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 이전 7년 연속 200안타 이상을 생산해낸 메이저리그 전설 스토리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스타일 웨이드 보그스의 위대한 7년
한국 프로야구 최고 타격의 달인을 꼽으라면 원년이후부터 10년간 활동한 통산 타율 0.331의 장효조를 가장 첫 손에 꼽을 것이며 이후로는 양신 양준혁이나 6년간 통산 타율 0.340을 기록하고 있고 현재진행중인 이정후도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타격머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렇다면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격달인은 누구일까?당연히 프로 24년간 통산타율 0.367를 기록한 타이콥이 첫 손에 꼽히지만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는 시대별마다 재능 넘치는 타격의 달인들이 존재해 왔습니다.1980년대 대표적인 타격의 달인이기도 한 웨이드 보그스는 메이저리그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3루수로 3000안타를 기록한 교타자이자, 출루머신 중 한 명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에서, 철천지 원수와도 같은 뉴욕 양키스로 자신의 발로 이적한 거의 최초의 선수라는 점에서 제법 유명한 선수기도 합니다.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타율 .328, 출루율 .415, 장타율 .443, OPS .858, 순장타율 .115, BB/K 1.9개, wRC+ 132, 3010안타, 118홈런, 1513득점, 1014타점, 1412볼넷을 기록했습니다.한국 프로야구에서 웨이드보그스와 비슷한 유형으로 원년의 장효조와 현재에는 이정후 선수가 대표적으로 비슷한 유형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정후 선수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다면 웨이드 보그스 선수와 같이 비슷한 스탯을 기록한다면 정말 메이저리그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그렇다면 80년대 대표적인 타격의 달인이었던 웨이드 보그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웨이드 보그스의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웨이드 보그스가 태어난 곳은 워렛 버핏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한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지만, 자란 곳은 탬파입니다.미식축구를 즐기는 탬파에서 키커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정작 야구를 더 좋아해서 1976년 드래프트에서 겨우 7라운드에 지명받았는데도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문제는 마이너리그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대단히 박하게 해서 이 때문에 데뷔 자체가 나이 24세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는데 비록 늦은 데뷔였지만 3루수 자리를 꿰차고 정교한 타격 실력을 앞세워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데뷔 시즌인 1982년 104경기 출전 타율 .349의 맹타를 휘두르며 AL 신인왕 3위에 오른 뒤( 당시 AL 신인왕은 칼 립켄 주니어이다)풀타임 주전이 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7년 연속 200안타를 달성해 일본인 스즈키 이치로가 깨기 전까지 1900년대 이후 아메리칸리그 최고 연속 200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 보낸 1980년대 1983, 1985, 1986, 1987, 1988년 등 총 5번의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정교한 교타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도루 실력은 거의 없었지만, 대신에 선구안이 뛰어나서 많은 볼넷으로 커버했으며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은 6번의 출루율 1위와 출루율 1위 5연패(1983, 1985, 1986, 1987, 1988, 1989)를 안겨줬습니다. 이 때문에 정교한 타격과 높은 출루율을 바탕으로 팀의 1번 타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타격왕 4연패와 다섯 번의 타격왕을 일굴 수 있었습니다.1986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는데 다만 문제는 이 때도 끝내 빌 버크너의 어이없는 알까기 쇼로 인해 결국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이 때 보스턴 덕아웃에서 펑펑 우는 그의 사진은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런 아픔은 있었지만, 적어도 1980년대 타격의 교과서라고 하면 토니 그윈보다는 웨이드 보그스를 더 먼저 꼽았고, 과연 보스턴에서만 뛰며 6번 타격왕에 오른 테드 윌리엄스의 아성을 넘을지가 관건이었습니다. 1980년대만 따지면 통산 타율이 무려 0.352이며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전성기 7년 동안 그가 쌓은 WAR은 무려 56.0입니다. (fWAR, bWAR 모두 56.0)오죽 했으면 재능있는 3루수 거포였던 제프 배그웰을 보스턴이 포기할 정도로 그의 아성은 굳건했지만, 1990년 들어서 웨이드 보그스가 부상에 시달리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그 사이 1980년대 그보다 뒤쳐졌던 토니 그윈은 더 힘을 내면서 마침내 8번의 타격왕을 차지하게 되지만, 그는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타격왕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1990년대 이후 통산 타율이 0.304인데 남들은 메이저리그 경력을 통틀어 한번 해내기도 힘든 3할 타율을 전성기 이후 10년 통산으로도 지켜냈다는 것입니다.1992년 그가 0.259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보스턴 레드삭스 수뇌부는 그를 미련없이 포기해 버렸고 FA가 된 그에게 관심을 보인 팀은 LA다저스와 뉴욕 양키스였는데 그는 뉴욕 양키스를 선택했는데 이유 자체는 단순하게 조건이 더 좋았었기 때문입니다.
▣웨이드 보그스의 뉴욕 양키스와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시절
하지만 보스턴의 결정은 너무 성급했는데 웨이드 보그스는 양키스에서 다시 3할타자로 부활했으며 특히 수비력이 과거보다 더 상승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3루수 골드글러브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것도 3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아직도 그보다 더 많은 나이에 첫 골드글러브를 탄 선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에도 2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 수상합니다.양키스의 주전 3루수로서 1996년 월드시리즈에서 괜찮은 모습을 선보였는데 승부의 분수령이 된 4차전 연장 10회초에서 결승점이 된 밀어내기를 얻어내면서 특유의 선구안으로 우승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메이저리그 데뷔 이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1997년 나이 39세가 되자 노쇠가 찾아와 부진하기 시작했는데 이 해 두 번째로 3할 타율에 실패하는데, 나이도 많고 부상도 있던 보그스를 굳이 양키스는 잡지 않았고, 그는 마지막으로 3,000안타 도전을 위해 당시 갓 생긴 팀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탬파베이로 이적했고 여기서 210안타를 치면서 3,000안타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친 3천번째 안타는 홈런인데, 이는 메이저리그 최초이며, 3000번째 안타가 홈런인 유일한 좌타자이기도 합니다.이후 데릭 지터가 3000호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는 기록을 세우는데 참고로 데릭 지터는 우타자입니다.일본 프로야구 NPB까지 확장하면 통산 안타 1위이자 이치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3천안타를 기록한 장훈의 3,000안타도 홈런이었으며 그도 좌타자였습니다.이 경력을 끝으로 웨이드 보그스는 18년간의 화려했던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었습니다.
▩웨이드 보그스의 플레이 스타일
웨이드 보그스는 컨택과 선구안이 모두 좋은 OPS형 교타자로 같은 80년대 활약한 장효조와 2023년 현재 이정후도 비슷한 유형이기도 합니다.전성기인 1980년대에는 그야말로 안타와 볼넷만을 얻었던 선수로 통산 1412볼넷, 745삼진, BB/K 1.9개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했는데 동시대를 뛰었던 교타자 토니 그윈과 종종 비교되는데 보그스는 1980년대, 그윈은 1990년대가 전성기였으며 주루는 그윈이 더 좋았고 보그스는 발이 느렸습니다. 도루 기록을 살펴 보면 그윈은 통산 319도루 125실패(성공률 71.8%), 보그스는 통산 24도루 35실패(성공률 40.7%)를 기록했는데 보그스의 높은 출루율+느린 발 덕분에 그의 뒤에서 클린업을 치던 짐 라이스는 엄청난 수의 병살타를 양산해냈으며 둘 다 중거리형 타자로 장타율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윈은 통산 20시즌 135홈런 .459의 장타율을, 보그스는 통산 18시즌 118홈런 .443의 장타율을 기록했는데 타고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한 출루율은 보그스가 훨씬 우세했습니다. 보스턴 시절에는 6번의 출루율 1위와 5년 연속 출루율 1위를 달성했으며 여기에 준수한 수비력까지 더해져 세이버메트릭스적인 평가에서는 보그스가 그윈을 압도하는데 웨이드 보그스 통산 fWAR 88.3/wRC+ 132, 토니 그윈 통산 fWAR 65/wRC+ 132. 타격 면에서는 그래도 비등비등했으나 토니 그윈은 외야수였고, 웨이드 보그스는 수준급 수비력을 갖춘 3루수였던 점이 꽤나 큰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보그스가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한것은 단 두 시즌(1987년 24홈런, 1994년 11홈런)이며 한시즌 최다 홈런이 24개일 정도로 장타력은 평범했습니다. 대신 통산 578개의 2루타를 기록한 중장거리 타자였는데 보스턴 시절 8번이나 40개 이상의 2루타를 달성했고 7년 연속 40개 이상 2루타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이런 타입이 은근히 팀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에서는 스캇 해티버그의 말을 빌려 보그스의 타격 스타일이 보스턴의 마초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팀에서 버림받게 된 것도 장타력이 다소 떨어지는 교타자의 한계를 들먹였을지도 모른 일인데 결과적으로 볼 때, 보스턴이 내린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였는데 보그스의 통산 WAR은 공격형 3루수인 조지 브렛이나 치퍼 존스보다도 높고 마이클 슈미트와 에디 매튜스보다 낮은 정도였습니다.웨이드 보그스는 홈런을 뻥뻥 때려내는 화려한 거포는 아니지만,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의 투수들을 괴롭히던 타자였습니다.웨이드 보그스는 무려 80개 가량의 루틴이 있어서 라파엘 나달은 저리가라할 수준이었는데 선수 본인의 말로는 이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경기의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하며, 하도 강박적으로 지켜대니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은 그를 골탕먹이려고 시계를 바꾼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구단은 보그스의 시계를 조작해서 7시 16분 다음에 바로 18분이 뜨게 하였지만 보그스는 그 경기에서 2안타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웨이드 보그스의 위대한 7년(1983년~1989)
웨이드 보그스는 스즈키 이치로가 등장하여 10년 연속으로 200안타를 생산해내기까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랜 기간 200안타를 때려낸 선수였습니다.웨이드 보그스는 1983년부터 1089년까지 7년 연속 200안타 이상을 때려냈는데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11년간 활약하며 최전성기를 보내기도 합니다.데뷔 시즌인 1982년 104경기에서 118안타와 타율 0.349로 예열을 마친 보그스는 1983년부터 본격적인 타격의 달인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총 153경기에 출장하여 210안타와 타율 .361를 기록했으며 1984년에는 158경기에서 203안타,타율 0.325를 기록했고 1985년도에도 161경기에서 240안타,타율 0.368,1986년도 149경기 207안타(타율 0.357),1987년 147경기 200안타(타율 0.363),1988년 155경기 214안타(타율 0.366),연속 200안타의 마지막 해인 1989년 156경기 205안타(타율 0.330)을 기록하며 7년 연속 200안타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됩니다.웨이드 보그스는 24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이후 35살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기까지 11년간 보스턴에서 뛰며 총 1,625경기(년 평균147.7경기)에 출장하여 7,325타석 2,098안타(년평균 190.7안타)타율 0.332,85개 홈런,422개 2루타(년평균 38.3개),47개 3루타(년 평균 4.27개)1067득점(년 평균 97개 득점),1004볼넷를 기록하지만 7년으로 한정하면 4,990타석,안타는 1,479안타(년 평균 211.28개),타율 0.346.여기엔 볼넷만 일을 뿐 사사구가 없어서 사사구까지 보태면 타율은 더욱 상승합니다)719볼넷(년 평균 102,71개)를 기록하면서 엄청난 7시즌을 보내기도 합니다.
웨이드 보그스는 3,000안타 달성 선수고, 198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교타자였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입성은 어렵지 않았는데 2005년 투표 첫 해 91.9%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한 번에 입성했지만 문제는 바로 그가 명예의 전당에 어떤 모자를 쓰고 갈지를 두고 의혹이 일어난 것인데 선수 생활 말년에 탬파베이로 가면서 그가 영구결번과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명예의 전당 동판에 탬파베이 소속으로 가기로 했다는 의혹이 인 것입니다. 실제로 보그스 전까지 명예의 전당은 본인 맘대로 모자를 고를 수 있었습니다. 놀란 라이언의 경우, 가장 적은 시즌을 보낸 텍사스 레인저스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갔습니다.결국 이 의혹 때문에 보그스 이후부터는 명예의 전당 모자 선택은 명예의 전당 위원회의 권고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습니다.이 결정의 첫 케이스가 2010년 헌액자인 안드레 도슨이며 가장 오래 뛴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으로 들어갔지만, 그의 최전성기는 시카고 컵스였고, 선수 본인도 시카고 컵스 모자를 쓰길 희망했지만, 결국 위원회의 권고로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이 되었습니다.보그스 자신은 거래설 자체를 일축했고, 3팀 모두 소중한 팀이라면서 선정권을 위원회에 넘겼는데, 이것이 전례가 되었습니다. 위원회가 선정한 팀은 그의 최전성기를 보낸 보스턴이었고, 그래서 보그스는 명예의 전당에 보스턴 모자를 쓰고 들어가게 되었지만, 흔히 팀을 위해 10년 이상 뛰었고, 또 그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면 취해주는 영구결번은 숙명의 라이벌 양키스로 제 발로 간 선수에게 영구 결번을 준다는 것은 어찌보면 페드로의 영구결번보다 더 파격적이었는데 그렇게 보그스의 영구결번식은 2016년 5월 26일에 거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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