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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02년 장성호_9년 연속 3할에 빛나는 아기 호랑이

by 마음heart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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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02년 장성호

9년 연속 3할에 빛나는 아기 호랑이



장성호는 충암고를 졸업하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지명되어 입단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재응도 고졸 우선지명을 받았으나 인하대로 진학한 뒤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장성호는 고교 2년을 혼자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날려버린 상태에서 고3(1995년) 때 겨우 충암고 야구부로 복귀해 팀의 주장을 맡으며 당시 에이스 박명환과 함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야구판 정대만 실사버전을 완성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해태에서는 오로지 이 1년도 안 되는 시기의 포텐셜만 보고 2차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 계약금 1억을 안겨주는 등 해태 나름의 초강수를 두는데 당시 현대 피닉스가 신인이란 신인은 죄다 빼내가서 신인들의 계약금이 껑충 뛴 탓에 해태도 나름 재산 싹싹 긁어내면서 장성호, 투수 김상진,포수 황성기에게 각각 1억이라는 해태 나름의 거액 계약금을 안겨줬지만 사실상 프로에서 롱런한 건 장성호 뿐인데 김상진은 2년 연속 9승과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하며 안착했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타이거즈 팬들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김응용 감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 프로 초년시절을 보냈는데 해태 시절만 본다면, 좌타거포 좌타거포 노래를 부르던 김응용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과 오리궁둥이로 유명한 김성한 타격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외다리타법을 장착하고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장성호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고의 타자 스카우팅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됩니다.덧붙여 98~03중 모든 시즌에서 타율로 이승엽을 이긴 유일한 선수로 특히 02시즌 정교함과 파워를 모두 갖춘 이승엽의 타율 성적 위에는 오로지 장성호만이 있었습니다.참고로 97년도에 이호준과 함께 일본으로 연수를 받으러 갔는데, 김성한의 엄격한 지도와 많은 연습량이 곁들여져 타격 스킬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장성호는 배트 들고 한 다리로 서 있기 등의 연습도 했으며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김성한의 호통이 작렬했다고 합니다.그리고 그 효과가 바로 98년도에 종범이가 떠난 타이거즈에 나타나는데, 고참타자인 홍현우, 이호성, 최훈재가 부진하면서 그들을 받칠 기둥으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97년도의 삼성 바로 밑으로 평가받던 해태의 타선과 98년도의 최하위급 타선을 비교해본다면 장성호와 이호준의 각성이 없었다면, 더욱 답이 없었을 것입니다.입단 첫 해인 1996년부터 개막전에 선발 출장해 데뷔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는 등 3안타를 쳤으나, 정작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으며 2년차인 1997년에는 김성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타격 스킬이 많이 늘어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번타자 1루수로 뛰며 데뷔 2년차에 우승반지를 끼기도 합니다.

장성호는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과 KIA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모두 경험한 네 사람(이종범,김종국,이대진)중 한 명이며, 해태 타이거즈 마지막 우승 멤버 중 김상진과 함께 가장 어린 선수였습니다.장성호가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한 시절은 선동열도,이종범도 없던 시절, 즉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의 암흑기였습니다. 1998년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난 뒤 해태의 1번타자는 무주공산이었는데, 이 시기에 타율 .312 15홈런 출루율 .381 장타율 .462 OPS .843 sWAR 3.7을 기록하며 해태의 1번타자로 활약합니다. 99년도에는 더욱 발전하여 .342로 타격 3위, 출루율 .420 장타율 .561로 도루가 많지 않았음에도 생산력으로는 정수근을 압도했습니다.1998년~2000년 당시 장성호는 정수근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1번타자였지만, 눈야구로 인한 높은 출루율과 기동력을 커버할 수 있는 장타력 덕으로, 클래식한 1번타자는 아니었지만 생산력 쪽에서는 오히려 정수근보다 좋은 WAR을 찍은 팀에 도움이 되는 1번타자였습니다.KIA로 스폰서가 바뀌기 전까지는 뛰어난 컨택 능력과 나쁘지 않은 주루능력, 더불어 빼어난 출루율로 굉장히 유동적이던 당시 타이거즈 타선에서 테이블세터와 클린업을 오가면서 활약했으며 특히 99년은 당시 홍현우,양준혁,샌더스,브릭스 같은 강력한 타자들과 함께 타율 .342(3위) 24홈런 출루율 .421(5위) sWAR 5.63(9위) wRC+ 152(7위) wOBA .425 (7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납니다.2000년대 초반 KBO 리그에서 최고의 타자를 말하면 이승엽,심정수 외에 항상 등장하는 인물로 동기간 활동했던 이호준은 그런 평가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장성호는 KIA로 팀이 바뀐 이후,클린업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본에 나갔던 이종범이 다시 돌아와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김종국이 부상과 타격부진에서 벗어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더이상 테이블 세터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2002년부터는 3번타자 1루수로 위치하기 시작했으며, 그 덕에 장성호의 타격실력이 더욱 제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데 클린업에 안착한 2002년에 타율 .343를 기록하며 곧바로 타격왕을 차지하고 이승엽의 출루율왕을 저지했습니다. 장성호는 최전성기인 1999시즌부터 2003시즌까지 그는 5시즌 모두 OPS 0.9 이상을 뚫었고 타자의 이상적인 슬래시라인이라는 3/4/5를 4년 연속으로 찍었으며, sWAR은 5점대를 당연하듯이 기록하면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습니다.그야말로 OPS 중장거리형 교타자의 교본과도 같은 성적. 98~03시즌 6년간 이승엽은 단 한번도 장성호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적이 없는데 당대 최고의 거포와 타격실력이 빼어난 선수가 많이 모이는 1루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으로 인해 골든글러브와는 도통 인연이 없었습니다. 신인시절에는 동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승엽에 밀리고 이승엽이 일본으로 가자마자 각성한 이대호와 김태균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가장 유력한 시절은 오히려 외야수로 뛰었던 99년이었는데, 좌익수 디스카운트와 30-30의 제이 데이비스도 골글을 못받는 타고투저로 인해 안타깝게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한 때 양준혁이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로 장성호를 뽑기도 했을만큼, KIA의 암흑기를 지켜주는 대들보 같은 선수였습니다. 저 시기에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반올림 3할을 달성하고, 거기에 2005시즌 3할을 달성하기 위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번타자로 나와 5타수 5안타를 치는 절실함이 낳은 괴력을 보여주면서 야구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타자는 3할되기 직전의 장성호라는 발언이 널리 퍼지기도 합니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당해 최대어로 떠올랐고, 시장으로 나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선협상기간 동안 4년간 최대 42억이라는 당시 FA 최고액 2위에 계약을 마무리지으며 KIA 타이거즈에 잔류했는데 이 계약은 시즌이 지날수록 연봉이 높아지는 형태의 계약이었는데, 다음 FA 때 이적은 생각도 안 한다는 계약이었습니다.이 당시 KIA가 제시한 대우에 대단히 만족했다는 증거였으며 실제로 본인 역시 이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터뷰로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이 이후 FA파동의 진원이 됩니다.2006년에는 04-05 시즌에 약간 손해봤던 커리어가 반등하며 기아 타선을 이끌었는데 시즌 중후반까지 이대호와 타점왕 경쟁을 하며 투고타저를 뚫고 역대 거액 FA 타자중에 손꼽히는 활약을 했는데 특히 시즌이 정확히 절반을 돌 시기에 이미 12홈런을 터뜨려 수많은 기아팬들은 장성호의 커리어하이를 기대했지만 시즌 후반부터 당시 이용규와 장성호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부실했던 기아 타선 덕분에 고의사구가 쏟아지며 전반적인 스탯은 약간 하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활약을 통해 3번타자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타자가 되었습니다.그렇게 기아는 이용규,이재주,장성호의 활약과 서정환의 투수진 혹사를 통해 겨우겨우 4강에 진출했으나, 준플레이오프에서 결국 시리즈 스코어 1:2로 아쉽게 탈락. 시즌 후 커리어 마지막 국가대표에 뽑혔으나 그 국가대표는 전설의 도화 참사 대표팀으로 장성호는 이 대표팀에서조차 3할 타율과 홈런 1개를 치며 역시 3할하면 장성호라는 이미지를 이어갔습니다.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 장성호의 성적은 9년 연속 3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훌륭했는데, 전성기였던 9년 동안 장성호는 그 기간 동안 타율 .317(1위) WAR 43.34(3위),164홈런(11위) 689타점(4위) 1341안타(1위) 747득점(1위) 2루타 258개(1위) 2115루타(1위) 673볼넷(1위) 출루율 .414 장타율. 500 OPS.914 sWAR 43.34(2위) wRC+ 147.1, wOBA .405를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꼽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2007년에 장성호는 구단 선수들의 투표에 의해 주장으로 선출되고 시즌 초 최희섭이 KIA에 합류하자, 장성호는 1루수를 최희섭에게 내준 뒤 본인은 신인 시절처럼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습니다.장성호는 부상을 입은 상태로 휴식 및 재활을 하지 않고 본인의 연속 3할 타율 기록 경신과 서정환 감독의 역대급 망상이었던 서머리그 우승을 위해 계속 출장을 강행하면서 결국 부상이 악화되었고, 결국 이후 커리어 하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결국 부상의 여파로 10년 연속 3할타율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2008년부터 장성호는 부상과의 사투를 벌이곤 했는데 08년에는 최희섭의 부진으로 인한 주전확보와, 고의사구효과로 어찌어찌 비율스탯에서는 커리어 반등에는 성공했지만 대신 조범현 감독과 플래툰 기용과 소통의 오류로 인하여 앙금이 생겼고, 최희섭이 각성해버린 2009년부터는 확실히 입지가 줄었습니다. 2009년은 98년 이후 장성호의 커리어 로우 기록이었는데 비율상으로는 07 시즌과 비슷했지만 타석수가 98년 이래 가장 적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화로 트레이드된 장성호의 2010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0.245 출루율 0.344 OPS 0.673 4홈런 29타점으로 신인시절의 2시즌을 제외하면 타율 0.280 OPS 0.800 이하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타자였기에, 커리어로우 성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통산타율은 0.306에서 0.303으로, 통산출루율은 0.400에서 0.398로 하락.했으며 2010년 시즌까지 통산 1799안타 199홈런 898볼넷 699삼진을 기록하게 됩니다.2011 시즌은 오른쪽 어깨 연골 봉합수술을 받으며 시작한 장성호의 최종성적은 타율 0.244 출루율 0.379 95안타 8홈런 37타점. 81개의 볼넷은 리그 1위 기록으로 특이한 점은 달랑 홈런 8개치고 전구단 상대홈런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2012 시즌 개인 통산 1000볼넷을 달성,역대 4번째 3000루타 달성,통산 2000번째 안타 달성과 프로 통산 아홉 번째 1000타점의 주인공이 되기도합니다.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2년,kt wiz에서 일년간 더 뛰다가 은퇴한 장성호는 프로 통산 20년간 2064 경기에 출장,7084타수 2100안타(역대 5위),타율 0.296,394 2루타(역대 3위),221 홈런,1043타점(9위),1108득점(6위),1101볼넷(2위),장타율 0.451,출루율 0.394를 기록합니다.

장성호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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