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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합기도의 시조 최용술_한국만의 독창적인 무술을 정립하다

by 마음heart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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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의 독창적인 무술을 정립하다

한국 합기도의 시조 최용술



덕암 최용술(德庵 崔龍述,일본명은 요시다 아시오/타츠주츠吉田朝男),대한민국의 합기도 1대 도주로 한국에서 합기 관련 무술의 시조격 되는 인물로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일본인 부부랑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양친과 알던 사이로 최용술을 이뻐해 데려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유괴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인 경력을 소개하는 매체마다 말들이 좀 다르게 나오는데 건너온 후 적응을 잘 못하자 결국 주지스님에게 맡겨졌다고 합니다.나중엔 주지스님의 친구였던 다케다 소가쿠가 데리고 갔으며 그 뒤 다케다 소가쿠 양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그냥 제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글마다 좀 다르다고 합니다.이후 다케다 선생의 집안에서 최용술은 자랐고, 다케다 선생이 제자들과 입산 할때 같이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하였는데 다만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최근엔 대동류를 배운건 맞다까진 인정하는 분위기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최용술의 행적은 여러 시각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굴되는 중이라고 합니다.일본의 패전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도중에 짐을 도난당했는데 짐 속에 돈,목록과 오의 등의 두루마리, 검 두 자루 등 병장기가 있었다 하며 딸인 최복선 여사 말에 의하면 22개 박스가 있었는데 이 중 1박스를 나르겠다고 도와주던 청년이 있었는데 가고 보니 1박스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재산이 다 털린 수준은 아닌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도 황간에도 가고 어머니 외가에도 갔다가 대구에 정착했다고 합니다.이후 풀빵을 만들어 팔며,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딸을 제압하면 풀빵을 공짜로 주겠다.'며 호객했다고도 하며 진짜로 덤벼드는 남자 아이도 있었지만 역으로 그의 딸에게 혼쭐 났다고 합니다.그러던 중, 어느 날 길거리에서 힘 꽤나 쓰는 양조장에 쌀포대를 들고 나르던 장정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키도 작은 최용술이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을 그의 첫번째 제자이자 당시 양조장 집 사장 아들이던 서복섭이 목격했는데 회고에선 한눈에 저것이 유술인 것은 알았는데, 형(型)이 특이해서 놀랐다고 합니다. 유도 유단자였던 서복섭은 최용술의 진가를 바로 알아보는데 이 당시 일화로 서복섭은 그의 유도기술을 이용하여 최 도주를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했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의 자신이 한참 나이가 많던 최용술에게 꼼짝도 못하자 제대로 배움을 청했다고 합니다.후일 그는 용술관의 유래를 듣고, "최옹의 기술이 아직도 전수되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최용술 도주는 서복섭의 제안으로 양조장의 2층에서 무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한국 합기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한국 합기도 도주 최용술(1899 / 1904년  7월 21일~1986년 10월 27일  (향년 81/87세)

최용술은 자신의 무술을 야와라(柔) 혹은 주지스라고 했다는데 가르칠 때는 야와라, 혹은 합기유권술이라 칭했습니다. 가끔 대동류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야와라(柔)는 유술이라는 뜻이고, 유권술은 서복섭이 제안한 것으로 '유술기에 권술까지 아우르는 무술임을 천명하자'는 의미였다고 합니다.최용술의 합기 유술 실력은 의심할 여지없이확실한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심지어 본토인 일본 대동류 쪽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좀 심하게 밝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최용술의 성격에 대해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는둥 깐깐했다는둥 글마다 좀 다른 부분이 있지만, 확실한건 최용술은 초기 제자들에게도 수련비에 따라 기술을 철저히 차별하며 가르쳤는데, 쉽게 말해 무술로 돈벌이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예 이해 못할건 아닌게, 당시엔 최용술도 돈이 별로 없는 처지긴 했습니다. 1948년에 양조장 사건이 있은 후 8년이 지난 1956년 들어서야 겨우 자기 집과 도장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물론 형편이 나아졌다고 돈을 밝히는 수련 방법이 바뀌진 않았다고 합니다.최용술의 제자에 따라 그냥 유술과 합기가 들어간 유술의 차이를 두었는데, 유술만 가르칠 제자에게는 합기 올리기를 위한 단전호흡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였으며 제자들이 서로 누가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술기는 쌀 몇 가마짜리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여, 제자들이 수전노라 비난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도장 안에 기다란 커튼을 설치하고 큰 돈을 지불한 특별 제자에게만 특별한 술기를 가르쳤음은 초기 제자들의 공통된 증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당시 돈이 궁했던 한국 합기도의 원로 중 한 명인 지한재는 훗날 최용술한테 맺힌 것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결국 이런 최용술의 방식 덕분에, 오늘날 한국 합기도는 지한재처럼 돈을 많이 내지 못한 제자들이 최용술에게 배운 것을 대충 더듬어서 실전된 무술을 새로 복원하는 수준으로 해체시키고 붙이고 재창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대동류와는 완전히 다른 짬뽕 무술이 되어버렸습니다.다만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동류 특유의 유사과학스러운 특징은 어느 정도 희석되고 좀 더 합리적인 호신술로 바뀌면서 의도치 않게 한국 무술로 정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1960년 들어선 3월 정식으로 '대한합기술무도회(협회)'를 설립했고, 1963년 9월 '대한기도회'를 창립하고 제1대 총재로 취임, 1968년에는 '대한무도회 전국합기도통합 제1회 전국시범대회'에 나가 시범을 보이는 한편, 추대로 "대한합기도"라는 명칭의 도주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한국에서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최용술 도주의 수련법

딱히 정해진 술기의 체계나 교육과정이 없이 가르쳤다고 하는데 용술관의 김윤상 총재도 1970년대 스승을 처음 만나 대구에서 몇 가지 술기를 한꺼번에 배운 후, 금산에 돌아와 수련하고 익힌 다음, 다시 대구에서 최용술의 재가를 받고 진도를 나가는 식으로 수련을 받았습니다. 원래 최용술 도주는 가장 기본적인 술기들을 가르쳐 주면 이후에는 술기의 형태를 자주 바꾸어 보여주었고, 어디가 혹은 무엇이 합기임을 쉽게 알려주지 않고 시간을 들여 깨닫도록 유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다른 합기도 유파의 술기가 형태나 과정에 많은 변화가 가해졌는데 한풀이나 용술관 또한 술기 과정을 재정리하였습니다.최용술 도주는 호흡을 특히 강조했는데, 모든 술기는 히이-후우(하나, 둘)의 단합에 끝남과 그에 맞는 호흡을 강조하였고 그 때문인지 담배를 피지 못하도록 했지만 최용술 본인은 후계자이자 아들인 2대 도주 최복열이 사망한 후, 담배를 자주 피웠다고 합니다.초기엔 낙법은 가르치지 않았는데 다케다 토키무네 종가의 증언에도 나오지만, 원래 대동류에서는 한국의 합기도나 초기의 일본의 아이키도와는 달리 낙법이 없었습니다. 검을 맞대고 대결하는 무사의 세계에서 낙법으로 넘어졌다가 일어선 뒤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하지만 낙법이 없다 보니 수련생들이 다치는 경우가 속출하여, 당시 유도를 배웠던 초대 제자 서복섭의 도움으로 유도 방식의 낙법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최용술 도주에게서 시작된 한국의 합기 계열 무술들의 낙법은 아이키도의 회전을 통해 상대와의 거리를 만드는 수신(受身)이 아닌, 유도식 낙법(落法) 형태를 띠게 됩니다. 다만 최용술 선생의 직계 제자인 김정윤 선생의 한풀 무술에서는 유도식 낙법이 아닌 아이키도와 비슷한 낙법을 사용하지만 유도처럼 낙법이라 하지 않고 구르기라고 말합니다.최용술의 기술이 현재 아이키도나 대동류를 생각하기 쉬운데, 손으로 하는 타격기, 발로 하는 차기 및 막대를 휘두르는 법 등 다양했는데 제자에 맞게 같은 원리에서 파생된 여러 형태의 기술을 가르쳤다는 말도 있습니다.원래 최용술 도주는 단조로운 발차기만 가르쳤지만 대동류는 윗수로 갈수록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최용술 도주는 제자들이 발차기를 하면 어디서 발을 놀리냐며 거부감을 드러냈다고 합니다.술기를 일본어 그대로 가르치고 사투리도 섞다보니, 명칭이 난잡해져 이후 제자들이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는데 다만 전부 통일하지는 못했는데, 4개조의 기술의 명칭만 해도 합기도쪽에서는 아훈넣기라 부르고, 다른 단체에서는 작은 칼넣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 합기도의 시조 최용술에 관한 거짓과 진실

최용술이 1986년 사망한 후, 지금까지도 그의 행적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데 최용술이 양자든 수제자든 뭐든 다케다 소가쿠랑 특별한 관계였느냐, 대동류 합기유술을 제대로 배운게 맞느냐 2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해선 엇갈리는 진술과 자료들이 상존합니다.일단 최용술 본인 말을 들어보면 매체마다 본인의 이력에 대해 좀 오락가락합니다.최용술 도주의 딸 최복선 여사가 다케다 소가쿠에 관해 언급한 적도 있는데 1998년 한 인터뷰에 의하면, 본인도 일본 홋카이도에 살던 당시 실제 최용술 집에 주기적으로 머물다 가는 다케다 선생을 보았으며, 오히려 이땐 다케다만 오면 좌불안석인 부모가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안되 다케다 선생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사망 2달 전에도 홋카이도에 있던 아버지 집에 머무르다 갔는데, 그로부터 2달 후 소가쿠가 객사했다는 부고장이 집에 도착해서 최 여사가 문맹인 아버지 최용술에게 직접 알렸다고 합니다.최용술과 장인목(최용술 외에 한국에서 대동류를 가르친 또다른 인물로, 마츠다 토시미에게 홋카이도에서 대동류를 배운 뒤, 해방 후 대구에 국무관을 설립하여 대동류를 가르쳤다. 둘이 만난 적도 있다고. 다만 대동류의 적극적인 전파보다는 접골원을 운영하는게 주 생계 유지였기 때문에 장인목은 지압과 같은 건강유지에 집중하는 편이었다고 한다.)모두에게 배운 바 있는 박병관은 최용술이 자신에겐 대동류를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자신이 보기엔 대동류를 배운 것이 아닌 것 같다며, 스승이 까막눈이라 역사왜곡을 하던 제자들 및 많은 사람들에게 휘둘렸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최용술의 스승은 '스님'이었다는 말도 했는데, 이게 다케다한테 소개해줬다는 주지 스님을 말하는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2018년 10월15일 무예신문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수미노 사토시(住野聡) 세계평화무도연합 사무총장이 대동류 합기유술 도쿄본부에서 직접 다케다 소가쿠가 생전에 모든 수업생의 이름을 영명록에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다만 스탠리 프래닌이 소가쿠의 장남 무네미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영명록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됐다고 하는데 그가 작성한 영명록에서 최용술이 수련한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는데, 20일 수련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합니다.아래 사진이 영명록↓

한편, 미국의 저명한 무술가 리처드 킴(하와이에서 활동한 무술가로 일본의 일부 사람들은 리처드 킴이 오키나와 사람이라며, 그의 성을 金武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헌데, 정말로 金武였으면, 자신을 소개한 영문 이름에 Kim이라는 발음을 사용했겠는가? 참고로 金이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일본은 こん(kon)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Jin이라고 발음한다. Kim을 사용하는 지역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며 리처드 김(1917~2001)은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전에서 미해병대에서 복무하였으며 이후 일본에서 요시다 코타로 밑에서 대동류를 수련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도와 가라데를 수련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오키나와 무기술을 수련했으며 청장년기와 노년기는 주로 북미와 유럽에서 활동하였다.)이 1984년 미국 하와이의 합기도인 글렌(Glenn)의 최용술이 정말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운 것이 맞는지 묻는 질문이 담겼다고 하는 편지에서, 최용술이 일본의 우익 조직 흑룡회의 멤버이자,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로부터 스승을 대신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인 교수대리(敎授代理)를 받은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의 뛰어난 조선인 제자였으며(=자기 선배),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 자신이 배운 무술에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증언합니다. 또 최용술 도주의 일본 이름이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였다고 증명한느데 이 때문에 일본을 비롯한 많은 위키백과에서는 최용술을 요시다 코타로 쪽의 제자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이에 대해 일각에선 정황상 다케다 소카쿠한테 배사하되 실질적으론 오랜 시간 요시다 코타로한테 배운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주장한 인물은 중국무술 권사로, 실제로 중국 무술계에서는 스승의 집에서 잡일을 하고 대신 사형에게 무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렇게 배운 사람들도 스승에게서 배웠다 하지, 사형에게 배웠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중국 무술 수련자들은 이와 같은 설이 마냥 당혹스럽진 않다고 합니다.한편 최용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 다케다에 의해 거두어져 아버지로 여기며 자랐으므로 제자라는 형식으로 입문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참고로 흑룡회란 일본 제국 시대 국가주의 우익조직으로, 일제가 헤이롱장(흑룡강黑龙江) 일대를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흑룡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앞장섰고,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 무술계는 최용술 도주가 반일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된 고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리처드 킴의 답신 전문.

dated November 26, 1984:

The founder of Hapkido, Mr. Choi -- Japanese name Yoshida, is not related to Yoshida Kotaro, Samurai extraordinary.

Mr. Choi was a student of Yoshida Kotaro. In fact he was an excellent student. You must realise that before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all Koreans had Japanese citizenship and names.

Mr. Choi returned to Korea and taught Daito Ryu Aiki Jujutsu. He named it Hapkido which in Japanese is Aikido. Since his time Hapkido has become modified with a distinct Korean flavour. It is an excellent art.

I would that the thrust and direction of Hapkido where it is different from what originally Mr. Choi had taught is in a number of sophisticated kicks which is unique to the Korean style of fighting. Probably, according to some, it may have improved the art for modern day consumption. That would be a matter of debate.

You are learning a good art. Stay with it and practice until perfection.

Sincerely,

Richard Kim, Hanshi ※Hanshi (範士)는 무술에서 8단 이상의 유단자의 호칭을 뜻한다.

합기도의 창시자, 최용술 -- 일본명 요시다, 비범한 사무라이인 요시다 코타로의 혈연은 아닙니다.최용술은 그의 제자였습니다. 실제 그는 우수한 학생이였지요. 일본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기 전에,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의 시민권과 일본식 이름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최용술은 귀국 후 대동류 합기유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본어로는 아이키도라 불리는 합기도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합기도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독특하게 수정됩니다. 합기도는 우수한 무술입니다. 첨언하자면, 합기도에 한국의 무술 스타일인 수준 높은 발차기가 도입되면서 원래 최용술이 가르치고 추구하던 것과 달라진 듯합니다. 아마, 일부의 주장대로 합기도는 현대인의 기호(선호)에 따른 무술로서 개량된 듯합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요.

당신은 좋은 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완벽해질 때까지 수련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리처드 킴 범사

왼쪽은 리처드 킴, 오른쪽은 요시다 코타로.

최용술 측은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관련해서도 아이키도 측과 상반되는 진술을 한 적이 있으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혼자가 아니라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선생 및 요시다(吉田)가의 부자(父子) 등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수련했고 관련 증언들도 존재합니다.아이키도 측에서 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친분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는데, 1988년 Aikido journal 77호의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아이키도 2대 도주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이키도의 1대 도주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개조가 최용술 도주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7년 10월, 한풀의 신상득 기자 또한 인터뷰를 통해 같은 내용의 답변을 들었는데 신상득 기자에게 기쇼마루는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다케다의 제자로서 열심히 수련하는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라고 답변했다고 하며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추정된다는 내용도 덧붙입니다.

Q: On another subject, it is true that a Korean named "Choi" who founded "Hapkido" studied Aikido or Daito-ryu?

A: I don't know what art it was but I understand that there was a young Korean of about 17 or 18 who participated in a seminar of Sokaku Takeda Sensei held in Asahikawa City in Hokkaido. It seems that he studied the art together with my father and would refer to him as his "senior".

Q: If that's the case the art must have been Daito-ryu.

A: I've heard that this man who studied Daito-ryu had some contact with my father after that.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gan teaching Daito-ryu on a modest scale. The art gradually became popular and many Koreans trained with him. Since Aikido became popular in Japan he called his art Hapkido[written in Korean with the same characters as Aikido], Then the art split into many schools before anyone realized it. This is what my father told me. I once received a letter from this teacher after my father's death.

질: 다른 질문입니다만, 합기도를 창시한 한국의 '최'라는 인물이 아이키도 혹은 대동류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답: 어떤 무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다케다 소가쿠 선생의 강습회에 17,8세의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선배"라 부르며, 같이 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질: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대동류겠군요.

답: 그 후에도 그 대동류 수련생과 아버지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작은 규모로나마 대동류를 계속 지도하였으며, 인기몰이를 하며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에게 배웠다고 합니다.아이키도가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자, 그는 이름을 [ 아이키도를 한글로 쓴] 합기도라고 지었는데, 이 후 많은 유파로 분열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온 적도 있습니다.

최용술 도주는 한글을 거의 모르던 문맹이었으며 무술 외에는 잘 전반적으로 무식한 편이었다고 합니다.또한 언론과의 인터뷰 때 다케다 소가쿠의 성씨를 다케다(竹田)라 적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다케다 소가쿠는 19세기 말 농민 집안이던 자신의 성(竹田)을 유명 다이묘였던 다케다(武田)로 바꿨다는 의혹이 존재합니다.최용술 도주의 주장에 따르면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엉이같이 생긴 다케다 선생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 때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다.”고 술회했을 정도였는데 실제 다케다 소가쿠는 느닷없이 방문하여 최용술 선생 가족이 보는 앞에서 최용술을 다짜고짜 두들겨 패는 등 그야말로 천하의 망나니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최용술 선생 역시 괴팍한 성격이 대물림되었는지, 김정윤 선생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김정윤을 때려 피가 낭자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최용술 도주는 키가 단신으로 약 150cm대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참고로 최용술의 딸 최복선 여사에 의하면 다케다 소가쿠의 키가 아버지보다도 더 작았다고 합니다.다케다 선생은 일본 전국을 주유하며 각지에서 제자를 받아 가르쳤고, 한 곳에서 오래 가르치는 일이 없었는데 그래서 제자로 입적한 사람은 많으나 제대로 배우거나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최용술은 다케다 선생을 아동 시절부터 따라다녔으므로 형식적으로 스승-제자 관계로 입적할 사항은 아니었다고 합니다.또한 다케다 선생은 무술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고 번 돈을 유흥에 탕진하며 평생을 살았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돈을 많이 내면 단증 또는 허가 등을 내어주었던 모양인데 최용술 선생도 그와 같이 단증 및 면허를 남발하였고 결과적으로 실력없는 제자와 단체가 우후죽순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현재 일본 대동류는 다케다 소카쿠 말년에 가르친 제자에서 계보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용술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최용술에 따르면 다케다 소카쿠는 몇 십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전쟁터에 징병되었고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케다는 조선인이 전쟁에 참전할 이유가 없다며 멀쩡한 최용술에게 치질 수술을 받게 했고 최용술은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최용술 도주의 제자로는 합기도 3대 도주이자 용술관 총재 김윤상(최용술 도주의 무술을 최대한 원형대로 수련한다지만, 최 도주부터가 체계와 교육과정이 제대로 없었던 만큼, 술기를 배우는 순서는 다르다. 특히 유급자 과정에서는 합기를 위한 몸을 만드는 과정에 주안을 둔다고 한다. 용술관에선 합기도와 구별하기 위해 '덕암류 합기유술'이라고도 부른다.), 최용술 도주의 최측근 제자이며 최용술 집에서 거주하다시피 하며 글자 그대로 옛날 스승과 제자처럼 배웠던 한풀의 창시자 김정윤,첫 번째 제자 서복섭,최용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자 후일 정치에 입문한 부친 서동진의 경호 담당으로 최용술 도주를 소개하며, 합기도가 정치인들이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도 큰 역할을 했으며 또한 사이클 선수 서준용의 친할아버이기도 한 정기관 관장 임현수, 영화 사망유희에서서 합기도 고수로 출연한 신무 합기도 총재 지한재(1949년에 최용술 도주를 만나 7년 조금 넘게 배우고 독립해 도장을 차렸다. 기도회 당시 월장낙법 등, 현란하고 아크로바틱한 낙법과 발차기를 도입하고서는 신무 합기도 때는 다시 최용술 도주의 술기로 돌아간다. 한 손 술기만 가르친다는 것이 특징. 최용술 도주에게는 야와라를 배웠지, 합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돈 때문에 차별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스승에게 맺힌 것이 많으며 고수를 찾아서에 잘 나와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말년의 최용술 도주

▩최용술과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일본 아이키도의 창시자로 일본 무술가들에게 추앙받는 사람입니다.일제의 강제 침략 당시 9세에 일본으로 유괴되어 고아로 버려진후 절의 주지가 거두어 약 4년간을 보낸 최용술은, 1913년 다시 다께다 소가쿠에게 넘겨집니다.최용술은 다께다 소가쿠를 따라 일본을 순력하다 1915년 북해도로 들어가는데 북해도에서 대동류의 중시조 다께다 소가쿠와 한국 합기도의 도주 최용술 그리고 일본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등 걸출한 3인이 운명적으로 조우합니다.

좌) 2018년에 한국의 인터넷 미디어 무예신문"에 게재된, '최용술'의 서명과 날인이 찍힌 영명록. 기재된 부분은 그 앞에 서명•날인한 '나카가와 타다시'가 쓴 것으로 보이며, '쇼와 17년(1942) 8월 6일부터 8월 15일까 지 10일 간' 타케다 소카쿠에게 '대동류합기유술'을 배운 것을 증명하고 있다(기사에 따르면, 한 번 더 10일 간의 강습을 받았다고 하며, 총 20일 간, 소카쿠의 지도를 받은 듯하다).

운명적인 3인의 만남에 대해 일본 아이키도측은 최용술 도주가 생전에 측근 제자에게 구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그 현장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지켜본 최용술 도주의 존재는 아예 삭제하고 있습니다.일본 아이키도측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다께다 소가쿠를 만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1915년 북해도의 한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우에시바는 우연히 그곳에 머무르던 다께다 소가쿠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다께다 소가쿠는 광대뼈가 돌출한 용모에 날카로운 안광은 매섭게 빛나고, 그리고 꽉다문 입은 위풍 당당한 모습이었다. 우에시바는 다께다 소가쿠와 복도에서 스칠때마다 그의 눈빛에서 불꽃 튀는 무인의 매서움과 그 인물의 몸에 밴 무술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에시바는 대동류 유술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허락받고 그후 90일간 대동류를 전수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나 최용술 도주는 우에시바와의 만남에 대해 아이키도측과는 전혀 다른 증언을 생전에 측근 제자들에게 전했는데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다께다 소가쿠 선생과 최용술이 1915년 북해도 욱천에 당도 했을 때 당시 북해도는 명치유신 이후의 본격적인 개척사업으로 많은 노무자들이 현장 개간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노무자들은 일본 사회의 범죄자들이나 부랑배들이 차출되어 투입되고 있을 때였는데 그 현장을 지나던 다께다 소가쿠 선생과 최용술은 일련의 노무자들과 시비가 벌어졌고 몰려든 노무자들은 약 50여명이었는데 이들과 다께다 소가쿠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다께다 소가쿠는 순식간에 이들 전부를 해치우는 솜씨를 보였다.이때 멀찍이서 다께다 소가쿠의 신기에 가까운 대동류 실전술기를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우에시바 모리헤이였다. 당시 기도, 유류, 유도 등 상당한 무술을 연마한 우에시바는 처음 보는 다께다 소가쿠의 무술에 감동하여 다께다 소가쿠와 최용술의 뒤를 미행했는데 다께다 소가쿠와 최용술이 한밤을 지나 새벽에 거처에 당도했다.우에시바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계속 미행하다 집을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이튿날 우에시바는 우에시바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계속 미행하다 집을 확인 하고는 돌아갔다. 이튿날 우에시바는 다께다 소가쿠를 방문 하여 대동류 유술의 사사를 청했다. 그러나 다께다 소가쿠는 우에시바의 관상을 보고 "너는 나의 무술을 배울만한 인물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그 후 우에시바가 거듭 찾아가 술기 교습를 애원하였으나 다께다 소가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듭된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우에시바는 집념을 놓지 않았다. 다께다 소가쿠와 최용술의 거처를 맴돌며 틈을 찾았다.다께다 소가쿠와 최용술이 수련하던 곳,도장은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없었는데 대동류 교습은 문외불출이라하여 수련장소는 엄격히 밀폐된 공간에서 일대일로만 이루어졌다. 다께다 소가쿠다와 최용술이 술기를 수련할 때 우에시바는 인근에 있다가 촘촘한 나무 사이 틈새로 몰래 술기 장면을 엿보았다. 그리고는 다께다 소가쿠가 외부에 출타하고 없을 때 혼자 있는 최용술을 찾아가 대동류 술기 한 수 씩을 배우려고 했다. 우에시바는 최용술이 조선인으로서 혈혈단신의 처지임을 알고 당시 10대였던 최용술옹에게 고급스런 일본 한복 옷가지와 신발을 선물로 주며 대동류 기술을 배우기를 원했다.얼마후 다께다 소가쿠는 집안에서 보지 못하던 최용술의 고급 옷을 발견하고 최용술을 다그쳤다.

합기술을 시연하는 생전의 최용술 도주

이에 최용술이 사실을 실토하자"너는 문외불출의 비기인 대동류를 어찌 문외인에게 전하려는가 "하며 혼을 내고 당장 우에시바를 데려오라고 진노했다.우에시바가 도착하자 다께다 소가쿠는 격노하여 "어찌 아이를 꼬득여 기술을 빼내려는가 "하고 혼찌검을 냈다. 그러나 우에시바의 집념은 대단하여 그 후에도 줄기차게 각종 선물과 경제적 공세로 다께다 소가쿠의 마음을 사려했고 종내에는 다께다 소가쿠가 곤경에 처한 일을 처리해줌으로서 대동류 교습을 허락 받았다.그러나 그 교습은 철저히 술기 한수당 얼마라는 경제적 거래로 이루어졌으며 대동류 고급술기는 전수하지 않았는데 다께다 소가쿠의 입장에서 우에시바의 격에 맞는 기술만을 전수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이렇게 아이키도측 기록과 최용술의 증언이 서로 상이함을 알 수 있는데 더구나 일본 아이키도 측은 최용술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아예 언급조차 않는다는 것입니다.분명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역사적 진실을 입증할 당사 자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후세의 각 유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를 만들고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즈금에는 시장 점유력이 높은 쪽의 얘기가 진실이 되버렸는데 일본자료만 보고 연구하는 자들은 당연히 일본측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며 더구나 한국 합기술 역사에서 이미 최용술의 이름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체육백과사전을 비롯해 각 합기도 교본 등 공식자료에서 최용술 도주는 이미 오래전에 거세당하면서 일본에서 술기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채 건너온 노인네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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