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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탁월한 미모를 자랑한 기생 베스트 8

by 마음heart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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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탁월한 미모를 자랑한 기생 베스트 8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에 각광받으며 한류는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K팝 스타들부터 드라마,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그야말로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면 월드스타가 되는 요즘,120여년전의 조선시대를 주름 잡았던 미모의 여성들 중 특히 사진이 전해지는 여성들 중 기생이 많은데 기생들은 요즘 시대의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우리들은 조선시대 기생이라고하면 황진이나 초요갱 등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기생들부터 구한말 일제에 의해 나라의 국권을 강탈당하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때문에 비록 많이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재능 많았던,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아름다웠던 기생 미모 베스트 7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예인이자 미녀였던 이난향

이난향 (李蘭香)은 암울했던 시기인 일제강점기,당대 이름난 예인이자 기생이었습니다. 당시 활동하는 예인 중 유명한 가객(歌客;전통음악인 정가  가곡을 부르는 사람을 말한다)이기도 했습니다.우리들에게는 이제는 고인이 된 설리 닮은꼴로도 유명한데 미모라는 것은 결국 시대를 뛰어넘어 아름다운 이들에게 어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난향의 본명은 이선비(李仙妃)로, 1900년에 평양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좌수였기에 집 형편은 넉넉했지만, 물산 객주업을 하다 실패하여 가세가 기울었으며 나이가 찬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그녀의 어머니는 12살인 막내를 기생 양성소라 불리는 이름난 노래 서재로 보냈습니다.이후 13살에 상경하여 다동기생조합의 기생이 되었고, 궁중 진연에 참가하여 순종 앞에서 춤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 후 대정권번에 소속되어 가곡의 거장인 하규일(1867~1937)에게 정악과 가무 일체를 배웠습니다. 정가인 가곡,가사,시조 뿐 아니라 서도잡가도 불렀으며, 국악기인 앙금과 일본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할 줄 알았고, 정재48종무, 승무, 검무, 서양무도 등 춤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난향은 춤추는 태가 빼어났는데 스승인 하규일 역시 자신의 모든 제자 중 그녀가 가장 빼어나다고 하였으며, 한번에 연달아 노래 네 바탕을 배울 정도로 열의 넘치는 제자였다고 합니다.

설리 닮은꼴로 유명한 이난향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잘 했으며, 춤도 잘 췄고, 앙금도 잘 연주한데다 외모까지 빼어났고, 목소리도 곱고,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할 정도로 만능 재주꾼이었으며, 소문이 금세 퍼져 많은 인기를 얻을만큼 팔방미인이었다고 합니다.이후 십수 년을 인기있는 기생으로 살았지만, 31세에 결혼하여 살림에 전념했으며 처음으로 가곡 레코드판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코리아 박온실

박온실은 평양기생 학교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라고 할 수 있는,일본과 조선이 함께 주관한 미스 조선이라는 대회에서 진으로 당선되었는데 아름다운 외모때문에 당시 진 당선에 대한 고민이 조금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온실은 조선 전통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며, 눈썹과 눈썹 사이가 넓어 포용력을 가지고 있고, 고운 피부와 기품이 넘친다는 평이 잇달았는데 당시 조선 및 일본의 심사위원 모두 만장일치로 박온실을 진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박온실은 특히 노래를 잘했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무용도 수준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온화하고 살가웠으며 당시로써는 매우 큰 키인 163cm의 키와 미모로 눈에 띄는 터라 주변을 걸어 다니면 수십명의 사내들이 박온실을 쫓아 다녔다고 합니다.포미닛의 남지현 닮은 꼴로 이슈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옥란

이옥란은 조선 기생 학교 출신으로 노래를 워낙 잘해 가수로서 명성이 더 높은 여성이였습니다.당시 그녀가 부른 노래들은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으며 단아하면서도 아름답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이옥란은 1938년 산염불(山念佛),영변가(寧邊歌),자진염불,초한가(楚漢歌)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콜럼비아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유행가 "기생수첩"·"꼿 갓흔 순정"·"눈물의 시집" 등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서 유행가 여섯 곡을 취입하기도 합니다.

▩김옥엽

김옥엽은 평양기생 학교 출신으로 아름다운 외모뿐 아니라 판소리에 상당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녀가 부르는 ‘수심가’를 듣기 위해 남녀를 불문하고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최고의 스타로 꼽히며 문학가였던 김동환과의 로맨스로도 유명합니다.김옥엽은 1920년대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경성좌창(京城座唱)과 경성잡가(京城雜歌)를 방송했으며 1929년 11월 13일 일본 대판지점(大阪支店)의 취입소에서 콜럼비아 축음기회사의 제2회 취입 때 복혜숙,김영환,김초향 등과 함께 취입하였으며 1930년 9월 15일 팔도명창대회 때, 1931년 5월 3~7일 조선명창대회 때, 그리고 1931년 9월 21~23일 제2회 팔도명창대회 때 출연하기도 합니다.

▩장연홍

장연홍은 1911년 평양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5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정 형편으로 14세 때 평양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생이 된 장연홍은 뛰어난 외모와 춤, 노래, 모델 활동 등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 상해로 유학을 떠났으나 상해에서 어떤 사건으로 영사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마약으로 인해 얼굴이 많이 상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선 최고의 미녀기생이었기에 평양기생학교에서 다시 받아줬으며 다른 기생들과 요식점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2년만에 문을 닫고 곧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실제 장연홍이 모델로 나온 비누광고

장연홍이 한창 활동할때는 그녀를 보기 위해 늘 주변에는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있었으며, 수많은 재력가들 역시 추파를 던졌다고 합니다. 

▨윤채선

윤채선은 조선 기생 학교 출신으로 당시 미인들과 비교했을 때,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통적인 한국미를 가진 여성들이 인기가 많았음에도 이들을 제치고 많은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었다고 알려져 있는 윤채선은 특히 조선의 전통 무용에 매우 능했으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168cm의 큰 키로 현재의 톱스타 버금가는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산월

오산월은 평양기생 학교 출신으로 당시 남성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인기의 척도는 남자들이 구매하는 사진엽서의 양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오산월의 사진엽서가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80~90년대 책받침 여신처럼 오산월의 사진엽서가 그런 인기의 척도였다고 합니다.

인기가 워낙 많았던 오산월은 당시 신문에도 여러 번 화보가 실렸으며, 오산월이라는 이름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영월

김영월은 서도소리로 일세를 풍미하며 많은 일화를 남긴 장학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평양기생으로 평양의 권번에서 학습을 한 김영월은 소리에도 능통했으나 연기 쪽에도 일찍부터 소질을 보여 많은 활동을 한 기생이었습니다.1927년 개봉한 영화 낙양의 길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오해

당시 인기를 누린 기생들은 현재의 관점으로 본다면 연예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기생이라하면 단순히 몸만 파는 창녀로 생각하지만 매춘을 업으로 삼는 부류는 기생 외에도 따로 있었으며 주로 매춘만을 생업으로하는 타락한 기생도 있긴 있었으나 이들은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이었는데 창녀와 하급기생은 prostitute로 쓰지만 풍류를 읊는 고급기생은 courtesan로 구분해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고급 기생들은 집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습니다. 일패의 경우 궁궐에도 출입했는데 양반들은 자신의 후원에 따로 부르거나 교외로 나가서 춤과 음악을 즐기거나 학문이나 시, 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양반들조차 어지간한 명망이 있는게 아니면 일패기생을 쉽게 부를 수 없었다고 합니다.주된 고객층이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학문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 했을 정도입니다.또한 기예가 뛰어난 기생이라면 신분이 천민이라도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는데 교양과 가무를 갖춘 연예인에 가깝다고 보면 되었습니다. 현대에 대입하자면 급에 따라 고급 연예인(일패), 스폰서를 둔 연예인(이패), 텐프로(삼패)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효주,천우희가 출연,연기한 기생의 삶을 다룬 영화 해어화

조선시대의 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는데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으며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는데 기생이 창녀인 것이 아니라 창녀는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습니다. 기생은 예술인 취급을 받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회기강이 무너지자 매춘 유무에 따라 은근짜와 더벅머리로 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됩니다.현재 기생=창녀라는 인식은 이 시기와 사극들의 영향이기도 합니다.또한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과 결합하여 오해가 더 심해진 경향도 있는데 이는 기생 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그 당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그림들, 대표적으로 민속화 등은 환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지금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은 상당수가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으로 즉, 기생들은 전통 예술을 전승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겸했다 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유교적 사상때문에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기도 합니다.일제강점기에는 권번에 기적을 두고 3년동안 기예를 배운 뒤 배반에 합격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소위 말하는 일패기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는데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습니다.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으로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으며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일제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습니다.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지는데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완월동)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됩니다.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예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습니다.유명한 평양 기생의 경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마시고 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것을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안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공산당 욕을 쏟아내었다고. 그래서 평양 점령 기념으로 회포를 푸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 버렸다 합니다.

포르말린 용액속에 박제된 여성 생식기 명월관 기생 홍련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남자의 머리와 여성 생식기가 포르말린 용액 속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일제 강점기때 사이비 종교 백백교 교주의 머리였으며 여성 생식기는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로 알려져 있습니다.남자의 머리는 백백교 교주인 "전용해"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성 생식기의 주인은 누구인지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다만 구전으로는 당시 유명한 ‘명월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로 알려졌지만 과연 명월이가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었다고 합니다.이 궁금증을 풀기위해 당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일본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에 주목했다고 합니다.이시이는 우리나라 근대 화가의 선구자인 이중섭 선생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로 그는 1918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각지를 돌며 주로 인물화를 그렸으며 이시이와 명월관 기생 ‘홍련’이 사랑에 빠졌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그러던중 일본 마쓰모토시의 시립미술관에 이시이가 그린 ‘홍련’의 실물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특별관람실에서 ‘홍련’의 실물 그림을 볼수 있었다고 합니다.그림속의 홍련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나 얼굴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슬퍼보이기도 합니다.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가 그린 홍련의 실물화

명월관 최고의 기생임을 상징하듯 왼손에는 금가락지 세 개를 끼고 있었고 옷고름에는 금 노리개가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이 그림은 1918년에 그려졌고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홍련’(紅蓮),그림의 배경으로 볼때 홍련의 방에서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1918년은 이시이가 조선에서 활동할 시기였으며 이때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고 합니다.1909년에 개업한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조선 최고의 기생집 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당시 명월관의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불렸지만 예명과 본명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기생이 바로 명월이로 불리는 "홍련"이었으며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상태 등으로 볼때 사망시점도 20대말로 추정되고 있어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 을 동일인물로 볼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여러정황으로 볼때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명월이는 홍련이었으며,또 일본 화가 이시이와의 사랑, 기생으로서 농익은 20대말 이라는점 등을 종합할때 국과수 생식기의 주인공과 명월관 기생 홍련이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옛부터 천하의 명기란 질 안에 지렁이 모양의 가느다란 주름이 많고 질 천장쪽에는 좁쌀(질벽에 돋아있는 돌기)이 가득 달려있으며 선천척으로 질 입구가 좁아야 하고 괄약근의 탄력성이 강해야 명기라 했다고합니다.또한 여성질환도 없어야 하며 질의 방향도 다소 밑쪽에 있어야면 명기에 이른다 합니다.그녀가 많은 기생들을 제치고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녀의 생식기 때문이었다 하는데 과연 그녀의 생식기가 어떠했길래 유명해진 것일까? 명월이 홍련은 일제 강점기 시절 수도 경성을 뒤흔들었고 희대의 요부라 불리우기도 합니다.당시 그녀와 잠을 잔 남성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 두를 정도 였으며 가끔 복상사를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아침이면 눈이 풀리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고 합니다.복상사는 남녀가 성관계중 남성이 너무 희열에 들떠 혈압이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숨을 쉴쉬가 없는 무아지경을 헤메는 것인데 이를 의학적으로는 심장마비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명월이의 탁월한 생식기는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하지만 이시이가 여행기록을 엮어 이듬해인 1921년 絵の旅(작화여행)(日本評論社, 1921)로 출간했는데 그 기록 중에는 홍련도 등장합니다.

“조선인(朝鮮人)은 실증을 잘 내 새로운 곳이 생기면 손님이 그쪽으로 옮겨가는 모양이다. 대성관(大成館)도 후에 등장한 3층의 우신관(又新館)에 약간 눌리는 듯하다. 요전에 김홍련(金紅蓮)이란 기생을 그렸던 화춘관(華春館)이란 요리집도 이미 한물갔다 한다.”(p.72.)

그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 홍련이라는 그림은 1918년 작품이며 서울의 명월관 소속이 아니라 평양의 화춘관 소속이었다는 것입니다.이시이도 홍련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으나 사실 그림의 모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해 명월관의 명월이와는 단지 두 사람 모두 기생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생식기 표본의 폐기는 인간 존엄을 위한 상징적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생식기 표본도 엽기적이지만, 그것이 기생의 것이라는 구전도, 그리고 초상이 남았다고 해서 ‘바로 그녀’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떤면에선 엽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기생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들과 그릇된 인식이 만들어낸 인간성 상실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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