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00년 박종호
39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다
박종호는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졸연고 자유계약으로 1992년 LG트윈스에 입단하였는데 입단 때만해도 유격수였으나 당시 감독 이광환이 박종호의 어깨가 약하다 판단하고 2루수로 전향시켰습니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김용달 타격코치 주도로 스위치 히터 전환을 시도하였고, 1993년에 좌우타석 홈런을 치는 등 주전 2루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그 해 2할 6푼 타율에 21도루, 56타점으로 하위타선의 해결사 역할을 하며 같은 팀 유지현과 준수한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2루수 골든 글러브 수상하는데 단순히 성적만 보기에는 그다지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고, 비슷한 시대에 박정태,강기웅,이명수 등(각각 '92, '93, '95 골든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타격이 뛰어난 2루수가 많아서 박종호가 골든글러브를 받을 것을 예상하기는 힘들었는데 마침 94년도에 이 선수들이 부상으로 풀타임을 못 뛰거나 부진하여 박종호가 받은 것입니다.그렇게 완전한 주전 2루수로 안착하나 했는데, 199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강성우와의 충돌로 인한 손목 부상과 방위병 복무로 인해 1군 61경기 출장에 그쳤고, 설상가상으로 1996년에는 방위병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되면서 잔여 기간 동안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습니다. 1997년까지 2년 연속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거기다 그 당시 LG 내야진은 신국환,안상준,권용관 등 센터 내야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방위 복무와 부상으로 고전했던 박종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박종호는 1998년 좌완투수 최창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이는 LG트윈스 트레이드 흑역사 가운데 하나로 뽑히는데 박종호는 현대 이적 이후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고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3개나 더 챙기며 현대 왕조의 핵심 멤버가 됐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최창호는 LG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이적한 후 박종호는 유격수 박진만과 호흡을 맞춰 류중일-강기웅 키스톤 콤비 이래 박진만 - 박종호라는 최강의 키스톤 콤비가 탄생되었습니다.이후 현대에서 3번이나 우승을 맛보게 됩니다.이후 현대에 있던 키스톤 콤비는 삼성에서도 이어지나 이후에는 그의 노쇠화와 잔부상이 찾아오면서 빠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존의 박진만 파트너였던 박종호의 자리에는 김재걸이 땜빵으로 메워 주다가 2007년부터 신명철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트레이드 직후인 1999년 3루수와 2루수를 오가며 3할 타율에 10홈런 13도루를 기록, 이듬해의 대활약을 암시하는 성적을 기록하였으며 이 해의 10홈런은 2000년과 더불어 둘 뿐인 박종호의 두 자리수 홈런입니다. 이 해에 골든글러브를 탔으면 홍현우도 하지 못한 2루와 3루에서 모두 골글을 탄 유일무이한 선수가 될 수 있었으나 경쟁자들이 .321의 타율에 22홈런을 때려낸 김동주와 .303에 24도루를 기록, 한화의 우승을 이끈 강석천 등으로 쟁쟁했고, 결국 .340의 타율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은 김한수가 타갔습니다. 여담으로 이 해 박종호가 맞은 사구는 무려 31개로, 종전 기록이던 공필성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박종호는 현대 시절에는 김재박 감독이 좋아했던 작전형 2번타자로 1번 리드오프 전준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습니다.전준호가 안타치고 도루하면 박종호가 번트를 대거나 진루타를 만들어주는 식으로 그만큼 잘 쳤고 본인의 작전수행능력도 뛰어났습니다.
2000년 소속 팀이 역대 최강팀으로 불리울 때는 성이 같은 박경완,박재홍,박진만과 같이 역사상 최강의 골글 센터라인을 구성하였고, 특히 121경기 .340의 타율로 타격왕에 올랐으며 59경기 연속 출루 기록도 세웠습니다.박종호의 한 가지 흠이라면 코시에서의 실책으로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회 초 병살성 타구를 최고 수준의 수비를 보여주던 박종호가 실책을 2개 연속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현대는 3연승 내리 달린 후 3연패를 하면서 사지에 몰리지만 7차전의 용병 톰 퀸란의 활약으로 역대 최강 팀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으니 박종호에게 다행이라면 다행,참고로 7차전에서 박종호는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이자 핵심 멤버였던 노장 이명수가 2루를 맡았습니다.그리고 그해 시드니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같이 출전한 유니콘스 소속 투수들이 부진한 가운데 박재홍과 함께 맹활약했습니다. 허나 2001년 전 해의 활약이 무색하게 .241로 규정 타석 꼴찌행,무려 타율이 1할이나 떨어졌는데 물론 전 해 멤버들이 거의 예외없이 00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우승만을 보고 달린 작년의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어찌됐건 팀의 정규 시즌 2위 달성에 힘을 보탰으며 2002년과 2003년에는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팀의 3번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FA 자격을 얻어 2003년 11월 말 삼성 라이온즈와 4년 22억원에 계약을 맺어 이적하게 됩니다. 박종호는 애초 현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현대에 남을 생각이었지만 현대 구단의 재정난과 같은 팀 선배 이숭용과의 대우 문제로 인해 결별하게 됩니다. 당시 현대 구단은 모기업이던 현대전자의 자금난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지라 FA 선수 계약에도 힘에 부치던 상황이었데 그러던 중 이숭용과 박종호가 FA로 풀렸는데 현대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주장이었던 이숭용을 내부 FA 협상의 우선순위 대상자로 낙점하고 상호 면담 후 계약을 했습니다. 이숭용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자 현대 구단의 자금 사정에는 박종호의 제안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더구나 박종호의 기량에 노쇠화가 올 것이라 판단하여 박종호의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현대와의 인연은 끝난 박종호에게는 삼성 외에 타 구단의 오퍼가 없었고 결국 삼성으로 가게 됩니다.박종호는 삼성 이적 첫 해인 2004년에 2003년 후반기부터 이어온 연속 안타 기록을 그대로 이어가는 등 꾸준히 활약을 하였으며, 3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이 때는 삼성이 박종호의 연속 안타 이벤트를 열었을 정도,이 3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10년 후인 2014년에 KBO가 비 더 레전드라는 일종의 게임으로 쓰이게 됩니다. 2004년에도 작년과 비슷한 성적을 찍었으며 수비에서는 괜찮았고 골든글러브도 4년만에 탈환하였습니다.그러나 두산과의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을 기점으로 이후 2005년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2007년 1할대의 타율에 그치고 시즌 초부터 부상으로 이탈한 뒤 팔꿈치 수술을 받았으며 거기에 당시 선동열의 야구 스타일인 기동력 야구에 맞지 않았던 그는 강영식과 트레이드 된 신명철이 영입되면서 출전 비중이 줄어들었고, 2008 시즌 도중 한화에서 건너온 용병 제이콥 크루즈와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사실상 은퇴에 몰렸지만, 2008 시즌 후 친정 팀 LG트윈스 감독으로 있던 옛 스승 김재박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LG와 계약하며 복귀하게 된 박종호는 2009년에는 괜찮은 성적을 올리긴 했지만 이후에 박경수가 2루수로 전향하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2010년 5월 27일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10년 9월 26일 잠실 삼성전에서 은퇴식을 열었으나 그 날 LG는 차우찬의 완투 쇼에 막혀 패배했습니다.박종호는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2군 야수 인스트럭터로 LG 구단에서 임명하여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2군 수비코치를 맡고 있다가 2015년 6월 15일 서용빈과 함께 1군으로 올라왔습니다.2019년은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수비코치를 맡았으며 2019년 10월 28일 롯데 자이언츠에 새로 부임한 허문회 감독을 보좌할 롯데의 수석코치를 맡고 동시에 1군 수비코치도 겸직하게 됩니다.2021 시즌이 끝나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2021년 11월 1일 백송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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