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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유도 사천왕이자 텐진신요류 쥬쥬츠(천신진양류 유술)의 달인

by 마음heart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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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사천왕이자 텐진신요류 쥬쥬츠(천신진양류 유술)의 달인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



사이고 시로(西郷四郎)는 아이즈 번사(会津藩士)였던 시다 테이지로(志田貞二郎)의 셋째 아들로서 게이오(慶応) 2년(1866년 2월 4일), 아이즈와카마츠(会津若松)에서 출생했습니다. 가문이 세습하여 물려받는 녹봉(祿俸)을 뜻하는 가록(家禄)은 150석이었습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 신정부군이 토호쿠(東北) 지방으로 쳐들어왔는데, 당시 34세였던 그의 아버지 시다 테이지로는 아이즈 번의 주력 부대였던 주작대(朱雀隊)에 편입되어있었습니다.아이즈 번은 게이오 3년(1867년)에 군제를 개편하여 연령별로 중국의 사신(四神)에서 이름을 따온 4개의 부대,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동쪽의 청룡(青竜), 북쪽의 현무(玄武)로 편성하였습니다.테이지로는 주작대의 무사로서 에치고(越後)의 나가오카 번사(長岡藩士)와 함께 나가오카 성(城) 공방전에 참천했고, 그 후에도 에치고 방면의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메이지(明治.원년; 1868년)에 아이즈 번이 항복했기 때문에 에치고의 시오카와(塩川)에서 무장 해제되어 시오카와, 그리고 타카다(高田)에서 유배되어 근신 생활을 하게 됩니다.메이지 3년(1870년 1월)에 근신이 해제되고, 테이지로는 가족이 피난하고 있었던 과거 아이즈 번령의 에치고쿠니(越後国) 칸바라군(蒲原郡) 가쿠시마무라(角嶋村)로 돌아왔습니다.가쿠시마무라는 메이지 22년(1989년)의 마치무라 제도(町村制)에 의해 니가타 현(新潟県) 히가시칸바라 군(東蒲原郡).츠카와 초(津川町)가 되었으며, 헤이세이(平成) 17년(2005년에 마치무라 합병(町村合併) 제도로 인해 아가 초(阿賀町)가 되었다.)많은 아이즈 번사들과 그 가족들이 메이지 3년(1870년)에 옛 남부번령(南部藩領)이었던 혼슈(本州) 북단의 불모지, 토난 번(斗南藩)으로 이주했지만, 시다 가문은 메이지 4년(1871년)에 토난 번으로 가지 않고, 가쿠시마무라에 정착하게 됩니다. 시다 가문은 본디 츠가와 지역의 자시다헤이(字志田平)의 호족 출신으로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테이지로는 일가를 츠가와로 피난시킨 것이라고 합니다.사이고 시로에게는 사실상 이곳이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다 일가가 츠가와에 정착한 바로 그 해, 메이지 5년(1872년)에 사이고 시로의 아버지 시다 테이지로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당시 사이고 시로가 7세때 였습니다.

(좌)근대 유도의 아버지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 1860~1938)(가운데)젊은 시절 사이고 지로(西郷四郎 1866~1922)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도쿄 상경과 강도관 입문

메이지 15년(1882년) 3월, 17세의 사이고 시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사토 요시로(佐藤与四郎)와 함께 도쿄로 상경합니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희망했지만 151cm의 신장이 걸림돌이 되어 입학을 포기하는데 이 때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라는 인물은 같은 해 5월에 에이쇼지(永昌寺)라는 절에서 강도관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의 유술(柔術)과는 다른, 새로운 유도(柔道)라는 것을 절간 한 구석에서 지도하고 있었습니다.사이고 시로는 그 강도관에 일곱 번째로 입문해 에이쇼지에서 지내며 유도 수련에 힘썼는데 가노 지고로는 이 때 당시 23세, 전년도 7월에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 철학(哲学) 정치학(政治学) 이재학과(理財学科)를 졸업한 상태였습니다. 메이지 3년(1870년), 11세 때 해군성에서 근무했던 부친과 함께 현재의 고베 시(神戸市) 히가시나다 구(東灘区)에서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18세에 처음으로 유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텐진신요류(天神真楊流)의 후쿠다 하치노스케(福田八之助)에게 배웠습니다.강도관의 첫 번째 입문자는 야마다 츠네지로(山田常次郎)였는데, 그는 이후에 이즈 시(伊豆市)의 해상운송 도매업자였던 토미타(富田) 가문의 양자가 되어서 토미타 츠네지로(富田常次郎)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토미타 츠네오(富田常雄)는 쇼와(昭和) 17년; 1942년에 소설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를 발표하여 인기 작가로 등극했습니다.이후에 스가타 산시로의 실제 모델이 사이고 시로라는 추측이 널리 퍼져서 사실과 같이 여겨졌지만,정작 작가 토미타 츠네오 본인은 스가타 산시로는 가상의 인물일 뿐이며 결코 사이고 시로가 아니라며, 츠가와에 위치한 사이고 시로의 비문에 이것을 기록하여 부정했다하지만 스가타 산시로의 형제 묘사와 그가 아이즈 출신으로 17세에 도쿄로 상경했다는 설정과 야마아라시(山嵐)라는 기술을 표현한 것까지 사이고 시로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작가 또한 공상 중에 떠오른 산시로의 생애 표현에 있어서 사이고 시로의 모습이 떠오른 것에 대해서는 시인했다고 합니다. 타케와키 무가(竹脇無我)가 연기한 텔레비전 드라마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는 1970년도에 방영되었는데 토미타 츠네지로는 사이고 시로와 함께 강도관 사천왕으로 불렸습니다. 메이지 19년(1886년), 사이고 시로가 21세였을 때,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경시청(警視庁)에서 개최된 무술대회에 명문 유술 유파, 요신류(楊心流)의 토츠카 히코쿠로(戸塚彦九郎) 사범의 수제자 테루시마 타로(照島太郎)를 작은 체구의 사이고 시로가 그의 장기였던 야마아라시로 호쾌하게 던져버린 것입니다. (당시 상대방이 테루시마 타로가 아닌 우케치 엔타로; 好地円太郎였다는 설도 있다.)창시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강도관 유도가 유명 고류 유술 유파를 물리친 것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이렇게 사이고 시로의 활약으로 인해 강도관 유도가 크게 발전하여, 강도관 설립 8년 후인 메이지 23년(1890년)에는 문하생이 1,500여명에 달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의 키는 일본인 중에서도 작은153센티 정도였다는게 정설입니다.그런데 사이고는 남들과는 다른 신체적 특성이 있었는데 바로 사이고의 발가락이 무척 길어 물갈퀴 같았다고 합니다.(곰발톱 같았다는 말도 있고, 문어발과 같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하여간 발가락이 굉장히 길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합니다.)사이고는 당시 아이즈 출신이라면 보통 익혔다는 아이즈의 오토메가 다스리는 지역마다 할당된 고유 유술을 어린 시절부터익혔습니다.아이즈의 오토메 유술은 여러가지 공격 테크닉을 가진 아이즈 비전의 무술로써 그 이름이 높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비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오시키우치라는 기술들인데 이것은 앉은 상태에서 상대를 역관절꺾기로 쓰러뜨리는 기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이는 막부시대에는 대다수의 영주들이 성을 짓고 살았고, 그 성의 영주가 있는 본당 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움직이는 슬행(膝行)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영주가 위급할 때 앉은 상태에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즈 오토메 유술의 오시키우치는 바로 대동류 합기유술의 원조로써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또한 한국 합기도 계의 전설이신 최용술 도주가 익힌 합기유술도 바로 이것이 뿌리이기도 합니다.사이고 시로는 어린시절 아이즈의 비전 오시키우치의 이름난 고수였던 사이고 타노모의 집에서 자랐습니다.호시나 치카노리는 그렇게 지체가 낮은 시로를 어린시절부터 잘 돌봐 주었고 거기다가 아이즈 비전의 오토메유술을 직접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거기다가 유일전승이라는 비전중의 비전인 오시키우치까지 가르쳤는데 시로가 강도관 입문후 2년째인 17세 되던 해에는 양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미국, 캐나다등지의 대동류 합기유술 사이트 등에서는 사이고 시로를 대동류의 마스터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사이고 시로는 대동류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아이즈의 오토메 유술을 익힌 것입니다.
사이고 시로의 도복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아이즈 번 가로(家老)의 양자가 되다

사이고 시로, 즉 당시 이름,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메이지 17년(1884년), 19세 당시에 옛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 : 에도시대 다이묘의 중신으로서, 다이묘 가문의 업무를 총괄했던 가신 중의 우두머리다.)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西郷頼母近悳)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는 당시에 호시노 치카노리(保科近悳)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므로, 당시에 시다 시로는 호시노 시로로 개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의 조상에 대해서 알아보면,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4남이었던 도쿠가와 마사유키(徳川正之)는 정실의 소생이 아니라, 히데타다의 유모를 섬겼던 시녀 시즈(静)의 아이였습니다. 당시 통례는 정실의 체면과 쇼군의 첩들과 시녀들이 거처하는 오오오쿠(大奥)의 질서 유지를 이유로 서자의 출산을 에도성 외부에서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그래서 시즈라는 시녀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딸이었던 켄쇼인(見性院;아나야마 우메유키 정실(穴山梅雪正室)이다)에게 맡겨졌고, 그곳에서 도쿠가와 마사유키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과거 다케다 가문의 가신, 신슈타카토 번주(信州高遠藩主) 호시노 마사미츠(保科正光)의 양자가 되어 호시노 마사유키(保科正之)가 됩니다. 그리고 마사유키는 아이즈 번의 23만 석에 이르는 초대 번주가 되었습니다.그 신슈타카토 번주 가문 출신이었던 호시나 마사치카(保科正近)라는 인물은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가 됩니다. 마사치카의 장녀는 도쿠가와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후다이(譜代) 다이묘였던 마츠다이라 야스나가(松平康長)의 가신이었던 사이고 신페이(西郷新兵)에게 시집을 가서 사이고 요시쥬로(西郷吉十郎)를 낳았습니다. 이후에 사이고 요시쥬로는 사이고 치카후사(西郷近房)로 개명하지만, 그는 차남이었으며, 외조부였던 호시나 마사치카의 적장자, 즉 외숙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保科正長)가 병약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 입적하여 호시노 치카후사(保科近房)가 됩니다.양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가 사망하여 가로(家老) 직책이었던 호시노 가문을 치카후사가 물려받았는데, 호시노 마사나가의 첩이 아들 호시노 마사오키(保科正興)를 낳았으며 그리고 호시노 마사오키가 성장하여 그에게 가로 직책을 물려주고 치카후사는 다시 자신의 원래 성씨인 사이고(西郷)로 돌아왔습니다.그런데 호시노 마사오키가 아이즈 번의 집안 문제에 휘말려들어 현재의 아가 초(阿賀町) 니쥬츠미즈사와 저수지(日出谷水沢) 지역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번주였던 호시노 마사유키는 호시노 마사오키의 후임 가로(家老)로 사이고 치카후사를 임명했으며 이로써 사이고 치카후사가 아이즈 번의 사이고 가문 초대 가로가 된 것입니다.

(좌) 사이고 시로, (우)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

또한 아이즈 번의 번조(藩祖), 호시노 마사유키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에게 도쿠가와 가문의 옛 성씨인 마츠다이라(松平) 성씨를 부여받는데,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두어준 호시노 가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호시노 성씨를 사용했으며 아이즈 번의 3대 번주 마사카타(正容)에 이르러서는 호시노에서 마츠다이라로 성씨를 변경하였습니다.그런데 사이고 가문의 먼 조상은 큐슈(九州) 구마모토(熊本)의 키쿠치(菊池) 가문이라고 합니다. 키쿠치 가문 일족이 아리아케 해(有明海)를 건너와 히젠쿠니(肥前国) 타카키군(高来郡) 사이고(西郷) 지역에 성을 세워 스스로를 사이고 가문이라고 불렀으며 더해서 이사하야(諫早)에 진출했지만, 류조지(竜造寺) 가문에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이고(西郷 지역 : 현재의 운젠 시(雲仙市) 미즈호 초(瑞穂町) 사이고(西郷) 지역이다.) 일족은 큐슈 일대로 흩어졌고, 사쓰마(薩摩)로 이동한 사이고 일족들 중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사이고 일족은 미카와(三河)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후손이 아이즈 사이고(会津西郷) 가문입니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실이었던 사이고 우노츠보네(西郷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낳았는데, 그녀는 미카와에 정착한 사이고 가문 출신이었습니다.보신전쟁에서 아이즈 번이 패배하자, 사이고 가문은 대가 끊어진 가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이고 타노모(西郷頼母)는 메이지 3년(1870년)에 조상의 성씨 중 하나인 호시노(保科)로 성을 바꾸었고, 메이지 8년(1875년)에 후쿠시마 현(福島県) 내의 한 신사(神社)의 궁사(宮司)가 되었습니다.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궁사 직책에서 면직되었으며 또한 어머니와 아내, 여동생 2명, 딸 5명을 포함한 일족 21명이 보신전쟁 중에 전원 자택에서 자결했고, 장남 요시쥬로 아리치카(吉十郎有隣)만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메이지 12년(1879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호시노 타노모는 시다 시로, 즉 사이고 시로에게 양자로 입적할 것을 권한 것입니다. 그렇게 메이지 17년(1884년)에 양자가 된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호시노 시로(保科四郎)가 되었는데, 메이지 22년(1889년)에는 정부로부터 사이고 가문의 재흥(再興)을 허가받아 다시 성씨를 변경하여 사이고 시로(西郷四郎)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가노 지고로가 18세때부터 익혔던 무술이 천신진양류였고, 이노우에 쿄타로는 바로 가노의 동문 선배였습니다.인사차 들렀던 가노의 눈에 바로 천재 사이고 시로가 눈에 띄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바로 교수로 임명된 수재이자 천신진양류 최강의 유술가였던 가노 지고로는 사이고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이노우에에게 부탁해 그를 강도관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다다미 12개와 9명의 제자만으로 시작된 강도관으로선 한명의 인재도 아쉬웠던 가노지고로는 더군다나 23세의 어린 나이에 유도라는 신무술을 창안해서 전 유술계를 적으로 돌려버리며 너무나 큰 압박과 부담감 큰 상황에서 사이고같은 어마어마한 인재를 찾은 가노의 기분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가노에게 사이고를 보내준 이노우에 쿄타로는 그 이후에도 요코야마 사쿠지로라는 걸출한 강자를 가노에게 보냅니다. 이 이노우에라는 인물은 천신진양류의 강자들을 강도관에 많이 입관시켰는데,이것은 극도로 폐쇄적인 양심류가 판을 치는 유술계에 변화를 원하는 진보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여러 상황을 조합해 볼때 강도관이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에는 이노우에라는 남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바로 다음해 사이고가 16세 되던 때에 초단을 취득하며 최단시간에 초단을 따내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가노는 자서전에서 사이고에 대해 "메치기의 극한에 달한 남자였다, 나는 그보다 강한 인간을 지금껏 본 일이 없다."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가노 지고로가 익힌 무술은 밧다리 후리기와 깃 조르기를 주무기로하는 천신진양류와 메치기를 주무기로 하는 기도류 유술 이 두가지가 근간이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유술의 체계화를 위해 타유술의 기술들 중에서도 쓸모 있는 것은 다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가노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유술 유파는 도츠가 양심류였고, 누구든 유술로 이름을 날리려면 그걸 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고 합니다.가노는 고류 유술을 배격하면서 유도를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양심류 쪽에서 보면 가노는 정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강도관을 만들기 전에 이미 가노가천신진양류와 기도류 유술의 마스터로써 양심류의 고수를 몇번 격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20세에 불과한 가노 지고로에게 양심류의 고수들이 나가떨어져 버리는 광경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가노 지고로는 18세때부터 무도를 익힌 초짜였지만 가노는 모든 방면에 능한 천재였던 모양입니다.그러나 같은 천신진양류와 기도류에 양심류를 이기는 다른 사람은 없었던 관계로 양심류는 계속 최강의 이름을 유지합니다.또한 가노를 상대로 최고수를 내보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도장끼리 시합은 10명 정도를 내 보내는데, 가노 지고로는 무패였지만 양심류는 압도적으로 이기는 시합에 굳이 가노를 상대로 에이스를 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그러나 강도관이 생기고 가노가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거기에는 강도관 사천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사이고 시로가 입문하기 전에 먼저 입문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는 강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야마다 츠네지와 야마시타 요시카즈(요시츠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입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제2의 고향 나카사키(長崎)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는 강도관(講道館)을 설립한 23세에 가쿠슈인(学習院) 교사로 부임하고, 메이지 19년(1886년) 6월, 27세에 교감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화족(華族) 가문 출신의 자제들 이외, 평민 자제들에게도 가쿠슈인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가노 지고로의 진보적 교육방침은 메이지 21년(1888년) 11월에 취임한 초슈 번(長州藩) 출신의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보수적 교육방침과 대립각을 세워 교감 직책에서 사퇴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가노 지고로는 해외시찰을 목적으로 유럽에 파견됩니다.가노 지고로가 부재중인 메이지 23년(1890년) 6월, 25세였던 사이고 시로는 8년간 몸을 담았던 강도관을 돌연 떠납니다. 떠나면서 지나도항의견서; 支那渡航意見書라는 문서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일본측 자료에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이 가득한 사이고 시로가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했다고 하지만 당시 시대상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와 당시 사이고 시로가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국가주의 우익 조직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과연 일본측 자료에서 주장하는 순수한 목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당시 일본에는 대륙 진출에 낭만을 느낀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도운 구마모토 현(熊本県) 아라오 시(荒尾市) 출신의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사이고 시로는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이고 시로는 강도관을 떠나, 중국으로 도항하기 위해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했는데 이 시기에 옛 아이즈 번사(会津藩士)였던 키타하라 마치나가(北原雅長)가 초대 나가사키 시장으로 취임해있었는데 처음 나가사키에 도착한 사이고 시로가 어디에서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24년(1891년) 12월에 그의 호적을 아오모리 현(青森県)에서 나가사키 시(長崎市) 히가시카미마치(東上町;현재의 타마조노마치玉園町.)27번호로 옮겼습니다.에도 막부 말기, 세토 내해(瀬戸内海)에서 카이엔타이(海援隊)가 오즈 번(大洲藩)에서 대여한 이로하 마루(いろは丸)가 키슈 번(紀州藩)의 군함과 충돌하자 배상교섭을 진행한 쇼후쿠지(聖福寺)가 타마조노마치(玉園町)에 있었습니다.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3년(1914년) 3월, 이마카고마치(今籠町)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 히가시카미 초 27번호에서 계속 거주했으며 56년의 생애 절반 이상을 나가사키에 거주하게 되면서 나가사키가 그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와 깊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메이지 35년(1902년) 1월 1일에 창간된 동양일출신문(東洋日の出新聞)의 편집자로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문 창간 이전에는 일본 열도와 중국대륙을 수차례 건너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고향 츠가와(津川)에 무도장 강무관(講武館)을 설립하고, 센다이(仙台) 제2 고등학교의 3대 유도 사범으로 부임하거나, 쿠루메 시(久留米市)의 난치쿠 사학교(南筑私学校)의 유도 사범으로서 큐슈 유도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동양일출신문사 창립 당시 기념사진 (좌측 끝 2열에 사이고 시로가 있다.)

그리고 아시아에 진출 야욕을 보이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가지고 조선, 중국,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일 뿐입니다.사이고 시로의 이러한 국제정세 관여도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로, 조선의 정치가 김옥균이 일본 망명 중에 나카사키를 방문했을 때 사이고 시로의 자택에서 은거했다는 사실입니다.김옥균은 1872년, 21세의 나이로 과거 문과에서 장원급제했던 수재였는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고, 그로 인해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펼쳤으며,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종의 처가였던 민씨 세력과의 충돌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6명의 대신을 살해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그보다 열세였던 일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김옥균의 정권은 3일 만에 몰락했고 김옥균은 코코 타케조에(竹添進一郎) 조선공사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습니다.김옥균은 메이지 15년(1882년) 3월부터 4월, 한 달간 나가사키에 머물며 임시 현의회(臨時県会)와 학교 시설 등을 시찰했고, 메이지 16년(1883년) 6월에도 나가사키를 다시 방문하여 나가사키 지역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망명했을 때, 나가사키의 유지가 김옥균과 교류가 있었던 도쿄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저택으로 호위를 붙여서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후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지냈는데,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해 오가사와라(小笠原)와 훗카이도(北海道) 같은 오지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항상 조선 정부가 파견한 자객들에게 목숨이 노려지다가 메이지 27년(1894년) 3월, 중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의논을 나누기 위해 나가사키로 돌아왔고, 상하이로 건너간 직후 호텔에서 명성황후가 파견한 홍종우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김옥균의 모습에 의협심 넘쳤던 사이고 시로 또한 이끌렸다고 일본 사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는데 메이지 24년(1891년)부터 25년(1892년)까지 사이고 시로는 일본에서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동양일출신문의 창간자이자, 동료였던 스즈키 텐간(鈴木天眼)과 함께 의논하여 나가사키 시내의 자택이나 교외의 은신처 등에 은거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사이고 시로는 이후에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쑨원을 지원했다고도 하는데 스즈키 텐간과 함께 동양일출신문을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하고, 현재 나가사키 수영 협회(長崎游泳協会)의 전신이었던 케이호 유영 협회(瓊浦遊泳協会)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나가사키 시내에 설립된 무도장에서 유도를 지도했고, 나가사키의 마네키(まねき)라는 요정(料亭) 집안의 외동딸이었던 나카가와 치카(中川チカ)와 결혼했습니다.

※야마시타 요시카즈는 이후 미국에서 루즈벨트에게 유도를 가르치고, 미군장교들에게도 전수한걸로 알려져 있습니다.강도관 4천왕중 유일하게 10단을 추증받은 인물로 가노 지고로의 유도를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야마다 츠네지(이후 토미다 가의 양자가 되면서 토미다 츠네지로로 개명)이 두명이었습니다. 야마시타는 이미 사범대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고, 야마다 또한 강도관의 분관을 맡고 있던 사범이었습니다.이 둘은 가장 스탠다드하고 교과서적인 유도를 구사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후에 실전 전적보다는 지도자로써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들입니다.이 둘은 강도관 초기에 계속해서 도장깨기를 하러 찾아오는 고류 유술가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결투를 해야했습니다. 가노가 직접 나설 수는 없었는데 타류 유술의 고수들에 비해 월등하다고는 볼 수 없는 실력이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고 시로의 등장으로 형세는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어느 누구도 사이고의 소매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메치기를 당해 날아가는 바람에 스승 가노가 타류 유술을 격파하며 얻었던 최강의 이름을 사이고가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여기다가 이노우에 쿄타로의 천신진양류 도장에서 필살의 던지기인 덴구 던지기로 최강자의 명성을 날리던 요코야마 사쿠지로가 가세하면서 강도관 4천왕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승승장구하면서 강도관 유도의 이름을 조금씩 높이기 시작하게 됩니다.그리고 사이고 시로는 메이지 19년 강도관 5단을 취득, 명실상부한 최고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입관 4년만에 5단을 땄다는 것은 사이고가 그 전에 배웠던 아이즈 오토메유술의 오시키우치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의 강도관은 승단을 하려면 같은 급수의 상대를 7명을 연속으로 상대해 이겨야하는 가혹한 조건이 있었습니다.1단이 되려면 갈색띠 7명을 연속으로 제압해야하는 것입니다.물론 무조건 이겨야하며 무승부는 안되었다고 합니다.후지와라씨의 만화 콘데 코마에서는 한명만 이기면 승단되는 것처럼 해 놓았는데 이것은 고증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작가가 그레이시 유술의 연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유도에 대해선 너무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나가사키에서의 결혼

메이지 23년(1890년) 6월, 24세의 사이고 시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고자 하는 야욕을 가진 것에 근심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낭인으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일본 측 자료에서는 서양 열강으로부터 중국과 조선, 즉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명분의 활동을 벌였다는 해석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을 한국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어디까지나 사이고 시로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판단되며 이러한 대륙 낭인 활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8년간 몸 담았던 강도관을 떠나 대륙으로의 이동에 편리했던 나가사키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인 메이지 24년(1891년) 12월에 자신의 호적지를 양아버지의 호적지였던 아오모리(青森)에서 나가사키(長崎)로 변경하였습니다.중국 대륙에서만 활동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호적을 나가사키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그가 거처를 완전히 대륙으로 옮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가사키에서 정주하며 활동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사이고 시로는 나가사키에서만 장기간 머물지 않고, 일본 후쿠시마(福島), 센다이(仙台), 쿠루메(久留米)를 다니거나, 대만과 중국의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등에도 방문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본격적으로 장기간 머물게 된 것은 메이지 33년(1900년)에 이르러서인데 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3년(1914년) 3월에 이마카고마치(今籠町), 7월에 모토후루카와(本古川町)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이전까지는 히가시카미마치(東上町)에서 약 23년간 머물렀는데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긴야마치(銀屋町)에서 거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이고 시로의 나가사키 거주 당시 거처가 있었던 장소

나가사키에는 예로부터 시안바시(思案橋)에서 가까운 요로즈야마치(万屋町)에 요네하루’(米春)라는 요정(料亭)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23년(1890년)에 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마네키(まねき)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었고 요정의 안주인은 나카가와 킨(中川キン)이라는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이었던 토키 사부로(時三郎)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치카(チカ)라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이고 시로는 이 요정에 방문하여 3살 연하였던 나카가와 치카를 좋아하게 됐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 시기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호적을 아오모리에서 나가사키로 옮긴 메이지 24년(1891년) 12월 전후였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치카와 혼인신고를 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44년 3월이었지만, 사실상 부부로써 일찍이 결혼생활을 했다고 합니다.메이지 33년(1900년) 11월, 34세의 사이고 시로는 당시 생후 3개월이었던 진보 타카유키(神保孝之)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진보 타카유키의 친아버지는 진보 쿠라노스케(神保巌之助)였는데, 옛 아이즈 번사이자 초대 나가사키 시장이었던 키타하라 마치나가의 남동생이었습니다. 맏형은 아이즈 번의 명령을 받고 나가사키에서 유학했던 진보 슈리(神保修理)였는데 진보 쿠라노스케는 고향 아이즈를 떠나서 나가사키에서 살고 있었는데, 메이지 35년(1902년) 4월 5일자 동양일출신문 기사에 따르면, 토마치무라(戸町村)에서 촌장을 했다고 합니다. 토마치(戸町) 출신이었던 아내 키에(幾ヱ)와 사이에서 이미 3남 2녀를 두고 있었는데, 사이고 시로는 새로 출생한 6번째 아이를 양자로 받았습니다.사이고 시로와 나카가와 치카 사이에는 친자녀가 없었고, 사이고 사치코(西郷幸子)라는 양녀가 있었고 덧붙여, 사이고 시로의 장모인 나카가와 킨에게는 미네(ミネ)라는 양녀가 있었는데, 고토(五島) 토미에(富江) 출신의 하마구치 카시로(浜口嘉四郎)와 미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토키하루(時春)가 나카가와 가문을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토키하루는 17세에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폭사했으며 사이고 시로는 말년에 지병 요양을 위해 하마구치 카시로 일가가 거주하고 있던 히로시마 현(広島県) 오노미치 시(尾道市)로 거처를 옮겼고, 그 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유도와 궁도를 지도하다.

“사이고 앞에서는 산바람(山嵐)이 속절없이 불고, 사이고 뒤에서는 산바람이 불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강도관에서 유명세를 탔던 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에 왔다고 해서 유도를 지도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메이지 30년대 후반(1900년대), 사이고 시로는 후쿠시마 쿠마지로(福島熊次郎)라는 인물과 함께 사쿠라마치(桜町)에 다이토 기쥬쿠(大東義塾)라는 유도장을 개설했습니다.나가사키의 스와 체육관(諏訪体育館)의 전신은 무덕전(武徳殿)이었고, 나가사키 시 제 50년사; 長崎市制五十年史라는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메이지 40년(1907년) 6월, 스와 공원 내에 시소유지를 무료로 대여 받아, 시공비 약 1만 9천 엔으로 무덕전 연무장 신축에 착수. 11월 준공. '쥬라이마치'(従来町) 도장 및 학교 등에서 지도했던 유도, 검도, 궁도는 이 무덕전을 중심으로 해마다 발전해나갔으며, 더 나아가 마을 도장의 발전을 촉진시켜 시민들의 심신단련 기관의 보급이 이루어져있다.”

/출처 : 450항; 450貢

사이고 시로의 유도장 또한 여기서 언급된 마을 도장 중 하나였는데 사이고 시로는 무덕전에서도 유도를 지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덕전이 건설된 그 자리에 사이고 시로가 그 전에 마을 도장을 개관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나가사키 지국에서 집필하고 발행한 메이지 100년 나가사키 현의 걸음; 明治百年 長崎県の歩み의 내용에 따르면, 사이고 시로는 나가사키 공원 뒤의 다테야마(立山)에 나가사키 강도관이라는 유도장을 개관했다고 합니다.당시의 일화 가운데, 한밤중에 사이고 시로가 어두운 나가사키 시내를 걸어 다닐 때, 갑작스럽게 다수의 장정들이 달려드는 일들이 빈번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이고 시로의 유도를 시험해보려는 무리들의 어둠 속 기습으로 이것을 사이고 시로는 재미있어했고, 어젯밤에도 노상강도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이야기했다고 합니다.또한 메이지 100년 나가사키 현의 걸음; 明治百年 長崎県の歩み에서는 아래와 같은 일화를 추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심한 밤, '이마카고마치'(今籠町) '반자이데이'(万歳亭)에서 ‘오가타 사다이치’(小方定一)가 크게 취한 사이고 시로를 껴안고 이동하는데, '모토시쿠이마치'(本石灰町)에서 '시안바시'(思案橋)로 접어들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한명의 일본인 인력거꾼이 6~7명의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고 시로는 만취한 상태에서 곧바로 뛰어들어 인력거꾼을 구해서 일으켜 세웠고, 구타한 외국인 중 한명의 옷깃을 갑작스럽게 잡아서 ‘야마아라시’(山嵐)를 완벽히 걸었다.

올려다볼 정도의 거한을 난간 넘어 강물 속으로 집어던졌다.외국인들은 맹수처럼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사이고 시로에게 달려들었다. 사이고 시로는 만취한 상태였던 만큼, 당황한 오가타 사다이치는 당시 '카지아마치'(鍛冶屋町)에 위치했던 동양일출신문사의 스즈키 텐간을 부르기 위해 다녀왔지만, 되돌아와 확인해보니, 다리 위에는 이전의 외국인이 한명도 보이질 않았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하카마 자락을 걷어내고 있는 사이고 시로만이 보였다. 절도 있는 야마아라시가 연발로 들어가자, 외국인들은 모두 강물에 빠진 것이다. '시안바시'(思案橋)에서의 이 사건은 당시 나가사키 전역에서 화제였다고 한다."

사이고 지로

사이고 시로는 유도뿐만 아니라 궁도 실력 또한 상당했다고 하는데 다이쇼 2년(1913)년에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徳会)로부터 일본 7번째 궁도범사(弓道範士) 호칭을 수여받았습니다. 나가사키 시립 나가사키상업고등학교(長崎市立長崎商業高等学校)의 전신은 나가사키 상업학교(長崎商業学校)였는데 과거에는 이라바야시(伊良林)에 학교가 있었는데, 사이고 시로는 이 학교의 궁도강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상업학교 90주년 기념으로 발행된 장상군상; 長商群像에 게재된 다이쇼 9년(1920년) 졸업생, 이쿠시마 히데토시(生島秀利)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나이는 꽤 드셨지만, 엄격한 지도였습니다. ‘잘 봐라.’라고 이야기하시며 스스로 시범을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말없이 가만히 우리의 연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도츠카 히데키는 최종 승부를 내기로 결전장을 보내고 가노는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비밀병기로 요코야마 사쿠지로를 데려 온 것입니다.1886년(1890년이후라는 설도 있음) 무코우가오카의 야요이 신사에서 경시청 주최로 양대세력의 대결이 대회형식으로 치뤄지게 됩니다.원래는 두게임만 약속되어 있었는데 야마다와 야마시타가 간단히 승리를 해 버리고 맙니다.야마다와 야마시타는 사천왕중에서는 약하다는 평을 받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간단히 이겨버리자 경시청 유술대회를 구경온 사람들에게 강도관의 이름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게 됩니다.여담이지만 당시 일본의 결투 관습이 보통 2명으로 싸우자고 하면 그것은 4~5명의 대결을 의미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그냥 형식적으로는 간단한 친선대회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지만 한 두명이 패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4~5명까지 붙이는 걸로 늘어나고 마지막에 에이스들끼리 끝장을 봐야하는 스타일이 유행이었다고 하기도 합니다.이에 자존심이 상한 도츠카 히데키는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내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경시청의 유술총감을 맡고 있었던 유술 최강자중 하나인 나카무라 한스케(양심류의 분파인 양이심두류의 마스터였다고 합니다.)였습니다. 키가 180cm,몸무게가 90kg가 되는 당시 일본으로써는 거한중의 거한이라 할만한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가노는 히데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걸 미리 간파하고 있었기에 아껴두었던 비밀병기 요코야마를 내보냅니다. 요코야마 또한 나카무라와 마찬가지로 거한이었기에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볼만한 것이었다 합니다.요코야마는 가장 파워풀한 유도를 구사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특히 그의 필살기였던 덴구던지기(어깨로 들어메치기와 유사한 기술)는 한번 걸리면 무조건 상대가 실신하게 될 정도의 파괴력이 있는 것이었데 그러나 상대는 당대 최고수중의 한명이었고, 덴구던지기의 특성상 준비동작이 크기 때문에 쉽게 간파되어, 그 기술은 먹히지 않았다고 합니다.반면에 나카무라 또한 계속 기술을 걸려고 했지만 요코야마는 그야말로 바윗덩어리 같은 중심을 가지 사나이라 꿈쩍도 안했다고 합니다.서로 당신기(급소 가격기)까지 날려가면서 기술을 넣어보려 하지만 둘의 실력이 거의 대등한 관계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무도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시청 무술총감이라는 엄청난 지명도를 가진 나카무라를 상대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 요코야마의 모습에 당시의 일본 무술계 인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게다가 요코야마는 20대 초반의 무도가였습니다. 요코야마의 나이만큼 유술 수련에 정진했던 30세의 백전노장 나카무라가 그정도까지 고전을 한 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고 둘의 싸움은 무려 1시간이나 끌었다고 하는데 이를 심판이 중지시켜 무승부가 되고 맙니다. 나카무라와 요코야마는 둘다 내려오자마자 탈진해 쓰러져 버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동양일출신문사 창설

메이지 35년(1902년) 1월 1일, 동양일출신문(東洋日の出新聞)이 10명의 사원들에 의해 창간되었는데 스즈키 텐간(鈴木天眼)이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지만, 사이고 시로 또한 이 신문사의 창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여,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스즈키 텐간은 니혼마츠 번사(二本松藩士)였던 스즈키 슈우(鈴木習)의 장남으로 게이오 3년(1867년)에 태어났는데 그는 일진회를 후원하여 한일병합의 원흉이 되는 코쿠류카이(黑龍會;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와 함께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동학당의 전봉준과 접촉하기도 한 텐유쿄(天佑俠; 천우협)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만큼, 당시 일본 국수주의 지식인 중 일부였습니다.스즈키 텐간은 메이지 13년(1880년)에 옛 아이즈 번사였던 쿠사카 요시오(日下義雄)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친구의 소개로 쿠사카 요시오의 제자가 되고, 메이지 19년(1886년)에 스승 쿠사카 요시오가 나가사키 현령으로 부임하자 스승을 따라서 나가사키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스즈키 텐간은 고토(五島)의 토미에마치(富江町) 출신인 오코치 타미(大河内タミ)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니혼마츠 번은 현재 도호쿠 지방에 있었던 31개의 번들에 의한 오우에츠 렛판 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 포함되어 보신전쟁에서는 아이즈 번과 함께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니혼마치 번의 쇼넨타이(少年隊)는 아이즈 번의 백호대(白虎隊)와 함께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니혼마츠 번은 아이즈 번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후쿠시마 현에 있었는데 후쿠시마 현에는 니혼마츠 시(二本松市)가 있었는데 사이고 시로는 스즈키 텐간과 평생 친구로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사이고 시로와 함께 스즈키 텐간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했던 인물이 사이타마 현(埼玉県) 출신의 후쿠시마 쿠마지로였는데 이 인물은 사이고 시로와 함께 강도관에서 유도를 수련했습니다. 나가사키에 와서는 사이고 시로와 함께 시내에 유도장을 개관했으며 후쿠시마 쿠마지로는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에 대만에서 대만일일신문(台湾日日新聞)을 창간했었습니다. 동양일출신문의 창간자 10인 중에는 당시 유명 한학자였던 니와 칸잔(丹羽翰山)도 있었는데 당시 나가사키에는 나가사키 신보(長崎新報), 친제이 일보(鎮西日報), 큐슈 일출 신문(九州日の出新聞) 등과 같은 신문사가 있었습니다. 큐슈 일출 신문은 메이지 31년(1898년)에 창간되었는데, 창간 당시 3인의 사장 중 한명이 스즈키 텐간이었지만 내부 사정으로 스즈키 텐간은 퇴사했고, 메이지 35년(1902년)에 동양일출신문을 창간했습니다.메이지 44년(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당시에 사이고 시로는 신문 발행인 겸 인쇄인이라고 동양일출신문 1면에 기록되어있습니다. 10월 10일에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사이고 시로는 카스가마루(春日丸)라는 배를 타고 나가사키 항에서 중국으로 떠났으며 중국 특파원으로 취재하며 16차례나 기사를 보내왔습니다.

다이쇼 13년(1924년) 8월 11일자 동양일출신문사

최초의 기사는 10월 25일에 작성된 상하이로부터(上海より)라는 제목의 기사가 10월 30일자 신문 1면에 실린 것으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혁명이 일어나자 상하이 시민들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것으로 묘사되어있는데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메이지 45년(1912년) 1월 1일에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러나 쑨원은 4월 1일에 임시대총통 직에서 사임하고, 당시 군부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쑨원은 다이쇼 2년(1913년) 2월 2일, 일본을 방문하였고, 3월 21일에는 나가사키에 도착,여관 후쿠시마야(福島屋)에서 머물고, 그 다음날인 3월 22일에 후쿠로마치(袋町)의 청년회관에서 세계의 평화와 기독교(世界の平和と基督教)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이후에는 훗켄 회관(福建会館; 현재는 나가사키 시 지정 유형 문화재로 등재되어있다.)에서 중국인 오찬회에 참석하고, 후루카와마치(古川町)에 있었던 스즈키 텐간의 자택을 방문했습니다.이때 스즈키 텐간 자택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 남아있는데, 중절모를 쓴 쑨원의 좌우에 텐간 부부내외가 서있었고, 텐간의 옆에 사이고 시로가 위치해있는데 당시 사이고 시로는 47세였습니다.

양심류는 결국 최강중의 최강이라는 테루지마 신타로(쿄타로라는 자료도 있고 그냥 타로라는 자료도 있음,테루지마라는 성도 불확실하지만 몇가지 문헌에서 언급을 하고 있음)를 내세우게 되는데 이를 맞상대한 것이 바로 강도관 최강의 남자 사이고 시로였습니다.거구에 장신이었던 테루지마는 사이고를 메치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 계속되는 사이고의 중심잡기 때문에 메쳐지지가 않았다고 합니다.사이고는 평소 낙법을 연마하기 위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보통의 낙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그래서 사이고의 별명도 고양이었다고 합니다.던지려는 순간에 몸을 회전시켜 두발로 서 버렸다고 합니다.계속 메치기가 실패해서 당황한 테루지마가 주춤한 순간에,사이고는 갑자기 좌자연체로 기본서기를 바꿉니다.유도를 하시는 분들은 좌자연체, 우자연체 같은 용어는 익히 아시겠습니다만,자연체라는 건 별것 아닙니다. 그냥 서있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 기술을 걸때의 방향과 디딤발을 자연체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것이 보통입니다.) 본래 우자연체로 계속 시합을 했던 탓에 그쪽 방어만을 생각하던 테루지마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굳어버리게 되는데, 그 순간 갑자기 공중에 떠서 날아가 버립니다. 당시에 구경 온 모든 무술가 및 구경꾼들은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메치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이것이 사이고 시로의 필살기 중의 필살기 야마아라시였던 것입니다. 이 야마아라시에 테루지마는 그대로 실신해 버리게 됩니다.더군다나 사이고의 야마아라시는 상대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확실히 감아서 측방낙법을 쓰지 못하도록 고안된 철저한 공격용 메치기였기 때문에,그는 몇일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이고 시로의 필살기 야마아라시란,

의미는 산폭풍이라는 뜻인데,상대의 다리를 발바닥으로 차면서 발가락으로 그 찬다리가 빠지지 않도록 꽉 쥔뒤 계속해서 뒤로 차올리면서 앞으로 메쳐버리는 기술입니다.메치기 방어의 기본인 좌우 이동을 봉쇄해 버리기 때문에 걸렸다하면 나가 떨어졌다고 합니다.사이고 시로 이후 아무도 쓴 일이 없고 본만 남아있는 환상의 메치기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발가락이 평범한 사람이 쓸 기술이 아니며 타이밍 잡기도 무척 어렵기에 천재 사이고 시로조차도 몇년이나 피를 토해가며 연마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끊어먹은 도복띠만해도 엄청났다고 합니다.후지와라의 만화 콘데 코마에 보면 발가락으로 상대의 다리 정면을 붙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그림으로 야마아라시는 비스듬하게 옆으로 차서 발가락으로 장단지 아랫쪽을 옆으로 잡아 올린 뒤 메치는 기술입니다. 후지와라의 베스트 셀러 권아에서의 팔극권 고증까지 의심하게되는 부분입니다. 또 마에다 미츠요가 야마아라시를 쓰는게 나오는데, 마에다는 야마아라시를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사이고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불리던 마에다 미츠요지만 야마아라시는 타고난 신체조건도 상당히 작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쑨원(좌), 스즈키 텐간(중), 사이고 시로(우)

동양일출신문사 옆에는 타카라야(寶屋)라는 요정(料亭)이 있었고, 요정의 현관 옆 창고에서는 중국의 혁명을 위한 폭탄제조가 이루어졌습니다.스즈키 텐간의 남동생 스즈키 몬이치(鈴木聞一)는 니혼마츠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동양일출신문에서 사원으로 재직했습니다. 쇼와 16년(1941년) 5월 20일자에 출간된 나가사키 일일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고를 전했는데“메이지 41년(?); 1908년(?) 여름 쯤에 쑨원 총통이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함께 갑자기 나가사키에 방문하여 텐간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그 당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운영하던 폭탄제조공장은 아부라야마치(油屋町)의 타카라야 요정의 창고였습니다. (현재 타츠지로 하시모토 귀족원 의원저; 橋本辰二郎貴族院議員邸)쑨원 선생은 은거생활이 너무 따분하여 몰래 비단으로 된 홑옷을 입고 텐간의 자택으로 놀러왔는데, 쑨원 선생은 중국인 고유의 버릇으로 옷을 걸쳐 입고 와서 몇 번이나 소매치기 위협의 주의를 받았습니다. 일본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그의 변명을 듣는 것도 아주 재밌었는데다 위대한 영웅도 움막집에서 지냈으니, 중국인들을 한번쯤 두고봐야할 필요가 있는데 그 창고 움막집은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었는데, 신문에는 쑨원 총리 은신처는 당시의 타카라야 창고라고 소개되어있습니다.

▦강도관 유도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_케이호 유영 협회를 설립하다

메이지 36년(1903년) 7월, 동양일출신문사가 설립 모체가 되어 케이호 유영 협회(瓊浦游泳協会)가 설립되었는데 사이고 시로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 고문으로는 나가사키 현지사, 회장에는 나가사키 시장, 이사에는 아와지야 토미사부로(倉場富三郎)와 함께 사이고 시로도 취임했으며 사무원으로 동양일출신문 사원 4명도 취임했습니다.협회 설립취지서 또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 설립취지서에는 서명이 없지만, 사이고 시로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해국(海国)의 사람은 물을 뿌리로 삼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 세상은 대양(大洋)을 능가하여 세계를 활보할 때야, 국방식산(国防殖産), 통교(通交) 모두가 물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고, 능히 노도(怒涛)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광란(狂瀾)에 빠지지 않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유영(游泳)의 기술을 몸에 익히기 때문이다. 능히 기술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이를 훈련해야 한다

(좌)사이고 시로의 묘(우)사이고 시로의 현창비

케이호 유영 협회가 유영장으로 선정한 장소는 나가사키 항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 네즈미시마(ねずみ島)였는데 네즈미시마는 나가사키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해수욕장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유영법은 고보리류(小堀流)의 것으로, 매년 여름 회원들을 대상으로 수영 훈련이 진행되었습니다. 협회 설립 2년 뒤였던 1938년부터 네즈미시마와 후카호리(深堀) 사이를 이동하는 유영 경기가 개최되었는데 다이쇼 2년(1913년), 협회의 명칭은 나가사키 유영 협회(長崎游泳協会)로 변경되었는데 다이쇼 3년(1914년) 8월, 제1회 아리아케 해 횡단 유영(第1回有明海横断遊泳)이 진행되었는데, 사이고 시로는 이 당시에 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시마바라(島原)의 타케시마(猛島)을 출발하여 쿠마모토(熊本)의 나가스(長洲)를 목적지로 출발했지만, 도착 직전에 큰 역류에 휩쓸려서 9시간 30분의 여정 끝에 실패했습니다. 다이쇼 5년(1916년)에 제2회 아리아케 해 횡단 유영(第2回有明海横断遊泳)을 실시했는데, 이때는 전체 참가 선수 14명 중, 10명이 완주했는데 도착까지 6시간 5분의 시간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이 완주는 나가사키 유영 협회를 한순간에 전국구 유명세를 떨치게 했습니다.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11년(1922년) 12월 23일, 오노미치(尾道)에서 류머티즘 때문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장례는 나가사키 시(長崎市) 테라마치(寺町)의 코타이지(晧台寺)에서 동양일출신문사 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유골은 다이코지(大光寺)에 위치한 처갓집 나카가와 가문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나가사키 유도 협회는 쇼와 44년(1969년) 10월에 나가사키 시의 스와체육관 부지에 사이고 시로 현창비(顕彰碑)를 건립함과 동시에 나카가와 가문 묘지에 사이고 시로의 묘비를 세웠습니다.사이고 지로는 브라질리언 주짓수와 일본의 고류 유술, 그리고 강도관 유도의 연결고리이자, 핵심적인 인물 중의 한명이 바로 강도관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와 조금은 생소하지만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일본 유도사의 핵심인물 사이고 시로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사이고 시로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시로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

1886년의 결투로 완전히 밀려버린 도츠카 양심류는 1887년에 절치부심,자신들의 대회를 통해 뽑은 최강의 강자 우케치 엔타로를 필두로 강도관과 열명씩의 선발을 내세워 다시한번 겨루게 되는데 이 승부에서 강도관 4천왕은 모두 승리를 거두고, 양심류는 3명의 무승부 외엔 전패를 하는 참담한 패배를 겪게 되면서 완전히 몰락합니다. 특히 양심류의 마지막 희망이던 우케치 엔타로는 사이고 시로에게 1분여만에 야마아라시의 제물이 되어 실신하고 말았다고 합니다.강도관은 이로써 명실 상부한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일본 최대의 무도조직으로 급부상합니다. 사이고 시로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사이고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합니다.기무라 마사히코의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여기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무렵 동경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가노 지고로는 학장과의 마찰로 유학을 강제로 가게 되는데 관장대리로 사이고를 임명합니다.명실상부한 가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셈입니다.

※베스트셀러 소설로 다시 태어난 강도관 최고의 천재 사이고 시로

강도관 사천왕중 한명이었고 마에다 미츠요와 미국으로 떠난 일이 있었던 토미다 츠네지로는 그의 아들에게 사이고 시로의 강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줬다고 합니다.강도관 최강의 남자였고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 유도의 천재 이야기를 말입니다.토미다 츠네지로의 아들 토미다 츠네오는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합니다. 무적의 야마아라시를 날리는 그야말로 폭풍같았던 최강의 유도가의 전설을 다시 부활시킨 것인데 그것이 바로 소설-스가타 산시로였습니다.이 소설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전후에는 신화적인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화하게 됩니다.세계 최고의 거장에 속하는 구로자와 감독의 데뷔작이 바로 이 스가타 산시로였다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수도관이라는 유도장의 야노 타다시 고로(가노 지고로가 모델)라는 관장이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싸워나가는 것이 주된 골격이며, 스가타 산시로는 바로 그 수도관의 에이스로 등장합니다. 이 소설속의 스가타 산시로는 사이고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역시 압권이라 할만한 것은 스가타 산시로가 야마아라시를 구사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여담이지만 이 소설과 영화에서 가라데를 구사하는 악당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가라데에 대한 일본인들의 나쁜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상대를 보호해주는 방법도 갖춘 유도와는 달리 상대를 때려서 직접 부숴버리는 가라데는 그들의 입장에선 야만적인 무도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최영의님의 공수도 교본에 보면 "스가타 산시로로 인해 가라데의 인식이 결정적으로 나빠졌다,그렇지만 공수가가 유도가에게 그렇게 진 적은 없다!"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오키나와 가라데를 처음 일본으로 초청한 것이 가노 지고로였고,일본에 가라데라는 무술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키나와 강유류 사범들의 강도관 연무 이후라고 합니다.실제 가노 지고로 본인은 가라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스가타 산시로는 그 속편까지 등장하게 됩니다.그리고 1981년 후지 tv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하게 됩니다.이 소설과 영화가 등장한 이후,일본에서는 최강의 유도고수에게 '스가타 산시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만화 군계 19권을 보면 유도 천재에게 헤이세이의 산시로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헤이세이시대의 스가타 산시로라는 뜻으로,최강의 유도고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유술 소년의 이름도 산시로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만화 중간에 "누가 산시로인지 가려보자!"라는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누가 스가타 산시로의 칭호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자는 의미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바꿔말하면 헤이세이의 사이고 시로를 가리자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그만큼 사이고 시로가 유도사에서는 거대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으로 아무리 기무라 마사히코같은 사람들이 대단했다고 해도, "누가 이시대의 기무라인지 가려보자!라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만큼 강도관 최강의 사나이였던 사이고 시로는 이후의 유도와 유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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