가 조선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렇다면 금계필담은 정확히 어떤 내용의 책이었을까 싶은데 서유영이 1873년(고종 10)에 저술한 문헌설화집으로 2권 2책 총 141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전하는데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저자 서유영은 서문에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는 이 책을 쓴다고 했습니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추정본이며 이 책은 각 편의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작품들을 수록하는 체재로 되어 있습니다. 제왕과 왕비,문신,이인異人 , 양반층 여인 ,기생,하층 여인,무인 및 장사壯士의 순으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배열하고, 풍속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함께 묶어서 끝에다 첨부하였습니다. 각 인물은 대체로 시대순으로 배열했는데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 걸쳐 있으며 작품에서 다룬 주인공들은 하층인보다 상층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보다 현실에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많이 나온 다른 야담집과는 달리 다른 문헌의 참고 없이 저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수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계유정난은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수양대군이 모사꾼 한명회 및 측근들과 함께 단종 1년(1453년),북방의 호랑이라는 김종서와 그의 측근들을 참살하고 권력을 쟁취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계유정난입니다. 이 참혹한 사건 때 경혜공주는 겨우 만 17세에 불과했고 단종 역시 어린 11세의 나이였으니 수양 대군의 야욕과 세력을 제어할 힘 자체가 없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인 김승유와 세령의 러브스토리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존 인물이었던 경혜공주와 정종의 비척 거리는 삶에 더 눈길이 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비정하리만치 냉혹한 권력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만 간 경혜공주의 정종의 삶을 따라가보도록 합니다.
조선왕조의 성군이자 한반도 오천년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의 딸로 태어난 경혜공주,만인지상 한 나라 최고 통치자의 귀하디 귀한 영애로써 그 시작은 찬란하고 영예로웠을 경혜공주의 이후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으니 역시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미로와도 같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종 18년(1436년) 만물이 기지개를 활짝 피는 계절에 태어난 경혜공주는 여섯 살 무렵인 세종 23년(1441년), 모친 권씨가 단종을 낳다 죽자 권씨 집안의 여종인 어리니에 의해 길러졌다고 합니다.만 16세가 되던 세종 32년(1450년경) 형조참판을 지낸 정충경의 아들 영양위 정종과 혼인하는데 극 중에서 정종 역을 맡은 이민우가 조금은 지질한 양반 자제로 나오기도 하지만 실상은 조선조 최고의 엘리트 집단의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종이 재임기간 2년(1452년) 여만에 의문의 죽음을 죽게 되는데 이는 조선 정치권에 불어닥칠 피바람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문종은 자신들의 측근인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왕세자인 단종이 즉위했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합니다. 계유정난을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불타는 권력욕의 화신인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사건이지만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왕권을 수호하려는 왕실 종친 수양대군과 사대부 권력 간의 대립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론 수양대군이 승리하였고 김종서를 위시한 사대부 권력은 패배하고 마는데 군부의 최고 실세이기도 한 김종서가 방심하고 수양대군을 경시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한순간의 오판은 참혹한 결과만을 가지고 옵니다.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던 경혜공주와 공주의 남자 영양위 정종, 온통 수양대군의 세력으로 대궐이 득실거린다 하여도 이들은 어린 단종의 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단종을 지지하는 왕족이나 사대부들은 수양대군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단종을 키웠던 세종대왕의 후궁인 혜빈 양 씨와 그 소생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과 함께 공주의 남편인 영양위 정종도 결국 영월로 귀양가게 됩니다.
20살도 안된 나이 어린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1461년)은 막강한 세력의 수양대군에게 당했을 고초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어린 단종은 자신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지로 귀양을 당하자 수양대군이 원하는 것이 자신의 자리인 왕위임을 깨닫고 자리를 넘겨주고 맙니다. 경혜공주는 결국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과 영양위 정종까지 귀양을 당하게 되자 병들어 눕게 되기도 합니다. 세조 1년(1455년) 상왕이 된 단종이 "경혜공주의 병이 유배를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듯하니 돌아오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니 세조는 마지못해 영양위 정종을 서울로 부르는 척하다 수원과 통진으로 유배를 다시 보내고 맙니다. 결국 경혜공주는 남편이 있는 유배지로 직접 찾아가게 되는데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어린 단종과 남편을 유배지로 보낸 경혜공주에게는 더 이상 불행의 끝은 없을 것 같았지만 세조 2년(1456년) 상왕 복위기도 사건이 터지며 단종과 공주 부부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맙니다. 왕이 된 수양대군은 영양위 정종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노복들까지 먼 지방의 노비로 보냄으로써 경혜공주와 정종의 수족을 모두 잘라 버린 채 세조 3년(1457년)에는 기어코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여 버리니 공주 부부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노심초사하는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세조는 공주 부부의 유배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갔으며 열흘에 단 한번 식량이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집 안에 우물을 파서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시키는 등 세조의 극악함은 공주 부부를 절망으로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영양위 정종은 세조7년(1461년)7월에 승려 성탄 등을 불러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는 와중에도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에게 죄를 얻었으니 무슨 고통이 있겠는가?"
빨리 상은(上恩)을 입고 싶을 뿐이다
라며 죽은 단종에 대한 의기를 드높였으며 결국 그해 10월 20일에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당하여 죽고 맙니다.영양위 정종은 드라마에서는 문약하고 철부지 형태로 그려지지만 실록에서는 문종이 아끼던 조카사위였다고 합니다. 세조는 영양위 정종의 목숨을 뺏은 뒤 경혜공주 역시 순천의 관비로 떨어뜨리고 마는데 일국의 존귀한 신분인 공주에서 천한 관비로 신분의 변화가 있었으나 경혜공주는 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공주의 일화 중에는 수령이 사역을 시키려 하자 대청 의자에 앉아 이렇게 일갈하였다 합니다.
나는 왕의 딸이다.
네 어찌 관비의 사역을 내게 시키려 한단 말이냐?
정종이 죽고 관비로 떨어질 무렵 경혜공주는 임신하고 있었는데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기수는 죄인의 자식으로 자라났으나 성종과 호형호제하며 성종의 시중을 들다가 성종 4년(1473년) 돈녕부 직장 형조 적량이 되기도 했는데 죄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비호로 무사하였으며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의 반열에 오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야사에는 경혜공주가 자식들의 면천을 위해 세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고도 전해지는데 무엇이 진실이던 어머니의 마음으로 본다면 원한보다는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했던 모성을 느낄 수 있는 야사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혜공주의 존재 자체가 세조에게는 크나큰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문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핏줄인 경혜공주에게 가해진 세조의 탄압은 극악을 달려 야사에서는 세조가 경혜공주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정희왕후 윤 씨가 여장으로 위장시켜 겨우 목숨을 구명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야사에 전해지는 내용이며 실록에는 노비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경혜공주는 서울로 들어와 살수 있었으며 끝까지 살아남아 1남 1녀를 키운 경혜공주는 성종 4년(1473년)인 만 39살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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