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
천하무적 그레이시 유술을 격파한 진정한 유도의 황제
기무라 마사히코는 1950년대 유도계의 최강자로 군림했으며 주짓수와 종합격투기에서는 기무라라 불리우는 기술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기무라 본인이 만든 것은 아니며 본래 유도에 있던 팔 얽어 비틀기(腕緘, うでがらみ)를 1951년에 벌어진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결에서 이 기술을 시전하면서 주짓수계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 불려진게 그 시작이입니다.브라질리언 주짓수로도 유명한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결은 1951년 상파울로 신문사의 초청으로 브라질에 들어와 있던 상황에서 벌어졌는데, 이전에도 가토를 비롯한 유도가들을 꺾은 엘리오와 당대 유도계 최강자라는 기무라의 대결은 브라질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관객만 2만명에 브라질 대통령까지 보러 온 대규모 시합으로 여기서 타격없는 그라운드 승부를 벌이던 와중 기무라는 13여 분만에 팔 얽어 비틀기로 엘리오 그레이시의 양 팔을 부러뜨렸고 엘리오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세컨드 측에서 타월을 투척하여 TKO로 승리했습니다. 그 이후 그에 대한 존경심 차원에서 팔 얽어 비틀기 기술을 기무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와 그레이시 가문 엘리오 그레이시의 전설의 대결
쇼와 26(1951년)년 10월,리오 데 자네이루의 마라카난·스타디움에서 세기의 유술시합 단판 승부가 벌어졌습니다.
한때 세계 최강의 격투가라는 칭호까지 얻었던 전설의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의 후계자 엘리오·그레이시(170cm/63kg) 그리고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명성의 당대 최강 유도가 기무라 마사히코(175cm/85kg)의 총 3R ,라운드당 10분의 결투.(기무라의 키에 대해서는 170이라는 자료도 있고 178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175였다는 자료입니다.)모 스포츠 신문에 나온 UFC의 역사라는 글을 보면 기무라와 가토가 전부 100킬로가 넘는다고 했는데 충분한 자료를 찾아보지 않고 글을 쓴 오류입니다.기무라는 85킬로, 가토는 80킬로였으며 게다가 기무라와 엘리오가 10살이나 차이가 나서 나이에서도 기무라가 유리했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당시 기무라 34살, 엘리오 42살로 8살 차이였습니다.이 시합 전에 가토 5단이 엘리오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기무라는 비장한 각오로 시합장에 나타납니다.물론 웃음을 머금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 속은 편치 않았을 겁니다.한번도 맞서본 일이 없는 유술이라는것과 맞서야한다는 것 또한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기무라 마사히코의 나이 34살로 전성기를 한참 지나버린 기무라가 브라질까지 오게 된 것은 자신이 총 책임자로 있는 프로 유도의 홍보를 위해서 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레이시 유술과 싸운건 강도관 유도가 아니라 프로 유도의 기무라였던 것입니다.물론 이때 프로 유도 단체는 소멸했었지만,스스로의 유파는 프로유도였고,이를 이용한 프로레슬링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시합장에 들어서자 기무라는 놀라는데 바로 거기에 관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엘리오는 기무라에게 그것은 기무라가 죽으면 들어가게 될 관이라고 하며 자신감을 피력했습니다.당시 엘리오는 수많은 발리투도 시합에서 패배 없이 승리를 거두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고 비교적 자신이 없는 분야였던 타격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술만으로 기무라를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기세가 등등했습니다.카지와라 잇키의 공수바보일대에서는 엘리오 그레이시를 200킬로가 넘는 괴물 유도가라고 묘사해 두었고, 방학기씨의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인디오 레슬러라고 묘사하지만 엘리오의 체격은 무도가로써 보통도 안되는 체격이었습니다.또한 엘리오가 타격이 약하다는 것은 이후 산타나에게 패배하면서 증명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건 당시 브라질에서 엘리오라고 하면 최강의 격투가이자 유술가였습니다.
엘리오는 격투 전적에 패배라고는 단 2패 뿐인데 산타나와기무라에게 당한 것이었습니다.엘리오는 서쪽 문을 통해, 그리고 기무라는 동쪽 문을 통해 등장합니다. 브라질에는 일본교민도 많았고 엘리오가 그렇게 일방적인 야유속에 경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브라질인들의 엘리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그 경기에 브라질 대통령까지 관람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기무라는 시합장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데 바닥이 보통의 것보다 많이 물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무라의 필살기인 밧다리 후리기와 한팔 업어치기를 봉쇄하기 위한 엘리오의 전략이기도 했고, 당시 유술 시합에 쓰이던 바닥은 유도에 비해 많이 무른 소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일본측에서는 엘리오의 계략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드디어 1라운드가 시작되자 기무라는 엘리오를 메치려 하지만 엘리오의 번개같은 스피드에 쉽게 기술을 걸지 못합니다.하지만 팔힘은 일본 제일이라는 정평이 나있었던 기무라답게 엘리오를 붙잡아 넘어뜨리고 누르는데 성공합니다.이때 엘리오는 이미 귀가 찢어져 피가 나기 시작했는데 기무라는 엘리오를 죽이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괜찮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엘리오는 정신력이 엄청나다고 정평이 나있었던 만큼 당연히 그 정도로는 굴하지 않았습니다.그러다가 엘리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어버립니다.그렇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무라의 조르기와 꺾기를 방어합니다.
기무라는 엘리오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닌 만큼 "무리하지 마라!"라고 두번 정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엘리오는 일어를 어느정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2라운드가 되자 엘리오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른 기무라는 하는 수 없이 팔 얽어 비틀기를 써버립니다. 훗날 기무라 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기술은 사쿠라바가 그레이시 헌팅을 할 때 응용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엘리오는 버티지만 이미 팔관절이 완전히 나가버린 상황으로 우두둑 하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관중들이 들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엘리오는 그런 상태에서도 계속 싸운다고 하였지만 보다 못한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타월을 던져 버립니다.기무라는 이 경기가 끝나고 나서 "과연 마에다 미츠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엘리오의 투지야말로 일본 무사의 거울이다.경기는 내가 이겼으나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는 패배했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이 시합이 와전되어 기무라와 엘리오가 3시간이나 싸웠다느니,기무라가 엘리오를 백번을 메쳤는데 엘리오가 버텼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게 되었습니다. 실제 시합시간은 13분이었고 시합 내용 자체로는 엘리오가 기무라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엘리오 그레이시는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대결 이전까지 무승부는 있어도 패배한 적은 없던 강자였던지라 지금까지도 기무라의 강함을 논할 때 이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물론 당시 엘리오 그레이시는 나이도 많고 몸이 쇠락해져갈 시기였고 기무라는 가장 신체적으로 좋을 때였지만 그러나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전 경기 내용도 보면 압도적인 승리만 있는 건 아니었고, 무승부도 많았습니다. 일본 유도가들과의 대결에서도 기절까지 시킨 가토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별로 이긴 적이 없으며 그나마 가토와의 대결도 첫번째는 무승부였고 오노 야츠시하고는 무승부, 타카시에게도 무승부였으며 레슬러들과의 대결에서도 많은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원래 엘리오는 체격이 왜소하고 몸도 허약해서 형제들 중 누구도 그가 무술로 대성할 거라 생각을 안 했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즉, 엘리오는 형제들 중에서도 체격이나 힘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걸 기술로 보완하여 싸운 스타일로 이런 일화 때문에 엘리오가 오늘날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일대종사로 취급받는 측면이 있습니다.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체격을 보완하고자 주짓수 가드 기술 등을 열심히 개발했기 때문인데 강자로서 유명했다기보다는 그런 허약한 체질에서도 강한 상대를 이겨오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에 대한 강함을 널리 알리게 된 인물이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한편, 기무라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완력도 동전이나 못을 손가락으로 구겨버리는 괴력의 소유자였으며 대결 당시 몸무게도 10~30kg대까지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기무라가 앞서긴 했습니다.그래도 엘리오 그레이시 입장에서도 별로 손해본 장사는 아닌게, 이때 브라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이후 본인의 도장과 유파도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기무라도 이때 엘리오의 기술에 감명받아 일본에 돌아가 동료들에게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엘리오의 아들인 호이스 그레이시가 90년대 들어 UFC 초대 챔피언이 되고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합니다.이후 1959년 브라질의 흑인 발리투도 선수였던 발데마르 산타나(격투기반은 카포에라,키 182cm 몸무게 94kg의 선수였다)와 그레플링 1승, 무규칙 경기 1무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1950년대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들어 당대 일본 프로레슬링계 최고의 스타였던 역도산과 대결하게 되는데, 유도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프로레슬링계에 진출한건 기무라의 아내가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고가의 치료약인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구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방학기 씨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이 부분이 아내가 암에 걸렸고 당시 암에 대해 무지한 시절인데다가 마이신이 만병통치약처럼 취급받던 세상이라 암 치료제 비용을 대기 위해 프로레슬링에 뛰어들었다고 묘사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국이 개혁 차원에서 일본 학교에서 행해지던 유도 교육을 금지시킨 탓도 있었는데 물론 기무라 정도 되는 위상의 유도가가 그거 때문에 생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찌됐건 그도 다른 활로를 찾아봐야 했고 그중에 상기한 브라질 출장도 카라시코라는 프로레슬러가 이끌어 홍보차 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그렇게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든 기무라와 역도산의 대결이 이루어지는데 이 대결은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이라 불리며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었는데, 문제는 경기 내용이 둘한테 별로 안좋은 방향으로 끝나면서 이후 기무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역도산도 이전의 영웅 이미지가 깎여나가게 되었기에 이 둘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기도 합니다.극진 공수도를 창시한 최영의와 강도관에서 함께 유도를 배웠으며 친우이기도 했는데 최영의는 기무라를 강도관 선배로서 그래플링 타입으로는 자신도 상대가 안 된다고 할 만큼 고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아는 무도가 중 자신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수련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는걸 보면 지독한 연습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루에 무려 9시간식 수련을 했다고 전해집니다.역도산과의 대결에서 기무라가 낭패를 당하자 발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_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
1917년 9월 10일에 태어난 기무라 마사히코는 강을 끼고 있는 구마모토 현의 광산 마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물속에 발을 담그고 돌멩이와 모래들을 퍼서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물속에 하체를 담그고 하루 종일 있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단련이 되는데 물의 흐름을 계속 버티면서 허리와 다리가 자연스럽게 강해지게 됩니다.또한 계속에서 돌멩이와 모래가 든 자루와 채를 손에 쥐고 날랐기 때문에 기무라의 악력이라는 것은 유도를 배우기 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구마모토 출신들이 술을 잘하고 힘이 장사라고 하는데 10세때 강도관에 입문한 기무라는 엄청난 트레이닝으로 원래 강했던 팔힘과 악력을 거의 몬스터급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됩니다.당시엔 자전거 타이어를 이용한 트레이닝이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라 나무에 흰띠를 묶어놓고 메치기 연습을 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트레이닝 방법이었는데 기무라가 끊어먹은 도복띠는 강도관 시절에만 무려 1000개에 달했다고 합니다.그리고 배밀기(유도식의 팔굽혀펴기)를 한 번에 1000회씩 할 정도의 팔힘과 지구력을 키웠습니다.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보면 기무라가 달려오는 말을 메치는 일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만화적 과장인 듯 하고 일본 측의 어떤 자료에도 그런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물론 전성기의 기무라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소년 시절에 달려오는 말의 앞발을 잡고 메친다는 것,중심이동이나 움직임 등이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네발 달린 짐승을 던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기무라는 중학 4학년(지금의 고1)때 강도관 4단을 취득,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승단 기록을 세우게 되는 기무라는 이후 시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 17세의 나이로 전일본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우고 1935년에서 1937년까지 전 일본 유도대회 3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이후 1950년 13년동안 무패가도를 달리고 10연속 우승이라는 깨지지 않을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여기엔 무승부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기무라는 당시 히트하던 소설 스가타 산시로의 붐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한 산시로의 실제 모델인 강도관 사상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의 뒤를 잇는 쇼와의 산시로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말은 기무라를 당시 사람들이 사이고 시로와 동급으로 인정해 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사이고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라는 말에 빗대어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사이고 시로는 강도관 122년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리던 사나이입니다.그와 견줄만 하다는 평가를 받은 기무라야말로 천재중의 천재였다는 것입니다.
기무라 마사히코를 김두한과 대결하는 일본 유도가 마루오카와 비교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마루오카는 체중 자체도 경량급이었고,지명도에서도 기무라 마사히코하고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원래의 유도 시합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체급이라는 것이 없고 무차별급으로 진행되었지만 어전시합에 한해서 경량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루오카는 그 부문에서 우승했다고는 하는데 이 어전 시합조차도 불분명합니다.방학기씨의 만화에는 마루오카가 유도 8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나이에 8단이라면 대기록으로 당시 강도관에서 40대가 되기전에 8단 취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무라나 사이고 시로도 하지 못한 일로 만화적 과장이 듬북 첨가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당시 방학기씨가 만화를 그릴때 김두한씨가 생전에 라디오 프로에서 했던 증언을 자료로 참고해서 그렸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너무 많이 나온 것으로 라디오 방송의 증언들이 허풍과 과장이 너무 심했다는 것은 김두한씨와 같이 건달 생활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내용입니다.장군의 아들같은 영화를 보면 마루오카는 장신에다가 거구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현역시절 170cm에 70kg도 되지 않는 경량급이었습니다.유도 8단이라는 것도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물론 마루오카가 유명한 선수가 아니다보니 정확한 단수는 알 수 없지만 기무라나 아베 켄시로 같은 무적의 강자들이 버티고 있는데 혼자 8단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당시 일본 경시청 유도 지도 총감의 단수가 8단이었다고 합니다.사실 경찰서의 무술 지도 경부가 8단이라는 것 자체도 우스운 이야기인데 마루오카 경부의 유도 실력은 비록 경량급이라도 어전 시합에서 우승을 할 정도이니 굉장히 뒤어났을 것입니다.그의 손에 나가 떨어진 당시의 건달이나 야쿠자는 꽤 많았다고 하는데그러다보니 스스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종로의 건달들이 강하다는 것이 일본까지 정평이 나서 마루오카를 특별히 불러왔다느니, 마루오카가 어전시합 무제한급을 7연패를 했다느니하는 과장과 헛소문을 퍼뜨린 듯 합니다.무엇보다 공식적인 어전시합인 무차별급에서 마루오카라는 우승자는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 당시 우승자라고 올라있는 이름은 아베 켄시로와 기무라뿐입니다.
기무라의 최종 단수는 강도관 7단이었는데 이는 기무라가 1950년에 강도관을 탈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현재 우리나라 규정도 그렇지만 당시 강도관 규정에도 특별 승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7단 정도까지는 별도의 승단 심사 없이 어전 시합 우승만으로 승급이 가능하였고, 기무라는 바로 그런 케이스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정상적인 승단 심사를 통한 것이었다면 33세때 7단이라는 건 말이 안될 정도의 단수입니다.물론 당시 7단이건 8단이건 기무라를 이길 사람은 없었겠지만 말입니다.우리나라 유도도 올림픽 우승하면 자동으로 단수를 올려주는 특별승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올림픽 우승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정식 승단을 하더라도 4단이나 5단 정도는 어렵지 않게 획득할 것입니다.
■기무라 마사히코를 패퇴시킨 사나이_아베 켄시로
기무라는 16세의 나이에 어전 시합에 최초로 참가하여 승승장구,4강까지 진출합니다. 당시 기무라의 위력앞에 이름난 유도가들이 하나,둘 나가 떨어지는데 그를 지켜보던 가노 지고로조차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고 하니 당시 기무라의 위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기무라가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아베 켄시로는 당대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유도가로써 168cm의 키에 71kg으로 경량급에 나가야 할 체중이었지만 워낙에 강자였기 때문에 무차별급에 출전하게 된 것으로 체격 자체는 마루오카와 비슷지만 실력은 천지차이였던 듯 합니다.기무라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밧다리 후리기를 하면서 한팔 업어치기를 할 요량으로 아베 켄시로에게 달려들지만 되려 아시바리(우리나라에서는 와사바리라고도 부릅니다.)를 당해 쓰러지면서 절반을 빼앗깁니다.당시에는 절반 그리고 한판 두가지 뿐이었습니다.그냥 밀려 넘어지는 건 점수로 인정 안해 주던 시절이었습니.) 생전 처음으로 아시바리에 넘어져 본 기무라는 자존심이 상해 다시 달려드는 순간 자신의 복숭아 뼈 밑으로 아베 켄시로의 발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 순간 기무라는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초고수의 아시바리를 당하게 되면 원래 머리부터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결국 아시바리 두방에 기무라는 한판으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이 대회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베 켄시로는 어전대회에 참가하지 않게 됩니다. 기무라에겐 가장 깨끗히 패해버린 시합이며 아베 켄시로에게 리벤지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아베 켄시로에게 패퇴했던 경험은 기무라에겐 엄청난 자국이 되었는데 그 때까지 한팔 업어치기의 연습에 주력하던 기무라는 이 일을 계기로 한가지 수련을 더 하게 되는데 바로 100개의 촛불을 켜고 발뒤축 후리기를 연습하여 풍압만으로 불을 꺼버리는 연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_그레이시 유술보다 위험한 요시지마 8단의 프로 유도
정식 명칭은 국제 유도 협회이고 쇼와 25년(1950년)에 요시지마 8단이 만든 것으로 이 또한 수많은 문헌에서 기무라가 창시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프로 유도라는 것은 고류 유술에 존재하는 수많은 살수와 역관절 메치기 같은 위험천만한 기술들을 다 복원시켜 스포츠 유도가 아닌 격투 전용 유도를 지향하는 상당히 실전적인 무도였다고 합니다.사실
역관절 메치기같은 경우는 조금만 잘못해도 팔의 관절이 부러져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며, 낙법도 무척 까다로와서 메쳐지면 실신하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의 유도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삼보에 아직 그 원형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브라질리언 유술에도 역관절이 조금 남아있기는 하지만, 역관절에 관한한 삼보 쪽이 보다 더 체계가 있으며 역관절 기술들에 관해서는 대동류 유술과 아이키도가 가장 우수합니다.손가락 관절기는 제대로 된 합기도를 조금만 익혀 보신 분들은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손가락은 굉장히 민감하며 힘도 별로 없어 주먹으로 꽉 움켜 쥐기만 해도 기술의 반은 걸렸다고 할만큼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불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유도에서 금한 기술입니다.기무라는 강도관의 분위기가 무도보다는 스포츠 쪽으로 기우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는 연습때마다 살벌할 정도의 기술을 남발해,그의 기술을 받아주는 사람들이 꼭 한 두명은 실신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명과 대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기무라는 이처럼 기술을 너무 세게 걸었기 때문에 강도관에서도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이런 그에게 요시지마 8단의 프로 유도는 그의 무도 정신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고, 기무라는 요시지마의 수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손가락 관절기까지 다 부활시켜버린 프로 유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레이시 유술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었기에 프로 유도는 최영의 총재의 실전공수 극진가라데처럼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전통 유도계의 압박에 의해 겨우 10회의 시합을 갖고 4개월만에 하와이에서 소멸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기무라는 프로 레슬링을 하기로 결심, 브라질 순방에 나서고 거기서 엘리오와 맞서게 됩니다.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시히코와 가라데바보 최영의와의 만남과 우정
기무라 마사히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당대 최강의 무도가 최영의입니다.최영의가 미국 순방에서 돌아와서 전통 무도계의 온갖 시기와 중상 모략 때문에 고뇌하던 시절,기무라 마사히코와 만나게 됩니다.기무라 또한 프로 유도를 하는 바람에 강도관 유도계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공격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만나자 마자 둘은 십년지기처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하지만 한가지 실망스러운 점은 유도와 가라데 최강의 사나이라는 둘의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인데 서로가 서로를 최강자라고 인정해주면서도 서로가 맞붙진 않았다는 것입니다.만화 바람의 파이터나 공수 바보일대에서는 둘이 대결한 적이 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공식적으로 붙은 일은 없다고 합니다.최영의는 자신이 직접 쓴 글에서 이렇게 언급한 일이 있는데 "기무라야말로 최강의 유도가이고 진정한 무도인이었다.그는 나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많이 단련하고 정진하는,내가 아는 유일한 인간이었다.요즘(당시1960년대)의 일본 유도계는 네덜란드의 헤싱크(헤이싱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 5단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러나 기무라 마사히코가 돌아온다면 헤싱크 따위는 그의 도복도 잡아보지 못할 것이며 3분을 버티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이것은 공수도인 최영의의 이름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최영의와 함께 미국 순방을 떠나 사선을 함께 넘으며 우정을 다졌던 엔도 고키치 6단은 최영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도 유도가이다보니, 기무라 마사히코라는 인간을 한 번 이겨보고 싶어서 5년이나 죽어라 연마했습니다. 기무라의 필살기라는 한팔 업어치기와 밧다리 후리기는 나의 필살기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5년동안 이를 갈면서 연마했지만 막상 기무라씨와 맞잡는 순간에 땅에 쳐박히고 말았지요.몇초도 버티지 못했었죠...."이후 최영의와 기무라는 같이 유도도 수련을 했는데, 최영의 또한 4년만에 강도관 4단을 취득한 유도의 달인이었기 때문에, 직접 유도 대련을 제안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아무리 천하의 최영의도 유도로는 기무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는데 맞잡는 순간에 한팔 업어치기로 깨끗히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그렇게 메쳐진 후 최영의가 한 말이 유명한데 "나를 이렇게 메쳐버린 인간은 기무라 마사히코 뿐이다."
▩기무라와 역도산 그리고 최영의_당대 최강의 사나이들의 애증의 관계
엘리오 그레이시를 격침시키고 일본 유도의 강함을 증명한 기무라, 그러나 일본에서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여 주지 않았던 기무라는 훗날 그레이시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레이시를 격파한 유이한 사나이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때만해도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외국가서 허접한 유술가 하나 잠재우고 온 것이라고 여겼고, 더군다나 귀신 기무라가 패한다는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러던 중쇼와29년(1954년),기무라는 프로 레슬링의 역도산과 함께 드디어 태그팀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시합을 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싸운 상대는 바로 유명한 샤프 형제였는데 이 시합을 구경하던 최영의는 역도산과 기무라에 대해 엄청나게 실망을 하게 됩니다. 최영의가 미국에서 목숨을 걸어가며 싸웠던 톰 라이스가 하던 실전형 레슬링이 아니라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인 경기였기 때문입니다.게다가 기무라는 아예 무시당하는 역할이었고 오로지 역도산만을 띄워주는 각본 또한 최영의를 화나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쇼의 들러리나 서주고 있는 기무라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습니다.역도산은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에서 톰 라이스와 진검승부를 하다가-사실은 각본이 있었으나 톰 라이스가 무시하고 시작하자마자 실제로 달려들었고 역도산이 미리 이겨버리는 각본이었기 때문에 훗날 역도산 vs기무라 전에서의 기무라처럼 일부러 맞아주거나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처음에는 역도산도 그와 제법 접전을 벌이셨지만 잠시후에 거의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중상을 입습니다.톰 라이스는 원래 세계 챔피언까지 노리던 복싱계의 강자였기에 모션이 크고 궤도가 단조로운 가라데 촙으로는 톰 라이스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최영의가 이후에 톰 라이스와 복수전 아닌 복수전을 했을때,톰 라이스의 늑골과 턱뼈를 날려 버리면서 톰 라이스의 격투인생은 그걸로 끝나게 됩니다만, 이 또한 역도산에게는 치욕스러웠던 듯 합니다.그러나 역도산 입장에서 최영의는 피지컬적으로나,기술적으로나 너무나 강한 상대였고 또한 너무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게다가 기무라처럼 뒷 공작을 할 약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때문에 실제로 진검 대결을 벌이지 못할 바엔 또 다른 최강자인 기무라를 눌러 버리는 것이 났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최영의가 프로레슬링을 할 리가 없으니 가난한 기무라를 끌어들이고, 자신의 각본 속에서 '기무라는 역도산보다 못하다'라는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각인시켜 버립니다.결국 기무라 마사히코와 역도산의 진검 승부가 결정이 나게 되자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 시합을 '간류지마의 결투'라 하여 엄청난 관심을 보였는데 간류지마의 결투라는 건 바로 일본 역사상 최강의 사무라이라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또 다른 검의 귀신 사사키 고지로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최강은 둘이 될 수 없고, 이 둘의 대결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에 비견할만하다는 의미였는데 훗날 최영의가 기술한 자서전을 보면 당시의 역도산이나 기무라 모두 엄청나게 강했지만, 기무라는 이미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 절정에 달한 젊은 역도산에 비해 불리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합니다.그렇지만 역시 실력만을 놓고 볼때 기무라가 약간 우위에 있었다고 판단한듯 시합 직전까지도 기무라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합니다.
▩20세기의 진검승부_제 2의 간류지마의 결투의 승자
간류지마의 결투에서 무사시가 온갖 심리전을 이용해서 승리를 따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검의 실력만이라면 고지로가 무사시보다 못할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결국 간류지마의 결투는 무사시의 검술의 승리가 아니라 병법의 승리였다고 알려지게 됩니다.기무라와 역도산의 시합 또한 역도산이 쳐 놓은 그물에 기무라가 걸려든 꼴이었는데 당시의 동영상을 보면 가무라가 역도산에게 맞는 순간,무방비로 있다가 어이없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 할 수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억울해하는 기무라의 모습도 확인이 가능합니다.훗날 말년의 기무라가 토크쇼에 출연해 당시의 사정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고, 그 내용은 최영의의 자서전과 바람의 파이터, 공수 바보일대 등에 나왔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사실 일본 만화 중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공수 바보일대에서 기무라가 병든 아내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역도산에게 져줘야만 했던 서글픈 사연이 나오고, 그 이후 역도산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이 그대로 기술되었을 때 역도산의 수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오오키 긴타로 등 세명의 프로레슬링의 거목들이 아무런 반론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공수 바보일대의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바람의 파이터와 똑같으며 최영의의 자서전과도 일치합니다.실제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최영의는 실신한 기무라를 보면서 격분한 나머지 역도산에게 죽여버리겠다고 분노한 일은 유명합니다. 이후 역도산이 최영의를 피해다닌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그런데 한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역도산이 이 무렵 야쿠자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며 술에 빠져 살때 역도산의 뒤를 봐주던 양원석(야나가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이라는 조선계 야쿠자의 존재입니다.보통 알려진 내용은 역도산이 워낙에 싸움에도 강했기 때문에 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야쿠자들이 그냥 맞아주고 자리를 피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야쿠자들이라면 정 안되면 떼거지로 달려들어 칼로 난도질을 해버릴 수 도 있고,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단지 싸움에 질 것 같다는 이유로 역도산을 피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는데 야나가와(양원석)라는 인물은 일본에서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초과격 무투파 야쿠자의 두목으로써 10명도 안되는 조직원을 이끌고 120명이 넘는 야쿠자 조직을 단 하루만에 쓸어버리면서 전 일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갔던 무시무시한 사나이였습니다.맨손 뿐 아니라 무기의 사용에 능하고 기습에 능해 한번 붙었다하면 반드시 바닥을 피로 칠해야 싸움을 끝냈다고 할 정도였으며 당시 야쿠자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라고 불릴 정도의 야쿠자였는데 바로 야나가와가 역도산의 뒤를 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훗날 최영의의 역도산에 대한 행동에 반감을 품은 김일 선수가 최영의에게 도전을 하였지만, 사실 우리들에게는 박치기로 유명한 한국 프로 레슬링게의 레전드인 김일이지만 당시 김일은 최영의에게 도전할만한 자격이 안되었습니다.더구나 김일은 당시 프로레슬링에서도 최고가 아니었습니다.이노키와 바바를 제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최영의에 대한 도전은 아무도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은 김일도 도전한다고 엄포만 놓았을 뿐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고 맙니다.사실 김일이 도전하실 때의 정황을 고려해 보면 정말 도전하실 생각이었다면 조일삼 형제나 로야마, 사토 카츠아키같은 당시 극진의 간판을 짊어진 사범들들을 먼저 쓰러뜨려서 최영의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고 그 정도 단계는 거쳐야 최영의라는 거물의 인지도를 김일이 메꿀 수 있었겠지만 당시 일본에서 세계 최강의 무신으로까지 칭송받던 최영의에게 도전하는 것인데 프로레슬링 태그 챔피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품격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기무라 마사히코는 결국 이 석연치 않은 사건으로 프로레슬링을 그만두고 개인도장을 운영하며 실전에서는 손을 놓게 됩니다. 기무라가 그렇게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던 무도가로써의 명예를 내팽개쳐 가며 지키려고 했던 아내는 기무라의 정성 덕분인지 병세가 호전되어 기무라의 곁을 지켜주게 되었습니다.명예는 잃었지만 가족을 지킨 사나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명예는 지킨셈입니다.당대 최강의 유도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간과하는 것이 사실 기무라는 어린시절부터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얻게된 아내는 기무라에게 있어서 유일한 가족이었고 쉼터였습니다.아내 또한 기무라를 지극정성으로 내조했고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기무라는 무도가라는 자신의 명예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입니다. 역도산이 3번의 매치를 제의하면서 2번은 짜고하고 마지막은 진검승부라고 했을 때 기무라는 시합이 단 한번으로 끝날 것이라는 각오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무도 인생의 끝이 될 것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예상했다고 합니다.다만 기무라는 역도산의 무도인으로써의 자존심에 실날같은 희망을 걸고 그에 응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결과는 기무라 선생의 추측대로 진행이 되고 말았고 훗날 기무라 마사히코는 인터뷰에서 그때의 일은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유일한 가족인 사랑하는 아내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은퇴 후의 기무라의 얼굴에는 평안함과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는데 프로레슬링 시절의 무기력한 모습은 사라져 버립니다.귀신도 메칠 정도라던 기무라의 유도 실력도역도산의 책략에 들러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역도산과 기무라의 이 사건 이후 일본인들에게 프로레슬링은 더이상 매력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지 못합니다.각본대로 짜여진 시합이라는 것이 알려진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인식이 크게 바뀌면서 일본인들은 '그러면 그렇지, 진검승부라면 프로레슬링 최강자가 아니라 상대가 전세계의 누구라고 할지라도 천하무적 기무라가 그렇게 질 리가 없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그리고 역도산이 톰 라이스를 일본으로 데려와 일방적인 구타끝에 승리를 하게 되지만 오히려 기무라전에 이어 역도산에 대한 인식을 악회시키게 만들었는데 톰 라이스는 최영의에게 패배하면서 최영의의 해머같은 정권에 이미 격투가로써의 인생은 끝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싸울 수 없는 톰 라이스는 돈 때문에 일본까지 오게 되고 역도산은 이를 이용, 일본인들 앞에서 그를 이겨버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의 관중들에게 각본이나 쇼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음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역도산이 진정한 복수전을 원했다면 자신을 참패시킨 톰 라이스를 그 지경으로 만든 최영의에게 도전을 했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레이시 유술과 함께 부활한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
그레이시 가문의 발리투도가 세계를 휩쓸게 되자, 이 그레이시를 일찌감치 격파해 버렸던 기무라 마사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기무라 마사히코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다만 그 당시에 엘리오를 이기는 필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그러면서 사람들은 기무라를 역도산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힘없는 유도가가 아닌 진정한 최강의 유도 고수로 다시 한번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쿠라바 카즈시라는 뛰어난 그래플러가 그레이시 가문을 기무라 록으로 격침시키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무라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사쿠라바가 호이스 그레이시를 쓰러뜨린 다음날 신문에는 '사쿠라바, 일본 격투계 50여년만의 비원성취'라는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리게 됩니다. 바로 엘리오가 기무라에게 무릎을 꿇은지 5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개된 필름 속의 기무라는 역도산과의 시합에서 무기력하게 실신해버린 삶에 찌들어버린 모습이 아니라 그 막강한 그레이시 유술을 일방적으로 부수는 가공할 유도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유도의 귀신이자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명성의 진정한 강자의 위풍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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