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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류 합기유술의 창시자 다케다 소가쿠_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이키도를 낳다

by 마음heart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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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이키도를 낳다

대동류 합기유술의 창시자 다케다 소가쿠



다케다 소가쿠는 1859년에 태어난 일본의 무술가로 무호는 源正義이며 대동류 합기유술의 증흥조로 다케다 집안의 고류무술이란 설도 있으나, 현대에 와선 다케다 소가쿠가 여러 무술을 종합해 창시한 당시 기준 신흥 무술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으로 다케다 소가쿠는 현대 모든 합기 관련 무술의 시조이자, 일본 근대무술의 거장 중 한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다케다 소가쿠.武田 惣角 (1859년 11월 4일 ~ 1943년 4월 25일)

▣아이즈의 작은 텐구로 불린 다케다 소가쿠

아이즈번사였던 다케다 소키치(武田惣吉)의 차남으로 아이즈번(지금의 후쿠시마현 카와누마군)에서 태어났습니다.스모의 역사이자, 검술에 능했던 다케다 소키치에게 스모(역사로서는 요코즈나(横綱) 다음의 오제키(大関)를 달성했는데 다케다 소가쿠는 스모를 굉장히 좋아해서, 대동류에 스모의 기술을 차용하기도 했다),유술, 보장원류창술 등을 배웠고, 그 재능이 상당하여 아이즈의 작은 텐구로 불렸습니다.13세 때 에도로 상경하여 아버지의 친우이자 에도 말기 ~ 메이지 시대의 무술가이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요시노부의 막신이었던 사카키바라 켄키치(榊原鍵吉, 1830 ~ 1894)로부터 카시마신전직진영류검술을 배웠고, 갑주를 들고 여러 도장을 다니며 타 유파와 대련을 거듭하였고, 덕분에 다양한 병장기 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이후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측으로서 참전하려 했으나 형이 요절하여 가문을 이어야 하는 사정이 생기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 후 무사수행을 하였는데 여비는 주로 현지조달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타류와의 대련이나 문하생을 모집하여 교습료를 받거나 도장에 직접 방문하여 특강하고 보통 2엔 정도의 전별금을 받는 식이었는데 상상하기 힘든 거금을 모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1879년에는 쿠마모토성의 창술 도장에서 식객이 되어 창술 교수를 하였는데, 목검으로 1대 3진창(真槍,베가본드에서 호조인 인슌이 사용하는 창)대련을 하던 도중, 사고로 앞니에 창의 일부분이 박히는데 이틀 정도 덜렁거리는 이빨을 달고 다니다, 결국 손으로 뽑아 버리고 여생을 앞니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다케다 소가쿠,대동류 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을 창시하다

다케다 소가쿠가 하루는 여관에서 투검으로 호객을 하던 중, 반신불수 앉은뱅이가 "그런 날붙이가 나무기둥에 안 박힐 리 있냐?" 하며 동전으로 기둥에 연달아 박아내자, 놀라 그에게 3일간 매달려 배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이때 교만한 자신을 돌아보고 심신의 단련이 별개가 아님을 깨닫고, 종교, 특히 밀교에 심취하는데 이때부터 각지의 밀교 사찰이나 영산에 방문하여 틈틈히 수련하였고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장녀와 장남을 얻었지만 생활비를 주지 않아 가족들이 꽤 힘들게 살았다는 후문도 있습니다.이후 에도 말기 아이즈 가로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먼 친척이기도 한 사이고 다노모(西郷頼母, 1830 ~ 1903)로부터 '검술의 시대가 끝났으니 유술을 널리 전파하라'는 가르침과, 다케다(武田) 가문의 비전무술 대동류 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전부 전수 받습니다.여담으로 현대 사가들에 따르면, 사이고 다노모로부터는 아이즈번의 오토메유술(御留柔術)을 전수받았고, 여기에 더해 만든 무술이 대동류 합기유술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직제자들 중 실력은 사가와, 면허는 히사 타쿠마, 기술은 호리카와 코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던 사가와 유키요시의 증언에 따르면, 다케다 소가쿠 증흥조의 기술을 받은 이가 ‘기존의 유술과는 다르다.’고 하자, 순간 '호시나(保科:호시나는 사이고 다노모가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명한 성이다)씨에게서 배운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다만 사가와 유키요시는 사이고 다노모의 무력이 굉장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대동류 합기유술은 어디까지나 다케다 소가쿠 증흥조가 이룩한 쾌거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 증거로, 다케다 소가쿠 이전에는 대동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동안은 무명(武名)에 신경쓰지 않다가 '야마토류'(大和流)라고 일컬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大和와 大東는 발음이 같을 수 없으니, 요시다 코타로가 대동류 유술(大東流柔術)로 통일하자고 제안하였다 합니다. 또 다케다 소가쿠는 직접 자신 이외에 "호시나 씨의 제자가 한 명 더 있다." 하였는데, 이 나머지 한 명은 사이고 다노모의 양자 사이고 시로(西郷四郎, 1866 ~ 1922, 메이지 시대의 유도가이자 신문 편집장)라고 추정했지만 사이고 시로는 대동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하며, 오히려 유도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도가 유술계 공공의 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사이고 시로의 공도 지대하였다는 것으로 전국의 이름난 유술가들을 야마아라시(山嵐)와 같은 술기로 제압한 덕분에 유도는 단 시일 내에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케다 소가쿠의 대동류 합기유술,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전수되다

한국에 대동류 합기유술을 전파한 최용술 도주와 아이키도를 창시한 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


다케다 소가쿠는 30대 이후부턴 각지를 유랑, 수련생 영명록과 사례록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대동류를 널리 전파하는데 다만 이때도 다케다 소가쿠가 어떤 체계를 완성하고 대동류를 전파했다기보단,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기술을 창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당시 다케다 소가쿠의 교습은 정처없이 떠돌다 한 마을에 들리면 무술 교습을 할테니 관심있는 사람은 와서 봐라는 식이었고, 그러다보니 별별 사람들을 다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도 늘어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다케다 소가쿠의 수련 스타일에 대해서는 나이, 성별, 출신 등에 상관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대동류를 전파하였다는 말도 있고, 반대로 문외불출 철저한 보안을 추구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무사에게 문외불출의 기술은 전장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이를 전수한다는 것은 만에 하나 후일 적이 될 수도 있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원천을 알려주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심지어 최용술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1915년 홋카이도에서 다케다와 처음 만났을 땐 낯선 자라며 수련을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우에시바가 당시 10대였던 자신한테 몰래 접근해 술기를 배우려고 하다 스승한테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혼합해보면 대동류 홍보 자체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했으나, 고급 기술은 수제자 아니면 잘 안알려줬다고 보는게 맞을듯 합니다.다케다 소가쿠가 돈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는지, 팔광류 유술의 개조 오쿠야마 류호에 따르면 사례금에 따라서 가르침에 차별을 두었는데 특히 합기가 들어간 유술과 그렇지 않은 유술을 양분하여 가르쳐서,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고 하는데 현 콘도 사범이 보인 대동류유술과 대동류합기유술만 보더라도, 저것이 대체 무슨 차이인가 싶을 만큼 알기가 힘든데 참고로 합기란 명칭은 원래 대동류 유술엔 없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그가 믿던 신흥 종교 오모토의 성사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관련 개념을 합기로 하자고 제안하고 다케다도 동의해 만들었다고 합니다.집안이 좀 살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도 대동류 배우다 재산 거덜날 뻔 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실제로 다케다 소가쿠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다케다가 다음 대를 잇게 할까 생각할 정도로 그를 아꼈으나,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우에시바가 아이키도까지 창시해 독립하자 다케다는 폭발해 우에시바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특히 1936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 다케다가 나타나 이곳 경비원들 수련을 지도하던 우에시바는 자기 제자인데 다 배운 것도 아니니 오리지널인 자신이 교육하게 해달라고 하고, 이를 전해들은 우에시바가 다케다를 보지도 않고 말없이 떠난 사건은 둘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됩니다.그런데 다케다 소가쿠의 이런 수련 수법은 소가쿠의 양자라고 주장하는 최용술이 훗날 한국에서 제자들에게 똑같이 써먹는데 다만 최용술도 스승에 대한 기억은 애증이 뒤섞여있던 모양이었나 봅니다. 

▤대동류 합기유술의 창시자 다케다 소가쿠 83살에 객사하다

다케다 소가쿠의 성격은 괄괄하고 의심이 많은 편이었으며 노년에도 자주 젊은이들의 사지를 부러뜨리고 집어던지는가 하면, 상대가 대접하는 음식도 먼저 먹지 않고 독극물이 들었는지 확인했다고 합니다.학문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서당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한번은 "나를 위해 대필해 줄 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 소키치로부터 "누가 너를 위해 대필해 주겠냐?!"며 역정을 듣기도 했다고. 하지만 후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히사 타쿠마(久琢磨)의 아사히신문사에 무술 조교로서 자주 활동하였기에 기자들이 대필해주었다고 합니다.히사 타쿠마는 다케다 소카쿠에게 면허개전(졸업증서)을 받은 2명 중 한 명으로 나머지 한 명은 토네다치 마사오(刀祢館正雄)입니다.이때 히사 타쿠마는 집 세 채 정도 되는 돈을 지불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1936년 아사히 신문사 사건 이후 우에시바가 떠나고(1934~1936. 다만 히사 타쿠마는 이후에도 우에시바와 친분을 맺어 이후 아이키도 8단도 된다.) 다케다가 경비원 수련을 맡게 되는(1936~1939 교육) 시기 동안 제자들은 당시 신문사 장비를 이용해 이 수련 과정에 관한 사진을 자기들끼리 재현하며 찍어뒀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동류 합기유술의 비전서격인 총전의 기원이 되며 우에시바한테 배운 기술은 아이키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다만 직제자들에 따르면 아예 문맹까진 아니었으며, 쉽게 질리는 편이긴 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말년에는 제자와 재혼하고 다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현대 대동류 합기유술의 종가)를 비롯한 4남 3녀를 얻었으며 또한 3남 토키무네를 장남으로 입적하고 종가(宗家)의 대표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다케다 소가쿠는 1943년 향년 만 83세 나이로 아오모리현에서 객사했는데 훗카이도 아바시리시 조동종 사찰 호류사(法竜寺)에 있는 다케다 가족묘에 안장되었습니다.

다케다 소가꾸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검술과 봉술, 스모와 대동류유술을 배웠고 시부야토마라는 선생에게 오노하잇토류 검술을 배웠다. 또 니코도 쇼궁에서 대동류합기술의 기초수련을 하였다. 이때는 다께다가 16세 이전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유술이나 검술이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 했었다고 한다.다께다 가문에는 신묘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문을 열지 않고도 몸이 통과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다께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허무맹랑한 거짓이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집안 가전비술로 대동류유술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있었지만 유술의 실전성에 의심을 품고 있던 그는 유술보다는 검술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그 당시 검술로 대단히 유명했던 지키신가케류 종가인 사카기바라 겐기치의 내제자(우치데시)로 입문하였다. 그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검술 유파는 북진일도류와 교신묘지류, 신도무넨류, 신게도류 그리고 지키신 가케류가 가장 유명한 검술 유파로 꼽혔다.오노하잇도류 검술을 읽혔던 다케다는 5년간 사카기바라 겐기치 선생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며 실력을 쌓아 나갔으며 몇 년 안 되어 제자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게된다.이후 큐슈에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가기위해서 오사카로 갔을때 교신묘지류 검술의 모모이순죠오 선생을 찾아가 수련을 하였으나 이전에 오노하 잇토류 검술을 수련하고 지키신 가케류의 종가인 사카기바라 겐기치 선생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실력을 쌓았던 소가꾸의 실력은 모모이 순죠오 선생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검술 실력을 인정받은 다케다 소가꾸는 의기양양 했으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큐슈로 이동하며 공연을 하는 서커스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 다케다 소가꾸는 수리검(칼을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기술) 시범을 잘 하였다고 한다.큐슈로 가는 도중 그는 신비스런 경험과 함께 검술의 한계를 느끼고(검 소지를 금지시키는 법으로 인한) 유술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큐슈에서 다시 아이즈로 돌아오게 되고 그곳에서 대동류 유술의 고시나 치가나오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고시나 치가나오는 체격은 약해 보였지만 빈틈없는 사람이었다.다케다 소가꾸의 검술 실력이 그당시 어느 정도인지 짐작되는 내용중에 사무라이는 허리에 긴칼과 짧은 칼을 함께 차고 있는데 긴칼로 내려베면 검의 혈조를 타고 바람소리가 나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소도로 내려 베면 왠만해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케다 소가꾸가 휘두르면 소도에서도 소리가 났는데 주위사람들이 놀라워 했을 정도라고 한다.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동류 유술의 고시나 치가나오에게 다케다 소가꾸는 어린아이에 불과 했다고 한다. 다께다의 그 어떤 공격에도 고시나 선생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검과 창으로 공격했을때도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선생은 힘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던져버리고 제압을 했는데 아무리 던져도 지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선생이 다케다에게 가르친 것은 “힘을 주면 합기 기술을 할 수 없다” 였다. 나이 60세가 되어 아들인 도키무네를 낳고 80세가 되어 20살이된 도키무네를 오노하 잇도류 검술 선생이며 북진일도류를 수련한 다카노 사사부로을 찾아와서 우치데시로 아들인 도키무네를 받아줄 것을 원했는데 말년에 가서도 검술에 대한 다케다 소가꾸의 애착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북해도에 있는 대동류합기유술 총본부에서는 대동류 시범에서 오노하 잇도류 검술이 함께 진행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도무넨류 종가이며 검술 명인으로 유명하고 북진일도류 검술를 수련한 나카야마 하쿠도 선생과 다케다 소가꾸는 같은 시기에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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