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시로(西郷四郎)는 아이즈 번사(会津藩士)였던 시다 테이지로(志田貞二郎)의 셋째 아들로서 게이오(慶応) 2년(1866년 2월 4일), 아이즈와카마츠(会津若松)에서 출생했습니다. 가문이 세습하여 물려받는 녹봉(祿俸)을 뜻하는 가록(家禄)은 150석이었습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 신정부군이 토호쿠(東北) 지방으로 쳐들어왔는데, 당시 34세였던 그의 아버지 시다 테이지로는 아이즈 번의 주력 부대였던 주작대(朱雀隊)에 편입되어있었습니다.아이즈 번은 게이오 3년(1867년)에 군제를 개편하여 연령별로 중국의 사신(四神)에서 이름을 따온 4개의 부대,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동쪽의 청룡(青竜), 북쪽의 현무(玄武)로 편성하였습니다.테이지로는 주작대의 무사로서 에치고(越後)의 나가오카 번사(長岡藩士)와 함께 나가오카 성(城) 공방전에 참천했고, 그 후에도 에치고 방면의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메이지(明治.원년; 1868년)에 아이즈 번이 항복했기 때문에 에치고의 시오카와(塩川)에서 무장 해제되어 시오카와, 그리고 타카다(高田)에서 유배되어 근신 생활을 하게 됩니다.메이지 3년(1870년 1월)에 근신이 해제되고, 테이지로는 가족이 피난하고 있었던 과거 아이즈 번령의 에치고쿠니(越後国) 칸바라군(蒲原郡) 가쿠시마무라(角嶋村)로 돌아왔습니다.가쿠시마무라는 메이지 22년(1989년)의 마치무라 제도(町村制)에 의해 니가타 현(新潟県) 히가시칸바라 군(東蒲原郡).츠카와 초(津川町)가 되었으며, 헤이세이(平成) 17년(2005년에 마치무라 합병(町村合併) 제도로 인해 아가 초(阿賀町)가 되었다.)많은 아이즈 번사들과 그 가족들이 메이지 3년(1870년)에 옛 남부번령(南部藩領)이었던 혼슈(本州) 북단의 불모지, 토난 번(斗南藩)으로 이주했지만, 시다 가문은 메이지 4년(1871년)에 토난 번으로 가지 않고, 가쿠시마무라에 정착하게 됩니다. 시다 가문은 본디 츠가와 지역의 자시다헤이(字志田平)의 호족 출신으로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테이지로는 일가를 츠가와로 피난시킨 것이라고 합니다.사이고 시로에게는 사실상 이곳이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다 일가가 츠가와에 정착한 바로 그 해, 메이지 5년(1872년)에 사이고 시로의 아버지 시다 테이지로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당시 사이고 시로가 7세때 였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도쿄 상경과 강도관 입문
메이지 15년(1882년) 3월, 17세의 사이고 시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사토 요시로(佐藤与四郎)와 함께 도쿄로 상경합니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희망했지만 151cm의 신장이 걸림돌이 되어 입학을 포기하는데 이 때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라는 인물은 같은 해 5월에 에이쇼지(永昌寺)라는 절에서 강도관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의 유술(柔術)과는 다른, 새로운 유도(柔道)라는 것을 절간 한 구석에서 지도하고 있었습니다.사이고 시로는 그 강도관에 일곱 번째로 입문해 에이쇼지에서 지내며 유도 수련에 힘썼는데 가노 지고로는 이 때 당시 23세, 전년도 7월에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 철학(哲学) 정치학(政治学) 이재학과(理財学科)를 졸업한 상태였습니다. 메이지 3년(1870년), 11세 때 해군성에서 근무했던 부친과 함께 현재의 고베 시(神戸市) 히가시나다 구(東灘区)에서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18세에 처음으로 유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텐진신요류(天神真楊流)의 후쿠다 하치노스케(福田八之助)에게 배웠습니다.강도관의 첫 번째 입문자는 야마다 츠네지로(山田常次郎)였는데, 그는 이후에 이즈 시(伊豆市)의 해상운송 도매업자였던 토미타(富田) 가문의 양자가 되어서 토미타 츠네지로(富田常次郎)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토미타 츠네오(富田常雄)는 쇼와(昭和) 17년; 1942년에 소설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를 발표하여 인기 작가로 등극했습니다.이후에 스가타 산시로의 실제 모델이 사이고 시로라는 추측이 널리 퍼져서 사실과 같이 여겨졌지만,정작 작가 토미타 츠네오 본인은 스가타 산시로는 가상의 인물일 뿐이며 결코 사이고 시로가 아니라며, 츠가와에 위치한 사이고 시로의 비문에 이것을 기록하여 부정했다하지만 스가타 산시로의 형제 묘사와 그가 아이즈 출신으로 17세에 도쿄로 상경했다는 설정과 야마아라시(山嵐)라는 기술을 표현한 것까지 사이고 시로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작가 또한 공상 중에 떠오른 산시로의 생애 표현에 있어서 사이고 시로의 모습이 떠오른 것에 대해서는 시인했다고 합니다. 타케와키 무가(竹脇無我)가 연기한 텔레비전 드라마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는 1970년도에 방영되었는데 토미타 츠네지로는 사이고 시로와 함께 강도관 사천왕으로 불렸습니다. 메이지 19년(1886년), 사이고 시로가 21세였을 때,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경시청(警視庁)에서 개최된 무술대회에 명문 유술 유파, 요신류(楊心流)의 토츠카 히코쿠로(戸塚彦九郎) 사범의 수제자 테루시마 타로(照島太郎)를 작은 체구의 사이고 시로가 그의 장기였던 야마아라시로 호쾌하게 던져버린 것입니다. (당시 상대방이 테루시마 타로가 아닌 우케치 엔타로; 好地円太郎였다는 설도 있다.)창시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강도관 유도가 유명 고류 유술 유파를 물리친 것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이렇게 사이고 시로의 활약으로 인해 강도관 유도가 크게 발전하여, 강도관 설립 8년 후인 메이지 23년(1890년)에는 문하생이 1,500여명에 달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의 키는 일본인 중에서도 작은153센티 정도였다는게 정설입니다.그런데 사이고는 남들과는 다른 신체적 특성이 있었는데 바로 사이고의 발가락이 무척 길어 물갈퀴 같았다고 합니다.(곰발톱 같았다는 말도 있고, 문어발과 같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하여간 발가락이 굉장히 길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합니다.)사이고는 당시 아이즈 출신이라면 보통 익혔다는 아이즈의 오토메가 다스리는 지역마다 할당된 고유 유술을 어린 시절부터익혔습니다.아이즈의 오토메 유술은 여러가지 공격 테크닉을 가진 아이즈 비전의 무술로써 그 이름이 높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비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오시키우치라는 기술들인데 이것은 앉은 상태에서 상대를 역관절꺾기로 쓰러뜨리는 기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이는 막부시대에는 대다수의 영주들이 성을 짓고 살았고, 그 성의 영주가 있는 본당 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움직이는 슬행(膝行)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영주가 위급할 때 앉은 상태에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즈 오토메 유술의 오시키우치는 바로 대동류 합기유술의 원조로써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또한 한국 합기도 계의 전설이신 최용술 도주가 익힌 합기유술도 바로 이것이 뿌리이기도 합니다.사이고 시로는 어린시절 아이즈의 비전 오시키우치의 이름난 고수였던 사이고 타노모의 집에서 자랐습니다.호시나 치카노리는 그렇게 지체가 낮은 시로를 어린시절부터 잘 돌봐 주었고 거기다가 아이즈 비전의 오토메유술을 직접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거기다가 유일전승이라는 비전중의 비전인 오시키우치까지 가르쳤는데 시로가 강도관 입문후 2년째인 17세 되던 해에는 양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미국, 캐나다등지의 대동류 합기유술 사이트 등에서는 사이고 시로를 대동류의 마스터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사이고 시로는 대동류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아이즈의 오토메 유술을 익힌 것입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아이즈 번 가로(家老)의 양자가 되다
사이고 시로, 즉 당시 이름,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메이지 17년(1884년), 19세 당시에 옛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 : 에도시대 다이묘의 중신으로서, 다이묘 가문의 업무를 총괄했던 가신 중의 우두머리다.)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西郷頼母近悳)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는 당시에 호시노 치카노리(保科近悳)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므로, 당시에 시다 시로는 호시노 시로로 개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의 조상에 대해서 알아보면,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4남이었던 도쿠가와 마사유키(徳川正之)는 정실의 소생이 아니라, 히데타다의 유모를 섬겼던 시녀 시즈(静)의 아이였습니다. 당시 통례는 정실의 체면과 쇼군의 첩들과 시녀들이 거처하는 오오오쿠(大奥)의 질서 유지를 이유로 서자의 출산을 에도성 외부에서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그래서 시즈라는 시녀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딸이었던 켄쇼인(見性院;아나야마 우메유키 정실(穴山梅雪正室)이다)에게 맡겨졌고, 그곳에서 도쿠가와 마사유키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과거 다케다 가문의 가신, 신슈타카토 번주(信州高遠藩主) 호시노 마사미츠(保科正光)의 양자가 되어 호시노 마사유키(保科正之)가 됩니다. 그리고 마사유키는 아이즈 번의 23만 석에 이르는 초대 번주가 되었습니다.그 신슈타카토 번주 가문 출신이었던 호시나 마사치카(保科正近)라는 인물은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가 됩니다. 마사치카의 장녀는 도쿠가와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후다이(譜代) 다이묘였던 마츠다이라 야스나가(松平康長)의 가신이었던 사이고 신페이(西郷新兵)에게 시집을 가서 사이고 요시쥬로(西郷吉十郎)를 낳았습니다. 이후에 사이고 요시쥬로는 사이고 치카후사(西郷近房)로 개명하지만, 그는 차남이었으며, 외조부였던 호시나 마사치카의 적장자, 즉 외숙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保科正長)가 병약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 입적하여 호시노 치카후사(保科近房)가 됩니다.양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가 사망하여 가로(家老) 직책이었던 호시노 가문을 치카후사가 물려받았는데, 호시노 마사나가의 첩이 아들 호시노 마사오키(保科正興)를 낳았으며 그리고 호시노 마사오키가 성장하여 그에게 가로 직책을 물려주고 치카후사는 다시 자신의 원래 성씨인 사이고(西郷)로 돌아왔습니다.그런데 호시노 마사오키가 아이즈 번의 집안 문제에 휘말려들어 현재의 아가 초(阿賀町) 니쥬츠미즈사와 저수지(日出谷水沢) 지역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번주였던 호시노 마사유키는 호시노 마사오키의 후임 가로(家老)로 사이고 치카후사를 임명했으며 이로써 사이고 치카후사가 아이즈 번의 사이고 가문 초대 가로가 된 것입니다.

또한 아이즈 번의 번조(藩祖), 호시노 마사유키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에게 도쿠가와 가문의 옛 성씨인 마츠다이라(松平) 성씨를 부여받는데,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두어준 호시노 가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호시노 성씨를 사용했으며 아이즈 번의 3대 번주 마사카타(正容)에 이르러서는 호시노에서 마츠다이라로 성씨를 변경하였습니다.그런데 사이고 가문의 먼 조상은 큐슈(九州) 구마모토(熊本)의 키쿠치(菊池) 가문이라고 합니다. 키쿠치 가문 일족이 아리아케 해(有明海)를 건너와 히젠쿠니(肥前国) 타카키군(高来郡) 사이고(西郷) 지역에 성을 세워 스스로를 사이고 가문이라고 불렀으며 더해서 이사하야(諫早)에 진출했지만, 류조지(竜造寺) 가문에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이고(西郷 지역 : 현재의 운젠 시(雲仙市) 미즈호 초(瑞穂町) 사이고(西郷) 지역이다.) 일족은 큐슈 일대로 흩어졌고, 사쓰마(薩摩)로 이동한 사이고 일족들 중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사이고 일족은 미카와(三河)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후손이 아이즈 사이고(会津西郷) 가문입니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실이었던 사이고 우노츠보네(西郷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낳았는데, 그녀는 미카와에 정착한 사이고 가문 출신이었습니다.보신전쟁에서 아이즈 번이 패배하자, 사이고 가문은 대가 끊어진 가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이고 타노모(西郷頼母)는 메이지 3년(1870년)에 조상의 성씨 중 하나인 호시노(保科)로 성을 바꾸었고, 메이지 8년(1875년)에 후쿠시마 현(福島県) 내의 한 신사(神社)의 궁사(宮司)가 되었습니다.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궁사 직책에서 면직되었으며 또한 어머니와 아내, 여동생 2명, 딸 5명을 포함한 일족 21명이 보신전쟁 중에 전원 자택에서 자결했고, 장남 요시쥬로 아리치카(吉十郎有隣)만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메이지 12년(1879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호시노 타노모는 시다 시로, 즉 사이고 시로에게 양자로 입적할 것을 권한 것입니다. 그렇게 메이지 17년(1884년)에 양자가 된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호시노 시로(保科四郎)가 되었는데, 메이지 22년(1889년)에는 정부로부터 사이고 가문의 재흥(再興)을 허가받아 다시 성씨를 변경하여 사이고 시로(西郷四郎)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가노 지고로가 18세때부터 익혔던 무술이 천신진양류였고, 이노우에 쿄타로는 바로 가노의 동문 선배였습니다.인사차 들렀던 가노의 눈에 바로 천재 사이고 시로가 눈에 띄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바로 교수로 임명된 수재이자 천신진양류 최강의 유술가였던 가노 지고로는 사이고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이노우에에게 부탁해 그를 강도관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다다미 12개와 9명의 제자만으로 시작된 강도관으로선 한명의 인재도 아쉬웠던 가노지고로는 더군다나 23세의 어린 나이에 유도라는 신무술을 창안해서 전 유술계를 적으로 돌려버리며 너무나 큰 압박과 부담감 큰 상황에서 사이고같은 어마어마한 인재를 찾은 가노의 기분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가노에게 사이고를 보내준 이노우에 쿄타로는 그 이후에도 요코야마 사쿠지로라는 걸출한 강자를 가노에게 보냅니다. 이 이노우에라는 인물은 천신진양류의 강자들을 강도관에 많이 입관시켰는데,이것은 극도로 폐쇄적인 양심류가 판을 치는 유술계에 변화를 원하는 진보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여러 상황을 조합해 볼때 강도관이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에는 이노우에라는 남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바로 다음해 사이고가 16세 되던 때에 초단을 취득하며 최단시간에 초단을 따내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가노는 자서전에서 사이고에 대해 "메치기의 극한에 달한 남자였다, 나는 그보다 강한 인간을 지금껏 본 일이 없다."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가노 지고로가 익힌 무술은 밧다리 후리기와 깃 조르기를 주무기로하는 천신진양류와 메치기를 주무기로 하는 기도류 유술 이 두가지가 근간이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유술의 체계화를 위해 타유술의 기술들 중에서도 쓸모 있는 것은 다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가노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유술 유파는 도츠가 양심류였고, 누구든 유술로 이름을 날리려면 그걸 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고 합니다.가노는 고류 유술을 배격하면서 유도를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양심류 쪽에서 보면 가노는 정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강도관을 만들기 전에 이미 가노가천신진양류와 기도류 유술의 마스터로써 양심류의 고수를 몇번 격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20세에 불과한 가노 지고로에게 양심류의 고수들이 나가떨어져 버리는 광경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가노 지고로는 18세때부터 무도를 익힌 초짜였지만 가노는 모든 방면에 능한 천재였던 모양입니다.그러나 같은 천신진양류와 기도류에 양심류를 이기는 다른 사람은 없었던 관계로 양심류는 계속 최강의 이름을 유지합니다.또한 가노를 상대로 최고수를 내보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도장끼리 시합은 10명 정도를 내 보내는데, 가노 지고로는 무패였지만 양심류는 압도적으로 이기는 시합에 굳이 가노를 상대로 에이스를 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그러나 강도관이 생기고 가노가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거기에는 강도관 사천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사이고 시로가 입문하기 전에 먼저 입문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는 강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야마다 츠네지와 야마시타 요시카즈(요시츠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입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제2의 고향 나카사키(長崎)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는 강도관(講道館)을 설립한 23세에 가쿠슈인(学習院) 교사로 부임하고, 메이지 19년(1886년) 6월, 27세에 교감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화족(華族) 가문 출신의 자제들 이외, 평민 자제들에게도 가쿠슈인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가노 지고로의 진보적 교육방침은 메이지 21년(1888년) 11월에 취임한 초슈 번(長州藩) 출신의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보수적 교육방침과 대립각을 세워 교감 직책에서 사퇴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가노 지고로는 해외시찰을 목적으로 유럽에 파견됩니다.가노 지고로가 부재중인 메이지 23년(1890년) 6월, 25세였던 사이고 시로는 8년간 몸을 담았던 강도관을 돌연 떠납니다. 떠나면서 지나도항의견서; 支那渡航意見書라는 문서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일본측 자료에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이 가득한 사이고 시로가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했다고 하지만 당시 시대상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와 당시 사이고 시로가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국가주의 우익 조직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과연 일본측 자료에서 주장하는 순수한 목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당시 일본에는 대륙 진출에 낭만을 느낀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도운 구마모토 현(熊本県) 아라오 시(荒尾市) 출신의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사이고 시로는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이고 시로는 강도관을 떠나, 중국으로 도항하기 위해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했는데 이 시기에 옛 아이즈 번사(会津藩士)였던 키타하라 마치나가(北原雅長)가 초대 나가사키 시장으로 취임해있었는데 처음 나가사키에 도착한 사이고 시로가 어디에서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24년(1891년) 12월에 그의 호적을 아오모리 현(青森県)에서 나가사키 시(長崎市) 히가시카미마치(東上町;현재의 타마조노마치; 玉園町다.)27번호로 옮겼습니다.에도 막부 말기, 세토 내해(瀬戸内海)에서 카이엔타이(海援隊)가 오즈 번(大洲藩)에서 대여한 이로하 마루(いろは丸)가 키슈 번(紀州藩)의 군함과 충돌하자 배상교섭을 진행한 쇼후쿠지(聖福寺)가 타마조노마치(玉園町)에 있었습니다.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3년(1914년) 3월, 이마카고마치(今籠町)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 히가시카미 초 27번호에서 계속 거주했으며 56년의 생애 절반 이상을 나가사키에 거주하게 되면서 나가사키가 그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와 깊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메이지 35년(1902년) 1월 1일에 창간된 동양일출신문(東洋日の出新聞)의 편집자로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문 창간 이전에는 일본 열도와 중국대륙을 수차례 건너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고향 츠가와(津川)에 무도장 강무관(講武館)을 설립하고, 센다이(仙台) 제2 고등학교의 3대 유도 사범으로 부임하거나, 쿠루메 시(久留米市)의 난치쿠 사학교(南筑私学校)의 유도 사범으로서 큐슈 유도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진출 야욕을 보이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가지고 조선, 중국,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일 뿐입니다.사이고 시로의 이러한 국제정세 관여도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로, 조선의 정치가 김옥균이 일본 망명 중에 나카사키를 방문했을 때 사이고 시로의 자택에서 은거했다는 사실입니다.김옥균은 1872년, 21세의 나이로 과거 문과에서 장원급제했던 수재였는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고, 그로 인해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펼쳤으며,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종의 처가였던 민씨 세력과의 충돌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6명의 대신을 살해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그보다 열세였던 일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김옥균의 정권은 3일 만에 몰락했고 김옥균은 코코 타케조에(竹添進一郎) 조선공사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습니다.김옥균은 메이지 15년(1882년) 3월부터 4월, 한 달간 나가사키에 머물며 임시 현의회(臨時県会)와 학교 시설 등을 시찰했고, 메이지 16년(1883년) 6월에도 나가사키를 다시 방문하여 나가사키 지역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망명했을 때, 나가사키의 유지가 김옥균과 교류가 있었던 도쿄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저택으로 호위를 붙여서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후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지냈는데,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해 오가사와라(小笠原)와 훗카이도(北海道) 같은 오지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항상 조선 정부가 파견한 자객들에게 목숨이 노려지다가 메이지 27년(1894년) 3월, 중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의논을 나누기 위해 나가사키로 돌아왔고, 상하이로 건너간 직후 호텔에서 명성황후가 파견한 홍종우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김옥균의 모습에 의협심 넘쳤던 사이고 시로 또한 이끌렸다고 일본 사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는데 메이지 24년(1891년)부터 25년(1892년)까지 사이고 시로는 일본에서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동양일출신문의 창간자이자, 동료였던 스즈키 텐간(鈴木天眼)과 함께 의논하여 나가사키 시내의 자택이나 교외의 은신처 등에 은거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사이고 시로는 이후에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쑨원을 지원했다고도 하는데 스즈키 텐간과 함께 동양일출신문을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하고, 현재 나가사키 수영 협회(長崎游泳協会)의 전신이었던 케이호 유영 협회(瓊浦遊泳協会)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나가사키 시내에 설립된 무도장에서 유도를 지도했고, 나가사키의 마네키(まねき)라는 요정(料亭) 집안의 외동딸이었던 나카가와 치카(中川チカ)와 결혼했습니다.
※야마시타 요시카즈는 이후 미국에서 루즈벨트에게 유도를 가르치고, 미군장교들에게도 전수한걸로 알려져 있습니다.강도관 4천왕중 유일하게 10단을 추증받은 인물로 가노 지고로의 유도를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야마다 츠네지(이후 토미다 가의 양자가 되면서 토미다 츠네지로로 개명)이 두명이었습니다. 야마시타는 이미 사범대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고, 야마다 또한 강도관의 분관을 맡고 있던 사범이었습니다.이 둘은 가장 스탠다드하고 교과서적인 유도를 구사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후에 실전 전적보다는 지도자로써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들입니다.이 둘은 강도관 초기에 계속해서 도장깨기를 하러 찾아오는 고류 유술가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결투를 해야했습니다. 가노가 직접 나설 수는 없었는데 타류 유술의 고수들에 비해 월등하다고는 볼 수 없는 실력이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고 시로의 등장으로 형세는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어느 누구도 사이고의 소매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메치기를 당해 날아가는 바람에 스승 가노가 타류 유술을 격파하며 얻었던 최강의 이름을 사이고가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여기다가 이노우에 쿄타로의 천신진양류 도장에서 필살의 던지기인 덴구 던지기로 최강자의 명성을 날리던 요코야마 사쿠지로가 가세하면서 강도관 4천왕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승승장구하면서 강도관 유도의 이름을 조금씩 높이기 시작하게 됩니다.그리고 사이고 시로는 메이지 19년 강도관 5단을 취득, 명실상부한 최고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입관 4년만에 5단을 땄다는 것은 사이고가 그 전에 배웠던 아이즈 오토메유술의 오시키우치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의 강도관은 승단을 하려면 같은 급수의 상대를 7명을 연속으로 상대해 이겨야하는 가혹한 조건이 있었습니다.1단이 되려면 갈색띠 7명을 연속으로 제압해야하는 것입니다.물론 무조건 이겨야하며 무승부는 안되었다고 합니다.후지와라씨의 만화 콘데 코마에서는 한명만 이기면 승단되는 것처럼 해 놓았는데 이것은 고증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작가가 그레이시 유술의 연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유도에 대해선 너무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나가사키에서의 결혼
메이지 23년(1890년) 6월, 24세의 사이고 시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고자 하는 야욕을 가진 것에 근심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낭인으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일본 측 자료에서는 서양 열강으로부터 중국과 조선, 즉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명분의 활동을 벌였다는 해석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을 한국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어디까지나 사이고 시로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판단되며 이러한 대륙 낭인 활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8년간 몸 담았던 강도관을 떠나 대륙으로의 이동에 편리했던 나가사키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인 메이지 24년(1891년) 12월에 자신의 호적지를 양아버지의 호적지였던 아오모리(青森)에서 나가사키(長崎)로 변경하였습니다.중국 대륙에서만 활동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호적을 나가사키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그가 거처를 완전히 대륙으로 옮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가사키에서 정주하며 활동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사이고 시로는 나가사키에서만 장기간 머물지 않고, 일본 후쿠시마(福島), 센다이(仙台), 쿠루메(久留米)를 다니거나, 대만과 중국의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등에도 방문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본격적으로 장기간 머물게 된 것은 메이지 33년(1900년)에 이르러서인데 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3년(1914년) 3월에 이마카고마치(今籠町), 7월에 모토후루카와(本古川町)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이전까지는 히가시카미마치(東上町)에서 약 23년간 머물렀는데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긴야마치(銀屋町)에서 거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예로부터 시안바시(思案橋)에서 가까운 요로즈야마치(万屋町)에 요네하루’(米春)라는 요정(料亭)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23년(1890년)에 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마네키(まねき)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었고 요정의 안주인은 나카가와 킨(中川キン)이라는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이었던 토키 사부로(時三郎)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치카(チカ)라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이고 시로는 이 요정에 방문하여 3살 연하였던 나카가와 치카를 좋아하게 됐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 시기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호적을 아오모리에서 나가사키로 옮긴 메이지 24년(1891년) 12월 전후였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치카와 혼인신고를 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44년 3월이었지만, 사실상 부부로써 일찍이 결혼생활을 했다고 합니다.메이지 33년(1900년) 11월, 34세의 사이고 시로는 당시 생후 3개월이었던 진보 타카유키(神保孝之)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진보 타카유키의 친아버지는 진보 쿠라노스케(神保巌之助)였는데, 옛 아이즈 번사이자 초대 나가사키 시장이었던 키타하라 마치나가의 남동생이었습니다. 맏형은 아이즈 번의 명령을 받고 나가사키에서 유학했던 진보 슈리(神保修理)였는데 진보 쿠라노스케는 고향 아이즈를 떠나서 나가사키에서 살고 있었는데, 메이지 35년(1902년) 4월 5일자 동양일출신문 기사에 따르면, 토마치무라(戸町村)에서 촌장을 했다고 합니다. 토마치(戸町) 출신이었던 아내 키에(幾ヱ)와 사이에서 이미 3남 2녀를 두고 있었는데, 사이고 시로는 새로 출생한 6번째 아이를 양자로 받았습니다.사이고 시로와 나카가와 치카 사이에는 친자녀가 없었고, 사이고 사치코(西郷幸子)라는 양녀가 있었고 덧붙여, 사이고 시로의 장모인 나카가와 킨에게는 미네(ミネ)라는 양녀가 있었는데, 고토(五島) 토미에(富江) 출신의 하마구치 카시로(浜口嘉四郎)와 미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토키하루(時春)가 나카가와 가문을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토키하루는 17세에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폭사했으며 사이고 시로는 말년에 지병 요양을 위해 하마구치 카시로 일가가 거주하고 있던 히로시마 현(広島県) 오노미치 시(尾道市)로 거처를 옮겼고, 그 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유도와 궁도를 지도하다.
“사이고 앞에서는 산바람(山嵐)이 속절없이 불고, 사이고 뒤에서는 산바람이 불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강도관에서 유명세를 탔던 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에 왔다고 해서 유도를 지도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메이지 30년대 후반(1900년대), 사이고 시로는 후쿠시마 쿠마지로(福島熊次郎)라는 인물과 함께 사쿠라마치(桜町)에 다이토 기쥬쿠(大東義塾)라는 유도장을 개설했습니다.나가사키의 스와 체육관(諏訪体育館)의 전신은 무덕전(武徳殿)이었고, 나가사키 시 제 50년사; 長崎市制五十年史라는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메이지 40년(1907년) 6월, 스와 공원 내에 시소유지를 무료로 대여 받아, 시공비 약 1만 9천 엔으로 무덕전 연무장 신축에 착수. 11월 준공. '쥬라이마치'(従来町) 도장 및 학교 등에서 지도했던 유도, 검도, 궁도는 이 무덕전을 중심으로 해마다 발전해나갔으며, 더 나아가 마을 도장의 발전을 촉진시켜 시민들의 심신단련 기관의 보급이 이루어져있다.”
/출처 : 450항; 450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